숨기사 벗어나게, 감추사 면하게 (시편 31)

 

(31:20, 개역)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31: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31:2, 개역) 내게 귀를 기울여 속히 건지시고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보장이 되소서

(31:3, 개역)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31:4, 개역) 저희가 나를 위하여 비밀히 친 그물에서 빼어내소서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31:5, 개역)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31:6, 개역)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31:7, 개역)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곤란을 감찰하사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

(31:8, 개역) 나를 대적의 수중에 금고치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31:9, 개역)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31:10, 개역) 내 생명은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해는 탄식으로 보냄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으로 약하며 나의 뼈가 쇠하도소이다

(31:11, 개역) 내가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내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31:12, 개역) 내가 잊어버린바 됨이 사망한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함 같고 파기와 같으니이다

(31:13, 개역)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으오며 사방에 두려움이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치려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31:14, 개역)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31:15, 개역)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

(31:16, 개역)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취시고 주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31:17, 개역)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나로 부끄럽게 마시고 악인을 부끄럽게 하사 음부에서 잠잠케 하소서

(31:18, 개역) 교만하고 완악한 말로 무례히 의인을 치는 거짓 입술로 벙어리 되게 하소서

(31:19, 개역)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31:20, 개역)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31:21, 개역)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31:22, 개역) 내가 경겁한 중에 말하기를 주의 목전에서 끊어졌다 하였사오나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셨나이다

(31:23, 개역)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성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히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31:24, 개역)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지난 시간에 다윗이 낙성가를 부름으로써 성전의 완성을 노래부른다 라고 했습니다.

다윗언약은 성전언약인데

성전이 어떻게 완성이 됩니까?

 

바로 예수님이 성전 되심으로써 인간의 성전 곧 몸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의 완성으로써 성전언약이 다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결국 인간은 외적인 성전완성에 집착하고 있고

거기에 상대적인 대조로써 전혀 다른 몸으로써 성전을 완성하시는데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못 박음으로써 완성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까? 인간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쳤든지

아니면 쯧쯧쯧 안됐구나 십자가의 저주에 못 박히고? 형벌 받았네 라고

 

남의 몸 즉 자신의 몸이 아닌 듯 착각했지만

사실상 모든 인간의 신체를 못 박는데 다 이루셨다 라는 겁니다.

 

자신의 몸이 박히는 줄 모르고

예수님의 몸을 못 박는데 미친 듯이 못 박았다 말이죠

그런데 알고 보니 자기가 자기 몸을 못 박는 일에 정신 팔렸던 겁니다.

이로소 우리의 본성이 드러난 겁니다.

 

예수님 딸랑 한 명 죽이는데 전세계가 들썩 들썩

온 지구의 인간들이 다 들썩 들썩 했다 라는 겁니다.

그 증거로써 성도는 이 십자가의 사건을 재현하는냥

지금 현재도 그 십자가 사건이 무한 반복으로써 벌어지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미끼 다윗을 던지니까

사람의 꾀가 이 다윗 하나 어떻게 해 볼려고 다 달려드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유대인은 기적의 지혜를 다 동원하고

이방인들은 헬라 지혜를 다 동원하듯이

 

졸지에 십자가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지혜로써 상대적으로 싫어버린바 되는

걸림돌 거리끼는 지혜로써

 

지혜와 지혜의 싸움이 벌어지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꾀 곧 인간의 모든 지혜가 동원이 되고

 

또 이 다윗이라는 미끼 하나 때문에

 

구설의 다툼 곧 계획적인 모략으로 함정들을 다 파 놓은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다윗 하나를 잡기 위해서 함정을 파고 모략을 짜서

온갖 구설수 곧 소문을 퍼트린다는 거죠.

 

그렇게 되면 부글 부글 끓지요

동기부여가 되니까

서로 서로가 마치 현상금을 노리는 사냥꾼처럼

다윗 하나 잡을려고 경쟁을 펼치는 겁니다.

누가 누가 다윗을 먼저 잡냐 라고

 

이렇게 다윗은 양 사방으로 우겨삼을 당하는 입장에서

철저하게 갇혀버린 상황인 겁니다.

빠져나올 길은 없다는 겁니다.

 

바로 이 불가능성

이 단절에서

 

기이한 곧 성령의 일이 개입한다는 겁니다.

이 불가능성에 불가능의 불가능성으로써 개입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상대적인 것으로써 이렇게 표현되었습니다.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무엇의 개입 때문에?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심의 개입 때문에 말입니다.

 

앞의 것들은 우리가 늘 보아왔던 가능성의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심은 사실상 하나 마나 한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불가능한데 그 불가능성이 덮쳐 버린 겁니다. 그것이 상대적인 대조로써

대비되어 나타났다는 겁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나타나 개입하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기이하다 라는 겁니다.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셨는데 무엇의 개입 때문에?

이렇게 인간의 모략으로 친 함정에서 어떻게 피하게 하셨는가? 하면

 

비밀히 장막에 감추심으로써 면하게 피하게 했다 라는 겁니다.

 

이것 또한 말이 안됩니다. 비밀의 장막이란 불가능하다 라는 겁니다.

불가능성으로써의 비밀의 장막인 겁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 봤듯이

오늘날로 치면 교회죠

성전에서 이 다윗 하나 죽이기를 펼치는데

눈에 다 보이는 성전에서

그것도 성전 안에서

 

또 다른 비밀의 성전이 있다 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라는 거죠.

그 숨겨진 성전이 나를 숨기더라 말이죠.

무슨 성전이 투명망토 이냐 말이죠?

그런데 다윗 죽이기를 펼치는 성전안에서 다윗이 건짐받은 이유는

딱 이거 하나 밖에 없다고 외친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도 살펴봤듯이

인간이 장악한 성전에서

전혀 다른 새로운 성전의 완성을 노래부르는 다윗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손으로 지을수 있는 그런 성전이 아닌 성전이다는 겁니다.

즉 감추어진 성전

비밀의 성전

안 보이는 성전을 예수님은 완성하셨고

다윗은 그 예수님이 세운 성전을 보고 낙성가 곧 다윗언약의 완성

성전 언약의 완성을 노래 부른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다윗만 본 겁니다.

다윗 자신의 신체가 못 박힘으로써 보게 되는 성전완성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리 그 시편 30편을 달달 외우고 노래 불러도

여전히 성전은 미완료 상태인 겁니다. 이미와 아직의 모호함에 갇혀버리는 겁니다.

 

다윗 에게만 보이는 이유는

다윗이 오늘 시편 31편에서도 보이듯이

맨날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처럼

자기 것이 하나도 없이

주님이 매일 매일 퍼붓는 사단의 가시 속에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라는

그 불가능성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예외 없이 다윗은

이 불가능성을 누리게 됩니다.

어떻게

 

주의 은밀한 곳이 뭔가를 말하기 위해서

사람들의 꾀의 대상물로써 놓여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 숨겨진 주의 은밀한 곳은

아무리 유대인이라도, 모든 인간의 꾀를 집결해도

알 수 없는 비밀입니다.

 

왜 은밀하고 비밀이겠습니까?

 

안되니까 비밀인 겁니다.

불가능하니까?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기 위해서 애굽왕과 군사는 반드시 강퍅해야만 했듯이

 

주의 은밀한 곳을 말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꾀가 반드시 동원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처럼 그것도 하나님의 집인 성전에서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예수님을 보시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의 집인 예루살렘성전에서 벌어지는 사건

곧 십자가 사건 말입니다.

 

예수님이 전혀 다른 성전 곧 자신의 몸을 말함으로써

졸지에 성전이 두 개가 생기는 겁니다.

 

전에 말한 두 하나님 또는 두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인간의 탐욕 곧 우상성이 담겨진 성전과

그것과 싸우시고 심지어 죽으시는 성전

이 두 성전의 대립처럼

 

오늘 본문도 두 세계의 충돌인 겁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좀 이상하게 오늘 본문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즉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이 좀 이상하지 않나요?

 

그리고 그 상대적인 다윗 빼고 다윗 이외의 사람들이 오히려 정상인 것 아닙니까?

 

사회생활을 해 보면

사람은 마땅히 조직문화 속에서 타인과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런데 유독 혼자 별종이 되어 버리면

그 사람만 손해 보는 것이다 말이죠.

 

왜 혼자서 딸랑 빠지고 왜 다른사람과 어울리지 않느냐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다윗은 이상한 비정상이고

오히려 다른 사람이 정상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이 다른사람들처럼 같이 생각하고 같이 행동하는

그 무리 속에 들어오면

이런 이상한 경계선은 애초에 없기에 아무런 문제가 생길 이유가 없다 라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제 말이 맞지 않나요?

 

그런데 말입니다.

문제는 다윗이 아닙니다.

다윗도 저들의 무리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라는 겁니다.

위에서도 언급했고 지난번 시간까지 자주 언급한 것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추호도 애굽에서 빠져나오고픈 마음이 없었다 라는 겁니다.

 

그럼 누구 마음이냐?

 

여호와 딸랑 한 분의 마음이 이런 사건을 벌리는 겁니다.

여기에 다윗이 딸랑 한 명 걸려들어서

미끼로 놓여지는 사건에 말려드는 겁니다.

 

그럼 다윗 혼자만?

 

네 다윗 혼자

 

그리고 나머지는 아무리 다윗에게 속하고 싶어도

모조리 다 반대편에 놓여지는 겁니다.

 

아무리 우리는 예수님이 지시는 십자가의 편에 서고 싶어도

베드로도 안되는 판국에 우리가 되겠습니까?

 

예수님 딸랑 혼자요

나머지는 십자가의 반대 편에 놓여져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되어 있다 라는 겁니다.

 

절대로 우리는 십자가 편에 못 서는

가해자 편일 뿐이다는 겁니다.

그래야 십자가만의 공로로써

우리는 죄인으로써 의사의 피를 발림받음으 그 피가 귀중하게 여겨지는 것이지

 

이 피 말고 더 보탬이 되는냥

베드로처럼 나도 십자가에 함께 죽겠습니다 라고 할때에

그것이 바로 사탄아 썩 물러가라

너는 나 예수를 넘어뜨릴려는 자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고

 

억지로 억지로 라도 베드로를 빼버려서라도 오로지

홀로써 이루신다는 겁니다.

베드로가 만약 들어가 버렸다면 큰일 나지요.

십자가는 여전히 미완료요

의문의 증서는 찢어질수가 없게 되는 거죠.

 

그러니 하나님의 일에 베드로의 그런 모습도 상대적으로 대조 대비된 것으로써

배치되기 위해서 결국 나타났어야 했던 겁니다.

그러니 죄책감을 가질 이유가 하등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런 실패가 불가능성을 누리도록 덮치게 되는 것이지

성공했다면

우리는 가능성만 누리는

이 세상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추호도 없게 되는 겁니다.

부르짖음이라는 소망은 여호와께서 애굽왕을 강퍅케 해야만 나타나는 기이한 겁니다.

아무나 부르짖는게 아닙니다.

오늘 내용도 전부 부르짖음입니다. 울음터트리는 탄식들입니다.

 

 

재미있는 다큐를 아니 시사교양프로그램을 봤는데

잃어버린 에덴을 찾아서 라고 화성이주에 대한 이야기를 봤습니다.

아 제목이 틀렸네요 생각의 집이라는 프로그램과 막 섞여서

 

화성이주 유토피아를 찾아서

 

한국사회가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의식있는 자들이 핀란드로 이주를 한다고 하던데

즉 이주는 곧 포기

 

이 땅을 포기한다는 전제성이 깔려 있다 라는 겁니다.

 

신앙도 결국 이 땅의 것들

심지어 이 땅을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이 육체 또한 포기 한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오늘 본문 시편 31편은 그야말로 이 불가능성을 누려 ~~~~ 가 되는 겁니다.

 

즉 원수들의 꾀에서 피하게 되는 주의 은밀한 장소로 숨기심을 누려 ~~~~~

곧 예수 안이지요

예수안은 불가능한 인간의 그 어떤 믿음도 그 어떤 행함 실천도 만들어 낼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겁니다.

즉 예수 안은 나와 연결된 모든 네트워크 포기인 겁니다.

 

또 원수들의 수군거리는 그 모략의 함정에서 빠지지 않게 되는 주의 비밀의 장막에 감추시는

그 불가능성을 누리는 겁니다.

 

다니엘을 예로 들면 감추시고 숨기시는 방법이 불 속입니다.

사자 입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게 무슨 숨기는 거냐 라고

오히려 멀리 멀리

 

외적으로 더 멀리 그 간극을 벌렸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가장 가깝게 되었고

이것이 외적간극이라고 했지요

거룩과 가깝게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외적간극

 

정작 누가 봐도 저 사람은 불에 타 죽었을거야?

? 너무 너무 가까이 갔으니까?

너무 너무 하나님의 저주인 나무에 달려 죽임을 당하고 우리는 멀리 떨어졌으니까

그런데 오히려 산자는 예수님 뿐이고

다른 모든 사람은 이 산자로부터 긍휼을 받아야 할 판국에 놓여진 것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내적간극

불 속에서 오히려 보호를 받고 있고

오히려 불 바깥의 안전지대가 사망이 덮쳐지는 곳이 되어버렸다 라는 겁니다.

 

 

이렇게 기이한 일을 벌리시는 주체가 바로 여호와가 아닌 여호와의 이름

그 이름을 찬양하는 내용인 겁니다.

이 내용의 실현을 다윗은 예수님을 보고서

 

아무도 부를 수 없는 이 불가능성의 노래를

자신의 신체에 사단의 가시가 박히듯이 박힌채로

 

이 은혜를

이 불가능성을 부르는 겁니다.

 

사단의 가시가 박히지 않는다면

이 노래가 나올수 없었다는 거죠.

 

그렇다고 우리가 이 불가능성을 또 가능성으로 바꿀려고 할 수 있냐 말이죠

 

예수님이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겁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기쁜 목소리 말입니다.

 

 

(3:12, 개역)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3:13, 개역)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3:14, 개역)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3:15, 개역)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16, 개역)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17, 개역)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18, 개역)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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