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뿔싸! 거룩이 나에게 덮칠 줄이야? 말도 안돼!! (십자가의 용서가 덮어버림) (시편 32)

 

아브라함에게 무엇이 덮쳐졌느뇨? 덮쳐진 그 믿음의 증상

(믿음의 조상이란? = 예수님 계보의 증상으로써의 다섯 여인)

 


(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32:1, 개역) [다윗의 마스길]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32:2, 개역)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32:3, 개역)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32:4, 개역)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

(32:5, 개역)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32:6, 개역)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32:7, 개역)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셀라)

(32:8, 개역)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32:9, 개역)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 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32:10, 개역) 악인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이 두르리로다

(32:11, 개역)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 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우리가 찬양을 얼마나 무시하냐 하면

우리가 입이 있다고 찬양 할 수 있다고

가능성으로 보고 있다는 착각 때문입니다.

마치 눈이 있다고 볼 줄 안다고, 눈으로 본다는 가능성을 소유했다고 착각하듯이 말입니다.
이런 지적을 오히려 소경 곧 실로암 소경을 통해서 너희는 정작 눈이 있어도 볼수 없다는 불가능성과
여기에 이중불가능성으로 정작 실로암 소경은 본다고 인간의 외설성을 더 나은 외설성으로 지적하는 식입니다.

 

그런데 찬양이란 결국 말도 안돼 라는 불가능성을 노래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호산나 찬양을 부르는 어린아이들과 함께 외치는 두 소경

두 벙어리의 외침과 같다는 겁니다.


눈 있는 자도 못 보는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이 불가능한데
오히려 소경이 눈 없는 자가 예수님을 찬양하듯이 말입니다.
 

즉 기존의 틀을 깨뜨리는 것이 찬양이다 라는 겁니다.
기존의 노래 개념을 깨뜨리지 못하는 찬양은 찬양이 아닌 거죠.

그렇다면 기존의 틀에 의해서 어린아이와 두 소경은

찬양을 부르면 안된다는 자들로 취급받는 존재들인 겁니다.

금지령 이다는 겁니다. 단절인 거죠.

그럼 찬양은 누가 부르는가?

요즘과 똑같습니다.

성화가 된 사람들만 제대로 찬양을 부를 수 있다, 성도이다, 어린신앙에서 벗어난 장성한 자이다 라는 식이

오늘날도 그 당시에도 동일하게 통념화 된 겁니다. 즉 보편화 된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그 보편성을 가지고서 재료로 삼아서 그 상대적인 돌들의 찬양, 불가능성의 찬양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아니 누가? 벙어리가 찬양을 할 수 있다고 여기겠습니까?
이미 훨씬 이전 부터 그 사람은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자인 겁니다.

한 마디로 죽은 자 입니다.

즉 찬양도 벙어리에게서만 찬양의 의미를 도출 시키듯이
희년의 의미도 갇힌자 포로된자 눈먼 자에게만 의미있도록 하시는 겁니다.
죄인에게만 구원자가 의미가 있고
환자에게만 의사가 의미 있듯이 말이죠.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만을 호명하러 오신것이 복음이다는 겁니다.

이 죽은자만을 통해서 복음은 증거 된다는 겁니다.
살았다고 여기는 자를 통한 복음 증거는 없다 라는 겁니다.

 

즉 이런 부정한 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세계에 접근 자체가

태어날 때부터 박탈 당한 상황이다는 겁니다.

 

이런 보편성을 깔고서 예수님 곧 찬양 그 자체 되신 분이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과연 이 예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자는 과연 과연 누구일까요?

아무도 찬양 할 수 없다 라는 것이 정답입니다.

 

아무도 찬양 할 수 없다 라는 것을 아시고

돌들을 통해서 찬양 받으십니다.

그 돌과 같은 무가치한 존재들로 취급받는 보편화 된 자들

죽은 자들, 심지어 마귀로 취급받는 자들, 이런 부정한 자들로만 구성된
우발적으로 급조된 찬양단을 예수님께서 만드셔서 예루살렘 함락, 침노 완성을 찬양합니다.

곧 어린아이요 두 소경인 겁니다.

 

즉 복음은 이런 자들의 것으로써, 천국은 저들의 것으로써 불려지는 기쁨의 찬양입니다. 찬양 그 자체입니다.

찬양이 인물화 되어서

찬양 마땅히 할 수 있는 자들인 가능성있는 자를 오히려 배제 시키고

누가 봐도 저 사람은 노래 부를 수 있는 가능성이 제로인 자들이야 하는 그런 부정한자

도리어 보편화 된 자들로써 도저히 저들은 찬양할 수 없는 자야 라는 자만


그 불가능한 자만 골라서


도저히 찬양할 수 없는 자로 취급받은 그 부정한 자만 골라서

찬양 그 자체에 화답하는 자로써

찬양케 만드신다는 겁니다.

 

이것을 어려운 말로

마스길 이라고 합니다.

 

어떤 학자는 지혜의 시 또는 교훈 또는 깨달음 이라고 하고

어떤 학자는 저런 의미를 억지로 붙일수 없다 그냥 음악의 한 형태 라고 합니다.

 

즉 둘 다 인간이 해석을 했다 라는 의미겠지요

그러나 정작 다윗은 기존의 틀이 깨어지면서 덮쳐진 바를 노래한 겁니다.

그렇기에 해석이 안 먹혀드는 찬양이다 라는 겁니다.

노래 자체는 기존의 틀이 깨어지면서 새로움 속에 들어간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이런 의미를 다 담아서 잘 보여주는 예가 바로

로마서 4장의 의미입니다.

 

사도바울은 도대체 믿음이 뭐냐?

행함의 반대인데

사도바울은 행함의 달인으로써 누구보다 자신이 거짓선지자의 최선봉에 선 자로써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결국 행함의 달인으로써 믿음을 말한 다는 것은 모순 그 자체죠.
바로 그 모순이 믿음이다는 겁니다.
행함은? 자신에게 있어서 신념이였고 일관성이였다는 거죠.
그러니 행함의 세계가 어떠한 가를 믿음 때문에 왜 행함으로는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을 제대로 지적하는 겁니다.

행함과 믿음은

극과 극으로써의 반대가 아닌

결국 한 바퀴 돌면 그 적대적관계가 대립이 아닌 동일한 것이기에, 외적간극으로써의 아닌

 

오히려 행함과 믿음이 극소차이로써

그 내적간극에 누군가의 개입을 보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결국 믿음은 그 개입자가 그 내적간극에서 활동하는 분이다 라는 겁니다.
이 둘 사이의 간극에 누구 라는 인물이냐 라는 거죠. 그러니 우연인 겁니다.

 

다른말로 하면 인간의 가짜인 믿음은

인간 자체가 가짜이기에

맨날 따져본들 외적간극만 따질 뿐이고

그것으로 믿음이라고 지멋대로 붙인다는 겁니다.

 

그럼 내적간극을 보면 되지 않느냐?

문제는 안 보인다는 겁니다.

안 보인다는 것을 보면 되지 않느냐?

자꾸 가능한 줄 아시는데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다른말로 나의 보는 것, 내가 해석하는 것, 내 입으로 찬양하는 것, 내가 행동하는 것, 내가 믿는 것 조차도

포기해야만 볼수 있다는 겁니다.

 

결국 본다는 말이네?

ㅋㅋㅋㅋ 그 말이 아니라 볼 수 있다는 것에 구지 끌어들일 필요가 전혀 없다 라는 겁니다.

가능성으로 바꿀게 아니라

불가능성 그 자체인 오리지날로 그냥 냅뚜라 라는 겁니다.

기여이 그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바꾸는 자체가

가상화 시킨다는 거죠. 우리의 눈으로 재해석해서 배치시키겠다는 겁니다.

원해 배치 그대로 두지 않고 말입니다.
자기가 설정하겠다는 주체가 되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원수를 사랑하라 입니다. 남을 몇번 용서할까요?
모든 종교는 이것을 실천할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이것을 불가능성으로 오히려 간극을 유지하는 거리두기입니다.

그러면 그 간극 속에서 누가 와서 이 불가능성을 완성하는가를 봐야할 판국인데
왜 이 인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성경문자를 지킬려고 하느냐 말이죠?

그것은 마귀 때문입니다.
졸지에 지키면 참 재미있게도 계급이 생깁니다.
계급이 생기면 누가 크냐 라는 질서가 형성 됩니다.
바로 이것을 핑계로 교회는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우가는 겁니다.

그런데 조상이라는 개념을 언급하는 이유는 바로 조상 개념 조차도 질서
즉 역사적인 순서로 본다는 거죠.
그것을 깨뜨리는 개념으로써 조상이니
후손에게 어떻게 주인이라고 말할수 있냐 말이죠.
다윗이 다윗 자손에게 주여 라고 자신을 종으로 여기는 질서파괴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니 인간은 처음부터 해석할 권리가 없다 라는 겁니다.

아니 해석아 안됩니다. 인간의 해석은 시간 순서입니다. 그런데 미래에서 쳐들어오는 해석을 못한다는 겁니다.
미래에 있어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 미래가 이삭이요(아브라함에게는), 다윗의 후손 예수님(다윗에게는)이다는 겁니다.
그 분 만이 나를 제대로 해석하는 자 라는 겁니다. 
그래서 불가능성 그 자체로 냅뚜라 라는 겁니다
.

오히려 그 불가능성으로 인해

그 증상을 누려야 할 판국에 놓여졌다 라는 겁니다.

 

그 누린자가 바로 사도바울이다는 겁니다.

그럼 기존의 틀은 무엇이였다?

가능성으로, 행함으로, 자기의 믿음으로 뭐든지 다 가능했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그 기존의 틀이

 

졸지에 찬양 그 자체가 개입해서 쳐들어 오는 바람에

졸지에 나는 무너져 버렸고

졸지에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봐 버렸다 라는 겁니다.

불가능성을 봐 버렸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하려?

 

이 사망의 몸인 주제에

곤고한 마음인 주제에

! 구원? ~~~ ????

 

이게 가능한 줄로 알았는데

아뿔사! 이 말도 안돼는 일이 왜 하필이면 나에게?

 

그래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은혜가 덮쳤다 라고

그런 자의 행복 곧 복에 대해서

다윗까지 끌여들어서 맞제? 맞제?

아 시편 32편이 그 소리였구나

난 그 동안 그런 의미인줄도 모르고 노래만 신나게 불렀지 뭐

그런데 다윗 또한 이런 의미로 불렀다 라는 것은

이제야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인 사도바울이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고

 

가능성 행함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써

내적 간극으로써 이 비이지 않는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곧 예수님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다윗이 찬양을 말하는게 아니라

노래 부르는게 아니라

자기 믿음을 말하는게 아니라

 

내 찬양 엉터리요

내 노래 엉터리요

내 믿음 순 사기요 라는 뜻에서

 

그럼 너가 지금 부르는 노래는 뭔데? 찬양은 뭔데? 믿음은 뭔데?

 

예수님입니다 라고 말하니까? 누구?~~~~~~

 

더 모르게 해석을 풀이해주는게 아니라

해석을 더 못하게

불가능을 더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린 겁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이 오셨을때에 풀렸고

물론 오셔도 모르는 자들은 여전히 모르지만

사도바울이 다시 한 번 비로소 언급하는 겁니다.

즉 그 전에는 아무도 몰랐다 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말하고자 하는 취지를 전혀 몰랐다 라는 겁니다.

사도 바울도 이제서야 비로소 알았다고 지금 외치는 것 아닙니까?

 

결국 사도바울이 로마서 4장에서도 언급하는 이유는

역시나 풀이 해석을 해 주는게 아니라

오히려 알까 싶어서 더 불가능성으로

풀이 자체를

해석 자체를 다시 잠금 걸어 버리는

불가능성을 더욱 더 불가능성으로 만드는 식이

무할례일까? 할례일까? 놀려 먹듯이 이야기 합니다.

이미 할례 하고픈 자는 그렇게 해석하도록

무할례 하고픈 자는 그렇게 해석하도록

이들의 해석과 전혀 무관하게 불가능의 해석으로써 말하고 있는 겁니다.

전혀 상관없이 전혀 다른 인물만 언급하는 의미이지

행동 하냐 마냐? 할례 해라 말아라 와 전혀 무관하다는 겁니다.

 

그럼 오늘 시편 32편도 물론 지금까지의 내용들도

누구 라는 그 인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다윗이라는 인물은 오히려 방해적인 요소로 작용한다는 겁니다.

그는 핍박 당한 적이 없는 셈이다 라는 겁니다.

오히려 다윗 조차도 가해자인 겁니다.

그럼 누가 피해자 이냐 라는 거죠

 

아무도 언급 한 적 없는 분이다는 겁니다.

알수도 없습니다.

보이지도 않습니다.

해석이 안되는 분입니다.

 

그럼 해석 포기, 지혜를 동원해서 알아내기를 포기

보는 것 포기, 노래 부르기를 포기하라 말이죠.

 

불가능성 앞에서

오히려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것만 외칠 수 밖에 없는 실제 상황에서

 

이것보다 심각한 것이 없는데

 

우리는 그 진노 앞에서

도리어 연필과 줄자와 콤파스와 종이기록을 통해서

계산 하겠다는 식입니다.

 

불 속에서 불을 계산하겠다는

여호와의 진노, 그 심판을 수학풀이하겠다는

 

이 불가능성에 간극을 벌려도 모자랄 판국에

가까이 가서 불이 몇 센치 인가를 재겠다는

 

불이 대상물이 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도리어 불의 대상물이 된 줄도 모르고 말이죠.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은

원조 라는 식으로 처음을 말하는 해석이 이미 보편적으로 우리는 육체를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조상이라는 말을 보편적해석을 깨뜨리는 식으로 의미를 전환시킵니다.

즉 증상이라고 말입니다.

 

결국 예수님만이 믿음이요 이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거꾸로 후세대에서 덮쳐지니까

저런 원인 없는 결과로써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의미를 더 잘 알아야 하는 아브라함 자손이

또는 오히려 시편을 더 잘 알아야 하는 어릴적부터 시편을 외운 유대인들이

 

입이 있어도 찬양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찬양을 한다는 행위에 누가 예민합니까?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 누가 예민합니까?

 

그런데 이런 자들이 오히려 누가 와야 한다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누가 와서 안식의 완성 찬양의 완성해 줄 것에는

결국 자신의 안식 지키기, 찬양 부르기의 엉터리에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고백은 아예 없다는 겁니다.

당연하지요 덮쳐지지 않았기에 그 증상으로써만 나타나거든요.

 

그러면 뭐냐? 다들 해석이다는 겁니다.

니도 해석하는데 나도 못할 해석이 뭐가 있냐 라는 겁니다.

나도 해석 할 줄 안다는 식으로

인간은 지키기를 굳혀 버린 겁니다.

회칠한 무덤이 된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우기지 마라

돌들로 아브라함 자손 만들어 버리겠다고

 

조상 개념을 치는 식으로 자손 개념도 치는 식으로 역해석을 하시는 겁니다.

 

조상은 결국 증상의 의미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계보에 나타난 다섯 명의 여성이 왜 개입이 되어야만 하는가?

인간의 족보 개념을 치는 증상으로써 여성이다는 겁니다.

 

유대인 족보에는 여성이 안 들어갑니다.

그래서 만약 이 다섯명의 여성을 빼버리고 족보를 운운한다면

예수님의 족보가 아니다 라는 거지요.

 

자신의 증상으로써의 족보인데?

이것이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족보이다는 겁니다. 마귀의 세계 속에서 감추어진 비밀의 족보 말입니다.

 

누가복음의 예수님 족보도 동일합니다.

인간의 보편성의 육의 족보에서 새로운 족보가 특이성으로써 나타났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증상은

인간의 보편성과 대립되는 내적간극의 족보인 셈입니다.

바로 유대인이라는 보편성을 뒤짚어 전복시키는 이방인에게 긍휼의 족보로써 말입니다.

 

번제와 제사의 족보에 대립되는 내적간극으로써의 인애와 자비의 족보인 겁니다.

그 출처가 거꾸로 치는 방식인 겁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연결 됨 외에는 다 거부이다는 겁니다.

 

다른 유사 연결을 쳐다볼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 그 이상은, 그 이상은, 그 이상은, 그 이상은, 하나님이요 라는 겁니다.

 

즉 이런 증상 외에는 다 거짓이다는 겁니다.

이 불가능성의 증상 뿐인데

 

다들 가능성의 증거로만 끌어모았다는 거죠. 종교꾼들이요 행함론자들입니다.

심지어 원문해석이 중요하다고 하는 자들 또한 그럴정도이니

모든 인간은 우상 숭배에서 단 한 발짝도 못 벗어나는 겁니다.

예수님을 우상숭배할 정도로 만들어 버리니까 말입니다.

자기를 위한 예수로

 

 

여기에 아브람도 별수 없다는 겁니다. 이 아브람을 치는 믿음 곧 예수님이

어떻게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드는 그 불가능한 일을 하시는 것일까요?

 

아브람이라는 역사물(경험, 체험, 행함)을 어떻게 묵시적인 종말적 존재인 아브라함으로 만드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곧 믿음은 화평을 주러 온게 아니라 전쟁 곧 충돌을 주러 왔다는 겁니다.

전쟁 곧 여호와의 이름 전쟁으로 인한 죽음 진멸 진노 심판 저주를 주러왔다는 겁니다.

검 칼 죽음입니다.

 

그 죽음 속에서 화평을 이루는 겁니다.

가능성에서 가능성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불가능성에서 불가능성으로 분명히 단절이요 차단이요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인데
말도 안되는 일이 원인 없는 결과로 덮쳤다는 겁니다,
불가능성에서 불가능성으로 이어진 겁니다.

성경말슴은 말도 안되는 일로만 되어 있습니다.
무슨 수로 가능하게 만든다는 소리입니까?
그런 놈들은 장사하겠다는 소리 밖에 안됩니다.

정말로 말도 안되는 일이 덮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사도바울과 바나바의 다툼, 충돌이 아닙니다.

바나바와 예수님과의 충돌이고

사도바울과 예수님과의 충돌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싸움을 붙인 겁니다.

우리도 매일 매일 예수님과의 충돌 전쟁에 놓여진 겁니다.

 

그러니 다투지 않고 싸우지 않고 충돌하지 않고 오는 구원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래야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죄가 들추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회개하겠습니까?
자기 스스로 파악한 죄를 들추어내는 그런 짓에 안 속아 넘어갑니다.

 

충돌 곧 다툼이란 기존의 세계를 포기 못하는 고집과 자존심과의 대충돌입니다.

어느 하나가 죽지 않는 이상은 끝나지 않는 겁니다.

구원이란 바로 이런 전쟁인 겁니다.

전쟁 같은 사랑입니다. 그 주체가 여호와가 아닌 여호와의 이름 곧 예수 입니다.

어떻게 다툼이 없이 사랑이 완성 됩니까?

죽음 보다 강한 사랑이라면

죽음을 봐야 사랑이 그 현장에서 보인다 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즉 사랑을 볼려면 죽음이라는 바닥까지 쳐야 한다는 겁니다.

 

결국 인간의 믿음은 죽음에 갇힌 상태에서의 믿음이기에

예수님이 친히 죽으셔서 그 죽음을 이긴

죽음 위에허 펼치시는 믿음으로

인간의 믿음을 치면서 거꾸로 쳐 올라오는 것이 믿음인 겁니다.

 

인간의 믿음인 비언약적인 요소를 재료로 삼아서

그 차이성으로 거꾸로 쳐서 올라오는 믿음이기에

아브람은 이 믿음에 의해 자기믿음이 와르를 무너져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겁니다.

즉 조상이라는 말이 함정일수 있는데
사실은 증상이다는 의미 입니다.

믿음에 의해서 거꾸로 쳐서 삭제 당함의 증상이 바로 믿음의 조상이라는 겁니다.
결국 내막은 전혀 다른 정 반대의 의미였던 거죠.

그것도 모르고 속으로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여기지 마라
돌들을 통해서 아브라함 자손 만들것이다 라는 취지를 모르는 겁니다.

자손 개념도 엉터리요 그러니 조상 개념도 엉터리로 잡은 겁니다.
아무리 해석 해도 성령이 오지 않는 이상
거룩이 덮쳐지지 않는 이상
해석 불가 입니다.

결국 예수님 홀로 영광 받으실 공로를 아브라함을 불쌓히 여겨주셔서

그것도 믿음이냐 라고 진짜 믿음 여기 있다 옜따 선물받아라 라고 받은 것이 믿음인 겁니다.

그러니 이삭 아니였다면 그는 믿음이 뭔지도 몰랐고

이삭 때문에 예수님을 보게 되는 겁니다.

이삭이라는 언약적인 존재 때문에 말입니다.

믿음은 선물이라고 했는데
선물이 딴게 아니라 증상 곧 삭제당하는 것이 선물입니다.
이삭이 삭제 시키는 지우개로 활동했던 겁니다.
이삭 본인이 삭제당하는 모습으로써 말이죠.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비언약성을 담아서 불태움 당해야 할 번제물이요

희생물이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미리 앞당겨 보여준 겁니다.

이런 다툼 이런 충돌 이런 희생의 죽음이 없다면

인간은 자기의 믿음에서 도저히 벗어날 길이 없는 겁니다.

사도바울 조차도 비닐이 벗겨져야만 할 정도로

외부의 개입이 아니고서는 사도바울은 자기 열심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겁니다.

갇혀 버렸거든요. 그래서 희생안타 스데반 집사의 죽음까지 반드시 가야만 하는 겁니다.

 

나의 죄를 위해 죽은 적도 없는 원문 해석하는 목사의 사기꾼 노릇에 속아 넘어가지 마시길 바랍니다.

 

아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인간의 열심?

다 가능한 것들 뿐입니다.

 

얼마나 공부를 안한 티가 나는 것이 원문 해석입니까?

소위 자칭 목회 성공했다는 놈들이 한 가지 우물을 파서 성공했다고 우깁니다.

감리교 쪽의 이름 까먹었는데 새벽기도로 히트쳐서 큰 교회 성공했다고 우깁니다.

그런 놈들과 똑같은 식으로 원문 해석 해서 성공해 보겠다는 심뽀인 겁니다.

 

목사란 그 교회에서 가장 믿음 없는 자를 목사로 주님이 세우시는 겁니다.

얼마나 믿음이 없기에 목사로 세우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이냐 말이죠.

결국 원문 해석의 열심히 아니라

주님의 열심 때문에 목사를 지탱하는 것이지

어딜 구라를 쳐서 세대주의 문자주의의 변형 그것도 고급스러운 변형으로써

원문 해석으로 나오냐 말이죠.

요즘 대부분의 목사들은 이 말도 안되는 일인 불가능성을 
어떻게 해서든 가능성으로 만들려고 우상숭배짖을 아예 가르쳐요 가르쳐
그런 짖을 못해서 안달이 나 있습니다.
김성수 이런 패거리들 말이죠.
말이 안되어야 하는데
말이 되겠끔하겠다는 짖을 말이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어딜 꼬실려고 말이죠.

 

한번은 제가 경험한 바인데

말씀보존학회에 속한 목사 놈이랑 부딧혔는데(제가 있던 교회에 전도사로 왔거든요)

이 놈은 오로지 킹 제임스 성경만이 제대로 번역이 되었고

나머지 한글 성경은 엉터리라고 주장하는 놈인데

 

하여튼 가지 가지 한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안 믿겨지면 저렇게 난리 브루스를 칠까?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믿어 볼려고 믿어 볼려고 그래도 안되니까 별에별 방법을 추구하는 겁니다.

 

원문 해석으로 우리가 성경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정 반대로 우리를 대상으로 삼아서 넘어오는 말씀 곧 인물입니다.

원문이라는 문자가 아니라

 

그러니 다가오시는 말씀이라는 인물을 만나 본적이 없기에

마치 바알과 아세라 850명의 우상숭배자들처럼

더 정성과 더 큰 소리로 지성이면 감천이다고

더 가까이 가겠다는 겁니다.

 

아이고 그것도 정성에 속하냐 말이죠? 그래 쪼매 정성바쳐서 올라가겠냐?

아이고 그것도 목소리라꼬 듣끼겠냐 말이죠?

 

거룩을 얼마나 무시했으면 인간의 정성으로 다가가겠다는 건지?

 

이런 인간이 꾀(지혜)가 먹혀들지 않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란 죽음 빼놓고 인간이 다가오는 방식을 다 거부하는 겁니다.

즉 죽기 싫어서 그런 짓을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죽음으로 다가오겠다는 것 조차도 거부하십니다.

 

그것도 제사냐 라고 비웃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주님 쪽에서 다가오시는 희생의 죽음이 십자가입니다.

즉 다른 방식의 제사는 안 받겠다는 겁니다.

해석도 마찬가지

인간 쪽에서의 희생적인 헌신적인 해석도 안 받겠다

오로지 예수님 쪽에서의 희생적인 죽음으로 인한 풀이해석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비밀입니다.

풀지 말라고 준 겁니다.

 

십자가를 풀겠다는 놈들이 한 둘이가 아닙니다.

 

십자가란 해석풀이를 포기하겠다는 뜻입니다.

건방지게 나는 말씀을 해석할 권리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심지어 나는 예수님을 믿을 권리 조차도 없습니다 라는 겁니다.

 

결국 주님 쪽에서 다 알아서 하시겠다는 겁니다. 심지어 믿음 조차도 말입니다.

 

중간쯤에 글을 쓰다가 하도 기뻐서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믿음은 내가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라는 것을

진짜 믿음 되신 예수님 때문에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누가 나의 가짜 믿음을 치느냐

그것도 거꾸로 밑에서 위로 쳐 올라오는 것이냐 라는 겁니다.

 

다윗이 왜 다윗의 후손인 자기 후손에게 주여 라고 하느냐 말이죠.

주님 주인님 이라는 말은 나는 종이다 라는 겁니다.

주인에게 노예처럼 종속 되었다 라는 겁니다.

 

이 질문에 대답 할 줄 아는 성경박사들이 없었습니다.

맨날 원문 해석 따위나 하고 있으니 말이죠.

 

믿음이란 역사를 소급해서 쳐서 삭제시키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후손이 조상의 역사 곧 행함을 삭제 시키는 방식인 묵시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내 열심히 특심이오니를 지우고 삭제할 방법이 이제는 없어져 버린 겁니다.

이미 마음 판에 자리 잡은 오만이요 우상숭배인 겁니다.

누가 삭제 시켜 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심각한 겁니다.

자기만 남았나이다 라는 이 심각성은

그 말 대로 심각한데 엘리야는 거꾸로 심각했던 겁니다.

나도 죽게 되어서 심각하다고 본 겁니다.

그것은 심각 축에도 못 드는 겁니다.

왜 심각하냐 하면 엘리야의 그런 교만을 삭제 시킬 방법이 없다는 뜻에서 심각한 겁니다.

그래서 불쌓히 여겨주셔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7천명의 남은자로 그 놈의 열심히 특심인 그 잘난 나만 남았나이다를 삭제 시켜 주신 겁니다.

달리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감히 되도 않는 기념비를 세우고 자랑할게 있냐 말이죠.

 

다윗도 지금 똑같이 이 십자가의 영광 때문에

외부의 공격과 내부의 모순들을 다 들추임 당하는 겁니다.

다 들추어내니까 내 속에는 정직한 영, 정직한 마음은 없었다 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왕이랍시고 앉게 된 것은

내가 나 다윗이 이스라엘 왕 답게 처신을 해서가 아닌

주님이 자신의 십자가의 용서를 높이고자

자신의 피 흘리심을 영광 받고자

이렇게 못나고 못난

어중이 떠중이 같은

죄인 중의 괴수인 우리들은 각자의 위치에 배치시켜서

십자가의 사건을 터트리시는 겁니다.

십자가의 다툼

십자가의 충돌

십자가의 전쟁을 매 수시로 터트리는 겁니다.

 

뭐 하나 잘난 것이 없이

그저 못난놈 못난놈인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한

 

십자가가 밝히 보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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