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노래, 이전 것이 지나간 노래, 보라 새 것이 된 노래 (시편 33)

 

(고후 5:17, 개역)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33:1, 개역)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33:2, 개역)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열 줄 비파로 찬송할지어다

(33:3, 개역)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지어다

(33:4, 개역)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 행사는 다 진실하시도다

(33:5, 개역) 저는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33:6, 개역)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

(33:7, 개역)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33:8, 개역)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지어다

(33:9, 개역)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33:10, 개역)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33:11, 개역)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33:12, 개역)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 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33:13, 개역)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33:14, 개역) 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33:15, 개역)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

(33:16, 개역)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33:17, 개역)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33:18, 개역)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33:19, 개역)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시에 살게 하시는도다

(33:20, 개역)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저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33:21, 개역) 우리 마음이 저를 즐거워함이여 우리가 그 성호를 의지한 연고로다

(33:22, 개역)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

 

 

오늘 본문에 새노래 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먼저 지난 시간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시편 29편에서 여호와의 목소리가 잉태 속에서 창조 곧 생명을 말하는게 아니라

여호와의 목소리가 낙태 속에서 곧 구원을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편 30편은 다윗이 성전의 낙성가 곧 성전완성을 노래 부르고 있는데

그 내용이 우리가 보통 집틀이를 하거나 새건물을 준공했을때의 잔치 내용이 아니라

마치 아들의 혼인잔치를 위한 임금비유처럼

살벌하기 짝이 없는 내용으로써

성전완성을 노래 부르고 있다는 겁니다.

곧 새노래입니다. 곧 복음입니다.

 

그런데 새노래란 곧 복음이란

옛노래를 헐고서 그 위에 그 터 위에서 새롭게 갱신하듯이

전혀 다른 전혀 차이나는 것으로써

그 간극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겁니다.

 

시편 29편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29:5, 개역)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제가 시편 29편을 살펴본 내용을 두 번이나 올렸는데

처음 것은 오독했다고 했지요

그 다음 것은 그 오독을 새롭게 보여서 잉태가 아닌 낙태의 관점에서 여호와의 목소리를 다시 언급했습니다.

 

즉 진노 속의 구원, 진노 속의 복음, 진노 속의 새노래, 진노 속의 여호와의 목소리 였다고 말입니다.

 

즉 부정성이 앞서서 나온다는 겁니다.

이 부정성이 사실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겁니다.

어떻게 잉태 속에서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기를 원하지

낙태 속에서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기를 원하냐 말이죠

(사 54:1, 개역)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1, 개역)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개역)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개역)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사실상 이사야 후반부는 다 "새노래" 라는 의미에서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구원이란 새노래란 곧 복음이란

우리가 싫어하는 그 진노 속에서 긍휼이 베풀어지는 겁니다.


시편 전체의 내용은 한마디로 말해서 긍휼의 노래입니다.
살려주세요 구원해 주세요 입니다.
그럼 과연 누구로 부터의 구원입니까?

원수 입니다. 그 원수로 부터의 구원입니다.

그 원수를 이겨야 원수 문제를 해결해야 구원이 되고 그 구원이 새노래인 겁니다.


곧 복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반드시 상응해서 대조되는 것이 반드시 동원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옛노래 곧 다윗이라는 원수입니다.


즉 다윗이라는 원수로 부터 다윗을 건져내 달라, 구원해 달라는 겁니다.

아니 무슨 수로? 불가능합니다.
그 원수를 죽여야 하잖아요?

그럼 구원입니까?

결국 이 말은 인간이 생각하는 구원이란 없다는 겁니다. 그런 구원이 바로 옛노래인 겁니다.
다윗이 반드시 원수로 규정되게 만드는 것은 십자가 라는 새노래 뿐이다는 겁니다.
그래야

다윗이 원수이면서 그 원수만이 부를수 있는 노래가 새노래 이다는 겁니다.

 

몇 년전에 십자가마을에서 내부의 충돌이 벌어져서 갈라진 사건이 있었는데

어떤 목사가 갈라디아서의 내용을 가지고 충돌해 온 겁니다.

사실상 자신이 충돌한게 아니라

거꾸로 충돌을 당하게 되니 그 반발작용으로써 벌어진 겁니다.

 

그 내용이 

어떻게 우리가 십자가로 구원 받아서 이제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닌데

죄인의 옷을 벗어버리고서 예수님의 구원을 노래하자 라는 식의 내용입니다.

 

자꾸 죄인 죄인 죄 죄 카지 말자입니다.
이 사람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 이 문제로 시비를 겁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데 그런 목사의 주장에 죄인의 옷을 이제 벗어버리는게 아니라

도리어 죄수의 옷을 벗고서 (비록 특별사면을 받았지만) 가 아니라

오히려 그 죄수 복에 찍힌 낙인 특별사면의 붉은 피도장 찍힌 그 옷 그대로 입고서

예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것이다 라는 주장에


그 목사는 휙 등돌리고 돌아서버린 겁니다.


충분히 이해가 가지요? 왜냐? 말이 안되기에 등 돌리는 겁니다.

말 되면 등 돌릴 이유가 없습니다.

 

같은 원리로 OO , OO 씨 다 똑같습니다. 그렇게 등 돌리게 되는 겁니다.

다른데 가서 왕질하면서 그 소리 외에는 할 줄 모르는 겁니다. 
새노래를 거부하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싸움은 딴게 없습니다. 이 싸움 뿐입니다.

 

여기에 동원이 된 것이 다윗이라는 죄인 중의 괴수이지

노래 잘 부르고 기타 잘 치는, 나만 가수다 라는 이스라엘 왕 다윗이 아닙니다.

그 다윗 찢어버려서 그 입을 화롯불꼬챙이로 지져서 제단숯불로 지져서 
이제는 입이 불타 버렸으니 노래 못 부르는 불가능하게 되니까 

비로소 나오는 노래가 새노래이다는 겁니다.

아니 불가능한데

아무리 봐도 가능성으로 바뀐게 없는데

더더욱 불가능하게 되었을 뿐인데 나오는 노래가 새노래

곧 덮쳐져져 나오는 소리 노래 라는 겁니다.

벙어리가 노래 부르는 것과 같다는 거죠.

소경이 예수님을 보는 것과 같고

귀머거리가 새노래를 듣고 춤추는 것과 같은 증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새노래가 덮쳤기에 나오는 불가능성의 증상입니다.

아니 생각을 해보세요 이것이 말이 되나?
벙어리가 노래를 부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데 더더욱 불가능한 것이 새노래는 더더욱 안된다는 겁니다. 노래도 안되는 판국에 새노래를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다시 말할까요?
실로암 소경이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마치 눈 뜬 건강한 자도 예수님을 못 보는 판국에!! 소경은 다른 사물도 못 보는데 남들 곧 눈 뜬 자도 못 보는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이중 불가능성, 불가능성 중의 불가능성을 누리고 있다는 겁니다.
자력으로? 눈을 못 뜬다니깐요?
그러니 이것은 덮쳐진 것이다는 겁니다.
노래를 못 듣는 귀머거리가? 어떻게 노래도 안되는 판국에 새노래를 듣겠습니까? 불가능성의 불가능성을
희년은 일방적으로 편파적으로 선포하는 겁니다.

 

에서와 야곱의 차이

맏아들과 탕자의 차이

사울왕과 다윗의 차이

 

그들 자체에서는 없습니다.

둘 다 똑같은 마귀자식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구원하는 그 구원이

이들의 간극을 벌려서

그 사이에서 나오는 것이 구원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편애로써 나타난 결과일 뿐만 아니라

아무도 의심없이 저 사람은 지옥 마땅히 가야해 할 그 사람이

오히려 그 어떤 원인도 없이

편파적인 편애 때문에 이유없이 천국 가야만 하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원인 없이 말입니다. 나중에 덧붙이는 식으로 그 원인이 앞이 아닌

뒤에서 붙여지는 식이니 지독한 이유없는 편애 편파적인 사랑 용서 때문인 겁니다. 일만달란트 비유가 그런 의미 입니다.


동시에 일만달란트 비유는 똑같이 이유 없이 지독한 미움을 받는 자도 동시에 말하고 있습니다.

지독한 편애를 거부할 수 밖에 없는 자는

아무리 편애를 줘도 못 먹습니다.

바로 코 앞으로 자기 돈 띠 먹은 자를 고소할 수 밖에 없거든요

그러니 그 비유는 사실상 말도 안되는 소리 입니다.

동시에 하나 마나 한 소리 입니다.

이 세상의 원리에 안 통하는 원리이다는 겁니다.


즉 누가 봐도 저 사람은 죽어서는 천국 갈 사람이야 하고 그 어떤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자를
성경박사들도 의심하지 않는 그런 자들을
정작 복음은 철저하게 백배나 지옥 자식을 만드는 마귀의 열매인 마귀자식으로 본다는 겁니다.

결국 이런 말도 안되는 일만달란트 비유는 이 보다 더 명료하게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비유는 없다고

오히려 더 약올리듯이 성경말씀은 이 말도 안되는 소리를

예수님은 더 당당하게 믿음(불가능성)으로 증거하십니다.


용서 비유를 이 보다 더 명료하게 선을 긋는 비유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라고 말이죠.

 

결국 차이나게 하는 것이 거룩이 그 간극 사이에서 나와서

그들에게 개입해서 구별 차단 갈라서게 하는 겁니다.

아버지의 용서이지, 곧 비유에서는 임금의 용서이지
그들이 거룩을 행해서가 아니다는 겁니다.

가르는 기준은 예수님 마음대로 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반드시 옛노래의 시선에서는 기분 나쁜겁니다.

어떻게 행할 방법이 없게 되거든요.

내 쪽으로 끌어 당길만한 그 어떤 것도 다 사라져 버리는

삭제 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안색이 변하는 거죠.
새노래는 곧 안색이 변하게 만들수 밖에 없는 겁니다.

안색이 변하게 만들줄 모르는 노래는 가짜 새노래인 거죠.

어린아이들이 호산나 라고 노래 부르는 이유는
반드시 그 새노래를 싫어하는 자들이

소음 소동으로 여기도록 한다 라는 겁니다.

그래야 선이 분명하게 갈라지는 겁니다. 구별은 저절로 되는 거죠.
 

곧 복음이, 새노래가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전 것]이 지나가 버림을 당해야만 하는 상황인
곧 충돌이 반드시 발생한다는 겁니다. 사건으로써 말입니다.

 

새노래가 개입하지 않은 자는

 

새노래 조차도 옛노래식으로 부를려고 하는 겁니다.

바로 죄수 복을 벗어버리고서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옛노래입니다.

왜? 내가 용서 받았는데 왜 죄수 복을 입어? 벗어야지!!!!
라고 하는 순간
내 돈 띠 먹은 놈 지나가니 법으로 족쳐 버리는 겁니다.

괜히 죄수 복을 벗는 바람에
나 보다 더 나쁜 놈을 가만히 두지 못하겠다는 거죠.

이것이 용서의 의미를 역설적으로 가장 잘 드러내는 차이성 곧 간극입니다.

그러니 용서는 아버지의 용서는(탕자와 맏아들) 임금의 일만달란트 탕감의 용서는
이 간극에서 나와야 하는 겁니다.

용서 받았는데 왜 이것이 나에게는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것인지를 말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으로 구원 받아 놓고서도 광야에서 원망 3가지를(사실상 10번 이상) 증거궤에 담는 겁니다.
너 죄인 맞잖아? 왜 의인인척 해?
내가 죄인 된 것은 주님의 영광을 위함인데

그것을 거부하니까

아니 내가 왜 죄인이 되어야 해?????
이제 제발 그만 죄 죄 죄 카자
이제는 구원받았잖나
이제는 의인 노릇해야지?
성화 해야지?

언제까지 죄인 노릇할래 라는 식입니다.

그러니 이 간극 사이에서 나오는 긍휼의 반복을 쓸데 없는 짖으로 본 겁니다.

왜 광야생활이 필요한지를 모르는 이유인 겁니다.

왜 하필이면 출애굽해서 바로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고

하나 마나 한

쓸데 없는 짖인 광야 40년이
왜 그 사이, 그 간극이 필요 했었냐 라는 겁니다.
그것은 긍휼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간극에서 말입니다.
아무리 원망해도 그 원망마저도 이기는 긍휼 말입니다.
이것이 그 사이에서 나오는 복음 곧 오늘 표현의 새노래 입니다.

항상 헌노래와 대비되는 상태에서

우리는 옛노래를 지적받으면서 새노래를 누리는 겁니다.
역발상이지요
광야에서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을 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 불가능성을 누리는 겁니다.
광야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뀌는
불가능성이 가능성이 바뀌어서가 아닌

광야 곧 죽음 곧 저주 그 자체 속에서도 말입니다.


그런데 죄수 복을 벗고서
가능성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그때서야 새노래를 부르겠다는 식입니다.

광야에서는
죄수 복을 입은 상태로써는 때려죽어도 새노래가 답지 못하는 식입니다.
죄인의 티를 벗고 의인이 되어야 새노래 답다는 겁니다.

기존의 실력을 가지고서 연결되는 식으로, 잇는 식으로, 교통 소통 일치되는 식으로

성화론도 그렇고

개혁주의도 다 그런 식입니다.

기존의 것을 가지고서 연결을 시도한다는 겁니다.

죄인의 몸을 성령의 도움으로 인해 의인의 몸으로 바꾸어서 새노래에 접속할려고

연결을 시도하는 겁니다.

 

차단 당하는게 아니라 말이죠.

 

여기에 새노래란 바로 그런 옛노래의 철저한 단절입니다.

이 단절을 구체화 하는 것이 새노래입니다.

단절을 누려야 하는 겁니다.

아무리 새노래를 배우고 해도 안되는 것은 안됩니다.

회개 금식 기도 눈물 백날 해 보세요 되나?

어딜 꼼수를 부리냐 말이죠.

안통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역으로 바리새인이 사용합니다.

자신들은 되었다 라고 연결 접속해서 됐다고 우깁니다.

십계명 율법은 지키라고 준게 아니라 단절성을 직시하라고 준 겁니다.

죄 아래 가두기 위해 율법이 가입한 겁니다.

본인들이 단절 당해야 함을 마땅히 인식해야 하는데

도리어 남을 단절 시키고 있습니다.

즉 자신들은 연결 되었으니까 그런 행동이 반드시 나오는 겁니다.

 

마치 남을 7번 용서해야 합니까 라는 사고방식이

자신이 단절 당해야 함을 느끼지 못하고

도리어 연결을 시도하고 동일시를 추구하고

그것으로 인해 남과 자신을 단절시키는

지가 지를 선택하는 방식인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선민화 시켜서 구원하는 방식

곧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 성화론이요 그들의 성령론인 개방성입니다.

 

여기에 다윗은 죄수 복을 입고서 부르는 노래로써

원수 복을 입고서 부르는 노래로써

새노래를 옛노래와 대조해서 부르고 있습니다.

 

(29:5, 개역)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다윗언약은 성전언약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을 파괴하는 것이 바로 여호와의 목소리라고 시 295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어제 어머니와 말씀을 나누면서 이 부분을 다루었습니다.

 

분명 시편 30편에서

다윗이 성전을 완성해서 부른 노래인 낙성가(건축완성노래)를 불렀는데

이것이 말이 안된다고 제가 말했습니다.

 

왜 말이 안될까요? 어머니!!!

 

다윗은 성전을 완성하지 못합니다.

완성할수도 없습니다.

그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피를 흘려서 더럽다는 이유가 아닙니다.

전쟁의 군사로써 한명의 장군으로써 적군의 피를 많이 흘려서가 아닌

 

이유는 정작 전혀 다른 겁니다.

인간의 손으로 지을 수 없다는 것이 성전이다는 이유인 겁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니지만 결국은 짖게 되잖아요

그래서 모든 재료를 구축하고서는 다윗은 죽고

솔로몬이 짖는 겁니다.

 

그때 그냥 안짖습니다.

제일 좋은 나무 가장 좋은 재료들

심지어 황금까지

그래서 솔로몬의 황금성전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때에 제 동기가 군대에서 다녀오더니

그렇게 소극적인 놈이 성격이 와일드 거칠게 변하여 저에게 적극적으로 이런 표현들을 하는 겁니다.

소위 장막회 하는 이단 속에서 전도 열풍에 빠졌던 겁니다.

요즘의 신천지 이지요

그때 신학교 전체가 이 열풍에 빠져서 신학생들 많은 수가 뿅갔지요 뭐

 

그때 그 놈이 하는 말이 자신들은 성경 그대로 황금성전을 짖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본인은 진지하게 이야기하는데

오히려 저는 억수로 웃겼습니다.

 

그게 뭐

 

그게 뭐 어쨌다고?

 

본인은 뭐 대단한냥 말하고 있는데 안믿겨지냐고? 제발 믿어라 라는 식이였습니다.

 

참나 신학생이 같은 동료에게 믿으라고 강조하는 겁니다.

 

즉 이 말은 본인에게는 그것이 새로운 것이고

상대적인 타인은 엣것이다 라는 충돌인 겁니다.

 

바로 이겁니다.

과연 그것이 새것이 맞고 과연 옛것이 아니냐 말이죠.

 

공부는 이 이유 때문에 하는 겁니다.

철학 신학 완벽하게 박사처럼 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래 봤자 다 옛것이니까 말이죠.

바로 왜 옛것인가를 알면 되는 겁니다.

 

왜 다윗이라는 그 기가막히게 노래 잘 부르는 노래쟁이가

이 새노래 앞에서는 옛노래로 취급받아야 하느냐 말인지를 말니다.

 

그래서 그것을 제가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만약 세계에 두 번째인가 몇 번째인가 제일 큰 교회를 세운 O씨 입장에서는

그것도 황금성전이가 라고 비웃을것입니다.

요즘 황금과 그 당시의 황금은 가치가 다르잖아요

그렇다면 O씨 입장에서는 그런 황금성전 수천개를 짖고도 남는 겁니다.

 

그러니 안짖죠

더 좋은 재료가 있고 더 비싼 것으로 자기들이 이미 지었거든요

대구에도 제주도의 비싼 돌을 가지고서 지었다고 소문난 교회가 있는데

미친놈들인 거죠

 

그런 조그마한 그 당시 조그마한 곳에서 황금성전을 지으니가

고만 고만한 중대형 교회도 따라 하는 겁니다. 요즘은 엄청나게 큰 사기꾼 집단이 되었지만

 

그런데 솔로몬의 황금성전을 그대로 따라 짖는다고 의미가 같지 않습니다.

전국가적으로 전민족으로 나서서 우선시 한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적이 있나요? 없잖아요

 

그리고서는 그 세운 성전 때문에 쫄딱 망해야 합니다.

그것을 바라고 황금성전 따라 짖기 하는 놈들 없잖아요

 

그리고서는 또 있습니다.

스룹바벨 성전 곧 판자교회 깡통교회를 짖는 겁니다.

 

솔로몬의 황금성전을 따라 짖는 놈도 웃끼는 놈들이지만

더 웃끼는 것은 깡통교회도 따자 짖는 놈들이 있는 겁니다.

 

더 웃끼는 놈들인 거죠.

 

새벽을 깨운다고 했던 그 목사를 어머니께서 아 깡통교회라는 말을 듣고 그 목사를 생각하신 겁니다.

 

왜 그런 놈들이 웃끼는지를 말했습니다.

 

그 판자 교회인 스룹바벨성전을 보고 원로들은 우는 겁니다.

황금성전을 봤던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그 옛성전이 깨져서 스룹바벨의 성전의 모습으로 오시는 분이 예수님의 몸인 겁니다.

다윗 언약의 완성이요 성전언약의 완성인 거죠.

 

그런데 이들이 포로잡혀서 되돌아 귀환해서 제일 먼저하게 된 그 성전건축에

그 어떤 재료도 없는 겁니다.

 

그리심산처럼 풍요로운 삼림이 아닌

벌거숭이 다 타버린 터에서 판자대기 하나 없는 가운데서 세운 성전인 겁니다.

 

그것도 그냥 짖도록 안내버려 둡니다.

사마리아인이 와서 그렇게 괴롭힙니다.

 

왜 사마리아인과 철전지 원수가 되었는가?

스룹바벨 성전을 짖는데 방해한 철저하게 방해한 방해꾼들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을 두둔하고 있으니

예수님을 가만히 두겠습니까?

죽여야지요???

 

이 얼마나 역설입니까?

그 스룹바벨 성전이 예수님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그림자인데

 

그 주의 성전(그림자)를 사모하는 열심히 주를 삼키는 역설 말입니다.

이 말을 제자들이 구약 내용을 기억해서 언급했잖아요

그래놓고 그들 또한 예수님을 모조리 다 버립니다.

이 또한 역설입니다.

그러니 성경은 안티들이 말하는 모순이 아니라

그 자체로써 인간에게는 모순으로만 보여야만 한다는 겁니다.

? 인간 자체가 외설적이기 때문이거든요.

 

그 외설 그 불법을 깨는 것은 오로지 더 나은 외설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날 황금성전을 따라 짖는 놈들이나

또 판자교회 깡통교회를 따라 짖는 놈들이나

자신의 외설성을 지적받기는커녕

동일시

개방성으로써

자꾸 감추는 식이 되는 겁니다.

 

죄인의 괴수로써 새노래로 들통당해야 하는데

도리어 그것을 감추는 식으로써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그 자체가 이전 것 이라는 옛노래와의 차이성이 결국은 없는 겁니다.

 

명료하게 갈라지는 것이 없이

도리어 남과 자신을 거리두기를 하는 겁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말이죠.

 

도리어 새노래 곧 복음에 희년에 의해

단절을 당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18:10, 개역)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8:11, 개역)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2, 개역)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성전 자체가 두 세계로 가른다는 겁니다.

위에서 언급한 성전 안에서 두 성전이 있다는 겁니다.

 

두 성전의 싸움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짖는 성전과

예수님이 세우시는 성전 곧 예수님 자신의 몸 말입니다.

 

그렇다면 새노래 곧 성전완성은

다윗 자신의 무너짐 곤 파괴로써 세워질 때 부르게 되는 노래가 새노래이다는 겁니다.

이전 것이 허물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새롭다고 말할 수 있냐 말이죠.

 

그래서 위에서 언급했듯이

솔로몬 때에 완성되는 성전인데

아직 성전이 완성도 되지 않았는데

완성 되었다고 다윗은 미리 앞당겨서 노래 부리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되냐 말이죠?

그러니 성경은 모순으로, 역설적으로, 외설적으로,

말이 안되는 것만을 기록 된

 

단절성이다는 겁니다. 불가능성이다는 겁니다.

 

즉 이전 것에서 벗어날 수 절대 불가능한데

도저히 지나 갈수 없는 옛노래 옛것에 사로잡혀 있는데

철저하게 포로 되었고

갇혔고

우리는 우상에 이미 잠식되어 눈 멀었고

쇠사슬에 매여 죽기를 무서워 평생 종노릇할 수 밖에 없는데

그 불가능성이 불가능성 그대로 덮쳐버렸기에

그 단절성을 느끼는 겁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란 눈물 질질짜고 반성하고 나쁘다고 회개한 그것을 고치는게 아닙니다.

회개란 불가능성이 덮쳐져서 그 단절성을 노래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즉 죄수 복을 입은채로 특별사면을 한 그 피의 고마움을 노래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엣것 이전 것 옛노래를 여전히 부르는 자는

이것을 가능성으로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솔로몬 재판때에 한 쪽 여자는 솔로몬의 판결에 박수를 치는 겁니다.

잘 하셨습니다. 저도 가지지 말고 이도 가지지 말고 참 잘 하신 판결입니다. 라고

동질화 시키는 겁니다.

즉 가능성으로 바꿔치기를 한 거죠.

이것은 전혀 불쾌하지 않습니다.

낯설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한 행동의 연결선상으로써 하나님의 지혜가 동원이 되는 식이다고 본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불가능한 것이어야 곧 거룩이어야 분리 구별 차이가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개방성 곧 가능성은 차이가 없는 겁니다.

도찐 개찐 이거나 저거나 거기서 거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뭐 별거 있어? 동일화 시키지 뭐

그럼 티가 안나니까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세리와는 차이성을 하나님과는 동일성을 두게 되는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 이글을 쓴다는 자체가

늘 하나님과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모습 아닙니까

그것을 그렇다고 제가 깰수가 있냐 말이죠.

저번에 말한 850 1 로 싸워서 이겼지만

아무리 하나님 덕분에 이겼다고 말은 하지만

결국 자기의 열심히 들어가 버린 이상 그 행함을 삭제시킬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불가능성입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사망의 몸에 갇혀 버린 곤고함이다는 겁니다.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것을 이사야는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겁니다.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것을 다윗의 시편 29편에서는 여호와의 목소리가 낙태케 함으로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겁니다.

 

(29:9, 개역)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불가능성을 그 불가능성 그대로 덮쳐지게 되는 불가능성을 누리게 즐기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가능성으로 바꾼게 아니라 말입니다.

 

성화론자들은 기여이 가능성으로 바꾸죠. 성령을 그런 식으로 이용합니다.

 

말이 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야 설득이 가능하고

전도도 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지난 시간에 말했듯이 말이 안되는 겁니다.

너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니

그렇게 예수님을 싫어하는 안티였잖아

그러게 말이야

나도 말이 안되는 것을 믿게 되어버렸어

어떻게 설명이 불가능해

말이 안돼 말이

 

말도 안되는 것을

즉 불가능성을 그 불가능성 그대로 덮쳐졌다는 겁니다.

그것도 원수 중의 원수

죄인 중의 괴수가 말입니다.

사도바울이 당사자 아닙니까?

그러니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것이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괜히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말도 안되는 일이 자기에게 벌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는 불가능한 것 밖에 없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 뿐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가능해 졌다는 소리가 전혀 없습니다.

여젼히 말도 안되는 소리로 계속해서 남아있다는 것

이것이 새노래입니다.

불가능성 그대로 덮쳐버림을 누리고 있다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 새노래가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입니다.

꼬끼오 꼬끼오 꼬기오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는 소리 곧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바로 3초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해 놓고서는

말도 안되는 소리인 줄 알면서 저절로 나오는 노래입니다.

 

그 새노래의 내용을 내가 채울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채우니까 그것 또한 말이 안됩니다.

내가 채우면 말 되는 소리만 골라 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노래는 헉 허걱 으악 오호라 화로다

이게 새노래입니다.

 

이게 무슨 새노래 라고요?

그러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 라고 했잖아요

저 속에 사건이 들어가있는 겁니다.

나를 원수 삼아 피 용서한 내용 뿐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헌노래는 인간들의 사연이 들어가 있습니다.

내용도 구구절절 합니다.

소위 예수 믿게 되는 회심사건을 사람들이 노래부르듯 나발불지만

그거 헌노래입니다.

 

헌노래는 반드시 새노래를 배격하고자 합니다.

새노래는 헌노래를 거부하니까 말입니다,

 

헌노래는 납득이 되요 납득이

그러나 새노래는 납득 자체도 불가능해요

말도 안되는 소리 뿐이거든요

 

거룩이 덮쳤다 불가능성이 덮쳤다

이건 말도 안돼

왜 나같은 죄인에게 용서를 해주신다는 거지?

말도 안돼

 

그런데 기독교는 이상하게 교리등 신학이든 자꾸 말 되게 만드니까

복음이 아닌 겁니다.

 

기독교가 가장 복음을 배척하는 집단이 되어버린 거죠

눈에 보이는 교회 조직 사수 때문에 말입니다.

헌노래를 사수하다가

새노래를 거부하는 겁니다.

옛성전을 사수할려다가 새성전을 거부하는 겁니다.

 

자 다시 말씀 드리면

엘리야가 자기의 행함을 삭제 시킬 방법이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즉 외설적이고 불법이요 모순인 것이 드러났습니다.

이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더 불가능성으로써 7천명의 남은자가 덮쳐버린 겁니다.

 

앞의 것은 어찌되었던 간에 850 1로 싸워 이겼다는 경험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7천명 남은자는 경험할 방법이 없습니다.

행할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무슨 수로?

불가능입니다.

그 불가능성으로

그 단절로 구원 받지

 

행하고 경험한 그것으로 구원이 안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힘이 되기 때문에

육신의 자랑이 되기 때문에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꾀는 것 밖에 안되는 겁니다.

 

무엇이 초과잉이냐 말이죠?

말도 안되는 외설 850 1로 싸워 이겼다는 것이 육신의 자랑이 되어버린

그 법, 그 외설법이 과연 초과잉적일까요?

 

아니면 경험 할수도 없는 내 쪽으로 끌어당길수도 없는

남은자 7천명이 과연 초과잉적인 불가능성일까요?

 

인간의 외설도 법도 아닌 주제에 법이 되어버리는 그 외설성에

더 심한 외설성으로 그것도 외설이냐 라고 따지면서 쳐들어 오는 모순이 바로 7천명의 남은자 라는 겁니다.

 

마찬가지 그것도 용서냐? 7번 남 용서?

에라이 770번 용서 받기나 하라 라는 겁니다.

 

말도 안되는 나의 법이라는 외설성을 무너뜨리는 더 심한 외설성은

남이 아닌 나를 용서하겠다고 쳐들어 오는 십자가의 피 다는 겁니다.

 

남 용서가 아닌 너나 용서 받으세요 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새노래 곧 복음 곧 희년 기쁜소식입니다.

사실상 전혀 안 기쁜 거죠.

말도 안되니까

 

그런데 안 기쁘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두 가지 양상이 나의 몸에 둘 다 새겨지는 겁니다.

하나는 말도 안되는 불가능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원인 없이 결과로

이전 것 과거 같았으면 전혀 기쁜 것이 아닌데, 안 기쁜데.

기쁨으로 충만하다는 것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이 왜 이렇게 감사한지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을 원하는 겁니다.

곧 십자가의 용서입니다.

 

신약으로 따지면

죄를 삭제 시키는게 아니라

먹보다 더 검은 죄를 삭제 시켜서가 아니라

그래서 불가능성이 가능성으로 바꾸는게 아니라(이것이 성화론이요 악마사상인 거죠.)

 

죄가 그대로 있는데 그 죄 보다 더 강한

죽음 보다 더 강한 사랑 곧 피가

먹보다 검은 죄 보다 더 붉은 피로 덧입히는

그래서 허물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는

허물이 완전하게 사라진게 아니라

위에 덮쳐진 용서의 피가 하도 두꺼워서

다 카바를 해 버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더 외설적인 거죠.

 

(10:12, 개역)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벧전 4:8, 개역)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불가능성에 더 불가능성이 덮쳐버려서

외설에 더 외설적인 것이 덮쳐져 버려서

그것도 꼴에 외설이냐? 라고 비꼬듯이 덮쳐지는 겁니다.

그것도 용서냐고? 에게 에게 겨우 7? 어느 세월에 ~~~~

에라이 770번이나 받아 무라 라꼬 말이죠.

겨우 남은자 딸랑 한 명? 에라이 7천명 누려라 ~~~~~

 

이것이 새롭다는 의미입니다. 기존의 의미에서는 고만 고만 하다는 것이 새로움이지만

그것은 새로움이 아닙니다.

그들의 방식을 다 깨뜨리는 것만이 진짜 새로움이다는 겁니다.

곧 더 나은 불륜, 외설, 스캔들인 십자가입니다.

 

확 깨뜨리거든요

깨작 깨작 거리면서 남(타인) 용서 7번 겨우, 아이고 그럼 몇 번 더 할까요? 8?

겨우 깨작 깨작 거리면서 7번에서 8번으로 나아가는 것이 그들의 새로움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헌 노래입니다.

 

깨작 깨작은 결국 헌사람이 심각하게 문제시 삼는 것이다는 거죠,

그게 과연 심각한 문제냐 말이죠.

문제 꺼리도 되지 않는 것을 문제시 하고 있다는 겁니다.

결국 인간은 행함을 깨작 깨작 거리면서

저 세리 보다는 낫다고 깨작 깨작 거린다는 겁니다.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어딜 감히 구라를 치고 사기를 치냐 말이죠.

그딴거

인간들이 심각하게 여겨서 깨작 거리는 것에 호응해 줄까요?

장난하냐 말이죠.

오늘날 기독교가 장난치고 있습니다.

그게 종교 아닙니까?

종교란 장난입니다. 마약입니다.

 

새노래란 그 헌노래를 찢으면서 오는 겁니다.

헌 성전을 찢으면서 오는 겁니다.

헌 몸을 찢으면서 오는 겁니다.

안 그러면 계속해서 깨작 깨작 거리거든요.

 

죄수 복을 벗을 필요가 전혀 없이(버리자 라는 것이 성화론자 곧 의인)

죄수 복 입은채로 붉은 도색을 노래하는 것이 새노래 곧 구원자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기쁜 소식

 

인간이 인위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전혀 없이 그 자체로 기쁜 소식이 바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것이 새노래이다 라는 겁니다.

 

즉 뭐뭐 아니라 라는 말은

앞의 것이 옛노래 옛것이다 라는 거죠.

이 옛것과 차이나고 그것이 지나가 버린 상태가

보라 새 것이 되었다 라는 겁니다.

 

 

그럼 옛것은 뭡니까?

의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것 아닙니까?

오늘날 대부분의 성화론자들 개혁주의자들 심지어 이단들로 규정된 자들까지 다 이 소리 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목소리는

곧 복음은 곧 새 노래는 그럼 뭐냐?

저것을 거쳐서 지나간 것으로 취급하는 새 것이다는 겁니다.

반드시 저것을 지나간 옛 것으로 취급하지 못하는 새것은 새것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곧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것만이 새 노래인 복음이다는 겁니다.

 

(9:13, 개역)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2:17,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5:32, 개역)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회개에 대해서 말했잖아요

그렇다면 의인은 회개할 꺼리가 없어요

죄인만이 회개를 누리는 겁니다.

 

회개를 하거나 지키는게 아니라

회개를 누린다 말이죠.

 

지킴과 누림의 차이란

회개를 지키는 자는 회개가 가능한 자이고

회개를 누리는 자는 회개 자체를 할 줄도 모르는 이미 회개인간으로 태어난 겁니다.

회개가 불가능해요

불가능하니까 회개입니다.

그런데 불가능에 더 불가능한게 바로 회개가 불가능한자에게 불가능한 회개가 덮치니까

회개의 사람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회개를 지키지 않지요.

회개 할 필요가 없어요

그냥 회개를 매일 매초 누리기만 할 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회개가 가능한 자에게 반드시 얼룩으로 자리 잡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누린다는 말이 괜히 어렵게 여겨지는데 이렇게 말하면 쉽습니다.

남자 보고 여자 되라고 하면 남자는 수술을 하든지 뭐를 하든지

자꾸 행함 밖에 안되는 겁니다. 남자의 영역에서는 여자되는 것이 그 자체로써 불가능하거든요

그러니 행함입니다. 믄 시도를 하든 말든

 

그러나 여자 보고 여자 되라고 하면 이미 그 말 자체가 모순 됩니다.

이미 여자인데 여자가 되라니? 그냥 여자로써 누리기만 할 뿐인 거죠.

그럼 여자 입장에서 여자되기가 가능해서 지키기로, 행하기로, 여자가 되는 겁니까?

아니지요

이미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여자되기를 할 필요가 없이

그렇다고 가능성으로 지키기 조차도 할 필요가 없이

그냥

그냥 누리는 겁니다.

그냥 막 살아도 절대로 남자 안됩니다.

여자로 그냥 막 누리면서 살다가 잘못하면 남자로 되는 경우는 없다 라는 겁니다.

아무리 성전환수술해도 소용없이 없습니다. 안된다 라는 거죠.

 

그렇다면 여자로써 그 절대로 안되는

아무리 막살아도 절대로 남자로 안변하는 그 불가능성을 또 누리는 겁니다.

 

이제 누린다는 말이 이해가 됩니까?

 

더 쉽게

 

지옥에서 땡기는 자는 아무리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아도

안 됩니다.

 

또 천국에서 땡기는 자는 아무리 막 살아도

예수님을 안 믿겠다고 발버둥쳐도

아무리 사람들에게 개판으로 사는 놈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탕자이여도

아무리 지옥 가고 싶어서 발버둥을 쳐도

안된다는 겁니다.

 

그 안되는 불가능성을 누리는 겁니다.

 

두 번째 천국에서 땡기는 자를 저런 식으로 표현하니까

교회에서 쓸데없이 걱정을 하는 겁니다.

진짜로 탕자들로만 수두룩 할까봐

교회 질서가 무너질까봐

그래서 지옥이 땡기는 짖으로 교회질서를 갖추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기독교 교회사 인 거죠. 2천년?

마귀 역사죠.

 

죄인이 없어요 죄인이

다들 자기 잘 난 의인들만

지옥에 갈 자들만 교회에 수두룩 한 겁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자들만 교회에 수두룩 한 겁니다.

 

그래서 낙성가

이미 성전 완성 되지도 않았는데 노래 부르는 겁니다.

이미 봐 버렸거든요

 

어떻게?

그 내용이 바로 313233편입니다.

 

다들 내용이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정적으로 앞 내용이 전개 되다가

갑자기 원인 없이 결과적으로 감사와 기쁨의 찬송으로 결론을 맺는 식입니다.

도통 연결점이 없이 말입니다.

 

마치 자주 강조하지만 예수님의 비유와 같은 식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항상 부정적으로 시작하는데

결론은 감사와 찬송 뿐입니다.

도통 무슨 연결점이 있어야 해석이 가능한데

비유 자체가 수수께끼라서

해석 자체도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벌리는 임금과 같다 라는 비유와 흡사한 겁니다.

오늘 본문도 새노래 라는 밝은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뭔가 부정적인 것을 규정하고서 그 차이로써 밝은 느낌으로 간다는 겁니다.

 

결국 새노래를 말할려면 반드시 옛노래 옛것 이전것에 대한

파괴와 허물어 버림 부서뜨림 등을 반드시 거쳐서

새노래를 말하는 겁니다.

 

감사와 찬양, 기쁨, 춤 다 이런 식이다는 겁니다.

 

지닌 시간에서도 나오는 본문입니다.

 

(30:1, 개역) [다윗의 시, 곧 성전 낙성가]

(30:11, 개역)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슬픔 대신 희락을

재 대신 화관을

근심 대신 찬송을

 

(61:3, 개역)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항상 대조적인 흑백논리처럼 대조성을 띤다는 겁니다.

슬픈데 어떻게 기쁨을 누리겠습니까? 불가능하지요

재가 되었는데 어떻게 꽃화관을 누리겠습니까?

재 다 타버려서 죽은 시체 조차도 없이 흔적이 없이 다 날라가 버렸는데

어떻게 생명이 화사하게 빛나는 꽃처럼 아름다운 생명을 누릴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불가능하지요.

 

베옷 죽은자에게만 입히는 옷 아닙니까? 죽은자인데 그 베옷을 벗기고 기쁨의 옷

색동옷 요셉으로 만드시겠다는 것? 이것이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까?

 

(30:11, 개역)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근심이 되어서 걱정이 되어서 노래가 나오지를 않는데 어떻게 찬송이 됩니까?

 

이 불가능성을 주님은 골라 골라서 하겠다는 겁니다.

그것을 가능성으로 바꾼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 불가능성 그대로 우리에게 덮쳐져서 누리게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언발란스 라고 했습니다.

 

환자에게만 의사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환자와 의사 사이, 그 간극에서 뭐가 나오기 때문입니까?

 

그 적대적인 관계

 

원수와 피 라는 적대적인 관계의 간극에서

그 사이에서 뭐가 나오냐 말입니다.

 

3일이라는 간극에서 나오는 것만이

 

새 노래 라는 겁니다.

 

불가능성으로써의 그 불가능성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새 노래는 우리는 자꾸 불가능성으로 몰고갑니다.

 

복음은

구원은

기쁜소식은

희년은

십자가의 피는

성령은

 

우리를 불가능성으로만 몰고갑니다.

그 불가능성을 누리라고

 

그런데 환자가 아닌 죄인이 아닌

의인 건강한 자와 의사 사이에서는 뭐가 나오겠습니까?

간극 자체가 없는데?

단절 된 것 자체가 없는데?

 

참 놀라운 것이 오늘날 목사들이 자신이 죄인 곧 환자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외치지 않고

자꾸 지가 의사인냥 예수님을 외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의사가 더 잘 고치느냐 라는 또하나의 번거러움이 생기는 겁니다.

즉 거짓선지자를 가려내어야 할 능력을 새삼스럽게 키워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놀랍게도 환자가 없는 세상

죄인이 없는 세상이 된 겁니다.

 

다들 의사들만 넘쳐나서 멀쩡한 인간 죄인 만들어서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는 노래만 부르는 놈들 밖에 없는 겁니다.

 

다 의사 예요 의사.

 

이것이 옛언약입니다. 자기가 옳다는 것

이것에만 대비되는 예수님이 곧 새노래입니다.

 

새노래는 엣노래와의 차이성으로써 알수 있습니다.

다른 방식은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옛노래 옛것 곧 육이요 인간의 몸이요

그것이 투영된 옛성전 가짜성전

지나가버리는 이전 것을

반드시 동원해서 그 차이성으로써 새노래를 증거합니다.

다른 말로 옛노래가 뭔줄 모른다면 새노래도 뭔 줄 모르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로

 

(33:16, 개역)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33:17, 개역) 구원함에 말은 헛것임이여 그 큰 힘으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구원은 곧 새노래는 힘으로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결국 힘과 무관하다는 거지요.

이것이 유대인이나 바리새인이나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부르고 있는

가짜복음 옛노래의 방식입니다.

힘이 된다는 말은 결국 누구에게 그렇다는 겁니까?

인간의 몸 아닙니까

그래서 이 육은 반드시 무엇을 추구할 수 밖에 없다?

 

곧 힘입니다.

 

예수가 힘이 되든 (임금 삼고자 예수님을 지독하게 따라잡아 붙잡는, 6:15)

십자가가 힘이 되든

다들 긍정적으로 개방적으로 가능성으로 본다는 그 자체

 

이것이 힘이 되기에 [옛노래], 또는 지나가버려야 할 [이전 것]의 방식입니다.

 

그 힘의 노래 부르다가 다윗이 박살 났습니다.

 

황금성전을 오늘날까지 짖겠다는 자들의 사고방식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힘이 된다고 본 겁니다.

그렇다고 반대로 깡통교회 일부러 짖는 놈들 또한 역시나 마찬가지

힘이 된다고 본 겁니다. 작고 나약함이 마치 거룩인냥 말입니다.

이 둘 다 힘 추구인 겁니다.

 

깡통교회 짖는다고 다윗이 부르는 성전완성의 노래 낙성가는 아닙니다.

새노래 새몸이 아닌 겁니다.

바로 그런 것들의 박살 페허를 통해서

다윗이 박살 당함을 통해서 새노래를 부릅니다.

 

아니 새노래가 덮칩니다. 그 증상으로써 허걱 거리는 것이 튀어나올 뿐입니다.

 

어떻게?

 

여러분! 힘이 아니예요

여러분! 힘은 우리는 구원 못해요

창과 칼과 수많은 숫자

힘이 될 만한 그 어떤 것

자기를 위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구원이 안되요 라고 말하는

[아니요]를 외치는, 그것은 [이전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새 노래이다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다 우상이다. 탐심에 의한 자기를 위한, 인간 유익일 뿐이다는 겁니다.

 

새 노래는 그럼 뭔데?

바로 그 옛것 때문에 죽으신 분

그것 때문에 아무 죄 없으신 분이 죽으셔야 했다는 것

바로 그 분이 새 것이다 라는 겁니다. 새노래이다 라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 용서를 노래부르는 겁니다.

? 헌 하늘과 헌 땅을 십자가의 피가 다 허물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도 쳐다 보지 않았고 듣고자 하지도 않았던

그 목소리가 시편 29편의 여호와의 목소리였듯이

새 노래란 우리가 싫어했던 노래였다는 겁니다.


어떤 구체적인 새노래 라고 무엇을 규정해 버리면 또 그것을 옛노래처럼

자꾸 소유하고 부를려고 하고 모방하고 따라 할려고 자기에게 장착할려고하는 것이 뻔하니까?

 

오히려 오호라 나는 죽었구나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하나님의 영광을 봐 버렸기에

 

새노래를 봤다고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외치는 자가 없잖아요?

그게 새노래입니다.

그러니까 새노래는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 새노래를 불가능성 그 대로

단절된 그대로 누리시면 되는 겁니다.

 

연결 할려고 시도조차 하덜덜 마시고 말입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엣예루살렘은 무너져야 합니다.

무너졌다는 것은 곧 새것의 출현이다는 겁니다.

새예루살렘성의 완성을 보고서

 

슬픔이 삭제가 되는게 아니라 지나가버리듯이 잊혀져는 것은

슬픔이 변하여 희락이 덮쳐버렸기에 그 슬픔을 누릴 시간이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우리는 옛예루살렘이라는 나의 몸의 무너지는 그 터에서

새롭게 세워지는 새예루살렘 새롭게 노래 부르는 새노래를 오히려 듣고 춤추고 화답해야 하기 바쁩니다. 옛예루살렘이 삭제가 아닌 그 허물어진 그 터 위에서

폐허가 된 잿더미 다 타버린 그 옛예루살렘 터에서 오히려 새예루살렘을 보고 기쁘고 아름다운 화관을 보듯이 즐겁게 노래 부르는 겁니다.

 

새색시의 꽃단장의 화관처럼 말입니다.

 

(14:3, 개역)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 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21:1, 개역)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1:2, 개역)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다윗이 밧세바를 취한 그 더러운 몸뚱아리 뜯어고치시던가요?

안됩니다. 그런데 그 터 위에 더한 외설적인 주님의 용서가

말릴수도 없을 정도로 때려부으니

 

춤추고 먹고 마시고 안하고 배기겠습니까?

 

아까 전까지만 해도 눈물로 회개로 금식으로 기도로 하시더니 어찌 먹고 웃고 춤춥니까?

혹시 머리가 이상하게 된 것 아닌지요?

 

안통합니다.

 

그것으로 통하는 줄 알았는데 안통한다 라는 겁니다.

 

안통하는데 어떻게 춤추고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냐 말이죠.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바꿀 필요도 없이

그냥 불가능성이 덮쳐버렸다 라는 겁니다.

 

그 어떤 원인도 없는 결과로써 덮쳐진 새노래 곧 복음인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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