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무화과 나무 잎이 없어도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시도다 (시편 34)

 


(
2:12, 개역)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3:16, 개역)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3:17, 개역)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3:18, 개역)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3:19, 개역)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34:1, 개역)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34:2, 개역) 내 영혼이 여호와로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가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34:3, 개역)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34:4, 개역)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34:5, 개역) 저희가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입었으니 그 얼굴이 영영히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34:6, 개역)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34:7, 개역)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34:8, 개역)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4:9, 개역)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34:10, 개역)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34:11, 개역)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34:12, 개역)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34:13, 개역)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34:14, 개역)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34:15, 개역)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34:16, 개역)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34:17, 개역)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34:18, 개역)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34:19, 개역)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34:20, 개역)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34:21, 개역)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34:22, 개역) 여호와께서 그 종들의 영혼을 구속하시나니 저에게 피하는 자는 다 죄를 받지 아니하리로다

 

 

(삼상 21:1, 개역)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며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삼상 21:2, 개역)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바와 네게 명한 바 일의 아무 것이라도 사람에게 알게 하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여차여차한 곳으로 약정하였나이다

(삼상 21:3, 개역)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든지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삼상 21:4, 개역)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항용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부녀를 가까이만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삼상 21:5, 개역)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안이나 부녀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나의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날 그들의 그릇이 성결치 아니하겠나이까 하매

(삼상 21:6, 개역)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낸 것이더라

(삼상 21:7, 개역) 그 날에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는 도엑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었더라

(삼상 21:8, 개역)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여기 당신의 수중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왕의 일이 급하므로 내가 내 칼과 병기를 가지지 못하였나이다

(삼상 21:9, 개역) 제사장이 가로되 네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든 가지라 여기는 그 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다윗이 가로되 그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삼상 21:10, 개역)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삼상 21:11, 개역)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고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삼상 21:12, 개역)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삼상 21:13, 개역)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삼상 21:14, 개역) 아기스가 그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삼상 21:15, 개역)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오늘 시편 내용은 다윗이 아비멜렉 왕 곧 아기스 왕으로부터 미친자 라고 쫏겨나는 사건을 담은 내용입니다.

 

우리가 노래 하면 단순히 음악적인 의미를 말하고 있지만

정작 정반대입니다.

노래란 사건을 담는 겁니다.

 

즉 사건이 노래로써 표현되었다 라는 것은, 즉 시죠 시

사건이 시로써 표현되었다라는 것은 경험화 될 수 없는

일종의 인간의 손이 닿지 못한다는 불가능성이다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침노 라는 표현을 쓰고 싶은데

왜냐하면 묵시가 역사 속에 침범 할 때 발생하는 것이 사건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들도 이 묵시가 이 땅에 침범한 것을 보고

묵시해석 곧 종말해석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가능성으로 바꾸었다는 말이지요.

 

불가능성인 해석불가인데

묵시를 해석해 버리니까

불가능성이 졸지에 가능성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믿음이 가능해져 버리는 겁니다.

바로 그런 자들을 겨냥해서 사건은 더더욱 전복성 가로지르기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지키는 개념 곧 행함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경험의 영역은 행함이거든요.

 

그럼 불가능성인데 이것이 우리에게 경험화 되는게 아니라

경험화 되면 자신의 육이 자랑이 됩니다.

 

마치 엘리야기 그랬다고 자주 언급했고

모세가 두 번 바위를 치는 식과 같게 됩니다.

경험화 되는게 아니라

 

불가능성으로 누리게 되는 겁니다.

누리는 것과 경험화의 차이가 뭔고 하니

우연성이다는 겁니다.

결국 행함은 반드시 필연화 한다는 겁니다.

 

이 필연성은 지난 시간에 말했듯이 동일화 일치화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게 가능성이 되는 겁니다.

 

개방성이라고 대부분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필연화 즉 예정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인간을 위한 예정이나

인간을 위한 구원은 없다 라는 겁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 오늘 본문의 사건입니다.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가 곧 사울왕을 앞세우고 대표자로 내세우는 이스라엘이

왜 다윗의 구원을 저지하는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다윗을 죽일려고 하는지

다윗을 죽이는 것도 필연화 시키고

이스라엘의 구원도 필연화 시키기 때문에 다윗 죽이기를 하는지를

 

바로 이것이 예수님만 구원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반발작용인

소위 인간들의 종말론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필히 사랑이 아닌

경제로 빠지게 됩니다.

떡을 위해서 말씀을 죽이는 겁니다.

말씀이야 취사선택이고

떡은 자기 목숨을 거는 겁니다.

 

아니 떡, 곧 먹을 것도 안 주는데 어찌 구원이 되겠습니까?

물없는 곳, 양식 없는 곳으로 몰고가는데 그것이 구원 맞습니까?

그런데 떡이라는 이 뫼비우스

마음으로는 말씀을 육으로는 떡

이 뫼비우스의 모순 보다 더 모순 되는 것이 주님의 살과 피라는 겁니다.

 

먹을 것 결국 줍니다. 그런데 도저히 먹기가 불가능한 먹는 것을 초월한 양식

주님의 살과 피를 안 먹으면 또 죽는다는 겁니다.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고 참나

이래 저래 다 불가능한 것 뿐입니다.

 

오죽 하면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끝까지

끝까지 ~~~~~~~~~~ 따라 잡냐 말입니다.

 

썩는 양식을 위해서는 예수님을 임금 삼을 정도이지만

그 정도로 좋아라 하지만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해서는 임금은 고사하고 반드시 죽여버리겠다는 것이

인간의 믿음의 결론입니다.

인간의 믿음은 결국 복수심입니다. 살인의지입니다.

 

교회에 가면 이런 살기가 가장 가득한 곳이라는 겁니다.

살기가 넘쳐요 살기가

막상 그래 죽여라 하면 또 안 죽여요

거룩한 척 해야 하니까

ㅋㅋㅋㅋ

 

예수님만 구원 되는 것이 싫은 겁니다.

나의 구원의 정당성을 반드시 주장하는 겁니다.

이것이 경제이고

인간의 믿음 곧 종말신앙입니다.

 

예수님만 구원 되면 그것이 목적이면

난 뭐가 되냐는 거죠.

 

그러나 복음은 이 예수님만의 구원을 향하여 가는 겁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하는데

사랑은 반드시 인간의 종말신앙이라는 옛노래를 찢는 새노래입니다.

 

그 사랑은 불가능성인데

어라!! 그 어떤 연결점이 없는 단절성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덮쳐버리니까

왜 나의 구원이 쓰잘데기가 없는 이유인지를 알게 되는 겁니다.

 

 

 

즉 불가능성을 누리게 되면(덮쳐져서 누릴 수밖에 없음) 이것은 동일화가 아닌 일치화가 아닌

차이화 단절성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표현은

동일성의 일치성의 표현이 아닙니다.

 

위에서 언급한 두려움과 떨림입니다.
역설적이지요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쫏는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오히려 진짜 사랑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일관 합니다.

맞습니다. 상대방이 달랐던 겁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쫏는다고 했을때에 그 상대방은

힘을 가진자들, 권세자들에 대한 겁니다.

그들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겁니다.

 

그 힘 물론 겁나죠.

그런데 더 큰 두려움과 떨림이 있는데 바로 사랑이다는 겁니다.

 

떡 보다 더 두려운 것은 사랑입니다.

 

죽음 보다 더 두려운 것은 사랑, 십자가의 용서, 곧 불가능성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제대로 두려워 하고 떨어야 한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 떠는 떡에 대한 문제. , 권력, 힘이 아닌

 

사랑을 보고서

말씀을 보고서 떨어야 한다는 겁니다.

 

아무도 두려워하거나 떨지도 않는 그 말씀을 보고 과연 누가 두려워하고 떨겠습니까?

 

이것은 차이화 요 단절성을 느끼는 겁니다.

 

화로하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는 표현이 누가 봐도 단절이 되었다 라는 것을 직시하고

그 어떤 가능성이 없음을 알게 된 겁니다.

 

그러니 벌벌벌 두려워 떠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도다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 피조물이 되었도다 라고

원인 없이 그 결과를 누리게 되는 겁니다.

마치 내 몸에 여호와의 불꽃이 붙은 것처럼 말입니다.

불은 소멸인데 안 소멸되는게

타들어가지 않는게

죽어야 하는데 안 죽는게

말도 안된다는 겁니다.

그 불가능성을 누리는 겁니다.

 

즉 이 단절의 간극을 그 어떤 원인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니 만들수도 없습니다. 불가능하니까요

그런데 가능성으로 바꾸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결국 돈으로 귀결 되는 신비한 이 또한 기가막힌 해석들인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넘어가는 식입니다.

평강이다 평강이다는 말에 다 넘어갈 정도이니까 말입니다.

이 말이 말이 되는, 말 답지

 

어떻게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나무 열매도 없으며

없으며

양도 없고

소도 없고

쫄딱 망했는데

 

실패 뿐인데

절망 뿐인데

낙태 되었는데

죽은자가 되었는데

 

어떻게 그것이 구원이냐 말이죠.

누가 말 되는 것을 버리고

이 말도 안되는 불가능성으로 기뻐하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누가 실패를 절망을 쫄딱 망한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자가 어디있냐 말이죠.

 

그런데 행함의 세계에서는 없는데

믿음의 세게에서는 있다는 겁니다.

말씀의 세계에서는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경 말씀은 말도 안되는 소리만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경 말씀에 풍덩 빠져서 말려들어가야 하는 사건에 휘말려야 하는데

오히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말씀을 우리 쪽으로 당기는 것이

바로 이것이 종교입니다.

왜일까요?

돈 때문이다는 겁니다.

 

이 외설성에 맞서는 것이 참으로 고맙게도

외설 보다 더 외설적인 말씀입니다.

말씀이 쳐들어 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행함은 원인 있는 결과이지만(말이 되는 이해가능성이지만)

그 정반대의 믿음은 원인이 없는 결과로써

말이 안되는 겁니다.

아무리 아무리 따져 보고 따져 봐도 말도 안되는 것이 덮쳐져서

그 어떤 원인이 없이 누리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7번 남 용서하기와, 770번 내가 용서 당하기의 차이입니다.

당하는 것이 누리는 겁니다.

따지고 보면 부정성인 겁니다. 좋은 의미 아닙니다.

그 부정성이 불가능성입니다.

 

그 불가능성과 함께 머무는(즐기는) 겁니다.

가능해서 누리는 것은 없는 겁니다.

그것은 다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는 법이 되거든요. 행함이 되어버리거든요.

결국 가능한 것은 지키는 것 밖에 안되는 겁니다.

지키면 나의 노동의 댓가 곧 보상을 바라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겁니다.

그래서 지지난 시간에 엘리야의 자기열심의 특심을 삭제할 방법은

엘리야에게서는 없는 겁니다.

그 자기열심이라는 말도 안되는 법 우기기, 행함 우기기를 삭제할 수 있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더 외설적인 주님의 열심히 덮쳐져야 하는 겁니다.

엘리야의 열심 보다 더 큰 열심히 덮쳐져야

삭제해서가 아닌

그 허물을 그 어떤 누구도 못 보도록 덮어버리는

예수님의 피

자기 목숨 내어주심이 아니면 안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구원이 옳습니까?

 

나의 구원은 틀렸고, 예수님의 구원만이 옳았다는 겁니다.

예수님만 제발 구원 받으세요 라는 겁니다.

나의 구원과 함께 일치되는게 아니라 말입니다.

 

지난 시간의 내용을 어머니와 나누면서

하박국 선지자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여호와의 목소리 곧 노래가 잉태에서 노래 불려지는게 아니라, 덮쳐지는게 아니라.

오히려 낙태 속에서 여호와의 노래가 펼쳐지는 겁니다. 이것이 불가능서인 거죠.

말도 안되는 거죠.

두려움과 떨림 즉 쫄딱 망하고. 실패한 속에서 불려지는 겁니다.

아니 벙어리가 된 것은 이제는 노래 불가능한데

오히려 벙어리가 되니까 비로소 새노래를 부르게 되는 겁니다.

그럼 남들이 따라 부를수 있는가? 불가능하죠

그 불가능성 그대로 그 자체로 두면서 새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그러니 새노래는 사건입니다.

묵시 사건 보다 더 외설적인 묵시의 묵시 사건인 십자가 말입니다.

종말의 종말 말입니다.

그냥 종말은 묵시를 말하면서도 십자가만 반칙으로 빼버립니다.

얼마나 외설적입니까?

그런 유대인에게 그 반칙 그 외설에 더 외설적인

십자가 라는 걸림돌을 반드시 집어넣음으로써

인간의 종말 또한 깨뜨리는 식입니다.

아무도 넘어갈수 없도록 걸려 넘어뜨리는 실족케 하는 십자가로써 말입니다.

그럼 넘어갈 필요가 없는데 기여이 구원은 탐나고

천국은 가야 되겠고

그런데 십자가에 다 걸려 넘어지니까

그 십자가를 빼버리는

걸림돌을 빼버리는 식이 되는 겁니다.

외설 보다 더 큰 외설에 말려들 수 밖에 없는 거죠.

 

나의 구원을 위해

나의 영생을 위해

걸림돌인 방해꺼리인 예수님을 죽이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그 걸림돌인 십자가가

그 하나님의 저주가 사실상 나를 구원하기 위한

예수님의 자기 몸 내어주신 사랑이였다는 것

 

나의 구원은

인간은 구원은 끝까지 가능성 곧 떡으로만 귀결되는 식이지만

내 열심히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나이다. 라는 종말에만 머물지만

 

예수님의 구원은

그런 악마에게서 한 치도 못 벗어나는 인간에게

십자가의 용서가 뭔지를 보여줌으로써 불가능한 것을 더욱더 불가능하게 하는

사랑으로만 귀결 되도록 만들어 버리신 겁니다.

종말의 종말입니다.

 

돈도 안되고

떡도 안되고

구원도 안되고

말 도 안되고

 

누가 귀히 여기겠습니까?

 

아무도 귀히 여길자가 없기에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겁니다.

귀히 여기게 되는 불가능성이 덮쳤다는 겁니다.

내가 귀히 여기게 된 나의 깨달음 나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내가 남을 7번 용서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770번 남으로부터 용서 받아야 할 판국에 놓여지게 함으로써

성령 때문에 귀히 여기게 되는 겁니다.

나는 추호도 귀히 여길 마음이 여전히 없는데

문뜩 문뜩 성령이 간섭하는 겁니다.

이 관계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누가 이 관계를 원할까요?

부부만이 됩니다.

 

그러나 종은 안됩니다.

종은 자기 노동의 댓가만을 바라기 때문에

돈으로만 귀결 되고

 

부부 곧 자유하는 여자는

돈이 아닌

사랑 없으면 죽습니다.

 

그렇다면 하박국 선지자가 말한 부흥이란 곧 심판의 날인데

그 심판의 날이 곧 구원의 날이라고 노래 부르는 겁니다.

 

떡으로 귀결 되는 그 세상이 끝을 보는 날

오로지 사랑으로만 귀결되는 종말의 종말의 날
? 사랑 보다 더 폭력적인 것은 없기 때문에

죽음(폭력) 보다 더 폭력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이 날을 성령 때문에 고대하게 되는 겁니다.

 

[심판의 날]이 아닌 날은, 구원의 날이 아닐뿐더러 새노래가 아닌 거죠.

결국 하박국 선지자가 부른 노래가 새노래 이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사건을 선취하니까 말입니다.

사랑의 완성

다 이루었도다 라는

사랑으로 귀결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믿음은 인간의 종말신앙은 이상하게도

돈으로 귀결 된다는 점입니다.

종말 때이면 오히려 종말이 돈벌이가 되는 겁니다.

거짓선지자의 대거 출현이 이상하게도

사랑으로 귀결 되는 법이 없고

그들의 사랑 조차도 평강이다 평강이다

? 복받은 인간이니까 곧 돈 이니까

평강인데 구원도 평강 곧 돈인데

 

정작 실상은 쫄딱 망하는 것이 구원이였던 겁니다.

 

누가 믿겠습니까? 인간의 믿음, 인간의 종말신앙을 다 피해가는

단절 불가능성인데!!!

 

무화과 나무 잎이 말라 비틀어 무성치 못하고

포도 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식물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 소가 없어도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난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 하리라

 

이것이 가능성의 노래 입니까?

불가능성의 노래입니까?

 

그럼에도 그 불가능성이 덮쳐버리는 겁니다.

노래가 도저히 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남을 7번 용서하듯이 내가 노래 하는게 아니라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노래가 불가능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불가능성이 덮쳐져서

저런 철저하게 단절된 상황인데 770번의 용서가 덮쳐져서

노래 아니 부르고는 못 배기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노래가 될 수 없는 노래가 진짜 노래 새노래이다는 겁니다.

노래로 부를 수 없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그 노래가

새노래 곧 구원의 노래인 복음인 겁니다.

 

안 기쁜데 기쁜소식이다는 거죠.

이 간극이 바로 복음입니다.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또는 꼬끼오 X 3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시잖습니까? X 3

라는 새노래는 과연 그 사건의 상황이 가능한 상황에서입니까?

아니면 불가능한 상황입니까?

 

이것이 불가능성의 노래로써 덮쳐지는 겁니다. 이것이 새 노래입니다.

기존의 노래를 파괴하면서 나오는 노래이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시편 34편의 구원 곧 새노래는 어떻게 벌어지는 사건입니까?

먼저 사건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사건이란 무엇인가?

 

새노래는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반드시 구원의 사건입니다.

그 구원의 사건은 불가능성의 사건이지

말이 되는 사건이 아닙니다.

 

말도 안되는 사건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없음]에서 구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구원은 이해가 안되는 사건입니다.

말이 안되는 겁니다.

이해가 되는 사건은 구원사건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있음]의 구원은 구원이 아니다는 거죠.

말이 되고, 이해 가능하고, 단절이 아닌 소통 공유 유비쿼터적이고, 개방적인 구원은

또는 개방적인 성령은 가짜다. 지난 시간에 바로 그것이 옛노래이다. 그것을 깨는 방식이

새노래이다. 라는 겁니다.

가짜 구원관이 예수님 당시의 마귀가 심은 메시아관 아닙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믿음을 주는게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주여 누가 그럼 구원 얻겠습니까?

누가 과연 믿겠습니까?

믿음의 달인들 조차도 다 탈락 단절 되는

그 상황을 정작 예수님의 제자들이 격게 되니까 하는 소리입니다.

그 정도로 불가능의 불가능성인 불가능성의 이중성(무한반복)이다는 겁니다.

 

이해가 불가능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덮쳐지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예수님만의 공로로 말입니다.

 

아 그럼 이해가 되고, 불가능성에서 가능성으로 바뀌어져서 이해가능하게 되는구나?

아닙니다.

 

믿음(불가능성)에서 믿음(불가능성)으로 되지,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3:28, 개역)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14:23, 개역)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행함에서 믿음으로

믿음에서 행함으로 되지 않는 겁니다.

 

덮쳐지는 것인데 불가능성 그대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덮쳐지는 겁니다.

가능해서 이해되는게 아니라

불가능 그자체로써 이상하게 믿겨지는 겁니다.

왜 믿게 된 것인지는 여전히 이해 불가입니다.

아무리 따져봐도 말도 안되기는 마찬가지이거든요.

아무리 설명하고 분석하고 남들에게 이야기 해 봐도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를 이해가 안될 정도인 겁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아닙니까?

 

제가 몇주 전에 그 유명한 십계 라는 영화를 다운받게 되어서

대충 한번 봤는데

홍해 가르는 사건을 봤습니다.

 

저는 그 홍해 사건을 영화 십계를 보면서

은혜가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저에게 이상한 반응이 저도 모르게 툭 하고 튀어나오는 겁니다.

 

어떤 반응인고 하니

 

말도 안된다고!! 연거푸 이런 말을 내 뱉는 겁니다.

그러면서 다 보더라 말이지요

 

이무리 봐도 말이 안되는 겁니다.

 

근데 저만 그런게 아니라

그 영화 장면의 배우들 즉 이스라엘 역할을 하는 그 자들도 말도 안된다고 하더라 말이죠.

 

그래 놓고 언제 그랬냐는 둥 감사합니다 라고 노래 부르더라 말이죠.

 

결국 새노래는 반드시 불평불만을 끌어안고 나오는 노래이지 곧 구원이지

구원은 우리의 불평불만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일치 동일시 되어서 나오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저는 그 부분에서 아 이것은 죄인과 의사의 불가능한 조우 만남이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둘 사이의 간극이 있습니다.

아무리 합체 크로스 세례 연합이 된다고 해도

그 간극이 있는데 이것이 불가능성이다는 겁니다.

 

모세가 떨기나무의 불꽃으로 여호와가 나타나는데

이상하게 타들어가야 불꽃이 유지가 되는데

 

타들어가지도 않는데 불꽃에 강렬하게 튀더라 말입니다.

즉 이 나무와 불 사이의 간극이 있을 수 없는데

오히려 그 간극 그 경계선이 명료하게 드러나더라 말이죠.

그것도 불가능성으로써 말입니다.

 

이것을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은 기적으로 봤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기적으로 해석한 순간

걸림돌에 넘어지는 겁니다.

기적을 긍정화 했기에 기적이거든요.

 

그것을 누가 걸림돌로 해석하겠습니까?

즉 누가 부정성으로 해석하겠습니까?

즉 누가 불가능성으로 해석하겠습니까?

 

기적이란 이미 가능성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적이 아닌 걸림돌로 해석하게 된다면

물론 그렇게 해석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성령이 비로소 알려줘서 알게 된 것이지

그 불가능성인 걸림돌 그 자체로

그 어떤 연결점이 없는 단절성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백번 만번

화로다 나는 망해도 마땅하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이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못 벗어나는 구나

 

?

여호와의 구원을 제대로 봤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봐 버렸기 때문에

 

망했구나

단절 되었구나

불가능성이구나

 

그런데 이것이

구원이구나

 

아니 무슨 원인도 없이 구원이라는 결과가 덮쳤냐 말이죠.

 

그러니 구원 조차도 사실상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는 겁니다.

불가능성이다는 겁니다.

 

정말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는 겁니다.

 

결국 복음이란 이 말도 안되는 소리를 즐기는 겁니다.

여호와의 목소리가 잉태 생산이 아니라

소출이 없는 낙태를 통해서

비로소 여호와의 목소리

그 구원의 소리

새노래인 복음을 듣게 된다는 겁니다.

 

다윗은 오늘 시편 34편에 아비멜렉 왕에게 미친 사람의 연기를 함으로써

쫏겨나게 되는 사건입니다.

 

아비멜렉왕 곧 사무엘상 21장에서는 아기스 왕입니다. 같은 사람입니다. 이름이 보통 몇 개 되고 또는 여러 나라 말로 불리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구원의 사건과 연관이 되냐 말이죠.

그냥 일반 평범한 사건 아니냐 말이죠.

 

미친갱이 역할을 해서 잠시 그 상황을 모면한 사건?

이게 무슨 구원 사건입니까?

 

구원사건이라는 것은 곧 예수님과 연관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로부터 바알세불 걸린 대마왕 마귀의 왕중의 왕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바라는 구원 기적과 안 맞다는 겁니다.

기적이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과 맞아 일치해야 하는데

우리의 기적관과 안 맞으니까 귀신이 들려서 귀신을 쫏아낸다고 합니다.

 

귀신이 들려서 귀신을 쫏아내면

귀신이 쫏겨나야 할까요?

아니면 귀신이 쫏겨나지 않아야 할까요?

 

결국 유대인들도 예수님에게 말도 안되는 소리를 했던 겁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말도 안되는 기적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말이 되는 기적을 보야 줘야 하는데

말도 안되는 기적을 보여주니까

그에 대한 반작용 곧 원한, 한풀이, 시기심, 적개심, 살인의지가 벌어진 겁니다.

 

마치 형 가인 앞에서 의도적으로 아벨의 제사를 칭찬하니까

가인은 안색이 변할 수 밖에 없도록 유발하시는 것처럼

이 둘의 간극 벌리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 두 명의 가족사 형 아우의 관계를

우주로 확대해서 천국과 지옥의 성향으로 재생산하고 확대 하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말이 안된다면 우리는 이런 영향에서 벗어나거나

이 상황의 바깥 외부에서 시선을 가지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깥은커녕 철저하게 갇힌 입장에 놓여져 있으니

해석은커녕 비판은커녕 당장 살려달라고 해야 할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그런 이유로 인간들은 마귀를 거칠수가 없습니다.

마귀를 거치지 않는데 어떻게 예수님께 바로 갈 수가 있냐 말이죠.

십자가 사건은

곧 구원의 사건은 바로 이런 마귀성 악마성을 도출하는 가운데

그 배경 빽그라운드로 깔고서 등장하는 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긍휼을 바래야 할 입장이지

마땅히 구원을 이룰수 있다고 여기면 안된다는 겁니다.

즉 심판이 마땅함을 직시해야 할 판국인 겁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것은 심판 속에서 구원이기에 말도 안되는 소리인

그 불가능성의 간극을 보는 것이고

 

행함에서 행함으로 이르는 것은 심판이 아닌 가능성에서의 구원이기에

정작 빛나야 하는 것은 자신의 구원만을 쳐다봐야만 하는 입장 뿐인 겁니다.

그러니 불가능성의 간극이 보일 리가 없지요.

오히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또는 더 나은 제사를 드린 아벨의 제사가 의식 될 뿐이기에 살인을 하는 겁니다.

안죽이고는 못배기고

 

반대로 불가능성의 간극을 보는 자는 도리어 죽임을 당해 버리니까

살인자의 시선에서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고 ? 웃끼고 있네

내가 죽여버렸는데 어떻게 이을래? 라는

마귀들의 공통된 활약상이 담겨져서

 

도리어 행함 자제가 아예 없이 믿음에 맡겨지는 경우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아벨은 예수님만 쳐다볼 수밖에 없는 거죠.

자기로써는 안되니까

자기로써는 형 가인의 말마따나 죽임 당해 버렸는데

그 어떤 행동이 나와야 잇기를 하거나 일치성 동일성 개방 연결 소통이 되겠냐 말이죠.

 

오히려 단절이 되게 가인이 도와주니까

시간적인 1234의 순서로 안되는데

불가능한데

수천년 뒤의 예수님의 믿음이

그의 제사 곧 아벨의 제사를 일방적으로 편애해서

아벨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화목제사 때문에

그 불가능성이 덮쳐져서 벌어진 사건이 되어버린 겁니다.

아벨에게는 이렇게 믿음이 뒤에서 덮쳐진 사건으로 불가능한 주님의 편파해석이 되었고

 

반대로 가인의 제사는 철저하게 시간에 갇혀서

절대로 믿음의 제사란 있을수 없어

오로지 행함의 제사 뿐이다 라고

믿음의 결과물을 지워버리면 그만이니

자신의 제사만을 남기게 되니까

 

제대로 말려들게 되는 겁니다. 불가능성에 말려드는 거죠.

 

똑같습니다.

 

다윗이 뭘해도 편애를 받으니까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사건을 역으로 역사를 거꾸로 올라가서

미친놈 행세로 취급받으면서 까지

예수님의 자유를 보여주는 겁니다.

 

다윗이 원래 자유한 자가 아닌데

예수님의 자유가 덮쳐지니까

이스라엘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미친척 하는 자유도 누리는 겁니다.

사건 자체를 누릴 수밖에 없도록

십자가 사건을 역으로 재현하는 식이다는 겁니다.

 

그럼 이런 구원사건 곧 십자가 사건에 상대적인

인간들의 가짜구원사건은 어떻게 상대적으로 벌어집니까?

마치 가인처럼 억지로 아벨을 죽이면서 까지 행함의 제사를 사수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면서 까지 자신들의 가짜 메시아관

가짜 성전관, 가짜 노래. 옛노래, 옛것을 어떻게 사수하느냐 하면

 

바로 사울왕의 활동을 통해서 볼수 있습니다.

사울왕은 결국 제대로 말려드는 겁니다.

 

제가 이 부분을 잊지 못할 정도로 중요한 질문을 건희아빠를 통해서 받게 되었는데

자극이 되어서 남아 있게 되었나 봅니다.

 

물론 설명 제대로 못했고

나는 신나했지만

그 당시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 사무엘상 21장 사건은

사울 왕으로부터 쫏기는 상황에서

도망치다가 아비멜렉 왕을 거쳐서 또 다른 곳으로 계속 도망치는 상황 중에

미친갱이로 변한 다윗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왜 이 아주 미약한 부분이 하나의 처세술로써 끝나버리면 되는 일을

십자가의 사건

곧 구원의 사건과 연관 시키느냐 하는 점에서

시편에 왜 기록이 되었냐 하는 겁니다.

 

건희아빠의 물음은 딴게 아니라

설교를 듣고

하나님은 다윗을 이런식으로 사울왕으로부터 보호를 하는데

보호를 할려면 이스라엘 내부에서 하시지

도리어 적군인 이방나라로부터 보호를 하고

또 더 이상한 것은 다윗은 이스라엘을 돕는게 아니라

이들 이방나라를 도와서 이스라엘을 물리치는 식의 전쟁을 벌려

다윗이 승리케 하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겁니다.

2223장 뒤로 가면 그런 내용들입니다. 삼상(사무엘상)

 

제가 답하기를 이 땅의 판을 이스라엘 그리고 적국 이방나라로 볼게 아니라

정반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원수 물론 적국 이방나라도 하나님의 원수

그럼 도대체 아군은 누구냐?

다윗 혼자 라는 겁니다.

 

그럼 다윗이 가는 곳에서만 참이스라엘의 속성이 벌어지고

다윗이 없는 이스라엘은 아무리 이스라엘의 껍데기를 가져도

사울왕과 같은 속성만을 표출하게 된다는 겁니다.

물론 다윗을 도우는 요나단 등등은 당연히 다윗중심으로 편성되었다는 것을 알죠.

 

이것이 자유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런데 우리는 진리의 유동적인 흐름을 안 보고

 

고정화된 틀에서 진리가 아닌, 임의로 부는 바람이 아닌, 불가능성이 아닌

자꾸 가능성을 가능하기에 해석하고자 한다는 겁니다.

해석 불가인데

믿고픈 것만 믿을려고 하기 때문에

믿음이 아닌 행함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마귀가 너무 너무 우리의 속성을 잘 알기에

예수님의 3가지 마귀 시험을 통해서

어떻게 믿음의 달인들인 유대인들까지 마귀가 어떻게 장악했는지를

그 내용을 통해서 잘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거기서 벗어날 인간이 있다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소돔과 고모라에 믿는자 단 한명이라도 있다면

아브라함! 곧 그렇게 묻고 있는 아브라함 본인도 믿음이 있다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멸망하시는 이유는 믿음이 단 한 사람도 없어서가 아닌

그건 소극적인 방법이고

 

멸망하심으로써 믿음이 단 한사람도 없도록 하나님이 조치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 곧 구원을 펼치신다는 것이

적극적인 의미이다는 겁니다.

곧 구원은 심판 속에서 단절 속에서

단 한 명도 없음 속에서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도 감사하게도

우리 에게서는 단 한 사람도 믿음이 있는 자가 없다 라는 절망 때문에

에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 되는 겁니다.

 

단 한 명의 사람이라도 믿음이 있다면

예수님이 구지 오실 이유도 없고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도 없고

엘리야가 모세가 갑자기 수천년 만에 나타나서

예수님 죽어 주시옵소서 라고 딱 한마디 남기고 갈 이유도 없다 라는 겁니다.

 

안되기 떄문에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불가능성을

불가능성 그대로

그 자체로 덮쳐져서

안믿기는 마찬가지인데

믿어지는 것은

믿는 내가 아닌

불가능한 믿음인 예수님(불가능한) 때문이다는 겁니다.

? 예수님은 믿을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없는 불가능성이기 때문입니다.

 

저번에 말했지요

하나님도

여호와도

다 믿는게 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

곧 여호와의 이름을 믿는 것은

믿음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

 

그래서인지 이스라엘 중에 그저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이사야가 갑자기 불가능성 곧 여호와의 영광이 덮쳐지니까

 

전혀 다른 고백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그런데 졸지에 이사야는 그 이후로부터 자기가 평생을 생각했던 이스라엘을 겨냥해서

싸우기 시작하는 겁니다.

 

오로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던 자가

도리어 이스라엘의 심판만을 위해 싸우는 자가 된 겁니다.

믿음이 덮치니까 말입니다.

 

적국과 안 싸우고

 

똑같습니다.

 

다윗은 졸지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예수님

곧 십자가 사건을 위해 동원이 되고

 

사울왕은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 다윗 하나 죽일려고 나서는 겁니다.

 

여기서 다윗을 주님께서 보호하시는데 있어서

이방을 통해서 보호하는 일종의 탁란을 하시는 입장이고

 

반대로 사울왕은 이스라엘 군사를 통해서 전쟁을 하는데 이방나라에게 깨지는데

그 이방나라의 승리의 장군이 다윗이라는 것에서

간따나 미쳤는데 더 미치도록

강퍅케 만드시는 겁니다.

 

과연 누가 미쳤느냐 말이죠?

아니 다윗은 미치는 자유라도 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사울왕은 진짜 미치지 않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믿음이 벌리신 이런 일을 믿어야 할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믿어야 한다고 하니까 가능한 줄 아는데

불가능하기에 그 불가능성의 간극(단절)을 직시하는 겁니다.
즉 불가능성을 누리는 겁니다.


오히려 주님을 더 두렵워하고 벌벌 떠는

? 이 불가능성이 덮쳐야만 하는가를 누리는 겁니다.

그 이유 없는 재앙은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로 귀결 되는 겁니다.
그러니 예 뿐이고 아니오가 없는 겁니다.


이 말씀도 결국 불가능성이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말도 안되는 것을 성도는 누리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가능해서가 아닌 불가능성 그 자체로 말입니다.

 

그것을 보자, 그 십자가를 보고 나서는 그 불가능성을 보임 당하고서는

욥은 밤새도록 긁어 대면서 살려달라고 했던 입을 부끄러워 하며

재를 뿌리고 자기 생일을 저주 하면서

다시는 고쳐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더 큰 외설을 만나 버렸거든요.
나의 병고침 따위는 부조리 였으며 그 부조리 축에도 끼이지 못할 정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봐 버렸던 겁니다.

더 나은 외설 말입니다. 스캔들. 불륜의 사랑

법 보다 더 한 법

곧 사랑의 법입니다.

 

(13:8, 개역)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13:10, 개역)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삼상 27:1, 개역)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삼상 27:2, 개역) 일어나 함께 있는 육백 인으로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삼상 27:3, 개역)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각기 가족을 거느리고 가드에서 아기스와 동거하였는데 다윗이 그 두 아내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 되었던 갈멜 여자 아비가일과 함께 하였더니

(삼상 27:4, 개역)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

(삼상 27:5, 개역)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께 은혜를 받았거든 지방 성읍 중 한 곳을 주어 나로 거하게 하소서 당신의 종이 어찌 당신과 함께 왕도에 거하리이까

(삼상 27:6, 개역)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삼상 27:7, 개역) 다윗이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거한 날 수는 일년 넉달이었더라

(삼상 27:8, 개역)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거민이라

(삼상 27:9, 개역)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 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약대와 의복을 취하고 돌아와서 아기스에게 이르매

(삼상 27:10, 개역) 아기스가 가로되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다윗이 가로되 유다 남방과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과 겐 사람의 남방이니이다

(삼상 27:11, 개역) 다윗이 그 남녀를 살려 가드로 데려가지 아니한 것은 그의 생각에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다윗의 행사가 이러하여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거하는 동안에 이같이 행하는 습관이 있다 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삼상 27:12, 개역)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하였으니 그는 영영히 내 사역자가 되리라 하니라

 

이것을 예수님의 활동에 비춰서 보면

정작 율법와 성전을 사수하고 있는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고

(예수님이 오히려 자꾸 깨짝 깨작 열받도록 속을 긁어대니까 말입니다. 강퍅케)

 

반대로 예수님은 이방인과 죄인과 강도와 세리와 창녀

특히 사마리아인

이들과 짝짝꿍이 되어서 (이들은 전혀 원한 적도 없는데)

 

오히려 유대인들과 특히 신앙 기득권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싸워서 대승을 거두니까

 

더더욱 바리새인들은 열받게 되는 겁니다.

 

자 그러니 유대인이 생각했던 구원은 말이 되는 구원으로 믿어버렸기 때문에

그들은 이 불가능한 구원 곧 걸림돌 거리끼는 돌에 부딧히게 된 겁니다.

 

자신들의 말도 안되는 외설성에 오히려 더 심한 예수님의 외설에 걸려 넘어지게 된 겁니다.

 

? 우리는 자꾸 법으로 만드는 것일까요.

신앙도 행함도 믿음도 내열심도 심지어 십자가도 용서도, 사랑도 법으로 만드는 것일까요?

 

즉 행함으로 만드냐

가능성으로 만드냐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더 기가막힙니다. 그것도 사랑이냐 라고 깨작 깨작 하는 남을 용서하는 7번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770번의 사랑을 더 외설적으로 펼치니

손 놓으라 라는 겁니다.

왜 우리는 그것을 행함, 곧 법으로 만드느냐 하면

사랑이 없기에

곧 죽을까 싶어서

돈으로 만들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먹는 것으로만 보이는 겁니다.

나를 옳게 보이고자 하는 짖 외에는 인간은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던 겁니다.

 

구원은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이나

그 누구에게나

말도 안되는 불가능성 그 자체인데

왜 유대인들 본인들 만큼은 다르다고 차이와 간극을

왜 당해야 하는데

도리어 자기가 자신들 손으로 벌려 놓느냐 하는 점이냐 말이죠.

 

오늘날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카톨릭인 거죠. 즉 과거의 유대교인 겁니다.

불교죠 교리 플러스 실천입니다.

 

그 이유를 어떤 철학자들을 통해서 보니까

결국은 돈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단순한 돈이 아닙니다.

 

떡입니다.

 

먹지 않으면 사냐 말이죠

 

문제는 먹긴 먹돼 독약을 먹어서 문제인 겁니다.

뱀을 달라 하고

독을 달라고 하니 문제인 겁니다.

 

주님은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는데

아무도 두드리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는다 라는 겁니다.

 

결국 인간의 믿음은 떡으로 귀결이 됩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예수님의 믿음은 오로지 십자가의 죽음으로만 귀결이 된다는 점에서

인간의 믿음은 절대로 십자가를 믿을수 없는 단절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더욱 우리 또한 남의 일이 아닌

그런 유대인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다 라는 겁니다.

 

이 뫼비우스의 띠에서 벗어나는 길은

떡이 아닌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 라는 말씀 뿐입니다.

 

곧 말씀은 사랑이다 라는 겁니다.

 

사랑

 

말도 안되는 불가능입니다.

 

나 같은 놈에게 용서를 베푸신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푸시는 그 사랑 때문에

 

아무리 우리가 미친놈 취급을 받고

마귀라고 사람들로부터 취급 당해도

 

그렇게 말하는 그들은 결국 돈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고

 

우리 또한 그 속에서 말도 안되게 건짐 받아서

마음은 늘 저 쪽에 떡에 가 있지만

 

절대로 그 마음을 버린 적도 없지만

 

더 크나 큰 말씀이 떡 보다 강해져 버려서

 

생산력이나

소유물이나

정신 멀쩡한 가운데 있어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는게 아니라

 

아무런 소출이 없어도

생산력 단절 되어도

 

오로지 이 불가능성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라는

 

이 불가능성을

이 말도 안되는 것에

 

우리는 예수님의 운명처럼 덮쳐진 겁니다.

 

죄인과 구원자의 불가능한 만남

환자와 의사와의 조우입니다.

 

허물을 완벽하게 제거함이 아닌

허물이 도저히 안보이도록 더 뚜겁고 말도 안되는 피로 덮어버려서

찾을래야 찾을수 없는 이것 또한 말이 안되겠끔

모든 허물을 덮어버렸다 라는 겁니다.

 

이 아니 기쁘고 못 배기는 거죠.

 

왕이시여 미쳤나요?

어찌 좀 전까지만 해도 눈물로 기도로 금식으로 회개로 하시더니

왜 지금은 먹고 마시고 춤추며 노래 부르십니까?

 

그것은 연결의 의미가 아닌

단절의 의미이다. 라는 겁니다.

불가능성이 덮쳐 버렸다 라는 겁니다.

 

혹시나 눈물 기도 금식 회개로 살려주실줄 알았는데

안 통하는 줄 알았다. 그것은 택도 없는 썩은 동앗줄이였다 라는 겁니다.

 

그 단절성

 

그 불가능성이 도리어

 

내가 아이를 살리는 구원이 아니라
(남들은 다 버려도 저는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에라이 니가 제일 먼저 버린단다)

사랑은 다윗에게 있으면 안됩니다.

사랑은 베드로에게 있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귀결되는 것이지

십자가로 귀결이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아이가 죽으면서 죽은 나를 살리는 방식인

십자가의 사랑이였다 라는 것을

 

내가 믿음의 조상이 아니라

이삭의 믿음(희생 제물 됨)이 이런 우상의 조상인 나를 변하게(빼내는 구출) 만드는 희생제물이였다 라는 것을

 

입이 있는 사람이 아닌

돌들이 새노래 부른다 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새노래 곧 구원을 노래한다는 것을

 

도리어 내가 믿어햐 할 판국에 놓여졌다 라는 겁니다.

 

그 동안 믿고픈 것만 골라서 믿었고

가능했던 것만 골라 믿었는데

 

정작 진짜 믿음은 그런 나의 믿음이 아예 통하지 않는 그 믿음이

덮쳐져서 그 불가능한 단절 속에서 이루시는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았다 라고 다윗이 고백하는 겁니다.

 

믿음도 일종의 인간의 소유물로 전락이 되다 보니

불가능한게 아니라

저 놈이 하면 나도 한다는 식이 되어버리니

 

소위 믿음 학원처럼 천국 학원처럼 우후죽순으로 돈벌이가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럼 진짜 믿음은 정반대의 길로 가야지요

너가 동 하면 나는 서 하리라처럼 말입니다.

 

아무도 애굽을 마다할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반대로 가서

그 애굽을 가만히 두는게 아니라

결국 쳐 내는 겁니다.

 

구원이라는 사건은 그렇게 벌어지는 겁니다.

 

다윗이 미친척 하는 그 자유는

정작 진짜로 미쳐있는 세상을

이 불가능한 구원의 사건에 동원이 되는 배경으로 삼는 겁니다.

 

어떻게 미쳐있을까요?

간단 합니다.

 

떡입니다.

 

떡에 다들 미쳐있는 세상입니다.

구원도 결국 돈으로 계산이 되는 세상입니다.

 

감사하게도 거기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나는 우리가

예수님의 믿음으로 인해

그 불가능한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부자청년이 자신의 소유를 버린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게 아닙니다.

이미 그에게는 주님이 믿음을 준적이 없는데

자신의 믿음으로 소유한 구원을 어떻게 버리느냐 말이죠.

자신의 믿음을 버리는 것이고, 자신의 구원을 버리는 행동이기 때문에 못 버리는 겁니다.

주님의 새믿음이 헌믿음 보다 아무리 봐도 안믿겨지거든요.

자신의 소유가 더 든든한 겁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을 던지시는 겁니다.

과연 가능성을 그가 포기할 리가 있겠냐 말이죠.

 

불가능이란 예수님 자신의 영광이지

우리의 영광이 아닌 겁니다.

그러니 나의 구원을 바란다는 자체가

말도 안되는 소리인데

 

그 외설에 그 불법에

더 더 더 심한 불법과 외설로써

구원 받을 가치도 없는 나를 구원하시겠다고 자신의 살과 피를

떡 대신에 주겠다는 엽기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겁니다.

기적 보고 따르던 많은 사람들 그 말에 다 떨어져 나가버리는 겁니다.

아랑곳 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마저도 왜 너희들도 가지 왜 안가니?

아쉬울게 없으신 주님인 겁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벌리시니까 말입니다.

왜 우리는 우리 영광은 안되고

예수님은 예수님 자기를 위한 자기우상적인 발언만을 하십니까?

 

그 더 나은 외설성이 아니면

마귀가 심은 메시아 구원관을 무슨 수로 뽑아내냐 말이죠.

그러니 마귀만은 겨냥한 사건인데

인간들까지 다 말려드는 겁니다.

안 말려드는 인간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이런 간섭 얼마나 감사합니까?

 

애굽으로부터 탈출하는 사건은

우리의 요청도 아닌

 

오로지 예수님 자신만의 사건입니다.

그 불가능한 사건이

 

탈출하고픈 마음이 전혀 생긴 적도 없는데

말도 안되게 벌어지는 겁니다.

 

우리가 답답해서가 아닌

예수님이 답답해서

 

돈에 미쳐있는 세상

떡에 미쳐있는 세상

모든 인간이 미쳐있는 세상에서

 

그런 지옥에 있는 꼴이

주님 혼자만 답답해서 이 구원의 사건을 벌리시는 겁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말입니다.

 

나의 두렵과 떨림이 아니라

나야 돈이 없으면 두려워 떨 뿐이지

힘없으면 두려워 떨 뿐이지

말씀(관계)이 없다고 두렵고 떠는 자는 없습니다.

말씀 없다고 죽는자 없습니다. 떡 없으면 죽는다고 난리를 치지만 말입니다.

사랑 없다고 난리를 치고 두려워 떠는 자 없습니다.

화목제 없다고 두려워 떠는 자가 없다는 겁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그런데 돌들이 소리 지르는 겁니다. 새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고맙게도 말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울부짖습니다.

꼬끼오 라고

 

번뜩 귀 기우리게 만드시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이 두렵고 떨림으로 외친 그 외침으로 그 목소리로 다 이루신 겁니다.

 

곧 자기 몸 버리는 사랑(두려움과 떨림, 떡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아야 하기에) 때문에

 

안 벌어지고는 못 배기는 불가능성의 사랑이

 

바로 구원 사건입니다.

 

무화고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으며 ~~

감람나무 열매 그치고 논밭에 식물이 없어도

우리에 양떼가 없으며 외양간 송아지 없어도

 

떡 없이도 난 여호와로 두려워하리

떡 없이도 난 여호와로 벌벌 덜덜덜 떨리

 

난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 하리라

 

 

이런 말도 안되는 노래를 나도 모르게 외치도록 만드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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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77일 오후 1:57 ·

 

부정의 부정 (외설 보다 더 외설적인)

 

바리새인들로 부터 바알세불 걸린 대마왕이라는 소리를 못 듣는 자는 구원자가 아니다.

 

(12:24, 개역)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마귀로 부터 마귀라고 취급받아야 그것이 진짜 선한 분이시다.

 

성도 또한 마귀들에게 마귀 소리 듣는 자가 진짜 성도이다.

 

(5:2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것이 마귀를 거쳐서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보게 하시는 방식이다.

마귀를 거치지 않는 예수는 가짜다.

 

그러나 가타부타 오늘날 현대인에게는 마귀 그 자체는 없다.

 

물론 예수는 있다. 자기투사 이니까

그런 우상은 새고 쌧지만

이상하게 마귀는 없는 세상이다.

 

단 돈벌이용으로 퇴마사(목사, 땡중, 의사)가 자본주의 아래에서 쪼매 언급될 뿐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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