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일(정치)과 하나님의 일(정치) (시편35)

 

사람의 다툼(영광)과 하나님의 다툼(영광)

 


(
16:23, 개역)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8:33, 개역)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35: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35:2, 개역)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

(35:3, 개역) 창을 빼사 나를 쫓는 자의 길을 막으시고 또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35:4, 개역) 내 생명을 찾는 자로 부끄러워 수치를 당케 하시며 나를 상해하려 하는 자로 물러가 낭패케 하소서

(35:5, 개역) 저희로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시고 여호와의 사자로 몰아내소서

(35:6, 개역) 저희 길을 어둡고 미끄럽게 하시고 여호와의 사자로 저희를 따르게 하소서

(35:7, 개역) 저희가 무고히 나를 잡으려고 그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무고히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

(35:8, 개역) 멸망으로 졸지에 저에게 임하게 하시며 그 숨긴 그물에 스스로 잡히게 하시며 멸망 중에 떨어지게 하소서

(35:9, 개역)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

(35:10, 개역) 내 모든 뼈가 이르기를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요 그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라 하리로다

(35:11, 개역) 불의한 증인이 일어나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일로 내게 힐문하며

(35:12, 개역)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35:13, 개역) 나는 저희가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35:14, 개역) 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 같이 저희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굽히고 슬퍼하기를 모친을 곡함 같이 하였도다

(35:15, 개역) 오직 내가 환난을 당하매 저희가 기뻐하여 서로 모임이여 비류가 나의 알지 못하는 중에 모여 나를 치며 찢기를 마지 아니하도다

(35:16, 개역) 저희는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 같이 나를 향하여 그 이를 갈도다

(35:17, 개역)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리이까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

(35:18, 개역) 내가 대회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많은 백성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35:19, 개역) 무리하게 나의 원수된 자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 무고히 나를 미워하는 자로 눈짓하지 못하게 하소서

(35:20, 개역) 대저 저희는 화평을 말하지 아니하고 평안히 땅에 거하는 자를 거짓말로 모해하며

(35:21, 개역) 또 저희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하하 우리가 목도하였다 하나이다

(35:22, 개역) 여호와여 주께서 이를 보셨사오니 잠잠하지 마옵소서 주여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35:23, 개역)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떨치고 깨셔서 나를 공판하시며 나의 송사를 다스리소서

(35:24, 개역)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공의대로 나를 판단하사 저희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35:25, 개역) 저희로 그 마음에 이르기를 아하 소원 성취하였다 하지 못하게 하시며 우리가 저를 삼켰다 하지 못하게 하소서

(35:26, 개역)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들로 부끄러워 낭패하게 하시며 나를 향하여 자긍하는 자로 수치와 욕을 당케 하소서

(35:27, 개역)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는 말을 저희로 항상 하게 하소서

(35:28, 개역)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오늘 본문의 단어 중에 다툼 곧 싸움 또는 전쟁 속에 놓여진 다윗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왜 전쟁, 다툼, 싸움 속에 놓여져야만 할까요?

 

이 영적전쟁이 왜 혈과 육의 싸움과의 대비 속에서 펼쳐지는 것일까요?

(6:12, 개역)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지난 시간에 비록 무화과 나무 잎이 없어도 여호와의 구원으로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도 안되는 소리죠. 즉 불가능성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도 안되는 불가능성이 우리 인간의 존재 보다 먼저 있다는 것이고
성경말씀을 이 불가능성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가능한 소리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불가능한 소리만 적혀 있습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인간의 경험은 없고요
믿음의 경험만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 불가능한 믿음이 말입니다.
 

즉 이 말은 약속의 경험입니다.

우리의 경험이 아니라. 약속이 이런 경험을 했다는 겁니다.
육의 경험은 육의 자랑으로만 회귀 되고 끝납니다.


그런데 이 약속의 경험은

불가능한 경험 말입니다.

불가능성의 단절로만 그대로 회귀되니까 말이죠.

곧 약속 곧 믿음이 이런 경험을 했는데

이 말의 의미를 요약하면, 아니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소리로 바꾸면

바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라는 말씀입니다.

즉 불가능성 그대로 그 자체로 늘 남겨지고 있다는 겁니다.
 

(2:4, 개역)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0:38, 개역)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의인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다시 산다 라는 경험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불가능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 사항을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이 하나 마나 한 소리를 예수님 만큼은 밀어 붙이더라 말이죠.

 믿음은 밀어 붙이더라 말이죠. 불가능한데 말이죠.

그 의인은 결국 예수님 자신이니까 말입니다.

 

말도 안되는 그 상황이 말이 되도록 무장해제는 커녕 늘 불가능성에서 불가능성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말입니다. (롬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예수님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다시 부활 하신 겁니다.

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소리 입니까, 이 불가능성이 가능성으로 말이 되게 바뀌어서 믿는게 아니라
그 불가능성 그대로 덮쳐지는 불가능성인 겁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인간들은 웃끼게도 이 불가능성을 어떻게 해서든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겨

모든 종교가 꿈꾸는 부활을 믿을려고 합니다.
가능성으로 말이 되도록 하겠다는 취지인 겁니다. 행함으로 만들기 때문에 믿어준 댓가와 보상을 노리는 겁니다.

그런데 부활을 믿을려고 하니 십자가의 죽음이 거추장 스럽게 다가 옵니다.

 

그럼 이제는 십자가의 죽음만 강조하다 보니 부활의 영광이 모순처럼 다가오는 겁니다.


두 시어머니를 모실려고 하니 죽을판국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겨우 꾀를 내어서 써먹는 것이

이미와 아직 이라는 긴장 상태라고 합니다.

웃끼죠
성화론이라는 교리입니다. 행함은 결국 인간에게서 절대로 떨어질래야 떼낼수 없는 겁니다.

반대로 십자가의 믿음은 아무리 본드로 붙일려고 해도 불가능합니다.

둘 다 불가능한 거죠.

 

성화론자들은 이미와 아직이라는

지도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 먹는 소리를 남들에게 하는 식입니다.

이것이 놀랍게도 인간의 일입니다.

인간의 경험은 여기까지 이다는 겁니다.

즉 사람의 일이요, 사람의 정치입니다.

 

예수님의 경험 곧 의인의 경험은 이런 인간의 한계성에 부정으로 다가오는 경험입니다.

부정의 부정인 거죠.

 

인간의 현실이 종말(파국)로 다다를때에 그 세기말의 징조는 결국 묵시문학사상을 꽃피웁니다. 난세 영웅 이라고 메시야 사상이 갑자기 대세를 이룹니다.
안 빠져 드는 인간이 없을 정도입니다.

 

종교는 그래서 마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답을 꿈의 세계, 무의식, 실재계에서 찾는 겁니다.

점집을 찾고 무당을 찾고 종교를 찾는 이유가 다 그런 이유 인 겁니다.

 

극비수사 라는 영화를 봤는데

몰입도가 있어서 좋았는데

 

막상 엉뚱한 생각이 이 영화를 통해서 느껴졌던 겁니다.

 

곧 불의한 재판관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간청하는 과부의 끈질긴 요청기도 말입니다.

 

즉 이런 인간의 종말에 더 외설적인 종말의 종말로 말씀(복음)은 증거한다는 겁니다.

 

(18:1, 개역)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18:2, 개역)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18:3, 개역)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18:4, 개역)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18:5, 개역)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18:6, 개역)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18:7, 개역)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18:8,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즉 오늘 시편 35편과 연관 됩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아주 아주 재미있게도 이렇게 전제를 깝니다.

 

일부러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 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데 어떻게 사람의 말을 들어주겠습니까?

사람은 아예 깡그리 무시 하는 갑질의 끝판왕 최고 불의의 공무원 재판관이다는 거죠.

비리와 부조리가 아예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하는 요즘 공기관들처럼 말입니다.

모든 재판관과 법이 자기 편인데 뭘 감추겠습니까? 이제는 아예 배째라는 식이지요.

 

자 이렇게 되면 대뜸 이런 자들에게 뭔가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은

일단 자기자신의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과연 좌파들이 썩어빠진 불의한 우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손을 잡으려 할까요?

적인데? 악마들인데? 손을 잡을려고 할까요? 동맹을 맺을까요?

 

누가 과연 저런 불의한 재판관에게 도움을 요청하겠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엣세네파 독립군들이 로마와 손 잡겠는가 말이죠!!

 

설사 도움을 받더라도 누가 과연 도움받으셔서 다행이군요 라고 하냐 말이죠!!!

 

자 이런 현실이다는 겁니다.

(물론 손을 잡습니다. 그것은 더 외설적인 예수를 어떻게 해서든

손에 피 안 묻히고 죽이고자 함입니다. 사람의 일 곧 정치죠)

 

이렇게 이미 전제된 이런 배경 그것도 아주 극악의 환경 속에서의 전체로 깔린 상황에

과연 기도를 말하는데 있어서 사람들이 공감이 가는 기도의 의미이겠냐 라는 겁니다.

 

당연히 아니죠.

불가능한 기도죠.

 

요즘 목사들도 이런 기도 안 가르치잖아요?

자기들도 기도를 안 믿거든요.

 

돈은 잘 믿죠

믿음이 팍팍 갑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는 안 믿습니다.

때려 죽어도 안 믿습니다.

이유는 힘이 안되거든요.

 

그런데 제가 경험 이라는 표현으로써 정치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데

경험이란 자신만의 특이성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경험은 특이성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특이한 게 없거든요.

 

삼손이 그 대표적인 경험입니다.

이 특이한 자기만이 아는 경험을 수수께끼로 내는 겁니다.

아무도 못 풀죠. 이것을 가지고 정치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정치에 더 외설적인 정치가 있었으니

삼손을 가지고서(사람의 일) 하나님의 영광을 펼치는 겁니다.

삼손은 두 눈과 힘의 원천이 모두 뽑혀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겁니다.

 

또 있죠 저는 오히려 엘리야가 가장 딱 맞는 상황이다고 봅니다.

갈멜산에서 850 1 로 싸운 그 경험

절대로 잊을수 없고 삭제 할 수 없는 기념비적인 경험이요 정치입니다.

그 정치를 하나님께 마져 펼칩니다.

 

내 열심히 특심인데 나만 남았다고 말입니다.

 

여기에 더 심한 겨우 한 명이냐? 7천명 콜????

ㅠㅠ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 사람의 일은 하나님의 영광과 어떻게 차이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대비 되는 식입니다.

 

감히 하나님의 정치 앞에서 곧 십자가의 정치 앞에

어딜 감히 들이대냐 말이죠.

 

과연 내 구원이 남아야 하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죽음만이 유일하게만 남겨져야만 하는지

함 해 보자 말이죠.

 

예수님의 죽음 곧 정치는

십자가의 죽음만 남기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경험은 반드시 정치화가 되는데

왜 인간의 경험이, 정치가 영광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자기에게로 회귀 하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육의 자랑입니다.

 

자 그래서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즉 인간의 경험을 무시하고 인간의 정치 곧 사람의 일을 무시하는 자에게
(? 오로지 자기 경험만이 유일하니까 말이죠)

 

하나님의 일인 과부의 귀찮게 밤낮으로 괴롭히는 원수 갚아달라는 기도가

과연 우리가 그 동안 알아 왔던 [기도의 의미]와 과연 일치 하냐 말이죠.

 

우리는 일단 안 맞다 라고 솔직하개 답해 봅시다.

그런데 안 맞다 라고 문제시 삼는 그 문제 또한 문제 삼아 봅시다.

 

일단 놀라운 점은

과부가 없습니다.

세상은 과부가 없는 세상입니다.

다른 말로 약자는 없다는 겁니다.

 

더더욱 놀라운 점은 하나님도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람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도 사실은 없습니다.

 

(5:1, 개역)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5:2, 개역)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5:3, 개역) 그들이 가로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온역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5:4, 개역) 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으로 역사를 쉬게 하느냐 가서 너희의 역사나 하라


여호와의 영광 때문에 우발적으로 발생되는 겁니다.

주님이 새롭게 그때 그때 만드셔야 하는 겁니다.

인간들이 도저히 미리 눈치 챌수 있는 인물들의 배치가 아니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내어서 그를 귀찮게 할수 없다는 겁니다.

 

과부는 자기는 살아 있고 남편은 죽은 자 아닙니까?
늘 죽은 남편의 빈자리가 늘 평생을 따라 붙는자 아닙니까? 쫄딱 망한자요 죽은자 아닙니까?

요즘 시대에 그런 과부가 없는 이유는 그냥 결혼 즉 재혼 하면 그만이다는 거죠.
(결국 결혼 하는 자도 없는 겁니다. 그냥 육과 육의 만남일 뿐입니다.)

그저 귀찮아서 돌싱으로 남을 뿐이지

뭐가 아쉬워서 과부 딱지를 계속 유지 하겠느냐 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남자로 치면 고자의 의미도 그런 의미다는 거죠.

고자 될려는 사람은 없다는 거죠.

 

이 말은 성경의 약자 보호법에 따르면

약자로 남아서 늘 보호받고자 하는 자는 없다는 겁니다.

 

남은 인생을 평생 남의 도움으로 살고자 하는 자는 없다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인간은 늘 독자적이고 자립하고자 할 뿐이다는 겁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은 그런 의미에서 시아버지 야곱(하나님도 사람도 무시하는)과 며느리 다말이 생각납니다.
얼마나 귀찮게 막내를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기여이 준다고 약속을 받아 내고야 마는 거죠.
시아버지의 외골수 보다 더 외설적인 다말의 간구가
더 옳았다는 겁니다.

또 모세가 애굽왕에게 귀찮게 찾아가서 여호와의 백성을 내어놓으라 라고 말하는

강퍅한 애굽왕과 애굽군사 에 대비되는 여호와의 영광 곧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간구가 생각납니다.

즉 기도는 인간의 요청에 따른 것이 아닌

주님께서 애굽왕 바로왕을 강퍅케 하심으로써

부르짖지 않고서는 못배기도록 하는

하나님의 일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 부르짖음이다는 겁니다.

 

이런 입장에서 원수 개념이 나오는 겁니다.

전쟁의 대상이니 말입니다.

여호와의 전쟁 싸움 다툼 말입니다.

 

나의 원수가 아닌 예수님의 원수인 겁니다.

여호와의 전쟁이지 인간에게 속한 전쟁이 아닙니다.

사람의 일이 아니다는 겁니다.

 

나의 원수의 입장에서는 원수 갚는 것은 주님께 달렸으니

넌 빠져 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에게는 원수가 없다는 겁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 라고 한바퀴 돌고 돌면

결국 원수는 없는 겁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원수 뿐인 겁니다.

 

(12:19, 개역)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10:30, 개역)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그러니까 정치란 예수님만의 경험이요

여기서 사람의 일과 대비된 입장에서 하나님의 일이다는 겁니다.

곧 사람은 마귀에게 잠식 당한 상태에서 원수가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은 사람을 일체 상대하지 않고

오로지 마귀만을 상대로하신

마귀 보란 듯이. 마귀만 들으랍시고 펼치시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다는 겁니다.

곧 영광이 된다는 겁니다.
이유 없이 무조건 이미 영광 그 자체로 말입니다.

 

결국 인간은 마귀를 못 본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는

사람의 일에 머무는 경험 뿐이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룬

어떤 완성입니까?

원수를 이기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그 경험 그 영광 그 정치를

예수님에게만 돌아가는 영광을 펼치는 정치를 펼치는데 있어서

사람의 일과 차이나는 하나님의 일이다는 겁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불가능함으로써의 기도가 덮쳐진 과부에게

원수 개념이 있듯이

오늘 시편 35편에서도 불가능함으로써의 기도가 덮쳐진 다윗에게

원수 개념이 등장한다는 겁니다.

 

원수는 이유 없이 공격한다는 겁니다.


(35:7, 공동) 구렁을 파고 그물을 쳐서 까닭 없이 이 목숨을 노리는 자들을

(35:7, 현대인) 아무 이유 없이 그들이 나를 잡으려고 그물을 치고 함정을 파놓았습니다.

(35:7, 현대어) 저들이 까닭없이 나 걸려 들라고 덫을 몰래 쳐놓고 나 잡아들이려 깊은 구덩이를 파놓았으니

(35:7, 쉬운) 그들은 아무 까닭 없이 나를 잡으려고 몰래 그물을 쳐 놓고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죽이려고 웅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35:19, 공동) 거짓말쟁이 원수들이 나를 비웃지 못하게 하시고 까닭 없이 날 미워하는 자들이 서로 눈짓을 못하게 하소서.

(35:19, 현대어) 그러나 설령 이 몸이 쓰러진다 해도 거짓밖에 아는 것 없는 저 원수들이 이 몸을 바라보며 고소한 듯 히죽히죽 웃지 않게 하소서. 까닭없이 이 몸을 증오하는 자들이 슬퍼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며 즐거워 능글맞게 웃지 않게 하소서.

(35:19, 쉬운) 아무 이유 없이 내게 달려든 원수들이 더 이상 나를 비웃지 못하게 하소서. 아무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더 이상 음흉한 미소를 짓지 않게 해 주소서.


그런 경험을 다윗이 격게 되는데

왜 이것이 시편에 쓰여져야만 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단순히 개인의 경험 아닙니까?

 

또 여지껏 지구에 발 딛여 살아왔던 사람들 중에

이미 죽었거나

아직도 살아 있거나

앞으로 태어나 살게 되거나

어찌되었던 이런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과연 한 둘이겠느냐 말이죠.

 

지금도 저 아프리카 오지나

미개발 국가나

정치적으로 혼란한 국가에서는

이런 경험 보다 더 심각한 경험이 너무나 많다 라는 겁니다.

 

그런 경험 과연 성경에 기록이 될 수 있을까요?

안되잖아요

 

그럼 왜 다윗의 이런 경험

곧 원수로부터 괴롬힙을 당하는 이 내용을 왜 기록하시는 것일까요?

놀랍게도 다윗의 경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라

방금 당신이 다윗의 경험 그것도 개인적인 경험이라고 해 놓고서는

다윗의 경험이 아니라니?

왜 이랬다 저랬다

대 놓고서 모순적인 말을 하느냐?

 

다윗의 이런 경험을 성경에 기록하는 이유는

다윗의 경험이 아니라

예수님의 경험이기에 기록한 겁니다.
(같은 의미로 나의 원수가 아닌 예수님만의 원수 때문에 배치되는 다윗입니다.)

에수님의 경험이 다윗에게 덮쳐져서

졸지에 다윗은 이런 경험을 피할수 있는 충분한 여건이 되면서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편파적으로 당하는 겁니다.

 

즉 원수는 다윗을 미워하는게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의 일입니다.

인간의 경험 곧 정치가 되는 겁니다.
(불의한 재판관 또는 강퍅한 애굽왕은 우리가 아무리 만들어내고 싶어도 안되는 겁니다.
우발적으로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등장하는 겁니다.)

 

원수는 다윗을 미워하는게 아니라

그래서 다윗을 괴롭히는게 아니라

예수님을 미워 하기 때문에 이런 말도 안되는 불가능성의 경험을 하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 곧 하나님의 정치입니다.

 

(7:7,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15:18,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5:19, 개역)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요일 3:13, 개역)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사람의 일은 마귀를 끌어들일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마귀만을 끌어들입니다.

마귀가 없으면 하나님의 일이 안됩니다.

영광을 받으실수가 없습니다.

 

출애굽하는 이스라엘백성이나 그들의 선지자로 등장하는 모세를 통해서 영광 받는게 아니라

 

(14:4, 개역)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14:17, 개역)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14:18, 개역) 내가 바로와 그 병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애굽왕과 애굽군사를 통해서만 여호와께서는 영광 받으신다는 겁니다.

 

결국 기도란 부르짖음이란 이런 자가 없다면

성사가 되지 않는 거죠.

 

하나님의 영광 때문에 애굽왕을 강퍅케 해서

안 부르짖고는 못배기도록 만들어서

그 원수릐 괴롬힘 때문에

기도함으로써

구원하시는

 

기가막힌 예수님의 자작극 아니겠습니까?

 

그럼 출애굽 해준 이스라엘 백성

그들을 이끌어낸 모세?

 

이들은 뭐가 됩니까?

 

놀랍게도 이들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여호와의 영광에 참예 된 겁니다.

그냥 선물 받은 것 뿐이지

그들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라는 겁니다.

 

즉 영광이 더더욱 영광 되도록 (용서가 더더욱 용서가 되도록; 일만달란트 비유)

그들은 770번의 용서당하기만 누릴 뿐이였던 겁니다.

이 불가능한 용서가

사실은 불가능한 [원수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시나리오에 참예 당한 영광 뿐이였던 겁니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지 말귀를 못 알아먹으면

이렇게 하면 쉽습니다.

실제로 도통 이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를

다윗 조차도 모릅니다.

왕인데 이런 불가능한 경험을 어떻게

왕이라는 좋은 환경을 버리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왕임에도 불구하고 770번의 용서가

그 불가능한 용서가 덮치게 되니까

 

왕이고 뭐고 다 날라갈 판국에 놓여지고

원수로부터 쫏겨다니면서

심지어 미친척 하면서 까지

 

이 영광 곧 하나님의 일이 뭔가를

사람의 일과의 차이를 통해서 누리도록

심지어 자기자신이 원수의 자리에서 이 차이를 실제적으로 격게 되는 겁니다.

 

이와 똑같은 경험을 모세 또한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구원할려고 40살 때 나서다가 졸지에 애굽인을 모래에 파 묻는

사람의 일에 빠져서

일부러 의도적으로 80살에 찾아온 하나님 앞에 거부권을 행사합니다.

왜 내 동료 나의 백성을 구원할려고 큰 맘 먹고 정의를 불태웠을대에

그때는 안 도와주고

힘 다 빠진 이때에 쓰실려고 합니까?

안 합니다 라고 삐집니다.

말더듬이고 힘도 없이 지팡이를 의지하는 나약하기 빠진 인간이 무슨 하나님의 일을?

힘 센 놈을 데리고 하세요 라고 말이죠.

 

그런데 과부와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의 대립 때문에

그 사이에서 기도의 의미가 성사 되듯이

 

하나님의 일은 마귀와 하나님의 구원행사 사이에서 그 간극에서 바로

윺월절 어린양의 피가 성사가 되는 겁니다.

 

기도와 어린양의 피가 무슨 힘이 됩니까?

무능하기 짝이 없는데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전쟁의 유일한 무기 이다는 겁니다.

 

무기를 포기하는 무기

 

사람의 일은 얼마든지 자신들만의 경험이라고 사건화 즉 정치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바로 그런 사람의 일을 비켜가는

 

사건을 포기하는 사건

정치를 포기하는 정치이다는 겁니다.

 

왜 마지막 세 번째 마귀의 시험이 정치적으로 나오는 것일까요?

 

인간들은 자신의 믿음을 정치화 하기 떄문입니다.

 

그 믿음은 자신만의 특이한 경험이라고 우기거든요.

 

그런데 이런 사람의 일 곧 사람의 정치는

마귀를 끌어들이는 입장이 못 된다는 겁니다.

전쟁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거룩한 전쟁이 아닌 그들의 전쟁은

자신의 믿음의 확장인 포교활동일 뿐인 겁니다.

 

그러니 믿음을 포기하는 믿음으로써의 하나님의 일에 말려들 뿐입니다.

누구 세력으로?

마귀세력에 잠식된 상태로써

 

이 마귀의 3가지 시험은 유대인을 장악한 유대인의 믿음이였던 겁니다.

 

그 시험에 말려들지 않는 예수님이다는 거죠.

3가지 시험을 이기신 경험이 바로 예수님의 정치인 겁니다.

곧 사랑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곧장 달려가는 예수님을

베드로는 막습니다.

 

막으니까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릴려고 하는 자가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고 하시는 겁니다.

 

왜 죽임을 당해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정치를 벌리시는 것일까요?

 

그 어떤 누구도 그 삼일이라는 간극을 만들어 낼 자가 없는 가짜들이다는 겁니다.

창조자는 이 삼일의 간극만 관심있을 뿐입니다.

 

그 빈 공백 만들어서 뭐하게?

 

그 간극에서 벌어지는 일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 간극에서는 사랑만이 나오고

사랑 아닌 것들이 다 들통나는 빈터이다는 겁니다.

 

광야라는 빈터로 몰아가서 오로지 유월절 어린양의 피 공로만을 남기고

다 탈락, 누락시켜 버리듯이 말입니다.

 

오직 용서로만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오늘 본문 시편 35편을 통해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을 왜 미워할까 라는 것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미워하는가를 그 진짜 내막을 보게 되는 겁니다.

 

왜 약속을 사람들은 미워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자 이렇게 되니 안미워하면 되지 라고

베드로처럼 다른 사람들은 다 약속을 미워해도 나는 약속을 미워 하지 않을 겁니다 라고 한다고 해서

 

예수님이 안 속는다는 겁니다.

 

베드로 또한 원수로써 십자가의 혜택을 받아야 할 입장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벌리시는 그 간극에 하등 도움이 안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방해꾼 노릇만 하는

사단이요 넘어뜨리는 자요 사람의 일만 생각할 뿐인 원수일 뿐이다는 겁니다.

 

그 원수를 용서하는 십자가의 사랑을 이루시는 겁니다.

 

베드로의 믿음(신념)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로 만드는 반석이 되는게 아니라

에수님이 베드로의 이런 유혹을 뿌리치시는, 시험을 이기시는 그 십자가의 피가

베드로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인 반석으로 만드는 새창조이다는 겁니다.

 

새창조 당해야 할 판국인데

자꾸 엣언약적 사고방식으로 예수님을 가로막을려고 했다는 거죠.

 

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 다윗은 다윗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예수님의 경험이 덮쳐지는 겁니다.

미래에서 쳐들어 와서 지금의 다윗에게 말이죠.

네 맞습니다. 불가능하죠. 말도 안되는 소리죠.

 

그런데 우리의 믿음은 그래서 엉터리이다는 겁니다.

자꾸 말 되는 소리로 모아왔고

가능한 것들로만 믿음이라고 우기니까 말이죠.

 

이런 버릇이 놀랍게도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 곧 그들의 대표 바리새인에게

그대로 나타납니다.

다윗의 개인의 경험으로 취급해서

자신들의 본보기로 삼으니까

 

정작 그 실상이 오니

그림자를 쫏던 자들이 실상이신 예수님을 쫏아내고 죽이더라 말이죠.

 

그러니 다윗의 개인의 경험도 쫏은 것이 아닌

그 반대편에 놓여진 다윗을 이유 없이 괴롭히는 원수짖만 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를 쳐다보면 다행이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불가능성의 불가능성

단절의 단절입니다.

 

결국 처음부터 구원은 불가능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가능성이 늘 함께 항상 동행해 왔다는 사실

 

이것을 다윗은 철저하게 당하고 있는 겁니다.

 

욥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마귀를 끌여당겨서

동기유발케 해서라도

 

약속되신 예수님을 보여주고 싶었던 겁니다.

 

다윗에게도 욥과 똑같이

그 영광 되신 예수님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귀를 끌어들이는 겁니다.

 

원수를 끌어들여서

원수 속에서 건지시는 예수님의 일이 뭔가를 보여주고파서 말입니다.

 

우리 보다 예수님이 더 설레고 설레하면서

이 귀한 피를 선물로 주고파서

그 얼마나 기쁘고 즐거움을 가득 안고서 말입니다.

 

받는 이 보다 주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이 더 설레하시면서 말이죠.

 

이 기쁨이 우리에게 넘치도록 하시는 겁니다.

 

슬픔 대신 희락을

재 대신 화관을

근심 대신 찬송을

다윗 대신 예수님(약속)을 뽑아내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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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동기유발 그리고 배신때리기

 

마귀보란 듯이

 

711일 오전 10:37

 

마귀야 마귀야 너 억수로 믿음 좋은 의인 욥 아니?

아무리 너가 괴롭혀도 끄떡 없단다!!

에이 그것은 주님이 그를 보호하니까 그렇지요

안그렇다면 딴 사람과 별 다를바 없습니다.

별로 관심 없다는 듯

마귀는 돌아설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마귀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면서

기여이 이 싸움을 성사 시킨다.

 

OK 좋았어!!!

마귀 보다 더 뻔뻔한 하나님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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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두 일의 대충돌 사건

 

715일 오후 3:11 · 수정됨 ·

 

한 사람은 절대로 절대로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절대로 배신하지 않겠다고 한다.

다른 한 사람은 그렇게 말하는 너가 제일 먼저 배신때린다고 한다.

 

이 두 일의 충돌로써 두 사람의 차이점이 부각된다.

 

도대체 무슨 차이일까?

 

이 두 사람의 사이의 간극 때문에 발생하는 충돌이다.

하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마귀를 못 본다는 점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상대하지도 않고 오로지 마귀만을 상대로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두 일의 차이다.

 

곧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의 차이다.

 

사람의 일은 마귀가 보이지 않는 관점에서 벌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은 마귀만 보인다는 점에서

마귀 보란듯이. 마귀만 들으라는 식으로 일한다는 점이다.

 

(16:13, 개역)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6:14, 개역) 가로되 더러는 침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6:15, 개역)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16, 개역)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6:17,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6:18, 개역)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6:19, 개역)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16:20, 개역) 이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16:21, 개역)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16:22, 개역)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16:23, 개역)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16:24, 개역)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16:25, 개역)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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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로써의 기독교?

 

716일 오후 10:49 · 수정됨 ·

 

어제 어셈블리 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왜 기독교가 정치라고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 봤다.

 

결론은 두 패 곧 사울왕(맏아들)과 다윗왕(탕자)

두 쪽을 완전히 다 멸망시킨다는 것에서 정치적이다는 것이다.

즉 무조건 이유없이 양 쪽 다, 둘다 다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아벨죽이기, 다니엘 죽이기, 사도바울 죽이기, 예수님 죽이기를 펼치신다.

 

그리고 죽었다가 일어나는(말도 안되는 이 불가능성)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자는 딱 한 분만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둘 다, 모두다 진멸시키는 것이 정치라는 것이다. 성령의 정치이다.
육의 소욕과 대비되는 성령의 소욕이다.

 

(1:16, 개역)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18, 개역)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19, 개역)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1:20, 개역)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2:4, 개역)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말도 안되는 불가능성의 소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이 불가능성에 도전한다.

 

그 가시적인 방법이 바로 의인인지 아닌지 죽여 보면 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정치다. 이 또한 말도 안되는 불가능성의 단절의 소리 아닌가?

믿으라는 것인지 못믿도록 하겠다는 소리인지?

 

어찌되었든 공백만의 승리한다. 무능한 빈터 말이다. 곧 십자가다.

결국 공백만 남는다. 불가능성만 남는다.

 

그 불가능성이 옳았다 라는 정치

그래서 일까? 성령은 이 두 세력을 늘 충돌시킨다.

 

늘 항상 이 불가능성을 펼친다.

 

그리고서는 죄를 회개하는 자를 찾는다는 것이다.

죄를 깨닫고 그래서 자복하는 자를 찾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영이 덮쳐져서 죄를 깨닫고 상한심령이 되신 예수님을 쳐다 보는 자이다.

즉 회개 곧 죄를 안다는 이 돈(경제)이 안 되는

하나 마나 한 것에 감사하는 자를 말이다.

아니 감사함이 덮쳐진 자를 말이다.

곧 사랑이다. 희생(대신 죽으심) 말이다.


그러나 돈이 안되는 것에는 그 어떤 의미도 두지 않겠다는 자는
가치가 되지 않는 것에는 그 어떤 것도 관심두지 않겠다는 자는


이 실패와 진노와 진멸과 멸망,

(즉 십자가에 못 박음에 대한 감사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이 옳았음에 이유없이 무조건 감사함을 거부 한다.


(5:22, 개역)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5:23, 개역)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5:25, 개역)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5:26, 개역)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물론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을 보고 회개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가능한 회개가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곧은 목이 돌아가게 된 자는(나무에 달린 인자)

회개가 그냥 덮치는 것이다.

회개가 목을 돌리는 것이지

목이 돌아가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 때문에 성령은 늘 둘 다 충돌 시키시고

둘 다 쫄딱 망하게 함으로써


오직 믿음만이 옳도록 하시는 정치를 벌리신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용서만 남기도록 사랑으로만 회귀 시킨다.

성령의 정치

묵시의 정치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의 아무런 대답없는 무응답이 정치다.

이 아무것도 아닌, 하나 마나 한 것에 충성하는 정치


물론 지젝의 이런 주장도 인간의 꾀(지혜)이다.

누가 구원을 바라지 않고 이런 짖을 하겠는가 ㅋㅋㅋㅋ


행함에 대한 보상!! 인간은 어쩔수 없다.


이런 인간의 꾀를 가지고서 십자가의 지혜는 그 차이를 증거하신다.

인간의 꾀(외설) 보다 더한 더 외설적인 기묘자(숨겨진 놀라운 지혜의 이름)와 모사(중보자, 상담자. 화목제물)로 말이다.

(11:34, 개역)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9:6, 개역)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개역)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개역)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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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주장은 항상 똑같다.]

 

어제 오전 9:40 · 수정됨 ·

 

아무것도 아닌 몸뚱아리

하나 마나 한 몸뚱아리

그렇기 때문에

하나 마나 한 것에,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충성한 분이 귀한 겁니다.

성경은 늘 항상 하나 마나 한 (불가능한) 소리만 하는 이유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공백되기, 얼룩되기, 불가능성 되기, 부정성 되기 지젝)


주변의 주장은 항상 똑같습니다.

 

독자적이 되어라 라는 겁니다. 자립, 독립,

(탕자와 맏아들의 차이)

 

탕자는 아무리 큰 재산을 가져도 소용없습니다.

아버지가 주는 한 끼 때문에

자신을 독자적으로 만들수 있다고 착각한 그 재산이

이렇게 빨리 소진해 버릴 줄이야 꿈에도 몰랐던 거죠.

 

그것이 불행이 아닌 실패가 아닌

이미 관계성에 놓여진 행복 그 자체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가, 그 한 끼가 아니 삼시세끼가

늘 항상 함께 이미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불가능성과 함께 머물기)(4)


그런데 놀랍게도 저들 주장대로 단 한명도 자립적인 인간을 본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성화론자들도 사실상 자립을 늘 꿈꾼다는 점입니다.

스스로 깨끗하게 한 번이라도 이루어 보고자, 함 달성해 보자 라는 식입니다.

구원에 대해서는 어떤 누구에게도 터치 받고 싶지 않는

자신만의 종교놀이로써 달성하고픈 자기 숙제 완성 말이죠.

게임하는데, 빵께이 하는데 누가 옆에서 잔소리하면 얼마나 싫냐 말이죠.


하나 마나 한 복음은 결국 관계입니다.(죄인과 피의 관계, 환자와 의사)

이쁜 두 천사 때문에 아빠가 되는 그 관계성을 누리는 겁니다.


즉 누가 나를 섬기고 있구나

누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구나

누군가 나를 위해 상한심령이 되셨구나를


이 이쁘고 무능한 이삭의 희생제물 됨 때문에(선물 때문에)

아버지 아브라함은 비로소 예수님의 때를 바라보게 된 거죠.
나무에 달린 자를 보게 되는 거죠.

관계 입니다. 불가능한 관계(반드시 100살 넘어서 비웃어 버렸는데 도저히 불가능한데~~)


그 관계는 유치하기 짝이 없어서 항상 남들은 비웃습니다.

그 관계성을 거부하는 자들 말입니다.

 

십자가의 죽음만으로만 맺겠다고 다가오는 그 분의 유치한 사랑을

그 어떤 허물로도 막아설 수가 없으니 원 ~~~~

관계를 누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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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인간의 편에 서 있는 철학자들(신학자들)

 

7시간 · 수정됨 ·

 

항상 인간의 편에 서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철학자들(신학자들)이다.

자신들이 얼마나 이 진리를 사랑하는지를 나타내려 한다.(니체)

 

자 그렇다면 복음은 저런 철학자들을 당연히 공격하는 입장인 것이다.

 

종교놀이 철학놀이를 살펴보면

마치 성전에서 비둘기를 팔고 있는 자들과 같다.

오늘날 교회놀이 이다.

물론 무신론자놀이도 똑같다.

 

그 게임판을 뒤엎어버린다.

 

(2:13, 개역)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2:14, 개역)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2:15, 개역)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2:16, 개역)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저들은 비로소 화를 낸다. 화가 난다 화가 나!!! 앵그리 버드들처럼.

 

자신들의 밥벌이 창고를 불지르는 예수가 미운 것이다. (10)

 

(12:49, 개역)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12:50, 개역) 나는 받을 침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12:51,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사도행전에서는 오늘날처럼 관광물품으로써의 신상(우상조각) 팔이들이

졸지에 아덴에서 사도바울 출현 때문에 졸지에 장사 망하게 될 판국이 되어버렸다.

사도바울이 가는 곳 마다 유대인의 훼방과 이방인의 고소는
그들의 각자 신에게 향한 종교놀이 돈놀이 방해 때문에 입에 풀칠이 위협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17)

 

또 무덤가의 귀신들린 청년을 고쳐 귀신이 돼지떼 속에 들어가게 됨으로서

축산업이 망하게 되니 도리어 예수님이 귀신처럼 쫏겨나게 되듯이 말이다.

 

(8:28, 개역)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8:29, 개역)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8:30, 개역)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8:31, 개역)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실진대 돼지 떼에 들여 보내소서 한대

(8:32, 개역)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8:33, 개역)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8:34, 개역)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결국 인간의 구원은, 종말신앙은 경제성이다. 돈놀이다. 종교는 돈이다. 보험이다.

 

이 경제를

이 떡을

 

말씀으로 바꾸는

예수님의 살과 피로 바꾸는 것이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4: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종교 놀이 속에서 펼쳐지는 십자가 피 이다.

일용할 양식이다.

썩을 양식 곧 너희 조상이 먹었던 만나 보다 더 외설적인 살과 피다.

 

(11:29, 개역)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이 십자가의 피가 휘장을 찢고 쏟아져 내리는 것이다.

 

(15:38, 개역)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2:13, 개역)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2:14, 개역)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2:15, 개역)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2:16, 개역)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나의 살과 피를 먹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 라고 말씀 하시면서 말이다.

(6:53,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자 항상 인간의 편에 서 있는 자들은 거짓선지자들인 악마들이다.

그리고 예수님께 시험한다.(4)

 

떡을 가난한 자에게 주어라 라고

또 사랑하는 자는 성전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도록 해 달라고(악한세대의 기적)

또 온 천하 만국이 강한 힘에 무릎 꿇는 그 힘의 소유자인 구원자를 보여달라고

 

이 얼마나 지고지순한 인간을 너무 사랑하고 사랑했으면 이런 요구로 시험하겠는가?

 

경제적으로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완벽한 메시아를 제발 달라고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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