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람과 예수사람의 차이 그리고 주의 살과 피 (시편 36편)

 


(
36:9, 개역)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4:12, 개역)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4:1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4:14, 개역)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4:15,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4:16, 개역)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4:17, 개역)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4:18, 개역)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4:19,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4:20, 개역)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4:2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4:22, 개역)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4:23, 개역)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4:24, 개역)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4:25, 개역)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4:26,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4:27, 개역)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4:28, 개역)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4:29, 개역)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4:30, 개역)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36:1, 개역)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36:2, 개역)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36:3, 개역) 그 입의 말은 죄악과 궤휼이라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36:4, 개역) 저는 그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고 악을 싫어하지 아니하는도다

(36:5, 개역)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36:6, 개역)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

(36:7, 개역)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36:8, 개역) 저희가 주의 집의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

(36:9, 개역)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36:10, 개역) 주를 아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

(36:11, 개역) 교만한 자의 발이 내게 미치지 못하게 하시며 악인의 손이 나를 쫓아내지 못하게 하소서

(36:12, 개역) 죄악을 행하는 자가 거기 넘어졌으니 엎드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으리이다

 

 

먼저 제목을 통해서 한번 생각을 해 보면

예수의 사람은 결국 교회의 사람과의 대조 속에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것도 우발적으로 말입니다.

그러니 자신은 예수님의 사람이다 라고 필연화 시킬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몫이지 우리 자신의 숙제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교회의 사람 속에 속할 뿐이다는 겁니다.

즉 도리어 우리는 철저하게 교회사람 속에 속하면서 예수의 사람을 핍박하는 가운데서
왜 나는 틀렸고 예수님만 옳았는지를 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교회사람이란 결국 우상숭배자입니다.

그런 우상 숭배자를 예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말 그대로 예수의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숙제, 예수님이 직접 하실 일이지 인간은 못합니다.


우상조각가였던 아브라함을 종교인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만든 자는 예수님의 믿음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기여이 다시 인간의 공로로 돌리는 자들이 바로
자신을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본 자들이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종교성입니다. 교회사람의 특징입니다.
그 당시 교회건물사람들이랑 공방하는 장면입니다.

(마 3:9, 개역)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눅 3:8, 개역)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요 8:37, 개역)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요 8:39,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요 8:40, 개역)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 8:56, 개역)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 8:57, 개역)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요 8:5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우리는 과연 어떻게 교회사람인 우상숭배자인 우리를, 이 죄인을 어떻게 예수의 사람으로 만드는지를
이 불가능한 일을 어떻게 예수님은 곧 주의 살과 피는 생명의 원천으로써 이루시는지

오늘 본문 다윗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교회사람의 특징이 뭡니까?

 

(36:1, 개역)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36:2, 개역)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36:3, 개역) 그 입의 말은 죄악과 궤휼이라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

(36:4, 개역) 저는 그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서고 악을 싫어하지 아니하는도다

 

에 나옵니다.

 

악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악을 좋아한다는 말이지요.

침상에서 죄악을 꾀한다고 합니다.

스스로 불선한 길에 선다고 합니다.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얼마나 신기할까요?

죄를 지어도 아무도 자신의 죄악을 드러내주는 자가 없으니 거기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미워함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믄 짓을 해도 미움 받기는커녕 더더욱 감추어지니까 자신에게 뭔가 대단한 것이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는 겁니다. 교회사람 답죠????

 

자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 할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게 말이 안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다윗의 일방적인 시선입니다.
즉 저렇게 하는 자가 없다는 겁니다.
없는데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뒤짚어 씌워서 저렇다 라고 편파적으로 일방적 해석을 해 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보통 일반인의 보편적인 시선을 뭡니까?

바리새인의 경우를 보면 잘 알수 있습니다.
참 이럴때에 바리새인이 고마운지 몰라!!!

바리새인은 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싫어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요
또 밤마다 침상에서 악을 꾀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긍하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선을 베풀것인가?
하나님을 증거할 것인가?
백성의 고단한 삶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위로해주고 천국을 소망케 할 것인가?

이들의 특징이 바로 경건주의 입니다.

오늘날 개혁주의자들과 성화론자들과 얼마나 똑같은 모습이 아니냐 말이죠. 교회 사람 말입니다. 

또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게 바리새인을 평가하고 본받기를 바랬고 또 그렇게 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런 평가를 뒤짚어 씌운다는 것은

전혀 다른 시선이 편파적으로 일방적으로 했다는 겁니다.
이런 모함을 누가 한 것일까요?
네 맞습니다. 예수님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고자 하는 삶이 바리새인의 삶인데
예수님은 돈을 사랑하는 자라고 일방적으로 뒤짚어 씌웁니다.
이 예수님의 무책임한 발언으로 돈을 사랑하는자 하면 바리새인이다 라는 공식으로 고정화 되어버립니다.

오로지 예수님만 저런 평가를 한 겁니다.

그것이 뒤에서 소급해서, 미래에서 덮쳐져서 다윗 또한 이런 시선으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세상 나라의 각각의 왕들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세상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아닌(이미 그들은 아주 당연하기에 미리 빼버리고)

오로지 이스라엘 내부에서 벌어진 일들을 통한 미리 결과를 통보하는 식입니다.
그러니 다윗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는 뻔합니다.
즉 역사해석가 들이 정상적으로 보는 역사는 교회사람들 곧 우상숭배자의 역사의식이고(솔로몬의 지혜로 더 잘될것이다-거짓선지자)
도저히 역사학자들이 이해불가능한 역사가 따로 두 줄기로 이스라엘 내부에서 펼쳐지는 겁니다.(이제 쫄딱 망했다-참선지자)


자 이렇듯 놀랍게도 결과적으로는 바리새인이 졸지에 악을 꾀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아니 원인도 없이 결과적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신기 합니다.

말도 안된다는 거죠.

즉 우리는 천국가는 자들도 말도 안되는 해석불가능이지만
지옥 가는 자들 또한 말도 안되는 해석불가능입니다.
평생을 교회다니고 남에게 해를 끼진적이 단 한번도 없이 지옥에 갔다면
모든 인간의 해석은 결국 다 통하지 않는 거짓이였던 거죠.

결국 성경에 기록된 천국가는 사람을 살펴 보니 정말 정말 말도 안되는 것이 그 사람에게 벌어졌듯이(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지옥에 가는 사람들 또한 똑같이 말도 안되는 것이 벌어진다는 겁니다.(강도짓 때문에가 아니라 옆의 두 사람의 대화를 무시했기에) 
결과적으로 말입니다.

양쪽다 해석불가능입니다.
그러니 저 사람은 지옥갈 사람이다 라는 말에 휘둘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사람의 말에 구원이 좌우 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목사 땡중 수녀 사제들 다 구라 치는 놈들이다는 거죠.
바리새인이 이들 보다 훨씬 뛰어난 성경박사들인데 말이죠.

왜 그런고 살펴 보니
오로지 예수님 때문에 졸지에 그들이 그렇게 들통난 겁니다.
예수님만 아니였다면 모든 사람을 심지어 자기자신 조차도 몰랐던 모습이다는 겁니다.
졸지에 예수님이 나타나는 바람에 그들의 속내가 졸지에 자기도 몰랐던 것들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야 당연하지요 죄란 인간이 짖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예수님이 새롭게 심어버리기 때문에
바리새인은 꿈에도 몰랐던 겁니다.

이런 시선에서 다윗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이런 모습은 다윗의 경험 속에서 나온 시선인 겁니다.
마치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믿음을 행함의 반대 개념으로 말하는것은
그 행함이 자신의 모습이였던 철저하게 그런 행함속에 갇혀있었던 모습이였다는 것을
믿음 때문에, 율법 외에 한 의 때문에 알게 되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순간 새롭게 심어서 그렇게 된 것이지
바울은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고
그 이전을 행함으로 본 것입니다. 배설물 말입니다.
거룩한 줄 알았는데 가장 똥내 나는 더럽기 짝이 없었던 것들이였습니다.
바울이 거룩을 엉터리로 해석해서 했겠습니까?

즉 다윗은 누구를 바라보고 그런 것입니까?
과거의 자기모습이자 현재의 이스라엘 모습이다는 겁니다.


자기 개인의 모습을 일방적으로 편파적으로 이스라엘의 모습이다고 단정적으로 확대 확산 시키는 겁니다.
말도 안되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발견한 내용이다는 겁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이라는 선민이라는 보호막이

이런 속성들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인데

다윗의 시선에서는 그렇게 보이는데

저들은 오히려 그것이 모두다 하나님의 덕분이라는 시선으로 가리우고 있다는 겁니다.

정작 다윗 또한 그 속에 있다고 빼내임을 당하다 보니 그런 시선을 가진 것이지

다윗도 스스로 그 속에서 빠져나올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결국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이것을 이해시킬려고 말하는 것일까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제가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무슨 수로 이해 시킵니까?
이 자체가 모순 그 자체인 불가능 그 자체인데!!
남을 설득시킬 입장이 못 되는 겁니다.
그 어떤 원인도 없이 결과적으로 덮쳐진 그 결과물을 말할 뿐이다는 겁니다.
손가락이 달을 가리킬 뿐이지 손가락에게 따질 입장이 못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함에 도리어 다윗 자신이 그 불가능함이 덮치다 보니

불가능한 시선을 가지고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는 겁니다. 불가능성으로써 말입니다.

 

자 그럼 상대적인 예수의 사람의 모습은 어떠한가? 역시나 마찬가지 입니다.

 

(36:5, 개역)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36:6, 개역)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시나이다

(36:7, 개역)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인생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나이다

(36:8, 개역) 저희가 주의 집의 살찐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수로 마시우시리이다

(36:9, 개역)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36:10, 개역) 주를 아는 자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하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의를 베푸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덮쳤다는 겁니다.

 

저는 이 부분을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예수의 사람은 악을 싫어하고
밤마나 침상에서 죄를 꾀하지 않고
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 라고 시편은 기록하는게 아니라

주가 어떻게 하시냐로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결국 주는 인자하심으로 용서하고 용서하고 또 용서하신다 라고 말입니다.

마치 십자가 두 강도 사이에 있는 죽어가는 예수님의 모습 아닙니까?
그냥 예수님이 아닌 죽어가시는 예수님 말입니다.
 

두 십자가의 강도는 다윗과 사울입니다.

오늘 시편 본문은 탕자와 맏아들의 대조라고 보시면 쉽습니다.

탕자가 악을 싫어하던가요?
다윗이 침상에 죄악을 꾀하지 않던가요?
그 말이 아니잖아요
그들은 정작 누락 시키고

지금 누구를 전면으로 앞세워 버리는 더 뻔뻔스러운 내용을 기록하고 있냐 말이죠.
마치 평생 토록 강도짖만 해 온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이제서야 주님을 만났다고 오로지 주님 만난 것에 대한 감사함을 뻔뻔스럽게 증거하고 있다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해 놓고서는

뻔뻔스럽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더 잘 아신다고 말하는 베드로 처럼 말입니다.

 

이 두 강도가 평생을 강도짖만 하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는

하나님의 심판에 놓여집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다짜고짜 이런 인생의 막다른 절벽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서는 말도 안되는 소리인 불가능한 말을 합니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중 불가능의 반복이 벌어집니다.

 

오냐 오늘밤 너와 내가 낙원에 있으리라

 

이 무슨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인 불가능이 만발한 말입니까?

 

그래서 옆에 있던 교회 사람 곧 맏아들이 반발을 합니다.
야들아 좀 말 안되는 소리 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라고 ~~~~
결국 마귀 곧 교회사람의 특징은 탕자를 공격하는게 아니라

아버지의 인자하심을 공격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자 이게 교회 사람과 예수 사람의 차이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다시 언급할까요?

 

귀신들린 딸의 어머니가 예수님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주여 제 딸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외칩니다.

 

제자들은 보드가드한다고 가로막고 있고

예수님 또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단절 차단 거리두기를 분명히 하십니다.

 

그런데 단절 되면 될수록 불가능하면 불가능할수록

그 불가능이 옳다 라고 더 말도 안되는 불가능함을 요구합니다.

 

주여 맞습니다. 우리 이방인은 개 맞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는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말을 하니까

 

여기에 예수님의 반응이 그야말로 불가해한 말을 합니다.

 

여태까지 다녀도 이스라엘에게 듣고픈 이 말을 단 한 번도 들어본적이 없는데

이 여인이 이 말을 하는구나

딸아 걱정 말아라 벌써 다 나았다 라고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게 칭찬일까요? 아니면 누구 들으랍시고 하시는 소리일까요?

 

이스라엘의 본모습

원가지의 본모습이 부스러기 였습니다.

즉 그들 또한 원래 죽은 가지였는데

접붙임을 당해서 이스라엘이 된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정작 자신들의 처음자리를 발로 차 버리는 이유는

 

중요합니다.

 

바로 눈에 보이는 교회

가시화 된 이스라엘

인간 손으로 지은 성전 때문이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가장 믿음직 스러운 자신의 말씀 지킴 때문이다는 겁니다.

 

남이 말씀 지킨 것은 믿음이 절대로 안 갑니다.

오로지 자기자신이 말씀을 이행하고 실천한 것만이 믿음이 가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 성경 전체에 나오는 것 중에 믿고픈 것만 믿을 뿐이지

믿기 싫은 99%는 관심도 없는 겁니다.

 

그 대표주자가 바리새인입니다.

 

바로 그 바리새인 코 앞에서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우연을 가장한 미필적 고의 간음죄를 저지르도록 아게 하니까

 

자신들의 트래이드 마크인 개혁자들이 과연 그 여인을 그냥 넘어가겠습니까?

자신의 특기를 살리는 길인데

잡아야지요

 

그런데 마침 예수님이 지나가니가 옳지 우연을 가장한 미필적 고의 사건으로 가장해서 예수님을 시험하는 겁니다.

 

병신이지요 정작 본인들이 걸려든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만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넘어뜨릴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미리 아시고 그들의 존재성 보다 앞서서

창세전에 미리 아시고

도리어 역으로 말려드는

(십자가 지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는데 성공한게 아니라, 모든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데 성공한 예수님을 오히려 도운 꼴이 되는 겁니다. 자기 얼굴에 누워서 침뱉은 격인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지혜와 반드시 맞물리는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역전에 역전으로써

부정의 부정으로써

저들의 눈에는 어떻게서든 미운 오리 예수로만 보이도록 하셨기에

어떻게 해서든 그들은 행함을 나타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즉 믿음이 없다는 증거로써 행함을 채우는 겁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미워 했으면 그 빈자리를 행함으로 채울려고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을 자랑스럽게 예수님을 떠 볼려고 들이대는 겁니다.

그 정도로 자신들은 정의를 위해 사는 자들이다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그런 모습이 너희 자신들의 탯줄을 끊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스스로가 처음자리의 원천자리를

즉 긍휼과 자비인 인자하심의 자리를 스스로가 거부하고

거부 정도가 아니라 죽여버리고

삭제 시키는 것도 모잘라서

그것을 자랑까지 한다고

자긍심을 가진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원천자리입니다.

 

(36:9, 개역)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인간들이 얼마나 웃끼는지

 

생명의 원천자리인 인자하심의 자리를

스스로가 삭제 한다는 겁니다.

 

그래놓고도 자랑하는 겁니다.

우리는 생명의 원천 자리를 삭제했노라 라고?????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개혁이라고

성화라고

 

웃끼죠.

 

사실상 개 만도 못한 인간이 오로지 예수님의 긍휼인 부스러기를 통해서

용서받은 살려준바가 되는데

본인 스스로가 그 생명의 원천 자리를 삭제했노라고 착각하는 겁니다.

 

그것을 미리 다 아시고

한번 삭제 해 보렴

삭제 되는지

과연 삭제가 되는지

 

정작 생명의 원천은 우리를 삭제 시킬려고 왔는데

도리어 삭제를 시키면 삭제 되는줄로 착각하는 자들의 속성을 드러내더라 말이죠.

 

이것이 교회사람의 특징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이런 사고방식으로만 똘똘 뭉쳐져 있는지

 

그 속에서 빠져나온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불가능하잖아요

다윗 또한 그 속에서 가장 그 일에 가장 맨 앞에서 앞장섰던 인물이였다는 겁니다.

사도바울도 그러했고요.

그런데 불가능한 일이 벌어진 겁니다.

그 속에서 빼내임을 당하게 되니까

다윗이 이 소리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서는 생명의 원천만 쳐다 보게 되니

이제는 눈에 보이는 교회나 성전이나 그 딴 것에 신경을 안 쓰는 겁니다.

이미 생명의 원천을 다 봐버렸기 때문이니까 말이죠.

 

문제는 그것이 안 덮쳐진 자들만이

오로지 어떻게 해서든 그 생명의 원천 자리를 삭제 할려고 달려드는 거죠.

달려 들면 달려 들수록 뭔가 씌인자들처럼 다들 달려들도록 하는 것이

생명의 원천 다운 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과연 삭제 되냐 말이죠.

삭제 되기는커녕 삭제 할려고 달려드는 놈들이 도리어 삭제 당하는 겁니다.

 

이런 양쪽 기능을 다 발현하는 것이 생명의 원천이다는 겁니다.

 

곧 삭제 곧 빈자리 이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정작 우리가 이 생명의 원천에 의해서 삭제함을 당해야 할 판국에 놓여졌는데

거꾸로 이 생명의 원천을 삭제 할려고 달려든다는 겁니다.

삭제한다고 삭제될 생명의 원천입니까?

 

웃끼잖아요

그런데 왜 더 기가막히냐 하면

이것이 몇몇 사람의 행동이 아니라

모든 인간 이제껏 살다 죽었던 모든 인간들의 평생 하는 짖이

바로 이것 뿐이다는 사실이다는 겁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또 오늘 이것을 말하고 있는 다윗이나

사울왕 뿐만 아니라

평생을 살아도 앞으로도 살아도 이 짖만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생명의 원천 자리를 어떻게 해서든 삭제 시킬려고 말이죠.

어쩔수가 없어요 어쩔수가

 

제가 이 말을 한다고 해서 아 이제 알았으니까 이것이 잘못된 짓이니까 멈추겠지

천만의 말씀

 

자꾸 성화론자들은 멈출수가 있다고 우기는데

멈추기는커녕 그들은 오히려 더 가속을 걸고 있더라 말이죠.

 

왜 그럼 왜 멈출수가 없습니까?

이렇게 알아도 왜 안되는 겁니까?

 

안되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생명의 원천 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내 숙제가 아니라 생명의 원천의 숙제인 겁니다.

고맙게도 너무 너무 고맙게도

생명의 원천은 그 사명을 결국은 다 해냈고 해내시며 해내실겁니다. 즉 미래완료로써 다가오셨으니 이미 넉넉히 다 이루셨다는 겁니다.

 

아니 뭘요?

 

우리를 삭제 하시는 것 말입니다.

 

걱정 마세요 왜 우리는 멈추지 못할까요? 라고 걱정하지 마시고

우리는 삭제 당한다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어 있다는 것에 기뻐하십시오 이것이 기쁜소식 복음이다는 겁니다.

 

즉 빈자리에 백날 앉아도 쭐꾸덕 미끄러진다는 겁니다.

 

이 빈자리가 주의 보좌 아닙니까?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수처럼 철철철 흘러 넘치는 곳 아닙니까?

 

누가 과연 다 삭제 할 수 있겠습니까?

퍼도 퍼도 줄지 않는데?

그 어떤 가뭄이 들어도 더더욱 풍성하게 샘 쏫는데???

 

목마른자들아 목마르지 다 내게로 오라

값없이 마시라

 

(55:1, 개역)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5:6, 개역)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21:6, 개역)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22:17, 개역)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놀랍게도 이 풍성함을 누가 시기하느냐 하면 교회사람이 싫어한다는 점입니다.

왜 값없이, 원하는자, 공짜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느냐 에 대한 반발입니다.

 

맏아들이 그랬거든요.

? 자신들은 이 생명수를 얻고자 새가빠지게 일했다 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현대교회를 말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다윗의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을 말하고 있다면

현대교회는 두 말 할 것 없다 라는 식입니다.

어떤 누구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결국 불가능하지요

뭔가가 덮쳐져서 우리는 맏아들처럼 탕자에게 베풀어지는 주의 인자하심에

반발을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왜 우리는 이런 병에 걸렸는가?

 

놀라지 마십시오 이것이 바로 주의 인자하심 곧 생명의 원천 자리가 펼치는 자작극이라는 사실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 또한 이 생명의 원천 자리를 무시하고서는

자신의 믿음을 과시하다가 쭐꾸덕 그 빈자리에 의해 미끄러지는 겁니다.

고맙게도 그 빈자리가 꼬꼬덱 꼬꼬덱 꼬꼬덱 이라고 새노래 곧 불가능한 불가능의 불가능인 새노래를 불러줌으로써 베드로가 그 속에서 빠져나옴을 당하는 겁니다.

 

결국 예수의 사람이라면 이 과정을 격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교회의 사람은 나의 죄를 위해 울어주는 우리가 평상시에 무시하는 닭이 없어서

닭의 울음이 없어서 거기거 멈춰 버리는 겁니다.

청함까지만 받고 택함 까지는 못 받는 겁니다.

그들은 물론 당연히 청함이 곧 선택이라고 굳게 믿다가 죽을 수 밖에 없는 거지요.

 

아니 생각 해 보세요

믿음이 없거나

말씀을 실천안했거나

예수님을 똑바로 알지 못해서가 아닌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닭의 울음이 없어서 예수의 사람이 될 수 없다 라는 것이

말이 되냐 말이죠.

성화론자 개혁주의자들이 들으면 기가막히고 코가 막힌 말도 안되는 소리 아닙니까?

 

문제는 예수님이 닭을 안 주신다는 점입니다.

교회사람은 거기까지 멈춰 버리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의 사람은 일체 자신의 행함이든 믿음이든 잘하든 못하든 일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오로지 닭 한 마리 보내서 그 닭에 의해서만 구원 시킨다니

 

졸지에 교리고 성전이고 뭐고 다 무너지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의 사람은 그것 외에는 구원이 없다 라는 것을

이 말도 안되는 것을 또 믿네?

 

참 나

 

그러니 모든 대화가 마치 십자가의 두 강도의 대화에서 벗어난 언어가 없는 셈이다는 겁니다.

아니다 다양성이다 라고 우기지만 정작 그 의미는 거기에 다 담겨져 있다는 겁니다.

 

문제가 그 대화 내용들이 납득이 안되는 불가해한 그야 말로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는 거죠.

 

에잇~ 이게 무슨 복음이고 라는 소리를 복음 스스로가 듣는 식으로 복음이 일한다는 겁니다.

생명의 원천이 그렇게 일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반발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평생을 마귀자식 노릇만 하는 겁니다.

 

벗어날수가 없어요.

 

그러나 고쳐 달라는 말 밖에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주여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는 말 밖에 뻔뻔스럽게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것은 실천이 아닌 당위 곧 하지 않고서는 못배기는 존재 이전의 당위이다는 겁니다.

 

왜 이것을 이스라엘 요츰으로 치면 교회사람에게서는 들을수가 없었을까요?

 

아니 그럼 교회사람이 왜 그런 소리를 합니까? 뭐가 아쉬워서????

뭐가 부족해서 말이죠.

 

그래서 교회사람과 예수사람의 이 차이는 인간이 의도적으로 닭을 돈주고 사와서

제발 닭아 나를 위해서 울어주렴 백날 해도 소용없듯이

그 차이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두 강도 사이에서 활발하게 일하신 덕분에 성경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신바 된 것이다 라는 거죠.

 

그들 사이에서 예수님이 무슨 일을 했냐 말이죠?

 

죽어가시면서 까지 옆의 강도 곧 다윗을 건지시는 주의 인자하심을 펼치신다는 점입니다.

 

그것을 다윗이 본 겁니다.

 

다윗은 자기도 뻔뻔스럽게 교회사람 짖만 골라서 해 놓고서는

거기서 빼 달라고 뻔뻔스럽게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 불 속에서 만난 주님이거든요.

불가능한 만남 이거든요.

빈자리에서 만난 예수님이거든요.

나는 당연히 미끄려져 자빠져 죽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 분은 죄 없는 분으로써 그의 인자하심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라는 겁니다.

 

그 인자하심을 봐 버렸기 때문에

감히 뻔뻔스럽게 외치는 겁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더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라고

아주 이제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서 외치는 겁니다.

 

이 본문 시편 36편은 그렇게 외치는 겁니다.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외침

곧 불가능한 외침이다는 겁니다.

 

다윗 지도 예수님을 삭제 할려고 달려들고서는

이제는 이 분이 옳았고 나는 틀렸다 라고

오히려 기쁘게 외치더라 말이죠.

 

그러나 누가 뭐라고 꼬투리 잡고 늘어져도

다윗은 아니 외치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생명의 원천은 이미 다 완성 되었는데 누가 반발하느냐고 뭐 뭐 뭐

 

그러나 교회사람들의 특징은 그 보좌가 비어있다는 이유로

오히려 더 채울려고 환장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곧 탐욕입니다.

괜히 교회 다니다 보니 그 빈보좌를 본겁니다.

그러니 미치고 날뜁니다.

그 비어있는 자리를 견디지 못하는 겁니다.

 

하늘 영광 다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오신 생명의 원천은 안 보이고

 

정작 늘 하늘을 탐하고 빈보좌가 그 탐심을 더더욱 부채질하는 그 악한영 심으심에

그들은 얽매이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의 사람은 이스라엘도 삭제

성전도 삭제

나도 삭제 모든 것을 다 삭제하시는 생명의 원천의 기능에 감사하는 겁니다.

 

이것이 다윗이 증거하는 생명의 원천의 기능입니다.

앞으로 다윗이 말하는 눈에 보이는 것들 곧 자신도 포함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의 삭제가

바로 생명의 원천이 든든하게 있다는 사실에서 누락 되어도 상관이 없다고 증거하는 겁니다.

 

?

생명의 원천은 그에게 있기 때문이지 사람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십자가를 싫어할 수밖에 없고

사람이 좋아하는 소리를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거기에서 빼내시는 작업을 다윗은 감사하게도 예수님이 하신다고

그 불가능한 말도 안되는 일을 생명의 원천이 직접 나서서 하신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내가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물을 마시게 해 주겠다는 겁니다.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물은 마시면 마실수록 오히려 더 갈증나게 됩니다.
그런데 다시는 물을 길어 오르지 않도록 해 주겠다는 것도 말도 안되는데 그것에 호응하면서 목마르지 않게 해 주겠다면서

갑자기 물 이야기 에서 죄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너의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말입니다.

너를 책임져 줄
갈증을 해결해 주는 남편 데리고 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갈증 그 죄악을 책임져 줄 남편 곧 주인이 없다는 겁니다.
이런 우물가의 여인이나 밤에 몰래 찾아온 이스라엘의 선생 니고데모나 둘 다 목마른 자들이다는 겁니다.
채워도 채워도 밑빠진 독이라서 물을 줘도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즉 불가능한데 더 불가능한 소리를 합니다.
마치 지난 시간의 새노래처럼
벙어리가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불가능한데
더더욱 건강한자도 못 부르는 새노래를 어떻게 벙어리로써 부른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하신다는 겁니다.
그것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 곧 주님의 살과 피를 주겠다는 겁니다.

그리고서는 남편 데리고 오라는 말은 결국 인자하심 곧 생명의 원천은 자신만이 준다는 겁니다.

이것이 야곱의 우물 보다 더 우월한
심지어 예루살렘보다도 더 우월한
생명의 원천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 원천이 바로 십자가에서 곧 두 강도가 반드시 대조적으로 깔리는 그 상황 속에서 그 둘 사이에서 나타나는 생명의 원천
다른 말로 하면 주의 오른편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말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주의 용서만으로만 모인 자들을 찾으시는 주님의 섬김이 있는 예배이지

인간이 드리는 예배가 아닌 거죠.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로써 모으시는 겁니다.
기존의 교회를 깨뜨리가면서 그 무너진 교회 속에서만 예수의 사람을 찾는 겁니다.
실지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유대인들이 피해다니면서 삥둘러서 절대로 사마리아 거주지역을 발로 발지 않는 곳을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걸으시면서 찾으시는 겁니다.

교회 사람과 예수 사람은 인간이 그 어떤 수를 써도 구별할수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살과 피로써만 구별될 뿐입니다.
다윗은 그래서 이 말도 안되는 소리를

불가능한 그대로 내어놓습니다.
인간의 믿음으로 믿는 것이 가능하다는 취지가 아닌
불가능하기에 이렇게 증거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주의 인자하심은 바로 이런 맥락 속에서 벌어지는 겁니다.
마귀의 세계까지 깊숙히 파고 들면서 말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사랑)은 이렇게 악을 싫어하시면서까지
자기 사랑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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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자에게는 쓸데 없는 예수

건강한 자에게는 불쾌한 예수

 

(9:12,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2:17,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5:3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오로지 죄인 에게만 의미있는 예수

 

(9:13, 개역)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2:17,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원본 보다 더 원본적인 시뮬라크르(환상가로지르기)

 

원가지 이스라엘 보다 더 이스라엘적인 개같은 이방인 중의 이방인,

여러 과부 중에 한 과부, 여러 문둥병자 중의 한 문둥병자 ~~~~~

 

실로암 소경과 탕자 그리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가지고서

성전(거룩한)을 장악한 자들의 악마성을 들추어내는데 있어서

그들이 가장 비하하는 자들만 골라서

가장 자신만만해 하는 자랑거리로써

비교우위를 나타낼 수 밖에 없도록 한다.

 

저 세리(매국노)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주여 ~~~~

 

이렇게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는

인간의 악마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데 있어서

가장 미련한 것을 택하는 이유이다.

 

에수님은 세상을 개혁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냥 약만 바짝 올리고, 죽음만 자초하는 일만 골라서 할 뿐이다.

 

어리석음 중의 가장 더 어리석음이다. 곧 십자가의 지혜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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