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큰 애로우 Broken Arrow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1:46, 개역)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1:47, 개역)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1:48, 개역)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1:49, 개역)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1:50, 개역)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1:51, 개역)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1:52, 개역)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1:53, 개역)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1:54, 개역)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궁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1:55, 개역)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37:1, 개역) [다윗의 시]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37:2, 개역)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37:3, 개역)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37:4, 개역)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37:5, 개역)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37:6, 개역)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37:7, 개역)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37:8, 개역)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37:9, 개역)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37:10, 개역)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37:11, 개역)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37:12, 개역)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향하여 그 이를 가는도다

(37:13, 개역)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 그 날의 이름을 보심이로다

(37:14, 개역)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기어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37:15, 개역) 그 칼은 자기의 마음을 찌르고 그 활은 부러지리로다

(37:16, 개역) 의인의 적은 소유가 많은 악인의 풍부함보다 승하도다

(37:17, 개역) 악인의 팔은 부러지나 의인은 여호와께서 붙드시는도다

(37:18, 개역) 여호와께서 완전한 자의 날을 아시니 저희 기업은 영원하리로다

(37:19, 개역) 저희는 환난 때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기근의 날에도 풍족하려니와

(37:20, 개역)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 되어 없어지리로다

(37:21, 개역) 악인은 꾸고 갚지 아니하나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

(37:22, 개역) 주의 복을 받은 자는 땅을 차지하고 주의 저주를 받은 자는 끊어지리로다

(37:23, 개역)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37:24, 개역)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37:25, 개역)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37:26, 개역)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37:27, 개역)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영히 거하리니

(37:28, 개역)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37:29, 개역)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37:30, 개역) 의인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그 혀는 공의를 이르며

(37:31, 개역) 그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 걸음에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37:32, 개역)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37:33, 개역) 여호와는 저를 그 손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재판 때에도 정죄치 아니하시리로다

(37:34, 개역) 여호와를 바라고 그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목도하리로다

(37:35, 개역)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으나

(37:36, 개역) 사람이 지날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

(37:37, 개역)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37:38, 개역)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결국은 끊어질 것이나

(37:39, 개역) 의인의 구원은 여호와께 있으니 그는 환난 때에 저희 산성이시로다

(37:40, 개역) 여호와께서 저희를 도와 건지시되 악인에게서 건져 구원하심은 그를 의지한 연고로다

 

 

오늘 아침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생 곧 영원히 사는 영생불멸하는 것 곧 천국생활이겠지요.

 

그런데 이게 말아 안된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즉 영생은 영원함이라는 시간의 소유가 되는 것인데

인간이 시간의 한 부분만을 괜히 맛보는 바람에

이 신체가 영생을 곧 영원함이라는 시간의 전부를 소유하고파 한다는 점입니다.

 

사실상 모든 종교가 이 영생을 말하지 않는다면 장사가 안되고 접어야 하겠죠.

 

그러니 말도 안되는 영생을 곧 구원 곧 영생불멸을 말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거죠.

단순히 돈이라는 자본보다

성경말씀은 그것을 악령이 들렸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가?

바로 그 구원장사, 영생장사. 영생불멸장사. 천국장사를 파괴하러 왔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그런 악마들의 영생장사 구원장사 천국장사 교회장사를 들통내고서는

예수님 자신이 들고온 영생 구원 천국을 다르게 표현을 하시는데

이것은 사람을 끌어 모으거나 돈을 버는게 아니라

도리어 제발 좀 나가도 라고 쫏아내는 방식이다는 겁니다.

심지어 예수님 자신이 뽑은 제자들에게 마저

너희들도 가지 왜 안가노 라고 자꾸 밀어내고 쫏아내고자 하는 식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영생은 뭐냐?

 

그것도 구약에서 말한 하늘에서 내려온 음식인 만나라는 양식과 대조하면서

그 만나는 너희 조상이 먹었지만 정작 썩는 양식이라는 겁니다.

너희 조상은 다 죽었다 라는 겁니다.


(요 6:48, 개역)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요 6:49, 개역)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 6:50, 개역)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 6:51, 개역)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요 6:52, 개역)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썩지 않는 양식이 있다고 해 놓고서는

억수로 먹고 싶도록 유도하시고서는 정작 그 양식이

자신의 살과 피 라고 하니까

 

그만 다들 돌아서는 겁니다.

예수님이 직접 베푼 기적을 보고 따랐던 모든 사람들이

다 돌아설 정도로 그 말 한마디에 다 돌아서는 겁니다.

그 정도로 충격적인 발언이였던 겁니다.

지금은 여사로 듣지만 말이죠.

얼마나 충격적이면 아무도 이 말씀을 받을 만한 자가 없을 정도이니까 말입니다.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요 12:38,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롬 10:16, 개역)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 정도로 불가능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리만 골라서 하신 겁니다,
교회는 믿을 수 있는 것만 골라 말하지만 복음은 정반대입니다. 도저히 못 믿는 것만 골라서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그야말로 그당시의 성경해석을 다 뒤엎어버리는 식입니다.
물론 오늘날은 믿음 주고파서 난리난 사기만 치는 식으로 전하겠지만 말이죠. 예수님 믿는 것 어렵지 않아요~~ 라고,

심지어 제자들에게마저 돌아서서 가라는 식으로 왜 안가냐고? 저들을 따라 가라꼬 다구치십니다.

 

이것이 참된 양식이라는 영생의 양식이라는 거죠.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영생은 역시나 종교장사일 뿐이니

예수님이 말씀하신바와 거리가 먼 겁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생이 아니고

억수로 불쾌하기 짝이 없고

오죽하면 등돌리고 돌아서게 만들어 버리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양식 영생 구원 천국이라야

기쁜소식 복음이다는 겁니다.


즉 인간에게는 하나도 안 기쁜소식이다는 거죠. 하나도 복음 복된 소리가 아니다는 겁니다.
오로지 예수님 혼자가에게만 기쁜소식이다는 겁니다.

 

어제 어머니랑 이런 대화를 했습니다.

노래와 새노래의 차이점이 뭔고 하니

 

노래는 사람들이 듣고파 하고 좋아라 하고

자꾸 반복해서 부르고파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중독성이 강하고

몇 번 반복만 하면 사람들을 최면을 걸수 있습니다.

최면 걸리면 뭐든지 다 사기칠수가 있는 거죠.

돈 뜯어내는 방법입니다.

가스펠이 거기에 이용 됩니다. 찬송가도 귀에 익은 곡들 말입니다.
찬양으로 마취를 하는 거죠.

 

그런데 새노래는 처음부터 딱 듣기 싫은 노래이다는 겁니다.

혹 누군가 끝까지 들을 거야 라고 큰맘먹고 다짐해도
역겹고 구토가 일어나고 병까지 들게 만들 정도로

거북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 새노래이다는 겁니다.
사실은 새노래가 그를 거부하는 겁니다.

결국 어떻게 하면 저 새노래를 없애버릴까 하면서 안색이 다 변하게 하는 것이 새노래로써

졸지에 멀쩡하던 인간이 마귀들린냥 가인처럼 안색이 변하게 하는 새노래 라는 겁니다.

곧 계시죠. 이것이 진짜 복음입니다. 멀쩡하던 인간이 악마의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러니 새노래가 불려지면 이것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살인까지 벌어집니다. 전쟁이죠 전쟁. 소동

나도 모르게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로 만드는 노래가 새노래이다는 거죠,

킹스맨이였던가? 교회에서 벌어진 살인극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진짜 참된 양식이요 새노래이다는 겁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기를 거부하고 돌아서 버린 사람이 정상입니다.

누가 나는 더러운 인간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반드시 먹어야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수천년 만에 나타난 변화산의 모세는 기껏 한다는 소리가 주의 살과 피를 먹여 달라고
주의 별세를 이야기 할 뿐입니다.
그 정도로 자신은 죄인 중의 괴수이다는 겁니다,
모세도 기껏 나타나서 한다는 소리가 그 정도이면 우리는 뭐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인 겁니다.

 

결국 오늘 본문에 나타난 악인을 없애는 것이 참된 영생 새노래인 겁니다.

악을 가만히 둔채로

따로 국밥처럼 영생과 새노래를 추구하는게 아니라

 

악을 없애는 식으로

즉 위에서 언급한 가짜 영생. 종교장사. 구원장사. 천국장사를 하는 이런 악들을 없애는 식으로써

 

영생과 새노래가 펼쳐진다는 겁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라고 아가서에서 말씀했다면

죽음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사랑은 가짜이다는 거죠.

 

그렇다고 거짓선지자들처럼 평안하다 평안하다 대충 대충 고치는 식이 아니라

 

제대로 이 죽음이라는 소굴 속에 들어가서 죽음을 이기는 사랑을 구체화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악도 구체화 되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제가 놀란 점은

저 역시도 악에 속한 자로써

세상을 살펴 보니까

 

사람들은 악이 없어지기를 원치 않는다는 점을 발견하고서 깜짝 놀랬습니다.

 

즉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이 악에 속해 있어서 갇혀 있다는 의식이 없다는 겁니다.

 

악에게 시달려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악인이 아무리 들끓어도 나만 깨끗하게 살다가 천국가면 되고

지옥 가는 놈은 저절로 지옥에 갈테니 구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의식이

오히려 교회사람들에게 더 강하다는 겁니다.

 

즉 교회 밖의 사람들은 오히려 악에게 시달리고 있는데 말이죠.

교회 안 이라는 안전빵이 있으니 괜찮다는 겁니다.
마치 선민의식 때문에 쫄딱 망한 이스라엘과 다를바 없습니다.
 

악에게 시달린다는 말은 자신이 악함 속에서 악한 짖만 하는 것에 괴로움을 격게 되니까

악을 의식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처럼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이렇게 잘하는데 누가 자기를 건드리겠습니까?

이렇게 똑바로 잘 살고 있는데

그러니 미리 저 세리와 같지 않음에 대한 감사로 저들과 거리두기를 했기에

그들은 평안 평안을 외칠 수밖에 없다는 거죠.

요즘 교회가 이런식으로 평안 평안을 외치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악이 없어지기를 소망하지 않게 되듯이 아주 당연한 것이 된다는 점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악에 속해서 우리야 장군을 죽이고 율법을 이용해서 악을 싫어하는 척만 했을 뿐

정작 자신은 악에 속해 있는 원수이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용서가 오니까 긍휼이 오니까

주의 살과 피를 먹여주시니까

비로소 악을 의식하게 된다는 겁니다.

 

왜 주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하는 줄 아십니까?

나는 깨끗한 인간이라서 그런 식인종과 같은 짓을 못하겠다고 다들 돌아서잖습니까?

그 놈들이 악마들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베푼 기적을 볼때는

목숨을 걸고서 라도 주님을 따르겠다는 자들이

정작 주님의 살과 피는 필요 없다고

 

그렇게 나는 나쁜놈 악인이 아니다고 다들 등 돌리고 돌아서는 겁니다.

 

바로 그런 사고방식을 돌려놓는 주의 살과 피

곧 십자가의 용서 때문에 비로소 자신에게 정직한 영이 없는 원수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처럼 악에게 시달리게 됩니다.

악에게 시달리게 되니까

마치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왕 바로왕을 강퍅케 하니까

이스라엘이 안 부르짖고는 못배기도록 하심으로써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었도다 하시는 자작극을 펼치듯이

다윗이 악에게 시달리게 되니까

이렇게 오늘 본문처럼 외치는 겁니다.

 

악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보다 더 어렵게 주님은 진행을 하시는 겁니다.

 

악이 있어야 그 악을 없애는 주님이 돋보이거든요.

 

이것이 외설성이라고 했습니다. 보충물이니까 말이죠.

 

그런데 이미 인간의 세계에

곧 악마의 세계에 런 보충물들이 한 가득합니다.

 

바리세인에게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할 정도

매국노 친일파 세리가 새때까리로 있고

 

유대인들에게는 사마리아 구역을 삥 둘러서 갈 정도로

사마리아인들이 새때까리로 있으니 이 얼마나 기가막힌 외설의 보충물이냐 말이죠.

 

그들은 이미 승리한 강자로써 이런 보충물로써 약자들을 사용하면 되는 것이고

힘센 로마에게는 아부하는 식으로 임기응변식으로 피해버리면 되니까 말이죠

 

그러니 뭐 하나 아쉬운게 없는데 악에서 구원해 달라고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모두 다 구비해 놓았다 말이죠.

이제 메시아만 이 중앙에 마련한 자리에 앉으면

자신들의 수고가 보상을 받는다 말이죠.

이 완벽한 시나리오 곧 제사에 누가 재를 뿌리고 초치겠냐 말이죠.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저들에게서 예수님은 악마죠. 마귀죠. 괴물이요 이단인 겁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로 형벌을 받도록 해야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외설성에 인간의 외설성이 다 말려드는 겁니다.

예수님 마저도 보충물로 삼을려다가 말이죠.

 

이게 바로 악의 실체를 드러내시는 방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뭘 해도 악한 짖만 할 뿐이다는 겁니다.

지금 저처럼 글쓰는 죄

복음 증거하는 죄

성경 아는 척 하는 죄

뭘 해도 다 죄 이다는 겁니다.

 

그럼 멈추면 되겠네

천만의 말씀

멈추지 못하는 죄가 있다는 거죠.

 

그럼 왜 악이 있습니까?

멈출수 있다면

그게 가능하다면 왜 있냐 말이죠!!

 

멈추면 멈췄다고 또 외설성을 펼치고 그에 따른 보충물을 또 또 ~~~~

 

바로 이런 불쾌함 때문에

 

세상에는 악이 없다고 합니다. 악이 있다고 선언하면 자신 또한 악이라고 인정을 해야하니까 말입니다.

그 악을 방관하고 있는 자들 또한 악이니까

자신들이 논리에도 안맞으니까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고 보는 겁니다.

 

심지어 이런 세상에 동의하는 자들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교회가 그런 짖을 합니다.

이제는 교회라기 보다는 힐링 건강센터가 되어서

무념무상처럼 도 딱는 놈들만

즉 마귀들만 가득한 곳이 교회가 되고 말았다는 거죠.

 

제발 교회 다니지 마세요

 

(24:15,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3:14, 개역)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가증한 것이 뭡니까?

빈자리에 인간이 졸지에 앉아버렸으니

빨리 도망치세요

교회 어디를 가도

예수님이 머리가 아닌 인간들이 다 그 머리 자리를 다 차지할 뿐입니다.

 

그래서 자기 교회는 악이 없다고 구라를 치는 거죠.

 

그러나 다윗은 악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심각하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내부에 이미 죽은 사울왕과 자기 자식 압살롬의 세계가 이미 원수로 밝혀졌지만

다윗은 더 심각하게 더 들어갑니다.

곧 자기자신이 그 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에 저들과도 똑같다고 말이죠.

왜 심각하냐 하면 자신이 그 악에서 빠져 나올 방법이 없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력으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 다윗이라는 원수를 제발 좀 없애 달라고 합니다.

악을 없애 달라고 말입니다.

 

악을 없애 달라는 말은 자신도 포함해서입니다.

자기만 없애 달라는 것은 자살을 정당화 하는 월권이라서 그것도 말이 안되고

이 세상의 본질을 파악했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 누가 생각나죠!!

맞습니다.

한나와 마리아의 기도

맞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세상의 본질을 파악했습니다.
곧 의인을 없애고자 하는 계략을 보게 된 겁니다.

 

그들의 기도는

악을 없애 달라는 것이 그 기도 내용의 핵심입니다.

 

왜일까요?

악에게 시달려 봤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이스라엘 내부에서 격게 되니

이게 무슨 이스라엘이냐 라는 거죠.
오히려 이스라엘이 의인을 죽이고자하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마리아 또한 누구에게 시달립니까?

율법을 쥔 자들 곧 돌을 든자 아닙니까?

율법 대로 돌을 들었으니까 말입니다.

법대로 하는데 뭐가 문제 입니까?

 

율법 외에 한 의가 왔기에

도리어 율법을 쥔 이스라엘이 졸지에 원수가 되는 겁니다.

의를 없애버릴려고 하기 때문인거죠.

그것도 뱃속에서 놀고 있는 의를 말입니다.

 

자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뱃속에 약속을 임신할 때 까지는 친한 이웃이였습니다.

서로가 율법 잘 지키도록 돕고자 했었고 말이죠.
그런데 막상 약속이 덮치니까
그들은 이 약속을 어떻게 해서든 죽이고자 하는 자로 돌변하는 겁니다.

 

왜 악을 없애 달라고 다급하게 심각하게 외치느냐?

바로 이 악들이 나를 괴롭히는게 아니라

(요 7:7,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요 15:18,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요 15:19, 개역)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 뱃속에 있는 의를 없앨려고 하기 때문에

그 정보를 알아버렸기 때문에(천사들이 얼마나 분주한지 이리 저리 피하라고 6.25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고 분주히 빠르게 일합니다.)

그 경계선에서 울부짖지 않고서는 못 배기도록 되어버린 겁니다.

 

그 정도로 악에게 시달리고 있다는 겁니다.

악은 의를 멸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악인인 다윗이

자신의 모습 속에서도 의를 소멸하고자

율법대로 4배나 갚으라 라는 사울왕과 똑같은 그 사고방식이 들통나고서는

 

이제야 본격적으로 악을 없애 달라고

자신을 포함해서 외치는 겁니다.

자신의 악을 들통남을 당하지 않는 자에게서는 이런 악을 없애달라는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도 스데반 집사님을 죽인 악인입니다.
더더욱 예수님을 핍박한 자입니다.
다윗도 우리야 장군을 철저한 계획아래에 죽인 살인마입니다.
베드로 또한 예수님을 넘어뜨릴려고 한 자 입니다.

왜? 다들 자기 의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게 악입니다.
그러니 이 악을 악인이면서도 이 악을 주님의 섬김 때문에 봤기에 없애 달라고 함이 마땅한 겁니다.
자기 존재가 먼저 라서가 아닌
존재 보다 앞선 당위 때문입니다. 복음 때문입니다. 새노래 말입니다.

 

그러니 악인을 없애 달라는 기도는 더더욱 불가능한 겁니다.
자기자신을 포함시켜야만 하니까요~~

자꾸 가능한 것으로 보는데

기도 자체가 불가능한 것으로써 그 불가능성을 그대로 유지하게 되는데

기도 그까짓꺼 나도 하겠다 라고 가능으로 바꿔 버리면

그게 기도입니까? 아니면 갓바윗 소원 빌 듯이 주문 하는 겁니까?

노래는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새노래는 불가능합니다.

불을 입에 넣고서 숯불에 입이 지져져야만 비로소 나오는 새노래입니다.

 

내용도 틀립니다.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하나님의 영광을 봐러렸네

나 죽어 마땅하구나 라는

 

전혀 다른 불가능한 새노래

전혀 다른 기도인 불가능한 기도를 하게 됩니다.

 

마리아의 기도는 그래서

이 악을 없애 달라고 브로큰 애로우를 외치는 겁니다.

폭격요청이지요. 부러진 화살 Broken Arrow

즉 적 뿐만 아니라 아군의 피해를 감수해서라도

악을 다 없애 달라는 최후의 폭격이다는 겁니다.

보호자 싸움이지 인간의 싸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개인의 원수도 아니요, 이스라엘의 원수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원수도 아닌 오직 전쟁 당사자 예수님의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이름 전쟁입니다.
이 아무것도 아닌, 하나 마나 한 것에 목숨을 걸듯이 전부를 걸면서 요청하는 겁니다.

 

그렇게 마리아는 악을 없애달라고 싸움붙여놓고서는 자기는 싹 빠지는 얍삽한 기도를 하지만

그 정도로 악에게 시달렸기 때문에 말입니다.

정작 우리 또한 나 또한 폭격물에 놓고서 악을 없애 달라는 겁니다.

나 자신의 악도 함께 몰살 시켜 달라고 말이죠.
 

이것이 오늘 다윗이 외치는 폭격요청 악을 없애 달라는 브로큰 애로우 이다는 겁니다.

 

자 그럼 마리아가 요청한 폭격요청 왜? 악을 없애달라는 그 기도 속의

핵폭탄은 그럼 누구입니까?

그렇죠 예수님입니다.

개인의 원수가 아닙니다. 예수님 원수 입니다.

예수님 숙제 입니다.

  

이 아기 예수님 때문에 졸지에 전쟁을 요청합니다.

아기 예수님이 아니면 전쟁 요청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유하는 여자의 특징이 이 전쟁요청입니다.
막사는 여자가 원수의 성문을 열듯이 말입니다.

(갈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아무리 말씀을 잘 지키는 자들도 전쟁 자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지 깨끗한 짖만 하다가

악인과 무관하게만 살다 그만이다는 식이기 떄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또 전쟁을 해도 자기 적군이지 자기자신이 하나님의 원수로 여겨서 전쟁을 요청하지는 않습니다.
회개를 요청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회개 할 줄도 모른다고 도와 달라고 하지 않는다 말입니다.

오로지 자기를 건드린 로마에 대한 독립전쟁이지
정작 그런 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의인 살해를 하는 이스라엘의 실상을 못 보여준다는 거죠.


그렇기에 아기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진짜 악인을 들추어내시면서 

아기 예수님이 전쟁의 이유이기에

이 아기 예수님으로 인해서 천국과 지옥이 갈려지기 때문에

이 전쟁 요청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어떤 정신병자 성화론집단은(개혁주의도 마찬가지)

이 와중에

마리아가 진짜로 성결 곧 순결하냐 안하냐를 따지고자

월경 임신이냐 월경임신이 아니냐를 따지더라 말이죠.

부정하면 안된다는 식이죠.

 

마치 실로암소경이 날때부터 소경인지라 단 한번도 빛을 본적이 없어

빛과 어두움을 구분을 못하는데 있어서

이 사람의 죄는 부모 죄인 유전인지

아니면 자기 죄인지를 신학적으로 풀어야 하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까지 시험하듯이 말입니다.

 

미친놈들이지요

마치 결백증 환자들 같아요

조금만 뭐 하면 손을 빠득 빠득 씻고

사마리아 구역을 아무리 지름길이라고 해도

일부러 삥 둘러가는

오늘날 교회가 다 이런 정신병에 걸린 결백증 환자들을 양성하고 있는데

사실은 이것이 바로 악이다 라는 겁니다.

 

이런 악에서 구하소서 라고 외치는자 있을까요?

우리 또한 맨날 저런 짓만 하는데 뭘

 

마리아도 마찬가지이고

한나도 마찬가지이고

다윗도 마찬가지인데


자기의 죄에서 벗어날 자가 없는 겁니다.
그것도 그냥 죄가 아닌
의인인척 하는 죄
악인 아니다고 우기는 죄 말입니다.
 

무슨 수로 이런 악에서 구해달라고 할 수 있겠냐 말이죠.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런 불가능함에 더 심한 불가능이 덮칩니다.

한나는 사무엘 선지자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다윗은 여디디야를

 

졸지에 뱃속에 임신하게 되니까


약속이 덮치니까

졸지에 졸지에

악에서 구해 달라고 아니 외치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 이들 약속 때문에

악들이 이 약속을 없애버릴려고 발악을 하면서 달려드는 것을 봐버렸거든요.

 

약속이 임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구하지도 않았던 요청입니다.

그들 자체적인 선은 없거든요.
악 뿐입니다.

그런데 악인이 악인을 없애 달라고 간구하며 부르짖는 불가능한 기도가 불가능하게 펼쳐집니다.

안 구하고는 못배길 정도로

악마들이 이 뱃속에 임한 약속을 어떻게 해서든 없애버릴려고 하는

악의 실체를 봐 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구하는 겁니다.

 

다윗은 여자도 아닌데 약속을 임신하니까

아니 사실은 약속이 임하니까

역이나 똑같이

한나에게도

마리아에게도

다윗은 이 악이 바로 이스라엘이였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죠.

 

약속을 누가 싫어합니까?

새노래를 누가 거부하냐 말이죠.

맏아들만이 탕자를 거부할 수 밖에 없거든요.

 

노래를 잘 부르는 자가 새노래를 죽일려고 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 즉 우리 또한 포함된 입장에서 모든 인간이 다 싫어하는 것이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엘리 제사장 가문의 사고방식이 퍼진 그 상황에서

사무엘 선지자의 등장은 곧 다윗의 등장이요 곧 예수님의 등장입니다.

 

곧 이스라엘의 악을 없애는 약속으로써 말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스라엘은 이 사무엘과 다윗과 예수님의 등장을 싫어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두 여인을 어떻게 해서든 괴롭히는 겁니다.

 

그 상황이 오늘 본문에서 한나의 기도처럼

마리아의 기도처럼 다윗은 기도하는 겁니다.

 

악에서 구해 달라고

 

이것이 다윗이 마리아가 또 한나가 기도하는게 아니라

그들 또한 악인데 졸지에 약속이 덮치다 보니

이 불가능한 기도를 안 외치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자신의 뱃속의 아기를 죽일려고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봐 버렸기 때문에

이 악을 없애 달라고

아니 부르짖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늘상 악 속에 삽니다.

의를 싫어합니다.

약속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악을 좋아 할 수 밖에 없는 육체에 갇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졸지에 약속이 덮치다 보니

우리가 싫어했던 의가 내 속에 들어오다 보니

 

비로소 이 세상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가게 되는 지를 알게 된 겁니다.

그거 알아서 뭐하게요?

아니 두 여인 한나 마리아가 알아봤지 더 그리 대단한 지식이라고

설사 알아도 여인의 몸으로 뭐 하겠습니까?

다들 남정네 판데기일 뿐인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에게 벌어진 이 사건이

이 숭고한 거룩이

 

이 세상의 흐름을 제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다윗은 이 기도 요청으로서

이스라엘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났음을 보게 됩니다.

 

비록 이스라엘이라고 해도 그 속에서 역사를 쫏는 자와(예수 잘 믿는 육체[]인 나)

예수님을 쫏는 자로 갈려진다는 것을 말입니다.(무조건 용서[십자가의 죽음]만을 바라보는 자)

 

다윗 역시나 죄인 중의 괴수로써

악인으로서

원수로써

십자가의 죽음이 덮치는 바람에

졸지에 악의 실상을 보게 됩니다.

그 악의 실상을 거쳐서

십자가의 죽음이 왜 벌어져야만 하는 지도 말입니다.

 

그리고 한나처럼

마리아처럼 기도 합니다.

 

브로큰 애로우

 

폭격요청

 

곧 악을 없애 달라고 말입니다.

 

 

(삼상 1:10, 개역)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삼상 1:11, 개역)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삼상 1:12, 개역)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삼상 1:13, 개역)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삼상 1:14, 개역)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삼상 1:15, 개역)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삼상 1:16, 개역)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삼상 1:17, 개역)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삼상 1:18, 개역)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삼상 1:1, 개역)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삼상 1:2, 개역)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삼상 1:3, 개역)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삼상 1:4, 개역)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삼상 1:5, 개역)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삼상 1:6, 개역)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삼상 1:7, 개역)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삼상 1:8, 개역)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삼상 1:9, 개역)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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