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 다윗과 번제와 속죄제를 원치 않는 십자가 (시편 40편)

 


(
40:7,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9:13, 개역)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12:7, 개역)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10:1, 개역)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10:2, 개역)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10:3, 개역)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10:4, 개역)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10:5, 개역)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10:6, 개역)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10:7, 개역)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10:8, 개역)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10:9, 개역)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10, 개역)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0:11, 개역)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0:12, 개역)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0:13, 개역)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0:14, 개역)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10:15, 개역)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10:16,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0:17, 개역)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0:18, 개역)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10:19, 개역)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10:20, 개역)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40: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40:2, 개역)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40:3, 개역)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40:4, 개역)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40:5, 개역)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40:6, 개역)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40:7,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40:8, 개역)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40:9, 개역) 내가 대회 중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40:10, 개역) 내가 주의 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대회 중에서 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

(40:11, 개역)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40:12, 개역)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 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40:13, 개역)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40:14, 개역)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로 다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로 다 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

(40:15, 개역) 나를 향하여 하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놀라게 하소서

(40:16, 개역) 무릇 주를 찾는 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40:17, 개역)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건지시는 자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십자가는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그렇다고 이중 기적인 기적의 반복이 아니라(그건 니체나 들뢰즈 쪽의 성화론사상 곧 불교이고요)
그건 악한 세대가 반복해서 요구하는 기적이고요.

 

십자가는 불가능 중의 불가능한 기적이다는 겁니다. 즉 요나의 표적입니다.

부정의 부정이라고 하면 지젝(라캉)의 사상이 생각나지만 이들은 정작 언약을 모르는 겁니다.
예수님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인간에게로 귀결 되는 인간의 숙제로 보는 겁니다.

그러니 자신들을 좋은 결과 쪽으로 의도적으로 자신들을 놓고 있기 때문에 웃끼는짖을 하는 역시나 성화론사상인 겁니다.
한국교회는 결국 다 성화론사상인 불교입니다. 교리 플러스 실천

 

비언약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악마들을 만들줄 모르고
(본인들이 마귀니까 마귀의 정체를 들추어내면 안되는 거죠.)
결과적으로 무조건 좋은 쪽으로 자신들을 놓아버리는 반칙을 자기멋대로 하는 식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게 아니라 자기들이 해요 그것이 성화론자(개혁주의)들의 발상과 똑같다는 겁니다.
이유 없이 자기들은 무조건 천국에 가야한다는 식인 거죠.
믿어 줬으니까 무신론자로써 믿음을 포기하는 믿음으로 믿어줬으니까 말이죠.

말도 안되는 소리죠 누구 마음대로?

십자가는 분명히 번제를 거쳐서 그 번제를 원치 않는 차원에서 증거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도 안되는 소리인 이유는 정작 그 번제를 누가 지키라고 했냐 말이죠.

주님 본인입니다. 그래놓고 번제나 속죄제를 원치 않는다고 하십니다.

 

(40:5, 개역)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40:6, 개역)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언제는 지키라 해 놓고서는 이제는 원치 않으니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뭐 이랬다 저랬다 하냐 말이죠.

그런데 반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옳치 하지 말라고 했으니 이제 안해야지 라는 자들 말입니다.
(요것을 이용해서 또 방종하면 안된다고 주로 교회주의자들이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복음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교회 곧 교회질서제도를 주장해야 먹고살수 있는 빌미를 마련하니까 말입니다.)

또 반대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동안 지켜왔던 마일리지가 다 무용지물이 된 자들 말입니다.

(대부분의 성화론자 개혁주의자들이지요. 바로 위의 방종도 반대하면서 이중적인 모습을 갖추는 위선자들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런 인간군상의 모습이기에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이들에게는 아니 우리 모두에게는 사랑이 없습니다.
애초부터, 처음부터 사랑이 없이 제사와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 겁니다.

구약적인 표현이라 거리감 느낀다면 요즘식으로 하면
예배와 찬양과 기도와 구제와 이웃사랑실천과 주일성수 십일조를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캬 이단적인 발언으로 이제 한국교회에서 매장당해야 겠죠?

사랑이 없이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 마나 한 짓을 한 겁니다.

그렇다고 아무리 해도 우리에게는 사랑이 없으니 말이죠.

그럼 어쩌라는 거냐?

 

지키냐 안 지키냐 라는 관건을 우리에게서 손 때자 말이죠.

바로 이 말을 말귀 못알아먹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육에 속한 말이 아니라 영에 속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 영에 속한 말을 한참 동안 했던 자도
결국 육에 속하는 말만 하는 집단으로 간 어떤 장로들을 본적이 있어서 하는 소리입니다.
사울왕처럼 괜히 성령을 맛보는 바람에 오히려 복수심이 가득한 행함의 세계로 가버리는 겁니다.

또 이런 자도 있습니다.

그럼 안해야지 라는 자와 같잖아!!

맞습니다. 그런 오해를 반드시 거쳐서

우리 또한 성경말씀을 오독하는 가운데

그 오독을 거쳐서

정독을 성령 때문에 하게 되는 겁니다.

즉 육은 백날 봐도 오독 뿐입니다.

성령 외에는 정독을 할 수가 없습니다. 0.003

 

그러니 1초 만에 구원된다는 기쁜소식을 누가 제일 싫어하겠습니까?

교회사람들입니다. 교회를 왜 차렸습니까?

1초 만에 구원이 안된다고 보기 때문에 교회를 차린 것 아닙니까?

성화론자들이 보면 열받는 소리가 바로 기쁜소식 복음 1초만에 구원이거든요!!

교회 종사자들도 필요가 없어요.

 

결국 누가 지키고 완성하느냐? 곧 우리에게는 없는 것으로 완성한다는 그 전제성을 깔기 때문에

불편한 복음이다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없는 것

 

네 맞습니다. 사랑입니다.

사랑이 얼마나 모호하고 추상적입니까?

그런데 이 추상적인 사랑을 단숨에 그 어떤 연결점이나

합리성 또는 이유와 원인 없이 단숨에 한 순간에

우연이 우연이 가장 우연하게 해소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나의 죄악을 담고서 대신 형벌받는 죽음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대신 죽는 죽음말입니다.

 

이건 말이 필요 없습니다.

구차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저절로 믿기싫어도 믿게 되고

사랑 할 줄 몰라도 사랑하게 됩니다.

 

곧 사랑으로 누가 완성하느냐 라는 것을 보자 라는 취지로

성경말씀 자체가 담대하게 도박걸 듯이 아주 아주 위험한 베팅을 거는 겁니다.

마치 욥기서에서 마귀에게 내기를 거는 여호와처럼 말입니다.

다 떨어질 것 예상하고 그 한 분에게 올인하는 식으로 그 분을 소개를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인간 구원 없습니다.

아니 같은 눈이라도 어쩜 그렇게 다를 수가 있냐 말이죠.

같은 말인데 같은 언어인데

보는 눈이 달라요

인간 구원에 대해 성경 백날 들따 봐도 없어요

예수님을 구원하는 내용 뿐입니다.

성경 백날 쳐다 봐도 ~하라 ~하지말라가 없어요

그런데 문자로 보면 그것 밖에 안보이니 참 기묘하죠

기묘한 이야기 ~~~~~

 

자 이렇게 되면 개인적으로 지키는 말씀의 의미는 다 날라갑니다.
오로지 집단으로써 지키는 말씀입니다.
자 또 이렇게 말하니까 교회가 그럼 바르게 해야겠군!! 더군다나 이스라엘이 실패를 했으니 우리는 더더욱 조심스럽게 실패하지 않도록 말이야!!

 

천만의 말씀 이스라엘이 실패할 정도면 우리도 안됩니다.

 

자 이런 소리를 하면 자꾸 그럼 안될거면 말라꼬 이런 소리를 하냐?

이런 소리 조차도 쓸데 없어 지는 것 아니냐?
이래도 안된다 저래도 안된다

어쩌란 말이냐?

 

안 그렇습니다.

 

그 한 분은 하시더라 말이죠. 그것도 사랑으로 말입니다.

 

왜 그 분 홀로 하셨다 라는 것은 왜 안보이는 것일까요?

성경에는 그 말 밖에 없는데!!!

 

개인이 안되는 사랑으로 율법완성을

집단인 이스라엘이나 교회가 한다고 그럼 되느냐? 역시나 안 됩니다.

 

그런데 단 한 분은 하셔서 다 이루시고

속건제처럼 보혜사 까지 주셔서 그것을 그리스도의 몸에게 공짜로 나누어 주셔서

집단으로 완성했지

우리가 한 게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 게 아니다 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은 자꾸 고백함으로써

그 공로를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게 돌린다 라는 점이

 

기존의 이스라엘과 자칭 교회라는 자들과의 차이점이다는 겁니다.

교회사람들과 차이나는 점입니다.

 

예를들면 쉽습니다.

구약에는 엘리야와 신약에는 부자청년입니다. 꼭 부자청년 뿐만 아닌 예수님 제자들 특히 수제자 베드로를 봐도 그렇습니다. 베드로 덕분에 우리의 모습도 지적받는 겁니다.

 

엘리야는 850 1 로 갈멜산에서 싸워 이겼습니다.

제단에 불 붙이는 싸움으로써 누가 살아계신 신이냐 라는 싸움에서 말입니다.

살아계신다 라는 것은 움직이고 활동하신다 그리고 약속을 지킨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번제 싸움입니다.

 

그 번제 싸움에서 이김으로써

그 승리를 번제가 아니요 오직 주님입니다 라고 말로 고백해도

주님에게는 안 통합니다. 일단 한 개인에게 꼿혀 버렸으니까요

그 어떤 세제나 지우개를 사용해도 지워지지 않는 육의 자랑이요 기념비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 정신분열을 치유나 고침이 아닌 더 더 더 자유롭게 누리는 이 불가능성이 바로

무조건 이 한 개인 곧 엘리야를 깨뜨리는 사랑을 누리게 하는 겁니다.

 

 

엘리야의 승리를 받지 않습니다.

850 1로 싸워 승리해 봤자

그것은 번제와 속죄제일 뿐

주님은 원치 않는 제사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엘리야가 도저히 만들어 낼수 없는

주님 쪽에서 다가오시는 770번의 용서인

7천명 남은자 만들기입니다.

 

결국 개인 문제가 아닌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비언약에 대한 언약의 지적으로써

개인 엘리야는 결국 자기에게로 회귀하는 기념비가 되는 겁니다.

 

즉 의도적으로 주님께서 엘리야 조차도 비언약으로 삼아서 언약을 보여주시지

저 이세벨과 아세라 바알 제사장들을 이겼다고 해서 바로 언약으로 되지 않습니다.

언약은 인간이 행하는게 아니라 주님이 직접 이루시는 약속입니다.

그러니 엘리야 조차도 믿어야 할 판국에 놓여진 비언약이지

저 비언약 곧 이단을 이겼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엘리야 자신은 이단이 아니게 되는게 아니다는 거죠. 역시나 엘리야 조차도 우상숭배자이긴 마찬가지 이다는 겁니다.

그럼 그런 엘리야를 누가 섬기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엘리야는 베드로처럼 이제 겨우 남을 78번 용서 했다고 우기는 식입니다. 비언약입니다.

이런 비언약을 예수님은 도리어 770번 용서 받아야 자로 만드는

결국 섬기는 자가 누구냐를 엘리야가 아닌 여호와 자신이 직접 증거하는 언약에 놓여졌다는 겁니다.

 

결국 엘리야가 말려 들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오늘 시편 40편도 그런 취지인 겁니다.

 

저는 역시나 놀랍게도

다윗이 이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어제 까지만 해도 다윗 역시나 율법 율법 이라고 가장 강조했던 자 아닙니까?

그랬던 번제와 속죄제를 드려야만 한다고 했던 자가

어떻게 1초 만에 마음이 바뀌어서 변덕이 죽 끓듯

 

번제와 속죄제가 아니다 기뻐하지 않는다 원치 않는 하나님이다 라고

무슨 근거로 이야기 할까요?

그것은 과거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미래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불가능한 소리만 하는 겁니다.

 

과거에서 찾으면 백이면 백 엘리야처럼 내 열심히 특심이다고 나만 남았다고 우길겁니다.

 

그 나 만 이라는 개인은 없다는 겁니다.

 

언약은 한 몸만을 겨냥한 겁니다.

히브리서에서 시편 40편을 인용한 내용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40:6, 개역)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40:7,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10:5, 개역)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10:6, 개역)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10:7, 개역)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결국 히브리서가 나오기 전 까지의 유대인의 육의 눈은 과거에서 찾다보니

번제와 속죄제를 원치 않는다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겁니다.

 

히브리서는 결국 예수님만을 증거하고 그 예수의 영을 곧 성령이 사도행전에서 예비되었다는 선언으로 인해 미래에서 다윗에게 덮쳤기에

 

다윗만이 알기에 유대인은 다윗이 증거한 예수님을 유대인 손으로 죽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다윗 본인이 그랬거든요. 말려들었지요. 그것이 십자가의 사랑이다는 겁니다.

 

역시나 엘리야가 말려 듬으로써

엘리야 속에 번제지켰음만 나오지

 

나 나 나 나만 남았나이다 만 남았지

 

우리는 아무리 둘러 봐도 안나오는 겁니다.

7천명을 백날 엘리야가 만들어 볼려고 해도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엘리야 역시나 번제와 속죄제를 원치 않는 그 이유가 값없이 원인 없는 결과로 덮쳐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비언약적인 모습이 분명히 드러날때에

비로소 섬기는 자가 누구냐 하는 겁니다.

 

우리를 단번에 이루는 분이 누구냐 라는 겁니다.

곧 섬기는 자죠.

 

이 분만이 두루마기에 기록된 자이다는 겁니다.

 

좀더 윗 구절을 보면

 

(10:1, 개역)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10:2, 개역)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10:3, 개역)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10:4, 개역)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10:5, 개역)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10:10, 개역)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여기서 [단번에] [1]라는 의미가 나옵니다.

상대적인 의미는 [해 마다 늘 드리는] 의미와 대조가 됩니다.

 

단번에 7천명 남은자

단번에 770번 용서

 

 

대조를 이루는 것이 바로

 

늘 드리는 남을 7번 용서 8번 용서 이것은 마침이 없이 늘 모호하게 의문만 더해갈 뿐입니다.

또 늘 드리는 나만 남았나이다. 내 열심히 특심인 나만 이라는 번제와 속죄제입니다. 왜 원치 않는지 이제 아시겠나요?

예배 찬양 기도 회개 금식 이웃사랑 교회봉사 주님이 원치 않습니다.

이것은 모호한 짖입니다.

단번에 1초와 대비를 이루는 비언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 단번에 1초를 이룰수 있느냐?

벌써 1초 지나갔는데? 무슨 수로 의식하냐 말이죠?

자아를 의식하는데???

 

우리 라는 그리스도의 몸은 단번에 1초 만에 형성이 됩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비언약을 고수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증거하십니다.

(2:16, 개역)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2:18, 개역)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2:1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20, 개역)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2:21, 개역)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2, 개역)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12:40, 개역)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14:58, 개역)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15:29, 개역)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9:22, 개역)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13:32, 개역)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24:7, 개역)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24:46, 개역)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27:63, 개역) 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8:31, 개역)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10:40, 개역)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고전 15:4, 개역)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번제 아닌 자비가 없음이 들통나는 것이 바로

 

나만 남았나이다 내 열심히 특심이온데 나만 남았다 라는 자살시위라는 겁니다.

 

시키는대로 했는데 왜 하나님은 묵묵부답으로 저 이세벨의 살인을 방관하느냐 라는 항의입니다.

 

 

자 이런 비언약적인 모습을 고수하는데 있어서
언약은 저들 자기가 옳다하는 모습에 틀린 모습으로 보여야 하니까

언약은 비언약의 비언약이 되는 겁니다.

광명한 천사의 탈을 한 마귀의 눈에는 예수님이 반드시 마귀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 언약이니까

 

(고후 11:14, 개역)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후 11:15, 개역)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여기에 한 개인 엘리야만 역인게 아니라 이스라엘이 역인 모습으로써

엘리야는 차라리 날 죽이라 라고

이스라엘이 끝나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고 집단의식을 표출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니가 눈으로 보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엘리야가 의식하는 이스라엘은 엘리야 개인의 확장 확대인 이스라엘인 겁니다.

그 의식은 요나선지자에게도 나타납니다.

왜 우리 이스라엘은 타락해도 회개케 하는데 신경 안쓰고

왜 남의 민족을 신경쓰느냐 라는 겁니다.

우리 라는 집단 속에는 니느웨 백성 곧 개같은 이방인은 넣으면 안된다는 의식을 고집하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의식이 비언약으로써 과연 이스라엘이 우리곧 집단으로 볼 수 없다 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곧 그리스도 몸의 머리의 주장인 겁니다.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기 싫다 라는 겁니다.

?

너와 너의 확장인 이스라엘 즉 개인화 된 이스라엘

육이 된 이스라엘은 번제와 속죄제를 원하니까 말이죠.

 

그럼 [][]의 개인이 아닌 [우리]?

도대체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이 아닌 [우리]는 누구냐 말이죠?

 

그것을 다윗은 오늘 시편 40편에서

번제와 속죄제를 원치 않는

 

사랑으로 역이는 [우리]이다 그 [우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을 원치 않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그 예수님이

직접 자신의 손으로 한 몸을 이루신 그 우리이지

 

누구 마음대로 아브라함 자손이 자기 멋대로 되고

누구 마음대로 단번에를 왜 늘 드리는 의문의 번제와 속죄제로 대처 할려고 하느냐 라고

바로 그런 자들과 대비되는 자들로써

 

단번에 의 열매들로만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한 몸을 이루었다는 겁니다.

? 머리니까

섬기는 자니까 말입니다.

 

번제와 속죄제 드리는게 과연 섬기는 것일까요?

남을 7번 용서 8번 용서가 과연 섬기는 것일까요?

 

아니다는 겁니다.

 

7천명이 단번에 1초 만에 구원 되는 두루마기에 기록된 사건이

두루마기에 기록되지도 않은 내 열심히 특심인 것은 7천명과 오히려 원수지간입니다.

소욕이 달라요 달라 육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은 원수지간이거든요.

 

770번 용서받기와 남 7번 용서하기는 두 세계의 소욕의 대립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 개인이나 말씀을 실천하는 차원의 개념은 다 날라가고

 

사랑을 누가 완성하느냐 로써

사랑은 독자적이지 않거든요.

 

남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것도 우연히

단번에

1초 만에 말입니다.

 

이것을 또 다른 말로는

 

3일만에 나타난다는 겁니다.

 

3이란 사건의 의미이지 숫자 개념이 아닙니다.

7천도 770번도 일만달란트도 숫자개념이 아닙니다.

숫자를 넘어서는 한 인물을 말하는 겁니다.

 

저런 숫자 소유해서 뭐하게요?

한 인물을 말하는데?

 

분명 남인데

타인인데

그 남을 역음으로써 사랑으로 완성한 그 [우리]가 나타나는데 바로

다윗은 그 남에 해당되는 자고

그 남을 사랑으로 완성한

번제와 속죄제로 하지 않는

자비로 완성한 그 우리를 이룬 분이 바로

 

(40:6, 개역)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40:7,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예수님이다 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물론 문자적으로 예수님이라고 하면

마치 숫자를 소유할려고 하듯이 미친 듯이 종교꾼들이 마약먹고 할 겁니다.

가능성이거든요.

 

그런데 비밀입니다.

무슨 소리인줄 모르게 했습니다.

 

모르니까 시편을 달달 외우는 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게 되니까 말이죠.

그럼 역시나 지금도 마찬가지이다는 겁니다.

 

일천번제와 또 어떤 집단은

내 학교 동기가 저번에 말했듯이 대한성서장막회라고 지금은 아마 신천지이지 싶은데

하여튼 여기도 족보가 복잡합니다

솔로몬 황금성전을 규격 그대로 복원하겠다고 ㅋㅋㅋㅋ

똘아이들이지요 왜 그럼 장소 예루살렘에 직접 가서 하지?

그런 남의 나라 돈이 되거든요.

돈 빼앗길 짓을 할까요?

 

이것 일천번제 등등 하는 놈들이 한 둘이가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악인을 다윗은 다윗 자신으로써 규정하기도 하고

다윗을 괴롭히는 악인으로써 악인에게 시달리는 타인으로 규정하는

혼용 혼합된 의미로써 나타내니까 다들 오독 할 수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시편 36편과 39편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또는 내가라는 다윗인지? 아니면 예수님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혼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구지 그 나 또는 내가를 누구라고 콕 찝어서 가려낼 필요가 없이

실제로 다윗의 자손이라고 다들 해결을 봤지만

역시나 다윗의 자손이 누구인줄 모르는 것은

오히려 다윗의 자손이 누구다 라고 알려준바 된

그 이스라엘이 더더욱 모르는 겁니다.

개같은 이방인은 몰라 봐야 당연한데 몰라야 할 자는 더 잘알아 보게 되고 말이죠.

실로암 소경이 예수님이 누구인줄 더 잘 알아보듯이 말입니다.

 

전체적으로 예수님이라고 보시면서 이 시편 40편을 보시면

결국 다윗 조차도 이 번제를 원치 않고 자비를 원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두 개로 갈려져야 하는 입장에 놓여졌다 라는 겁니다. 분절 분열이지요.

 

그러니 본인은 항상 악인이요 항상 범죄자로써 예수님을 증거하는 입장이지

감히 그 의인이나 믿음에 속해서 증거할 입장이 못된다는 겁니다.

 

즉 개같은 이방인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못 알아봐야 하는데 더 잘 알아보게 된 것은 이방인 범죄자 죄인의 입장이지

 

(65:1, 개역)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이스라엘이라는 자기 멋대로 우리아브라함 자손의 입장에서는 정작 못 알아봤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 본인은 지금 악인의 입장에 놓여져서

원수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본 겁니다.


즉 이사야 65장처럼 이스라엘 곧 의인의 자리에서 늘 부르던 중에 부르신바 늘 구하는 중에 구하는 바가 되지 않는

 

다윗을 이방인의 자리 곧 처음자리 원수의 자리에서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이 되겠다고

다윗을 왕이 아닌 백성의 자리에 재배치 시켜서 부르신바가 되게 하겠다는 겁니다.

 

죄인의 자리에서 비로소 번제도 속죄제도 제사를 원치 않는 주님을 본 겁니다.

주님이 원하는 제사는 상한심령 곧 인애와 자비인

 

단번의 제사인 직접 제사장과 제물이 되시는 화목제물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언약입니다.

비언약은

내가 의인인데 내 열심히 특심인데

번제도 속죄제도 잘 드리는데 무슨수로 예수님을 알아보겠습니까?

 

다윗과 우리는 어디까지나 항상 악인 죄인 괴수로써

항상 번제나 속죄제만을 원하는 수준 밖에 안되는 입장에서

이것이 아니요 예수님만이 옳다 라는

 

왜 아니되는 가를

왜 예수님만이 혼자 옳은가를

 

나 너 우리가 다 배제됨을 당함으로써

새로운 우리의 의미를 봐야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로써가 아닌

이방인으로써

우리 이다는 그리스도의 몸이다는 겁니다.

? 머리가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 머리는 이스라엘이 거부한 머리이거든요.

 

(118:22, 개역)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1:4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12:10, 개역)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20:17, 개역)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4:11, 개역)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벧전 2:7, 개역)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그렇다고 또 문자적으로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이 하나의 구원이 조건이 된다고 보시면 안됩니다.

 

원가지도 아끼지 않고 버렸는데

원래 죽어있던 가지를 접붙임 하시는 이유는 오로지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높이기 위함이지

인간 구원이 목적이 아니다는 겁니다.

죄인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의사의 기능이 환자에게만 맞을 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라고 아주 당당하게 내어놓는 것 조차도

아주 매몰차게 상을 뒤엎음 당하는 입장인 상태에서 그것을 거쳐서

예수님이 이루시는 우리 곧 그리스도의 몸을 봐야 한다는 거죠.

 

그러니 우리는 늘 머리를 배제 시킴으로써 이루는 몸을 추구할려고하고(그런 속성을 봄으로써 뭘 해도 죄만 나오는 이 저주의 몸을 비교 대조할 수 있는 한 몸 그리스도의 몸이 이루어졌다는 것에 감사 감사 또 감사)

예수님은 그 성전(=)을 허물어서 반대로 3일만에 단번에 1초 만에 세우시는 머릿돌을 세우고 완성하심으로써 저절로 이루어지는 몸을 말하는 겁니다.

 

두 몸의 싸움이다는 겁니다.

 

마치 하나님(하나님 나라)vs 하나님의 이름(예수님 나라)의 싸움처럼 말입니다.
이 공식을 생각해 보니 어떤 젊은 목사가 생각나는데

결국 그 도 몰랐던 거죠.

인간은 누구나 아는 척만 할 뿐이지

누가 늘 붙들어 주시느냐 라는 늘 섬기시는 분은 곧 머리를 늘 배제하기 마련입니다.

 

엘리야가 투덜 거리는 우리는 이세벨의 칼날에 의해 다 죽어나갈 판국에 놓여졌다고 보는 우리입니다.

 

참선지자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이미 완료된 이스라엘을 봐 버렸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을 오히려 공격하는 자들 아닙니까?

 

반대로 거짓선지자는 어떻게 해서든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을 사수하고 그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고 이 이스라엘(“우리”)에게는 그 어떤 부정한 일이 안 닥친다. 평강이다 평강이다 라고 주장하는, 마치 번제와 속죄제를 사수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나만 남았다고 합니다. 내 열심히 특심인데 나만 남으면

우리가 무슨 소용이 있냐 라는 거죠.

 

개인의 확대로써 우리이지?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겁니다. 한 몸이 아닌 거죠.

그 어떤 관계성도 없는, 십자가의 죽음과 무관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엘리야에게 그 우리는 우리가 아니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세벨에게 무릎 꿇지 않는

이세벨이 죽일수도 없는

목베인 영혼 남은자 7천명을 남겨 놨다 라는 겁니다.

 

이 말은 엘리야 개인의 시선에서 확립한 우리 라는 개념을

훨씬 뛰어넘는 의미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이 꼭 살아서 또는 엘리야의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울부짖는 그 장소에

구지 다 집결해서 눈으로 확인해서 보여줘야 할 필요성이 없는

한 개인의 시선을 뛰어넘는 우리 라는 겁니다.

이세벨이 아닌 엘리야 너의 그 번제를 고집하는 그 시선에서, 엘리야 너의 손에 죽은자 7천명을 예수님은 삼일 만에 살려냈다 라는 겁니다.

요나선지자에게 죽은 자를 삼일만에 살려냈다 라는 겁니다. 그것도 이스라엘백성이 아닌

니느웨 백성, 개같은 이방인을 말입니다.

 

엘리야 니가 무슨 근거로 죽었다 라고 선언하느냐 말이죠.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데? 죽어도 사는데 말입니다.

 

도대체 무슨 계산기???

무슨 손가락으로 셈을 했냐 말이죠.

그 손가락 짤라 버리겠다는 겁니다.

너는 숫자를 셀 권리가 없다 라는 겁니다.

 

번제? 속죄제? 드렸으니 나 옳잖아?

무슨 근거로 옳냐 말이죠?

 

너 개인이라는 수준에서 우리를 계산 할 때

백날 세어 보라 말이죠! 과연 7천 명이 나올수 있는 숫자인지 말이죠.

 

이것은 마치 상을 엎어버리고

성전을 헐라 3일 만에 짖겠다 라고 말하시는 예수님의 선언과 같다는 겁니다.

번제를 원치 않고 자비를 원한다는 선언 말입니다,

 

아니 그 어떤 건축적 기술 다 동원해 보라 말이죠.

과연 3일 만에 지을 수 있는 성전이 있을 수나 있냐 말이죠?????

 

? 물음표 억수로 날렸습니다.

불가능하다 말이다는 거죠.

 

아마 아직까지 현대건축 기술도로 안될껄요?

페인트만 해도 며칠을 해야 말리잖아요!!!

 

그래 그 불가능 내가 이룰게 라는 겁니다.

7천명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 불가능 내가 이룰게 라는 겁니다.

즉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래 불가능한데 더 불가능성으로 더 갭을 더더더 불가능하게 벌렸다는 겁니다.

여전히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가능성으로 바꾸게 되면 종교꾼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돈으로 다 밀어붙일텐데??

누구든지 다 따라 할수 있는게 아닌

원래 갭이 있는 불가능성을 아예 이제는 7천 일만달란트 770

7번 동물에 담구겠다는 겁니다.

더러워서 안먹겠다고 다 등돌리게 하겠다는 거죠.

 

그런데 인간들은 번제 속죄제 드렸으니 됐다 라는 사고방식을

도대체 무슨 근거로 가지냐 말이죠.

 

양탈늑대 무리에서 이웃사랑실천을 성경에서 하라고 했다 그러니 지켜야 한다 라고 우기던데

아무런 근거도 없어요

문자적이예요

이웃사랑실천의 기준도 없이 자기 멋대로 그 말씀 지켰다고 우기더라 말이죠.

무슨 근거로 지켰다고 우기죠?

자기가 설정한 이웃을?

기분탓일까요? 지 기분으로 한 것일까요?

 

불가능한데?????

 

그런데 이들이 자꾸 토를 다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꾸 그런식으로 보면 교회질서 곧 우리가 형성이 안된다는 겁니다.

개판 되면 안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강박증입니다.

남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그러니 개판 되면 안되는 거죠.

주님이 나서기 전에 우리 손으로 청결케 하겠다는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왜 자꾸 이런 상황에서 불가능하다고 말하느냐 하면?

우리자체는 처음부터 불가능했거든요??

 

처움부터 예수님 쪽에서 다가와서 형성된 우리라는 관계였지

내가 내 스스로 우리라는 관계성을 만들수가 없어요

없으니까

불가능하니까

그 대신 시스템을 구축하는 겁니다. 관계가 아닌 시스템 말입니다.

교회는 관계가 아닌 시스템을 구축하고서는 관계라고 우기는 식입니다.

광명한 천사들이거든요.

 

그렇다면 7천명이라는 불가능함을 말한 예수님이 졸지에 거짓말쟁이로 몰고 있는 셈입니다.

그들이 말이죠.

 

부자청년이 얼마나 자신만만했으면 어릴적부터 율법을 지켰다고 하는 겁니다.

이거는 보통 사람 같으면 엄두도 못내는 겁니다.

맞습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는 어릴적부터 지킨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언어란 내가 맞다 옳다 라는 것 자체가

남은 틀렸다 라는 것이 깔리는 겁니다.

 

고로 내가 옳다 나는 거짓말이 아니다 라면

예수님은 틀렸다 예수님은 거짓말이다 인게 됩니다.

 

도리어 당해야 할 판국인데 예수님 앞에서 그렇게 나는 옳지 않느냐

내 열심히 특심이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말한다는 자체는

 

예수 너는 무조건 틀렸고

나는 무조건 맞아

 

? 나는 어릴적부터 율법을 지켰거든 이라는 말과 같은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늘 드리던] 그 번제를

예수님께서 [단번에] 드려 보라고 부추깁니다. 불가능성을 말입니다.

 

자금 당장 전재산을 가난한자에게 나누어 주어 보라고?????

 

자기가 설정한 율법 지킴이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죠?

 

그것은 개인이지

 

우리가 아니잖습니까?

 

그들의 철저한 공동체 의식은

사실상 개인의 확장일 뿐

 

우리를 흉내내었을 뿐

 

아무도 우리[한 몸]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전혀 낯설기 짝이 없는 그 몸을 형성할 수가 없는 불가능의 [우리]였던 겁니다.

 

성경말씀에 기록된 우리를 형성해 보라 말이죠.

왜 엉터리 개인의 확장을 그 우상을 왜 거룩한 제단에 가증한 물건을 세우냐 말이죠.

 

도망치세요.

 

 

(24:14, 개역)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24:15,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24:16, 개역)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24:17, 개역)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 가지 말며

(24:18, 개역)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24:19, 개역)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24:20, 개역)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24:21, 개역)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4:22, 개역)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24:23, 개역)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24, 개역)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24:25, 개역)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4:26, 개역)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27, 개역)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24:28, 개역)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13:14, 개역)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부자청년은 자꾸 가증한 것을 우리 속에 집어 넣을려고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겁니다.

그 정도로 부자청년은 자신만만했다는 겁니다.

얼마나 흠이 없을 정도로 했기에

예수님 앞에서 까지 당당하게 말할수 있을 정도이냐 말이죠.

 

그 당당함을 완전히 비겁한 인간으로 1초 만에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 거룩하다고 착각한 것 배설물 가증한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얼마나 더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죠.

 

그 부자청년은 입으로만 당당한게 아닙니다.

실제로 그렇게 실천해 왔고 몸에 배여있는 것을

예수님 앞에서 까지 티를 팍팍 낼 정도입니다.

 

그런데 등돌리고 가 버리게 할 정도로 예수님은

과연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 있었냐 라는 것을 묻는 겁니다.

 

사랑?

 

얼마나 모호하고 추상적이냐 말이죠?

 

어떤 기준으로써의 사랑일까요?

 

전 재산 중에 10분의 일만 가난한 자에게 줘도 우리는 선뜻 이웃사랑 실천이라고 우길껍니다.

양탈무리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건 니 생각이고?

 

이웃사랑실천했다는 그 행함 조차 다 날라갈 정도로 상관없는 사랑이 될려면

십의 일인 십일조가 아니라 전 재산 다를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겁니다.

 

이 말은 졸지에 나는 그럼 거지가 되고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얼마나 살벌한 말입니까?

굻어 죽을수 있냐 라는 거죠.

 

이 쓴잔을 마실수 있냐 라는 겁니다.

그럼 사랑 없는 것 맞잖아요.

 

그렇다면 찌그려져 있어 내가 주는 사랑 용서 받아 먹기만 해 라는 겁니다.

 

이것은 불가능에 더더더 불가능의 갭을 벌리는 겁니다.

지키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하라” “~~하지 말라를 훨씬 뛰어 넘는 더 갭을 벌리는 불가능성을 더 불가능하게 하는 기쁜소식입니다.

산상수훈은 율법의 더 더 더 강화입니다. 불가능성의 더더더 강화입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을 지키자 라는 이상한 집단이 그것도 한국을 대표하는 개혁교회라고 할 정도이니

가증한 것이 선 겁니다. 배설물이 선 겁니다. 도망칩시다.

 

그런데 이것을 지켜왔던 놈들에게는 도리어 올무가 되는 겁니다.

못 지키면 그동안 율법을 안지킨 것이 들통나게 되니까 말이죠.

 

괜히 지킨 겁니다. 사랑도 없이!!

 

번제와 속죄제를 원치 않는다는 말은

인간의 구원을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그거 해 봤자

소용이 없어요~~~~~

 

인간 구원은 소용이 없는 짖입니다. 모호하고 의문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복음을 말하는데 ~~~

불쾌하기 짝이 없을 겁니다.

 

즉 이웃사랑실천이 백배나 지옥 자식 만드는 셈이다는 겁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불가능성으로써 예수님만의 숙제이지

내가 남을 7번 용서 한다는 것은

번제와 속죄제를 고집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번제와 속죄제를 지킴으로써 아 이렇게 나는 엉터리이구나를 깨달아야 할 판국인데

이게 졸지에 어릴적부터 자랑꺼리가 되니

백배나 지옥 자식 만드는 셈이다는 거죠.

자기도 안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하는

삥뜯는 짓이다는 겁니다.

 

그럼 안해도 되겠네?

천만의 말씀

예수님으로부터 770번 용서 받아야 할 판국에 놓여질 정도로

죄인 중의 괴수임이 늘 들통나야 한다는 겁니다.

 

안하는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말려드는 식이다는 겁니다.

어딜 감히 십자가에서 벗어나겠다는 심뽀를 펼치냐 말이죠.

 

지키냐 안 지키냐 라는 굴레가, 그 뫼비우스의 띠에서 벗어나게 되니까

우리 몸이 편한 쪽으로 된 줄로 아는데

오히려 더 더 더 우리 몸에 더 불편한

지키냐 안지키냐 보다 더 불편한 십자가라는 걸림돌이 우리 몸에 박히게 된다는 겁니다.

 

여기에 다윗도 엘리야도 박혀서 지금 증거한다는 겁니다.

그 상처가 다윗과 엘리야를 자유케 한 겁니다.

 

나 같은 죄인, 이런 벌레 만도 못한 이런 악인도 용서하는 십자가의 사랑이면

도대체 어떤 것이 훼방꺼리가 될 수 있겠느냐 라는 겁니다.

 

얼마나 당찹니까?

부자청년의 당당함도 짖눌러 버리는 더 당당당한 외설성입니다.

되도 않는 부자청년의 외설성 부조리 보다 더 더 더 부조리한 십자가라는 부정성이다는 겁니다.

 

이 부조리가 옳았습니다 라고 외쳐야 하는 겁니다.

 

기쁜소식이거든요, 아니 외치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이 부정함이 우리를 이루는 겁니다. 곧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번제나 속죄제로 이루어지지 않는

창세전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몸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아무도 예상 못한 낯선 몸입니다.

에이 설마 저렇게 더러운 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라고 할 정도로

예상 밖의 상상도 못한 은혜였던 겁니다.

 

교회로 이루어지는게 아닙니다.

교회의 순결성 거룩성 깨끗함으로 이루어지는게 아닙니다.

하도 교회로 사기치는 놈들이 많아서리 ㅋㅋㅋ

 

개인 말씀 실천 안 받습니다.

집단 실천 받습니다.

이스라엘? 실패 했습니다.

교회(자칭 새이스라엘)? 앋받습니다. 머리가 부재입니다. 머리를 부정하는 자들입니다.

기어이 자기 실천을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결국 예수님 혼자 완성하셔서 그 완성을 그리스도의 몸에게 나누어주신바 됨으로써 우리 로써 이루신 겁니다.

 

완전 엉터리요 구라죠?

?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소리만 골라 하시거든요.

차라리 위의 말이 믿음이 가지

도통 믿음이 가지 않는 새노래이다는 겁니다.

 

예수님 혼자 지켜 완성해 놓고서는 그 완성을 우리에게 부어주신바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40:3, 개역)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새노래는 집단노래로써 불가능한 노래입니다. 듣자 마자 구토가 날정로도 불편하기 짝이 없는 노래입니다. 어린아이와 문둥병자 소경, 고아, 과부, 나그네만이 부르는 노래로써의 희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노래를 듣기 싫으니까 그래서 새노래입니다. 듣기 좋은 노래는 가능성인 인간의 실천이 가능한 그냥 노래이지 새노래는 실천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불가능성이 우리에게 덮쳐서

분명히 노래 한 번 부른적이 없는 날 때부터 벙어리인 우리가 노래가 터져 나오고

분명히 눈으로 본적도 없는 예수님을 주 라고 시인하게 되고

분명히 귀로 들은적도 없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서 나의 목자라고 외칠때에

바로 이 불가능성으로써만이 외치는 새노래 새목소리가

악마들이 듣기 싫어하는 마귀보란 듯이 펼쳐지기에 새노래이다는 겁니다.

마귀를 시기케 못하는 새노래는 새노래가 아닌 거죠.

 

머리 되신 예수님과 그 몸이 된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오는 합창인 겁니다.

 

144천명이 찬양단이라고 했잖아요?

 

(40:3, 개역)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목베인 자들이 부르는 찬양이 새노래입니다.

이 동서남북 333 333 333 333 이 말입니다.

 

3이란 간극이라고 했습니다. 불가능성의 간극

 

에이 설마 죽은자가 어떻게 목이베였는데 노래를 불러?

할례를 했는데 어떻게 전쟁을 해?

입이 짤렸는데?

눈이 뽑혔는데?

귀가 짤려 듣지도 못하는데?

 

그러니 불가능한 노래가 새노래이다는 겁니다.

 

그 새노래를 내 입에 두셨다고 했을때에

다윗이 아닌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다윗이 불러봤자 많은 사람이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번제나 속죄제라는 받지도 않는 것을 지키는 거기까지의 수준 밖에 안되기 때문입니다.

번제나 속죄제를 원치 않는 그 이상의 것을 드리는 자가 바로

 

(40:3, 개역)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내 입에 두셨다고 하는 =입니다. 다윗 아닙니다.

다윗은 지금 예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매맞는 족보처럼

마태복음 11절부터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에

다윗을 의도적으로 빼듯이 다윗을 기록하듯이

 

다섯 여인이 징계를 받음으로써 머슴아들이 나음을 입는 매맞는 족보처럼

 

지금 시편 40편은 다윗 본인이 다윗을 빼면서

누락하면서 예수님을 집어넣고 있습니다.

 

문제는 유대인들이 아무리 시편을 달달 외워도 못 본다는 겁니다.

그럼 우리라꼬 보이겠습니까?

역시나 안 보입니다.

 

그 불가능성을 우리에게 누리랍시고 입에 넣어준다고 해도

줘도 못 먹을 정도로 우리에게는 안 맞는

몸이 거부반응을 나타낼정도로

숨겨진 이름이다는 겁니다.

비밀이라니깐요

감추어진 비밀

 

우리 몸은 번제와 속죄제가 딱 맞습니다.

개별적으로 드리는 개인 실천이 딱 맞지

 

남이 사랑을 이루는 것은 눈 뜨고 못 봅니다.

 

우리의 속성은 사촌이 땅 사면 배 아파하는 그 속성이 딱 맞습니다.

그런 개인이 모여 우리로 우긴다고 해서 우리가 되는게 아닙니다.

 

사랑을 빼 버리고서는

법을 주장하는

그런 부조리가 딱 맞지

 

이런 부조리를 캐는 부조리를 우리 몸 자체는 거부하거든요.

십자가는 이 불가능성에 도전하는 겁니다.

 

 

더 더 더 불가능하게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겁니다.

 

다 이루었도다

 

(19:30, 개역)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13:8, 개역)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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