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교리의 차이 (나사렛 이단 예수냐? 교회냐?)



교리란 일단 한 종교의 사상의 매뉴얼로써 작용하는 것이다.
특히 이단으로부터의 방어의 목적이 가장 큰 교리형성의 원인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교리를 형성하겠다는 사상이 바로 이단이다.
이단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고자 하는 것이 이단이다.


정작 복음은 나사렛 이단 예수에 대한 이야기다.
성경 어디에도 교회의 교리를 형성하고자 하는 내용은 없다.
성경 자체가 매뉴얼인데 거기서 다시 쪼개어서 매뉴얼을 만들어내겠다는 발상 자체가 이단이다.


그런 이단들이 장로회 성결회 순복음 감리회 기타 등등
뒤늦게 출발한 순복음을 견지하기 위하여 갑의 횡포는 역사를 우려 먹는다
이런 판국에 신흥집단들은 이런 갑질에 자신들 또한 갑이라고 어떻게 해서든 대형화 해서
돈으로 쳐발라서 형님들에게 아부를 하고 을에게는 행패를 부리는 식으로 
어떻게 해서든 이단이 안되고자 한다.

고신측은 과거 친일세력으로 도배된 한국교회와의 차등을 두면서 자신들은 순결한 교회 답잖아 라고 우긴다.
하여튼 결백증 환자들이다.

바로 이런 것들을 교리 속에 녹아 넣어서 타교단들과의 차별성으로 장사를 할려고 한다.
결국 최종 목적지는 돈인데 말이다.


아니 나사렛 이단 예수로 출발하는 복음이
이렇게 교리를 저마다 형성함으로써 이단성을 제거했으니 나도 인정해 달라는 식으로 사기를 친다.
뭐 제일 큰 형님이라는 장로회가 그런 사기를 치니
밑에 놈들은 더했으면 더했지 가만히 있는 놈들이 없다.


이런 판국에 팔짱을 끼고 앉아서
아이구 이놈들아 돌아오너라 너희들의 교리는 이미 우리 쪽에서 다 있던 거란다 라고
말로만 돌아오너라 탕자야 라고 큰형님인척 하지만 이빨을 빠득빠득 갈고 있는 카톨릭이
기가찬다고 입을 쯧쯧쯧 차면서 개판으로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고 흐뭇해 하고 있다.


교리의 왕자는 카톨릭이 아닌가?
지켜보는 입장에서 다들 카톨릭이 되고파서 저러는데
왜 돌아오지 않는다고 트릭으로 자기영업을 방어하고 있다.
역시나 이단이다.


복음은 나사렛 이단 예수로부터 출발한다.
즉 이단성을 제거하고자 하는 시도가 아닌
이단 중의 이단으로 증거되는 복음이기 때문이다.


이단 끝만 다르다 라는 뜻이 아닌가?
결국 그 앞의 것의 기준이 자신들의 교리이지
나사렛 이단 예수의 복음이 아닌 셈이다.


그런 이단들로부터 이단 소리 듣는 것이 복음이다.
유대인의 유대교로부터 이단 나사렛 예수이다.


그 이단 척결자가 사도바울이였다.


그가 이제는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오히려 더 뻔뻔스럽게 이단들로부터 이단 소리를 듣는 십자가라는 이단성을 증거하기 시작했다.


교리 형성? 뭔가 불안하다는 증거이다.
그 불안한 마음의 죄책감이 복수심으로써 방어기제로 작동한다.
가인이 에녹성을 쌓고 온갖 부적(하나님)으로 성에 도배를 했듯이 말이다. 

교리를 만드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라멕 또한 교리를 만드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나를 건드리는 놈은 가인의 7에 77이란다.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의 흉내로 동일성을 추구하여 그 복수심을 펼치고 있는 것이 교리이다.


이것이 법을 추구하는 인간의 최종 목적지이다.


(창 4:24, 개역)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아니 사랑을 무슨 수로 교리화 할 수 있을까?

구원이 교리화 된다고 믿는 저 믿음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믿음일까?
대단한 놈들이다.

사랑이 교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니~~~


그런 체제화 시스템화를 우습게 만드는 것이


도리어 사랑이다. 우발성이다. 
아무리 아무리 사랑을 새장에 가두어 볼려고 해도 사랑은 잡히지 않는다.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꾀는가 말이다.


오히려 복음은 가두어지기는커녕 공격을 한다.
그 새장을 찢어 버린다.


(골 2:14, 개역)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교리는 복음을 거스리고
복음은 교리를 거스리는

두 소욕의 전쟁을 보여준다.


복음은 그런 방어기제로 작동한 제국(세상나라-바리새인의 하나님 나라 운동도 포함된)형성의 교리가 아닌
오히려 그런 제국을 향한 예수님 나라의 폭력인 사랑이다.


십자가는 그야 말로 폭력이다.
이 폭력 앞에 무릎 꿇는 자만이 그것이 화목케 하는 전쟁임을 보게 된다.


찢겨진 그 상처에서 복음이 나온다.


전쟁이 없는데 어떻게 화목이 이루어지나?
바로 이것을 교리는 꿈꾸고 있다. 전쟁 없는 화목을 말이다.


꿈 깨라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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