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배신 (배신의 배신) (시편41)

 

다윗을 배신하는 아들 압살롬 그리고 압살롬을 배신하는 다윗자손

 

 

(41: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41:2, 개역)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41:3, 개역)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저의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41:4, 개역)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41:5, 개역)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

(41:6, 개역)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오며

(41:7, 개역)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41:8, 개역) 이르기를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이제 저가 눕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하오며

(41:9, 개역)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41:10, 개역)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41:11, 개역) 나의 원수가 승리치 못하므로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41:12, 개역) 주께서 나를 나의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41:13, 개역)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송할지로다 아멘 아멘

 

 

 

제목을 뭘 해도 다 죄이다 라고 할려고 했는데

왜냐하면 뭘 해도 다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모조리 무조건적인 용서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뭐든지 예 뿐이고 아니라 함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 시편41편의 해석 내용을 보니

원인에 따른 결과로 해석하다 보니
즉 성화론자들(개혁주의)처럼 행함으로 추적해서 해석을 하다보니
마지막 결론 부분은 어물쩡 넘어가는 식입니다.


이렇게 실천했더니 이런 좋은 결과가 나왔다 라는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는 식입니다.

이런 반칙이 없지요? 결론의 결과를 앞의 원인에 따른 것이다고 하지만 억지스럽게 갖다붙여넣기를 했을 뿐이지
정작 앞의 원인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게 아닙니다. 오히려 말도 안되는 결과이다고 해야 솔직한데 말이죠.
 

그래서 특히 카톨릭에서 시편41편의 해석을 보니 
이런 가난한자에 대한 배려를 중심으로 이웃사랑실천하자 특히 가난한자는 돕자 라는 해석입니다.
성화론자들은 이런 카톨릭을 못 따라 잡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난한자가 누구를 죽입니까? 예수님을 죽입니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그것 마저도 다 아시고 가난한자에게 베푸셨다 라고

이건 또 불교 쪽으로 빠지는 식입니다. 역시나 교리 플러스 실천의 완성이니까 말이죠.

 

이렇기 때문에 시편 또한 율법에 해당되는 겁니다.(지혜문서-시편 잠언 전도서 욥기 아가서) 
법적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는 거죠.

그러니 신학을 동원해서 교리화 할려고 한다는 겁니다.

교리란 이해 안되는 것을 이해 되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불가해한 것을 가해하도록, 불가능한 것을 가능성으로 바꾸는 것이 교리입니다.
이단이죠.

그렇게 이해가 되면 돈 내라 라는 식이 되는 거죠. 혜택을 입고서도 돈 안내면 도둑질이다는 겁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있냐 라는 거죠.

 

그러나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을 하게 되면 돈이 안됩니다.

무상 공짜 이니까 말이죠. 곧 은혜이니까 말이죠.

 

그리고 사도행전에 우상조각가들이 사도바울 때문에 장사가 안되니까

화를 내고 죽일려고 달려들 듯이 그런 와중에 유대인들도 어떻게 해서든 바울을 죽일려고 하듯이

시편으로 돈 벌려고 하는 자들이 십자가 때문에 졸지에 돈이 안되어서 화를 내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에도 역시나 교회가 그런 짖을 하는 겁니다.

이런 속내를 들추어내는 불편한 거룩이 진짜 거룩입니다.

이것이 진짜 복음입니다. 화를 내도록 불쾌하게 만드는 해석이 십자가 해석입니다.

 

그럼 가짜 복음은 뭔데? 사람을 좋게 하는 거죠. 거짓선지자도 똑같습니다.

이런 지식을 알아도 소용이 없어요 무조건 이유 없이 사람을 좋게 해야만 하도록 되어 있거든요.

그래야 그 돈으로 입에 풀칠 할 것 아닙니까?

 

과거에 가스펠이 노래로써 돈 장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잉여가 도리어 자신들의 목을 조르는

압살롬처럼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그렇게 작용하는 겁니다.

잉여가 무능이라는 얼룩으로 작용하는게 아니라

자기자랑이 되어버리는 기념비가 되어버리니까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식입니다.

꾀라는 자기 지혜 말입니다.

 

자 이렇듯

 

인간의 활동 곧 행함을 힘의 배치에 의해 따른 결과물입니다.

힘에 따라 좌우된다는 거죠.

 

거기에 항상 꼽사리 같이 얼룩처럼 낑겨있는 귀찮은 존재가 있는데

바로 그런 존재를 오늘 본문에서는 가난한자 병든자 약한자 등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잉여죠 쓰레기 찌끄래기 쓸모없는 무능한 것들 말입니다.

이들은 소위 말해서 자리가 없습니다.

자리가 없기 때문에 큰 성에 빌어붙어 철거머리처럼 착 달라붙어 살아야 합니다.


(잠 30:24, 개역)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잠 30:25, 개역)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와』

(잠 30:26, 개역)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잠 30:27, 개역) 『임군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잠 30:28, 개역) 『손에 잡힐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

 

자기 자리가 없는 호모 사케르 곧 죽은자입니다.
그 죽음 속에 죽음으로써 자리잡고 있는 겁니다.

 

힘의 배치에 의해서 저마다 다 한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싸움에서 밀려 밀려서

그 어떤 자리도 없는 머리 둘곳 없는 자들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병든자 라는 겁니다.

 

자 그런데 죽은자를 돌봐주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카톨릭 특히 수녀들 히스테리 환자들 아닙니까 사이코죠.

이들은 이것을 고대로 따라 합니다.


가난한자를 도와주면서 살자 라고 말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그 대표성 아닙니까?

나중에는 과연 하나님 있냐? 라고 묻는 바람에 논란이 되었지만 말이죠.

 

죽은자를 돌봐 준다는 것은

 

(41: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41:1, 쉬운) <아플때의 기도-다윗의 시. 지휘자를 따라 부른 노래>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려움이 닥칠 때에 여호와께서 그 사람을 건져 주십니다.

(41:1, 킹흠정) (악장에게 준 다윗의 시) 가난한 자를 배려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주께서 고난의 때에 그를 건지시리로다.

(41:1, 현대인) (다윗의 시.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부른 노래) 가난한 자를 보살펴 주는 자는 복이 있으니 환난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구하실 것이다.

(41:1, 현대어) [병들어 몸 아플 때; 다윗의 노래.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얼마나 복되랴. 어디 한곳 기댈 데 없이 가난하게 살아가는 이들. 돌보아 주는 이들은. 재난받는 날 여호와께서 그런 이들을 건져 주시리라.

 

한 마디로 하나 마나 한 짖을 하는 자이다 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짖을 하는 자 이다는 겁니다.

 

인간은 그 어떤 행동도 하나 마나 하는 짖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 의미를 두고자 하는 짖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몰두해도 그 속에서 그 몰두하는 자기자신에게 의미를 두고 한다는 겁니다.


가난한자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의미있는 줄 알았는데 의미가 없게 되니까?
과연 하나님 있기는 있냐 라는 회의에 빠진것이 테레사 였다는 거죠,
 

그러니 모조리 다 원인 있는 결과를 추구한다는 거죠.

이것이 나쁘다가 아니라 어쩔수 없다 라는 겁니다.

제가 교리에 대해서 비판하니까

그럼 교리 만들지 말자

무교리를 추구하자 라고 하는데

무교리를 추구하는 그것도 교리 아니냐 말이죠.

자꾸 의미를 둘 수 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그것은 시이소와 같은 법적인 체제의 시스템사고방식이다는 겁니다.

반드시 한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행함의 차원이지

은혜의 차원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자 그럼 은혜의 차원은 뭐냐?

내 숙제가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럼 내 마음대로 살지 뭐


내 숙제가 없다 라는 소리를 듣고 내 마음대로 살지 뭐 라는 생각은 핑계꺼리를 찾는 거죠.

여태껏 자기 마음대로 살아와 놓고 저 말을 핑계로 삼아서 새삼스럽게 마음대로 살 것 같이 생각한 거죠.
이것이 갇혀있는 줄 모르고

강요된 선택에 놓여있는줄 모르고

마치 자유할수 있는냥 착각한다는 겁니다.

 

내 숙제가 없다가 은혜의 차원이 아니라

내 숙제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숙제를 볼 것 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내 숙제가 없는 것은 비극입니다.
목숨 걸 때가 없는 것 보다 더 절망적인게 어디있겠습니까?
신나는 삶은 목숨 걸 때가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비극에서 희극으로 되는 것은 예수님의 숙제 뿐이다 라는 겁니다.

 

이 비극에서 희극으로가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라는 거죠.

 

오늘 본문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인터넷을 살펴보니까

앞부분은 잘도 해석합니다.

 

그런데 끝은 해석이 안됩니다.

그냥 잘 먹고 잘 살았더라 라는 동화같은 해석을 하는 겁니다.

이유없이 잘 되었더라 라는 결론을 억지로 앞의 원인 때문이다는 식으로 괜히 붙이는 겁니다.

 

처음에는 아팠다 그런데 하나님만 의지했다.

가까운 자들은 그를 죽기를 바라면서 배신했지만 그는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했다

그리고 그는 해피엔딩이 되었다

이런 식입니다.

 

이런 어릴적 동화의 구조 속에 다들 동화같은 이야기로 이 시편41편을 바라보고서

그것을 따라 할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유 없이 나는 동화같은 해피엔딩이 되게 해 달라면서 말이죠.

 

이것이 바로 행함이다는 겁니다.

 

이 행함이 지금 다윗이 죽기를 바라고 있다는 겁니다.

 

행함이 뭡니까? 육 아닙니까?

육 이라고 하니까 추상적이잖아요

추상도 결국 이해시킬려면 그 반대 개념을 가지고 오면 이해가 어쭈 되긴 되요

 

사실상 모든 언어 구조는 추상적입니다. 해피엔딩이라고 했을때에

어떤 기준이 과연 해피 곧 행복이냐 말이죠?

행복해서 행복이라는 단어가 나오는게 아니라

행복이라는 단어가 인간들에게 행복하다 라는 욕망을 부추깁니다.

그러니 남들에게 좋아보이는 것을 자신은 1초라도 맛보면 나도 행복했다 라고 우기는 식입니다.

 

기준이 없이 자기 멋대로 이다는 식 이다는 겁니다.

 

빛과 어두움도 우리에게는 추상적이지 않지만

같은 인간은 날때부터 소경인 사람에게는 빛도 어두움도 추상적이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실로암 소경에 날때부터 소경이니 부정한자이니

저 사람의 개인의 죄냐?

부모의 죄냐 라 것에서

 

죄도 결국 추상적으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식의 추상적이다는 겁니다.

어떤 기준이 과연 죄냐 말이죠???

 

예수님은 더 깊게 들어갑니다.

율법은 이러 이러 하지만

나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죄다 라고 하십니다.

 

자 이렇게 되면 법을 지키면 죄가 안되는 의인이 될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그 어떤 자도 못 빠져나오도록 만들어 버리는 율법강화로써 산상수훈을 말하니까

 

유대인들이 화를 내는 겁니다.

 

이것을 성화론자들은 반대로 이것 마저도 지킬려고 한다는 겁니다.

 

사기꾼들이지요.

 

문제는 그 사기에 놀아나는 자들이 엄청나기 때문에

수요공급의 원칙에 의해서

그 사기꾼들이 유지가 된다는 겁니다.

 

즉 그 정도로 예수님이 하시는 일들이 모조리 미운 겁니다.

상대적으로 내 자신이 하는 일들은 모조리 사랑스럽다는 겁니다.

 

지금 본문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다윗을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다는 것을 보고

우리는 자꾸 주인공편을 들고

압살롬이 나쁜놈이다 라고 하겠지만

 

정작 십자가 사건이 고맙게도 우리의 진짜 속성을 들추어내는데 있어서는

그 압살롬이 바로 우리였다 라는 겁니다.

 

얼마나 얼마나 예수님이 죽기를 바랬습니까?

심지어 십자가에 아프게 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픈자를 더더욱 죽일려고 온갖 지혜를 다 모으고 집결시켜

그 힘으로 아무것도 없는 자를 죽일려고 소원에 소원을 이루고자 했냐 말이죠.

 

한번은 한번도 해본적이 없었던 신년해맞이를 따라가봤는데

해가 뜨는 그 장면을 보고 소원을 비는데

한 쪽에서는 목탁소리가 나고

한 쪽에서는 찬송가가 나고

한 쪽에서는 소원을 빌고 하는

별에 별짖들이 다 펼쳐지는 장면을 보고 놀랬습니다.

 

아 마귀들이 다 모였구나 ~~~~~~~

 

저는 그 모습을 다시금 회상해 보니

 

인간의 소원은 딱 하나입니다.

 

예수야 죽어라 제발 죽어라입니다.

 

모든 인류의 소원 곧 욕망은 딱 하나입니다.

 

예수야 제발 죽어라 지구를 떠나거라입니다.

 

교회와서 기도하는 내용도 이것 뿐이고

절 간에 가서 부처에게 비는 내용도 다 이것 뿐입니다.

얼마나 제가 추상적으로 말하고 있습니까?

 

심지어 제가 지금 이런 글을 적는 목적도 제발 예수야 나의 인생 간섭하지 말고 죽어라 죽어

이것이 모든 인간이 십자가에서 들통난 본디 본 모습이다는 겁니다.

 

평생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죽은 인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소원은 대한민국의 독립이다고 주장한 자도

십자가에서 밝혀 보니

예수야 죽어라 라는 것이 인간의 소원인 겁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유대인의 독립운동을 방해했으면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죽기를 바랬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원수인 로마가 대신 죽여주니까 얼마나 속이 시원했는지

 

결국 로마가 그들의 원수가 아니였습니다.

 

모든 인간의 원수는 예수님 한 분 뿐이였던 겁니다.

 

(3:14,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3:15, 개역)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모든 인간은 인간인척 하는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이다 라는 거죠.

 

이 말을 어떤 누구가 수긍하겠습니까? 다들 반발하지!!

 

지금 다윗은 자기아들 압살롬이 저렇게 된 것이

바로 원수가 한 짖이다는 겁니다.

 

더 근본적인 악의 세력이 있다는 것에 대한 시선이다는 겁니다.

심지어 자기자신의 분신인 압살롬이 저럴 정도이면

자기자신도 포함해서 이 근원적인 악에 대한 주님의 조치를 요구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반드시 다윗 자신도 포함된 악에 대한 조치 말입니다.

 

제가 우발적으로 튀어나온 말을 막상 글로 옮길려고 하는데 뭔가 아쉬움이 남았는데

그것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글 곧 가사가 오대천왕이 부른 혁오의 멋진헛간 곧 탕자이야기에서

 

그 도둑놈이 알고보니 자기자신이였다 라고 했잖아요

 

내 속에 있는 악마를 조치해달라고 다윗은 요구 합니다.

이것이 확대 확장 재생산 탈재생산이 되어서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악마를 조치해달라고 다윗은 요구합니다.

 

마치 애굽의 파라오 왕을 강퍅케 해서 의도적으로 부르짖도록 만들어서

출애굽을 벌리듯이

 

지금 이스라엘을 강퍅케 해서 다윗이 안 부르짖고는 못배기도록

다윗 주변의 사람이 다들 다윗아 제발 죽어라 죽어라 라고 공격하듯이

지금 의도적으로 이런 사건을 만들어서

 

이스라엘을 엑소더스 탈출하시고자 한다는 겁니다. 출이스라엘

 

이것은 결국 예수님의 출 세상입니다.

 

예수님의 세상탈출입니다.

예수님의 교회탈출입니다.

 

결국 다윗의 악마탈출입니다.

 

제목으로 좋죠.

 

이것이 배신의 배신입니다.

절대로 못 탈출하도록 가두어서 죽이고자 했는데

오히려 그 죽음이라는 무기가 탈출하는데 더 도움이 되는 도와주는 꼴이 된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어리석은 지혜가 인간의 지혜보다 낫다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결론 부분은 마치 원인 없는 결과로써 그 어떤 연결점이 없이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네 라는 결과가 나타난 겁니다.

 

 

7장 마지막과 8장 처음구절의(로마서)

 

그 어떤 연결점이 없다는 점에서 단절이다는 겁니다.

성화론자는 어떻게 해서든 이것을 연결 시켜볼려고 가능성으로

이해 시켜 볼려고 한다는 겁니다.

왜 그것을 연결시키지 못해서 안달일까요?

 

역시나 성경의 대답은 예수님이 죽기를 바라는 겁니다.

 

말도 안되는 뒤짚어 씌우기식이죠?

네 맞습니다.

 

그런데 결국 인간도 말도 안되는 짖 말고는 한게 없습니다.

이유없이 자기는 구원받아야 된다는 말도 안되는 짖만 한다는 거죠.

 

너는 안 그러느냐?

네 맞습니다.

저도 그러합니다.

 

사도바울도 그래 맞다 나도 예수님의 핍박자다

그런데 이중적 케노시스 라고 했죠. 이중적 빈터,빈공백의 빈공백.

 

그랬던 나도 지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라고 주장한다.

나에게 따지지 말아라 예수님께 따져라 라고

예수님을 가장 죽기를 바랬던 자가 지금 이런 소리를 하는

이율배반을 펼치고 있다는 겁니다.

 

배 배 배 배신이야 배신

 

맞습니다. 그 배신이 나를 나 되게 했습니다.

 

(고전 15:10, 개역)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내가 안했다 라고 오리발 내미는 거죠.

 

결국 우리 또한 사도바울처럼 예수를 핍박했던 자였다는 겁니다.

그랬던 자도

그런 원수도 예수님은 넉넉히 이기시고 넉넉히 사랑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병듬이 고침받을 필요가 없이

오히려 그 병듬이 오히려 고침이 되어버린 겁니다.

물론 그 어떤 연결점이 없는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말도 안되는 불가능성이 벌어졌다 라는 겁니다.

 

그 병듬이 아니였다면

악마의 실체를 어떻게 볼수가 있었겠냐 말이죠??

 

십자가가 아니였다면

내가 얼마나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했는지를 어떻게 알았겠냐 말이죠?

 

이것이 성화론자들과의 차이점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압살롬은 솔로몬과의 차이점으로 대비되는 겁니다.

 

이미 결정난 결과를 압살롬은 뒤엎어 볼려고 하는 겁니다.

이미 결정난 예수님의 승리를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죽이면 바뀌어 질수 있다고 믿는 것이

인간의 믿음이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하는 짓은 그런 짖 뿐인 겁니다.

 

결국 압살롬은 다윗의 자식이 아니였던 겁니다.

사울왕의 자식이였던 겁니다.

곧 마귀 자식이였던 겁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원인 없는 결과인

 

3일의 간극

 

곧 오늘 시편 41편의 내용인 죽음 속에서 낳은 자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었다가 3일만에 살아난 그 사건의 자식이 아니였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낳은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병듬 속에서 다들 죽어라 죽어라 라는 그 공백 속에서 태어난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아닌 티를 팍팍 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솔로몬은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그 삼 세 번의 사건 속에서 낳은 자식입니다.
죽음 속에서 태어난 자식입니다.

 

요셉은 굴에 파묻혀 죽었다가 살아난 은 20냥에 팔려버린 자식입니다.

 

이 요셉이 자기를 죽인 형제들을 거꾸로 살리는 겁니다.

 

욥은 자기를 저주한 그 세친구를 위해 제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죽인 예수님을

예수님이 도리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십자가의 피로써 용서하시는 지혜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전체는 압살롬과 사울왕의 힘에 사로잡혀 살고 있고

정작 다윗은 병들어서 시도때도 없이 힘을 장악한 자들에 의해 암살에 시달려 삽니다.

 

결국 이미 죽은자 이다는 겁니다.

 

이 죽은자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자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이 죽은자를 죽기를 바랬는데 말이죠.

압살롬과 사울왕은 하나의 개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오로지 목적이 돈 하나만 보고 살아갈 뿐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이나 오늘날 교회나 도찐개찐입니다.

어쩔수 없습니다.

 

다윗은 결국 예수님의 운명이 덮쳐져서

미래에서 덮쳐져서

 

이 죽음을 맛보아야만 하는 겁니다.

자기 인생은 없는 듯 삭제 당한채로 말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이왕 병든 것 죽었뿌라 라고 저주를 퍼붓습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유익이 될 때는 잘 믿지만

나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때는 죽었뿌라 라는 마음 뿐인 것이

우리의 속내입니다.

 

그런데 누가 승리합니까?

 

원인도 없이 말입니다.

 

결과는 누구 승리입니까?

다윗입니까?

 

그래서 다들 성경을 엉터리로 보는 겁니다.

다윗의 승리 따위

다윗의 구원 따위는 없습니다.

 

예수님만 구원 받습니다.

 

예수님만 승리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 얼마나 멋진 헛간입니까?

멋진 배신입니까?

 

그 어떤 인간의 믿음에도 속하지 않는 배신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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