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야! 네 하나님이 어디있느뇨? (시편42)

 

예수야! 네 하나님이 어디있느뇨? (유대인으로부터 듣는 욕)

다윗아!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이스라엘로부터 듣는 욕)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바벨론 포로 당할 때 듣는 욕)

 

 

(42:1, 개역) [고라 자손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42:2, 개역)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42:3, 개역)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2:4, 개역)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42:5, 개역)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42:6, 개역)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42:7, 개역)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42:8, 개역)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42:9, 개역)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42:10, 개역)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42:11, 개역)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지난 시간에 병든자를 도와주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을 대부분이 병든자를 도와줘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에서
카톨릭이나 성화론자들의 저런 해석 곧 가난한자를 도와줘야 한다는 해석에

정작 성경말씀은 반대한다고 했습니다.

(시 41: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결국 병든 자를 고칠수 있는 분은 예수님 뿐이며

실질적으로 고쳐주는 것이 아니라 병을 고치지 않아도 병듬 그 자체가 이미 다 나음이라고 했습니다.

즉 병든자를 고칠 생각하지 말고 너가 병든자로써 고침받아야 할 정도로 저주받은자이다 라는 것을 알아라 라는 겁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없습니다.
오로지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겁니다.

구원자의 증상으로써 죄인이며
의사의 증상으로써의 환자이다는 겁니다.

이 이미 다 나음 다 완료 가 미래에서 덮쳐져서 선취되는 방식이 바로 병듬입니다.

그리고 복있는자 예수님의 죽음의 개입이 바로 증상으로써 나타난 것이 병듬이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어머니와 말씀을 나누다가 이런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39:12, 개역)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39:13, 개역)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나는 주께 객 곧 나그네, 이방인 또는 버림받음이 되고, 또 다시 거류자, 곧 예수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
바로 나의 모든 열조가 그러했다 라는 겁니다.

또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켜 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앞 과 뒤가 말이 안됩니다.

즉 단절이 되어 있는 뚝뚝 끊어진 상태이기에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어떻게 객 나그네 이방인 버림받은자인데

어떻게 다시 백성이 되고 거류자로써 집안으로 들어오게 되느냐?

그것이 바로 믿음의 선배들이 그렇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또 말이 안되는 것이 바로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켜 달라는 겁니다.

그냥 떠나면 굳이 건강 회복시킬 필요없이 천국에서 만나면 되잖아요?

 

그러니 역시나 앞 뒤가 안 맞다 라는 겁니다.

(물론 구약에서는 천국과 지옥 개념이 없습니다. 막연하듯이 있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기준이기에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천국과 지옥이 구체적으로 갈라져서 나타나는 겁니다.
이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분리, 구별 말입니다.
즉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거룩이라는 것도 모호합니다. 인간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거룩을 지키는 식일 뿐입니다.
그러든 말든 여호와께서는 거룩을 입히시는 식으로 일을 하신 겁니다.
그래서 지상에서 천국과 지옥이 구체화 되는 식이 구약입니다.
그렇기에 반드시 용서하심의 증상으로써 그 구체성이 바로 병에서 회복됨이다는 겁니다.
마치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처럼 말입니다.)

이런 상황을 더 더 더 불가능하고, 더 더 더 단절 시키고, 더 더 더 구별 차이 분별이 되고, 더 더 더 말이 안되게 하는 것은

신약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고후 12:7, 개역)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12:8, 개역)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 12:9, 개역)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10, 개역)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어떻게 약한것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라 라는 말이 안되는 소리를 하냐 말이죠


주변에서 약함을 가만히 두질 않습니다.
교회 사람들과 능욕과 궁핍 핍박 곤란을 나눠 보세요 다들 도망칩니다.
오히려 왕따 시킵니다. 교회가 더해요.
마치 있는 사람들이 더 하듯이 말입니다.
아무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저주 받은자라고 이 기회를 통해서 정죄하기 바쁩니다.
아이고 너가 핍박 받는구나! 아이고 기쁘겠다. 아이고 부러워라. 라고 아무도 그렇게 안봅니다.
오히려 그런 핍박이 묻을까봐 가까이 가지도 않습니다. 
 

약할때가 어떻게 강함이 됩니까?

이것은 종교적인 용어로써 써먹기에 딱입니다. 사기칠 때 말이죠.

 

그런데 종교적인 의미를 빼고서 어떻게 약한데 강함이 되느냐 말이죠?

 

이것이 너무 어려워서 제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10짜리 동전을 청소를 하다가 장롱 밑에서 아니면 소파에 낑겨있던 잃어버린 동전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왠 오바의 오바인지????

너무 너무 기뻐서 잔치를 벌리는데 너무 초과잉의 잔치인 겁니다. 10원 찾고(얻었고) 16조원을 뿌리는(소모하는) 겁니다.
잃어버린 동전을 찾았을 뿐인데 죽었다가 살아왔다고 잔치를 벌리는 겁니다. 부정의 부정, 종말의 종말이다는 겁니다.
어떻게 딸랑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절망이요 실패요 약함인데 7천명의 남은자가 되냐 말이죠?
그냥 10원이 아닌 잃어버린 동전 10원이 어떻게 일만달란트 16조원이 되냐 말이죠???

그래서 맏아들이 반발하고 거부하는 겁니다. 말도 안된다 불가능하다 라고 말입니다.
또 부자청년이 그래서 등돌리고 간 겁니다.
자기는 때려 죽어도 잃어버린 10원 짜리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즉 약한 자가 아니다는 겁니다. 때려죽어도 강한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16조원이 아까운 겁니다.
약해지기 싫다는 겁니다. 아니 누가 약해지고자 하냐 말이죠
부자청년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을 대변해 줍니다.

기도하지 말고 기도의 사람이 되라 라는 차이점은
기도는 내가 약하기 때문에 무능하기 때문에 간구하는 겁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자의 특징은 기도를 통해서 약함에서 탈출하여 강하게 해 달라고 하기 때문에
이런 기도는 소위 지키는 행함에 해당되는 겁니다.

기도할 필요가 없이 이미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난 자는
강함을 추구하는 기도를 하는게 아니라
강한 예수님의 증상으로써 약한데에 늘 놓여지게 되는 자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난 자 입니다.

기도하는 자 와는 질적으로 틀리다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숙제이지
인간이 자신을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나게 못합니다.

관계성이지 시스템이 아니다 라는 거죠.

이런 의미에서 다시 살펴보면

 

잃어버린 동전 10원 찾았다고 일만달란트(16조3천억원,16만년 일당)을 잔치비용으로 쏩니다.
죄인 하나 돌아왔다고 금가락지. 새신발, 살진 소를 잡아서 큰 잔치를 벌리는 겁니다.

죄인 하나 돌아왔다고 천군 천사들이 너무 너무 좋아서 지루박을 추면서 기뻐하더라 말이죠.


천사들이 하늘에서 잔치를 벌립니다.
 

죄인 하나 돌아왔다고!!!

 

 

의인이 아닌데!! 죄인인데 !!

 

짜장 아닌데!! 짜왕인데!!!


의인이 귀합니까? 죄인이 귀합니까?
천국에서는 죄인이 귀합니다.
99마리 양은 하나도 안 귀합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귀합니다.
그 정도로 없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새때까리인데~~~

 

아니 의인이 돌아와야 잔치를 벌릴 것 아닙니까? 16조원을 쏠것 아닙니까?


자식을 키웠는데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판사되면 그 마을이 잔치를 벌립니다.

 

그런데 천국(예수님 나라)은 반대로, 성경은 반대로

거꾸로 깜빵에 드디어 들어가게 되었다고 다들 마을 잔치를 벌립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드디어 전과 10, 전과 20, 전과 30, 전과 490범 되었다고

1년에 7번 70년 동안 490번이나 깜빵을 들락 날락한 그 죄인을~~~

뭐가 그리 좋다고
귀한 죄인 돌아왔다고 하늘에서 천군천사들이 잔치를 벌린답니다.
이게 말이 되냐 말이죠??

 

오죽 말이 안되면

불가능하면

단절이 되었으면

차단이 되었으면
 

맏아들이 그 부조리에

그 불가능에

그 단절에

반발하지 않고는 못배기냐 말이죠.

얼마나 엉터리이고 말도 안된다고 여겼으면 ~~~
 

얼마나 부조리했으면 말입니다.

얼마나 불가능하고 단절적이면 오죽하면 그렇게 반발 하느냐 말이죠.

 

창기와 세리가 먼저 천국에 간다는 의미가 그런 의미입니다.

 

객 곧 나그네 곧 버림받은자

 

이것이 다윗이 저들 이스라엘과의 차이점으로써

다윗은 이미 예수님의 운명을 선취(미리 보여주는)로 보여주는 증상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런 다윗을 보는게 아니라
다윗의 주변의 힘의 흐름을 보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 죽은 사울왕과 압살롬과 똑같이 강함이 되고자
자기가 자기 스스로 이스라엘이 될려고
이스라엘됨을 지킬려고
선택받은자 될려고
약한 것들을 도리어 제거하고자 하는 겁니다. 강함이 되어야 하니까 말이죠.


정작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왔지

선택받은자 될려는 자를 찾으러 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바로 예수님 자신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그 간극
그 불가능성이 다윗에게 덮쳤는데
이것을 어떻게 해서든 사울왕과 압살롬의 세력은 가능성으로 바꾸고자 한다는 점이
그들에게는 강요된 선택(자유의지)이다는 거죠.
 

그런데 정작 이 예수님의 운명이 이스라엘에게는 없고

개같은 이방인 여자에게서 나타나는 겁니다.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이것이 관계성이다는 겁니다. 시스템이 아니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 자신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곧 십자가는 관계성입니다.

 

이 모습과 반대의 운명이 바로 선민의식의 이스라엘이였던 겁니다.

 

그래서 선민은 죽음 곧 시체와 가까이 하지 않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처럼
(? 시체를 만지면 율법(말씀)을 어기게 되니까? 말씀이라는 시스템을 자신의 몸에 갖추고자 하는 겁니다. 토라를 온 몸에 칭칭 감아서 말이죠!!)


죽음을 멀리하고 시체 곧 죽은자와 방불이 된 다윗과 멀리하고 다윗에게 죽어라 죽어라 외쳤지만

 

정작 다윗은 그 죽음 속에서 또 다른 죽음을 보게 되는데

바로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서

 

모든 병을 더 이상 고쳐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병이 든 것이 곧 고침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어머니에게 말씀 드렸죠

 

물론 어려워 하시는 겁니다.

 

사단의 가시를 빼 달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하는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라는 말만 들을 뿐이다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되냐? 말이죠.
 

계시를 받은게 너무 많기 때문에 자고치 말라고 가시를 찔렀는데

 

저는 어머니께 그게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우와 성경을 엉터리로 말하고 있지요? 지금????

 

자고치 즉 교만하지 않도록 ...

 

계시를 받은 것이 바로 겸손하도록 한 겁니다.

그런데 계시를 받은 것이 도리어 교만케 한다면 계시를 왜 받냐 말이죠??

그래서 주는 것이 사단의 가시 곧 이것이 교만케 하는 사단의 가시 아닙니까????

 

저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겸손은 예수님의 운명이다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겸손과 전혀 무관한 것이 겸손이 되시는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가질수 있는 소유의 의미가 아니다 라는 거죠.

결국 사도바울에게 예수님의 운명을 뒤짚어 씌우기 위해서

예수님이 격었던 그 십자가의 운명을 겸손이라고 즉 교만치 않게

자고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고 보는 겁니다.


약한 것이 십자가 이다 라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말입니다.
 

즉 이것과 무관하게 따로 떼어내어서 겸손할 수 있는 의미가 아니다 라는 거죠.

 

만약 그런 의미에서의 겸손이라면 유대인들이 최고로 겸손한 겁니다.

도 닦기의 달인들 아닙니까?
그런데 정작 그들은 약한 것을 싫어합니다. 약해질까봐 겸손하는 겁니다.
겸손을 통해 강하게 되고픈 겁니다.

예수님 혼자만 강하면 안돼!! 나도 강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의 증상 곧 예수님의 몸은 어디있냐 말이죠??
그러니 그들에게는 몸이 없는 머리만 있는 유령으로만 보일 뿐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보는 겁니다. 마귀라고~~
몸이 아니니까 ~~

그런데 유대인들이 없는 것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말입니다.

바로 사단의 가시 입니다. 사단의 가시를 거쳐서 십자가 라는 걸림돌이 있는 겁니다.
약하게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것을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하기 때문에
그 기적을 모조리 무효화 시키는 사단의 가시처럼 작용하는
십자가 라는 거리끼는 기적을 싫어하는 겁니다.

기적은 기적인데 나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않는 기적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고

예수님이 보여줄 표적은 오로지 요나의 표적 곧 십자가 라는 것 밖에 없다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이 뭡니까? 3일의 간극 아닙니까?
죽었다가 살아난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그 간극 아닙니까?

이 간극 때문에 유대인들은 기적으로 믿었던 그 기적이 모조리 다 삭제 될 판국인 겁니다.

졸지에 십자가 때문에 기적이 무용지물이 될 판국인데 십자가를 가만히 두겠습니까?
십자가를 거부해야만 하는 겁니다.

괜히 기적을 받아가지고 말이죠.

마치 방명록에 왜 사울왕은 성령을 받았는데 지옥가냐 라는 질문에
괜히 성령을 받아서 지옥에 간다고 한 겁니다.

3일이라는 간극이 없어서

잃어버렸다가 되 찾음이 없어서
아니 그런 자를 오히려 더 미워하죠.

탕자를 미워하는 맏아들처럼 말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그 간극이 싫은 겁니다.

이것이 요나의 표적인 겁니다. 요나도 그것을 반발해서 차라리 날 죽여라 라고 자살시위를 벌릴 정도이니
이것은 그야말로 유대인들에게 괜히 박혀 버린 기적입니다.
그것을 빼내는 것이 바로 사단의 가시를 박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즉 흘러 넘친다 라는 겁니다.

아까전에 다윗과 다윗을 괴롭히는 이스라엘과의 차이점이 뭐라고 했습니까?

마찬가지로 사도바울 이전의 사울와 사도바울의 차이점이 뭡니까?

 

죽음 속에 놓이는 겁니다.

 

사단의 가시와 같은 부정함 속에

시체됨 속에

죽은자 됨 속에 놓여지는 겁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라

 

그 죽음 속에서 또 다른 죽음이 있다는 겁니다.

두 죽음을 보는 겁니다.

 

하나는 원래 나는 죽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딴 죽음은 별 다른게 아니기 때문에 다들 격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안봐도 보게 되어 있지만

 

정작 안보이는 죽음을 봐야하는 죽음이 또 있다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이 죽음이 미래에서 덮쳐지니까

다윗은 저들 이스라엘과의 차이, 구별, 분별, 분리가 되는 겁니다.

 

에수님의 운명 곧 십자가의 죽음이 덮쳐지니까 다윗은 가까운 주변부터 멀리 있는 사람들까지

모든 인간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요즘으로 치면 교회사람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로부터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저주받은 사람을 싫어하거든요.

강도만나서 거의 죽게된 시체와 방불한 자를 싫어하거든요.

 

고개를 돌리고 싫어한다 말이죠.

 

? 아름다움과 흠모할 만한 모양이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바로 그런 자들과 분리 단절 차단 분별하여서 차이성을 둔다는 겁니다.

다윗 스스로가 아니라. 말이죠.

다윗은 어디까지나 저들 속에 있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저들이 싫어해요 싫어해

 

더럽다고 저주묻을까봐

 

시체와 방불한 자를 만나고 만지고 함께하는 것이 싫다는 겁니다.

 

누가 깜빵에 전과 30, 전과 490범이 되었다고 잔치를 벌리는 자 어디있습니까?

의인이 아니라 죄인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이런 자를 위한 나라를 만드는 겁니다.

거기에 다윗이 죽은자와 방불한 자가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자기 열조이다는 겁니다. 믿음의 열조.

 

그럼 반대로 바로 이런 예수님의 나라를 싫어하는 나라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의인들만 들어가지 죄인들은 못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는 관심 없고 오로지 아흔 아홉 마리의 양만을 찾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이고

이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친 자가 바로 바리새인들 아닙니까????

 

반대로 예수님 나라는 아흔 아홉 마리 양은 필요 없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만 찾는 목자를 주장한다는 겁니다.

 

그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누구입니까? 물어보니

 

어머니께서 이제야 알겠다고 바로 예수님이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의 자신의 운명을 기여이 덮어 씌우겠다는 겁니다.

 

어떻게 객인데

나그인데인데

버림받은자인데

 

어떻게

거류자가 되느냐 말이죠?

 

어떻게 건강한자를 찾기 않고

병든자를 찾냐 말이죠.

그 병듬이 곧 고침이 되었다 라고 하냐 말이죠.

이것은 병들었다가 고침이 되었다가 중요한게 아니라

병듬이 하나의 인도자 가이드처럼 누가 의사냐를 안내하는 안내양처럼

병듬 때문에 졸지에 의사가 누구인가를 보게 되는

정작 중요한 것은 관계성을 누리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고쳤냐 안고쳤냐는 뒤에 관심이 없어요

 

만났냐? 못 만났냐? 로 게임오바 이다는 겁니다.


결국 병듬 또는 사단의 가시는 역설적으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관계성을 말하는 증상으로써
그 관계성을 미이 앞당겨 선취되어 보여주는 증상, 관계성의 증상이였던 것이였던 것이였던 것이였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시편 42편에

하나님을 바라보라 입니다.

 

곧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본다는 겁니다.

 

(고전 13:11, 개역)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3:12, 개역)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3, 개역)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점이 바로 죽음을 안다라는 겁니다.

아이는 죽음을 모릅니다.

모르고 죽습니다.


얼마전에 죽은 아이 말입니다. 졸지에 유럽이 이민자를 다 받아주기로 결정했다나 뭐라나!!

 

그러나 어른은 죽음을 알고 죽습니다.

죽음을 알기 때문에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본다는 겁니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어른과 어린아이는 육체적인 것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성화론자들 같은 개혁주의 라는 사기꾼들처럼 영적 어린아이 라는 것도 다 구라치는 겁니다.
구약의 십계명에서 부모를 공경하라 라는 계명은 그 부모가 바로 애굽을 빠져나와 홍해 라는 죽음을 건너온 선지자로써의 부모이기에 그 부모를 공경하라 라고 한 겁니다. 죽음을 건넌 자가 아니면 어른 곧 장성한 자가 아니다는 거죠.)

즉 죄인과 구원자의 관계성입니다.
환자와 의사의 관계성말입니다. 기능 말입니다.
의사라는 기능 때문에 졸지에 환자라는 증상물이 되는 겁니다.


마치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도다 라는 기능 때문에 졸지에 병듬이라는 증상물이 반드시 나타나야 하듯이 말이죠.
그것이 이미 다 나았다는 증거이다는 겁니다.
 

어떻게? 십자가의 죽음이 덮쳐져서 말입니다.

다윗은 비로소 예수님의 얼굴을 봅니다. 관계성입니다.
홍해를 건넌 것이 세례, 연합 이듯이 함께 한 몸이 되었다는 겁니다. 같은 운명이다는 겁니다.

즉 죄인이 되었고, 원수가 되었기에 주님의 피만 바라본다는 겁니다.
얼굴을 돌리지 마옵소서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긍휼을 먹고 살지 않습니까?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라고 말하는 관계는 주의 얼굴만을 바라볼 뿐인 죄인이다는 겁니다.

 

그것도 건강한 눈으로 몸으로 마음으로 보는게 아니라

죽은 눈, 죽은 몸, 죽은 마음, 상한 마음으로 보게 된다는 겁니다.

 

과연 실로암 소경 즉 날 때부터 소경인 자가 예수님의 얼굴을 보게 될까요?

아니면 소경 아니다 라고 하는 자, 눈이 밝은 자 라는 자가 예수님의 얼굴을 보게 될까요?

 

탕자가 예수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까? 즉 사랑을 보게, 긍휼을 보게 됩니까?

아니면 맏아들, 그것도 하나님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는 맏아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까?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객이 되었다가 거류자가 되는

그 믿음의 선배 열조들 처럼

 

3일 동안 굴에 파묻혀서 죽은자와 방불했던 그 열조와 같은 운명이

사실은 미래에서 덮쳐진 예수님의 운명이였다는 겁니다.

 

(롬 4:17, 개역)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 4:18, 개역)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롬 4:19, 개역)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롬 4:20, 개역)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고후 6:9, 개역)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 6:10, 개역)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히 11:12, 개역)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그러니 행함이나 번제나 이런 것으로 얼굴을 마주보는게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라 바라보게 되는게 아니라

 

정작 긍휼 용서 사랑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게 되는

죽음 속에서의 또 다른 죽음인 예수님의 죽음과의 만남이다는 겁니다.

 

나는 그냥 내 죄 때문에 죽을 뿐인데

그런 죽음 속에 예수님의 죽음이 따로 보이더라 말이죠.

 

죽음 속에 죽음으로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어차피 자기 강도짓으로 인한 죽음을 격을 뿐인데

그 죽음 속에 예수님도 따라 죽음으로써 만나더라 말이죠.


왜? 이 아무것도 아닌 쓸데 없는 찌끄래기 쓰레기 죽음에 예수님의 죽음이 뛰어드시냐 말이죠!!
 

그렇게 되니 내 죽음은 하나도 중요하거나 심각해지거나 하는 것이 없다 라는 겁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런 하찮은 죽음 속에 귀한 분의 죽음을 보게 되었다는 것에서

 

주여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얼마나 말도 안되는 소리를 겁도 없이 그 강도는 말하고 있습니까?


당연히 옆의 강도가 반발하죠?

정신차리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고 반발하지요!!

 

넌 둘 다 죽잖아 그런데 뭐??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아이고 뻔뻔스러워라

 

넌 또 뭐니 그것을 받아주는 너는 더 미쳤구나

 

오냐 오늘밤 너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주여 내가 없어지기 전에 나를 고치소서

 

오냐 오늘밤 너와 내가 낙원에 있으리라???

 

차라리 죽음이 안 닥치도록 해야지?

둘 다 죽는 판국에 무슨 거짓말을 못해? 이 사기꾼들아!!!!!

자기도 못 구하는 판국에. 자기도 탈출 못하는 주제에 뭐? 남을 탈출시켜???

 

 

오늘 시편 42편을 보십시오

누가 주를 찾습니까?

안 찾고는 못배기도록 주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네 맞습니다. 애굽왕을 강퍅케 하심으로써 부르짖게 만드십니다.

그래놓고서는 옳거니 드디어 나에게 부르짖었으니 내가 응답하마 라고

애굽왕과 애굽군사를 통해서 영광받으시는 겁니다.

철저한 자작극이지요!!

 

사단의 가시를 통해서 영광받으시는 겁니다.

 

그들이 하는 짓은 결국 다윗죽이기

바울 죽이기 아닙니까?

 

그럼 울부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고쳐달라고 살려달라고

이 자체가 이미 고침이요 이미 살려주심이다는 겁니다.

 

아니 객이 되었고 나그네가 되었는데

그 나그네가 되었다는 자체가 이미 백성이 되었다는 겁니다.

 

고아가 되었는데 고아가 된 것 자체가 이미 아들이 되었다는 겁니다. 기업이 되주셨다는 겁니다.

과부가 되었는데 그 과부됨이 이미 신부가 되었다 라는 겁니다.

 

이 말도 안되는 불가능성의 단절 자체가

 

바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게 되는

 

사랑의 관계성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정 못하는 자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과부 아닌자

고아 아닌자

이방인 아닌자

객이 아닌자

나그네 아닌자

소경 아닌자

 

이들에게는 희년이라는 기쁜소식이 필요가 없는 겁니다.

 

잃어버림의 경험이 없기에

되찾음의 관계성이 필요가 없는 겁니다.

 

오로지 그들은 선민의식 하나만으로 지옥행일 뿐입니다.

 

죽음 속의 죽음으로써 만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피하고자 도리어 죽이는 자, 살인자로 자발적으로 나서게 될 뿐이다는 거죠.

 

어떻게 하나님을 바라게 됩니까?

그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원수로 변하여서 죽일려고 달려들 때

 

주님의 얼굴을 안 바라보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저들은 놀려먹습니다.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다윗에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려먹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교회다니는 사람들이 다윗에게 비아냥 거립니다.

다윗 너의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있으면 널 구해야지? 왜 안 구하니? 왜 아무도 너를 안 도와주닌 거니?

거봐 너는 하나님께 저주 받은게 맞잖아 라고 죽일려고 달려드는 겁니다.

 

저들도 이런 말을 아주 강조합니다.

오늘날 예수님이 온다고 해도 역시나 교회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도록 되어 있다고

저들도 말합니다.

사도바울이 와도 교회사람들 손에 죽게 되어 있다고 그들 또한 말합니다.

 

물론 구지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성도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교회사람들로부터 핍박 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결국 어떤 누구도 예수님의 운명이 덮쳐지기를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 모두는 가해자에 속해있지

핍박 당하는 입장에 놓여지지 않습니다.

아무도 핍박을 기뻐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핍박을 만나면 온전히 기뻐하라고 성경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말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신경질 나고 짜증을 내어야 할텐데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나 니나노 ~~~~ 라고 노래를 부르는 자가 생기더라 말이죠.

오늘 본문의 다윗이다는 겁니다.

 

객이 되고 나그네가 되고 이방인이 되고 죽은자가 되고 시체가 되었는데

 

오히려 그것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가 되어버린냥

죽음 속에서 죽음을 바라보게 되니

 

이미 완료가 덮쳐버리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사 54:1, 개역)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어떻게 잉태 못한 자는 자식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게 되고
자녀가 많던 남편 있는 자는 그 자식들이 다 죽게 되느냐 말이죠. 없게 되느냐 말이죠

지금 계속 말도 안되는 소리만 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가 다 말도 안되는 소리 뿐이다 말이죠.

이것이 종말의 시선 곧 십자가라는 죽음 속에서 바라보는 시선이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봐버렸거든요.

 

그러니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성전, 이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게 되는 겁니다.

이미 완료된 이스라엘과 성전을 이미 다 봐버렸고

 

지금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은 백날 해도 미흡하고 모호한 이스라엘이요 성전일 뿐이니

오히려 깨버리는 겁니다.
누락 시키고 배제 시키는 겁니다.

 

그 뒤의 역사 곧 다윗정신을 이어 받은 참선지자는 이스라엘을 깨는데 매진하고

거짓선지자는 안된다 깨면 안된다 라고 사수하는데 열중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이 깨어져도 상관이 없는

이미 완료된 세계를 몰고 오셨습니다.

완료된 십자가에 모두 못 박아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이 3일이라는 간극인 십자가의 죽음을 이 세상에 깔아버립니다.

 

모든 것은 이제 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랑 곧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는

그 관계성으로 재편성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이제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계속해서 끊임없이 무한반복이 되도록 말입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느냐 내가 어찌하여 불안하는고 너는 너의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라

 

뭐 네 하나님이 어디있냐고? 난 하나님의 얼굴을 얼굴과 마주 대하여 보고 있는데

넌 안보이나 보네????

 

여기 있잖아 여기 ~~~~

실로암 소경이 보고 있는 예수님의 얼굴을 그들은 애써 외면하고 이제 화젯꺼리를 딴데로 옮겨버린다.

 

너 누구 제자야? 난 모세 제자인데!!!!

 

난 모세가 누구인지 난 모르겠고

안돼 안돼 예수님의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못보는 자는 예수님의 나라와 상관이 없는 자야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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