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정치(죽음 속에 탁란) (시편 43)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느냐 너는 너의 하나님을 바라라

 


(
43:1, 개역)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 경건치 아니한 나라에 향하여 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간사하고 불의한 자에게서 나를 건지소서

(43:2, 개역)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43:3, 개역)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43:4, 개역)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 나의 극락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43:5, 개역)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라는 원수들의 발악에

예수님은 다윗아 너의 하나님을 바라라 라고 원수들의 주장에 반박하십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불안하느냐 너는 너의 하나님을 바라라

 

이것이 예수님의 정치입니다. 곧 사랑입니다.

 

이 정치에 휘말린 즉 미래에서 예수님의 운명이 덮쳐져서 다윗이 격게 되는 것이

바로 죽음 속에 탁란이다는 겁니다.
(정치라는 말을 대부분의 목사들이 엉터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마귀를 끌어들일줄 모른다는 뜻입니다. 어디까지나 정치란 마귀 보란듯이 펼쳐지는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목사인 삯꾼들은 교회를 치리하는 원리로 정치를 인용합니다. 남을 다스리겠다고 말이죠.
물론 대부분의 교인들이 반박없이 거기에 동의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니 정치꾼들이 가득한 곳이 오히려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정치를 당해야 하는데 도리어 정치를 하겠다고 설치는 겁니다.
사랑(용서, 구원)을 당하는 것이 아닌, 남을 용서 하겠다고 나서는 셈입니다. 남을 구원하겠다고 말이죠.
철학에서는 정치란 간택(선택, 사랑(공명,짝꿍))의 의미이거든요.)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죽음을 하나의 사물 또는 인격 또는 주체로 본다면

그 죽음이라는 주체 속에 탁란 시키는 방식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지혜이다는 겁니다.
결국 진짜 주체는 십자가의 지혜이지 죽음은 오히려 십자가의 지혜의 보충물로써 작용하는 셈입니다.

 

말을 괜히 어렵게 했는데

쉽게 말해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애굽왕 파라오 왕에게

이스라엘을 탁란 시킨다는 겁니다.

 

그리고 때가 차매

애굽왕을 강퍅케 만드셔서

이스라엘이 부르짖게 됨으로써

출애굽을 하게 되니

애굽은 멸망케 된다는 겁니다.


(출 14:4, 개역)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출 14:17, 개역)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출 14:18, 개역) 『내가 바로와 그 병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애굽왕과 애굽군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거든요.

결국 애굽은 자기 생명줄을 스스로 끊는 자살을 한 셈입니다.
마치 그 사람의 특이성인 기념비가 도리어 자신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셈이다는 겁니다.
압살롬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결국 자신의 목을 조르는 기능으로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정치는 곧 지혜는

 

자신의 허물덩어리, 오점, 약점, 얼룩을 제거하는 것이
곧 자기의 가장 귀중한 것을 제거한 셈이 된 것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얼룩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 도리어 애굽의 스스로의 목을 조른 셈입니다.
사울왕도 똑같고 말이죠.
생명을 자기 스스로 제거한 셈이다는 겁니다.

 

우리가 흔히 약자보호법 시형제결혼법 등등으로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를 말하고 있는데
(오늘 시편 43편이 그러합니다. 지난 시간의 42편도 마찬가지 이구요. 병든자)

문제는 이들이 대상 소문자 a로 작용하여서

제거하고 소외시키고 배제 살인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는 겁니다.


누가? 바로 병든자를 보호하겠다고 나서는 자들이 말입니다.
약자를 오히려 더 밟는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다윗을 그렇게 취급했거든요.
마치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누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자들이 말입니다.

소위 이웃사랑실천 이라는 말씀실천 자체가 말씀을 어기는 동시성인 이유인 것은
그들의 말씀과의 동일성 추구가 도리어 예수님을 삼키는 식이다는 겁니다. 
도리어 말입니다.
성전도 자기 멋대로 성전 개념을 가지고 있지
예수님이 성전이시다 라는 의미는 무슨 소리인줄 모르기 때문에

그냥 듣기 싫은 겁니다.
두 주인을 어떻게 섬길수가 있냐 말이죠.
두 성전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과 그리스도의 몸인 성령의 성전 중
둘 중 하나만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어디까지나 인간의 이웃은 자기설정이지

예수님의 이웃 설정이 아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멋대로 이웃을 설정해 놓은
그것을 들통내기 위해서
예수님이 일부러 의도적으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창기와 죄인의 친구 곧 이웃으로 나서니까
못마땅해서 저런 별명을 붙이는 겁니다.

즉 자신은 저렇지 않으니까 깨끗하다는 거죠.

 

오히려 진짜 이웃은 불편한 자인 겁니다.

그런 이웃을 대접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곧 예수님이 이웃입니다. 이보다 더 불편할 수 없는 이웃은 없으니까요.

유일한 이웃은 예수님 한 분 뿐이다는 겁니다.
 

유럽에서 어린아이 하나 죽었다고 피난민을 받아주는줄 아십니까?

천만의 말씀

 

가난한자는 나랏님도 못 다스린다고 하지 않습니까?

즉 불가능 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웃사랑 실천할 생각하지 말고,
? 이웃사랑을 도로 어기기 때문입니다.


본인 자체가 바로 약자이다는 것을 알면 되고

본인 자체가 바로 피난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런 약자인 나를 누가 도우냐로 이웃사랑이 어떻게 말씀성취 되는 가를 봐야 한다는 겁니다.

 

아니 한 나라의 왕인데 왕인 동시에 가장 약자인 자가 있습니다.

이 모순성 이율배반성

이 부조리성을 신체 그 자체에 장착된 자가 바로 다윗 왕 아닙니까?

 

사울왕이 그랬던 적 있던가요?

없잖아요??

 

즉 다윗왕이 그렇다면은

결국 누가 그렇다?

 

네 맞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예수님이 그렇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절대 안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렇다 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 자이다는 겁니다.

무능하기 때문에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난 분입니다.

무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 나무에 달려 죽는 분입니다.

 

태어난 것도 죽는 것도

하나님이 아닌 예수님이 그렇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절대 안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렇다 라는 겁니다.

 

ㅋㅋㅋㅋ 헷갈리죠??

 

하나님은 안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그렇다 라고 지난번의 시간에 자주 인용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치 곧 괴물성입니다.

 

너가 바로 죽음 보다 강한 사랑인데

왜 죽음을 보고 겁내하느냐?

너는 너의 괴물을 바라라 라는 겁니다.

 

이것을 알 때 까지 계속 해서 죽음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그래놓고 요셉은 자기 형제들을 계속해서 뺑뺑이 돌립니다.
뭐 내어 놓을때까지?
믿음으로 내어 놓을때까지!!

유다가 며느리 다말 때문에 받은 그 약속이라는 믿음을 내어놓으니까

비로소 패쓰 하는 겁니다.

이 패쓰 오브 데이 pss of day 가 바로 유월절 아닙니까?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의 죽음을 내어 놓을 때 까지는 절대로 못 넘어간다는 겁니다.

 

다윗은 그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건져내 달라고 합니다.

 

결국 구원이 이미 덮쳐졌기 때문에 지금 벌어지는 사건들인데

다윗은 구원이 미완성이기 때문에 구원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마치 주여 주여 주의 이름으로 마귀를 물리쳤다고 하는데

정작 예수님은 그런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는 겁니다.


마귀 한 마리 물리치면 더 모호해지지 또렷해지지 않습니다.
나이 들고 늙어 죽을때에는 도대체 몇 마리의 마귀를 물리쳐야 할까요?

그런 모호한 구원은 없다는 거죠.

 

이것은 곧 메르스 라는 병마에서 건져달라고 하는 그 기도하는 사람에서

너가 메르스야 너가 괴물이라니깐 이라고 하는 기도의 사람이다 라고 바꾸시는 겁니다.

 

이것을 또 다시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이다 라는 겁니다.

 

하나님이란 도킨스 말대로 만들어진 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만들어진 인간입니다.

 

그냥 성육신 하면 될걸 왜 만들어진 인간이라고 하느냐 하면

무능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지키는 자가 아니라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난 자이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곧 주 기도가 바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라고 하는 이유가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무능한데도 불구하고 이미 다 받았다는 겁니다.

 

이미 다 받았는데 말라꼬 기도하냐고요?

그러니 기도하지 마시고 기도되세요 라고 하는 겁니다.

 

기도의 사람은 기도하는 자가 아닙니다.

기도하는 자는 기도의 사람의 핍박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누가 예수야 너의 하나님이 어딨냐? 왜 너를 안 도와주고 왜 구원하지 않느냐 라고

누가 그런다고 했나요?

 

유대인 아닙니까?

 

기도하는 자는 기도의 사람을 그렇게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냐?

바로 이것이 정치 곧 사랑인데

 

이웃사랑실천하는 자는 반드시 이웃 되신 예수님을 죽이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사랑이 펼치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즉 때려죽어도 이웃사랑실천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지혜를 모르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지혜는 내가 바로 이웃을 죽이는 살인자라는 죄인에게만 해당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정반대로 신앙을 하는 겁니다.

유대인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신앙은 예수님 혼자만 하시는 겁니다.

그 대상에 우리가 놓여진 겁니다. 그것도 죄인으로써 말입니다.

 

그러니 건져달라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할 판국 뿐이지

 

어딜 감히 이웃사랑을 실천하려 하느냐 말이죠.

 

저는 자주 이런 말을 합니다.

성경 말씀에는 어디에도 하라 하지말라가 없다고

 

성경에는 명령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명령어가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명령어 속에 들어가서 명령어 에게 속아 봐야

명령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하라 하지말라는 지키게 되면

하라 하지말라가 졸지에 자기자신이 되어

자기자신이 명령어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이것을 에이 그런게 어디있느냐 라고 특히 목사들이 반발을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을 인정해 버리면 목사들은 교인들을 다스릴수가 없게 된다는 겁니다.

무질서가 되고 개판이 되며 방종을 방관하게 된다는 말도 안되는 강요된 선택을 주장합니다.

 

자기자신이 명령어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대상화 해서 신앙할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이 나를 대상화 하는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성경말씀을 대상화 하는 주체가 된다는 거죠.

 

그러니 결국 저들이 말도 안되는 것을 수천년동안 속여 와놓고서는

거꾸로 엉터리로 믿음을 가르친답시고 모범이 되겠다고 껄떡 거리는 겁니다.

 

목사는 모범인이 아닙니다.

목사는 내 같은 이런 죄인도 용서 받았다는 죄인임을 보여주는 것이 목사입니다.

 

그런데 의인이 될려고 하니

오히려 세상사람들이 속이지 말라고 하는 셈인 거죠.

 

오늘 본문은 왜 약하게 만드시느냐?

왜 그런 정치를 곧 사랑을 펼치시느냐?

 

바로 하나님을 바라라 라는 이유인 겁니다.

 

바라보게 되면 갑자기 강하게 되거나

약함이 해결이 되거나

가난이 해결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바라본다는 자체가 관계성으로써

그 어떤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 이미 바라본다는 관계성으로써 게임오바 라는 겁니다.

 

다른 말로 주의 이름으로 마귀야 물러가라 라고 하니까 마귀가 떨어져서 강하신 하나님을 증명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사탄이 하는 짓이고

 

너는 그런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나님만 바라라 라는 그 관계성으로 이미 게임 오바 이다는 겁니다.

 

욥이 더 이상 밤새도록 잠도 못자면서 끍어대는 그 병을 더 이상 고쳐 달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이미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봤기 때문에

게임 오바가 된 겁니다.

 

오히려 자기를 저주한 그 친구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잖아요

 

이미 게임 오바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용서가 만개함이 드러나지

내 병고침 받았다 라는 것은 쑥 들어가고 없습니다.

 

결국 그 병듬이 도리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라는

은혜의 관계성을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기도하지 말고 기도되기가 된 겁니다.

기도를 따로 행해서 기도를 지키는게 아니라

이미 기도로 태어났기에

늘 무능함 속에서 도리어 관계성(죽음보다 강한 사랑)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그러니 죽음 속에 도리어 탁란하는 셈입니다.

 

죽음이라는 강한 것 속에 알을 낳아서 죽음이 도리어 우리를 먹여 살리는 꼴이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실컷 먹이고 키워줬더니 죽음의 자식이 되는게 아니라 생명의 자식이 되어버렸다 라는 겁니다.

 

부자가 실컷 창고를 지어서 재산을 모았더니만

오늘밤 네 영혼을 취해버리면

그 고생해서 모은 재산은 결국 남의 것이 되는 겁니다.

결국 자기 좋으라고 재산 모은게 아니라

남 좋으라고 재산 모은 꼴이다 라는 거죠.

 

애굽왕은 이스라엘 좋으라고 그런 재산을 모은 셈이다 라는 거죠,

물론 이스라엘은 그런 것 필요가 없기에

더더욱 죽음 속으로 할례 연합 세례 받으면서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겁니다.

 

결국 오늘 다윗의 모습도 출이스라엘 출예루살렘을 보여주는 겁니다.

출 탈출만 있으면 안되죠.

입 입성이 있어야만 되죠. 입성 때문에 탈출이 의미가 있으니까 말이죠.

 

그래서 예수 안에 입성하는 겁니다.

 

탈 하나님 ~에서, 입 하나님의 이름 ~ 으로 이다는 겁니다.

 

탈출 하나님에서 입성 예수님으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이것이 이미 구약에서 주님은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구약은 결국 우리의 본성을 다 드러내주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런 작업을 홀로 하심으로써

다윗을 빼내었다는 겁니다.

 

다윗을 빼내시는 예수님을 보는게 아니라

빼내임을 당하는 다윗을 보고 있으니까

 

예수님을 바라라 가 아닌 겁니다.

 

다윗은 예수님을 바라라 가 되는데

그것을 보고 있는 우리는

다윗이 예수님을 바라봤듯이

왜 우리는 예수님을 못 바라보고

다윗을 바라보고 있느냐 말이죠.

 

그 이유는 다윗이 어디에 들어갔기에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까?

죽음 아닙니까?

 

그럼 우리도 죽음 속에 들어가면 예수님을 바라볼것인데

 

누가 죽음 속에 들어갈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내가 설정한 죽음은 죽음도 아니잖아요???

 

다윗이 다윗 자신이 설정한 죽음에 들어갔나요?

그럼 죽음을 설정한 다윗이 강하지

죽음이 강합니까?

 

도저히 못 벗어나는 강함의 죽음 속에서 예수님을 바라본 겁니다.

 

결국 이것을 따라 할 생각 말고

예수님이 그랬다는 것을

다윗에게 미리 보여주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미완료로서의 지키기가 아닌
이미 다 완료 되었기에 덮쳐지는 단절성 바로 정치인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를 쫏아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마귀 쫏아내면 다른 마귀 가만히 있겠나요?

그럼 사단의 가시는 왜 주시나요?

그렇기에 오히려 마귀 속에 탁란 시키는 겁니다.

애굽왕 속에 탁란 시키는 겁니다. 이것이 정치 지혜 곧 사랑이다는 겁니다.

너는 무능할 뿐이고

이 무능자의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에

나서십니다.

 

그렇다면 너는 하나님만 바라보라 라는 겁니다.

 

결국 시편 43편은 출애굽의 재반복입니다.

 

너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라 왜? 이미 다 완료이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누가 너를 괴롭히니? 그렇다면 이것은 구원사건의 완료로써 발생한 사건이다는 겁니다.

그 속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교회가 생겨난다는 겁니다.

 

그 교회가 너 다윗이듯이

너는

교회는

다윗은

 

가만히 서서 하나님만 바라라 라는 겁니다.

 

(14:13, 개역)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14:14, 개역)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오로지 무능한 자만이

 

고아 과부 나그네에게만이 기쁜소식이지

 

강한 자에게는 전혀 기쁘지 않는 소식이다는 겁니다.

 

희년은 이렇게 자기 대상물을 미리 만들어서 오는 겁니다.

 

가만히 서서 너의 하나님만 바라는 그 자에게만 오는 기쁜소식이다는 겁니다.

 

출애굽때는 거시적인 전쟁과 불기둥 구름기둥 그리고 홍해사건과 같은

블록버스터와 같은 장면이지만

 

지금 시편 43편은 그야말로 초라하기 짝이 없는 독립영화와 같은 미시적인 상황입니다.

거대한 숫자의 군대도 없고

홍해도 없고

불기둥 구름기둥도 없습니다.

 

그 어떠한 구원 장치 하나 없습니다.

믿음직 스러운 눈에 보이는 스팩타클한 거대한 장치 하나 없습니다.

오로지 초라한 괴로움 당하는 몸뚱아리 밖에 없습니다.

그럼데도 불구하고 출애굽사건은 벌어집니다.

홍해갈라지듯이 두 패로 가르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정치 곧 용서의 사랑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어떤 상황이든 상관 없이 십자가의 지혜는 펼쳐집니다.

출애굽사건이라는 구원 사건이 말입니다.

 

다윗을 빼내시는 주님

 

다윗은 겁을 먹고 낙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낙망하지 말고 너는 너의 하나님만 바라라 라고 하십니다.

 

구원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완료로써 오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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