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성에서 불가능성으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시편 44)

 

죄인에서 죄인으로, 죽음에서 죽음으로


 

(1:16, 개역)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17, 개역)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44:1, 개역) [고라 자손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44:2, 개역) 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심으시며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

(44:3, 개역)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44:4, 개역)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44:5, 개역)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44:6, 개역)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44:7, 개역)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케 하셨나이다

(44:8, 개역)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리이다(셀라)

(44:9, 개역)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케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44:10, 개역) 주께서 우리를 대적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44:11, 개역) 주께서 우리로 먹힐 양 같게 하시고 열방 중에 흩으셨나이다

(44:12, 개역) 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심이여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44:13, 개역) 주께서 우리로 이웃에게 욕을 당케 하시니 둘러 있는 자가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44:14, 개역) 주께서 우리로 열방 중에 말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케 하셨나이다

(44:15, 개역)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44:16, 개역) 나를 비방하고 후욕하는 소리를 인함이요 나의 원수와 보수자의 연고니이다

(44:17, 개역)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44:18, 개역) 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44:19, 개역) 주께서 우리를 시랑의 처소에서 심히 상해하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44:20, 개역)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44:21, 개역) 하나님이 이를 더듬어 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대저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44:22, 개역)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44:23, 개역)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44:24, 개역)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44:25, 개역) 우리 영혼은 진토에 구푸리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44:26, 개역)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

 

 

누가봐도 구원은커녕 버림받은 모습입니다.

다윗이라는 개인이 아니라

마치 복선처럼 다윗은 이스라엘의 모습을 대변 대표합니다.
보편적 단독자 로써 말입니다.

더 깊게 보면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듯이 말입니다.

즉 예수님이 보편적 단독자로써 버림받는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하나의 개인으로 보고 착각하고서는

이스라엘이 다윗을 버림받은자 취급해 버립니다.


누워서 침뱉기죠

십자가의 지혜는 이렇게 맛물려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게 아니라

사실은 내가 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지혜인 겁니다.

지혜가 인간의 소유가 되기는커녕 지혜에 모조리 소유 당해야 할 판국인 겁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이스라엘 자신들의 모습인데
어떤 모습?

십자가라는 저주에 달려 죽어 마땅한 죄인의 모습 말입니다.

 

그런데 왜? 한 개인의 모습을 보고 남 보듯하냐 말이죠.

자기들 운명인줄 까마득하게 모른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운명이 남의 운명 취급하듯 한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는

기적을 바라는 유대인에게서는 거리끼는 겁니다.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개역)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개역)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자기운명인데 남의 운명처럼 남 말 하듯이 한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운명은 곧 나의 운명인데 말입니다.

십자가는 내 운명인데

타인 취급하듯이 이질적으로 본다는 겁니다.

또 반대로 동질적으로 보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온갖 선한 것들을 닮고자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왜 그런고 하니 인간의 신체가 이미 법으로 장착된 몸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믿어주면 혹시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동질성입니다. 합일 일체 동일화 말입니다.

 

누가 전화가 와서 묻는 물음에 답하기를

인간이 왜 자기가 생각한다고 착각하느냐 하면

생각이 주어져서 생각하는 줄 모르고

자기가 생각한다고 착각 하도록 만드는 것이 생각이라는 주체이다는 겁니다.

결국 인간은 생각하는 주체도 아닌데 자기가 주체인냥 생각해서 생각한다고 본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이라는 주체가 얼마나 인간 보다 뛰어나게 주도하면서 대상화 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자기가 생각해서 생각한다고 여기도록 착각케 만드는 생각이니까 말입니다.

 

모든 사물이 다 그러합니다.

 

죄를 자꾸 인간이 짖는다 라고 하는데

천만의 말씀!!
인간이 죄를 짖는게 아니라

죄가 인간을 다루는 겁니다.

 

죄가 주체이고 인간은 대상물입니다.

 

결국 인간의 신체 자체가 자기중심이라는 주체화 되어있음으로 인해 모든 것들이 전도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럼 당신은 예정론적으로 이미 정해져 있다는 말이냐?

아니지요!! 정반대죠 결국 그런 예정론 또한 인간 자신이 주체가 되었다는 것에 동원이 될 뿐이지

예정론을 깨는 예정론은 때려죽어도 안 믿거든요. 예정론자들도 거부하는 예정론이다는 겁니다.
즉 십자가를 주장하는 자들도 거부하는 십자가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포착불가의 십자가 지혜 말입니다.
[불가능에서 불가능으로] 이다는 거죠.

예수님만 구원되어 있는 예정론 뿐이다는 것을 그 어떤 예정론자도 안 믿습니다.

 

나의 구원이 낑겨 있어야 인간은 그 예정론을 취사선택 합니다.
어디까지나 나의 구원이 포함된 예정론이어야 하지
내 구원이 빠진 구원론 예정론은 거부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즉 인간의 믿음이란 믿고픈 것만 믿는 취사선택일 뿐이다는 겁니다.
내가 믿는 십자가를 거부하는 십자가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내가 십자가를 거부하는게 아니라 인정하는데
십자가가 나를 거부하는 그런 십자가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언어 단어 자체도 취사선택합니다.

구원도 그런 의미에서 취사선택하는 식입니다.

? 자기신체가 법적이기 때문입니다.

 

지지난 시간에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정면배치 된다고 언급했잖아요!!

 

그럼 당신은 자유의지를 믿는다는 말이네

그것도 엉터리요 사실상 자유의지란 없습니다.

자유 또는 자유의지처럼 보이는 강요된 선택인 거죠.

인간에게 포착 당하는 자유란 없어요

그렇게 되면 자유가 자유가 아닌 셈이지요

인간에게만큼만은 포착 당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인 겁니다.

자유가 주체이지 인간이 주체가 아니다는 겁니다. 인간은 그저 대상물일 뿐입니다.
모든 것이 이런 식입니다.

 

인간은 갇혀있습니다. 그래서 강요당한 선택을 해 놓고서는 자유라고 그냥 우기는 겁니다.

그래야 자기 신체에 편합니다. 편한 것은 결국 우상 아닙니까??

 

예를들어 오늘 본문인 시편 44편의 상황을 자유의지는 절대로 선택할 수가 없습니다.

자유인데 다들 피해 버리면 그만이거든요.

누가 저런 상황을 겪을려고 하겠냐 말이죠.

 

마치 이사야 53장의 고난의 종 모습 아닙니까?

 

누가 도대체 믿겠냐 말이죠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래서 제목을 불가능에서 불가능으로 즉 믿음에서 믿음으로입니다.

 

다른 말로 쉽게 하면

 

말도 안되는 것에서 말도 안되는 것으로입니다

 

앞의 것을 부정하면서(앞의 부정이 뒤의 부정을 부정하기 때문에) 저들(앞의)의 부정에 더 부정함을 추구하는 식입니다.

 

불가능(말도 안되는)을 추구한다는 자들에게서 조차 그건 말도 안된다 라는 것을 이미 이룬 것을 누리는 식입니다.

 

말이 참 어렵지요

 

소위 믿는 자 라는 자들에게서 조차

에이 그러면 누가 구원얻겠습니까? 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라고

정작 믿는자들이 믿음을 거부하는

 

그 믿음

 

바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말입니다.

 

대부분의 인간의 한계는 이겁니다.

 

믿음에서 대부분 행함으로 빠집니다.

 

[믿음에서 행함으로]

 

자 그렇다면 행함이라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은 앞의 믿음은 사실상 믿음이 아니였다는 겁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우리가 자꾸 그 의인이다는 전제를 빼야 말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못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에

반드시 우리 자신을 포함 시킨다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안가르치는 교회를 본적이 없습니다.

다들 이렇게 가르치는 겁니다.

 

은근 슬쩍 다 집어넣습니다.

 

청년부 대학부 다들 그렇게 가르치더라 말이죠.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예수님에게만 해당 됩니다.

우리는 의인이 아닌 죄인일 뿐이고

믿음은커녕 어떻게 해서든 가능성을 추구할 뿐이지

누가 불가능성을 추구하냐 말이죠??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아예 대 놓고 이렇게 직설 돌직구를 날립니다.

 

본인도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다는 겁니다.

이건 불가능해 라고 말이죠.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믿음 카면 이스라엘이 달인들입니다.

이 믿음 문제 때문에 민족하나 자체가 평생 전 역사속에서 혹독하게 다루어지는 겁니다.

늘 행함과 믿음 문제로 인해서 예민할데로 예민한 민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특이성 자체가 믿음으로 인해 태어나고 생겨난

없는데서 발생한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민족은 행함에서 행함으로 이어지는 민족이지

이스라엘은 믿음에서 믿음으로

불가능에서 불가능으로 단절에서 단절로 불쑥 불쑥 발생한

뚝뚝뚝 끊어진 존재이다는 겁니다.

 

그럼 끊어져야 하는데 안 끊어지는 겁니다.

안끊어진다고 해서 단절성이 없는게 아니라 단절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이것이 말이 안되기 때문에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는 겁니다.

 

단절에서 단절으로 어떻게 이르게 되고 다다르게 되냐 말이죠?

 

천국 곧 예수님의 나라에 말입니다.

 

반면에 지옥의 나라에서는 행함에서 행함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이것은 이해 자체가 가능하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니까 말이죠

말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말이 안됩니다.

어떻게 죽은자 단절된자인데 산자이냐 말이죠?

누가 봐도 죽은자 인데

 

이것은 예수님의 나라 라는 결과가 앞의 원인이 없이 결과를 도출시켰기 때문입니다.

결국 미래완료라는 다 이루었다 라는 완료성이 미래에서 현재에 덮쳐져서 이끄는 것이지

 

원인에 따른 결과

과거와 현재 라는 원인에 따른 미래

과정으로 인한 결과로 도출되는 것은 지옥나라이지

예수님의 나라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것은 행함의 나라이지

믿음의 나라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결국 모든 종교마다 믿음 곧 신앙을 주장하는데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행함에 속하는 겁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곧 유대인 민족도 믿음이 아니라 행함으로 곁길로 빠져버렸듯이

그 어떤 자도 믿음에서 믿음으로, 불가능에서 불가능으로 이르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럼 누가 하긴 했다는 말인데 누구냐?

 

바로 의인 딱 한 사람 바로 믿음되신 예수님입니다.

 

여기서 믿음되신 예수님이란

반드시 믿는자들로부터 거부되는 믿음이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능성에서 불가능으로 라는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것이 말로는 어려운데 다행히도 성경에서 나오는 의미로 보면 쉽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로부터 거부당하는 안식 그 자체 곧 안식의 주인이 바로 안식이다는 겁니다.

 

즉 진짜 안식이란

반드시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로부터 거부당하는 안식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말이 또 어렵나요?

쉽게 말하면

채플린 흉내내기 대회에서

 

진짜 채플린이 참가 했습니다.

 

그런데 채플린이 탈락 당합니다.

 

그리고 채플린 따라하기 대회 123등 수상자들로부터

 

채플린을 그것 밖에 흉내못내냐고 티박받는 그 채플린이 진짜 채플린이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바로 이런 의미로써 철학자들은 사유를 억수로 만들어 냅니다.

 

인간은 아는 것이 쥐뿔도 없다 라고 소크라테스가 자주 인용한 말인데

그렇기 때문에 쥐뿔도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자기는 위대하다 천재다 라고 말하듯이 말이죠.

 

결국 예수님의 공생애는 간단합니다.

가는 곳 마다 가짜 라고 티박받는 것 밖에 없습니다.

 

가는 곳 마다 쫏겨나고 구박받고 말이죠 거부시 당하는 겁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을 핍박했다는 실상을 들추어내는 사건이 믿음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믿음은 늘 가짜 라는 것이 진짜가 늘 간섭했기에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행함이 아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도록 주님께서 직접 개입하고 간섭하시겠다는 관계성입니다.
신부인 아내는 그래서 할게 없습니다. 사랑 밖에는
그러나 가정부는 이런 지적 받는 사랑의 관계가 없기에
생존을 위한 행함으로 인해 그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겁니다.
 

즉 이 말은 진짜가 오니까 그 동안 가짜를 사랑하고 좋아라 했다는 겁니다.

 

즉 또 다시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오기 까지는 이런 갈라짐은 없었다 라는 거죠.


자유하는 여자와 여종의 갈라짐 말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갈라짐 말입니다.

탕자와 맏아들의 갈라짐 말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낌이 되는 십자가 곧 불편하기 짝이 없게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모조리 맏아들에 해당되는 것만 잔뜩 손아귀에 쥐고 자부해 왔던 겁니다.
탕자에 해당되는 긍휼은 전혀 없었습니다. 믿음은 없고 행함만 있었으니
믿음이야 말로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싫어하고 거부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겁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교회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자가 바로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그럼 교회사람들이 사랑한다는 예수는?

가짜 채플린

가짜 예수죠.

그렇다고 교회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겠다고 하지 마세요
이들은 중요한 힌트를 주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사람들이 티박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에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보게 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이 유대인들 속에서 이방인들이 보라고 믿음의 사건을 터트리듯이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그 믿음 되신 예수님 앞에서는 자신들의 행함만 내세울 뿐입니다.
아주 아주 신기하게도 그것 밖에 내어 놓을 줄 모른다는 겁니다.
이상하죠?????


못행하도록 말씀을 주었는데
이상하게 다들 행할줄 아는 행함의 도사들이 다 되어버린 겁니다.
죄 아래 가두도록 율법을 주었는데
죄 아래 갇혔버려서 긍휼을 바라는 자는 하나도 없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면서
이레에 두번 금식, 십의 이조,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는
이런 것만 내세우더라 말이죠.
그것을 바울은 배설물이다고 했는데
그 똥을 자랑이랍시고 예수님 앞에 들이대더라 말이죠.
그 정도면 자신의 몸에 칭칭 똥칠을 하고
남에게도 그렇게 발랐다는 말 아닙니까?
교회에 가면 똥내가 납니다.
배설물을 자랑하는 인간들로 가득합니다.
마귀들이죠.

바로 믿음(불가능)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겁니다.
 

이런 거리낌 요소

불편한 요소

불가능성의 요소

단절의 요소(검을 주러 왔노라)

 

를 모조리 다 빼버린

 

위의 요소에 반대의 요소인

거리낌의 반대는 뭡니까? 수긍의 요소(환영, 환대의 요소-4장 선지자는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함)

불편의 반대는 편안한 요소

불가능성의 반대는 가능성의 요소

단절의 반대인 소통 연결 화합 화평의 요소

행하고 지키고 실천했다는 그런 요소들
 

로 채워버리면 가짜 예수는 유지가 되는 겁니다.

가만히 보니 모든 교회 프로그램이 바로 이런식 아닙니까?

 

그러니 구지 진짜 예수님이 없어도 교회는 잘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저런 프로그램이 그 동안 밑도 끝도 없이 만들어져서 뺑뺑이 돌리면 되니까 말이죠.
그러니 예수 라는 이름은 그저 브랜드 이름일 뿐입니다. 허구요 이미지 일 뿐인
광고 카피 처럼 말이죠.

 

사실상 세상의 원리가 저렇게 돌아가는 겁니다.
특히 자본주의의 원리를 보고 싶으면 교회가면 가장 잘 보여줍니다.

 

인간이 주인공 곧 주체가 된 세상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오늘 본문 시편 44편입니다.

 

심지어 다윗 본인도 아닙니다.

다윗이 아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철저한 단절인 단절에서 단절으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의 시선이 없기 때문에

행함의 시선에서는

다윗 끝났구나

넌 죽었구나

라고 끝입니다.

 

구원이고 뭐고 없습니다.

 

제가 말이 안 되는 소리 말고

말이 되는 소리 하나 할께요

 

바로 예수야 너는 왜 너 자신도 못 구원하면서 남을 구원한다고 하느냐?

어디 너 자신을 구원해 봐라 라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는 자들 모두가 그렇게 말했습니다.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역전도 없습니다.

 

이것 보다 더 명료하고 또렷한 것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란 그야 말로 밝히 보인 것 맞습니다.

그 어떤 반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이 되는 것으로 끝나면 참 좋겠는데

 

또 심기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제가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말이 안되는 소리를 말입니다.

 

말도 안되게

 

3일 뒤에 살아났다는 겁니다.

 

물론 제가 이것을 믿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제발 믿지 말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이것은 행함의 영역에서 떠난 문제이기 때문에

믿으라 라고 믿는다고 해서 믿음의 영역에 들어가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 또한 행함의 영역이기에 믿으세요 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덮쳐지는 주체문제가 바깥 외부로 규정되는 기준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러니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말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 이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주체가 외부로 선을 긋고서 믿음 자체가 활동을 합니다.

그것이 사도행전에서 나타나는 겁니다.

사도는 그저 장기알처럼 배치 당할 뿐이지

성령 곧 예수님의 영이 다 알아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성령을 누가 봅니까?

 

예수님을 죽인 당사자가 보는 것 아닙니까?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결국 사도행전도 그렇게 봐야 합니다.

믿음 줄려고 성령이 활동하시는 구나?

천만의 말씀 그것은 믿음의 시선이 아니라 행함의 시선이지요

 

그럼 어떻게 봐야 하는데?

사도행전은 믿음 줄려고 하는게 아니라

 

믿음을 오히려 안 줄려고 하는 성령의 모습으로써 사도들이 배치된다는 겁니다.

결국 예수님과 똑같이 취급당하는 거부시 당하는 모습만

마치 결제 받듯이

그럴줄 알았어 라고 현장검증 하듯이

아 이런 식으로 너희가 예수님을 죽였구나 라고

예수님의 죽음을 재현하는 현장으로 만드는 것이 성령행전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불가능에서 불가능으로 라는 겁니다.

 

이렇게 단절 시키고 단절 시켰는데도 불구하고

믿음이 나타났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믿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되면 주체가 인간 자기자신인 거죠.

예수님이 믿음을 주니까 믿기 싫어도 믿을 수밖에 없는 자가 된 것인데

 

이것을 바로 이방인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새이스라엘 말입니다.

 

이 말은 누구를 염두하고 누구 들으랍시고 하는 말입니까?

원가지인 이스라엘 곧 유대인을 대조시키면서 말이죠.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9:18, 개역)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9:19, 개역)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9:20, 개역)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9:21, 개역)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9:22, 개역)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9:23, 개역)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9:24, 개역)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9:25, 개역)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9:26, 개역)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9:27, 개역)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9:28, 개역)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9:29, 개역)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9:30,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9:31, 개역)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9:32, 개역)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9:33,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 이방인이 바로 누가복음에서는

이스라엘 과부도 아닌 이방나라 과부도 아닌 이방나라 과부 중에 딱 한 사람 시돈땅의 사렙다의 한 과부 뿐이여

이스라엘 문둥병자도 아닌 이방나라 문둥병자도 아닌 이방나라 문둥병자 중에 딱 한 사람 수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 뿐이다는 겁니다.

 

(4:24, 개역)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4:25,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4:26, 개역)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4:27, 개역)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4:28, 개역)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4:29, 개역)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4:30, 개역)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왜 한 사람 뿐이다 라고 하실까요?

그래야 거리끼는 요소이지

환영 환대하는 요소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즉 분노케 만드는 복음이지

기쁘게 하는 복음이 아니다는 겁니다.

 

살인하고파서 낭떠러지로 끌고가 밀쳐 떨어뜨리고프게 만드는 복음이지

감사하고 안심이 되고 편안한 복음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것은 가짜 복음이다 라는 거죠.

 

진짜는 이상하게도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에게 계속 시비를 깨작 깨작 거는

 

믿는다고 하는 자들에게 그렇게 시비거는 것이 진짜 믿음이다는 겁니다.

 

그렇게 진짜 믿음이 가짜믿음인 나에게 시비를 건다고 여겨지시면 빨랑 항복하시면 됩니다.

무조건 이유없이 잘못했다고 말입니다.

잘못한게 없는데 왜 시비냐고 따질게 아니라

그냥 이유 없이 무조건 말입니다.

 

과연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어디까지나 믿음이 아닌 행함인데

즉 주체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지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님이 아니거든요.

 

나도 생명이 있어서 숨을 쉬고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큰 착각 이지요.

 

오늘밤 네 영혼을 취해 버리면

내가 그동안 쌓아온 생명의 의미들이 누구 것이 되겠냐 말이죠?

 

내 생명을 위해서 모아온 것들이 결국 남 좋으라고 모은 셈이 되는거다 말이죠.

 

부자청년이 오죽하면 예수님에게 제대로 걸려들어서 근심하고 등돌렸겠습니까?

 

거리끼는 겁니다.

 

부딧히는 돌에 부딧힌 겁니다.

 

건방지게 가능성으로 봤던 것이 다 들통난 겁니다.

 

부딧힌 돌에 부딧혀 단절을 격게 되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제발 부딧히자 말이죠.

제발 들통나자 말이죠

 

자 이런 판국에 구원이 어디 있습니까?

이상하지 않나요?

예수님은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 아닌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요나서를 보세요

그것이 과연 구원에 대한 이야기인지를 말입니다.

 

누가 죄 죄 죄 그만 카라 라고 짜증내면서 말하던 목사가 있던데

마귀죠

 

그런데 이스라엘 하면 구원 구원 구원 하구한날 맨날 구원 구원 구원 하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의 민족 아닌가요?

그런데 구원이 맨날 바뀝니다.

바뀌니까 맨날 구원에 매달려서 맨날 구원 구원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요나서를 보면 더 이상 구원 구원이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맨날 맨날 구원 구원 하던 사람이 갑자기 구원 소리 안하면 어떻게 됩니까?

안 하던 소리 하면 죽을때가 된 것 아니냐 라는 말들을 하듯이

갑자기 더 이상 구원 구원 구원 안 그러는 겁니다.

 

구원이 아닌 지금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왜 갑자기 요나의 표적이 생각이 났느냐 하면

 

오늘 시편 44편이 구원은커녕

지금 모습이 처참합니다.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이라던 다윗을 보는 시선이

오히려 저주 속에 철저하게 놓여진 모습입니다.

 

아니 누가 구원자가 구원해 달라고 하면 말이 됩니까?

한 나라의 왕이

그것도 최고의 권력자가

그 나라에게 가장 약한 자

가장 거지

가장 잉여 쓰레기 찌끄래기 취급 당했을때에

이 왕의 신분은커녕

철저하게 경계선에 낑겨버린 경계인이 되어버린 겁니다.

중간에 낑긴 자가 된 겁니다.

죽은 것도 아니고, 죽어버렸으면 차라리 죽어버려라 라는 소리를 안 듣잖아요

아직도 살아 있으니까 온갖 저주의 소리를 듣는 겁니다.

그렇다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닙니다. 숨을 쉬고 있는 생명이라면 생명의 가치가 있어야 하는데

그 어떤 생명의 가치로 취급 받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왕 맞습니까?

 

이것이 구원자 맞습니까?

 

오죽 하면 구원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구원해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도로 구원해주어야 할 판국일 정도로 처참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처참합니까

그래서 요나서가 생각난 겁니다.

구원이야기는 쑥 들어가 버리고

쓰레기 잉여 찌끄래기

미말에 던져진 웃음꺼리 비방꺼리 구경꺼리 밖에 안될 정도로

아주 아주 무가치(잉여)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겁니다.

 

(고전 4:9, 개역)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누가 감히 그런 예수님 앞에서 구원해 달라고 입을 꺼낼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왕에게 도와달라고 해야하는데

왕 꼬라지가 그 나라의 가장 나약한 백성 보다 더 나약하다는 겁니다.

 

과연 그 속에서 복음이 나오겠냐 말이죠?

구원이 나오겠냐 말이죠?

 

불가능인데 더 불가능 속에서 구원이 나오겠냐 말이죠?

 

인간의 구원이나 믿음은 어디까지나 취사선택이다고 했습니다.

즉 저 처참함 속에

비참함 속에서 나오는 구원은 안 받겠다는 것이 인간의 구원이요 믿음이기에

사실은 인간의 구원은 거짓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다윗왕은 그 비참함 속에 놓여지는 겁니다.

 

이것이 구원의 능력이다는 겁니다.

 

즉 구원을 믿는 자도 저런 구원의 능력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등 돌리는 구원의 능력이다는 겁니다.

구원을 믿는 자를 등 돌려 보내버리니까 말입니다.

 

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예정론 보다 앞선 사후적인 십자가의 사건이다는 겁니다.

예정론을 믿던 놈들이 십자가에서 다 떨어져 나가 등돌려 버리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다윗은 저런 비참함을 통과 한 것 아니냐

어찌 되었던 간에 말이죠.

 

아닙니다. 저런 비참함을 시험 통과 패쓰 하듯이 통과한게 아니라

통과 패쓰할 필요가 없이 다윗 본인이 비참함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러니 통과고 자시고 뭐고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본인이 불가능성 그 자체가 되어 버린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들이 웃끼는 믿음이 뭔고 하니

십자가를 통과 해서 패쓰 하면 부활이다고 우깁니다.

대부분이 그렇게 믿고 교리화 합니다. 교리화 한다는 말은 결국 실천할려고 행할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십자가는 통과할 문제가 아니라

관계성으로써 너가 이제 십자가로써 배치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주변인들은 그 거리끼는 십자가의 사건을 또 격게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사건은 무한반복 되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은 결국 십자가를 통과해 버리고 빨리 멀리 멀리 치워버리듯이

하나의 관문을 통과하듯이 그 어려움을 통과하는 대학입시 시험 치는 날로 여겨 버리듯

또는 군대 제대하면 다시는 뒤도 안 돌아보고 오줌도 그 쪽 방향으로 안하겠다고 하듯이

통과 하는 식이겠지만

 

정작 십자가는 관계성이다는 겁니다.

 

또 누구 말마따나 피할수 없으면 즐겨라 라고 우기겠지만

즐길수도 없어요

이질적인데

불가능성인데

 

그럼 뭐냐?

갑자기 이런 그림이 보여서 제가 이렇게 밖에 설명 못합니다.

십자가는 권총에서 격발 시키는

그걸 뭐라고 하죠? 딱 때리는 겁니다.

총알의 밑 부분에 장전된 곳을 치는

이렇게 십자가의 사건이 발생하면

우리는 마치 딱 맞은 총알처럼 누구에게 박히는 총알 그 자체가 우리이다는 겁니다.

다윗이라는 총알이 이스라엘의 심장에 박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이 다윗이라는 총알이 싫은 거죠.

? 죽어야만 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죽어가면서

물론 죽어가고 있지만 (총알에 맞지 않아도 늙어 죽어가고 있지만)

그 죽는 가운데 누구의 죽음을 보느냐 하는 겁니다.

자기 죽음 밖에 안 보이는 자는

평상시 살아 있어도 자기의 살아 있음만 보는 자요

죽는 순간에 예수님의 죽음이 보이는 자는

평상시에 예수님의 삶이 자기 삶 속에서 장악하는 것이였던 것이였다는 겁니다.

 

아 누구에게 전화상으로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이 또는 십자가 라는 주체가 나를 야구방망이로 홈런을 쳤는데

야구방망이로 딱 친 그 야구방망이가 바로 십자가이고

나는 그 야구방망이에 홈런 깜으로 맞은 야구공이다는 거죠.

그런데 홈런이라고 다들 좋아라 하잖아요

그것도 상대적으로 누구 보란 듯이

던진 투수 마귀 보란 듯이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증상물로써 십자가의 사건을 무한반복하시는

예수님의 증상물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의 사건이 후차적으로 나타났기에

선취적으로 오늘 시편은 야구공처럼 홈런 딱 맞아서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아무리 봐도 오늘 본문에서 기쁜 내용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쁘다는 겁니다.

 

아니 왜?

도대체 뭐가 기쁘다는 거야?

 

그러니 불가능성이지요.

불가능성에서 불가능성으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믿음의 시선에서만 펼쳐지는 겁니다.

 

이 관계성을

 

아들은 징계를 맞음으로써 그 관계의 증상을 누리도록 되어 있고

 

사생아는 끝까지 가정부처럼 행함의 댓가성으로써 보상을 취할려고 구원의 조건을 갖추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사생아에게는 이런 관계성을 혹 초청받아도 스스로가 거부하는 겁니다.

거리끼는 겁니다.

 

너무 쓰레기처럼 더럽고 냄새나고 악취가 나서 고개를 돌릴정도이지만

 

예수님은 그런 더럽고 썩고 냄새나는 이 저주받은 다윗을 기쁘게

뽀뽀하고 금가락지 씌우고 뭐가 그리 좋다고

죽었다가 살아온 자식이라고 입맞추고 살진소를 먹이고

잔치를 벌리는 겁니다.

 

죄인 하나 돌아 왔다고 ~~~~~

 

이것이 아버지의 믿음이였던 겁니다.(인간의 믿음이 필요가 없는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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