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숭고한 거룩) 왕의 혼인 잔치 (시편 45)

 

십자가 지혜와의 결혼

 


(
45:1, 개역) [고라 자손의 마스길, 사랑의 노래, 영장으로 소산님에 맞춘 것]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

(45:2, 개역)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왕에게 영영히 복을 주시도다

(45:3, 개역) 능한 자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영화와 위엄을 입으소서

(45:4, 개역) 왕은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위엄있게 타고 승전하소서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두려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45:5, 개역) 왕의 살이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

(45:6, 개역)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45:7, 개역)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

(45:8, 개역)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45:9, 개역) 왕의 귀비 중에는 열왕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우편에 서도다

(45:10, 개역)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45:11, 개역)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지어다

(45:12, 개역) 두로의 딸이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

(45:13, 개역) 왕의 딸이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

(45:14, 개역) 수 놓은 옷을 입은 저가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동무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45:15, 개역) 저희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45:16, 개역) 왕의 아들들이 왕의 열조를 계승할 것이라 왕이 저희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45:17, 개역) 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케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영히 찬송하리로다

 

 

 

이사야 53장 그 유명한 고난의 종에 대한 말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지만

믿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시편 44편에서는 주의 오른팔과 주의 얼굴의 나타나심으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시 44:3, 개역)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즉 상대적인 저희의 팔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뭐뭐 아니요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 그리고 주의 얼굴 빛으로 했다는 겁니다.
 

인간이 주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도 안 죽는 이유는 주의 얼굴이 많이 봐줘서 불쌍히 여겨줘서 안타죽은 겁니다.

그래서 간밤에 여호와의 얼굴을 보고도 안 타죽었구나 밤새 안녕했구나 평안했구나 라는 뜻에서 샬롬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더 불가능한 것은 물론 주의 얼굴 보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역시나 불가능한 이중불가능성으로써 또 하나는

바로 주의 오른팔이 나타났다는 겁니다.

이 말은 사실상 이스라엘이 무슨 의미인줄도 모르고 사용할 정도로 무지 무지 어려운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즉 불가능한 말인데

말도 안되는 말인데

 

오른팔이 나타났다는 말은 구원했다 라는 구원 개념입니다.

그런데 왜 제가 이스라엘이 이 말을 못 알아먹는다고 했는고 하니

그 이유가 마치 구원을 당연시 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선민됨이 또는 구원론이 도리어 그들의 구원이 안되겠끔 한 셈이다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론 하나는 끝내주게 발달 되어 있습니다.

그런 구원 교리만 믿으면 게임 오바가 될 정도로 교회는 구원시켜 주고 싶어서 환장해 있습니다.
구원 장사야 말로 돈이 되니까 말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이 불가능한 구원을 가능성으로써의 구원으로 바꾸었다는 점입니다.

구원은 어디까지나 불가능성입니다.

 

오죽 하면 이사야가 저런 말을 할까요?

선민으로써 이스라엘 중에서 마치 당연한 구원 이야기를

이사야는 아주 생뚱맞고 아주 아주 낯설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치 불가능한 것이 떳다 비상 비상 비상 하듯이 말입니다.

그럼 그 구원의 내용이 기쁘고 행복하고 즐거운 내용이어야 하는데

이건 뭐 상하고 찢어진 상한심령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못 볼 내용이 나오는 겁니다.

고난 받는 종 말입니다.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7, 개역)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8, 개역)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사 53:9, 개역)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사 53:10, 개역)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사 53:11, 개역)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사 53:12, 개역)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구원자가 나타났는데

주의 오른팔이 나타났는데

 

도저히 불가능한

 

믿음의 대가들 조차도 도저히 못 믿을 믿음이 나타났는데

 

다들 외면하는 구원자 라는 겁니다.

 

다들 고개를 돌리고 싫어하는 구원자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보통 시편 한 편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한 편 안에서 로마서 7장과 8장의 단절처럼

원인 없는 결과가 나타났는데

시편 44편은 그야말로 전체가 그야말로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끝에 가서 역전이 나올줄 알았는데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45편은 정반대로 아예 혼인잔치의 기쁨 그 자체로만 도배가 되어 있습니다.

 

결국 44편과 45편의 그 어떤 연결점이 없는 단절로써

원인 없는 결과로써 예수 안에는 무조건 예 뿐이지 아니오 함이 없다는 식으로써

오늘 시편 45편은 왕의 결혼식에 대한 내용입니다.

 

어떤이들 곧 성경해석자들이 시편 45편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시편 150편 중에서 가장 특이한 편이다 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보통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이스라엘에 대한 내용인데

 

이 시편 45편은 특이하게도 인간 왕에 대한 찬양이라서

이교도적인 세속적인 냄새가 많이 난다고 하는 내용이다 라고 그런 해석이 많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이방적인 것이 합세되어서 이스라엘 속에 들어온 것인지

아니면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의 노래 곧 사랑의 노래를 가지고 온 것인지

이래 저래 따지다가 결국은 모르겠다 라는 해석이 주류를 이루는 식이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우연찮게도 얼마전에 영화를 봤는데(뷰티 인사이드)

그 영화를 보고 생각난 것을 비평 아닌 비평으로써 대충 적었는데

아니 그러고 보니 오늘 시편 45편과 우연찮게 연관이 되더라 말이죠.

 

마치 예수님의 족보에 정통 이스라엘 여자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방 여자의 개입이 많더라 말이죠.

 

아마 유대인 또는 이스라엘 같았으면 그 여자들을 예수님의 족보에서 어떻게 해서든 빼낼려고 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 여자 다섯은 이스라엘의 수치이자 얼룩인 이방이거든요.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몰라도

다섯 여자를 예수님의 족보에서 빼낼려고 얼룩 제거하듯이 빼낼필요가 없이

 

선민 곧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서 예수님 자체가 얼룩 그 자체가 되어버렸기에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이 되든 말든 상관이 없어져 버린 겁니다.

오히려 더 좋다고 여기겠죠.

왜냐?

어차피 이단들이니까

이단 족보에 왜 정통을 자부하는 저들이 예수님의 족보에 개같은 이방여자가 들어가 있다고

가타부타 할 필요성이 오히려 사라지게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영원히 갈리는 겁니다.

 

바로 이것을 저는 주의 오른팔이 나타났다. 주의 얼굴이 나타났다.

주의 팔이 나타났다.

또는 믿음이 나타났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주의 오른팔이 나타났다는 말은 상대적인 왼팔이 있을 것 아닙니까?

오른판 왼팔이 중요한게 아니라

 

오른쪽이라고 말할려면 오른이라고 말할수 있는 기준이 생김으로써 오른쪽 왼쪽이라고 의미를 붙일수 있는 겁니다.

 

바로 이 오른쪽과 왼쪽을 가르는 그 간극 사이에 있는 기준이

나타났다 라는 겁니다.

 

그 기준이 바로 그 간극 사이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간극이 벌어지는 겁니다.

 

결국 인간의 믿음과 인간의 수고함과 전혀 무관한 기준이요

낯설기 짝이 없고

이스라엘이 단 한번도 경험 해 보지도 못했던 기준이다는 겁니다.

 

만약 경험화 되어서 구원이 가능하다면 다윗은 자주 주장합니다.

벌써 내가 다 알아서 드렸을 것이라고 ...

(시 51:16, 개역)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그런데 오죽 불가능하면 안된다 안된다 안된다 라고만 다윗은 외치는 겁니다.

 

여기에 다윗의 노선을 이어받은 참선지자는 역시나 삐딱하게 부정스럽게 안된다 라고 외치고

반대로 상대적인 거짓선지자가 나타나줘야 그 차이 곧 간극이 벌어지듯이

거짓선지자는 된다 된다 된다 라고 긍정으로 일관하게 되는 겁니다.

 

(40:6, 개역)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만약 제사나 속죄제나 번제나 예배 찬양 회개 기도 금식 말씀실천 등등으로 죄를 사할수 있었다면

다윗은 자신이 벌써 그것을 했을 것이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불가능하게 만드셨거든요

무슨 말인고 하니 간극을 벌려놓았던 겁니다.

 

어떤 간극 첫 번째 것이 앞서 있고 뒤의 두 번째 것이 옴으로써 첫 번째 것을 패하기 위해서

두 번째 것이 있었었었다 라는 겁니다.

 

 

(10:1, 개역)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10:2, 개역)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10:3, 개역)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10:4, 개역)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10:5, 개역)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10:6, 개역)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10:7, 개역)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10:8, 개역)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10:9, 개역)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10, 개역)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0:11, 개역)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0:12, 개역)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0:13, 개역)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0:14, 개역)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결국 첫 번째 것을 폐하심은 두 번째 것을 세우고자 함이다 라는 겁니다.

 

그렇기에 첫 번째 것은 죄를 사하지 못한다 라는 겁니다.

고로 온전케도 못하고 말이죠.

즉 구원이 안된다 라는 겁니다.

 

그럼 오른팔이 나타났다 라는 것은 이 두 번째를 세우는 것으로써 구원의 완성이다는 거죠.
결국 첫번째 것은 죄를 사하지도 못하면서 죄를 사하는 척 하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고
이런 오해는 결국 두 번째를 세우기 위한 보충물로써 작용하는 겁니다.
사라질 영광도 이렇게 영광 스러운데 실상의 영광은 오죽하겠냐 말이죠.

(고후 3:6, 개역)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후 3:7, 개역)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고후 3:8, 개역)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고후 3:9, 개역)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고후 3:10, 개역)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고후 3:11, 개역)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고후 3:12, 개역)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고후 3:13, 개역)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고후 3:14, 개역)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고후 3:15, 개역)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 3:16, 개역)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고후 3:17, 개역)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8, 개역)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리고 오른팔은 상대적인 왼팔이 아닌 자기 원수들이 자기 발등상에 놓여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주의 오른팔의 변론에 의해서 원수들이 발등상에 놓여지는 겁니다.

두 패로 비로써 갈라진다는 겁니다. 기준이 나타났거든요.
 

이렇게 됨으로써 이 간극의 생성 되는 겁니다.

 

이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자 그렇다면 거룩이란 우리가 거룩해서 거룩이 되는게 아니라

원인 없이

이유 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거룩을 입히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결혼식으로 표현이 되는 겁니다.

 

자 여기까지 들어보면 이것은 이방나라의 사랑노래 또는 결혼축가 보다 더 더 더 이방적이지 않나요?

 

하나님을 찬양하는게 아니라

 

한 인간에 대한 칭송으로 도배가 되니까 말입니다.

 

물론 오늘 시편 45편의 하나님이 아닌 찬양 칭송 받는 자는 바로 한 인간으로써의 왕입니다.

 

누굽니까?

 

이래서 이방적인 노래니 세속적이니 이교도적이니 하는 해석들이 나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이질적인 겁니다.

 

다윗 왕입니까?

 

아니지요

 

네 맞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아닌

하늘 영광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결국 성육신은 하나의 교리 개념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철저하게 우리 구석 구석으로 파고들어오는 의미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나타났다] 라는 겁니다.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군대에서 마치 사단장이 뜨면 밑의 부대들은 난리가 납니다.
덴져러스 위험합니다.
헬기 한번 볼까 말까한 부대에서
사단장이 헬기 타고 옵니다.
대대장 부터 완전히 기다시피 하면서 그 위엄있던 자들이 완전히 똥개처럼 굽신 굽신 거리는 겁니다.
그래놓고 5분만에 가 버립니다.
그 5분이 얼마나 살벌합니까?

그런데 아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와 버린 겁니다.
땅과 역사는 벌벌벌 떨어야 할 정도로 살벌하기 짝이 없게 됩니다.

헤겔이 자신의 하숙집에 나폴레옹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저기 절대정신이 걸어간다고 외칩니다. 세계정신이 걸어간다 라고 표현합니다.

적군의 왕으로써 자신의 국가의 적대국인데 어떻게 해서 저렇게 외치냐 말이죠?
그런데 자신의 국가는 완전 엉망이라서 백성들 조차도 왕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그 정도로 개판인데
적국의 왕인 나폴레옹을 마치 자신의 왕인냥 자국을 배신때리고 새로운 왕으로 또 새 백성으로써 맞이하는 식이다는 겁니다.
국가를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판을 뒤 엎어버리는 왕으로써 말입니다.

마치 기생 라합이 자신의 민족과 국가를 버리고 간담이 녹았다고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스라엘을 보고 그 배후의 여호와의 하나님을 영접하듯이 말이죠.

또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보라고 외치는 세례 요한 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한 인간이요, 나약한 한 명의 사람일 뿐인데

그 한 명의 인간에게 절대정신이라는 둥,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는 둥,
최고의 강국인 애굽을 물리쳐 멸망시킨 여호와의 일로 간담이 녹았다는 둥의
국가 덩어리로, 참된 왕 그 자체의 덩어리로, 그 자체의 참된 신으로 인식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 왕이 무능해 보이고
나약해 빠진 초라한 인간으로

싫어버린바 된 흠모할 모양 하나 없어도
어리석어 보이고
비천해 보여도
그 왕 이라는 그 자체가
국가와 동일시 되는
이유 없이 그 자체로써의 절대정신, 세계정신,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듯한 하나님 그 자체로 본다는 겁니다.

너무 너무 위대해서 신들메 푸는 가장 비천한 일이 졸지에 가장 영광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 될 정도로 감개무량하다는 겁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또는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이스라엘 중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봐 버렸다.

성경 전체가 다 이런 식입니다.

이유가 있어서
조건이 되어서 나의 왕
나의 신랑이 되는게 아닙니다.

무조건 이유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과연 우리들의 조건에 맞는지를 따져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정상 아닙니까?
유대인 일수록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자 일수록 그럴수 밖에 없습니다.
어쩔수가 없습니다. 인간이란 의심할 수 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이방인이 다짜고짜 무조건 영접합니다.
죄인 중의 괴수가 주를 영접합니다.

맞습니다 주여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실로암 소경이 모세가 큰지 예수님이 큰지 그거 하나 따지는 유대인 앞에서
그저 지금 이 순간 정작 자신의 눈을 뜨게 한자
자신의 허물을 덮은 자
자신을 용서한 자를
이유가 없이
무조건 영접인 겁니다.

주님 쪽에서 벌리신 일이지 자신이 벌린 일이 아니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 쪽의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먼저 왕이 그 자체로써의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희생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종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뿅가버립니다. 누구에게 여호와의 팔이 나타나겠으며 누가 이것을 믿겠는냐?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라고 사도바울이 말하는 것도
그냥 이유 없이 조건 없이 무조건적인 절대 사랑이다는 겁니다.
따지지 마라 라는 거죠.

이것이 바로 저들의 외설성에 더 외설적인 간극이 되는 겁니다.

즉 이것이 천재와 사도의 차이요
소크라테스와 그리스도의 차이입니다.

왕은 좋은 왕이 될려고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오히려 무능하고 어리석은 왕일 뿐입니다.
(다윗왕이 이스라엘 왕 다움을 추구할려다가 박살이 났습니다. 실패했죠. 그 실패가 다윗을 구원하는 겁니다.)
신은 더 이상 신 닮기를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신 그 자체이거든요. 그래서 철저하게 무능합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을려고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이미 아버지와 꼭 같거든요.

기도하는 자와 기도의 사람의 차이 점입니다.
기도할 필요가 없이 이미 기도 그 자체가 덮쳤거든요.

거룩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거룩이 덮쳐졌기에 모든 허물을 덮은 사랑 덩어리이다 라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실로암 소경을 보는 시선에서는 허물 덩어리일 뿐인데 말이죠.

(막 1:7, 개역)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눅 3:16, 개역)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침례를 주실 것이요』

(요 1:27, 개역)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바로 그 왕 중의 왕이신 

이 예수님이 이스라엘민족을 신부로 삼는게 아니라

이방나라백성을 자기 신부로 삼는 겁니다.

 

이것이 온유 아니겠습니까?

 

모세가 자기 부인으로 이방여자 구스 여인

즉 이방 여자 중에 제일 수준 낮은 구스 여인을 아내로 취하니까

 

여기서 중요합니다.

선택은 그냥 선택이 아닙니다.

상대적인 반발성을 유발케 하는 선택입니다.

이렇게 되니 반발을 합니다

왜 하필이면 이방여자라도 좀 수준 높고 상식이 통하고 문화 문명이 발달되어서

좀 배운 여자가 되면 얼마나 좋냐 말이죠.

 

왜 제일 비천한 여자 이어야 하느냐 말이죠.

 

격렬한 반발이 나와줘야 그 선택이 옳았다가 되는 겁니다.

 

결혼은 사랑의 확증 아닙니까?

그 결혼 곧 구원을

 

세상에나 허다하고 모든 죄를 다 짊어진 제일 더럽고 악취나고 제일 죄가 많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진짜 왕이다 라는 겁니다.

 

원수와의 결혼 말입니다.

원수와의 사랑 말입니다.

 

자 이것이 이교도적이다면

 

십자가의 지혜는 이교도적 중에 가장 이교도적이어야만 합니다.

 

왜 인간들이 아니 교회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교회 자체를 우상화 하느냐 하면

과거 이스라엘이 예수님에게 했던 사고방식 그대로 답습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단 중의 이단이 되기 싫은 겁니다.

결국 자신들의 조건에 맞는 메시아인지를 따지고 따지고 따져보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그 희생적인 죽음 앞에서는 그냥 뿅 가버립니다.

희생의 죽음 앞에서는 뭘 해도 다 죄일 뿐입니다.

그런 희생 앞에서는

그저 우리는 

탕자 중의 탕자

 

죄인 중의 괴수일 뿐입니다.

그것을 저들은 거부하는 겁니다.
거리끼는 십자가의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걸림돌이거든요.

 

의인 중의 의인이였으면 했지

 

그런데 그것은 결혼이 안됩니다.

사랑이 안됩니다.

 

여기에 모든 인간들은 반발하고

특히 마귀는 반발 합니다.

 

이 반발성을

 

주의 발등상에 놓아서 드러내는 겁니다.

 

즉 그 반발성 그 강퍅성이 오히려 이 말도 안되는 결혼을 더 돋보이게 해 주는 보충물로 작용케 되니까

 

주님의 손해 볼 것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럼 이 반발성 이 강퍅성을 더더욱 북받치게 돋꾸게 하는 것이

 

백합화 로 표현이 되어 있는데

 

즉 염장 지르는 거죠.

 

이 백합화가 소산님 이라고 표현 되어 있습니다.

 

(45:1, 개역) [고라 자손의 마스길, 사랑의 노래, 영장으로 소산님에 맞춘 것] 내 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왕에 대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

 

(45:1, 공동) 내 마음에서 우러나는 아리따운 노래를 글 잘 쓰는 선비의 붓끝으로 엮어 우리의 왕에게 바칩니다.

 

(45:1, 쉬운) <왕의 결혼을 위한 노래-고라 자손의 마스길. 사랑의 노래. 백합화 곡조에 맞춰 지휘자를 따라 부른 노래> 왕을 위해 시를 지으려니 내 마음속에 좋은 생각들이 넘쳐납니다. 내 혀는 솜씨 좋은 작가의 붓과 같습니다.

 

(45:1, 킹흠정) (고라의 아들들을 위해 소산님에 맞추어 악장에게 준 마스길, 사랑의 노래) 내 마음이 좋은 일을 읊으리라. 내가 왕에 관하여 지은 것들을 말하리니 내 혀는 능숙한 문장가의 펜이로다.

 

(45:1, 현대인) (고라 자손의 교훈시.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백합화' 곡조에 맞춰 부른 사랑의 노래) 내 마음이 아름다운 시상에 젖어 왕을 위해 이 가사를 지으니 내 혀가 훌륭한 작가의 붓과 같구나.

 

(45:1, 현대어) [임금님, 복받으소서; 고라 사람의 시. 백합 가락에 맞추어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부르는 사랑의 노래] 마음에서 아름다운 말이 우러나오니 시를 지어 임금께 읊으리이다. 내 혀는 글을 빨리도 잘 쓰는 문필가의 붓이외다.

 

아마 그 당시에 유명한 가락이였던가 봅니다.

오죽하면 꽃이름 붙여서 만든 노래 또는 음악의 장르 이니까 말입니다.

 

(2:1, 개역)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2:2, 개역)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구나

 

또 성경에서는 사랑받는 여인을 백합화로 표현 되어 있습니다.

술람미 여인이 자신을 그렇게 표현한 거죠.

 

그런데 실상은 그 여인이 사실상 안 아름답습니다.

그것을 모든 동네 여인들이 다 알고 있는데

졸지에 모든 동네 여자들이 너무 너무 부러워서 배 아파 죽을려고 할 정도로 떼창을 부릅니다.

 

아이고 좋겠네 사랑받아서 너는 졸지에 아름다운 여인이 되었구나 라고

 

마치 구스여인에게 모든 여자들이 부러움을 표현하듯이 말입니다.

 

그럼 왜 하필 많고 많은 꽃 중에서 백합입니까?

 

그 지역에서의 백합은 그렇게 흔한 꽃은 아니다고 합니다.

어떤 곳은 흔하다 라고 하고 어떤 주석은 흔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것도 골짜기의 백합화요

들에 핀 백합화 라고 말입니다.

 

즉 백합화를 표현할때는 항상 광야와 같은 심판 죽음 저주 무생명을 나타내는 단절 속에서

피어나는 백합 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대충 아는 그런 백합화 라고 생각하는데

 

어떤 해석은 백합화가 3일이라는 간극 속에서 피는 꽃이라고 해석할 정도로 좀 과잉된 해석까지 하던데

 

공통적으로 광야에서 사막에서 피는 꽃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생명이 없는 곳에서 꽃을 피운다는 것은

철저한 단절 속에서

철저하게 차단된 불가능 속에서

피우는 꽃이다는 긍휼을 베푸심을 말하는 겁니다.

결국 왕이 그 정도로 사랑한다 라는 겁니다.

편파적인 편애이다는 거죠.

 

그러니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습니까?

 

누가 봐도 저 사람은 죽은자야 라고 하는 자에게 나타났다는 겁니다.

저 사람은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는 자야 라는 자에게만 나타났다는 겁니다.

 

희년은 누구에게만 희년입니까? 누구에게만 기쁜 소식입니까?

이방인 중에 이방인 아닙니까?

이스라엘 과부도 아닌 이방인 과부 중에 사렙다 과부 딱 한 사람에게만

이스라엘 문둥병자도 아닌 이방인 문둥병자 중에 딱 한 사람 문둥병자 수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 라는 겁니다.

 

이게 무슨 이교도적입니까?

오히려 복음적이잖아요

 

결국 복음이란 반드시 저쪽에는 화내는 안색이 변하게 하는 복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두 쪽을 만드는게 중요한게 아니라(어떤 놈은 이것을 억지로 만들려고 하는 놈이 있어요)

 

이 두 사이의 간극이 벌어짐으로써 나타나는

 

거룩 곧 숭고한 거룩

불편한 거룩

 

이것이 여호와의 오른팔이요

주의 얼굴의 나타나심이다는 겁니다.

 

곧 구원의 나타나심

 

오늘 시편 45편에서는 왕의 등장이다는 겁니다.

 

이 왕이 자기 신부를 자기 사랑하는 자를 건지시러 왔다는 겁니다.

 

그것은 미완료로써 건질려다가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건짐이 아니라

 

이미 결혼식을 해 버리고서는

뿌뿌부 나팔을 먼저 불어서 승리를 이미 완성으로써 외치시고서는

결혼식을 먼저 벌리고서

 

실행하시는 구원이다는 겁니다.

 

속도 위반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사랑의 확정 아니겠습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든 허다한 허물과 죄를 다 덮어주시는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런 결혼선포 이다는 겁니다.

 

이 결혼에 참예하지 않는 자는 공포가 되는 날이 되는 겁니다.

 

흔히 기독교의 사랑을 아가페 라고 하는데 틀린 말입니다.

사랑은 어디까지나 에로스입니다.

 

신의 사랑은 에로스 이거든요.

 

일방적인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여기에 반발하는 자들의 특징은 조건의 사랑입니다.

성화가 되어야 한다는 둥

제사와 번제 즉 요즘으로 치면 주일성수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둥

무슨 놈의 조건이 그리 많은지

 

제 블로그에 9월이 되면 갑자기 늘어나는 검색어가 있는데

십일조를 내야 하느냐 라는 물음들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들입니다.

 

제발 십일조 내지 마세요 라고 알려줘도

혹시 안 내다가 심판대에서 십일조 안내서 지옥 갈까봐 겁이 나니

이 말을 무시하는 겁니다.

 

주님이 싫어하는 짖을 기어코 하겠다는 겁니다.

번제와 속죄제를 원치 않고 상한 심령을 원한다고 해도

 

때려죽어도 거부합니다.

예수님의 사람이 아니라

교회 사람이기 때문에

평생을 죽기를 무서워 교회의 종이 되어버린 겁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허물 투성이인 우리를 일방적으로 결혼해 버리시는 겁니다.

허물을 앞으로 고치라는 조건도 걸지 않고서 말입니다.

 

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결혼 아닙니까?

십자가의 지혜는 이렇게 허물덩어리와 결혼합니다.

사랑합니다.

구원해 버립니다.

 

이 말도 안되는 불가능성을 우리는 즐기고 누리는 겁니다.

감히 감히 십자가의 피 용서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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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허물) 덩어리와의 결혼 (예수님의 족보)


(마 1:1, 개역)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마 1:3, 개역)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마 1:5, 개역)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마 1:6, 개역)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 1:16, 개역)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매일 매일 예수님이 달라진다. 변모하신다.
변이가 벌어지는데 점점점 아름다움 속에서 거룩이라는 숭고 속으로 변한다.

때로는

다말 에게서
라합 에게서
룻 에게서
우리야의 아내 에게서
마리아 에게서

예수님이 나타난다.

뷰티 인사이드 (아름다움의 변이, 얼룩의 변이=아름다움 속의 또 다른 아름다움인 숭고)

현실(종말)은 모순 덩어리다.
그러나 그 현실(아름다움) 속의 진짜 현실(숭고)인 
예수 안의 세계(종말의 종말)은 허물 그 자체이다.

결혼은 그 사람의 장점만 보는게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그 사람의 단점만 보겠다는 것이다.

장점이 그 사람의 차이(거룩)가 아니라
그 사람의 단점인 얼룩이 그 사람 그 자체인 차이성이다.

이 차이의 반복만을 누리는 것이 한 몸이다.

탕자는 자신의 씻지 않아 더럽고 썩고 냄새나는 자신의 역겨운 얼굴에
뭐가 그리 좋다고 뽀뽀하고 얼싸 안고 금가락지 끼우고 멀리서 맨발로 기다린 사랑에 무릎 꿇는다.

그러나 맏아들은 내세울게 워낙 없다 보니
한 번도 아버지 말씀을 어기지 않았다는 의인됨을 내세웠다.

사랑이 아닌
행함을 말이다.
행함은 허물을 싫어하고 거부한다. 탕자를 이쁘다고 뽀뽀하는 아버지를 못마땅해 한다.
불편한 숭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

(벧전 4:8, 개역)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잠 10:12, 개역)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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