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러운 호산나 찬양 (시편 47)

시끄러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라고 외치는 딱 듣기 싫은 노래

 


(
21:9, 개역)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21:15,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11:9, 개역)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1:10, 개역)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2:13, 개역)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47:1, 개역) [고라 자손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너희 만민들아 손바닥을 치고 즐거운 소리로 하나님께 외칠지어다

(47:2, 개역)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

(47:3, 개역) 여호와께서 만민을 우리에게, 열방을 우리 발아래 복종케 하시며

(47:4, 개역)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곧 사랑하신 야곱의 영화로다

(47:5, 개역) 하나님이 즐거이 부르는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

(47:6, 개역) 찬양하라 하나님을 찬양하라 찬양하라 우리 왕을 찬양하라

(47:7, 개역)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양할지어다

(47:8, 개역)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47:9, 개역) 열방의 방백들이 모임이여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세상의 모든 방패는 여호와의 것임이여 저는 지존하시도다

 

 

예수님은 시편 그대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시편을 모르는자가 아닌

시편을 알고 있는
시편을 달달달 외우고 있는 그들이

시편 대로 행하시는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바로 우리들 처럼 말입니다.
 

신약에서는 오늘 시편 47편에 나타난 여호와의 대관식에서

예수님이 왕이 되심을 거부한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즉 이 시편 47편을 이해 할려면

이 내용을 거부하는 시편47편을 노래 부르는 자들과의 충돌 사건을 살펴 봐야 한다는 겁니다.

즉 나와 충돌 한다는 겁니다.
내가 말씀을 읽는 주체로써 말씀을 읽을 때는 전혀 충돌사건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가능성의 세계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주체가 되어 나를 읽을때는 반드시 충돌이 벌어지는 겁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죠.
하나 마나 한 소리입니다.

불가능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하나 마나 한 소리에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가쁜 소식 답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일까요?

네 맞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러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죽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예루살렘이 아닌 이스라엘 어느 곳이든 상관이 없지 않나요?

 

그런데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 성취 곧 기록된 대로 행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죽으셔야만 하는 겁니다.

 

예루살렘은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보좌라고 지난 시간에 말했습니다.

시온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예루살렘은 비어있는 보좌처럼

원수들에게 포위 당한 원수의 성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포로 된 듯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둑처럼 그 예루살렘의 의미를 빼앗고자

원수의 성문을 열 듯이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예루살렘을 침노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집중 공격합니다.

 

가시적으로는 눈에보이는 장소 곧 예루살렘으로 표현이 되었지만

이것이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고 선포한 이후에는

장소는 공중분해가 되고

그 장소는 예루살렘이라는 주의 성소 주의 보좌는

곧 성도가 되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고 3일 만에 다시 세우시는 성전인

자신의 몸을 장소인 성전개념으로 말하듯이 말입니다.

 

너희는 성령의 전이라

 

결국 눈에 보이는 장소 개념인 예루살렘을 깨뜨려야

이미 완성된 새예루살렘의 의미를 볼 것이 아니냐 말이죠.

 

이 예루살렘 쟁탈전으로 인해 예루살렘을 깨뜨림으로써

성도 자체가 하나님의 보좌로

의자 걸상 으로 작용하는

주의 나라의 완성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 곧 복음입니다, 희년 
즉 인간에게는 전혀 안 기쁜 소리, 듣기 싫은 소리일 뿐이고
오로지 예수님 혼자만 기쁜 소식이다는 겁니다.
 

시편 46편에서는

 

(46:10, 개역)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46:11, 개역)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리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요

하나님 되심을 알게 된다고 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스라엘의 나라의 완성으로 표현 되었습니다.

 

(12:13, 개역)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문제는 기존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어놓고서

메시아만 그 성전에 오면 게임 오바가 되는 종말성을 추구했는데

 

정작 이스라엘의 왕이 안 오는 겁니다.
왕이 그 성전에 앉아야
그 보좌를 준비하고 준비했던 자들이 보람이 있을것 아닙니까?
그래야 기쁜 소식이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와중에 거지꼴한 예수라는 청년이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니까

어린아이들은 호산나 라고 찬양을 하는데

정작 메시아를 기다리는 예루살렘 거주자들은

이 호산나 찬양을 외치는 자들의 노래를 소음으로 취급하면서

이 소동을 일으키는 자들에게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펼치고 있는 겁니다.

 

맞습니다.

진짜 복음이라면

진짜 메시아 라면

반드시 이들 다윗의 나라를 거부하는 자들을 돌출시키면서

예수님의 나라의 왕의 대관식을 펼친다는 겁니다.

 

혼인잔치란 반드시 혼인잔치라는 기쁨을 배가 시키기 위해서

모든 거부자들을 색출해 내는 피비린내 나는 진노와 심판이 펼쳐져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지난 시간에 말한 땅의 요동, 땅의 흔들림, 진동 이라고 했습니다.

즉 진동은 곧 여호와의 보좌에 앉으신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 앞에서 잠잠해야 할 판국인 겁니다.
풍랑이 일어나도 말입니다.
?
불가능한데
잠잠하기는커녕 더욱더 살려달라고 해야할 판국인데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 보기는커녕 당장 살려 달라고 해야 할 판국인데

? 불가능한 소리를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시느냐 하면

결국은 잠잠하고 결국은 가만히 서게 되니까

그 완료된 미래가 덮쳐져서 현재를 이루니까

어차피 그렇게 되니까 말입니다.

불가능한데 이 불가능이 절대로 가능성으로 바뀐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게 하고(여전히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풍랑이 일어도 잠잠히 있게 된다는 겁니다.

알고보니 예수님이 다 이루셔서 말입니다.

결국 누구를 보라

누구 라는 인물을 말하기 위해서 동원이 되는

모든 소품이요 모든 사건들이였던 겁니다.

여기에 우리가 동원이 되는 겁니다. 역시나 소품으로써 말입니다.

 

혼인잔치라는 기쁨의 날

여호와의 날은

이 예루살렘을 탈환하고자

예루살렘을 요동케, 진동케해서 흔들어 재끼는 소동이 벌어지는 겁니다.

심히 흔들리고 진동하는 격동이 벌어지는 겁니다.

 

(21:1, 개역)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1:2, 개역)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21:3, 개역)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21:4, 개역)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21:5, 개역)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21:6, 개역)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21:7, 개역)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21:8, 개역)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21:9, 개역)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21:10, 개역)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21:11, 개역)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21:12, 개역)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21:13,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21:14, 개역)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21:15,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21:16, 개역)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21:17, 개역)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감히 하나님의 집을 (내 기도하는 집)
마치 사람의 손으로 지은냥 예루살렘 성전에 호작질을 한 유대인을 향하여

예수님은 더 더 더 심하게 예루살렘 성전을 호작질을 합니다.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지 않도록 말입니다.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의 환전상을 확 엎어버리고

채찍질로 짐승들을 쫏아내고 말이죠

(2:15, 개역)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9:36, 개역)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19:37, 개역)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19:38, 개역)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19:39, 개역)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19:40,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19:41, 개역)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19:42, 개역)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19:43, 개역)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19:44, 개역)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19:45, 개역)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19:46,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19:47, 개역)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19:48, 개역)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침을 찾지 못하였더라

 

 

결국 인간들이 메시아를 맞이하고자(대관식) 준비하는 그 예루살렘을 보면

정작 가짜 투성이 일뿐이고

 

도리어 강도의 소굴인 본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직접 하신다는 겁니다,
직접 하게 되면 그 동안 준비한자들의 수고가 헛수고가 되지요?
내 수고는 실패다. 망했다. 의미없다 이것이 얼마나 기쁘냐 말이죠.
이 되도 않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내 수고를 철회하고 주님이 직접 하신다니?
이게 과연 기쁠까요?
하나도 안 기쁘기에 기쁜소식이다는 겁니다.
주님 혼자만 기뻐 ~~~

직접 하신다면 기존의 형식의 질서와 계급과 준비자들은 도리어 자신들의 준비가 다 날라가 버려야 할 판국에 놓여지게 되니

이 배설물을 사수할 것인가? 아니면 굴복할 것인가? 라는 문제에 부딧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거짓선지자의 특징이라고 지난 시간에 언급 했습니다.

이미 완료된 예루살렘을 봐 버린 참선지자는

눈에 보이는 국가 이스라엘을 해체 시킬려고 하고

(그래서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리고, 삐딱하게 말해버리는 겁니다.)

반대로 이미 완료된 예루살렘을 본 적이 없는 자인 거짓선지자는

지금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이 전부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거룩으로 채워 넣을려고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막사는 자와 막살수 없는 자와의 차이입니다.

마치 아내와 가정부의 차이처럼 말이죠.

 

제발 막살아라 라는 의미는

상대적으로 절대로 막살면 안된다 라는 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발현되는 선포입니다.

 

그냥 음파일 뿐인데

소리일 뿐입니다.
언어요 문자일 뿐인데

말 뿐인데

 

이상하게 그 말이라는 언어 때문에

절대로 막살면 안된다 라고 말하는 자들이 새롭게 발생한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거짓선지자 또는 악령이 들린자
강퍅게 만드신 자를 통해서만 주님은 영광 받으신다는 겁니다.


순식간에 발생적이다는 사실

아주 아주 우발적으로 말입니다.

 

저 말을 안 들었다면 절대로 발생할수도 생겨날수도 없습니다.

들었기 때문에 반드시 나오는 돌발적인 우연의 집단이 생긴다는 겁니다.

 

마치 호산나 라고 외치니까

그 호산나 소리에 분노하는 자들이 새롭게 발생하듯이 말입니다.


왜? 아무리 들어도 소음이거든요
시끄럽기 때문에 분노할 수 밖에 없고
짜증낼수 밖에 없는 겁니다.
반드시 짜쯩나게 하는 호산나 이니까 말입니다.
 

막살기란 불가능하거든요

그런데 그 불가능함에

반응(거북스러운)을 하여서 더 더 더 불가능한

절대로 막살면 안된다 라는 자들이 새롭게 발생한다는 겁니다.

 

호산나 라는 외침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보좌 라는 자리 장소 의자가 마련이 되어도


이 왕이라는 주체를 인간의 입장에서는 알길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보좌를 인간의 손으로 만들었다는 자체도 의미 없고
오히려 철회하고 해체해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왜? 누구인지를 도통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누가 왕인지 말입니다.

 

이사야 53장 고난 받는 왕이 왕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예 초반부터 단절 시켜 버립니다.


뉘게 나타났느뇨? 여호와의 팔이

누가 믿겠느뇨?

아무도 못 알아 봤다는 겁니다.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즉 빈공백이다는 겁니다.

 

이 빈공백을 마귀들은 견딜수가 없어서 반드시 채워넣습니다.

꽉꽉 채워 넣어서 왕이 오시길 기다린다는 겁니다.

시편 문자대로 지켜서 말이죠.

웃기죠

지들 마음대로 해 놓고서는 말입니다.


왕은 구름타고 오실꺼야?
이런 아름다운 풍채이실꺼야?
모든 사람들이 좋아라 할꺼야?

그런데 왠걸?
구름은 커녕 짐승 밥통에서 태어나고
아름다운 모양이 일체 없고 다들 고개를 돌릴정도로 외면하는 새카맣게 타 버린 얼굴이고
모든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모습이요 삶이요 질고를 지고 째찍질만 맨날 당하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막살아라 라는 불가능이라는 빈공백을

저들은 절대로 막살지 않기 라는 가능으로써 촘촘하게 체워넣었는데(믿을수 있는 좋은 것들만 꽉꽉 채웠는데)

정작 그 기대치와는 정반대로
도저히 믿음이 절대로 절대로 가질 않는
도저히 신뢰할 만한 구석이 없는
안믿는게 천부당 만부당한 그 모습으로
그 어떤 믿음도 다 피해가는 모습이였다는 겁니다.

 

절대로 비어 있는 보좌가 되면 안된다고 꽉꽉 채웠는데
고난의 종은 텅텅 비어있으니
그래도 믿겠다고 다가가면 밑빠진 장독에 물붓기처럼
모든 것을 허사로 실패로 만들어 버린다는 겁니다.

즉 이 말은 절대로 땅은 진동하면 안되는데 졸지에 진동과 소음과 요동 흔들림 뿐이다는 겁니다.
나의 가짜 믿음은 졸지에 예수님을 괜히 만나는 바람에 흔들릴수 밖에 없는 겁니다.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러나 인간은 때려죽어도 땅은 요동 진동 격동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인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줄 표적인 요나의 표적 뿐입니다.
오히려 흔들어 버리겠다는 겁니다.

탈탈탈 다 털리도록 믿음이 거짓이였음을 들통나게 하는 십자가만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호산나 라고 소동을 일으키니까

분노하는 겁니다.

 

불가능성이라는 사건

막살기 라는 사건이

소동

진동

흔들림 이라는 사건이 벌어지니까

 

이 사건을 막을려고 분노하는 겁니다.

 

이 모습이 반드시 왕의 입성에

왕이 예루살렘이라는 보좌에 앉을때에

그 대관식

그 혼인잔치에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 나라의 완성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기쁜소식이다는 겁니다.
내 믿음이 가짜로 들통나게 하는 호산나가 말입니다.
 

인간나라는 정반대죠 쿠테타 일어날까봐

왕이나 대통령이 등장할 때

모든 소동을 막아버리지 않습니까?
경호원들이 쫘악 깔리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나라는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쿠테타 라는 소동 보다 더 큰 소동을 일으키는 그 당사자가 왕의 등장이다는 겁니다.

그 앞에서 온 천하는 잠잠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잠잠케 하기 위해서는

평화가 되기 위해서는

잠재되어 있는 모든 전쟁을 그 순간에 모조리 다 터트리는 겁니다.


소동을 일으키는 당사자가 바로 초라한 나귀를 탄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그래야 전쟁의 종식이 선언이 됨으로써

 

하늘에서는 평화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자들에게 평화라고 합니다.

 

(19:38, 개역)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2:14, 개역)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누가 복음에서는 호산나 라는 표현이 이렇게 표현된 겁니다.

즉 예수님 나라의 완성으로써 말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11:10, 개역)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다윗의 나라의 완성이라고 표현이 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12:13, 개역)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이스라엘의 왕 으로 표현 된 겁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호산나 즉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나를 불쌍히 여겨줄 그 주체를 말하는 겁니다.


예루살렘에 살아도 거주해도 정작 왕의 보좌로 만반의 준비를 해도
주체인 왕이 오지 않으면 
누구인지를 몰라보면
길에서 지나가다가 입맞추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겁니다.
결국 주체가 직접 해결해야할 숙제이다는 겁니다.
나는 오히려 그 앞에서 무능할 뿐이니
제발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겁니다.
이런 소경 됨에서(정작 눈이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는 소경된 죄인)
무슨 수로 알아 먹겠냐 제발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두 소경이 외치는 겁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호산나 라고 말입니다.

결국 나라 국가 그 자체가 되신 예수님의 등장 자체가

이 예루살렘을 소동케

요동케

흔들리게 하는 겁니다.


이 흔들림이 드디어 주님이 보좌에 앉으신 증거라는 겁니다. 얼마나 기쁘냐 말이죠.
 

얼마나 흔들렸으면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나는 겁니다.

복음이 듣기 싫어서 짜증내고 분노를 표출하는 세력들을 발생 시키는 식으로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대관식이다는 겁니다.

대관식이란 이 분이 왕이 되었다 라는 선포식으로써

왕관을 씌우는 의식입니다.

최고의 날이죠

여호와의 날이죠.

 

구원자가 누구다?
그 구원자가 바로 왕이다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대관식은 형식적인 행사 또는 제사와 같은 형식으로 벌어져야 할까요?

아니면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로 벌어져야 할까요?

즉 사건으로 벌어져야 할까요?

형식과 사건은 완전한 정반대입니다.
형식은 사건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사건은 형식 속에서 도출되면서 형식을 보충물로 삼아 우발적으로 발생합니다.

 

괜히 쓸데 없는 말을 했는데

대관식이 중요한게 아니라

십자가 사건 자체가 결국은 대관식이다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왕에게 씌우는 왕관은(왕 즉위식)

어떤 왕관 입니까?

 

가시 면류관 이지요 뭐


과연 왕(형식)의 모습입니까? 아니면 조롱받는 고난(십자가사건)의 종입니까?

누가 믿겠습니까? 누구에게 여호와의 팔이 나타났습니까?

결국 믿음은 모든 인간의 믿음을 비켜가는 식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불가능성을 이루는 겁니다.

다들 비아냥 거리면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놀려먹는 팻말을 달아놓고서는

가시로 만든 왕관을 씌우는 겁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이 예루살렘이라는 보좌를 보좌 삼아서 벌어진 사건이 십자가 사건 아닙니까

 

왜 이런 창세전에 예정된 대관식

곧 예수님이 왕 되심의 왕관을 머리에 씌우는 대관식을 거부하고

 

뭐 만반의 준비로써 예루살렘의 보좌됨을 인간의 온갖 행함과 선행으로 채울려고 한

그 실상이

사실은 가시관을 씌우는 모습이였다는 겁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동시에 나오는 우리의 진짜 본 모습 말입니다.

 

정작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인간의 성화론과

성령의 성화론은 십자가의 사건으로써

두 속성이 충돌하면서 나타난다는 겁니다.

 

솔로몬의 지혜가 반드시 두 패로 나누어지는 상황에서

만방에 만개가 되듯이

대관식은 십자가의 사건으로써 두 패로 나누시는 것을 다 이루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왕 되심을 성취하는 방식이 완전 정반대이다는 겁니다.

 

마치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의 차이처럼

아벨의 제사는 죽음으로써 완성 되더라 말이죠.

 

이것이 가인의 제사 보다 더 나은 제사인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믿음(예수님)이 드리는 인애와 자비인 겁니다.

 

어디까지나 행함으로는 도저히 드릴수가 없는(배설물)
오로지 믿음으로 드리는 왕의 대관식 곧 십자가 사건이다는 거죠.

 

그러니 호산나로 온 예루살렘을 다 수시고 다니는 겁니다.

십자가로 다 수시고 다니는 사도행전처럼

 

수시고 다니면 믿는자가 생길까요?

안 생깁니다.

그 속성만 들추어내는 겁니다.

 

이미 완료되었는데 뭐하러 새롭게 믿음을 만들어내냐 말이죠.

믿음이 부족하거나 미흡하거나 모호할 정도로 의문이라는 것이 전혀 없는데 말입니다.

 

암살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쌍둥이 메시아 라는 의미가 딱 떠올랐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매국노의 딸이 진짜 메시아의 기능을 보여주고

그냥 개죽음 당해 버리잖아요

허무하게 말이죠. 아벨 (허무)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메시아의 기능은 독립군 저격수 안옥윤이 보여주더라 말이죠.

 

가룟유다는 바로 이런 안옥윤같은 메시아를 원했던 겁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도리어 진짜 메시아로부터 죄인 중의 괴수로 새롭게 만들어 집니다.

세 번 씩이나 부인하는 매국노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야 배설물로 마귀의 시험에서 이길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거든요.

 

호산나의 뜻이 뭡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는 의미 아닙니까?

여기에 주여 주여 주의 이름으로 마귀를 쫏아냈습니다 라는 의미가 어디에 있나요?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구제 봉사 충성했다 라는 의미가

호산나 속에는 없습니다.

 

그저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의미 밖에 없습니다.

 

드디어 예루살렘에 들어오셨다는 것은

예루살렘을 보좌로 삼아서

예루살렘을 땅을 흔들 듯이 요동케 소동케 진동케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탈탈탈 털어서 오로지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는 자만 찾는 겁니다.

 

의인이 아닌 죄인을 찾아서 죄인을 자신의 보좌로 삼는 겁니다.

 

그러니 의인은 예루살렘이 예수님의 보좌가 되지 못하도록

성문 밖에서 죽이는 겁니다. 해골 언덕 말입니다.

 

저들 마귀 세력들은 얼마나 철저한 계산 속에서 성문 밖에서 살인을 벌리는 일들입니까?
가인이 죽고 없어진게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죽음은 즉 아벨의 죽음은

가인이 죽든 안죽든 가인의 사고방식을 수평적으로 더 더 더 퍼트리는 식입니다.

사울왕이 죽으면 끝나는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로 사울왕의 사고방식을 더 더 더 퍼트리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의 죽음(핍박, 고난, 환란, 끊어짐)은 더더욱 구체화 됩니다.

 

이것이 보좌에 앉으신 증거입니다.
두 패로 나누시는 예수님이 없다면 지옥이 없듯이 말이죠.
땅은 쪼깨지듯이 크게 흔들려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가만히 서서

잠잠하라가

이 일을 벌리셨다는 것이 다 이루었다 로 개입하시니까 말이죠.

 

왕의 대관식은 바로 이런 두 양상이 동시 다발적으로 벌어지는 사건 그 자체입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의 완성은 말입니다.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의 평화가 임하듯이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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