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주인을 겸하여 섬김][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라] (시편 49)


(
6:24, 개역)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16:13, 개역)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49:1, 개역) [고라 자손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만민들아 이를 들어라 세상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

(49:2, 개역) 귀천 빈부를 물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49:3, 개역)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묵상하리로다

(49:4, 개역)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49:5, 개역) 죄악이 나를 따라 에우는 환난의 날에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49:6, 개역)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49:7, 개역)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49:8, 개역)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49:9, 개역)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

(49:10, 개역) 저가 보리로다 지혜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

(49:11, 개역) 저희의 속 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49:12, 개역)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49:13, 개역)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셀라)

(49:14, 개역) 양 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49:15, 개역)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셀라)

(49:16, 개역)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지어다

(49:17, 개역)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49:18, 개역)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49:19, 개역)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49:20, 개역)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왠만한 종교에서는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마치 이것은 상식으로써 보편화 된 의미이다는 거죠.

그렇다면 그런 상식과 같은 모든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바를

왜구지 성경말씀 까지 나서서 적는 것일까요?


지난 시간에 언급했듯이 누구든지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도통 모르도록 패쓰워드 걸어버리는 것이 비유
곧 비밀이라고 말입니다.
성경 전체를 그야말로 아무도 해석 못하도록 단절시키는 비밀 그 자체 입니다.
 

즉 성경말씀 그것도 신약에서 돈 문제를 예수님이 직접 언급하시는 이유는

사실상 이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 마나 한 소리로써 언급했다는 겁니다.


즉 돈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것이 인간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하라 하지말라에 말려들게 됩니다.
물론 말려들어도 어쩔수 없습니다. 반드시 이것을 거쳐서 불가능한 단절을 보도록 하시니까 말입니다.
어쨌든 아무도 못 벗어나도록 가두었기에
인간은 외식하는 위선적인 인간이 되는 겁니다.


결국 모든 종교 모든 상식에서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는 거죠.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위선에 해당되는 거짓이다는 겁니다.


왜 맞는 말인데도 거짓이 되는 것일까요?
 

아니 성경에도 그렇게 적혀 있는데 그럼 성경도 거짓이네?

성경은 다른 취지로 적혀 있습니다.

즉 돈 사랑의 평범성을 훨씬 뛰어 넘어서

주인이라고 합니다.

 

주인(주체, 괴물)

 

분명 돈을 사랑하지 말라 라고 하면

돈을 사랑하지 않는 나, 자기자신, 자아 곧 나를 주인공으로써 실천하면 된다는 겁니다.
뭐가 어려운 일입니까? 아무것도 비밀이 될 이유가 전혀 없는 이야기 입니다.

이것이 모든 종교 모든 상식의 주장입니다.

 

내가 주인공

그리고 돈 사랑하지 않는 나를 그런 자아를 만드는 것 

 

그런데 성경말씀은 그것을 깨뜨립니다.

너가 돈을 사랑하지 않음을 지킴으로써 주인공이 되는 문제가 아니라

 

돈 자체가

재물 자체가

너를 주물떡 주물떡 가지고 노는 주인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 맞서는 또 다른 주인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그냥 우리가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종교의 신으로써의 예수님이 아니라
(왜냐하면 인간의 신앙 대상물이 아니라 도리어 거꾸로 예수님의 대상물로써 성도이기에)
직접 그 돈이라는 권세의 주인으로부터 구원사건을 벌리는
구원자 예수 라는 주의 이름이다는 겁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 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써
예수님의 숙제 입니다.
어떻게 돈의 세계에 갇혀버린
그 돈을 주인으로 섬겨야만 살수 있는 그 세계에서 빼내시겠다는
예수님의 선언이요 선포를
우리는 어떻게 하시는가를 목격하는 목격자에 놓여진 것이지
우리가 직접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달성하는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돈에 포로되었고 돈에 매였고 돈으로부터 갇혀 버린 인생입니다.

사람이 떡으로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라는 선언을 하신 예수님이

과연 어떻게 그 말씀을 이루시는가를 누리는 것이
예수님의 믿음의 대상물인 성도로써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졸지에 나 라는 주인공을 휙 빠져 누락되어 버리고

 

어느새 두 주인이 나를 차지하고자 싸우는

두 세력 두 주인 두 세계의 모습으로써

그 고래등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모습으로 내가 그 두 주인 싸움의 경계선에 놓여졌다고

성경은 언급하는 겁니다.


중간에 낑겨버린 존재
절대로 한 쪽으로 아예 놓여진 자가 아니라
그렇게 되면 내가 졸지에 주인공이자 절대가 되고 필연이 되어버리는 것이기에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시는 보충물로써
철저하게 우연적인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럼 중간에 낑기는 조건을 갖추면 구원이냐?
그게 아니죠!!
이미 주의 구원하심의 사건이 벌어졌고, 벌어졌다는 것은, 개시했다는 것은 이미 다 이루었기에
승리했기에 발생되는 사건이다는 겁니다.
성도는 그 구원사건의 증상물로써 배치됨으로써 죽어도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중간에 낑기는 것은 무엇을 보여주는 기능인고 하니
소유욕을 보여주는 겁니다. 중간에 낑긴자가 아니라
두 주인 말입니다. 이를 좋아하면 저를 싫어하도록 되어 있고
이를 싫어하면 저를 좋아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표현도 참 구체적입니다. 또렷합니다.
이를 귀하게 여기면 저를 소홀히 여기고
이를 소홀히 여기면 저를 귀하게 여기고
이를 사랑하면 저를 미워하도록 되어 있고
이를 미워하면 저를 사랑하도록 되어 있다는

이 요상한 시이소 같은 장치물이 중간에 낀긴 나
곧 성도가 그러하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기능입니다.
양쪽 세계의 소유성을 보여줍니다.

격렬하게 서로 자기 것이다고 자기 소유물이다고 끌어 당기는 강력한 힘
곧 사망의 힘이냐 아니면 죽기까기 다 내어주신 사랑의 힘이냐? 라는

절대로 양립불가의 양쪽 소유의 격렬한 피 튀기는 전쟁 곧 소유욕망을 보여주는 기능으로써
철저하게 사용, 이용해 먹겠다는 겁니다.

다들 피식 웃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사라처럼 다 웃습니다.
에이 그건 이미 다 끝난 게임 아니냐 라는 거죠.
이미 다 돈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귀히 여기는 세상에서
무슨 되도 않는 게임을 예수님은 피곤하게 펼치시느냐 라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이 하는 겁니다.
믿음은 이 하나 마나 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숨 걸었습니다.
아무도 예상 못한 일을 벌리는 겁니다.
이미 다 끝난 게임을
보나 마나 한 게임을
이미 끝난 것을 새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 모든 상식이라는 동일성 필연성 선민성 등등의 외설에 더 나은 외설로써의 성경말씀이다는 거죠.


중간에 낑긴 대표자로써 

마치 베드로에게 있어서 두 주인이 등장합니다.

하라 하지 말라를 지킬려는 베드로에게
몸이 무너진 피곤함에 죽어버린 틈을 타서 율법 조차도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모든 의욕을 주님이 무너뜨립니다. 넌 나를 세번 부인할 것이다.
의욕상실 당한자는 죽은자나 마찬가지이니 율법 지킨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께서 주인께서 거부하는데
나의 뜨거운 열정의 열심을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습니다. 끝까지 따라가겠습니다.
죽는곳까지도 가겠습니다. 예수님을 때려죽어도 사랑하겠습니다.
보기 좋게 미끄러져 버립니다. 어린아이까지 조롱할 정도로
넘어설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어긴 베드로를 잡아서 송사하는 마귀라는 주인과

 

바로 그런 주인을 거쳐서 율법대로 따지지 않고

율법대로 마귀에게 잡혀오기를 기다리시고서는
정작 새옷을 입히시고자 그래서 더 이상 율법대로 묻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시겠다고 하는 용서의 주인으로써 예수님이라는 주인

 

이 두 주인을 반드시 언급한다는 겁니다.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과연 돈이라는 권세, 돈 없으면 죽는다 라는 세상의 권세와
사랑의 권세

너는 어떤 주인에게긍휼을 받을래? 라는 겁니다.

 

그러나 모든 상식 모든 종교는 이런 의미가 없거든요.
마귀를 끌어들이는 법이 없습니다. 결국 사랑이 아니다는 겁니다.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면 반드시 죽음을 끌어당기면서
그 죽음을 거치면서 증거 되는 겁니다.
마귀를 끌어당길줄 모르는 사랑은 가짜이다는 거죠.

 

그래서 안식일날 일한다고 당신의 제자들은 왜 안식을 어기느냐고 따지는

세상의 주인을 반드시 끌여들여서

 

안식일날 물에 빠진 자기 식구같은 가축을 건지지 않겠느냐 라고 하시는

안식의 주인


과의 충돌을 반드시 언급하신다는 겁니다.
 

이 두 주인의 대립을 반드시 보여주는 것이 성경말씀이다는 겁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상식과 세상의 종교에는 없는 두 주인의 대립이다는 거죠.

왜냐하면 내가 믿고 내가 실천해야할 문제 곧 숙제가 모조리 다 사라지니까 말입니다.

나의 개입이 일체 허용이 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내 자신이 어떤 한 주인을 취사선택하는 입장에 놓여진 것도 아니요.

이 두 주인의 싸움에서 벗어날수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인간은 그냥 갇혀 있다는 것 뿐입니다. 이런 허무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 어디있냐 말이죠.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이다는 것을 알아도 소용없는

어쩔수 없이 갇혀 있는 상황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기 떄문에 불의한 재물에 충성한 불의한 청지기가 옳다는 겁니다.

곧 누구 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아무도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는 자가 없기 떄문입니다.

 

종말을 대비하는 유대인들에게

즉 가장 믿음이 좋다는 그런 유대인들에게
세상사람과 구별되어 세상의 마지막인 종말의 삶을 미리 앞당겨사는 사는데 달인들인 이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를 갈구 갈망하면서 참고 참고 참으면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그 유대인의 종말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그 믿음들 곧 인간의 믿음들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리는

곧 그런 외설적인 유대인들에게마져 불의한 자로, 부정한 자로, 이단으로 낙인 찍인

 

가장 비신앙적인 인물인 그 예수님이 더 더 더 외설적인 종말의 종말을 대비하는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는 불의한 청지기 이신 예수님이 더 지혜롭고 옳다 라는 겁니다.

누구 이야기 입니까? 그것도 구약에서? 네 맞습니다. 다말이야기입니다.

 

마치 좋은 편을 택한 마리아 처럼 말입니다.(상대적인 마르다와 대조적인 싸가지 없는 모습의 마리아처럼)

며느리 다말 처럼 말입니다.(시아버지 유다와 대조로써 저 개같은 이방인여자 때문에 약속의 집안이 쫄딱망하게 되었는데 역시나 남의 남자의 아이를 임신까지한 불태워 죽여 마땅한 며느리 다말처럼)

 

(16:1, 개역)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16:2, 개역)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16:3, 개역)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16:4, 개역)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16:5, 개역)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16:6, 개역)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16:7, 개역)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16:8, 개역)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16: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16:10, 개역)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6:11, 개역)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6:12, 개역)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6:13, 개역)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6:14, 개역)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분명 돈을 사랑하는 자를 정죄하시지만

정작 돈이라는 강력한 힘 속에 탁란 시켜서

불의한 재물에 충성케 하시는 겁니다.


누가복음 16장은 그야말로 앞 뒤가 안 맞습니다.
논리로써 못 푼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이거든요.

돈을 사랑하는 자를 정죄를 하고서는
예수님 자신은 더 더 더 부정한 불의한 청기를 칭찬하면서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라 라고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하신다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바래새인 들으라꼬
아주 그냥 약을 바짝 올리는 거죠.
바리새인의 외설을 지적했다면 그 반대로 가는게 아니라
더 외설적으로 가버리니까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시편 49편은 돈이 곧 가장 강력한 힘이요 권력이요 파워이다는 점에서

우상적이다 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역설적이게도 이 돈의 세력이라는 강함과 반드시 맞물려서

더 더 더 강한

돈 보다 더 센

죽음 보다 더 강한 사랑을 증거하는 아가서처럼

돈 보다 더 센 예수님의 희생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냥 예수님의 희생의 사랑을 말하는게 아니라

빛을 말하기 위해서는 어두움을 동원하듯이

인간이 도저히 이길수 없는 마귀를 보충물로 동원하듯이

돈이라는 재물의 파워를 동원해서 증거하시는 겁니다.

 

즉 돈 속에서 탁란하여서

돈 보다 강한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돈 입장에서는 더 외설적인 예수님을 더 나쁜놈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그야말로 분노 폭발할수 밖에 없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구원 사건이였던 애굽왕을 강퍅케 하심이다는 거죠.
애굽왕이 없으면 구원사건이라는 하나님의 영광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의도적으로 독자적인 영광을 말하지 않고 반드시 애굽왕과의 대조로써 증거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49편에서는 그 애굽왕과 같은 그 당시 가장 큰 권력 힘 파워 세력인 애굽왕처럼
돈을 끌여들여서 지혜와의 대조를 펼치시는 겁니다.
물론 여기서 지혜란 인물로써 비밀적인 의미입니다.
누구든지 다 아는 인물이 아니다는 거죠.
마치 오히려 애굽은 다 알지만

돈은 누구든지 다 알지만

돈에게

애굽왕 바로에게
여호와를 말하면

도대체 여호와가 누구냐 라는 말을 반드시 들음으로써

그 비밀되신 인물인 지혜 곧 예수님(여호와의 이름)이 누구신지에 대한 증상들을 발현하신다는 거죠.

애굽 시껍합니다.

그 정도로 모든 권력을 가질수 있도록 애굽을 그렇게 만드신 줄도 모르고
힘있다고 까불었던거죠. 

똑같이 돈의 수준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거의 신입니다.
제가 교회나 어떤 종교의 제사나 예배나 그 모든 것을 봐도
결국 돈에게 절하는 것이다 밖에 안 보이는 겁니다.

돈때문에 결국 설교 하는 것이고

돈때문에 전도 하는 겁니다.

교회도 결국 이 돈이라는 신에 미쳐있습니다.

안 미쳐 있는 교회가 없습니다.

 

주님이 돈 속에 탁란 시켰으니까

돈을 이길 자는 없습니다.

그렇게 탁란 시켜 놓고서

돈 보다 더 센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식으로 복음을 증거하시는 겁니다.

 

여기에 말려드는 자가 바로 바리새인 곧 돈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돈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 도 닦듯이 평생을 말씀실천에 매달려 왔습니다.

 

오히려 돈을 사랑하는 자는 누가 봐도 세리들입니다.
세리 라는 의미가 돈 때문에 하나님도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민족도 모조리 다 팔아먹은 자 이다는 겁니다.
그 돈을 그 세금을 거두어서 매국노처럼 로마 앞장이를 한 겁니다.

누가 봐도 세리가 돈을 사랑했으면 했지
바리새인은 절대 그렇지 않은데
예수님은 세리가 돈을 사랑하는 자 이다 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성경 해석 자체가 해석불가 인 겁니다.
그 어떤 인간의 시선이 개입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런 말씀을 해석할 입장이 못되고
도리어 해석을 당해야 할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마치 오늘 내용처럼 불의한 청지기 또는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라 라는 말씀에
나 라는 존재는 해석당해야할 판국에 놓여진 것처럼 말입니다.

자 이렇게 되면 그 어떤 접촉점이 없게 되는 단절을 누리게 됩니다.
해석도 못하죠. 이 말씀을 실천도 못했죠. 이해도 못하죠. 도저히 믿을 수도 없지요.
졸지에 그 어떤것 하나 연결점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이상하게

도저히 말도 안되는 이 의미들이 말도 안되게 믿겨진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도대체 누가 나에게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을 벌리셨나요? 라고

다른 주인을 다른 주체를 보게 된다는 거죠. 이것이 회개 아닙니까?

내가 믿어야할 숙제로 본다면

말씀을 내 믿음의 대상물로 본다면

이것은 회개하는 자가 아닌 셈이지요.

회개는 그야말로 실패
그 어떤 접촉시도가 다 실패로 끝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도저히 이해 못하겠끔
정작 세리들은 돈 보다 센 분 앞에서 긍휼을 여겨달라고 고백케 만들어 버리고

 

정작 돈을 사랑하지 않도록 자신의 삶을 신앙으로 똘똘똘 뭉치게 했던 자들은

돈 보다 센 주님이 나타났어도 시큰둥 합니다.

주님 보다 돈을 사랑하지 않는 자기자신이 더 낫거든요.

예수님이 자신들 보다 더 나은 것이 별로 눈에 확 들어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생활면에서는 오히려 자기자신들이 더 나으니까 눈을 돌릴 이유가 없는 겁니다.


누가 이렇게 팔을 어긋맞게 한 것일까요?

도대체 누구세요 라고 묻게 된다는 겁니다.


니가 핍박하는 예수다 라는 답 외에는 없는 거죠. 비밀을 알려주셔야 알게된 것 뿐입니다.
 

자 이렇게 되니 예수님은 그들에게 뒤짚어 씌웁니다.

돈 보다 센 예수님 자신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우상 보다 더 강한 주인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을

바리새인은 돈을 사랑하는 자이다 라고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정작 바리새인이 우상 숭배자였고

 

정작 돈을 사랑하지 않았던 바리새인은 그렇게 취급당해 버리고

 

돈에 미쳐서 환장했던 누가봐도 그러했던 세리는 예수님께서 편파적으로 용서하시는 겁니다.
누가 봐도 불의한 자인 천하의 죄인 세리는 무조건적인 용서를 받는 겁니다.
이상하게 삭개오 세리 마태 세리 등등 세리가 먼저 그 나라를 영접하더라 말이죠.

천국의 열쇠를 쥐었다고 하는 자들은 정작 지도 안들어가고 남도 못들어가도록 하는

이 복음의 진수

캬 ~~~ 놀랍지 않습니까? 누가 믿으리요?
즉 인간의 믿음은 안 통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참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참이 되는 것과 같은 식이니
누가 ~~
누가 ~~
감히 누가 ~~~ 

참으로 뻔뻔스럽게 예수님은

옳치 내가 너 세리를 강력한 힘을 가진 돈 속에 참 잘 탁란했구나 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오히려 나는 절대 돈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했던 바리새인에게는

너는 돈을 사랑하는 자다 라고 일방적으로 편파해석을 뒤짚어 씌우면서 말이죠.

 

행함이 아닌

예수님의 믿음이 그렇게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이 이상한 상황이 구약에서는 그 대표적인 다말사건이고

더 특이한 상황이 바로 우리야 장군을 죽이고 밧세바라는 남의 아내를 취한

십계명을 제대로 어긴 이 다윗에 대한 편파 용서사건이다는 겁니다.

더 놀라운 이야기 할까요?

사실상 성경 전체가 다 이런 식입니다.
다들 안그런척 하면서 우기던데

사실은 참선지자는 아무리 봐도 거짓선지자 였다는 겁니다.
오히려 거짓선지자는 아무리 봐도 참선지자로 다들 착각했듯이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보들이라고요?
지금은 더 심합니다.
이런 양상을 주님은 의도적으로 펼치시는 겁니다.
심하면 심했지 지금 현재 2015년은 이 거짓영을 받은 광명한 천사노릇을 하는 자를 다들 따르고 있다는 겁니다.

참 신기하죠
아무리 역사가 반복이 되어 그것을 미리 방지하고 지식으로 알아본들

인간은 못 벗어나는 겁니다.


바로 이렇게 다윗을 편파적인 용서 때문에 상대적인

 

여기에 반발한 압살롬이 계속 그 사건을 꼬투리 잡고서

자신들의 우상세계를 죽은 사울을 뒤이어 받아서 펼치고 있으니

오히려 다윗이 미끼로써 작용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불의한 재물에 충성합니다.

곧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의 멸망 곧 실패를 증거하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이미 완료된 완성의 이스라엘을 봐 버렸기 때문이요

자신처럼 실패하라 라고 이스라엘에게 불편하기 짝이 없는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라고 하니까

이스라엘에게는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서

그 거리끼는 얼룩을 빼버릴려고 다윗을 뺄려고 하다가

도리어 더 깊숙이 박아버리는 역할로 작용케 만드는

시아버지 유다의 역할을 한 셈입니다.

 

그러니 다윗이나 이런 다윗의 정신 곧 십자가의 용서라는 걸림돌 정신을

이어받은 참선지자나(물론 거짓선지자로 취급받는)

 

이스라엘 속에서는 때려죽어도 빼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치도록 만드는 [얼룩]으로 작용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자신들의 운명 자체가 얼룩인줄 모르고(종말)

종말이 종말을 빼버릴려고 했다는 겁니다.

거짓이 거짓을 빼버릴려고 했다는 겁니다.
도리어

빠지기는커녕 더더욱 더 깊숙이 박히는 겁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처럼 말입니다.

 

자신이 탁란물인줄 모르고

도리어 탁란 된 것을 빼버릴려고 하니

탁란이라는 속성에 말려드는 셈입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바로 그런 패러독스 역설을 담고있는 겁니다. 패러독스(거짓)을 담고 있습니다.

이 역설 곧 거짓을 담고 있지 않으면 우리의 거짓이 들추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돈을 사랑하지 않는 자신의 삶에 빠져 살게 되는 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돈을 사랑하는데 미쳐있다는 지적을 받음으로써

돈 보다 더 강한 주님의 활동에 주목케 만드시는 그 작업을 주님이 하시는 겁니다.

 

돈 보다 세게 보여야 그런 예수님의 활동을 보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돈이 가장 세다는 안목 속에서 도저히 못 벗어나는 그 불가능성 속에서 말이죠.

어딜 감히 아무도 못 벗어나도록 모든 세계를 자본주의 속에 집어 넣었는데

어딜 감히 나는 돈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우기냐 말이죠.

 

그렇게 되니 불의한 재물에 충성못하는 겁니다.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시는 예수님을 주목 못하는 겁니다.

 

어디 눈길이 돌아가겠습니까? 타인에게 절대로 안 돌아갑니다.

자신이 실패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돌아가겠습니까?

자기가 잘 이기고 있는 판국인데 ~~~~~~~~

 

 

시아버지 유다가 어디를 봐도

모든 사람을 다 속여 가면서 까지

자신이야 말로 약속에 충실했다고 우겼습니다.

다 속아 넘어갔습니다.

남들은 다 속여도 예수님은 안 속습니다.
나에게 예수님은 도저히 속일 수 없는 분입니다.

진짜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이 와중에 다말 편에 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말은 유다의 부정적인 불의한 물건에 충성합니다.

도장 도장끈 지팡이

 

드디어 불의한 물건을 확보하는데 올인하여 획득했습니다.

아니 누가 이 도장 도장끈 지팡이에 충성하는 자가 있습니까?
도장 도장끈 지팡이?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겁니다.
이 하나 마나, 있으나 마나 한 아무것도 아닌 것에 충성하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도장 도장끈 지팡이는 유다의 허물을 숨기고 있는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저주에 누가 충성합니까?
십자가는 유대인과 모든 이방인의 허물을 숨기고 있는 하나님의 저주입니다.
십자가가 발현 되면 아무리 구원을 따 놓은 당상이라고 우기는 선민 조차도 다 지옥으로 보내고도 남는
우리 모든 인간의 실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하나의 저장창고? 박스? 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왜 걸림돌 즉 거리끼는 물건 이겠습니까?
자신들 손으로 하나님을 죽였거든요.
이런 죄악상을 담은 겁니다.


비록 다말에게 또는 예수님에게 

아무도 자신의 편에 서는 자가 없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 십자가라는 박스 안에 세가지 물건


모세의 싹난 지팡이

깨어진 십계명 두 돌판

만나를 담은 항아리


이 세가지 불의한 물건만 획득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위에 피를 뿌리는 겁니다.


용서의 피 입니다.

다시는 이 허물을 보시지 않겠다고

묻지도 따지지 않겠다고 모든 허물을 다 덮어버리겠다고 말입니다.

 

이 종말의 종말성에 충성한 겁니다.

이것이 사랑이요

이 사랑이
사랑이 얼마나 추상적인데 도리어 가장 또렷하게 구체화 됩니다.
그 증거가
이 사랑의 발현으로 비로소 맏아들은 분노합니다.
마귀가 비로소 구체화 됩니다.

즉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라고 하시는 이유는
인간 쪽에서의 사랑은 악마를 구체화 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질투인데
죽음을 이기는데
죽음도 못 이기는
사망의 권세도 못 이기는 사랑을 자꾸 사랑이라고 우기니까 그것이 도리어 추상적인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빨랑 그 모호한 것들은 실패로 돌아가도록 만드시고
구체적인 사랑을 표출 하심으로써
비로소 마귀는 구체화 되는 겁니다.
맏아들의 반발심 말입니다.


바로 이런 정치(종말의 종말)를 하기 위해서

요셉은 반드시 뺑뺑이 돌려서 간첩으로 몰아가서

이 세가지 부정한 물건을 가지고 오는 그 십자가의 용서를 요셉 자신이 받았듯이

형제들에게도 간첩으로 몰아버리고서는 십자가의 용서만을 가지고 오는지에 대한

통과시험을 치르게 하는 겁니다.

시험할려고 하는게 아니라

내가 이런 용서 받았는데

과연 같은 용서 받았는지

제발 이 용서만을 쳐다보자라는 복음증거차원이였던 거죠.

 

아니나 다를까

 

시아버지 유다가 결국 다말 덕분에 얻게된 그 불가능한 믿음

곧 패쓰워드 비밀을 가지고 오는 겁니다.

 

요셉이 그 비밀을 가지고 왔다고

그 십자가의 비밀을 가지고 왔다고

패쓰 통과 시키는 겁니다.

 

졸지에 애굽총리 라는 강한 세상의 권력으로 형제들을 간첩으로 몰아갔는데

시아버지 유다는 이 강한 힘 앞에서 돈으로 해결할려고 한게 아니라

더 강한 돈 보다 더 강한 사랑이라는 십자가의 피 용서로

 

진짜 주인 곧 이 모든 사건들을 주님이 일으켰다 라는 그 증거물인

불의한 재물에 대한 충성을 나타내 보이는 겁니다.

 

나의 죄악 그것도 위선적인 죄악

돈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저 세리와 같지 않아서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한

그런 위선적인 죄악을

들추어내셔서 찢으시고 그 허물을 도리어 싸매어 주시는

징계의 사랑, 대신 나의 허물을 대신해서 대신 매맞아 죽으시는

그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이야 말로

 

나 보다 더 옳았다고 고백케 함으로써

 

그 시험을 통과 케 하는 겁니다.

 

이것이 진짜 실상이고 나머지는 허구 허상이였다는 거죠.

그러니 결과적으로 볼때는

원인 없는 결과요

무시험 합격이지

 

내가 그 시험을 통과했기 때문에 합격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불의한 재물에 내가 충성했기 때문에 나의 지혜가 옳다 라는 말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이래 되면 또 모호한 나 속에 빠져서 또 의문의 희미한 모호함 속에 챗바퀴 돌 듯이 평생을 뫼비우스의 띠 라는 외설 속에 갇혀 살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나 라는 자아는 없습니다. 자아에게로 귀결 되면

또 모호한 미흡한 의문에 빠지는 겁니다.

자유가 아닌 종이 되는 겁니다.

 

자유하는 여자와 계집종 하갈의 차이가 되는 겁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차이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차이입니다.

야곱과 에서의 차이입니다.

다윗과 사울의 차이입니다.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차이입니다.

 

시편49편의 제목은 바로 재물과 지혜의 차이입니다.

재물은 돈이라는 도저히 우리가 이길수 없는 우상이요 세상 권력입니다.

주인이라고 표현합니다. 신약에서는 말이죠.

 

그런데 지혜는 그 돈을 이기는 나의 신앙이 아니라

지혜 자체가 하나의 인물로써 도리어 나를 그 돈 속에 탁란하여서

도저히 애굽왕의 강퍅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돈을 사랑하는 그 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로 만드셔서

그 돈이라는 세상의 가장 강력한 왕을 통해서

애굽왕과 애굽군사를 통해서 영광을 받는 분이 바로 돈 보다 더 센 지혜라는 인물이다는 겁니다.

 

이 두 주인의 싸움을 주님 때문에 우리는 목격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한나처럼

마리아처럼

 

보호자 싸움을 요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성령을 받아서 외치게 된 이 시편49편처럼

성령을 받지 못한 자는

 

세상사람처럼 돈을 사랑하는 그 자체로만 끝나는 시선과

또는 그 반대로 나는 절대로 돈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그 나를 지키기 위한 신앙에 빠진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처럼 살 수밖에 없습니다.

 

정작 재물이 아닌 지혜라는 인물을 쳐다 보는 것이 아니라 말이죠.

 

왜 어리석은 지혜로 오셨겠습니까?

아무도 원치 않는

아무도 쳐다보지도 않는 걸림돌로써 오신 겁니까?

 

정작 돈을 사랑하지 않을려고 말씀을 지키고 실천한 그들에게 왜 거리끼는 부정한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시는 분으로 오시는 겁니까?

 

이것이 지혜라는 인물이

 

인간이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돈 곧 재물이라는 주인을

 

유일하게 이기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재물에 충성합시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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