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범죄에서 예수님의 상한심령으로 (시편 51)

 


(
51: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51:2, 개역)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51:3, 개역)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51:4, 개역)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1:5, 개역)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51:6, 개역)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51:7, 개역)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51:8, 개역)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51:9, 개역)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51:10, 개역)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51:11, 개역)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51:12, 개역)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51:13, 개역)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51:14, 개역)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51:15, 개역)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51:16, 개역)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51:17, 개역)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51:18, 개역)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51:19, 개역)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지난 시간의 내용을 오늘 제목처럼 요약하면

나의 감사가 아닌 예수님의 감사로

나의 믿음이 아닌 예수님의 믿음으로

나의 7번 정직한 마음이 아닌 예수님의 770번 정직한 영으로

 

라고 하면 딱인 것 같습니다.

 

참말로 오늘 시편 51편은 그야말로 유명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노래 한다는 겁니다.


밧세바를 취한 사건을 그래서 나 이렇게 용서 받았다고
 

노래 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뭘 잘했다고????

 

그런데 모든 종교나 모든 상식이나 윤리는 절대로 노래에 끼어 넣을 수 없는 것을

우리 예수님은 더더더 쿡 찜하듯이 더 돋보이도록 집어 넣는다는 겁니다.

 

더 뻔뻔스럽게 그 허물을 더 잘 보이도록 하는 것이 복음이다는 겁니다.

 

일반적인 상식에서는 자신의 허물을 감추고자 합니다.

그것이 당연한 이유는 자랑꺼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이게 무슨 자랑인냥 뻔뻔스럽기 짝이 없이

자신의 허물을 아예 노래를 불러요 노래를

 

물론 그 허물을 자랑스러워서가 아니라

그 허물 뒤에 오시는 그 허물을 덮는 사랑 때문이다는 겁니다.


이 사랑이 너무 너무 놀랍고 놀라워서 너무 너무 감격스러워서 나팔을 부는 겁니다. 뿌뿌뿌

나 처럼 용서 받아라 라고 외치는 노래입니다.
나 같은 놈도 용서하는 사랑이라면 그 어떤 죄도 용서 못할 것이 없는 십자가의 피이다 라는 겁니다.
 

오늘 제목에서도 그렇지만

분명히 범죄 곧 다윗의 밧세바 취하는 사건

이것이 보통 사건이 아닙니다.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서 우리야 장군까지 죽이게끔 되어 있고

그 뒤에는 이름 없는 아이의 죽음까지 이어지는


한 가정을 완전히 묵사발낸 겁니다. 가정 파탄범 입니다.

그것도 그 가정이 잘못한것도  없는 오히려 다윗의 시기심에 의해서 탐욕에 의해서 파괴 당하는 겁니다.
우리야 장군은 그저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에만 관심 있었는데
그래서 아내와의 동침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노리고 다윗이 뛰어든 겁니다.

그래 너 잘났다. 너 한번 거룩한 전쟁 실컷 하다가 죽어라 라는 식으로 
최전방에 보내고 의도적으로 죽도록 하는 겁니다.
우연을 가장한 미필적 고의 사건인 거죠.

결국 이것은 우리야 장군 하나 죽이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겹겹으로

일타석 3안타까지 벌어진

일타 삼피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

3가지가 동시다발성으로 벌어진 사건입니다.

아무에게나 벌어지는 사건이 아니니까 일부러 따라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나 감당이 안되니까요


성령받은자에게만 해당 되는 겁니다. 선물이 미래에서 덮쳐져서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범죄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갑자기 끝은 번제 이야기로

온전한 번제(십자가의 피 용서)로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이것은 거꾸로 온전한 번제가 먼저 있었고
나중에 온전한 번제인 십자가(피 용서) 때문에 발생해야만 하는
나중에 벌어지는 범죄 이다는 겁니다.

우리의 시선인 범죄가 먼저이고 온전한 번제가 뒤라고 보는 시선을 전복시킵니다.
시간적인 순서가 사실상 역순인 겁니다.


그것도 태어나기 전에???


즉 다윗 자신에게는 무시험 합격이 되었다고 선언하는 셈입니다. 
편파적인 편애가 무조건 용서가 덮쳤다고 외치고 노래 부르는 겁니다.
 

완전 완전 반칙 중의 반칙입니다.

 

온전한 번제 곧 용서로 끝납니다.

그것도 웃끼는 것이 주님 쪽에서 용서한다는 것이 아닌

다윗 지가 지 입으로 예수님이 날 용서해서 용서 마 받았뿟다 라는 식으로

나도 어쩔수가 없다 라는 식으로

용서 해 주시는 분이 저런 식인데 나 한테 따지지 말라 라는 식입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그런데 바로 이 기준

다윗이 말하고 있는 이 온전한 번제
곧 십자가의 단 번의 제사인 피 용서이지요.
그 십자가의 사랑

즉 주님은 번제를 원치 않고 속죄제를 원치 않고

자비와 용서를 원한다 라는

 

이 기준에 의해서 거짓선지자와 참선지자가 갈리면서

반드시 이스라엘 역사의 두 축을 이루는데

말이 두 축이지

일방적인 거짓선지자의 독점으로 이스라엘 역사가 끝을 맺는다는 겁니다.


왠 갑자기 거짓선지자와 참선지자 이야기로 빠지냐구요?

앞 뒤가 맞지 않다구요?
그런데 우짭니까?

이스라엘 역사가 그런데

그러니 역사 역사 붙잡는 양반들은 이 어떤 연결점도 없는 역사해석에 손을 못대고 있는 겁니다.

자 물론 참선지자는 오히려 이스라엘이 죽은

이스라엘이 사망한 그 시점부터

거짓선지자는 이미 다 죽고 없어지니까 참선지자가 독점을 이루듯이

이스라엘의 역사 즉 이미 없어진 이스라엘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이끄는 마치 인간은 실패했지만

이스라엘은 실패했지만

참이스라엘 되신 예수님의 믿음은 이런 죽은자(이스라엘)도 살리시는 그 믿음으로 계속 이어간다는 겁니다.
분명히 죽은 사망한 이스라엘인데 그 이스라엘의 의미는 오히려 생생하고 또렷하게 완성되더라 말이죠.


무엇을 이어간다는 겁니까?

바로 저런 다윗의 정신

주님은 번제를 원치 않고 자비를 원하신다는

상한심령을 원하신다는 것 말입니다.


신약에서 그것이 이렇게 표현 되는 겁니다.
바로 십자가 정신입니다. 


즉 회개입니다.

 

회개란 눈물 흘리면서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연관 된 것이 아니라

 

미래와 연관된 의미에서

 

회개란 지금 이 순간 미래에서 덮쳐지는 상한심령이라는 자비를 보라 라는 겁니다.

 

우리는 회개를 마치 종교꾼들의 용어처럼

과거에서 원인을 찾아서 그 원인에 따른 결과로써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듯이

잘못을 수정하고 보완하여서 다시는 이런 일들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고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회개는 달인들이 따로 있습니다. 바리새인이지요 뭐

종교꾼들이 그런 회개는 달인들입니다.

그런 회개 하지 마세요.


그런 회개는 모호하기 짝이 없이 의문만 챗바퀴 돌듯이 도는 회개입니다. 아니 반성입니다.

바로 7번 회개했습니다. 이레에 7번 금식 했습니다. 십의 7조를 드렸습니다. 남을 7번 구제했습니다.

남을 7번 용서 했습니다 라는

거짓선지자의 세계 곧 우상의 세계와 같습니다.

우상은 약속을 못 지키거든요.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미래에서 온 선물을 받으라 라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말한 것처럼

너가 하는 7번의 감사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니 쪽에서 만들어내는 감사가 아니기에 손때라

그런 손때면 회개입니까 아니지요

 

뒤에 또 오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받는 것이 회개 입니다.
바로 7에 70번 회개 받아라 입니다.

용서 받아라. 감사 받아라. 찬양 받아라 입니다.


다윗이 뭘 잘했다고 이렇게 노래를 부릅니까?
자신의 잘잘못을 보는 과거가 아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래에서 무조건적인 용서가 옴에 있어서
노래를 안 부르고는 못배기는
노래하기가 아닌

노래 되기 라는 당위성 때문입니다.

노래를 불러서 노래하는게 아니라

노래가 덮쳐지니까 다윗 자체가 노래가 되는 악기가 되어버린 겁니다.

자신을 악기치듯이 치시는 예수님의 악기치는 솜씨 때문에 자신은 노래를 안 부르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선물을 받은 7에 70의 회개입니다.


흐릿하고 모호한 내가 반성 회개하는 7번 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그런 우상세계의 7번 회개가 아닌


이미 미래에서 완료된 것이 왔음의 선포로써의 7에 70의 회개인 겁니다.


내가 만들어 내는 7번의 감사를 손때고 탈출하고

입성을 해야 하는데 어디에 입성을 해야 하느냐 하면

주님 쪽에서 부어주시는 770번의 감사라는 선물을 받으라 라는 겁니다.

 

즉 이 선물을 받지 않는 자는 회개하는 자가 아니다 라는 거죠.

(마 3:2, 개역)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으니』

(마 3:8, 개역)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회개하면 천국에 들어간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천국이라는 미래완료가 덮쳐지면 회개 곧 상한심령을 누리게 된다는 겁니다.

회개라는 원인으로 인해 천국에 들어간다는 결과가 아니라
천국이라는 미래가 상한심령 곧 자복하는 마음으로 나는 무조건 틀렸고 예수님이 무조건 옳았다고
천국의 폭력성에 압도 당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곧 회개와 천국 사이에 그 어떤 연결점이 없이 원인 없는 결과로써
또렷한 미래완료를 누린다는 것이지

회개 하면 천국을 들어간다 라는
어떤 종교꾼들이든 다 알고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아무도 못 푸는 비밀이요 패쓰워드 걸린 의미입니다.

곧 상한심령은 지옥과 같은 저주받는 모습 아닙니까?

다들 상한심령을 싫어해서
혹 그런 심령이 자신의 신체에 묻을까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것 아닙니까?


즉 상한심령이 천국이다는 겁니다.
아니 어떻게 상한심령이 지옥이지 어떻게 천국이 된다는 말입니까?

그정도로 거리끼는 것이요 불편한 것이 상한심령(십자가요, 요나의 표적)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어 버린 겁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약속이였거든요.

영원하지 않다 라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라는 것이거든요.

영원한 예수님의 상한심령으로써의 십자가의 사랑을 거부한채
영원하지도 않는 곧 사라져 없어져 버릴 것을 유대인들은 붙잡고 그것을 빼앗길까봐
도리어 예수님을 죽인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걸림돌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 걸림돌이 옳았습니다 그 걸림돌이야 말로 영원해야 합니다 라고
회개가 덮쳐진 자는 즉 7에 70의 완료가 덮쳐진 자는 
그 초과잉적인 용서가 덮쳐진 자는

모호하고 영원하지도 않는 7번의 회개를 비로소 손 놓게 된다는 겁니다.

누구 이야기와 똑같나요? 다말사건이지요.
그래서 시아버지 유다가 요셉의 테스트 시험에
자기가 하지도 않은(왜? 자신은 7번 용서, 회개, 찬양, 번제 했다 라는 것 밖에 내세울것이 없기 때문에 -모호한)
며느리 다말아 다 완료시킨 영원한 기념비가 되는 7에 70의 지혜를 통해 무시험 합격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정직한 영이 없어서 정직한 영을 새롭게 달라고 합니다.

즉 인간에게는 감사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정직한 영이 없듯이 감사가 없기 떄문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못하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구원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감사를 받아야 합니다.

정직한 영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한척 뻔뻔하지 않은 척
7번 감사
7번 용서
7번 회개만 받으면 된다고 봅니다.

주님 안 속습니다.
우리는 7에 70번 무조건적인 감사를 받아야 합니다.
7에 70번 용서
7에 70번 회개
7에 70번 노래
7에 70번 상한심령
7에 70번 십자가의 피 용서 말입니다.

이 말은 그 정도로 우리는 안되고 안되고 안되는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앉았고 흑망의 백성인 지옥백성이며
약속은 추호도 관심이 없는 개같은 이방인이다는 겁니다.

아니 약속의 민족인 이스라엘도 안 되는 판국에 우리는 오죽하겠습니까?

 

왜 다윗의 범죄 사건을 통해서 다윗은 죄책감으로써 오늘 시편 51편을 쓰는게 아니라

노래 부르는게 아니라

오히려 뻔뻔스럽게

그 동안 옳다고 했던 짓들이 사실상 엉터리 였고

밧세바라는 우리야 장군의 아내를 취한 십계명을 범한 사건은

사실상 그 동안의 옳다고 여긴 것들이 모여서 잠재적으로 있다가
엉터리 였지롱 이라고 터진 사건이다는 안목인 겁니다.

그럼 엉터리가 아닌 진짜인 영원한 진짜 사건은 바로 이 밧세바취한 사건이 진짜 사건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원치 않는 범죄였다는 거죠.

곧 범죄는 하나의 증상이였고 진짜 영원한 것은
증상의 실체인 십자가의 용서였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용서로써 터진 진짜 사건이 다윗의 범죄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죄책감과 전혀 무관한 겁니다.

과거 반성과도 무관한 겁니다. 그런 회개는 없습니다.

십자가의 용서 때문에(미래) 그 증상으로써 나타나는 것이 다윗의 범죄였다는 겁니다.
마귀는 당연히 미래가 아닌 과거를 붙잡고 다윗을 잡아와야 합니다.

베드로를 잡듯이
그런데 베드로에게 다윗에게 왜 너는 나를 세번 부인했니?
왜 너는 밧세바를 취할려고 우리야 장군을 고의적으로 죽였니 라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다짜고짜 너 날 사랑하니 베드로야?
너 선물 받았니 다윗아?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아직 택배가 안 도착했는디요?
아 지금 봐라 선물 도착했을 것이다.

그래서 살펴보니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처럼
예수님이 말씀만으로 고치셨듯이
그 어떤 연결고리가 없는데
원인 없는 결과를 누리듯이

(막 5:38, 개역)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막 5:39, 개역)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막 5:40, 개역)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막 5:41, 개역)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막 5:42, 개역)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막 5:43, 개역)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여디디야가 이미 도착해 있는 겁니다. 이미
벌써

창세전에

벌써

여디디야 라는 뜻이 뭡니까? 솔로몬의 별명이지만
예수님이 무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 아닙니까?
정작 다윗은 7번 사랑하기 라는 모호한 것만 채웠지만
비록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번 부인 했지만
비록 아브라함은 약속을 비웃어서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예수님은 다윗은 7에 70번 무조건 사랑하시기로 이미 작정하셨고(여디디야)
베드로를 무조건 사랑하시기로 이미 작정하셨고
아브라함을 무조건 웃도록 이삭이라는 웃음을 주시기로 선물하시기로 이미 작정하셨다 라는 겁니다.

이 또렷한 이미 작정하신것과
내가 7번 용서 만들어내기 7번 회개 만들어내기 7번 감사 남들어 내기

7번 사랑 만들어내기 7번 산한심령 만들어 내기 등등과


족히 비교가 안되는 겁니다.
저런 모호한 성화론자들의 주장과 말입니다.
아예 손 때는 겁니다. 저런 약속도 못 지키는 우상의 세계에서
예수님의 상한심령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족히 비교도 안되는 ~~~~~~~~

그렇다면 감사를 받는다고 표혔했는데

즉 선물이라고 했는데

 

선물의 관점에서 보니

오히려 이렇게 터진 것이 감사할 일이였다 라는 겁니다.

 

실로암 소경이 왜 소경이 되었는가?

자기 죄 인가? 부모 죄인가 라는 물음에


예수님은 동문서답을 하시는데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소경이 되었다고 합니다.

왜죠?

그리고 바로 뒤에

실로암 소경은 눈을 고침받아서 빛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이 되었다는 증상으로 나타난 겁니다.


이미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이 덮쳐졌기 때문에 그 증상으로써 소경으로 태어난 겁니다.
이것을 도리어 눈뜬 소경인 바리새인들은 저주받았다고 그 얼룩을 괜히 건드린 겁니다.
 

이것은 반드시 바리새인들이 보는 앞에서 벌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고치십니다. 왜 성경에 기록이 된 사건일까요?

야이로의 딸을 다들 죽었다고 통곡할때
그 눈물 그 상한심령(7번)이 거짓인 이유는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 자식을 위해 울어야 하는 이유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비웃음을 유도하신 겁니다.

어리석어 보이고 미련하게 보이는 참 지혜는
반드시 인간의 악마성을 도출시키면서 비웃음 당하면서 오는 것이기에 두 패로 갈라지는 겁니다.

누가 다수에 있기를 원하지 소수에 있기를 원하겠습니까?
다수의 사고방식이 안전빵인줄 알았는데
모래 위의 짖는 집이였던 겁니다.

진짜 영원한 집인지 아닌지를 주님께서 감사하게도 풍랑을 일으키고
땅을 요동케 만들고 바다를 흉흉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진짜 영원한 처소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를 비로소 보게 됩니다.
평상시 풍랑이 없고 땅이 요동하지 않을때는 모릅니다.

 

자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시고자

감사를 주는 쪽과 감사를 주지 않는 쪽으로 갈라진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으로 치면

감사하는 쪽인 다윗과
감사하지 않는 쪽인 이스라엘로 나누어지는 겁니다.

마치 출애굽이라는 구원사건과 똑같지 않나요?

감사치 않는 애굽쪽과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히브리 잡족

한 개개인의 자질과 역량에 따른 것이 없이
집단적인 뭉태기로써 집단 구원이 벌어지고 있지
개인 구원이 아닙니다.

다윗 개인 구원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시편 51편은 집단구원으로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렇게 두 패로 나누는 기준이 되는 겁니다.

정직한 영을 주시는 쪽과 정직한 영을 주시지 않는 쪽으로 갈라질 때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고

이것이 구원사건이다는 겁니다. 갈라지는 거룩 구별이 되는 사건 곧 차이죠.

 

자 그렇기 때문에

회개는 과거를 원인으로 해서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로 수정해서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다들 상식적으로 아는데
지가 지 죄를 파악하고 자기 죄로 자기가 눈물 흘리는 것 처럼 가장 모호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이것은 영화롭게도 못하며 구원사건이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정반대죠 미래에서 선물이 덮쳐지는 것이 회개이니까

본인도 전혀 예상 못한 감사치 못한 쪽이 회개가 안 덮쳐진 것이고
본인도 전혀 감을 못잡은 쪽이 회개가 덮쳐진 쪽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구원사건이 덮져짐으로 인해서 두 패로 갈라지는 것이지
개인의 자질에 의해서 두 패로 나누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회개)에서 덮쳐지는 것이지
과거의 반성을 통해서 두 패로 갈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상한 것이고
미래는 전혀 뜻 밖의 상황입니다. 그래서 대처 할 수도 없습니다.

한 쪽은 영화롭게 못하기 때문에 감사가 없고 회개가 없고 정직한 영이 없고(미워하기로 작정된 에서)

다른 한 쪽은 영화롭게 되기 때문에 감사를 회개를 정직한 영을 선물로 받는 겁니다.(사랑하기로 작정된 야곱)

 

그런데 참 놀라운 점은 구원사건이 덮쳐지지 않는 쪽은 이미 감사와 회개와 정직한 영이 있다고 여겨서 구지 선물로 받을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점에서

 

이것이 선물이 선물 답다 라는 겁니다.
마치 용서가 용서 다운 것 처럼

 

지난 시간에 용서를 받은 사람이 없는데

오히려 없으니까 용서의 왕 중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더더더 초과잉적이다는 겁니다.

아니 용서 받은 사람이 부재인데(일만달란트 용서 받은자가 탈락해 버렸습니다. 없습니다.)

오히려 용서는 하등 손해보는 것 없이

더더욱 그 의미가 충만케 된다는 겁니다.

없으니까 더 더 더 말입니다.

 

선물이 저 세리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감사하는 자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선물 받을 가치도 없는 누가 봐도 저 세리 저 매국노 저 돈 밖에 몰라서 민족을 배신한

저 마귀자식에게 가는 것이 선물 답다 라는 겁니다.


누가 봐도
 

?

 

선물이 두 패로 나누니까 말이죠.

과거의 행적을 원인으로 하는게 아니라
미래에서 오는 선물로써 두패를 가르니까

누가봐도 예상했던 것들을 다 요리조리 다 피해가는 겁니다.
다 틀린 겁니다. 땡 탈락 빵점

 

모든 종교 모든 상식에서 보는 시선에서
아니 선물 받는다고 두 패로 갈라집니까?

백날 해 보세요 안 갈라지지

 

얼마나 선물을 무시했으면 이미 있다고 안 받아도 된다고 합니다.

 

결국 선물 자체가 사건인 셈이죠. 우연이요 무시꺼리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선물 아니면 저 죽습니다.

제발 선물 주세요

제발 정직한 영을 주세요

 

라고

 

그 동안 자신에게 있다고 여겼는데

정작 없었다는 실상을 까발린 것이 밧세바 사건이였던 겁니다.

 

그럼 그 사건이 오히려 선물로써 없다!!!! 뭐가? 정직한 영이 없다 라는 것을 인식케 함으로써

간구케 만드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에서와 야곱에게서 장자권에 대한 인식을

정작 장자권을 소유한 에서에게서는 선물 개념이 없었고

비록 야곱에게는 없었던 장자권이였고. 에서에게는 분명히 있었던 장자권이였는데 말입니다.

선물이 선물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서 팔을 어긋맞게 덮쳐오는 겁니다.
이것을 이근호목사의 최근 수요설교 인간이라는 제목에서 나오는 경과 개념입니다.
과정과 반대되는 경과 
저는 이것을 증상이라고 표현하고 싶은데
선물의 증상이다는 거죠.
선물이 제대로 안착 하니까
감기가 제대로 안착하니까 콧물이라는 증상이 나타나듯이 말입니다.

야곱에게서는 장자권을 선물 개념 곧 약속으로 보았기에 반드시 빼앗는 겁니다.

에서는 결국 장자권을 소홀히 여긴 겁니다.
절대로 소홀이 여긴적이 없는데 결과적으로 소홀히 여긴 꼴이 된 겁니다.
너무 너무 맛있어 보이는 또 하필이면 배고플때에 그 틈을 노려서 팥죽 한그릇과 바꾼 겁니다.
그칸다고 장자라는 역사 시간 속에서의 고정된 의미가 바뀔리가 없다는 거죠.
장자로 태어난 이상 동생 곧 차남이 될 수가 없다고 본 겁니다.
마치 장자의 민족이자 제사장 나라였던 이스라엘이 정작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개같은 이방인이 예수님을 영접했듯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되는
천국(예수님 나라)이 임하는 증상(경과)이 나타나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되었기에 결과적으로 덮쳐져서 선물을 무시한 증상의 사람으로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되었기에 결과가 덮쳐져서 선물을 달라고 간구케 함으로써 구원의 증상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누가 감사할까요?

 

빼앗은 사람이 감사할까요? 아니면 빼앗긴 자가 감사할까요?

 

다른 말로 구원받은 자입니까? 구원 못받은자 입니까?

 

약탈자입니다.

 

얼마전에 예루살렘을 빼앗는 자가

천국을 침략하듯이 빼앗는 자가

 

약속을 귀히 여기는 자입니다.

 

나의 믿음을 귀히 여기는 자가 아니라

내가 남을 7번 용서하는 것을 귀히 여기는게 아니라

 

도리어 내가 770번씩이나 용서 받아야 한다는 그 약속이 귀하다 라는 겁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상한심령이 아니면 안된다는 거죠.

 

번제 7번 드려도

감사 7번 드려도

속죄제 7번 드려도

 

인간은 약속을 소홀히 여깁니다.

오죽 하면 십자가의 지혜를 거리끼는 걸림돌로 여기겠습니까?

 

거북스럽고 불편하다는 거죠.

 

그런데 그것이 유일하게 귀한 지혜입니다.

이 십자가라는 귀한 약속이 아니면 나는 지옥 뿐이다고

귀히 여길수 있는 자는 상한심령의 영을 받은자

예수의 영을 받은자

정직한 영을 받은자

십자가의 영을 받은자 뿐입니다.

 

다윗은 비로소 뻔뻔스러워 집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 했지

우리야나

밧세바나

이름 없는 아기에게 범죄한게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인간 대 인간의 사건이 아니라

 

이것은 어디까지나 복음사건이다고 참으로 뻔뻔스럽게 외칩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해놓고서는 부정하고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아시면서 왜카십니까 라고

뻔뻔스럽게 외치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신부로써의 교회 인 겁니다.

 

교회란 하나의 사건 덩어리입니다.

 

교회가 가는 곳 마다 십자가의 용서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두 패로 나누어 지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교회가 오히려 복음을 가로막는 신부가 아닌 가정부로 돈만 밝히고 있습니다.

마치 바리새인은 돈을 사랑하는 자라고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뒤짚어 씌우듯이 말입니다.

 

오늘 시편 51편을 잘 살펴 보세요

저기서 다윗의 정신이 나옵니다.

거짓선지자와 참선지자가 두 패로 나누어지는 기준점으로써

 

이스라엘이 두 패로 나누어 지는 겁니다.

 

사실상 다시한번 언급하지만 사실상 거짓선지자의 완판승입니다.

딸랑 1명과 다수로 나누어지는 것이 무슨놈의 두 패입니까?

 

딸랑 1명은 수에 치지도 않을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기쁜소식입니다.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따지던 엘리야가

7천명을 남겨두었다 라는

 

주님의 회개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니까

 

이스라엘도 그 1 대 다수라는 두 패거리로 나누어짐을 통해서

쫄딱 망해서 구원받는 딸랑 1 명의 세계인 참선지자 세계에 쫄딱 망해서 들어가게 됩니다.

회개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쫄딱 망하지 않으면 거짓선지자의 세계에서 못 벗어납니다.

긍정의 세계요

평강의 세계요

절대로 이스라엘은 망할 리가 없다 라는 그 망상 허상 우상의 세계에서 못 벗어납니다.

 

다행히도 오늘 다윗처럼 쫄딱 망해서

완판 실패하게 되어서

오로지 바라볼 것은 번제가 아닌 상한심령만 쳐다 볼 것 밖에 없게 됨으로써

 

그 참선지자의 계통으로 예수님이라는 여호와의 구원이 오시는 겁니다.

 

맞습니다. 다윗은 지금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게 된 겁니다.

 

아니 범죄에서

그것도 개인의 범죄에서 어떻게 여호와의 구원으로 갑자기 사건내용이 전개되는 것일까요?

 

원인 없는 결과요

 

마치 로마서 7장 마지막과 8장의 첫부분처럼

 

그 어떤 연결 고리 하나 없이 여호와의 구원이 덮쳐지게 됩니다.

결국 여호와의 구원이 미래에서 덮쳐져서 벌어진 사건이

오늘 본문이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은혜를 더하고자 죄를 더할려는 꼼수는 안통합니다.

어디까지나 은혜 스스로가 벌린 일이지

인간이 더하고자 하는 것 자체가 육의 일이요 사람의 일이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일의 취지를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저주로써

우리를 살리시는 겁니다.

 

누구처럼?

다윗을 이렇게 구원했듯이 말입니다.

 

안그러면 다윗은 자기가 이스라엘 왕 답지 않느냐 라고

사울왕과 다를바 없이 그 세계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주님이 빼내시고자 다윗을 지옥까지 뛰어들어서 건지신 겁니다.

 

이것이 다윗에게 벌어진 예수님의 구원하심으로써 이 사건이 증상으로 터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아주 당당하고 기쁘게
아니 기쁠수 있겠는가? 라고

죄수 복을 입고서 주의 피 용서 합격을 노래하고 노래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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