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막아라 (시편 52)

 

안식일, 주일성수를 어기는 예수를 막아라

 

율법을 어긴 아히멜렉 제사장의 죽음과 하나님의 복수 그리고 안식일(율법) 논쟁 (시편 52)

 


(
12:4, 개역)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2:26, 개역)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6:4, 개역)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52:1, 개역) [다윗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왔더라 말하던 때에] 강포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52:2, 개역)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52:3, 개역)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셀라)

(52:4, 개역) 간사한 혀여 네가 잡아 먹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52:5, 개역) 그런즉 하나님이 영영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셀라)

(52:6, 개역)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저를 비웃어 말하기를

(52:7, 개역)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오직 그 재물이 풍부함을 의지하며 제 악으로 스스로 든든케 하던 자라 하리로다

(52:8, 개역) 오직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영히 의지하리로다

(52:9, 개역)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영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함으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

 

 

(삼상 21:1, 개역)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며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삼상 21:2, 개역)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바와 네게 명한 바 일의 아무 것이라도 사람에게 알게 하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여차여차한 곳으로 약정하였나이다

(삼상 21:3, 개역)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든지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삼상 21:4, 개역)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항용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부녀를 가까이만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삼상 21:5, 개역)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안이나 부녀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나의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날 그들의 그릇이 성결치 아니하겠나이까 하매

(삼상 21:6, 개역)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낸 것이더라

(삼상 21:7, 개역) 그 날에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는 도엑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었더라

(삼상 21:8, 개역)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여기 당신의 수중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왕의 일이 급하므로 내가 내 칼과 병기를 가지지 못하였나이다

(삼상 21:9, 개역) 제사장이 가로되 네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든 가지라 여기는 그 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다윗이 가로되 그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삼상 21:10, 개역)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삼상 21:11, 개역)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고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삼상 21:12, 개역)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삼상 21:13, 개역)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삼상 21:14, 개역) 아기스가 그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삼상 21:15, 개역)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삼상 22:1, 개역)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삼상 22:2, 개역)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삼상 22:3, 개역)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을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로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삼상 22:4, 개역)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이 다윗의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삼상 22:5, 개역)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삼상 22:6, 개역)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나무 아래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 곁에 섰더니

(삼상 22:7, 개역) 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로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삼상 22:8, 개역)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삼상 22:9, 개역) 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신하 중에 섰더니 대답하여 가로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었는데

(삼상 22:10, 개역)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식물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더이다

(삼상 22:11, 개역) 왕이 보내어 아히둡의 아들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 아비의 온 집 곧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부르매 그들이 다 왕께 이른지라

(삼상 22:12, 개역) 사울이 가로되 너 아히둡의 아들아 들으라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삼상 22:13, 개역)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로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뇨

(삼상 22:14, 개역) 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모신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삼상 22:15, 개역) 내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은 것이 오늘이 처음이니이까 결단코 아니니이다 원컨대 왕은 종과 종의 아비의 온 집에 아무 것도 돌리지 마옵소서 왕의 종은 이 모든 일의 대소간에 아는 것이 없나이다

(삼상 22:16, 개역) 왕이 가로되 아히멜렉아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네 아비의 온 집도 그러하리라 하고

(삼상 22:17, 개역) 왕이 좌우의 시위자에게 이르되 돌이켜 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의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고발치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삼상 22:18, 개역)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이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이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인을 죽였고

(삼상 22:19, 개역)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삼상 22:20, 개역)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가 피하였으니 그 이름은 아비아달이라 그가 도망하여 다윗에게로 가서

(삼상 22:21, 개역) 사울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인 일을 다윗에게 고하매

(삼상 22:22, 개역)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고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비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연고로다

(삼상 22:23, 개역) 두려워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 하니라

 


제목을 보니 참으로 이단적이지요. 아마 목사들이 다 달려들겁니다.
아니 목사 사모들이 더 하더라고요. 직접 격어 봤는데.
사모들 모임에서 십일조 내지 말라고 하니 눈에 불을 켜던데 ㅋㅋㅋㅋ

성경은 한마디로 언약과 비언약의 전쟁, 대립을 담고 있습니다.

즉 십자가의 정신과 인간의 행함 말입니다.

은혜냐 법이냐 라는 대립구조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예수님의 피 용서를 말하고

인간의 행함은 무조건 용서라는 반칙에 대한 반기로써 말씀을 지키는 실천을 강조합니다.

어떻게 말씀을 실천하지 않고서 천국에 가느냐 라는 거죠.

 

여기에 다윗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피용서로 간다는 겁니다.

그러나 마귀는 그거는 반칙이다. 법을 제대로 준수해서 가야 한다고

이 용서에 대한 거부감으로 일관합니다.

 

마귀는 바로 이 십자가의 피 용서만을 거냥한 거부감을 나타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것은 곧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닌 영의 싸움으로써

예수님과 마귀의 싸움이 되는 겁니다.

결국 마귀는 율법을 쥐고서 심판하는 권리를 손에 넣음으로써

무조건적인 용서를 어떻게 해서든 방해하는 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우에 아느냐 라는 겁니다.

예수님과 마귀의 싸움인지 우찌 아느냐 라는 거죠.

 

물론 모릅니다.

 

봤냐? 봤냐?

보기는 보았느냐 말이죠!!

 

이게 실증주의이죠 증명을 못하는 것은 무가치 무의미하다는 거죠.

즉 보고 믿는 것은 결국 행함이다는 겁니다.

 

이런 외설에 더 더 더한 외설이 있습니다.

 

그래 봤다 우짤래!!

! 본 자만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6: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4:12, 개역)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28:26, 개역)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보여짐을 당한 자만이 보니까

본 놈은 어쩔수가 없는 겁니다.

본 것을 말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것도 믿음의 세계를 거부했던 그 당사자가 봐버렸기 때문에 빼도박도 못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어떤 연결점이 없는 원인 없는 결과로서의 성령의 소욕이다는 겁니다.

 

곧 성령 받은 자만이 아는 겁니다.

즉 그 말은 그 싸움에 중간에 낑겼다 라는 거죠.

낑기지 않은 자는 아무리 교육을 받던
지식으로 쌓던
배움을 갖던

소용이 없습니다.

 

두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중간에 낑긴자만이 그 싸움의 내막을 본대로 말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건을 목격한 목격자가 노래하는 겁니다.

 

신약에서 대표적인 자가 바로 예수를 막을려고 목숨걸었던 사도바울 아닙니까?

그랬던 그가 가장 대표적인 중간에 낑긴 자입니다.

 

구약은 바로 다윗이 그 대표성이겠지요.

 

시편 52편은 사무엘상 21장에 나타난 사건이 발생한 때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노래 라는 것은 사건의 의미입니다.

 

마치 오페라 속에서의 사건들을 나열하는 식입니다. 연극 플러스 노래

 

과거의 종합예술은 오페라 였거든요.

 

그 이전에는 연극

 

요즘으로 하면 바로 영화인 겁니다.

 

사건을 노래화(재현) 했다는 말은

요즘식으로 하면 사건을 영화화 했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건을 시뮬라크르 라고 하는데

우연이라고 하기도 하고요

이미지, 즉 영상화 했다는 거죠. 그림화. 눈에 가시화.

이것이 마치 지나가듯이 스쳐 지나가는데 우연인데,

문제는 그 잔상 또는 여운

또는 잉여가 계속 맴돌때에

이것을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영화화 또는 노래화 또는 희화화 한다면

이것은 더더욱 그 잉여성이 계속 계속 반복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차이의 반복이라고 하는데

잔상이 계속 남는 거죠.

 

그렇다면 시편 전체가 모두다 다 잔상의 여운의 반복

잉여의 반복

이 잉여의 반복을 유대인들은 어릴적부터 외워서 부르는데

정작 그 잉여의 반복을 실현하는 것은 유대인이 아닌 예수님이였다는 거죠.

 

그러니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들은 시편이 노래 불렀던 사건들이였다는 겁니다.

 

가상 보다 더 가상적인 현실이 현실을 찢고 스크린을 찢고 침범하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인 겁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들은 이 십자가 사건의 재현입니다.

이것을 놀랍게도 그 당시(예수님 당시) 유대인이나 오늘날 교회나 거부하는 겁니다. 가짜로 취급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가짜스럽게 진짜로 십자가 사건을 매일 매일 반복케 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무엇이 진짜 현실인지를 알게 되는 겁니다.

 

자 그럼 사건 속으로 시뮬라크르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먼저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가 있어야 겠지요

물론 사건 현장이 있고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범죄가 발생해야 하겠지요

곧 사건현장입니다.

그것을 조사하는 기관인 형사, 경찰이 있는 겁니다.

 

그럼 그 기관에서 조사한 결과물을 즉 증거물들을 수집해서

이 범죄 현장을 판단하는 재판기관이 있는 겁니다.

 

검사와 변호사와 재판장 말입니다.

 

형사는 범죄 현장에서 증거물을 찾고 범인을 잡으면 되는 거고

재판받도록 넘기면 됩니다.

 

재판장에서는

검사가 범인에게 법에 의한 죄의 형량 곧 무게를 더하고자 하는 것이고

 

변호사는 혹시 범인이 진짜 맞냐 라는 것을 따지는 것이고

누명을 쓴 것 아닌가를 봐야하고

 

재판장은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최종 판결을 내리는 겁니다.

 

각자의 할 일이 다 다릅니다.

그런 입장에서 사건을 보는 시선은 결국 다 달라야 하는 거죠.

 

시차(시선의 차이)적 관점 말입니다.

 

그리고 재판관은 사건을 종합적으로 마무리하면서

지혜가 왜 옳은지에 대한

절대로 악을 허용하지 않는 이 지혜의 옳음을 나타내어야만 하는 겁니다.

 

이것은 변호사도 검사도 못하는 일입니다.

오로지 재판장만 하는 일이 지혜를 높이는 겁니다.

변호사는 변호만 하면 되고

검사는 검열만 하면 됩니다.

자기가 맡은 역을 넘어서면 안되는 거죠.

건방지게 변호사가 재판장이 되면 안되고

검사 또한 재판장이 되면 안되니까 말이지요.

 

오늘 시편 52편의 사건은

 

사건이 발생한 때를 노래했다고 했습니다.

네 사무엘상 2122장입니다.

 

그런데 지혜는 이 사건 현장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거꾸로 추적해 들어가야 합니다.

이미 지나간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시편 52편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지혜는 이렇게 노래 부른 겁니다. 시편 52편 말입니다.

 

자 그럼 판결이 끝났습니다. 시편 52편에 의하면

사무엘상 2122장의 사건은 결국 하나님이 보응하신다 라는 판결로써

악은 그 죄의 댓가를 받는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판결이 끝난 사건을 다시 재판을 다시 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다시 터트려서 재판이 유보 되겠끔 합니다.

미쓰 와이프 라는 영화를 보니까 변호사가 악한자들의 편을 들다가
사건을 통해서 이제는 악을 변호하는게 아니라 악과 싸우더라 말이죠.

이렇게 시선이 바뀌는 겁니다. 해석이 뒤짚어 집니다.


악인 사울왕은 예수님 시대에 누구이며
다윗왕은 누구의 모습으로 재현 되느냐 말이죠.

 

그 사건을 다시 터트린 사건이 신약의 예수님때에 바로 안식일날 일부러 제자들이 이삭을 먹은 사건으로 재현케 됩니다.

 

그 유명한 안식일 논쟁입니다.

 

(12:1,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12:2, 개역)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12:3,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12:4, 개역)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12:5, 개역)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12:6,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12:7, 개역)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12:8, 개역)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12:9, 개역)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12:10, 개역)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2:1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12:12, 개역)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2:13, 개역)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2:14, 개역)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어머니께서 기가막힌 질문을 하셨습니다.

왜 사울왕이 지도 안지키는 율법 또는 안식일을

왜 다윗이 어겼다고 제사장을 죽이는데 85명씩이나 죽였는데

문제는 왜 사울왕을 하나님이 바로 안 죽이냐 라는 겁니다.

 

제가 오바하면서 안되지요 안되지요 지금 당장 죽이면 안되지요

사울왕이 죽더라도 그 사울왕의 사고방식이 이스라엘 전체에 스며들도록

지금 죽이면 안되고 악이, 죄악이 꽉 가득 찰때까지

그래서 이제 죽여도 이스라엘 전체에 골고로 잘 퍼지겠구나 라는 그 시점이 될 때까지

절대로 죽이면 안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일려고 2살 밑으로 아기를 다 죽인 헤롯대왕

왜 그때 안 죽였을까요?

죽이면 안되죠.

헤롯 그 가문이 퍼지고 퍼져서 또 할 일이 있거든요.

 

그 다음 헤롯 안디바는 세례요한의 목을 짜르잖아요

마치 제사장 85명을 죽이듯이

 

또 그 다음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사도 야고보를 죽이지요.

그리고 사도 베드로를 죽일려다가 급사 하잖아요

 

즉 누군 죽도록 악한 놈을 방관하시고

또 누구는 죽지 못하도록 막고자 악한 놈을 죽이고

 

이런 일들이 일관성 없이 보이는데 


문제는 누구 기준의 일관성이어야 하냐 말이죠.


인간 기준에 맞출 이유가 없잖아요
어떤 인간? 아무도 없는데
하나도 없는데 ~~~~??
 

그렇다고 주님이 손해 보냐 말이죠.

 

모든 것이 주님 뜻대로 척척 돌아가는 겁니다.

우리가 모르니까 의문을 가질 뿐이지

알면 언제그랬냐는냥 또 주님이 옳았습니다 라고 하거든요.

그렇다면 그 결과를 미리 앞당겨서 보자 라는 거죠.

 

자 그럼 사건의 순서대로 살펴 보는게 아니라

그것은 이미 지나갔고

사건을 거꾸로 해석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건을 거꾸로 해석한 것이 시편 52편인데

이 사건을 다시 재현해 보니까

다시 해석도 달라지게 되는 겁니다.

 

그 사건 사무엘상 21-22장의 사건을 다시 재현한 것이

안식일 논쟁 사건인데

 

52편의 결과는

 

악이 퍼지고 관영하고 아무리 악이 모든 것을 다 가진 듯이 맹위를 떨쳐도

뿌리채 뽑힐 것이며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는 자는 영영하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건이 다시 재현 되니까

 

바로 이 시편 52편을 외우던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이

시편 대로 예수님을 악으로 규정하고 예수님을 뿌리채 뽑을려고 예수님을 목숨 걸고 막는 겁니다.

 

안식일을 어기니까 이것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큰일이 난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을 일부러 그런 바리새인들 보는 앞에서 어김으로써

안식일을 지키지도 못하는 모호한 인간의 행함 보다

안식의 주인인 예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의 실체 실상 진짜 안식을 보여주는 겁니다.

 

마치 이것은 안식일을 헐라 내가 3일 만에 안식의 주인을 세우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니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누가 3일만에 짓겠느냐 말이죠.

 

누가 2000년 동안 믿어온 하나님을 헐어 버리고

어떤 누가 딸랑 3년 활동한 예수를 믿겠냐 말이죠.

 

2000년 동안 믿었다는 그 전통성은 동질화 되어서 곧 자기가 되었는데

누가 자기를 버리고 예수님을 택하겠냐 말이죠.

 

자기의 모든 것을 2000년의 유대교에 올인 했는데?

 

4050년 신앙생활을 버리고

지금 오늘 처음 본 예수님을 믿는다고?

 

너 누구 제자니? 난 모세 제자인데?

너 예수 제자 될래?

 

실로암 소경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갑자기 누구 죄냐를 따지다가

안되니까 말을 돌려서 누구 제자냐 라는 문제로 따지는 겁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믿어라?

말이 되냐 말이죠

 

하나님은 존재이고 하나님의 이름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데? 비존재??

이름이 뭔데 아무것도 아닌데

 

하나님이란 존재이기에 그 존재를 믿으면 같은 동일성 동질화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상상계와 같은 정교회죠. 예수를 부담스러워 하는 정교회인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은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동질화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오히려 비존재이다는 겁니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보이도 이름만을 가지고서 가는 겁니다.

개죽음 당하고 아무런 것이 변하지 않아도

이 이름만을 들고가는 겁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반면에 카톨릭은 하나님과 동일화 했던 이스라엘 존재가 박살 해체가 되니까

묵시를 끌여다가 눈에 가시화 시켜서 억지로 라도 유지 보수 하는 겁니다.

해체 되지 않았다고 묵시운동을 펼치는 겁니다. 말씀 실천인 거죠.

 

여기에 복음인 기독교는 그 말씀실천도 해체시켜버리는 겁니다.

? 안식일 지켜봤자 모호하거든요.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가 뭡니까?

인애와 자비 아닙니까? 사랑이 나와야 하는데

사랑이 나오기는커녕 법이 나오는 겁니다.

 

베드로가 나는 절대로 예수님 안 버리겠다고 끝까지 사랑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사랑이기에 모호합니다.

마귀를 거치지 않았기에 의문의 사랑인 거짓사랑인줄 모르는 겁니다.

남을 78번 사랑하겠다는 손가락 세고 있는 사랑인 겁니다.

손가락 뿌라 버려야 합니다.

 

도리어 마귀를 거쳐서 사랑을 보니 내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신 그 사랑만이 사랑이였던 겁니다.

 

그러니 카톨릭이나 유대교나 자꾸 7번 사랑 8번 사랑

9번 안식일 성수 10번 주일 성수 라는 손가락을 세고 있는 짖을 하기에

예수님이 그 손가락을 다 뿌라버리는

 

770번의 안식의 주인이 되신 겁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을 거부하는 것이 유대교 카톨릭이다는 겁니다.

 

안식의 완성을 싫어하고

모호한 안식일 지키기만을 하겠다는 겁니다.

요 사고방식이 지도 안식일 모호하게 지키면서

안식일 어겼다고 제사장 85명을 죽이는 사울왕의 사고방식을

이스라엘 전체로 수평적으로 퍼트려서(바벨탑의 언어혼란처럼)

이스라엘이 무슨 짓을 하든

인애와 자비가 아닌 법 법 법으로 따지는

그래서 율법을 어긴 안식일을 어긴 다윗을 죽이고자

예수님을 죽이고자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막고자 하는

인애와 자비를 막고자 하는

7에 70을 막고자 하는

오로지 7번의 제사를 고집하는 사고방식으로 일관하겠다는 것이

마귀들의 사고방식이다는 겁니다.

 

결국 십자가의 피 용서를 끝까지 거부하겠다는 겁니다.

그건 반칙이니까요.

 

? 반칙이 많아지면 개판 된다는 겁니다. 질서가 안된다는 거죠.

성령이 일하시잖아요?

십자가의 영이 죽지 않았잖아요.

성령까지 갈 필요 없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정직한 영이 왜 없다고 지난 시간에 말했을까요?

바로 이런 마귀를 끌어당기기 위함입니다.

보충물로써 말입니다.

 

일만달란트 용서의 비유에서

정작 용서 받은 자는 없어졌는데

도리어 용서라는 의미는 초과잉적으로 전혀 손해 보는 것이 없이

확대 확장 되는 겁니다.

 

아니 일만달란트 용서 받은 자가 없는데 말이죠.

 

이것이 잘못 되었다고 따지는 것이 마귀요

주님은 손해 본 것이 없이 더 크게 확장 되었다고 좋아라 하십니다.

 

용서 받은 자가 없는데 그게 무슨 용서냐 라고 마귀는 마치

용서를 억수로 용서 답게 해야 한다는 냥

용서를 억수로 생각하는냥 따지는 겁니다.

 

이것이 마귀의 사고방식인데

 

이 마귀의 사고방식이

 

안식일 이삭을 먹는 예수님의 제자를 향해 시비를 거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막고자 말이죠.

 

잘 걸려든 겁니다.

주님의 안식의 의미는 더더욱 확대 명료 또렷 완성으로써 확장 되는 겁니다.

전혀 손해 보는 것이 없이 말이죠.

 

제발 안식일 주일성수 어깁시다.

뭐 하긴 한 번도 지킨적도 없지만

늘 어겨왔지만 말이죠.

 

어기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안식일을 어기는 것을 통해서 마귀가 달라붙고

마귀가 달라 붙는 가운데서

예수님의 새로운 안식의 주인 해석

안식의 완성의 의미를 보는 겁니다.

 

결국 전혀 무관하고 안식일 지키는 자들에 의해서 무시 받던

 

인애와 자비가 안식의 주인의 목적이였던 겁니다.

 

(13:8, 개역)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13:10, 개역)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5:17, 개역)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자 결국 두 해석의 싸움입니다.

사무엘상 21장 22장의 사건을 해석한
시편52편의 해석을 가진 유대인과

다시 사건 자체를 다시 발생시켜서
시편52편의 해석권을 모조리 예수님 혼자 단독으로 가진 해석과의

싸움

 

오늘도 제사장 85명이
바로 이런 안식일을 지킬려고 하는 자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도록 하십니다.
뭐 85명이겠습니까? 어린아이 2살 밑으로 다 죽이듯이
주일성수 지킬려고 주일성수 어긴자를 정죄하기 바쁩니다.
연자맷돌을 매달아 물에 빠뜨리는 짓을 오늘날도 벌립니다.
예수님까지 죽이고 있습니다.

자 이렇게 예수님을 죽일려는 자들을 나타내심으로써

 

주님은 십자가 사건을 무한반복 하시는 겁니다.

 

제사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를 반복하시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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