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곳]과 [자본주의는 지극히 기독교적이다.]

처음에는 비극(오독)에서, 다음에는 희극(정독)


송곳이라는 드라마 또는 만화?

영화 카트의 확장판 같다.

부조리가 멀리 떨어져 있다가 이제는 피부에 직접 와 닿을 정도로
실상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노조에 가입하고
이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알아야 할 판국이다.


그러나 이 판대기는 변할리가 없다.


이 변화의 흐름을 타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맞써 싸울 것인가?


자본주의는 지극히 기독교적이다.
기독교가 살아남은 것을 자본주의가 따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절대로 망할리가 없다.


그런데 좌파들은 자본주의는 언젠가는 망한다는 망상을 집어넣고 있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이 피부 속으로 와닿는 이 현실을???


성경은 참으로 실재적이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의 삶은 오늘날 노동자의 삶과 똑같다.
로마 치하에서 나라 잃은 민족의 서러움을
예수님은 위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구질 구질한 세상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세계를 말씀하셨다.


다들 비웃는다.


그래서 비극적이다. 오독한다.


그러나 그랬던 사도바울 조차도 이제는 희극이다.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구나 라는 허구에서 벗어나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이전 것은 지나갔다고 외친다.

왜 쓰잘데 없이 답도 없는 모호한 세계에서 억지로 참아가며 사는 것인가?

벗어나면 그만 이다.


처음에는 오독했다. 그래서 비극적이다.

아무리 발버퉁 쳐도 점점더 옥죄어 온다.

의롭지도 않으면서 의로운 모양새를 갖출려고 위선을 떨어서이다.

위악적이면 자유롭다.


나는 늘 가짜였다. 괜히 진짜인척 살면 본인만 피곤하다.

그냥 벗어나면 된다.

문제는 사고방식이다.


이제는 희극 뿐이다. 정독이다.


성경말씀을 처음에는 오독했다.
이제는 정독뿐이다.


7번 남을 용서하겠다는 위선에서 벗어나
남이 아닌 내가 7에 70번 용서 받아야 하는 위악의 삶이, 죄인의 삶이

오로지 용서받는 긍휼의 삶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송곳은 결국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찌르고 남탓만 할 뿐이다.


부조리는 나를 죽이는게 아니라 도리어 나를 살리는 역설이였던 것이다.

부조리 보다 더 부조리한
십자가라는 부조리(불륜, 스캔달)가 무조건 나보다 옳기 때문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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