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고에 상한 다윗에서 쇠사슬에 매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시편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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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5:18, 개역)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56:1, 개역) [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요낫 엘렘르호김에 맞춘 노래,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 인에게 잡힌 때에]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56:2, 개역)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히 치는 자 많사오니

(56:3, 개역)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56:4, 개역)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56:5, 개역) 저희가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내게 대한 저희 모든 사상은 사악이라

(56:6, 개역) 저희가 내 생명을 엿보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종적을 살피나이다

(56:7, 개역) 저희가 죄악을 짓고야 피하오리이까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

(56:8, 개역)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56:9, 개역)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가 물러가리니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 줄 아나이다

(56:10, 개역)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56:11, 개역)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이까

(56:12, 개역)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56:13, 개역)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믹담이라는 뜻이 정확한 뜻이 없이 여러 해석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황금 또는 돌처럼 그 영원하고 딱딱하고 불변할 것 같은 것에

홈패임을 당하듯이 새겨지는 흔적(사건) 이라는 해석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즉 고난 이다는 의미이다는 거죠.

 

그렇다면 믹담이라는 의미를 딱 들었을때 요셉이 땅에 파묻혀 팔려가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 요셉사건을 다시 시편에서는 새로운 해석을 하기를

 

(105:18, 개역)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그 때의 그 사건이 요셉 개인으로 끝나버리는게 아니라

반복이 된다는 겁니다.

 

바로 이겁니다.

 

사건이란 차이로써 즉 거룩으로써 계속 반복한다는 겁니다. 마음판의 할례이다는 것이죠.
손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할례인 겁니다. 분별 분리 차단 단절 말입니다. 불가능성의 반복.

반면에 육의 할례는 거룩은 없이

즉 사건은 없이 습관화 하는 반복이다는 겁니다. 차이의 반복이 아니라, 거룩의 반복이 아니라,

억지로 지키는 행함이다는 겁니다. 껍데기의 반복이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56:1, 개역) [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요낫 엘렘르호김에 맞춘 노래,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 인에게 잡힌 때에]

 

라고 그때 그 사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다시 노래 부른다는 것은 다시 반복이 되고 있다는 겁니다.

 

손의 할례를 반복하는 것은 왜 노래 부르지 않고

사건을 노래 부를까요?

 

이것은 행함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이 벌리신 사건은 구원사건이다는 겁니다. 곧 믿음 속의 믿음인 예수님의 믿음이지요.


인간의 믿음은 반복 즉 거룩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화 될려고 해도 배설물의 반복입니다.
예수님이 완성하신 율법의 완성인 사랑 곧 십자가 사건만이 반복 될 뿐입니다.
유일한 거룩은 이것 뿐입니다.
 

다윗은 이 구원사건을 주님이 일으시키신 그 믿음을

마음판에 할례하듯이 새기듯이 이스라엘에게 새기는 겁니다. 증거합니다.

십자가를 새기듯이 말입니다. 십자가 사건의 반복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곧 시간이란

이 십자가 사건의 반복입니다.

믹딤 곧 이스라엘이라는 목이 곧은 백성에게 그 백성의 역사에
묵시가 마음판에 새기듯이 할례를 하듯 홈을 파는 겁니다. 사건의 흔적을 남기는 겁니다.


역사는 판대기요 묵시는 구원의 뿔처럼 깍고 파고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누리는 겁니다.
묵시에서는 행하는 것이 없습니다. 누리는 것 뿐입니다.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는 없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곧 언약 사건입니다. 약속 사건.

그렇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십자가 사건의 반복을 방해하는
다른것들의 반복 또한 대립적으로 활동을 해 줘야 합니다.
그래야 보충물로 작용하지요


영광이 됩니다.

(출 14:17, 개역)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바로 마귀활동이 즉 행함이 이스라엘에서 전체를 장악한 듯이 작용을 해 줘야 합니다.
그렇게 배경으로 카페트 깔리듯이 깔려야 그 차이로써 믿음 곧 약속이 차이나게 등장하는 겁니다.

 

그 행함 때문에 믿음의 노선인 다윗은 착고에 상하는 겁니다. 요셉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에게서 싫어버린바 되듯이 말입니다.

(시 105:1, 개역)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시 105:2, 개역)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사를 말할지어다』

(시 105:3, 개역)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시 105:4, 개역)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시 105:5, 개역)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의 행하신 기사와 그 이적과 그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

(시 105:6, 개역)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의 행하신 기사와 그 이적과 그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

(시 105:7, 개역)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시 105:8, 개역) 『그는 그 언약 곧 천 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시 105:9, 개역)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시 105:10, 개역)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

(시 105:11, 개역)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

(시 105:12, 개역)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시 105:13, 개역)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였도다』

(시 105:14, 개역) 『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연고로 열왕을 꾸짖어』

(시 105:15, 개역)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시 105:16, 개역)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시 105:17, 개역)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시 105:18, 개역)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시 105:19, 개역)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시 105:20, 개역) 『왕이 사람을 보내어 저를 방석함이여 열방의 통치자가 저로 자유케 하였도다』

(시 105:21, 개역) 『저로 그 집의 주관자를 삼아 그 모든 소유를 관리케 하고』

(시 105:22, 개역)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시 105:23, 개역) 『이에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감이여 야곱이 함 땅에 객이 되었도다』

(시 105:24, 개역)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크게 번성케 하사 그들의 대적보다 강하게 하셨으며』

(시 105:25, 개역) 『또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 종들에게 교활히 행하게 하셨도다』

(시 105:26, 개역) 『또 그 종 모세와 그 택하신 아론을 보내시니』

(시 105:27, 개역) 『저희가 그 백성 중에 여호와의 표징을 보이고 함 땅에서 기사를 행하였도다』

(시 105:28, 개역) 『여호와께서 흑암을 보내사 어둡게 하시니 그 말씀을 어기지 아니하였도다』

(시 105:29, 개역) 『저희 물을 변하여 피가 되게 하사 저희 물고기를 죽이셨도다』

(시 105:30, 개역) 『그 땅에 개구리가 번성하여 왕의 궁실에도 있었도다』

(시 105:31,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파리떼가 오며 저희 사경에 이가 생겼도다』

(시 105:32, 개역) 『비 대신 우박을 내리시며 저희 땅에 화염을 내리셨도다』

(시 105:33, 개역) 『저희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시며 저희 사경의 나무를 찍으셨도다』

(시 105:34, 개역)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황충과 무수한 메뚜기가 이르러』

(시 105:35, 개역) 『저희 땅에 모든 채소를 먹으며 그 밭에 열매를 먹었도다』

(시 105:36, 개역) 『여호와께서 또 저희 땅의 모든 장자를 치시니 곧 저희 모든 기력의 시작이로다』

(시 105:37, 개역) 『그들을 인도하여 은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 지파 중에 약한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

(시 105:38, 개역) 『그들의 떠날 때에 애굽이 기뻐하였으니 저희가 그들을 두려워함이로다』

(시 105:39, 개역) 『여호와께서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 불로 밝히셨으며』

(시 105:40, 개역)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로 오게 하시며 또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도다』

(시 105:41, 개역) 『반석을 가르신즉 물이 흘러나서 마른 땅에 강 같이 흘렀으니』

(시 105:42, 개역) 『이는 그 거룩한 말씀과 그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시 105:43, 개역) 『그 백성으로 즐거이 나오게 하시며 그 택한 자로 노래하며 나오게 하시고』

(시 105:44, 개역) 『열방의 땅을 저희에게 주시며 민족들의 수고한 것을 소유로 취하게 하셨으니』

(시 105:45, 개역) 『이는 저희로 그 율례를 지키며 그 법을 좇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지만

 

원수란 사울왕이 아닙니다. 사울 왕은 하나의 증상물이지 그 증상의 주인(주체)는 아닙니다.

시편 전체에 나타난 원수는 누구인가 라는 것이 해석의 관건입니다.
곧 이것은 십자가로 판명이 나야할 원수이지

시편 자체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거꾸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럼 사울왕이 아니면 압살롬?

압살롬도 아닙니다.


만약 압살롬이 시편 전체에서 말하는 원수라면 다윗은 아들 압살롬을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전체로 퍼지기 전에 말입니다. 방치하면 방관죄가 되는거 아닙니까?
그런데 다윗편의 장수가 여러번 죽일까요 라고 할때에 죽이지 말라고 합니다.

사울왕은 기름부음받은 왕으로써 죽일 기회가 많았지만 정작 본인이 죽이지 않았듯이
아들 압살롬 또한 반란을 일으킬때마다 죽이고자 장수들이 간청을 해도
죽이지 말라고 합니다.
저런 것도 다 주님의 뜻일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수 문제는 자꾸 유예 됩니다. 자신이 나서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라고 합니다.

주님이 세운것도 원수요 주님이 해결할 것도 원수이다는 겁니다.

주님 숙제이지 나의 숙제가 아니다 라고
왕으로써는 참으로 무책임한 말을 하는듯 보입니다만
이것은 육의 시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윗 본인이 격는 원수 문제를 본인이 해결해 버리면
 

그렇게 되면 육의 할례, 손의 할례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전형적인 성화론이 되는 거지요.

그런 원수는 그 원수된 조건을 완화 해 버리면 원수는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조건 때문에 발생된 원수이니까 말이죠.

 

성화론의 문제점은 조건만 갖추면 된다고 인간에게 가능성을 부여한다는 점입니다.


참 신기하게도 성경을 보는 눈이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물과 기름 입니다.

성화론자들에게 마음판의 할례를 해 본 사람이 있냐고? 물어 보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거룩의 근처도 못 가는 겁니다. 무슨 수로 하겠습니까?

백날 해 본들 손 할례 수준인데?
껍데기로 거룩의 모양을 백날 100% 갖추어도
마음판의 할례가 안되는데

이것을 사기를 쳐도 보통 치는게 아닌데 
그래도 가능성을 부여하고
사람들에게 또 먹혀 들더라구요?

결국 왜 그런가 살펴 보니

그건 다 거짓말이고 돈 때문이였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였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속고 속는 이유는 결국 돈 문제였다는 거죠.
 

결국 죄란 조건에 미흡해서 부족해서 생기는게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보충하면 죄 안되던가요?
그런 이성적, 합리적 사고방식은

육의 사고방식입니다.

인간의 지혜에 예수님이 따라줄줄, 속아줄줄 아는 겁니다.
안 속습니다.
물론 인간 쪽에서는 이것이 전부이니 어쩔수 없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로지 예수님 자신의 지혜인
십자가의 지혜로만 일하신다는 겁니다.
이 십자가 만이 우리의 곧은 마음판을 홈파는 겁니다.
백날 다른 것으로 해본들 홈을 팔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로지 십자가에 그 정과 욕심을 못박는 것은 십자가 뿐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안됩니다, 백날 도 딱아 보세요. 백날 성화해 보세요 되나!!

 

거룩이란 미흡해서 부족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99.99999999의 조건을 갖추어도

단 하나의 조건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 하나가 바로 사랑입니다.
애초부터 없던 것 단 하나 빼먹고 다 하는게 인간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하나가, 조건을 갖추겠다는 인간에게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조건에 미흡하거나 부족한게 아니라 말이죠.

없다는 것이 문제 입니다.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습니다.
이 없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들통내는 것이 바로 율법 아래 가두는 겁니다.
모든 인간을 죄 아래에 가두는 겁니다.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애가 욥기 모조리 다 율법입니다.
죄 아래 가두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사랑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신(영웅, 권력, 힘)에게만 관심 있습니다.
사랑은 돈이 힘이 안되지만
신은 돈과 힘이 되는 겁니다.


이 신을 깨뜨리는 것이 바로 십자가 입니다.

곧 자아투시로써의 신을 깨뜨리는 십자가이기 때문에 마귀는 신이 될려는 인간을 방해하는 이 십자가를 방해하는 것이지요.

선악이 뭡니까? 신만이 아는 것 아닙니까?

피조물이 알 필요가 없는 겁니다.

율법이 가입된 이유는 죄를 더하게 함이지 율법 지키라는 게 아닙니다.

율법 지키면 지킬수록 선악을 아는 신의 조건을 갖추게 되는 겁니다.

신과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거죠.

누가 신과의 차이성을 알고자 율법을 지키는자가 어디있습니까?
말씀을 지키는 이유 또한 모조리 신과의 차이성이 아니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가 아니라
저 세리와 같지 않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가 되는 것이 말씀 지키는 이유인 겁니다.
악마죠. 악마의 자식들입니다.
마귀가 되고 싶어서 말씀을 지키는 겁니다.


그랬던 자가 추락합니다.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해볼것 다 해봤다는 겁니다.

선악의 정점을 찍어 봤다는 겁니다.

율법의 정점을 찍어 봤다는 겁니다.

자유는 커녕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속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의 법을 사랑해도

겉사람이 사로잡아 버린다는 겁니다.


가로막혀 버립니다.


자유는 커녕 포로되어 갇혔다는 겁니다.
철저하게 갇힌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이 문제를 예수님의 죽음이 십자가의 죽음이 해결했다는 겁니다.

구원이란 뿔로써 뻥 뚤어버린 겁니다.

막힌 담을 헐어버려야

비로소 평화가 오는 겁니다.



(엡 2:13, 개역)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엡 2:14, 개역)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 2:15, 개역)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6, 개역)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 2:17, 개역)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 2:18, 개역)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9, 개역)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가로막힌 담을 헐어야 말이죠.


그래서 성전을 헐어버려야 합니다.

성전이 오히려 가로막는줄 꿈에도 몰랐던 겁니다.
성화됨으로 쌓은 벽돌을 무너뜨려야
막힌 담이 허물어 집니다.
쌓으면 쌓을수록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가로막혀 버립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주를 삼키니까 말이죠.

예수님과 죄인인 나 사이에 그 어떤 것도 둘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목사여도
아무리 복음적인 교회여도
아무리 성화된 성도여도
아무리 믿음 좋은 나 자신이여도

중간에 그런 배설물들을 다 거들내 버려야 합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아무리 복음적인 교회도
아무리 성경적인 목사도
아무리 성화가 된 성도도
아무리 믿음 좋은 나 자신도

나의 죄를 사하고자 십자가에 대신 못박힌 적이 단 한번도 없다는 겁니다. 

오로지 예수님과 나 사이에는 죄인을 부르시는 그 십자가의 피 발림 뿐입니다.
그 어떤 것도 그 중간 사이에 둘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불의한 재물인 십자가만 있을 뿐입니다.

이 불의한 십자가에 충성하면 됩니다.
다른 것에 충성할 하등의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자신의 성화(거룩)됨을 위해서도 충성하지 마세요.

탈무드에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눈동자가 검은 이유는 어두운 데서 빛을 보기 위한 것이다는 겁니다.
성화론의 전형적인 모습이지요
그럼 파란 눈을 가진자는????

자신이 소경이다고 인정해서 빛을 보기 원하는 죄인인 입장이어야 한다고 말을 하지만

정작 그것을 알고 있는 자신이기에 의인이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그래도 겸손하게 위버멘쉬 겸손한자로써 창조적인 자율적 인간이다는 겁니다.

즉 인간 쪽에서 출발하는 빛을 향한 발걸음(도전)이다는 거죠.

복음은 그 정반대입니다. 찾아오심 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뻔뻔스럽게 그 조건 999999999로 갖춘 사람이 바로 자기자신이다고

뻥을 쳐도 보통 뻥을 치는게 아닙니다.
그 정도로 당당합니다. 실제로 바울 보다 나은 자가 없을 정도로 뻥칠만 합니다.
인간 중에서는 최고일지 모르니

율법 근처도 못 간 겁니다.

나만 남았나이다 백날 몸부림 쳐고 달음박질 하여도 1입니다. 제자리 뛰기 입니다.

7000 근처도 못 간 겁니다.

죄만 더 추가 시켰을 뿐입니다.

다행히도 예수님의 찾아오심 때문에 빨리 빨리도 바닥을 친 겁니다.

 

그러나 솔직하게도 아니 감사하게도 이 십자가의 사랑이 찾아와 주시지 않았더라면
자기 열심에, 자기 믿음에 속을뻔 했다는 거죠.

그런 조건은 다 배설물 똥 덩 어 리 일 뿐이다 라는 그 주장 때문에

모든 무거운 짐을 다 내려놓을수가 있는 겁니다.

 

쓸데 없는 짖이다는 거죠.

 

사랑은 여기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지 않다 라고 먼저 전제를 하고서는

사랑은 여기에 있다 즉 우리 바깥이라고

율법 외에 라고 말입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우리 인간 쪽에서 마련한 제물이 아니라
주님이 직접 마련한 또렷하고 명료한 제물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고마운 말입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라는 그 곤고함에서 벗어나는

보통 보통 보통의 믿음이 아닌 의미입니다.

 

바울의 믿음이 아니라

믿음이 바울을 다루어서 나오는 소리이다는 겁니다.

 

자 그럼 눈치 채셨겠지만

시편 전체에 나타난 원수 개념은 그럼 누구입니까?

 

나 입니다.

 

나 다윗


없는 자아를 끝까지 있다고 우기는 나

그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 보다 더 기쁜소식은 없습니다.
 

나 김대식 이다는 겁니다.

여러분 자신이다는 겁니다. 나 OOOOOOOOOO 말입니다. 이름이 세 글자 이상도 많으니 ~~

 

결국 다윗 속에서 다윗을 빼내는 겁니다.

나 속에서 나를 빼내는 겁니다.

신약의 십자가 사건을 거쳐서 시편에서 말하는 원수가 누구인지를 보게 되니
남이 아닌 나 자신인 겁니다.

이것을 또 구라를 쳐서 카톨릭은 내 탓이요 라고 사기를 치는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내 탓이다 라는 것은 윤리적이고 양심적인 인간이 되자 라는 식입니다.
이것은 회개도 아닙니다.
회개를 할 줄 아는 나는 옳은 인간이 될려고 노력하니 얼마나 바른 생각이지 않냐 라는 식이지요.
가톨릭이나 성화론자나 개혁주의나

다들 예수님과 나 사이에 엉뚱한 것을 집어넣고 있는 겁니다.

기여이 그 중간에 성화된 나, 바른 인간이 될려고 노력하는 나를 기여이 집어 넣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꼬시냐 말이죠.

다른 말로 십자가에서 다 이룬 그 사랑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겁니다.

 

하나님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빼내는 겁니다. 빼낸다? 구원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을 빼내는 겁니다. 뒤의 이스라엘이 바로 예수님이고

앞의 이스라엘은 혈통 이스라엘인 거죠. 육적 이스라엘

 

쌍둥이

에서에게서 야곱을 빼내는 겁니다.

 

다시

야곱에게서 이스라엘을 빼내는 겁니다.

 

다시

그 이스라엘에게서 참이스라엘 예수님을 빼내는 겁니다.


마치 가인의 손에서 아벨을 빼내시는 겁니다. 물론 허무하게 죽지요
그 허무에 충성하시는 겁니다.

허무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예수님 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스라엘 손에서 건지시는 방법이
구원하시는 방법이 바로 십자가 라는 어리석은 지혜 입니다.

인간의 손에서 예수님을 구원하시는 겁니다.
 

이 사건의 반복입니다.

항상 쌍의 대립 구조 속에서 말입니다.

 

사건이란 결국 십자가만을 말하는 겁니다.

십자가 구원 사건 말입니다.

 

십자가를 믿는 자들로부터 십자가를 구원하는 빼내는 것이 성경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로부터 믿음되신 예수님을 빼내시는 것이 구원사건이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사건에 대한 철학개념을 세운 자들도

사건의 껍데기를 형성하는데 천재적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사건의 앙꼬인 예수님은 이상스럽게도 다 뺴버립니다.
절대로 넣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모호합니다.
다시 의문인 인간에게로 회귀합니다.

종교적이다 라는 욕을 먹을까 싶어서 말이죠.

이런 의식은 유대인도 성화론자도 이상하게 동일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거리끼는 걸림돌이기 때문입니다.

천재적인 발상인데

어리석고 미련함이 된다는 것이 싫은 거지요.

 

그래서 웃끼게도 아주 아주 역설적이게도

예수는 포기해도 바울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 요즘 현대철학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사상에 바울을 이용해 먹기에 딱 좋다 라는 거죠.

바울의 열정

그것 하나 만큼은 인정하겠다는 겁니다.
제국에 목숨 걸고 싸우는 열정
이것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습 아닌가? 라고

정작 껍데기는 기가막히게 잘 보고 있지만

앙꼬는 무조건 이유 없이 싫어합니다.

이것 조차도 참 신비하지 않나요?

 

어떻게 해서든 이들은 은혜를 행함으로 바꿔치기 할려는 시도입니다.
거짓영을 받은 거짓선지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참 선지자는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어디까지나 우연이다는 겁니다.

 

어쩔수 없습니다. 이들의 시대상이 과거 거짓선지자와 똑같이

어떻게 해서든 인간에게 희망과 평강과 긍정을 심어주기 위함이니까 말이죠.


결국 인간에게로
나 에게로 회귀 합니다.

무자아를 외쳐도 결국 무자아를 외치는 나에게로 회귀하니
나 를 아무리 죽여도 소용이 없더라 말이죠.
다시 의문이 되고 다시 모호함에 빠져

흐릿한 말만 반복할 뿐이지

또렷한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고 증거를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 56편을 보시면 이건 완전 딴판입니다.

그렇게 배부른 소리를 할 입장이 못 됩니다.

 

여기서도 반복이 되는데

 

(56:12, 개역)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56:13, 개역)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감사제를 드리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위에서 언급한 현대 철학자들이나 거짓선지자들이 긍정 희망 평강을 말하는게 아니라

 

노아가 홍수 심판으로 인해 감사제를 드린 것과 같은 맥락에서

참 잘 하셨습니다 라는 감사입니다.

 

싹 쓸어 버리니 참으로 후련합니다 라는 겁니다.

 

즉 이미 감사제가 전제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 감사제의 증상으로 벌어지는 사건이 바로 다윗죽이기 라는 겁니다.

 

심지어 놀라운 점은

다윗 조차도 다윗죽이기(자기부인)를 해야 이 감사제가 먼저 있었다 라는 것을

 

원수 너거들 몰랐지?? 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너 이것은 몰랐지롱 이라고 말이죠.
 

물론 그 원수 속에 다윗 조차도 포함 되었고 말이죠.

 

이것이 예수님의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반드시 십자가의 지혜에 어리석다 라는 표현을 앞에 붙이는 이유는

 

인간의 지혜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개입 속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나타난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그 인간의 지혜가 뭡니까?

현대철학자든 거짓선지자든

인간의 믿음이든 행함이든 모든 것이 다 동원이 되어서

발생되는 십자가 사건의 대립물 아닙니까?

그 속에는 인간의 트릭인 성화론도 있구요

인간의 믿음은 트릭입니다. 사기죠.

 

동원할수 있는 것 다 동원해 봐라 말이죠.

과연 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미련한 십자가의 지혜와

 

겨뤄 보자 말이죠.

 

그렇다면 이 십자가의 지혜 때문에

다윗은 원수로써

 

원수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다윗이라는 존재 보다 더 앞서 있는 당위인 겁니다.

 

결국 다윗의 기능은 즉 당위는

원수라는 죄인의 기능과

동시에 원수로부터 원수 취급받는

죄인으로부터 죄인 취급받는 죽임을 당하는 기능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기능이요

이것이 성도의 기능이요

이것이 성령받은자의 기능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십자가의 영이기 때문에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 지혜이어야

 

마귀가 덮썩 물려고 달려들거든요.

 

죄인이 되고 병들고 약하면

 

바로 달려들어서 덮썩 물어버립니다.

 

욥의 하나님에게 따지기는 그거야 하나님이 욥의 뒤를 봐주니까 그렇지요? 라고

절대로 게임 내기에 말려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승산이 조금이라도 있다 싶으면 바로 달려듭니다.

얼마나 적극적인 사고방식, 긍정적인 사고방식, 빅긍정 입니까?

 

마치 속이는 야곱처럼 하나님은 팥죽 한 그릇에

에서를 유혹하듯이 마귀를 유혹합니다.

 

내가 니를 너 보다 더 잘 안다 라는 식이지요. 하나님이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욥은 본의 아니게 이 마귀를 통과 패쓰 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미 욥에게서는 이미 포기된 믿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마귀를 패쓰 하는 것은 바로

욥이 본 한 인물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넘어선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이 분절되어 나타난 그 한 인물을 보고서

 

비로소

잿더미를 뒤짚어 씌고

머리를 땅에 쳐박고

생일을 저주하면서

 

나는 가짜이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그 분 때문에 말입니다.

 

그 분의 믿음만이 옳았지

 

인간의 믿음? 사랑? 으로는 택도 없는 마귀통과이다는 겁니다.

 

누가 죽음도 못 통과 하는 판국에 마귀를 통과 할 수 있겠습니까?

 

자 이렇게 원수로써 원수를 통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한 것이 없지요.

 

마치 시아버지 유다가 원수 됨으로서

죄인 됨으로써

 

간첩 뺑뺑이 돌리기 테스트를 하는 착고를 통과한 요셉의 시험을 통과 하듯이 말입니다.

 

그럼 시아버지 유다 자기가 시험 치른 겁니까?

아니지요? 자기는 한게 없지요?

 

그럼 누굽니까?

시아버지 유다로부터 죽임을 당해 다시 살아난 며느리 다말 아닙니까?

 

그 개같은 이방여자 때문 아닙니까?

그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가 유다를 살린 겁니다.

 

자 그럼 오늘 본문 다윗은 이미 감사제가 덮쳐버렸기 때문에

반드시 패쓰 할 수밖에 없는 것을 통과 하는 겁니다.

 

과정으로써가 아닌

목적지를 향해서가 아닌

 

이미 목적지에 도착했기 때문에

그 목적기에서 풀풀풀 피어나는 경과 장면을 다시 되새김하듯이 증상으로 누리는 겁니다.

맞아 맞아 이렇게 통과 경과했었었지 라고 말입니다.

 

이미 다 이루었기에

다 감사하기에

조건의 감사가 아닌 무조건적인 감사이기에 말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봐도 오늘 본문에 시간적인 순서상으로써는

감사라는 결과가 나올수 없고

 

또 기쁨이라는 것이 나올수 없고

 

또 평안이라는 것이 나올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감사와 기쁨과 평안이 원인 없이 결과로써 덮쳐져서 나오는 것이

후차적인 것이 바로 고난당하기

원수로부터 원수 취급당하기

죄인으로부터 죄인으로 몰리기 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왜 그런가? 구원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사건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늘 말로만 떠들어 대는 구원 개념은

쥐뿔도 아무것도 아니지요.

 

얼마나 시시하게 구원을 언급했는지

입이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구원사건은 그야말로 어마 어마 할 정도입니다.

 

우리가 먹고 살기 바빠서 걱정하는 걱정꺼리들을 한 순간에 다 날리고도 남을 정도로

 

그딴것들이 일체 심각한 꺼리에 포함 될수 없을 정도로

 

구원사건은 엄청난 것이다 라는 거죠.

 

심지어 목사든 선교사든 뭐 말로는 목숨 걸었다고 하는 자들도

다 엉터리입니다.

 

구원사건을 시시하게 다룹니다.

 

진짜 구원사건이라면

구원을 외치는 그 당사자가

오늘 다윗처럼

 

구원 때문에

전혀 구원 못받은자처럼 완벽하게 구원과 상관이 없는 자처럼 여김받을 정도로

 

구원 때문에 너덜 너덜 개털이 되어야 할 정도입니다.

 

? 그 정도로 엄청난 서건이기 때문에~~

 

몇 년전 일본 원전 사건도 사람들이 두려워 방사능이 올까봐 피해다닐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뭐 공상과학에서 성경의 종말론을 운운하면 핵전쟁도 엄청난 사건이다고 외칩니다.

 

그런거 구원사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증인은 결국 이 핵폭탄 보다 더 더 심각한 구원사건을 터트리는 자이다는 겁니다.

 

어떻게?

자기가 외치는 그 구원에 너덜 너덜 하게 찢겨지는 것을 증거하는 겁니다.

 

이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그래서 원수 되는 겁니다.

복음 때문에 죄인처럼 원수처럼 갈기 갈기 찢기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사울왕이 달려들어서 다윗을 갈기 갈기 찢는 것보다

압살롬이 달려들어서 다윗을 들들 뽁는 것 보다

원수들이 달려들어서 다윗을 삼킬려고 하는 것 보다

 

정작 복음이 나를 갈기 갈기 찢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셈입니다.

 

그 사랑이 그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를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겁니다.

 

오죽 사랑했으면~~~~~

 

너무 너무 사랑했으면 말이죠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8:33, 개역)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8:34, 개역)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종일 죽임을 당하게끔 하겠다는 것이 사랑 이다는 겁니다.

사랑이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는 겁니다.

 

? 넉넉히 이기니까?

 

그래서 감사가 기쁨이 평안이 이미 덮쳐서 나오는 결과가 바로 오늘 본문

 

다윗을 종일 죽임에 당하도록 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저들 원수들이 숨어있다가 비로소 모습을 구체화 합니다.

이 구원사건에 한마디 거들려고 비로소 나타납니다.

 

다윗이 종일 죽임에 당하게 되니까

다윗을 자신들도 손대는 겁니다.

 

참 신기하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나 봅니다.

몸이 건질 건질해서 미칩니다.

 

하나님도 저주하는 다윗인데

하나님과 같이 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 가만히 있다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성경말씀이 틀리게 되는 거죠.

 

그래서 반드시 나서게 됩니다.

반드시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모든 유대인은 나서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일까요?

구원을 구원 답게 하기 위한 구원사건이다 라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것이 감사요 이것이 기쁨이요 이것이 평안이기 때문입니다.

 

모순이요 이율배반이지요.

감사라는 조건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입니다. 원인 없이 말이죠

 

기쁨의 요소가 일체 없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기쁨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써 말이죠.

 

평안 곧 안식이 여기 어디 있습니까? 오히려 안식일 어겼다고 다들 죽일려고 달려드는 그 판국에

안식의 주인을 만나버린 겁니다. 이상하죠? 안식의 주인을 꼭 이럴 때 만납니다.

도저히 만남이 불가능한 만남을 누리게 됨으로써 안식 평안을 누립니다.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그러니 무조건 이유 없이 매일 매일 종일 죽임에 당하는 것이

도리어 무조건 이유없이 매일 매일 항상 기뻐하고 항상 감사하고 항상 평안할 수 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 보탬이 되고자 기뻐할려고 노력했거나

감사할려고 감사 감사 입으로 백만번 외웠거나

평안할려고 남과 원수 맺는 일을 피해 다녔다거나 했던

행함을 일체 한 적도 없습니다.

성화 될려고 한 적도 없는데

 

저절로 덮쳐진 겁니다.

 

이것이 구원 사건입니다.

 

(살전 5:15, 개역)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살전 5:16, 개역)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7, 개역)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8, 개역)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고후 6:10, 개역)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4:4, 개역)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것을 행해서 나오게 되면 오히려 모호합니다. 누구에게는 이렇게 또 다른 이에게는 저렇게 되는 겁니다.

또 언제까지 저런 상황이 될지 의문이 되는 겁니다.

 

오히려 누가 봐도

넌 근심하는 자야

넌 가난한 자야

넌 아무것도 없는 자야

넌 슬픔 뿐인 자야 라고 단정 지어 버리는 그 속에서

 

이율배반적으로

자기가 봐도 자기가 이해가 안되는

그 모순 속에서 누리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죽임을 당하는데 어떻게 기쁘냐 말이죠?

누가 이런 상황에 감사가 나오냐 말이죠!!

 

그런데 다윗은 감사제를 드린다고 합니다.

이 모든 원인은 감사제에서 나온 결과이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고 싶어서

그 구원사건을 증거하고 싶어서

너무 너무 외치고 싶어서

역설적이게도 착고에 상했던 요셉은

형제들을 간첩으로 몰아가면서까지

이 구원사건을 반복하는 겁니다.

 

요셉의 형제 아니 야곱의 아들들은 영문도 모른채

죄인으로 몰려

간첩으로 몰려

 

이 긍휼의 사건 곧 감사제

 

즉 성결제사인데

 

(8:20, 개역)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구원받은 것은 오로지 정결한 짐승을 잡아 죽임으로써 부정한 짐승을 살리는 방식이라는

어리석고 미련한 지혜를 보여주는 겁니다.

 

노아 홍수심판에서 살아남은 정결한 짐승을 살아남은 것이 무의해져 버리게

죽여 버리는 데

그 죽임의 피를 부정한 짐승에게 바르는 제사이다는 겁니다.

 

이 제사 때문에 벌어진 홍수심판이였다는 거죠.

 

피로써 덮어주고 가리워준 그 용서를 그 일만달란트 용서를

 

함이 비웃어서 함땅 애굽땅은 구원사건 의 마당터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함의 아들 가나안은

 

이 희생이 옳느냐? 인간의 권력(행함)이 옳느냐? 의 정복싸움이 되는 겁니다.

 

구원사건이지요.

 

그리고 그 가나안땅 약속의 땅에서 벌어지는 다윗사건은

 

오로지 이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만을 계속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의 행함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할수 있다 라는 사고방식과의 싸움이다는 겁니다.

 

자 이렇다면 역사란 곧 시간이란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의 때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인에게 잡힌 때입니다.

삼상21장입니다.

 

사울에게 쫓겨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아히멜렉에게 얻어 먹었습니다.

그 때문에 아히멜렉과 제사장 85명을 죽였고,

 

다윗은 가드와 아기스로 도망치는데

아기스의 부하들에게 잡혀 아기스 왕에게 끌려가.

침을 질질 흘려 미친척합니다.

 

그때 노래한 구원노래입니다.

구원 노래 말이 되나요?

신세한탄 노래가 아니라

원망의 노래가 아닌

구원 노래입니다.

 

그 때란

 

이 구원사건 구원전쟁의 반복이 되는 거죠.

 

그러니 무궁무진합니다.

 

역사(사무엘상 21)라는 마당터에 묵시사건은 엄청나게

허벌나게 나열되어 있는 겁니다.

주워먹기 바쁩니다.

 

보통 어마 어마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우주 보다 더 넓은 사건이

이 조그마한 지구 땅에서 벌어지는 겁니다.

그 어떤 다른 행성에서도 벌어지지 않은 사건입니다,

 

이것이 허벌나게 널려있습니다.

 

이런 대조이니까 이런 대립이니까

 

매일 매일 구경하기 바쁩니다.

 

시란 노래란

얼마전에 티비 강연에서 서동욱씨가 자주 나와 시에 대해서 언급했듯이

시야 말로 진리이다 라고 할 정도로

 

시편의 시는 진리를 노래 하고 있습니다.

어마 어마하고 굉장히 굉잔한 이 사건을 노래 곧 반복하고 있습니다.

마치 터져라 터져라 라고 이 다윗이 격는 상황을 너도 어서 빨리 당해봐라 라고

이 사건 상황을 저주하는 듯이 보이지만

정작 이것은 즐기고 누리는 입장 뿐이다는 겁니다.

 

제가 긍정적으로 의도적으로 바꾼게 아니라

성경 말씀이 이미 다 이루었기 때문에

이미 다 통과한 상황을 즐기듯이

 

금과 은 나에게 없어도 내게 있는 것 너에게 줄 것이니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나라

 

죽어도 산다 라고

 

다윗은 기쁘게 즐겁게 너도 이거 누리라고

주고싶어서 안달이 나서

 

이 사랑을 외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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