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확정된 찬양 (시편 57편)


 

이중 확정, 홈을 파는 찬양

 

죽으면 죽으리라, 무덤을 깨우리라, 죽음을 깨우리라

 


(시 108:1, 개역) 『[다윗의 찬송 시]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시 108:2, 개역)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 57:1, 개역) 『[다윗의 믹담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시 57:2, 개역)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시 57:3, 개역)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셀라)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시 57:4, 개역)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시 57:5, 개역)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시 57:6, 개역)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셀라)』

(시 57:7, 개역)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시 57:8, 개역)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 57:9, 개역)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57:10, 개역)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시 57:11, 개역)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삼상 22:1, 개역)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삼상 22:2, 개역)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시 142:1, 개역) 『[다윗이 굴에 있을 때에 지은 마스길] 내가 소리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무엇이 확증 되었다는 말일까요?

 

오늘 본문 시편 57편을 살펴 보면서

사실은 내가 시편 57편을 살펴 보는게 아니라

시편 57편이 나를 어떻게 살펴 보는지를 살펴보는 겁니다.

내가 읽는 시편 57편이 아니라. 내가 해석하는 시편 57편이 아니라

시편 57편이 나를 읽는 것이며. 시편 57편이 나를 해석하는 겁니다.

 

마치 말씀이라는 구원의 뿔이 나를 구멍을 뻥뻥내 버린다는 겁니다.

 

구원의 뿔이 나를 돌파 하듯 말입니다.

 

(삼하 22:3, 개역)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시 18:2, 개역)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그런데 읽는다는 주체는 나 이지

어떻게 시편 57편이 주체가 되느냐 말이죠.

그리고 그 시편 57편이 주체로써 어떻게 나를 읽느냐 말이죠?

병원에서 스캔하듯이 엑스레이. 시티, 엠알아이 촬영하듯이

영화찍듯이 하느냐 말이죠?

 

눈이라도 있나요? 카메라렌즈? 소리내어 읽어가는 입이라도 있나요? 스피커?

 

손과 발이 있나요? 그럼 다리도 없는데 어떻게? 움직일수가 없잖아요!!!

 

말이 안되죠

(물론 이미 말 되게 다 말했지만) 

 

아무리 봐도 상대적으로 자유는 나에게 있다고 여기지

말씀은 자유가 없다고 보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즉 팔과 눈과 손과 다리가 있는 것이 오히려

못 보도록 가리는 역설이 된 겁니다.
눈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 도리어 못 보도록 하는 괜히 있는 눈이다는 겁니다.
있으나 마나 한 눈이다 라고 밝혀버리는 것이 성경말씀이 나를 읽는 성경의 눈입니다.

자유가 있어 보이는 나는 정작 자유라는 것이 없이 철저하게 갇힌바 되었고

팔도 없고 눈도 없고 귀도 입도 없는 말씀은 정작 상대적으로 자유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거부하지만 말이죠

 

우리와 똑같은 이 다윗도 그렇게 생각 했었었엇습니다.

자유하다고

더 부축이는 촉매제가 임금이라고, 왕이라고 뭐든지 다 부릴수 있는 권세가 있다고
다들 부러워 하는, 왜? 뭐든지 다 가능한 자유가 가장 많은 자라고 보고 있으니까 말이죠.

(그러나 그 솔로몬의 황금 영광도 저 들풀과 같은, 빈들에 피는 백합화 보다 못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윗 꼬라지 한번 보세요

자유는커녕 도망치고 또 도망치고 또또또 도망칩니다.

 

도망치다 치다 안되다 보니

드디어 막다른 골목인 동굴에 까지 도망칩니다.

이제 갇혀 버렸습니다.

동굴 밖으로 나가면 사울왕이 칼을 들고 다윗을 죽이고자 딱 버티고 있습니다. 

 

이 무덤과 같은 동굴에서

이 죽음과 같은 동굴에서

 

무슨 수로 살아남을수 있을까요?

과연 구원이라는 것은 있을까요?


그런데 말도 안되게, 아니 제발 말 좀 되지 말라고 아예 뻔뻔스럽게 노골적으로

구원이 나오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질 뿐만 아니라

구원이 어딥니까? 아에 구원의 주인인 구원의 왕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 죽음의 동굴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나오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그 십자가에서 비로소 왕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런 왕 만이 진짜 왕이다는 겁니다.
죽음 속에서 죽음을 뚫고, 무덤을 뚫고, 새벽을 뚫고 나오는 왕 만이 진짜 왕 입니다.


지금 이 사건은 구원받은 이스라엘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애굽으로 부터의 구원 사건이 더 증폭 확장이 되어서
이제는 이스라엘이 강퍅한 애굽이고, 다윗은 남은자로써
동굴에서 구원이 나오는 겁니다.

사건의 판대기가 더 깊이 더 깊이 들어가

인간의 내부를 다 드러내는데 있어서

이스라엘 내부에까지 파고들어서 홈을 파고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속으로
다윗이 동굴인 무덤 속으로 파 묻혀 더 깊게 더 깊이 들어가게 되었는데
오히려 예수님은 주가 되시고 오히려 다윗은 왕이 됩니다.
정작 바깥의 자유한 자가 도리어 더 깊은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는 역전의 모습 같지 않나요?
밤새도록 굶주린 배를 못 채워서 잠도 못자는 자들로써 말입니다. 짐승이지요.

소위 구원받은자들 내부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이요

동시에 구원 사건입니다.
구원받은 자가 구원받은자를 핍박하는 사건으로써 하나는 가짜요 다른하나는 진짜이다는 겁니다.
물론 그들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닌 주님의 개입으로 인해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알다스헷 이라는 말은 멸망하지 않는다 라는 뜻으로 구원사건이다는 겁니다. 구원노래. 이중확정

참고로 지난 시간의 요낫 엘렘르호김은 멀리 광야의 상수리 나무 위의 침묵하는 비둘기 라는 뜻으로 고난이다는 거죠. 이중고난.

둘 다 같은 취지로써 이중적이다는 것은 결국 이 모든 것이 구원사건의 보충물로써 작용된다는 겁니다.)

 

이 살벌한 살기가 넘쳐나는 죽음의 한 가운데서 어떻게 구원이 있겠습니까?

이미 구원 자체가 말도 안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되지만 주님은 하신다는 겁니다. 

일부러 불가능성을 찾아서

일부러 단절된 상황을 만들어서

그 어떤 인간도 못하도록 차단하시는 겁니다,

더더욱 안되는 상황이어야만 주님만 홀로 돋보이시는 겁니다.

주님의 자작극인거죠.

십자가만 영광되게 말이죠.


자 그렇다면 말이 되게 구원을 이야기하는 오늘날 설교자들은 한마디로 말해서 마귀들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말이 되는 구원을 말한적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말이 되는 구원으로 구원장사를 하는 겁니다.
이것이 다윗을 죽일려는 동굴 밖의 자유하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시편 57편을 살펴 본다는 것은

눈이 있고 그 눈으로 본 것을 해석하는 뇌

또는 어떤 해석 담당기능을 가진 것이 있어야 해석할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눈 있다고 우기는 나, 즉 우리 인간은 

이 시편 57편을 해석 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시편 57편에게 묻습니다. 

물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시는 겁니다.

제발! 시편 57편아!! 해석 좀 해 줘! 라고

 

아니 시편 57편에 무슨 눈이 달려 있다고? 말하는 입이 있다고 알려달라 하겠습니까?

사람대하듯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듯이 그렇게 물어보겠습니까?

해석하는 기능이 있습니까?

 

그러나 처음부터 해석의 권리를 해석주체로 시편 57편에게 떠 넘겨야 할 판국이고

오히려 내가 눈이 있다고, 또 볼 줄 안다고 우기는 

그 눈은 무능(불임, 죽은태)하다고 외치는 식의

무능함을 외쳐야 할 판국인 겁니다.


거꾸로 봐야 합니다.

 

바로 이것을 확정하는 겁니다.

이것이 첫 번째 확정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순차를 매긴다면

일단 나는 안된다. 나는 죽은자다. 나는 뭘 해도 죄이고 해석도 엉터리이다 라는 확정.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라는 확정 말입니다.


(롬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없음] 이라는 확정 말입니다.

 

즉 우리가 확정 못 짖지요

그래서 말씀이 확정 짖는데

그것이 바로 다윗처럼 죽음 속으로 내몰리는

동굴 속으로 쫏겨나는 상황입니다.

 

왕의 위치에서는 절대로 확정 못합니다.

그 자유롭게 여겨지는

나는 눈 있다 코 있다 귀 있다 율법 해석 할 줄 안다

저 나쁜 놈을 율법대로 4배나 갚도록 해라

이렇게 율법 해석 할 줄 안다

 

라는 그 왕의 위치에서는 절대 확정 못짖는 것을

 

믹담 곧 죽음 속에서 고난 속에서

동굴 속에서 확정 짖습니다.


니가 그 나쁜놈이야 라고 나단선지자가 확정시켜주는 확정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확정

 

백번 만번 죽어 마땅한 자 이다는 겁니다.

왕 중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자 있겠습니까?

우리야 천한 천민이라서 그런 말을 수천번을 해도 이상할 것이 하나 없지만

왕이 저런 말을 하면 이상하잖아요~~~~

 

시편 57편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왕이 왜 저런 처지가 된 것이냐 말이죠?

왕인데???

이상하잖아요 ~~~

물론 앞으로 왕이 될 사람인데
진짜 이스라엘 왕이 될 사람이고
지금 이스라엘의 왕 사울왕은 가짜이다 를 밝혀내는 얼룩으로써 말이죠.
그런데 왜 저런 처지가 되냐 말이죠. 왕 될 사람이????

 

그래서 믹담

딱딱한 영원불변할 것 같은 그 권세 권력에

홈을 파는 겁니다.

땅굴을 파는 겁니다.


그 홈에서 진짜 왕이 나오는 겁니다.


이것이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왕이라는 최고의 권력에 홈을 파는

이 홈에서, 이 구멍에서, 이 동굴에서,

기존의 해석(왕=지혜)을 깨뜨리면서 등장하는 새로운 해석(왕=지혜)이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이 참성전이시다 라는 새로운 의미가 나올려면

기존의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와르르 무너짐을 통해서 나오는 겁니다.
헌 옷이, 헌 성전이 무너지지 않는데
어떻게 새성전이라고 의미를 붙일수 있겠습니까?

그래야 비교 곧 차이 구별 거룩 분별을 할수 있는 겁니다.

 

이것을 깨우는 겁니다.


새벽을 깨우듯, 죽음을 깨우듯, 마음을 깨우듯, 무덤을 깨우듯 말이죠.
 

이것이 확정된 겁니다.

나를 죽이시기로 작정 하신 겁니다.

다윗을 말입니다.


다윗 죽이기 확정 땅땅땅

 

확정하고 확정하는 이중확정으로써의 확정반복입니다.

 

시편이 인간에게서 해석된다면

시편을 어릴적부터 달달 외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리가 전혀 없습니다.


유대인도 해석 못하는 판국에

우리 이방인은 더더욱 단절입니다.

 

시편이든 그 어떤 성경이든 인간에게 해석 당할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말씀에 인간은 해석당해야 할 판국입니다.

 

해석하겠다고 나서는 놈 다 거부하세요!!!

 

그럼 처음부터 확정해야 할 것은 뻔뻔스럽고 얍삽하게 떠 넘겨야 합니다.

난 해석 할 줄 몰라 라고 떠 넘기세요


누구에게?

시편에게 말입니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 이율배반입니까?

시험을 쳐야 하는 수험생이 자신이 시험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시험 문제에게 [문제야! 답좀 알려줘?] 라고 하는 겁니다.

반칙이지요!

이게 말이 되냐 말이죠?


이런 말도 안되는 것에

더 말도 안되는 것이 벌어지는데!

답이 뭐니 라는 질문에 시험문제가 이렇게 대답을 하네요?

응 너는 이미 합격이야 무시험 합격!!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 입니까?

반칙인데 더 반칙인 반칙의 반칙 이중반칙입니다.

 

이것을 확정하는 겁니다. 참 말도 안되는 것을 제가 지금 말하고 있으니 원!!

 

그렇게 반칙으로 치사하게 유예시키듯 떠넘겨 버리면

더 놀랍게도 이 시편 역시, 누군가에게 떠 넘기는 것을 놀랍게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시편 반칙을 봐야 합니다.


응 너는 이미 합격이야! 나 시편이 누구에게 물어 봤거든!

누구? 

그 분이 넌 이미 합격이래!!


아니 답을 알려달라니깐?

아니 넌 이미 합격이라니깐!!


우리는 이 시편의 반칙을 눈여겨 봐야 합니다.

누가 보겠습니까?

누가 이런 말을 듣겠습니까?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우리인데!!!

 

문제 또한 답을 알려달라고 누구 누구에게 요청하더라 말이죠!!

 

시편은 누구에게 떠 넘기는 반칙을 벌리느냐?

 

예수님입니다.


어제 시편 50편의 말씀을 나누었는데

참 말도 안되는 것을 말할려고 하니 참으로 기가막히고 코가막히는데

그 기가막힌 것을 코가막히는 것을 즐기고 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벌써부터 감기는 걸려서리 ㅋㅋㅋ


1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가

2 하나님을 영화 롭게 하나니

3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4 하나님의 구원 보이시리라 


감사드려 ~~~~~


(시 50:23, 개역)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그런데 문제는 처음부터 감사드리는 자가 없다는 겁니다.

그럼 1번이 안되니까 2번 3번 4번 다 안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거꾸로 이미 구원시켜 놓고 구원사건을 터트리시는 겁니다.
시간적 순서의 해석이 깨어지면 인간은 해석불능입니다.
그 어떤 인간의 해석도 거부당하는 식입니다.

구원사건은 계시 곧 묵시사건입니다. 역사(시,공간) 속에 침략한 사건입니다.

네 맞습니다. 출애굽 구원사건이지요. 이 구원사건의 반복이 성경전체입니다.

그것도 그림자로써 실상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실상이지요.

구원사건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구원하는 사건의 반복입니다. 인간 아닙니다. 인간 구원 없습니다.


결국 거꾸로 이미 구원시켜놓고 거꾸로 3번 2번 1번을 이루시는 겁니다.

순서나 시간적인 의미가 아니라

무순서로써 사건적인 의미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4 구원이 되어버렸으니

3 의롭지 않는데 의롭다 하시고 로마서 4장이지요?

2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고! 정작 우리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라는 결과가 덮쳐졌고

1 이 모든 것이 감사함으로! (단 한 사람도 감사한 자가 없는데??)
 무조건으로 조건 하나 갖춘 것 없이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니 감사 아니하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또 시편 100편에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시 100:4, 개역)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그런데 역시나 마찬가지로 감사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니 그 문에 들어갈 자도 없습니다.


그런데 모순 되게도 그 문이 터벅 터벅 걸어와서 나를 통과 하는 겁니다.

그래놓고 그 문에 들어갔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해 버리는 겁니다.


감사해야 그 다음 순서로 그 문에 들어가게 되는데
거꾸로 문이 움직여서 나를 덮치게 되니까

감사가 아니 나오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즉 조건 갖추어서 나온 감사는 감사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원인은 감사하는 자가 아니라
문이 원인으로써 결과가 나타나는 겁니다.


그 문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시편에서 말하는 문은 예수님 곧 인물입니다.


이게 말이 되냐 말이죠? 


말이 되면 벌써 믿었죠

아무도 못 믿으니까

시편 대로 행하시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시편을 달달 외운)은 죽였고

비록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듯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친 우리를

아무 조건 없이 십자가에 용서하시겠다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겁니다.

시편을 말입니다.

즉 인간의 믿음은 오히려 믿음되신 예수님의 활동에 방해작용으로써 보충물 역할을 하는 겁니다. 즉 비언약적이다는 겁니다.


말이 간따나 안 되었는데 더 더 더 말이 안되는 겁니다.

이중 말 안됨


도저히 믿을 수 없도록 하시는 겁니다.

믿도록 만들겠다는 종교인들의 활동이 아니라~~


그래서 믿음의 세계,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마땅하다고 아멘 아멘 이중아멘이 됩니다.

 

마치 안식일이 안식의 주인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안식이의 주인인 거죠.

 

우리는 이 안식이의 주인에게는 관심 없습니다.

안식일 지키는 것에 정신팔려서

그저 안식일하고만 놀려고 하니까 말이죠.

즉 남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말입니다.

 

누가 봐도 충분히 시편은 시편을 해석할 수 있다고 여김에도 불구하고

정작 시편이는 절대 절대 해석을 하지 않고 해석 포기를 합니다.

 

찬양이가 찬양을 하지 않으면

그럼 누가 찬양 합니까?

찬양의 주체가 찬양인데????

그런데 찬양이가 찬양을 부인합니다. 자기부인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아무도 시편을 해석할 줄 모른다는 것이

 

두 번째로 확정이 됩니다.

 

사실은 두 번째도 아니죠. 우리가 편할려고 순서 매기는 것이지

그 정도로 모르기 때문에

사실상 동시다발적으로 무순차적으로 벌어지는 사건인 겁니다.

시간이 아닌 사건입니다. 사건

 

아무튼 이것이 기쁜소식입니다.

즉 사실상 인간에게는 가장 나쁜 소식인 거죠.

인간 단절, 인간 거부이니까 말이죠.

 

인간은 안된다 라는 것으로서의 기쁜소식 말입니다.
(이상스럽게 교회에서 이런 말을 진짜 싫어합니다. 특히 목사!!!

어떻게 해서든 희망을 주어서 동기부여해서 교회를 키워야 하는데 이런말들은 교회성장에 방해가 되니까
자꾸 버럭 버럭 화를 내더라 말이죠.)

다른 말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 소서 라는 확정이 기쁜소식입니다.

성화론자에게는 있을수 없는 일이지요.

그랬다가는 교회 말아먹어 장사 접어야 하니까 말입니다.

돈이 안되는 겁니다.

 

성경말씀 보다, 복음 보다, 인간에게 세상에서 가장 나쁜소식은 없습니다.

얼마나 확정적인지!

 

자 처음의 확정과 두 번째의 확정

 

이 이중확정의 반복이 되는 겁니다.

 

두 번째 확정에서 예수님께 떠 맡겨 버리는 시편을 보고

우리는 이제 희망을 보게 됩니다.

진짜 제대로 된 희망을 비로소 보게 됩니다. 기쁜소식입니다.


참소망은 이제 인간에게는 없고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 시편을 이루시는가를 말입니다.

 

시편대로 행하시는 예수님을 주목, 자세히 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을 갈망한다면 말입니다.

찬양을 갈망한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찬양을 할 줄도 모릅니다.

그런데 찬양이 찬양 스스로가 노래 부르지 않고

찬양이 반칙을 벌려서 난 찬양 못해요 라고 찬양이 찬양못한다고 하는

그 단절성을 뼈저리게 외치는 그 단절을 보고서

 

그럼 찬양이가 누구에게 찬양을 떠맡겨 버리는가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찬양할 수 있는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그 동안 우리는 성전을 대충 대충 봤듯이

찬양도 대충 대충 봤습니다.

입이 있어서 나도 노래 부를 줄 안다고 여겼던 겁니다.

인간의 손으로 충분히 성전을 지을줄 안다고 우겼기 때문입니다.

어쩔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눈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자세히 봐야 합니다.

그 성전이 참성전이신 예수님 아닙니까?

참성전이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가짜성전이 대세를 이룬다는 전제 속에서

우리는 가짜성전만을 보고 있었지

참성전을 대충 본 겁니다. 아예 안봤던 겁니다.

 

시편은 외칩니다. 성전을 자세히 보라고

똑같이 역시나! 찬양을 자세히 보라고
찬양이가 찬양하고 있는 그 분을 말입니다.
유대인이나 우리나 자꾸 엉뚱한 것을 찬양하고 있는 겁니다.
즉 자기구원을 노래 부르고 있습니다.
왜 유대인들처럼 자기 구원을 노래할까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는 노래는 사실상 우리의 본색을 드러내는
우리가 늘 나발불듯이 부르는 노래였다는 겁니다.

저 나쁜 놈 보다 나는 괜찮은 자이다 라는 노래!

눈이 어둡다면 더 자세히 봐야 합니다.

소경일지라도 더욱더 자세히 말입니다.

 

(시 48:12, 개역) 『너희는 시온을 편답하고 그것을 순행하며 그 망대들을 계수하라』

(시 48:13, 개역) 『그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

 

성전을 자세히 보듯이

찬양을 자세히 보니까

 

찬양이가 찬양이라는 기능을 거부한채로, 해석불가라고 확정한채로

누군가에게 떠넘겨 버리는 반칙을 벌리는 겁니다.

 

누구에게?

 

난 찬양 할 줄 몰라요 난 무지 무지 노래부를줄 모르는 음치 박치예요 대신 불러주세요 라고

단절이라고

나는 벙어리 라고

 

누구에게 떠 넘겨버리는 겁니다.

 

찬양이가 벙어리가 되어버리면

아무도 찬양할수 있는 자가 없어져 버리는데!!

 

이것을 분명히 해 놓고서는, 확정 지어 놓고서는

 

그 찬양이가 저 분은 유일하게 찬양자 라고 외치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라는 겁니다.

찬양이 조차도 예수님에게 모조리 모든 찬양을 떠맡겨 버리는 겁니다.

 

찬양이가 제발 예수님 찬양을 불러 주소서

찬송케 하소서 라고 말이죠.

 

찬양은 오히려 찬양을 포기해 버리고(이것이 첫 번째 확정이고)

이 찬양이는 예수님께 제발 찬양해 달라고

자신의 기능을 예수님에게 치사하게 떠넘겨버리는(두 번째의 확정)

 

이 이중확정으로써


왜 예수님이 찬양자인지

주께서 부르시는 찬양을 들음으로써

 

듣기만 했을 뿐인데

우리는 찬양에 동참 참예케 되는 겁니다.


여기에 새벽이도 동참하고

비파와 수금이도 참예하고

모든 피조물들이 잠에서 깨어나 연합하여 외치는 겁니다.

즉 오히려 도저히 찬양할 수 없는 자로써 말입니다.

분명히 찬양할 수가 없는데

돌이 무슨 입이 있습니까?

그런데 돌들이 소리를 지르는 겁니다. 고래 고래 큰 소리로 외치는 겁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찬미를 하는 겁니다.

어린아이가 노래를 불러봤자? 듣낄라 말라 한데

젖먹이는 더더욱 들리지 않을 텐데

이들의 찬미가 천궁에 울려 퍼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무시할 수밖에 없는 노래이기 때문에 찬미하는 겁니다.

 

물론 이율배반이지요

노래가 안되는데 노래가 되는 겁니다.

찬양이 안되는데 찬양이 되는 겁니다.

불가능한데 그 불가능성이 가능성이 바뀐적도 없는데 이상하게 누리는 겁니다.

부정을 부정하는 이중부정인 겁니다. 부정의 부정입니다.

알다스헷 멸망치 않는다. 그냥 구원된다 카면 될 것을

멸망이라는 부정을, 않는다 라는 부정으로써 이중부정으로 의도적으로 만드시는 겁니다.

 

(마 21:16, 개역)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똑같이 의도적으로 부정당하는 자를 앞세워서

모든 이들이 무시하기 때문에 온전케 하시는 겁니다.

무시하지 않는다면 온전케 할 이유가 없는 거죠.

 

누가 이들의 찬미를 찬미라고 여기겠습니까?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부정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찬미를 온전케 하시는 겁니다.

그 부정을 부정케 하는 온전이다는 겁니다.

(구스여인이라는 누가 봐도 부정한 여인을 부정하다고 미리암을 대표로해서

이스라엘의 내막을 들추어내신후

구스여인처럼 부정한 여인이 온전케 되는 온유함으로

미리암 또한 부정 속에 집어넣었다가 다시 그 부정을 부정하는 온전케 하심으로

긍휼 속으로 들어오게 하시듯이 말입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무슨 노래를 할 줄 안다고? 라는 사고방식이 팽배해진 그 상황에서 말입니다.

 

그러니 벙어리와 귀머리거리 소경이 찬미한다는 것은

무시받는 것들을 통해서만 영광받겠다는 겁니다.

 

(사 61:1, 개역)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사 61:2, 개역)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 61:3, 개역)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입이 있어도 벙어리가 된 냥 그의 이름을 부른적도 없는 이방인인데

 

(사 65:1, 개역)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이것이 첫 번째 확정인데

즉 단절인데

 

언제 그랬는냥 모순적이게도 예수님께 떠맡겨 버리니까

이것이 두 번째 확정으로 명료해 지니까

 

우리는 비로소 주의 이름을 찬양케 되더라 말이죠.

 

그 어떤 연결점이 있었던가요?

성화가 되어서?

열심을 내어서?

행해서?

율법을 지켜서?

그 어떤 것도 없이

원인 없는 결과로 두 번째가 확정된 겁니다.

 

처음은 얼마나 비극적입니까?

입이 있어도 부를수가 없습니다.

찬양을 불러도 다 엉터리였다는 겁니다.

뭘 해도 다 죄였다는 겁니다.

뭘해도 삑싸리입니다.

 

마치 죽은자와 방불하여

벙어리처럼 노래를 부를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찬양자라고 하는 이스라엘이,
이 이스라엘 조차도

 

(사 43:21, 개역)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벙어리가 되어버린 이 다윗을 놀려먹습니다.

노래도 못 부르는 벙어리라고 얼레리 꼴레리
다윗은 벙어리래요 벙어리래요


음치래요!! 박치 래요!!
 

예수님에게 마저도 놀려먹습니다. 비웃고 가위바위보 게임하듯 제비뽑기를 하는 겁니다.

 

(시 22:16, 개역)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시 22:17, 개역)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시 22:18, 개역)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마 27:42, 개역)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맞습니다. 아무도 다윗을 저런 상황에서는 찬양못할 거야 라고 단정해 버립니다.

고럼 고럼 어떻게 저런 상황에서 즐거운 노래를 부를수 있겠어?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도 거들또 안보고, 보도 않는데 말야

 

모든 인간의 탐욕이 예수님을 찬양하지 못하도록 입을 꿰메고서 비웃습니다.

이제 예수는 찬양할 수 없을 거야?

저렇게 입을 꿰매버렸는데 어떻게 찬양할 수가 있겠어?

 

자기도 못 구원하는 판국에 뭐 남을 구원해?

너 자신부터 구원해봐? 그럼 믿어줄게?

그럼 박수쳐 줄게

 

(시 72:19, 개역)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

(시 89:52, 개역)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아멘 아멘 해 줄게?

노래 불러봐 노래!


이것이 우리의 확정된 본 모습입니다.
 

무슨 수로 노래를 부를수 있겠니?

입을 불로 지져 버렸는데!!!

 

(시 57:4, 개역)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시 57:5, 개역)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시 57:6, 개역)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셀라)』

 

이런 내막을 다 들추어내는 것이

자 이것이 참된 찬양자의 모습입니다.


진짜 찬양은 인간의 찬양이 왜 거짓인가를 다 들통내는 가운데서

그들이 넌 노래 부를줄 모르지 라고 비방했던 그 이방인을

새로운 찬양자로 삼아버리는 겁니다.

여전히 벙어리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음치 박치인데도 말이죠.

찬양자로 삼아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부활의 권세입니다.

왜 부활되신 예수님께 참예시키느냐?

찬양자로 만드시고자 말이죠.


새벽을 깨우듯이 이 부활의 권능은

새벽이슬같은 청년처럼 예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나오는 겁니다.


그들 새벽 이슬같은 청년이라는 찬양자는 예수님이 새롭게 만든 찬양자였던 겁니다.

예수님 자신을 찬양하라고!!


어디서? 해골 언덕 골고다에서 찬양자가 말입니다.

땅굴에서, 아둘람 굴에서 말이죠.


(시 110: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시 110:2, 개역)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시 110:3, 개역)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결국 참된 찬양자(예수님)가 먼저 있었고(찬양이 보다 먼저 있었고, 시편 보다 먼저 있었고)

그래서 시편은 먼저 있는 예수님에게 떠 넘겼고

후차적으로 이 예수님을 돋보이도록 하기 위한, 영광되게 하기위해,

이들의 조롱이 후차적으로 발생하는 겁니다. 

참된 찬양자의 등장의 증상으로써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시간 속에 갇혀있다 보니

사건의 발생을 조롱이 먼저이고

찬양자가 뒤에 나온다고 보고 있겠지만 말이죠.

역사 곧 시간 속에서는 행함의 시선에서는 거꾸로 인 겁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아무도 모르는 거죠. 그렇다면 손때라 말입니다.

 

(롬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넉넉히 이겼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이

역사의 거꾸로

바로 종일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도저히 찬양을 부를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찬송이 울려 퍼지는~~~~

이 불가능성을 누리는 겁니다.

 

자칭 찬양자들의 등장 때문에 찬양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주변의 분주한 활동을 가시화, 발생 시키는 

그 얼룩이 진짜 찬양자 이다는 겁니다.

 

참선지자와 거짓선지자의 대립도 이와 같은 식입니다.

 

이것이 분명하게 확정 되도록 또렷하게 드러내시는 겁니다.

 

자 그럼 이제 아무도 저 다윗은

저 예수는 이제 찬양 할 수가 없어 라고 마치 불쌍한 냥 쳐다보겠지만

 

사실은 그렇게 불쌍하게 쳐다보는 자들이

다윗을 벙어리로 만들어 버리고

예수님의 입을 꿰매버리듯 갈기 갈기 찢어버렸던 겁니다.

 

맞습니다. 이제 찬양 못합니다.


찬양이 가능한

찬양 조건이 갖추어진 그 상황에서의 찬양은 가짜입니다.

도저히 찬양이 불가능한 그 상황 속에서

나오는 찬양이어야 진짜 찬양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이 찬양자로 삼는 식인 겁니다.

벙어리 귀머거리 소경이 찬양자일 줄이야 ~~~~~


창기 세리 강도가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갈 줄이야!!! ~~~~


분명 못합니다.

제비 뽑는 저들이 옳았습니다. 찬양못하도록 만들어 버렸으니

찬양 못하는게 맞습니다.


(마 27:35, 개역)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눅 23:34, 개역)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요 19:24, 개역)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동굴 속에 갇혀 버렸습니다.

이제 멸망 뿐입니다.

바깥에는 사울왕이 군사들과 함께 칼을 쥐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독안에 든 쥐 신세입니다.

삼상 22장 아둘람 굴로 피신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찬양이 흘러 흘러 넘쳐서 대방출 됩니다.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소리요, 노래요, 찬양일까요?

 

찬양이도 자신은 노래 못 부른다고 치사하게 자기 사명을 포기하고

예수님께 떠맡겨 버렸는데

도대체 찬양이 어디서 나오냐 말이죠.

 

왜 떠맡기는고 자세히 보니

사람들이 예수님의 입을 꿰매버렸기 때문입니다.

단절성을 분명히 확정시키는 겁니다.

 

즉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찬양이 조차도 찬양을 예수님께 떠맡기는데 있어서

예수님은 정작 찬양할 수 없는 입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찬양이는 더더욱 [그렇게 때문에] 찬양을 떠 맡겨 버리고 있으니

불가능에서 더더더 불가능으로 나아간 셈입니다.

 

헛짓한거 아닙니까?

실패한 것 아니냐고요!!


허무하게 실패 했습니다.

쫄딱 망해서 십자가에 죽어버렸습니다.

 

멸망 맞지 않습니까? 명말 맞습니다.


그런데 왜

 

알다스헷 멸망 당하지 않는다 라고 할까요?


앞의 확정과 뒤의 확정이 서로 모순되어서 발생하는 그 충돌 속에서

그 둘 사이의 충돌 속에서

 

이 동굴 속에서 상상도 못했던 이스라엘이 나오는 겁니다.

남은자가 나오는 겁니다.


거꾸로 이미 구원한 상태에서 그 구원의 증상으로 감사로 제사 드린다고 하니까?

그럼 이미 구원한 상태는 인간에게서는 그 어떤 조건도 안 본다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주님 마음대로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순서적으로 역사적 시간적으로 

1 감사로 제사 2 하나님을 영화롭게 3 그 행위를 올게 여김받는자 4 하나님의 구원 얻음

이렇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이 순서를 지킬려고 한다는 자체가 바로 인간 지마음대로인 반칙이다는 겁니다.

기록된 대로 행하는데 뭐가 잘못이냐 라고 따지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숙제이지 너의 숙제가 안된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막혀서 감사할 인간이 없거든요

즉 갇힌 꼬라지 밖에 안되는 겁니다.


시간이 아닌 사건이기에


이 사건으로써 구원이기에

이미 구원으로 시작하시는 주님이다는 겁니다.

여기서 남은자 개념이 나오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실패했는데

그 실패한 이스라엘 속에서

왕이 나오는 겁니다.


동굴 속에 갇혀 버린 다윗은 실패 했고

성공의 조건을 다 갖춘 사울왕은 동굴밖에서 칼 들고 다윗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다윗에게 다 뒤짚어 씌우는 쪽박차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상황입니다.

완전히 배불러 터진 입장입니다. 작반하장인데~~`

인간 지 마음대로의 저 순서대로 지켰다고, 성공했다고 우기는 식인 거지요.

 

엘리야가 바알 아세라 850 대 1로 싸워 이겼다 그런데 왜 나만 남았나요?

라는 것에서는 남은자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헌 이스라엘입니다. 행함의 세계이지 은혜의 세계가 아닙니다.

내 열심히 특심인데 왜 나만 남았습니까?

이것이 오히려 육적 이스라엘의 한계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배경바탕화면으로 깔고서 진짜 이스라엘을 뽑아냅니다.

이스라엘 속에서 이스라엘을 말입니다.

 

주님은 엘리야 혼자 그 심각한 상황에 

원망하듯이 따지는 그 부정함을 

부정(전복시키는)하는 7천이라는 남은자를 말씀하시니까!

심각했던 것이 갑자기 웃음보따리의 개콘이 되어버리듯 채널돌리기를 하시는 겁니다.

입이 쑥 들어가는 겁니다. 너무 너무 초과잉이라서 족히 비교도 안되는 겁니다.

 

그럼 이 7천은 어디서 나와야 합니까?

 

나만 남았나이다 라는 확정

이것이 믿음이 아닌데 믿음이라고 우기는 그 행함을 돌출시켜서

그것을 깨뜨리는

그 죽음의 권세

죽기를 무서워 평생 종노릇하는 행함의 세계를 깨뜨리는

무덤을 돌파해서 해체하는 파 해치는 그 확정 속에서

 

상상도 못했던 새이스라엘 남은자가 나오는 겁니다.

 

누가 다윗이 도망치다 도망치다 피신한 저 아둘람 굴에서 어떻게 남은자 라는

새이스라엘을 이스라엘 속에서 뽑아내느냐 말이죠?


아둘람 굴에 다윗이 숨었다고 하니까

정상적인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모였는데 400명 가량입니다.

그 속에서 왕이 등장하는 겁니다.

다윗이라는 왕이 말입니다.


마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라고 했던 나다나엘의 말처럼

참이스라엘은 아무도 예상못한 장소 

곧 틈에서 홈패임 속에서

아둘람 동굴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나오는 겁니다.


(삼상 22:1, 개역)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삼상 22:2, 개역)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그 뒤의 사건이 지지난 시간에 올린 내용인 아히멜렉 제사장과 85명의 제사장이 사울왕으로 부터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안식일 논쟁에서 언급했습니다. 안식일, 주일성수를 어기는 예수를 막아라 (시편 52편))



누가 봐도 실패한 장소

누가 봐도 부정한 장소

누가 봐도 멸망한 장소에서

골고다 해골의 언덕

죽음 속에서

십자가에서

왕이 나오는 겁니다.


마치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다가 새이름을 얻고 허리가 부러지는데 그 허리 부러진 틈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낯선 존재가 나오듯이 말입니다.


바로 이런 육적 이스라엘과 대비되는 틈(사건흔적,홈패임)에서 나온 이 다윗정신(남은자)을 기준으로 해서

 

이 정신으로 다윗이 죽고 난뒤에 이스라엘을 참선지자들이 이어서 가는 겁니다.

아니 끊어졌는데, 단절이 되어 차단이 되었는데 어떻게 이어갑니까?

단절인데!!!


원인 없는 결과 입니다. 7천명 남은자처럼 초과잉입니다.


물론 거짓선지자는 끝까지 행함의 정신으로 이스라엘을 유혹하니

안 넘어가는 이스라엘백성이 없지만

주님은 오로지 이 다윗언약중심으로

이스라엘이 쫄딱 망해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이끌어 가시는 겁니다.

 

(미 1:15, 개역) 『마레사 거민아 내가 장차 너를 얻을 자로 네게 임하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라』

 

이스라엘이 없는데?

그런데 남은자는 마치 7천명처럼 있는 겁니다.

엘리야가 아무리 눈씻고 들따 봐도 이스라엘에게 남은자는 없는데 말이죠

 

동굴에 다 숨겨 놨습니다. 니 눈만 눈이냐 말이죠.

 

끝까지 안 보여 줍니다. 이미 믿음의 눈으로는 다 봐 버렸는데

행함의 눈에는 절대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확정적인 모습을 보고서 깜짝 아니 놀랄수가 없는 겁니다.

 

확정 되었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이스라엘 본인들의 행함으로는 도저히 이룰수가 없다는 겁니다.

역설적이고 모순적이지요?

이스라엘 조차도 안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데 있어서 이스라엘은 하등 그 어떤 보탬도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움직이는 것은 이스라엘 본인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숙제는

이스라엘이 손 때야 할 판국이고

오로지 뻔뻔스럽게 떠 넘겨버려야 할 판국입니다.

나 같은 죄인 좀 어떻게 해 주세요 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을 뿐이였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직접 찬양을 다 이루시는 겁니다.

아무도 이룰수 없었던 찬양을

아무도 이룰수 없었던 시편을 말입니다.

 

다윗은 찬양자입니다.

노래를 잘 불러서가 아니라

 

(사 43:21, 개역)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입이 없어도 벙어리가 되어도 반드시 부를 수 밖에 없는

구원사건을 구원의 이름을 만나 버렸기 때문에 찬양자입니다.

 

예수님의 편파적인 십자가의 용서가 덮쳐져서

후차적으로 역사 속에서는 앞서 나타난 증거물이 다윗입니다.

 

그래서 원수들은 구원의 이름을 못 부르도록 입을 찢어버렸는데도

찬양자의 찬양을 막을수가 없습니다.

입을 막았는데 어디서 소리가 새어나오는지

찬양자 다윗 조차도 놀라는 겁니다.

 

나는 소리요 빈들에서 외치는 소리 이다 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말입니다.

 

요낫 엘렘르호김 침묵의 비둘기일 뿐인데

지지배배 지지배배 구구구구구 라고 노랫소리가 궁창을 울리는 겁니다.

진동을 해요 진동을 ~~~~

 

누가 자기자신을 소리 라고 주장합니까?

소리는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것이고

잡을수도 없고

물 흐르듯이 흘러서 사라져 버리는 바람인데?

누가 바람을 잡을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리이다 라고

왜 너는 왜 소리인데?

이 분을 소개하기 위한 스피커이다는 겁니다.

외침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더더욱 이중 확정으로써

그렇다면 주변에서 이 찬양자의 찬양을 가만히 둘까요?

소음공해라고 온갖 방해로 경찰에 고소를 하고

어떻게 해서든 방해를 한다는 겁니다.

 

이 얼룩을 제거할려고 달려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입을 찢어버리고

입을 꿰매버리고

목을 쳐서 벙어리로 만들어 버리는 상황을

 

찬양자 이기 때문에 주변의 활동들이 이 찬양자의 보충물로써 작용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찬양이 흘러 넘치는 겁니다.

 

얼룩이 더 크게 되어서

얼룩이 전체 아름다운 그림을 다 덮어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더 아름다운 그림이 되듯이

아름다운 찬양이 되는 겁니다.

 

막을려고 했던 것이, 제거, 삭제 할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더 확장 증폭기를 더 크게 키우는 꼴이 된 겁니다.

 

즉 처음 확정과 두 번쩨의 확정 사이에

 

반드시 찬양을 없애 버리는 배치물들의 등장이 있다는 겁니다.

 

그럼 이제 찬양은 없고 빈공백만 있습니다.

찬양을 모조리 다 없애버렸거든요.

이제 아무것도 없습니다.

빈터입니다.

십자가에 죽여버렸습니다.

찬양자도 없고 찬양도 이제 사라졌습니다.

없습니다.

 

 

그런데 이 무가

 

오히려 더 크게 노래를 부릅니다.

무찬양자 무찬양이

 

유찬양보다 더 큰 찬양으로써의 무찬양이 된 겁니다.

 

유찬양자 보다 오히려 더 큰 비찬양자가 입도 없는데 더 크게 하늘에 까지 울려퍼지면서

하늘을 진동케 하고 있는 겁니다.

 

하늘을 진동케 하는 찬양소리 들어본적이 있나요?

 

이 찬양이 나에게 들려야 합니다.

이 찬양이 나의 온 몸을 떨게 해야 합니다.

 

이 찬양이 나를 해석하고 나를 노래하는 겁니다.

내 온 몸 구석 구석 진동케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내가 부를 노래는 이제 없습니다.

 

노래가, 찬양이가, 나를 부르는 겁니다.

 

어떻게 부릅니까? 불가능한데 말입니다.

 

이 불가능성을 누리는 겁니다.

 

이 두 이중 확정 말입니다.

 

우리는 불임자로써 만국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을 압니다.

우리는 죽은태로써 만민의 어머니인 사래를 압니다.

우리는 벙어리로써 시편기자인 찬양자 다윗을 압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한 자로써 구원자 예수님을 압니다.

 

자기 하나 구원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십자가에 달려 죽은자가 구원자가 될수 있습니까?

어떻게 불임자가 믿음의 조상?

어떻게 벙어리가 찬양자가 되느냐 말이죠?

 

말도 안되는 것을 우리는 누리고 즐기며 노래부릅니다.

 

가능성으로 바뀌어 진 것 하나 없습니다.

 

여전히 불가능성이며

앞으로도 계속 불가능성 뿐입니다.

 

이 불가능성을 누리는 겁니다.

 

찬양?

 

불가능 합니다.

 

억지로 부를 필요도 없습니다.

시편 억지로 외우지 마세요

 

불가능할 때 나오는 노래가 참 노래입니다.

 

충분히 가능할때가 아닌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누구도 우리를 찬양자로 못 만듭니다.

불가능 합니다.

 

찬양을 가르쳐 줄 자도 없습니다. 성가대 지휘자?

 

심지어 찬양이도 찬양을 포기했습니다.

 

네 맞습니다. 포기 합시다.

우리는 입이 있어도 부를줄 모르는 벙어리입니다.

찬양 포기를 확정 합시다.

 

얼마나 찬양을 우리가 시시하게 봤으면

찬양하겠다고 덤벼드냐 말이죠.

 

그 불가능한 찬양을 불가능함에 대한 확정을 분명히 합시다.

 

자 이제 우리는 벙어리요

입이 찢어진 자입니다.

우리는 진짜 찬양자를 싫어했고

아무도 그의 찬양을 들을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싫어했고

고개를 다 돌려 버렸습니다.

듣기 싫다고 귀를 막기 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입을 찢어버렸고

입을 꿰매버렸으며

소리가 도저히 나올수 없도록 모든 기능을 정지시키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버리기 까지 했습니다.

 

이제 찬양 없습니다.

 

찬양 사망 ~~~~~~~~~~~

 

 

그런데 말입니다.

 

찬양이 더 이상 없도록 사망시켜 버렸는데

찬양이에게 7천번의 목숨이 있는냥

아무리 죽여도 죽여도 죽지를 않더라 말이죠.

 

분명 사망했잖아요

찬양은 사망했었거든요.

 

그런데 일어나더라 말이죠.

 

오히려 더 크게 외치는 겁니다.

 

내 마음아 확정하라

내 마음아 분명하고 또렷하게 확정하라

 

(시 57:7, 개역)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시 57:8, 개역)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 57:9, 개역)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 57:10, 개역)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시 57:11, 개역)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할테니

죽었는데? 어떻게?

 

그러든 말든

 

비파야! 잠에서 깨어나라! 넌 딩가 딩가 줄을 치고

수금아! 죽음에서 일어나라! 넌 아름답게 튕기어라

 

새벽아 너는 노래 불러라

어서 깰지어다 새벽이여

 

무덤아 깨어나라 죽음아 깨어나라 잠에서 일어나라

 

(엡 5:14, 개역)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시 108:1, 개역) 『[다윗의 찬송 시]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시 108:2, 개역)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 108:3, 개역)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열방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시 108:4, 개역) 『대저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 위에 광대하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 미치나이다』

(시 108:5, 개역)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시 108:6, 개역) 『주의 사랑하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꼬끼오 ~~~~~~~~~~

꼬끼오 ~~~~~~~~~

꼬끼오 ~~~~

 

죽은자여 잠에서 일어날지라

 

사망아 너가 이겼다고 하는 증거가 어디있느냐?

너가 쏘아 죽인 자가 어디있느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매???

 

시체 어디있노 시체????

 

무덤 어디에 있노? 묻었다매?

 

돌문이 열렸는데?

 

증거를 대라 증거를 ~~~~~~~

 

(고전 15:55, 개역)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6, 개역)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 15:57,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8, 개역)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힘을 다 쏟아가면서 겨우 겨우 죽였는데

사망이라는 무기가 졸지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오히려 찬양을 더 크게 볼륨을 올려버린 식이 되어버렸으니

 

이 어찌 노래 부르지 않고 배길소냐?????

 

이 구원사건은 지금도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다윗처럼 노래 부를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노래 못 부를 위치요

노래를 도저히 부를수 없는 처지이고

노래가 불가능한 벙어리요

원수들에게 입이 찢겨진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더 크게 외쳐지는 이 불가능한 찬양을 부를 수밖에 없는

 

찬양하기가 아닌

 

찬양자로 태어난 겁니다.

 

이것이 찬양자로 태어난 자의 영광스러운 운명입니다.

 

다윗이 처한 상황이 남이 처지가 아닌 이유이기에

 

 

멸망치 않는 노래를 벌써 멸망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든 말든 상관없이

 

십자가의 용서를 노래 부르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 하셨다고 ~~~~

 

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고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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