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부메랑, 악의 평범성 (시편 64)

 

부메랑을 피하는 기술


 

(64: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하나님이여 나의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64:2, 개역) 주는 나를 숨기사 행악자의 비밀한 꾀에서와 죄악을 짓는 자의 요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64:3, 개역) 저희가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64:4, 개역) 숨은 곳에서 완전한 자를 쏘려 하다가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않도다

(64:5, 개역) 저희는 악한 목적으로 서로 장려하며 비밀히 올무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보리요 하며

(64:6, 개역) 저희는 죄악을 도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64:7, 개역) 그러나 하나님이 저희를 쏘시리니 저희가 홀연히 살에 상하리로다

(64:8, 개역) 이러므로 저희가 엎드러지리니 저희의 혀가 저희를 해함이라 저희를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

(64:9, 개역)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64:10, 개역) 의인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56절을 아주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64:5, 공동) 저들이 악독한 일을 마음에 품고 아무도 모르게 올가미를 치면서 "누가 눈치를 채랴?"

(64:6, 공동) "누가 감히 우리의 비밀을 알랴?" 하지만,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을 보시는 이가 알아채시니

 

(64:5, 쉬운) 그들은 서로 나쁜 짓을 하라고 부추깁니다. 그들은 숨겨 놓은 덫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고 누가 이것을 알 수 있겠어?”라고 말합니다.

(64:6, 쉬운) 그들은 못된 짓을 꾸며 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기막힌 생각이야!” 사람의 마음과 생각은 정말로 알기가 힘듭니다.

 

(64:5, 킹흠정) 그들은 악한 일로 서로를 격려하고 몰래 올가미들을 놓으려고 대화하며 이르기를, 누가 그것들을 보리요? 하는도다.

(64:6, 킹흠정) 그들은 불법들을 탐구하며 부지런히 찾나니 곧 그들 각 사람의 속생각과 마음이 깊도다.

 

(64:5, 현대인) 그들이 악한 일에 서로 격려하고 함께 모여서 덫 놓을 곳을 의논하며, `누가 그것을 볼 수 있겠는가?' 하는구나.

(64:6, 현대인) 그들은 악한 계획을 세우고서 `우리가 묘안을 생각해 내었다.' 하니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64:5, 현대어) 꾸미느니 못된 계획뿐이면서도 잘해 보자고 서로서로는 등 두드려 줍니다. 어디에다 올가미를 놓으면 좋을까 머리를 맞대고 꾀를 짜내며 이르기를 `아무도 이 올가미를 찾아내지 못하리라' 하며

(64:6, 현대어) `우리가 짜낸 이 계획이 잘못될 리 없지. 역시 머리가 좋아야 좋은 계획을 세울 수 있는 법이지' 지껄여 댑니다. 못된 궁리만 하고 있습니다.

 

 

악의 연대기 라는 영화를 보면 의외로 누구에게나 벌어질수 있는 평범성을 느끼게 됩니다.

악이란 너무 너무 평범하기 때문입니다.

 

5, 6절을 보면서 우리는 마치 저런 악인과 같은 입장이 아니다고

우와 저런 악한자를 봤나 정말 정말 나쁜 생각을 저렇게까지 하다니 라고

정작 이 구절을 읽는 본인들은 저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냥

또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인냥 자부하면서 거부감을 가진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저런 가해자인 악의 모습이 아니라
다윗처럼 피해자의 위치에 놓여졌다고 자기자신을 미리 위로해 버립니다.

 

그런데 시편은 정작 그런 나의 마음과는 달리

이것이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즉 가장 가장 평범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이야 말로 지극히 정상적이다는 것이 인간의 인식입니다.
너무 너무 정상적이기 때문에 의문이 되지 않습니다.
곧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가지지 않듯이 말입니다.

오히려 비정상 곧 특이성은 복음이 비정상적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나에게 쳐들어 올때
비로소 나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그 정도로 복음이 나를 건드리지 않는 이상
나를 전혀 의문시 하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정상적으로 본다는 겁니다.
이것이 악의 평범성입니다.


그런 악의 평범성, 악을 지극히 당연시하는 그런 인간이
시편을 대할때에
시편에서 원수가 과연 누구인가 라는 해석에 대한 난점에 부딧히게 됩니다.

사울왕 또는 압살롬을 표면적으로 내세웠지만

 

정작 이 시편이 가시화 된 예수님의 공생애가 기록된 4복음서에서는

그 원수는 사울왕도 아니요 압살롬도 아닌

인간 그 자체였다는 것이 십자가 사건에서 밝혀집니다.

더 깊숙히 들여다 보도록 말입니다.

더 깊숙히 들어가 보니
인간 그 자체가 그렇게 평범하고 지극히 정상으로 여겨졌던 그 인간 그 자체가
비로소 의문 덩어리로 보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라는 조명이 비추어주심으로써 비로소 밝히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의문덩어리는 이제 답이 없습니다.
자랑꺼리가 되지 못합니다.
뭘 해도 부끄러운 배설물 뿐입니다.

이제 비로소 자랑꺼리를 보게 됩니다.
부끄러움을 밝히 보여준 그 조명빨인 십자가가 비로소 자랑꺼리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모르고 유대인들은 달달 외우면서 시편을 찬양했습니다.

가스펠 부르듯이 노래하다 보니 어릴적부터 잘 외웠겠지요.

그러나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일까요?

 

얼마나 평범합니까. 그 찬양자가 사실은 살인자 였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너무 너무 악이 평범했기에 찬양자가 살인자였더는 것을 꿈에도 몰랐던 겁니다.


이 말은 결국 인간이 악을 다룰수 있는 문제를 넘어섰다는 겁니다.
인간이 악이나 죄를 짖는게 아니라
악이나 죄가 인간을 좌지우지 마음껏 다루고 있다는 겁니다.
 

특히나 오늘 시편 64편은 공동찬양시 라고 합니다.

공적인 예배에 공동기도문과 같은 다같이 찬양하고, 다 함께 부르고, 다 함께 낭송하는 시입니다.

 

마치 예배 중에 주의 기도문처럼 [다막 악에서 건져 주옵소서] 라고 하는 의미와 같습니다.

 

다만 악에서 건져 주옵소서

 

어디로부터 건져 달라고요?

악에서

 

? 너무 너무 평범하기에

악이 특정인. 또는 타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자기자신에게도 늘 있기 때문에

항상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툭 하고 나타나 버리기 때문입니다.

 

(51: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51:2, 개역)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51:3, 개역)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그 너무 너무 보편화 된 그 악에서 건져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시편 51편에서도 살펴봤듯이
다윗의 죄악에서 시작하다가 갑자기 결론은 딴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온전한 제사로 결론이 나버립니다.

즉 제사나 번제를 여호와는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심령이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제사를 말하기 위해서
다윗은 죄악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부분이 성화론자들이 시비거는 문제인 거지요.
기여이 행함의 문제로 보고 있지
믿음의 문제로 못 보는 겁니다.)

 

이것이 부메랑 피하는 기술이기도 한데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 악의 평범성에 너무 너무 익숙해져서

악이 뭔지도 조차 모를 정도로 너무 너무 보편화 되어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악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뭘 해도 다 악인줄 모른다는 겁니다.

뭘 해도 다 죄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죄
찬양을 불러도 죄
기도를 해도 죄

헌금을 해도 죄

교회를 다녀도 죄

봉사를 해도 죄

목회를 해도 죄

설교를 해도 죄

라는 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런자에게서 악에서 건지시는 여호와의 구원은 오히려 낯설고 이질적이고 배타적입니다.

그것을 지난 시간에는 전능자 곧 괴롭히는 자 라고 표현했고

시편 63편에서는 인자하심 주의 인자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자비와 인애 곧 사랑 말입니다.

 

한마디로 사랑을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폭력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알 리가 없습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해서 시기 질투 곧 맹렬한 질투와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악을 너무 너무 미워한다는 겁니다.

반대로 우리는 악을 너무 너무 사랑하는 점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만을 증거하십니다. 즉 자랑하십니다.
반대로 우리 인간은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으로 싫어하고 거부스럽게 여긴다는 점입니다.
십자가를 부끄러워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지난 시간에 심은대로 거둔다는 행한대로 거둔다는 선과 악의 기준입니다.
우리는 정반대의 선과 악의 기준으로 남을 정죄하기 바쁜거지요.

자랑이 되느냐? 아니면 부끄러워함인가? 로 두 패로 갈라지게 하는 기준이 바로 십자가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 악이 너무 너무 보편화 된 평범성이라서 그 악을 사랑하는 것에

 

주의 인애와 자비 곧 전능자는 그 꼴을 못보겠다고 질투하시는 겁니다.

우리를 죽여버려서라도 사랑하시겠다고 개시 출발 시작하시는 것이

주의 구원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구원 개념과 정반대 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예수님을 임금 삼는 겁니다.
자기 구원을 위해서 말이죠.
예수님은 그것을 아시고 도망치십니다.
표적 곧 십자가를 본 까닭이 아니라 먹고 배불러 터져서 임금삼고자 한다고

 

내가 바라는 구원과는 전혀 양상이 다른 차원입니다.

 

그렇다면 시편 64편에서 주님께서 개시한 주의 질투인 사랑으로

 

어떻게 악을 규정하는지

오히려 우리에게는 이 악이 너무 너무 보편화된 평범성을

 

어떻게 깨뜨리는지

어떻게 거리끼는 모습으로 다가오는지를 봐야 하겠습니다.

 

제일 마지막에 이렇게 표현 됩니다.

 

의인은 여호와로 인해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고 그를 자랑한다고 말입니다.

 

(64:10, 개역) 의인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자랑한다는 말의 반대의미는 싫어한다 곧 거리끼는 것이다 이겠지요.
부끄러워 한다.

 

그럼 악의 평범성, 보편화 된 악의 평범성에 졸지에 거리끼는 싫어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자랑꺼리가 되는데

그 악에게는 거리끼며 싫어하는 것이 뭔고 하니

 

(64:7, 개역) 그러나 하나님이 저희를 쏘시리니 저희가 홀연히 살에 상하리로다

(64:8, 개역) 이러므로 저희가 엎드러지리니 저희의 혀가 저희를 해함이라 저희를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

(64:9, 개역)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바로 위에 표현되어 있는

 

하나님의 화살입니다.

이 화살 앞에서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말하며 깊이 생각할 수 밖에 없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눅 2:30, 개역)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눅 2:31, 개역)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눅 2:32, 개역)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눅 2:33, 개역)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눅 2:34, 개역)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눅 2:35, 개역)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한마디로 악인들에게 미끼로 던져진 것을 덮썩 물었다고 좋아라 할때에

하나님의 화살이 날라와 쏘아서 그 악인이 심판을 받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표적 곧 기이한, 특이하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바로 이런 일이 악의 보편성을 뛰어넘는

여호와의 특이성인 십자가이다는 겁니다.

 

보편 보다 더 보편적인 특이성이다는 겁니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떤 재미있는 광고인데 오래된 만화로 나온 티비 광고인데요

무엇을 선전하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장면이 하도 특이해서 어린 마음에 기억에 새겨졌나 봅니다.

 

아주 작은 물고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 먹이를 먹다가 조금더 큰 물고기가 그 물고기를 입에 덮썩 무는 겁니다.

 

아니 그러더니 또 더 큰 물고기가 덮썩 문 물고기를 덮쳐서 또 덮썩 물더라 말이죠.

그리고서는 이제는 상어가 덮썩 또 물더라 말이죠.

입에 삼키기도 전에 물고기 한 5마리가 입에 삼키기 전에 말입니다.

최종적으로 그 상어마저도 큰 배에 있는 인간에게 잡히는

그래서 상어 한 마리를 잡았을 뿐인데 정작 네 다섯 마리를 덩달아 잡게 되는

 

그런 만화로 된 광고였습니다.

 

오래된 광고인데 기억나시는 분 있지요?

 

악의 평범성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방법은

일일이 악을 제거할 필요가 없이

보편화 시키는 겁니다.

 

이럴 때 마귀는 말합니다.

 

거봐 거봐 하나님은 너희들을 버린거야

구원하시지 않아

악이 이렇게 퍼져있는데

하나님이 있는거 맞니?

그래서 혼자 살아남아야 해

낙오되면 어쩔수 없지 죽는거지 뭐

 

이것이 너무 너무 보편화 된 지극히 정상적인 생각입니다.

이 보편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어디서 많이 본 내용같지 않나요?
맞습니다. 욥기 입니다.

가만히 있는 마귀까지 끌어들여서 마귀랑 내기를 하는 겁니다.
마귀가 바보입니까? 내기에 지는 게임을 하겠냐 말이죠.

그 미끼에 즉 욥에 혹 하고 넘어가는 겁니다. 팥죽 한 그릇에 혹 하고 넘어가듯이 말입니다.
전형적인 제로게임입니다. 반드시 이기는 게임에 마귀는 말려들수 밖에 없습니다.
 

악인은 말합니다.

(시 64:5, 공동) 『저들이 악독한 일을 마음에 품고 아무도 모르게 올가미를 치면서 "누가 눈치를 채랴?"』

(시 64:6, 공동) 『"누가 감히 우리의 비밀을 알랴?" 하지만,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을 보시는 이가 알아채시니』

알아 챌 것 같으면 재미없지요
왜 죄 짓는 것이 재미있나요?
자신들의 올무 곧 비밀을 모를 것이라 여기기 때문에 재미있고 그래서 비밀이지요.

마귀가 괜히 하나님의 내기에 응하겠습니까?

악을 사랑하기 때문에 악을 미워하지 않고

도리어 전능자를 미워하기 때문에 자랑할 수가 없기에


자기 꾀에 자기가 말려드는 겁니다.
지금 이 글을 마귀가 보니까 알수 있을까요?
모릅니다. 이유는 십자가의 용서를 자랑할 수 없는냥 어쩔수가 없는 것이 악인이요 마귀입니다.
악은 어쩔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속임수에 말려들수 밖에 없는 겁니다.
십자가는 그런 의미까지 다 포함된 지혜 입니다.
 

전능자 여호와는 속이시는 모습으로써, 숨어있는 모습으로써

이 악의 평범성에 특이성으로 개입하시는 겁니다.

 

악의 화살인지? 아니면 여호와의 화살인지?

 

악은 자기 먹잇감에 즐거워 하면서 덮썩 물었지만

정작 뒤에서 여호와의 화살이 정조준하고 미끼를 물기를 기다렸던 겁니다.


악마가 했던 짓을, 설마 여호와가 할 줄 몰랐던 거지요. 부정의 부정이지요.
오로지 마귀 보란 듯이 펼쳐지는 것이 십자가의 피 용서였거든요.
 

그들은 앗 속았구나 라고 억울해 합니다.

 

자신들의 속임수에 더한 속임수로써 화살에 맞도록 되어 있는

뻔한 시나리오에 말려들도록 되어 있으니까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는 그렇게 똑똑하다는 마귀가 어리석은 지혜에 말려드는 겁니다.

누가 생각나네요. 지금은 이놈 저놈 흉내내면서 대장 노릇에 미쳐 있습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지혜롭다고 자신의 꾀를 자랑할 정도였는데

정작 그 꾀에 자신들이 쳐놓은 올무에 자기가 걸려드는 꼴이 되는 겁니다.

 

시편 51편에서도 언급했지만

 

사울왕의 패거리나 압살롬이나 이스라엘 전체나

다윗의 이 범죄를 끝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다윗의 악이 미워서 이단 척결자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차지한 그 권력의 위치가 탐났던 겁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다윗과 연관된 모든 것이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던 겁니다.
남의 왕 자리는 전혀 탐이 나지 않는데 다윗이 차지한 왕 자리는 그렇게 탐나 미치는 겁니다.

딴 사람은 내기해도 마귀가 안 나섭니다.
오로지 욥 만큼은 내기에 선뜻 나서는 겁니다. 수를 많이 많이 물려서라도 이기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니 정의로움을, 바른 소리를, 저 악인들은 외치는 겁니다.
광명한 천사 노릇을 해야하고
양의 탈을 써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속여야 하거든요.
화살을 쏘기 위해
올무를 쳐 놓는 겁니다.

 

오히려 다윗에게는 저들이 저렇게 열심으로 올무를 쳐 놓는 그것이
다윗자신에게 이 부메랑과 같은 악의 되풀이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였던 겁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주님의 일하심이지요.

 

이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가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였던 겁니다.

 

그러니 이것을 자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말이죠?

 

 

그런데 아무리 봐도 저들에게는 십자가가 자랑꺼리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왜? 본인들 꾀에 본인들이 말려들도록 한 십자가에 오히려 앙심을 품게 하지
자랑은 무슨, 근처도 못가는 겁니다. 이를 뿌득 뿌득 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악의 평범성의 수렛바퀴에 머물러 벗어날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는 잘나서 벗어난게 아닙니다.

주님의 희생 때문입니다.
이런 십자가의 지혜를 나타내지 않으셨다면 누가 벗어나겠습니까?

 

이것이 특이합니다.

 

누가 믿었으리요?

 

어느 정도로 보편화 되어 있고 평범하게 쫘악 퍼져있는고 하니

 

(21:40, 개역)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21:41, 개역)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21:4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21:43,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21:44, 개역)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21:45, 개역)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21:46, 개역)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대제사장 곧 우두머리가 자기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 정도입니다.
(그 정도로 누가 우리의 비밀 계획을 알까?)


(시 64:5, 개역) 『저희는 악한 목적으로 서로 장려하며 비밀히 올무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보리요 하며』

(시 64:6, 개역) 『저희는 죄악을 도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그 정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썩어있는 것을

 

예수님만 인식하고 있지


거꾸로 거룩을 다룬다고 하는 대제사장, 자기들 말대로 오늘날로 치면

총회장 목사부터 노회장 목사. 당회장 목사. 부목사, 강도사, 전도사. 여전도사

장로, 권사, 집사. 주일학교 반사. 일반 교인, 대학부, 청년부, 학생회, 주일학교 어린아이 까지

머리부터 발 끝까지 다 썩어있는 것을
거룩은 커녕, 성화는 커녕 근처도 못가는
오히려 악이 온 몸에 퍼져있는 것을
예수민남 인식하시고

 

그 썩어 있는 악의 평범성에서 꺼내시고자 뛰어드신 겁니다.

지옥과 같은 우리 들 속에 말입니다.

 

얼마나 특이합니까?

 

기이하죠!!

정작 우리는 아무리 봐도 필요없다고 여겨서 버린 돌인데

괜히 건축기술자들이 자원을 함부로 버리겠습니까?

설계도에 맞게 계획대로 건축을 지어야 하는데

아무 쓸모 짝도 없음을 확인하고 확인하고 확인해서 버린 겁니다.

 

그랬던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어떻게 주춧돌 머릿돌이 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사람들의 손에서 지어진 건물 중에 이런 일이 벌어진 적이 있던가요?

 

건축자들이 쓸모 없다고 버리는 돌

이것이 평범성입니다.

악의 보편성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응하시는 주의 인자하심 곧 전능하심 곧 찬양이란

이 평범성에 특이성을 대조시키는 겁니다.

 

어떻게 버린 돌이 주춧돌이 되냐 말이죠.

 

그런 사례가 단 한건도 없습니다.

그런 사례를 조사하거나 살펴보거나 할 하등의 필요성이 없을 정도로

지극히 당연한 평범성이다는 겁니다.

당연한 보편성인데

 

무슨 그런 근거를 조사할 수가 있냐 말이죠

당연히 없다 라는 겁니다.

 

 

없음

 

그런데 그 없음 곧 그런 사례가 없다는 당연성 마땅한 당위

보편성 평범성을 깨뜨리는 이 특이성이

 

곧 우리의 자랑꺼리가 되는 겁니다.

오히려 이 평범성에서 빼내어 달라고 하게 되는 겁니다.

 

누가 이 안정적으로 보편화된 안전빵을 마다하고 거기서 빼내 달라고 기도하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는 기도는 범상치 않는 평범한 기도가 아닙니다.

 

아주 아주 특이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것의 차이를 구별하게 됩니까?

 

속이는 악의 평범성을 더 더 더 속이는 특이한 주의 인자하심을 통해서

비로소 보게 된 것이지

 

아무리 봐도 우리는 거기서 빠져나올 자격이나

그런 것을 요청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윗의 시편 51편을 볼 때

정말 정말 로또 당첨자 맞구나 라는 것을 보게 되고

그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당첨자 맞기 때문에

그 이후로도 끝까지 악들은 그를 가만히 두질 않는 것을 볼때에

또 다시 로또 당첨이라는 효력이 다윗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로마서 4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4:10, 개역)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사람의 행복은 오로지 이 복 뿐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복되면 이런 것을 자랑할까요?

 

반대로 저들은 에게 에게 그게 무슨 자랑이냐 라고 싫어하는 겁니다.

불법을 사함 받은게 무슨놈의 자랑꺼리냐고 부끄러운줄 알아라 라고 말이죠.

 

이 정도로 악의 평범성에 물들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어리석음이

복되고 자랑꺼리인 이유는

 

다른 길로는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인 겁니다.

 

이것이 주님이 제사를 원치 않는 인애와 자비인 겁니다.

 

왜 시편 기자들은 주의 인애와 자비를 노래하고 자랑할때에

반드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앞세워서 그 배경을 깔고 노래하는 것일까요?

 

본인들이 당해 봐서 그런 겁니다.

 

사람들은 악을 좋아하지 이 주의 십자가의 지혜는 싫어한다는 것을 말이죠.

 

거기서 갈라지는 그 현장에서 본인들이 찢어지는 그 사건을 격어 봐서 아는 겁니다.

아 사람들은 원래 악을 사랑하고 그것이 보편화 되었고 그것이 평범화 되었지

 

거기서 빠져 나오게 하시는 주님의 죽음을 볼 생각이 없다는 것은

본인도 그랬는데 주님의 괴롭힘 때문에 그 사랑의 질투 때문에 비로소 안 것이지

자신도 거기서 빠져나올수 없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 덮쳐져서

 

비로소 행복함을 외치게 되는 겁니다.

 

복되도다 라고 말입니다.

(시 65: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시 65:2, 개역)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시 65:3, 개역)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시 65:4, 개역)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뻔뻔스럽게 우리는 주님 덕택에 비로소 벗어나서 뻔뻔스럽게 외칩니다.

당첨된 자로써 말입니다.

아이참!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요 21:14, 개역)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요 21:15, 개역)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 21:16, 개역)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 21:17, 개역)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네? 부메랑(악의 쳇바퀴)에서 벗어나는 길요?
간단합니다.

너무 너무 간단해서 무시하고 싫어하고 거리끼는 것으로 부끄러워 하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자랑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메랑을 피하는 방법은 바로

내가 악인입니다. 저를 고쳐주세요 라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시면 됩니다.
얼마나 저들에게는 부끄러움이겠습니까?
우리가 싫어했던 것을 도리어 역으로 자랑하라고?

고마워 하라고?

부끄러워 하지 말라고?

그러나 자신이 아무리 봐도 악에서 벗어날수 없는 죄인 중의 괴수임을 볼때에

그 상한심령일때에 비로소 십자가가 너무 너무 고마워서

자랑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동네사람들 동네사람들 나의 죄과를 씻어주시는 선지자가 나타났다고
우물가의 여인이 물동이를 내팽계치면서 십자가를 자랑하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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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하면 아예 망했다고 생각을 해봐라. 어느 정도로? 더 이상 내가 내 인생을 책임 못 질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생각을 해보자. 그러면 나는 나한테 내 할 도리를 다했는데, 더는 못하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 더는 더 못하는 그 순간이 바로 니가 가야 될 도착지점으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손 못 대는 상황으로 자꾸 유발시켜요. 물을 먹고 싶은데 물이 없고 양식 떨어지고. 이제 출애굽 보이십니까? 신명기 이제 눈에 들어오십니까? 하나님께서 성도를 어떻게 하느냐, 내 힘으로 할 때는 절망적인 거예요.


그러면 매일 주어진 상황은 책임자가 따로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부딪치게 하시는 상황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이근호 목사님 설교中-

Yun Jin Park님이 좋아합니다.
댓글
송재원 막다른 골목은 하늘을 쳐다보라는 예수님의 신호




김대식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의 이조를 드리고 저 세리와 같지 않아 하나님께 감사하다 라는 것은 자기 것이 있기에 언제든지 꺼내놓을수 있지만

정작 아무것도 내세울것이 없는 세리는 그저 긍휼만 바라 볼 정도로
자신이 멸망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아는 거죠.

성전은 이 두 세력을 가르는 부르짖음이라는 탄식(광야교회)만이 있을 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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