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모든 민족이 주를 찬송하고 경외하리로다 (시편 67)

 

 

(67:1, 개역) [시 곧 노래,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것]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그 얼굴 빛으로 우리에게 비취사(셀라)

(67:2, 개역)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

(67:3, 개역)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67:4, 개역) 열방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판단하시며 땅 위에 열방을 치리하실 것임이니이다(셀라)

(67:5, 개역) 하나님이여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67:6, 개역) 땅이 그 소산을 내었도다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67:7, 개역)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먼저 모든 민족이 주님을 찬송하고 경외한다고 하는 말씀 이 시편말씀을

이스라엘 본인들은 과연 믿을까요?

더 나아가 오늘날 기독교가 믿을까요?

 

아마 각각의 민족들 속에서 예수님을 믿는 소수자들이 있다고 그렇게 이해하면

이 본문이 맞다고 할 겁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전체 민족이 각각의 민족 전체가 여호와를 경외하고 송축한다 라고 했습니다.

이 시편의 노래를 이스라엘도 못 믿는 판국에

왜냐하면 그렇게 될까봐 이스라엘이 강퍅해져서

지난 시간의 내용처럼 이스라엘이 애굽화 되어서

출애굽의 전쟁을 벌리는 구원사건을 노래하듯이

출이스라엘 할 판국인데

과연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애굽화 된 것을 인정하느냐 말이죠.

하나님의 원수로써 활동한다고 하는 내용을

시편에 기록 되어 있는데도 과연 믿을수 있겠냐 말이죠.

 

다윗은 그런 의미에서 오로지 예수님만 증거 했는데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오호려 시편을 문자적으로 보다 보니

더더욱 예수님을 거부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런 역설적인 의미인데

과연

모든 민족이 여호와를 송축하고 경외하는 것을

누가 거부하고 누가 시기하고 누가 방해 하겠냐 말이죠.


오로지 이스라엘 본인들만 여호와를 송축하고 경외해야 하는데
모든 이방민족이 주를 송축하고 경외한다는 것은

마치 저 더러운 세리가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번 금식하고 세리처럼 토색하지 않는 
나 바리새인 보다 더 옳게 여김을 받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의 사랑으로 용서 받는 것에 대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고 반응하는 맏아들과 같다는 겁니다.

이방인이 주를 송축하고 경외하는 것에 극도로 반발한다는 겁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일이 벌어지면 안된다.
찬양은 우리 이스라엘 민족만 해야 한다 라는 식이다는 거죠,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요나의 이야기 아닙니까?
니느웨 벡성을 멸망시킨다는 말에 좋아라 삼일길을 단 하루만에 후딱 돌아버린 겁니다.
나 요나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돌이켜야 하지 그깟 니느웨 백성에게 신경쓸 시간에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니느웨 백성을 회개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을 송축하고 경외합니다.
이 사랑을 알때까지 요나와 씨름합니다.

이방인이 송축하고 경외하는 것에 같이 참예하면 되는데 도저히 그럴수가 없다는 겁니다.
 

오늘날도 이런 사고방식은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주님이 하시는 것을 싫어하는 자들을 배경으로 깔고서

증거되고 확정되는 방식이 십자가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다윗은 이방의 구원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다윗의 정신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사 49:1, 개역) 『섬들아 나를 들으라 원방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내가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가 어미 복중에서 나옴으로부터 내 이름을 말씀하셨으며』

(사 49:2, 개역)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로 마광한 살을 만드사 그 전통에 감추시고』

(사 49:3, 개역)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사 49:4, 개역)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히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정녕히 나의 신원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사 49:5, 개역) 『나는 여호와의 보시기에 존귀한 자라 나의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셨도다 다시 야곱을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며 이스라엘을 자기에게로 모이게 하시려고 나를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자기 종을 삼으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사 49:6, 개역)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사 49:7, 개역)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너를 보고 열왕이 일어서며 방백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너를 택한 바 신실한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사 49:8, 개역)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사 49:9, 개역)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자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

(사 49:10, 개역)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

(사 49:11, 개역)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

(사 49:12, 개역) 『혹자는 원방에서, 혹자는 북방과 서방에서, 혹자는 시님 땅에서 오리라』

(사 49:13, 개역)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가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임이니라』

(사 49:14, 개역)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사 49:15, 개역)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 49:16, 개역)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사 49:17, 개역) 『네 자녀들은 속히 돌아오고 너를 헐며 너를 황폐케 하던 자들은 너를 떠나가리라』

(사 49:18, 개역)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로 장식을 삼아 몸에 차며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

(사 49:19, 개역) 『대저 네 황폐하고 적막한 곳들과 네 파멸을 당하였던 땅이 이제는 거민이 많으므로 좁게 될 것이며 너를 삼켰던 자들이 멀리 떠날 것이니라』

(사 49:20, 개역) 『고난 중에 낳은 자녀가 후일에 네 귀에 말하기를 이곳이 우리에게 좁으니 넓혀서 우리로 거처하게 하라 하리니』

(사 49:21, 개역) 『그 때에 네 심중에 이르기를 누가 나를 위하여 이 무리를 낳았는고 나는 자녀를 잃고 외로워졌으며 사로잡혔으며 유리하였거늘 이 무리를 누가 양육하였는고 나는 홀로 되었거늘 이 무리는 어디서 생겼는고 하리라』

(사 49:22, 개역) 『나 주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열방을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민족들을 향하여 나의 기호를 세울 것이라 그들이 네 아들들을 품에 안고 네 딸들을 어깨에 메고 올 것이며』

(사 49:23, 개역) 『열왕은 네 양부가 되며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사 49:24, 개역) 『용사의 빼앗은 것을 어떻게 도로 빼앗으며 승리자에게 사로잡힌 자를 어떻게 건져낼 수 있으랴마는』

(사 49:25, 개역)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용사의 포로도 빼앗을 것이요 강포자의 빼앗은 것도 건져낼 것이니 이는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네 자녀를 구원할 것임이라』

(사 49:26, 개역) 『내가 너를 학대하는 자로 자기의 고기를 먹게 하며 새 술에 취함 같이 자기의 피에 취하게 하리니 모든 육체가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요 네 구속자요 야곱의 전능자인줄 알리라』

 

그럼 누가 반발합니까?

오로지 이스라엘에게만 구원이 된다는 자들 아니겠습니까?

거짓선지자죠.

 

그런데 이스라엘만 구원 받는 것 맞습니다.

이방인이 새이스라엘로써 구원받을 줄 그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도록 되어 있으니까 말이죠.


이스라엘 맞기는 맞는데 더 나은 이스라엘인 새이스라엘 입니다.
이스라엘 조차도 새이스라엘 되지 못하면 구원 없다는 말입니다.

누가 가장 반발하겠습니까?
새이스라엘을 말입니다.
헌 이스라엘이 반발합니다.
새이스라엘 개념 자체를 헌이스라엘에게 말하고 있는 예수님을 가만히 둘 이유가 없습니다.
반드시 죽여야 하는 겁니다.

원래 이스라엘 자체가 말도 안되게 [없는데서] 생겨난 부조리한 방식인데
그 부조리 보다 더 나은 부조리인 새이스라엘이어야 하니
첩첩산중의 불가능성의 불가능성이겠습니까?
 

그러니 주를 송축하는 것에 이스라엘은 이방인에게 빼앗기는 셈입니다.

 

형 에서가 동생 야곱에게 팥죽 한그릇에 장자권을 팔아 넘기듯이

장자권을 소홀히 여긴다고 뒤짚어 씌움 당해

장자권을 빼앗기듯 말입니다.

 

이렇게 미움받기도 작정된 자와 사랑받기로 작정된 자가 갈려지는 겁니다.

미움받기로 작정된 자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사랑받은 티를 억수로 나열합니다.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와 같지 않게 해 주셔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탕자 같은 세리는 그저 불쌍히 여겨달라고

사랑받은 티는커녕 미움받아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그저 불쌍이 여겨달라고

미움받아 마땅함을 안다는 겁니다.

 

참으로 대조적이면서도 역설적입니다.

사랑받기로 작정된 자는 정작 미움받은 버림받은 모습입니다.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 분이 바로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미움받기로 작정된 자는

자신이 하나님인냥 남을 판단하는 위치에서 권력을 휘두른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들은 이 십자가의 사랑을 노래 부를 수가 없습니다.

거리끼고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노래한다는 말은 자랑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한다는 것인데

자신을 죄인으로 원수로 규정하는 그 십자가가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더러운 개같은 이방인은, 이 더러운 매국노 세리는,

이 십자가의 용서를 자랑하고 기쁘게 외치는

찬양하고 송축하고 경외까지 합니다.

 

이 원수도 용서할 정도로 모든 허물을 다 덮는 십자가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시어머니 나오미가 평생을 교회 다녀도 하나님을 믿다고 이 꼬라지 됐다고 하는데

정작 교회 단 한번도 다닌 적이 없는 이방여자 며느리 룻이

어머니의 하나님을 괴롭히는 여호와의 이름이 진짜 하나님이다 라고

제대로 전도 하고 있습니다.

 

평생 교회 단 한번도 빠진적이 없이 다닌 나오미가

평생 교회 단 한번도 다닌적 없는 며느리 룻에게 전도 받아서

나오미가 빠져나오는 겁니다.

룻 이라는 선지자 곧 사사로부터 말입니다.

 

비로소 이방여자 룻의 찬양에 룻의 주를 향한 송축과 경외함에

시어머니 나오미가 비로소 참예케 됩니다. 연합하게 됩니다.

 

거꾸로죠,

 

룻을 주님이 보내주지 않았다면 나오미는 구원받을 길이 없는 겁니다.

 

결국 이스라엘만 주님을 단 한번도 송축한적 없이

단 한번도 경외한 적이 없이

 

도리어 주님으로부터 거부 당하는 겁니다.

 

이 내용을 예수님을 보고서 다윗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 67편을 이스라엘이 노래 부릅니다.

그런데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동시에 납니다.

 

그 한 입에서 시편 67편을 노래하지만

정작 그 시편 67편의 주 되신 예수님을 저주하고 있으니까 말이죠.

 

왜 저주할까요?

 

이방이 주님을 송축하고 경외하는 것을

맏아들 이스라엘은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사랑으로 용서받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다시 십자가의 사건으로 모아지는 것을

가인은 싫어했고 가인의 후손은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행함은 결국 살인이라는 결과를 나타내는 겁니다.

 

칸트가 말했던가요?

법을 지키고자 하는 행함은 두려움 때문에 법을 지킨다고 말입니다.

 

인간이 왜 제사를 지킬까요?

두렵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아벨은 제사를 지킨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긍휼을 쳐다본 것 뿐입니다.

십자가가 덮치니까 예수님의 운명이 되어버린 겁니다.

 

마치

법을 지키고자 하는 이스라엘 유대인 곧 대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유대백성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듯이 말입니다.

 

제사 지키는 것은 곧 살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안할 방법이 없는게 인간입니다.

법에 갇혀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긍휼을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법에 갇혀 버렸기에

살인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기에

불쌍히 여겨달라고

십자가를 보면서 자신이 죄인임을 보게 되니까 말입니다.

 

자 이렇게 오늘날도 어쩜 그리 똑같이 벌어지는지

가인과 아벨의 사건은 그 때 그 당시로 끝난 문제가 아닙니다.

수시로 지금 현재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앞으로도 말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건은 취소 된적이 없이 무한반복 되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모든 민족이 주를 송축하고 경외한다는 제목을 왜 달았는지에 대해

다윗은 왜 이렇게 노래 부리는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이방인에게 구원이 넘어가는 것을

다윗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곧 이스라엘은 이 다윗의 시편을 따라 부르면서

정작 본인들이 말려드는 상황이다는 겁니다.

다윗이 말하는 예수님의 활약상을 싫어하고 거부하는 입장이다는 겁니다.

 

이방인에게 그런식으로 구원이 넘어가는 겁니다.

 

그럼 이방인은 무조건 구원 받냐?

원가지도 아까지 않았듯이

너희도 그러하다 라고 합니다.

 

(11:17, 개역)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11:18, 개역)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11:19, 개역)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

(11:20, 개역)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11:21, 개역)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11:22, 개역)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11:23, 개역)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11:24, 개역)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11:25, 개역)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11:26, 개역)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11:27, 개역)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11:28, 개역)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11:29, 개역)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11:30, 개역)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11:31, 개역)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1:32, 개역)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11:33, 개역)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11:34, 개역)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11:35, 개역)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11:36, 개역)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마지막 구절 로마서 1136절은 압권입니다.

나를 위한 구원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겁니다.

맏아들을 내어 쫏고 탕자를 불쌍히 여겨주심은

탕자가 맏아들 보다 나은 사람이 아니다는 겁니다.

 

뿌리가 긍휼의 뿌리이지 그 긍휼에 맞게 열매와 가지를 유지하지

제사 라는 행함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을 통해서 인간의 근원을 살펴 볼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들의 왜 탈락 당했는지

그 다음은 너 차례인데

왜 긍휼을 베푸시는지를

유대인 덕분에 알아 보게 된다는 겁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근원을 거부했다는 겁니다.

언약정신을

지금 시편 67편의 다윗 정신 곧 십자가의 정신을 거부했다는 겁니다.

 

뿌리를 거부하고 있으니 당연히 가지는 짤려야 합니다,

뿌리와 가지가 성질이 다르니까 말이죠.

 

그러니 열매도 다른 겁니다.

 

뿌리 때문에 근원 때문에 가지도 그 뿌리라는 근원의 성질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고

열매도 그러합니다.

 

결국 모든 민족이 주를 송축케 주를 경외케 하는 이 근원인 십자가의 용서를

그들은 거리끼는 것으로 싫어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근원인 뿌리와 성질이 다른 가지이기에

이것은 어쩔수가 없는 겁니다.

원가지를 짤라낼 수밖에 말입니다.

 

이 다윗정신 곧 십자가의 정신을 찬양하라고 세운 이스라엘인데

이스라엘이 행함을 자기구원을 노래할려고 하기에 짤라내는 겁니다.

언약 보다 다른약속을 따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죽은 가지인 이방인을 접붙임했는데

이들 또한 원가지를 아끼지 않았듯이

접붙임 당한 이방인도 당연히 아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를 찬양하기 위해

접붙인 가지이니까 말입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에는 의미를 둘 필요가 없습니다.

심지어 십자가를 노래라는 자기자신에게도 말입니다.

 

그 목적에 맞지 않으면 가차없이 짤라내는 겁니다.

 

어차피 이방인은 성경말씀 조차도 모르고

비록 지금부터 알아간다고 해도 유대인을 따라잡을수 없으니

뭐 이방인도 짤리는 것은 매 마찬가지이고

백번 만번 짤려도 시원찮은 자들 아닙니까?

그럼 말라꼬 믿냐 말이죠.

 

그러나 그런 이방인조차도 주님이 다 세운 겁니다.

그거 예수님이 몰랐겠습니까?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데????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모를 정도로

점점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모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사랑인 자비였지

제사 지키기가 아니였다는 겁니다.

내가 주체가 된 행함이나 그런 말씀지키기가 아니였던 겁니다.

탕자의 형 맏아들 보세요 더 모호하게 빠져들었잖아요

자기에게 자기가 걸려 넘어진겁니다.

모호한 자기에게 왜 믿음을 거느냐 말이죠.

오히려 탕자는 절대로 빼앗기지 않을 것을 얻게 되었죠.

결국 맏아들은 아버지의 용서를 소홀히 여겼지요.

아니 싫어하고 거부하고 반발하는 살인의지를 표출한 겁니다.

미워한다는 것은 죽이고 싶다는 것이니까 말이죠.

 

뿌리는 결국 십자가 용서였는데

바로 원수들에게 자기목숨을 내어준 사랑아닙니까?

 

어차피 원가지도 짤리는 판국에 불리하게 죽은가지가 접붙임 당해 본들

불리하게 출발한 것처럼 결국 불리하게 될 것 뻔하지 않냐?

바로 그런 사고방식이 놀랍게도

첫 번째로 유리하게 출발했던 원가지 이스라엘 사고방식이였습니다.

처음부터 유리하거나 불리하거나 라는 의미가 없었고

뿌리는 처음부터 긍휼과 자비였습니다.

그런데 법이나 행함을 추구하면 할수록 본 취지의 사랑이라는 뿌리 보다

육을 과시하고픈 자랑 밖에 없었으니

십자가를 당최 이해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이방인 중에서도 이런 사고방식은 어쩌면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도 안되는 판국에

주님은 그 불가능한 일을 하신다는 점에서

주님의 믿음을 믿어야 할 판국이지

우리 믿음은 애초부터 기대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게 아니라(모호함, 의문)

예수님이 나를 믿는다는 것을 믿습니까? 이것이 십자가입니다.(또렷함, 완료, 명료함)

 

내가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를 진적이 없거든요.

예수님이 나 같은 죄인 중의 괴수인 원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거든요.

성경말씀 어디에도 인간의 능력 밖의 것만 나열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오죽하면 인간은 안되기에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하십니까?
성령이 나서지 않으면 안되는 인간 능력 밖의 일들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뭘 지켰다. 행했다. 믿었다? 그거 다 거짓말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모호했으면 그딴거 자랑할까요?

 

결국 다윗은 이 십자가 정신을 말하는 겁니다.

그 십자가의 용서를 통해서

모든 언약이 다 완성이 됨으로써

그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노래하는 겁니다.

 

여기에 이 근원인 뿌리를 거부하는 세력을 통해서

더더욱 이 뿌리 곧 근원인 십자가의 정신을 증폭시키는 겁니다.

어두움을 배경으로 깔고서 빛을 더욱더 영광되게 말이죠.

 

그렇다면 모든 민족이 주를 찬송하는데 있어서

모든 민족이 주를 경외함에 있어서

 

유대인들은 반발함으로써 더더욱 주님의 언약의 완성을 더욱 빛내도록 하는

어두움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도록 하셨다는 겁니다.

 

이런 세세한 상황까지 다윗은 다 염두하고서

성령으로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단순히 모든 민족이 주를 송축하고 경외한다로 그들 모든 민족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를 하는게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이 시편을 달달 외웠다니깐요.

이방인은 성경을 본 적도 없구요.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아무것도 없는 이방인이 부요하게 되고

유대인들은 간따나 팍팍한 삶을 더더욱 이방인에게 빼앗기게 되는 식이니

 

때린 시어마이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그렇게 만든 이런 상황을 조작한 시누이 예수님을 더더욱 미워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

말씀 지키고

예수 잘 믿고

이런 것 다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살려달라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이 필요 없더라 말이죠.

 

다윗은 왜 이스라엘이 격분할 수 밖에 없는

이방인의 구원을 외칠까요?

 

저 더러운 이방인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격노케 만드는 일이거든요.

 

맏아들 앞에 탕자의 용서를 운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 말이죠.

 

99마리 양 들으랍시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만을 위한 목자가 되시겠다는 말과 같거든요,

 

이 얼마나 도발적인 발언입니까?

 

다윗은 그야말로 이스라엘로부터 죽임을 당할려고 환장한 듯이 발언하고 있습니다.

 

마치 46년 동안 공들여서 건설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3일만에 짖겠다 라는 소리와 마찬가지인 소리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의 코 앞에서 아예 격분을 일으키게 할려고 작정한 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찬양이라는 사건입니다.

룰루랄라 신나는 노래 우리 함께 불러보자 쿵 짝 쿵짝 네박자가 아닙니다.

 

사건입니다.

 

살인의지를 1초 만에 유발케 하는 그런 사건입니다.

당연히 이방인의 구원은 1초 만에 구원일 정도로 상대적이다는 겁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이 거부하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대놓고 이것이 주님의 뜻이다 라고 외칩니다.

 

자 이렇게 되면 유대인들은 반칙이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주님이 유대인에게 하신 약속인데

그 약속을 어기고 스스로 깨뜨린 것이니까 말이죠.

다윗 당시에는 이 시편 67편이 무슨 소리인지를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반칙이다는 것이 밝혀진 겁니다.

 

맞습니다. 반드시 반칙이어야 합니다.

약속 스스로를 깨뜨린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반칙이 옳았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오히려 유대인들이 반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들추어내는 방식이

반칙에 반칙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 사건이

괜히 이스라엘인과 이방인의 대립사건이 아닌 겁니다.

 

괜히 그 반칙이 옳았다 그는 나보다 옳았다 라고 기록된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곧 유대인은 사랑없이 두려움으로 법을 지킨 겁니다.

주님의 사랑에는 관심도 없이

법만 붙잡은 그 반칙을

 

그래서 법을 깨뜨려서 긍휼이라는 사랑으로 완성하는 겁니다.

 

과연 누가 옳을까요?

 

그래서 십자가는 반드시 불륜 또는 스캔들 또는 부정으로써 작용하는 사건인 겁니다.

 

저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시편 68편을 노래 부를 때

이 노래가 나를 배신하고

유대인을 배신하면서 다가올 때

 

과연 배신을 때린 이 찬양이 옳은지

아니면 배신당했다고 나는 배신하지 않았는데 라고 하는 나 또는 유대인이 옳은지에 대한

 

충돌 사건이

 

바로 인간을 제대로 후벼 파는 본색을 들추어내는 사건인 십자가 사건이다는 겁니다.

 

십자가는 신앙의 대상물이 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지신 그 십자가의 사건이

실제로 나에게 쳐들어와서 같은 사건을 격게 될 때

 

나의 모든 부정함이 드러나는 겁니다.

 

결국 나는 죄인으로써 불쌍히 여김 받는 그 일 밖에 없다는 겁니다.

 

다윗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본인에게 덮쳐진 그 십자가를

영광스럽게 노래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십자가가 그를 인도한 겁니다.

부정한 십자가가 저들의 부조리에서 빼내는 겁니다. 더 부조리 하게 말입니다.

 

이 십자가가 아니면 주를 경외하지도

주님을 찬양하지도 않는 저들과 다를바 없었기에

 

그 빼내시기 위해서

이 십자가의 사건이 덮쳐지도록 하신 겁니다.

 

그리고 그 흔적을 그 십자가의 흔적을 자랑하는 겁니다.

자랑 곧 노래하고 즐거워 하며 기뻐하는 겁니다.

저들에게는 역겨워 더럽다고 거부하고 싫어버린바 되는 거리낌이

도리어 우리에게는 참 기쁨이요 참 노래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의 흔적을 말입니다.

 

 

(6:13, 개역)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6:14, 개역)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6:15, 개역)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6:16, 개역)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6:17, 개역)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6:18, 개역)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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