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사건의 반복이냐? 과거의 다시보기 인가?

 

미래를 걷는 십자가

 


과학이 종교화 되었다는 것은 곧 과거의 다시보기이다는 것이다.

미디어 세상에서 잉여란 마치 지난 방송 다시보기를 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것과 같다.

 

모조리 과거이다.

 

그래서 과학은 종교가 되어서 미래를 탐할려고 한다.

미래를 어떻게 하면 과거 방송 다시보기처럼 반복 할 수 있을까?

 

공상과학영화도 이 불안한 미래를 어떻게 하면 미리 보기해서

다시 보기라는 반복을 할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대박 아닌가?

 

사람들이 왜 점쟁이를 찾고 종교를 찾고 점을 치고 제사를 드리고

왜 그런 짖을 하는가 하면

 

마치 과학이 타임머신을 상상하는 것과 같다.
어떤 과학자는 미래는 갈수 있어도 과거는 못간다고 지금까지의 이론은 그렇단다.

 

과거처럼 다시 보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야 안심이 된다.

 

과거의 트라우마를 리셋하고픈 것이다.

 

어제 방송 대상 누가 받았어? 라는 그 대화에 소외가 되지 않을려면

다시보기를 해야 한다.

 

미리 과거를 봐 버린 사람은 대화에 참여가 되고

우리 라는 네트워크가 형성이 된다.

그렇지 않은 자는 소통에서 단절이 된다.

 

성화론이 그래서 악마의 짖이다.

과거의 나를 다시보기해서 그 배설물을 정당화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과학기술 또한 과거의 빅데이터를 수집해서

현재의 난관을 뚫고 나가고자 하는 컨텐츠를 형성하는 것이다.

 

모조리 과거 뿐이다.

그래서 과학은 미래까지 손댈려고 한다.

아니 인간은 미래까지 손 댈려고 하는 것이다.

성화론자도 미래의 자아라는 그 과거의 배설물인 자아를 미래에 까지 똥칠로 도배를 하고픈

치매환자들이다. 치맥 말고 치매

 

이렇게 모든 사상은 다 악마적이다.

 

(10:4, 개역)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56:5, 개역) 저희가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내게 대한 저희 모든 사상은 사악이라

 

(2:8, 개역)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즉 저들이 말하는 미래란 과거 없는 미래란 있을 수 없다는 미래일 뿐이다.

곧 과거라는 배설물이 없는 미래란 없다는 것이다.

기여이 그 배설물을 미래에 까지 끌고 가겠다는 것이기에

미래가 아닌 과거의 반복일 뿐이다.

 

성화론자들이 그런 자아라는 배설물의 반복을 기여이 잇고 잇고 이어나가겠다는 식이다,

 

반대로 성령 안에서 교통은 이 십자가의 사건만이 소통 될 뿐이다.

어제 누구에게 글쎄 십자가의 사건이 또 덮쳤데?
그래 그 사람 또 주님의 피를 자랑하고 노래하겠네!!

라고 십자가만이 대화로써 소통 될 뿐이다.

그 사람은 어느 정도로 십자가에게 지근 지근 밟혔는데??

글쎄 죽도록 지근 지근 밟혔데!!

인간이 주인공이 되는 대화가 아니라.

십자가가 주인공이 되는 대화 뿐이다.

 

그럼 미래란 무엇인가?

십자가이다.

미래란 사건 뿐이다.

사건은 오로지 십자가 뿐이다.

 

에이 십자가란 과거 사건이다. 2000년 전의 역사속의 사건일 뿐이다 라고 다들 취급한다.

그렇기에 미래의 희망으로 둘 수가 없다. 과거이니까 말이다.

희망은 미래적이어야 한다. 곧 과거의 연장물인 나 자신이 희망적이어야 하지

왜 십자가가 희망이어야 하는가?

자랑꺼리도 못 된다.

즐거움도 아니다.

기쁨도 될 수 없다.

 

오히려 싫어버린바 된다.

거리끼는 걸림돌일 뿐이며

아무 쓸모짝에도 없는 돌이기에 걸리적 걸리적 거릴 뿐이다.

하등 건축물에 쓸 가치도 없어서 건축자들이 당연히 버려야 하는 돌이다.

 

다윗도 걸리적 거릴 뿐이고 모세도 바울도 세례요한도 다들 걸리적 거릴 뿐인 인간이다.

예수라는 인물이 그러하기 떄문이다.

 

맞다, 그렇기 때문에 그 버린 돌이 주춧돌이 된다.

완공 완성의 주춧돌로써 기념이 되는 준공식에 쓰이는 머릿돌이 된다.

 

아무리 봐도 십자가는 과거 사건이지

현재도 미래의 사건도 아니다.

 

당연히 십자가에 달린 예수도 어디까지나 과거의 인물이지

미래의 인물이 될 수가 없다. 십자가 자체가 과거사건인데 말이다.

 

그래서 과거로 취급한다. 십자가를 말이다.

그리고 종교꾼들은 부활을 미래로 취급한다. 모든 종교가 그러하다. 부활 영생불멸을 꿈꾼다.
양심상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심 덕분이다고만 다른 종교와의 차별성을 둘 뿐이지

탐욕은 같은 탐욕이 우상숭배이기는 마찬가지인 성화론이다.

 

왜냐하면 사위일체처럼 인간을 머릿돌로 감추고 속이듯이

부활은 결국 내가 목적이 되어야 하기에 부활을 미래로

곧 나 자신을 미래로 두었기 때문이다.

내가 부활 되지 않는 판국에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나의 부활을 위해 십자가에 달렸다면 의미가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과거의 다시보기 이다.

 

그러나 바로 이것에 기가막힌 걸림돌로써 작용한다.
거치는 돌 뿌리에 걸려 부딧히게 한다.

실족해서 넘어뜨리게 한다.

현대의 과학에 기가막힌 걸림돌이 바로 미래의 사건이다.

그래서 아예 무시하고 과학 본인이 미래의 희망으로 사람들에게 자리잡듯이

인간은 아예 미래사건은 십자가만큼만은 무시하고 자기자신이라는 배설물 똥 덩 어 리 로

미래에 포함 시킬려고 한다. 곧 구원을 말이다.

달리 다른 것을 미래로 둘 꺼리가 없다.
외계인의 미래를 꿈꾸겠는가?
아니면 가룟유다의 미래를 같은 인간으로써 꿈꾸겠는가?
다 남이고 나와 상관이 없는 인물들 뿐인데?

천만의 말씀 가룟유다가 과거의 인물로써 성경에 기록된게 아니다.
모조리 미래에 연관된, 미래사건에 연관된 인물로써 오늘날에도 등장하도록 되어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은 아무리 취소 시키고 싶어도 취소 시킬수 없는

다시 보기를 안하면 그만이다가 안통하는
오로지 현실로써 현재에 자리 잡은 미래사건이다.

 

십자가는 그래서 참 고맙게도 다 걸러낸다.

그 어떤 것도 통과 못하도록 말이다.

어딜 감히 주님의 피로 화목된 것을 개인 구원 따위에 이용할려고 성화하겠다고 하느냐 말이다.
남이 성화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자기만 남을 7번 용서하고 8번 용서하고
거기에 이용물로써 타인은 내가 용서해야할 대상물일 뿐이지
타인이 나를 용서하는 것은 도저히 용납못한다. 내 마일리지를 왜 남이 쌓는것에 도움이 되게 할 것인가?
부자청년이 그래서 등돌리고 돌아서는 것이다. 걸림돌에 제대로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미래사건이 덮쳐진 것이다.

과연 이 십자가를 자랑스러워 할 수 있을까?

과연 머릿돌 답군요 라고 감탄할 수가 있을까? 아니면 뭐 저런게 다 있노!!! 라고 반발하고 등돌릴것인가?

죄인을 불러서 회개케 한다는 의미는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미래를 반복하겠다는 것이다.

미래 보기 이다. 과거 다시보기가 아니라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반대로 의인이 구원이 된다는 식의 성화론이다. 즉 지난 방송 다시 보기이다.

그 배설물을 다시 보고 또 보고 또 본다는 것이다.

 

성경말씀을 그들은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과거의 사건이 하나도 없다

모조리 미래 사건 뿐이다.

 

다시 보기가 없다.

 

미래의 사건의 반복 발생 뿐이다. 같은 구절을 봐도 새로운 사건으로 터진다.

 

미래 사건이 덮치기 때문이다.

 

아뿔사? 십자가의 사건이 과거사건이 아니라 미래 사건이였다니 !!!!!

 

 

오늘도 이 무시 무시한 성경말씀 곧 미래사건의 반복을 본다.

 

 

하늘도 울어서 울부짖었던 그 미래의 십자가사건을 말이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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