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시편 70)

 

 

(15:29, 개역)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15:30, 개역)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15:31, 개역)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40:13, 개역)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40:14, 개역)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로 다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로 다 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

(40:15, 개역) 나를 향하여 하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놀라게 하소서

(40:16, 개역) 무릇 주를 찾는 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40:17, 개역)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건지시는 자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70:1, 개역) [다윗의 기념케 하는 시, 영장으로 한 노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70:2, 개역) 내 영혼을 찾는 자로 수치와 무안을 당케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로 물러가 욕을 받게 하소서

(70:3, 개역) 아하, 아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물러가게 하소서

(70:4, 개역) 주를 찾는 모든 자로 주를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로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70:5, 개역)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니 여호와여 지체치 마소서

 

 

유대인이 남을 비판을 할때는
자기 눈의 들보를 살펴보고 남을 비판을 하지

함부로 비판을 하지 않습니다.
즉 말 한마디 한마디를 하나님과 결부 시켜서 한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비판하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매우 매우 조심스럽게 말 한마디 한마디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마 7:3, 개역)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4, 개역)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마 7:5, 개역)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유대인들이 그런 상황이라는 것을 잘 아시면서

유대인들에게 뻔히 반박할 빌미를 오히려 더 주는 식으로써 말씀 곧 비판을 하시는 것일까요?

 

적반하장으로 들리도록 하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예수님을 무조건 이유없이 미워하게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예 제발 나 예수를 제발 미워해라 미워해 라고 동기유발을 팍팍 부여하시는 겁니다.


즉 예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원수 문제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 유대인이 곧 모든 인간이 믿는 하나님이란 결국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원수입니다. 원수!!!
모든 매사를 하나님과 결부 시켜서 행동하고 말하는 유대인의 그 하나님이 사실은 마귀이다는 겁니다.
그럼 시편에서 말하는 원수 문제는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 그 수수께끼가 풀리는 겁니다.

즉 이 말은 곧 모든 인간이 믿는 하나님이란 결국 마귀 이다 라는 말은
반대로 인간이 마귀로 취급하는 자는 단 하나 뿐이며 그 마귀가 예수님이다 라고 유대인들은 보고 있다는 겁니다.
그 어떤 인간의 믿음에서도 예수는 마귀로 취급받는다는 겁니다.
결국 인간의 믿음에서는 예수는 마귀이며 상대적으로 하나님은 철두철미하게 믿고자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의 믿음은 복수심입니다. 나를 인정해 달라는 거죠.
나의 믿음(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인정해 주지 않으면
다 죽여버리겠다 라고 호이짜! 호이짜! 쭤뿨쭤뿨!
살인의지를 표출하는 겁니다. 가인 제사.
반대로 예수님의 믿음은 바로 인간의 믿음을 거부하시기 떄문에 마귀로 취급받아 죽임을 당하시는 겁니다. 아벨 제거

그러니 그런 믿음 안 가지겠다고 할게 아니라(불가능합니다. 못 벗어납니다. 갇혀버렸습니다.)
그런 믿음을 들추어내시고 지적해 주시는 예수님의 믿음을 쳐다보자 말이죠. 물론 우리는 백번만번 무시하겠지만, 인정하지 않겠지만
그 지적이 아니면 마귀가 심은 믿음에서 못 벗어나니까
예수님이 직접 십자가에 죽으시러 오신것 아닙니까? 우리의 허물로 인해 말입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겠다는 자가 아니냐? 라는 말을 
지나가는 사람이 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이 그렇게 발언했던 그때의 충격을 먹은 사건이
이제는 그렇게 말한 예수 너가 도리어 하나님으로 부터 저주를 받고 있네 라고
우리가 참 잘 참았지 그래 라고 지나가던 발걸음을 멈출 정도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고 있다는 시선으로 주목하고 있는 겁니다.
괜히 비이냥 비웃는게 아니지요.

지금 시편 본문의 상황이 다윗이 그렇고
다윗의 노선을 따른 참선지자도 항상 마귀 취급받았고
예수님의 활동은 마귀 중의 대마왕 왕마귀로 취급한 이유는
인간의 모든 행동을 간파하고 있기에 성경말씀에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그 상황은 현재 2016년 도 또한 똑같은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즉 다윗은 주의 책에 기록도 되지 않을 사람들을 멈추시는 시선과 그들의 말에 주목하는게 아니라
미래의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고 외치는 겁니다.
사람들이 다윗을 비웃어서 아하 아하 라고 사람들이 그런다고 하는게 아니라
예수님을 비웃는 십자가 사건을 바라보고
즉 주의 책에 기록된 것을 보고 시편에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결국 이런 시선만이 원수문제를 풀수 있지
사람에게 맞겨진 원수문제가 아니다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원수가 없다고 수 차례 이야기 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원수 문제 입니다. 바로 우리죠.

결국 주의 책에 기록된 대로
항상 거짓선지자가 대접 받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마귀를 대접하고자 되어 있는 인간의 믿음이다는 것을
주의 책에 기록된 대로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런 내막을 십자가는 낱낱이 들추어내는 거리끼는 걸림돌인 겁니다.
싫어할 수 밖에 없지요.

이것을 지난 시간에 수셔대기 또는 말려들도록 하기 라고 표현했습니다.

함정 복음이요 실족 복음이다는 겁니다.

 

유대인을 대상으로 말입니다.

이방인이 아닙니다. 유대인 말입니다.


모든 인간의 대표성인 유대인 말입니다.
이방인은 왜 제외 되었나?
제외 된게 아니라 유대인을 바짝 약올리고자 유대인이 가장 싫어하는 개같은 이방인을 의도적으로 택한 겁니다.
자꾸 유대인은 이방인 보다는 낫다 라는 의식이 이미 뼈속 까지 박혀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예수님을 평가하는 겁니다.

예수라는 자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럽게 등장해서 미운짖만 골라서 해서 미운거지
사실상 뼛속까지 미운 원래의 원수는 이방인이다는 의식을 가진것을 예수님이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거기에 예수님이 아예 자신이 그 미움을 자기 쪽으로 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원수 문제 때문에 말이죠.
그래 내가 이방인이다 우짤래 ~~~~
 

상대적인 이방인은 유대인에게는 원수인데 이 원수는 또 무조건 일방적으로 편애하네????

아무리 바리새인이 의도적으로 예수님께 머리 숙여서 친화를 요청하면서 가까이 다가가도

예수님은 무조건 바리새인에게 시비를 거는 겁니다. 예수님이 먼저 말입니다.

미움 받고파서 작정을 하신듯 말이죠.

 

미움받을 권리 라는 책도 나왔던데, 미움받을 용기 였나? 제목만 봐도 엉터리죠.


주의 책에 기록이 되었기에

다윗이 밉상스럽게 보여서 의도적으로 눈물을 주의 병에 담는 겁니다.

 

그렇듯 예수님이 오히려 먼저 바리새인에게 어서 너희들 얼굴을 드러내어라 라고 시비를 겁니다. 긁어 대요 긁어대. 슬슬 ~~~~~

 

그 이유는 바로 유대인의 하나님과 연관된 입장에서 시비를 먼저 주님 쪽에서 거시는 겁니다.
즉 너의 아비인 너의 나무가 누구인가를 드러내라 라는 겁니다. 너는 그 나무에 그 열매잖아 라고 말이죠.

결국 예수님이 먼저 시비를 거실 정도면

인간은 다 거기에 말려들어 넘어질 정도이지

누구나 예수님의 그 시비에 말려들지 않을 것이다는 것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집요합니다.

 

왜 그렇게 집요한고 하니

주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사랑인데 왜 시비걸고 비판하냐 말이죠.

 

역설적이게도 너는 사랑의 열매가 아니니까 사랑되신 예수님이 시비를 거는 겁니다.

사랑 아니다 라는 것을 알아라 라고

 

사랑의 기능은 오로지 죄를 겨냥합니다.

마치 의사는 건강한 자를 상대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환자만을 상대하는데 환자는 숙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의사는 숙주인 환자 속에 있는 병을 상대로 하지 숙주를 상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 병 때문에 자신의 의사됨의 기능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사랑 또는 용서

또는 피 흘리심은

상대적인 것에 부합되는 기능이다는 거죠.

 

무엇입니까?

죄죠

마귀죠.

 

그럼 예수님은 무조건 유대인을 시비거시는 방식이다는 겁니다.

요즘으로 치면 교회 다니는 사람을 무조건 시비거는 겁니다.

다리 걸어 넘어뜨리는 식이다는 겁니다.

ㅋㅋㅋㅋ 교회 다니지 마세요 ㅋㅋ

과연 너희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기는 믿냐 라는 식으로 먼저 시비거는 겁니다.

하나님을 제발 제대로 믿어라 라는 뜻이 아니라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마귀이다 라는 뜻에서 다리 거시는 겁니다.

즉 마귀를 찬양하는 교회를 왜 다니냐 라는 거죠.
다니는 교회란 없습니다.

우리 자체가 교회인데 교회로 부터 핍박받는 교회인 탕자이다는 겁니다.
교회는 정죄하기 바쁜 참으로 마귀랑 어쩜 닮았는지!!
지들끼리 서로 서로 정죄하고
누가 더 복음적이다 라고 서로 이단으로 몰고
그 나물에 그 밥으로 도찐개찐 도토리 키 재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안 넘어지고 실족지 않은 자가 복된 자이다는 거죠.

그래서 하나 하나 일일이 다 다리걸어 넘어뜨리는 겁니다.

바위를 두 번 친 모세도, 나만 남았나이다 라는 엘리야도

율법대로 네 배나 갚으라 라는 다윗도,

안 넘어지는 놈이 없습니다.
저주 받아 마땅한 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이 자기 얼굴에 침뱉기를 하듯이
다 달려들어 저주를 퍼붓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라!!
하나님으로 부터 저주 받은 자 이다.

제대로 말려든 것이죠.

맞잖아요 저들의 하나님이 결국 마귀이니까 마귀로 부터 저주 받은 자가 예수님이고 유일하게 구원받은 복 받은자 아닙니까?
예수님 외에는 복 받은자 없습니다. 왜? 마귀로 부터 저주 받았으니까!!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까!!

저들 다윗 모세 엘리야 베드로 그렇게 다들 넘어졌던 자가
이 예수님의 저주받으심 때문에 졸지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예수님 때문에 복받은 겁니다. 


넘어졌던 자가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겁니다.

그들이 믿음이 좋아서? 아닙니다.

예수님이 일으켜 줬기 때문입니다. 네 맞습니다. 반칙입니다. 반칙

편파 편애 복음입니다. 이 얼마나 실족케 하는 복음입니까?

누구에게는 일으켜 주고 누구는 넘어진채로 냅뚜고


이게 오히려 더 실족케 하는 겁니다. 십자가가의 무조건 용서가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것이 알고 싶지 않습니까?

십자가는 모든 죄인을 위해 흘리신 피 라는 것을?
편파는 편파인데 십자가를 보여줘도 안볼려고 한다는 겁니다.

(민 21:8, 개역)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민 21:9, 개역)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요 3:14, 개역)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개역)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개역)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7, 개역)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8, 개역)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사 6: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마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막 4:12, 개역)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행 28:26, 개역)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그러니 핑계치 못하는 겁니다.

 

마귀는 그래서 십자가를 어떻게 해서든 공격합니다.

심지어 십자가를 운운하면서 친화적으로까지 광명한 천사 노릇을 하면서

십자가를 믿으세요 라고 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오늘날 이 세대를 보세요 십자가를 믿으라고 하지, 믿지 말라고 하는 자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도 지금 다윗의 상황과 똑같습니다. 한치도 벗어난 상황이 없습니다. 예외가 없어요.


(11:6, 개역)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7:23, 개역)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
15:18,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5:19, 개역)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15:20, 개역)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15:21, 개역)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15:22, 개역)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15:23, 개역)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15:24, 개역)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15:25, 개역)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15:26, 개역)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15:27, 개역)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16:1, 개역)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16:2, 개역)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16:3, 개역)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16:4, 개역)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시비를 집요하게 걸면
사람이 참다 참다 더 이상 한계에 부딧히게 되면

실족하여 넘어져서

역으로 당한대로만 공격하게 되어 있는데

 

그때 비로소 충돌이라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환자를 의사가 가만히 두질 않습니다.

 

먼저 청진기로 보이지 않는 몸 속의 상태를 파악합니다.
엑스레이도 찍고 온갖 검사를 합니다.

이래 저래 진단을 한 후에

드디어 몸에 칼을 대기 시작합니다.

병을 직접 건드린다는 겁니다.

죄를 직접 건드린다는 거죠.

마치 여리고성 하루에 한 바퀴 돌다가 마지막날 중심을 치는 것과 같지 않나요?
예수님이 3년 동안 뺑뺑이로 수셔대다가 마지막 순간에 예루살렘을 치시듯이 말입니다.
드디어 예루살렘을 건드리시고 죽으시는 겁니다. 원수의 성문을 여시는 거죠.

 

이게 사랑입니다.

칼로 몸을 찢지 않으면

몸 속에 있는 중앙센터 본부의 암덩어리를 건드릴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 증거 시작하기 전에

마귀로부터 광야에서 3가지 시험을 받으시는데

그 이유는 마귀가 이미 유대인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절대 인정 안하지요,

지금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절대 인정 안합니다.

 

저는 이번주에 아주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뭐 평상시 다들 느끼시는 것이지만

왠지 새삼스럽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뭔고 하니

어머니와 이런 저런 성경 말씀의 내용을 나누다가

문득 혼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 하나님 참으로 얄굽네 ~~~~~

참선지자들의 모습을 보면 참으로 기이한 엽기적인 행동 곧 이상한 행동을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다 시키시는데 있어서

뭔가 이상한 점이

하나 하나 꼼꼼하게 모두다 의미 있게 하나 하나 그 이상한 일들을 하신다는 겁니다.

 

뭐 에스겔이 옆으로 몇 년 반대로 누워 또 몇 년 등등이

북이스라엘 멸망 남유다 멸망 과 연관되었고

저번에 말한 예레미야의 눈물

또 이사야 선지자의 부정적인 표현들 등등이

뭔가 하나 하나 마치 숙제를 하듯

미션을 완성하듯이

세세히 꼼꼼히

아무리 봐도 아무런 의미 없는 일들인 하나 마나 한 일에

얼마나 정성을 들여서 꼼꼼히 하더라 말이죠.

 

마치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듯이 말이죠.

광야에 뭐가 있는데요

아무것도 없는게 광야 아닙니까?

 

왜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을 왜하냐 말이죠

복음을 증거할려면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들이 있는 곳에 해야지

 

그런데 그런 것 하나 하나가 예수님과 연관된 의미이다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할 쯤에

오히려 세례요한은 이상하게 빨리 퍼득 퍼득 죽을려고 하는 식입니다.

이것 또한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성경 전제는 이상한 사건들만 있을 뿐이지

인간들의 해석하는 것 꼬라지 보면

그저 구원 구원으로만 보고 있다는 점에서

그런 점에서 유대인에게 먼저 시비거시는데 있어서

의사의 칼은 유대인을 가만히 두지 않고 먼저 시비를 겁니다.

 

그러면 참다 참다 못해서 폭발하여서

비로소 그 숙주로써의 그 증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럼 그 증상들이 뭔고 하니

 

어쩜 그렇게 딱 맞는지

잠시 떠난 마귀가

인간 속에서 발동하여서

예수님께 반발하는 모습들입니다.

이것이 복음적으로 얼마나 중요한고 하니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

악마가 반발하는 모습과 연관이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은 일을 참 잘 하신 겁니다.

참 의사 답다 참 구원자 답다 라는 거죠.

 

그런데 오늘날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을 보면

악마의 반발 현상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야 당연히 가짜 복음이니까 그런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요.

 

아무도 마귀가 발악하는 현장이 없이 복음을 운운하는 식이니

이미 우리 속에 잘못된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복음이 건드리는 마귀가 우리 속에서 활개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 제가 이번주에 어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주 특이하게 느낀 점이 뭔고하니

 

왜 성경말씀은 탕자를 선택하고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는 맏아들은 버리시는가 하는 점에서

 

이 부분만이 아닙니다 성경 전제가 그러합니다.

 

그런 점에서 깜짝 놀랬던 것이 바로

 

예수님 본인이 바로 탕자이다 라는 의미이다는 겁니다.

성경에서 괜히 이런 특이한 내용으로만 기록되어 있는게 아닙니다.

예수님 본인이 불의한 청지기 이다는 겁니다.

예수님 본인이 성전에 두 사람 중 하나인 세리 이다는 겁니다.

예수님 본인이 두 강도 중에 한 쪽 강도인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는 자가 바로 예수님의 영이 들어간 예수님 본인입니다. 자기자신을 나타낸 겁니다.

예수님 본인이 실로암 소경입니다. 저 눈으로 본다고 하는 자가 오히려 소경이다 라는 것을 밝히고자 말입니다.

예수님 본인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이다는 겁니다.

예수님 본인이 99마리 양이 아닌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이다는 겁니다.

예수님 본인이 바로 우물가의 여인이다는 겁니다.

에수님 본인이 거지 나사로 였습니다.

그러니 거지 나사로 될려고 하지 마세요 이미 거지나사로입니다.
하나 됨의 십자가 때문이지 거지 됨 때문이 아닙니다.


(2:12, 개역)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2:13, 개역)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2:14, 개역)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2:15, 개역)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2:16, 개역)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2:17, 개역)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2:18, 개역)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2:19, 개역)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2:20, 개역)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21, 개역)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2, 개역)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2:1, 개역)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 십자가로 하나 이기 때문입니다. 원수 되었던 우리와 화평을 이룬 하나됨을 미리 나타낸 겁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진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원수도 없어요 없어, 막힌 담을 허물줄 모릅니다. 우리는.

 

뷰티 인사이드 라는 영화에 나타난 매일 매일 얼굴이 바뀌는 주인공 말입니다.

 

그래서

 

나무는 열매를 보고 알잖아요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때려 죽어도 저들과 하나 되기 싫어하는
바로 그런 죄인 창녀 세리 강도와는 때려죽어도 하나 되기 싫어하는

그런 자들과 하나 되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자를 말입니다.

(9:11, 개역)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님 본인이 죄인이요 창녀요 세리요 강도이거든요.

 

(11:19,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21:31, 개역)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그 나무에 그 열매 곧 하나 됨으로써 밝히고자 실족케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우리가 더럽다고 고개를 돌리는, 우리가 미워하는 것만 골라 골라서 ...

 

(7:16, 개역)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7:20, 개역)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6:44, 개역)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은 탕자를 선택함으로써 맏아들의 아버지임을 거부하는 식입니다.

자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먼저 시비를 거시는 줄 아실겁니다.

 

저들은 열매일 뿐이니 저들의 아비를 시비 거는 겁니다.

 

즉 어디까지나 보호자 싸움입니다.

 

한달전인가? 두달 전인가?

어머니께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상대하지 않고 오로지 마귀만을 상대로 하는데

마귀가 눈에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상대하느냐?

마귀의 증상물을 통해서 마귀를 상대하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들추어내시는 그 마귀를 거치지 않으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물론 늘 이야기 했던 것이지만

 

그래서 성경은 마귀 읽으라고 준 것이지

우리 읽으라고 준게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아주 도발적인 발언이지요

이 말 때문에 막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얼마전에 그랬구요.

 

그럼 성경은 누가 읽는데?

성경은 읽는게 아니라

거꾸로 성경이 나를 읽는 겁니다.

성경 말씀이 나를 읽는데 내 속에 마귀를 상대 한다는 거지요.

 

즉 내가 주체가 되어서 읽기라는 대상물에 성경이 있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정반대로 성경말씀이 주체가 되어서 나를 읽어나가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믿음도 읽기도 기도도 모조리 대상물로 삼았다는 점에서

마귀의 3가지 시험이 말하는 바는

결국 그렇게 마귀에게 다 장악되어 갇혀버린바 되었다는 겁니다.

 

만약 한 사람이도 넘어가지 않은자가 있다면

예수님이 굳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단 한사람도 없을 정도이기에 직접 오신 겁니다.

 

오자 마자 즉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자마자 가장 먼저

마귀의 정체를 먼저 밝혀 버리니까

마귀는 들통난 입장에서 잠시 떠나가는데

언제 등장하는고 하니

바리새인(유대인의 대표성)이 예수님으로부터 먼저 시비당했을때에

방어하고자 나타나는 겁니다.

 

어디 어디 안 보이던데

물론 안 보이죠.

바리새인이라는 열매를 통해 그 아비인 마귀를 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 어떤 자입니까?

하도 우리가 들어서 나쁜놈이라고 알지만

 

예수님이 시비 걸기 전까지는

당대에서 제일 존경받는 제일 모범 시민이자

다들 본받고 싶어 멘토로 삼는 선생입니다. 선생

학자요 선생이요 실천가요 선교사죠

 

아무튼 우리 같은 사람들은 흠잡을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인간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툭툭 시비를 거니 추풍낙엽처럼 우수수수 떨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시비를 안 걸어 줬으면 몰랐을뻔 했다 말이죠.

얼마나 감사합니까?

 

바로 이런 상황을 미리 덮쳐져서 벌어진 사건을 오늘 시편 70편으로 보시면 됩니다.

 

참 쉽죠잉

 

괜히 복잡하고 길게 두서 없이 말했는데

이번주에 느낀 점은

 

하나님이 다르다 라는 겁니다.

 

열매를 의도적으로 갈라서 나무가 다르다 라는 것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예수님은 자신을 탕자로 의도적으로 보여주신다는 점에서

아마 오늘날 교회도 또 현재 현대의 교인들도 다들 거부할 겁니다.

 

교회에서 배워봐도 결국 인간들의 하나님은 맏아들의 하나님입니다.

그런 믿음이 형성이 된 입장에서

 

예수님의 등장 곧 탕자의 등장만이 사건이 되지

 

맏아들이나 탕자나 같은 아버지이다 가 되면

사건이 벌어질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도 이스라엘 내부에서 하나님이 둘로 갈라진다는 겁니다.

결국 나무가 둘이다는 겁니다.

열매가 둘이 되는 바람에

나무도 둘로 나누어진다는 겁니다. 이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깨끗한게 거룩이 아니라

갈라지는 분열이 거룩이다는 겁니다.

 

제가 지난 달에 어머니에게 아 참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이 잘못 믿어서 엉터리 하나님을 믿게 되어서

이사야가 임마누엘 즉 니 하나님과 내 하나님이 다르다 라고 공격하는게 아니라

 

하나님 본인이 두 개로 분절이 되는 바람에

인간들은 안이하게 아무것도 모른채

원래 하나님을 믿는 식으로 그냥 계속 쭈욱 믿어 왔는데

주님 쪽에서 두 개로 분절이 되어서

인간들을 속이는 식으로 시비를 건다 라고 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인간이란 유대인만 말합니다.

이것이 다윗 이후의 참선지자의 등장 배경도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본인이 두 개로 갈라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두 개로 갈라져서

아무도 못 믿도록 아니

이미 믿을수 없는 상황으로

저쪽 하나님을 믿는 판국에

두 주인을 못 섬기잖아요

 

예수님 본인이 말한거 아닙니까?

그래서 새로운 주인으로써 직접 자기자녀를 뽑는 식으로

새판을 짜니까

 

기존의 판에 놀던 자는 다 맏아들 일 수밖에 없는

다 속아 넘어간다는 겁니다.

 

속이시는 하나님이니까 말이죠.

 

이것을 감지하면 또 다행이죠

감지 조차도 못해요

상상도 못했으니까

 

요나 선지자도 하나님한테 속아서 시위를 하는 판국인데

일반인인 우리는 오죽 하겠습니까?

오로지 다윗의 노선 딸랑 한 가닥의 노선에서만 벌어지는데!!!

보이면 따지든 달래든 우회를 하든 동조하든 어떤 조치를 취하기라도 하죠.

그 한 가닥이 머리카락 보다 더 얇아서 비이질 않아요 보이질 않아!!

초미세먼지와 같다 말이죠.

 

무슨수로 봅니까?

 

그냥 속을 수 밖에

 

그런데 속는게 억울한게 아니라

 

모조리 다 마귀에게 잡혀서 이 마귀를 거쳐서 마귀의 손에서 건지심으로써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보여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에게 안 잡혀 본자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여전히 모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럼 구약에서 누가 그런 예수님을 제대로 봤는가?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성경말씀을 읽을 자가 없다는 겁니다.

다른말로 제대로 해석할 자가 없다는 겁니다.

 

성령이 아니면

예수님이 직접 마련해 주시는 영인 성령

그럼 인간 속에는 정직한 영이 없다

없습니다 라고만 해야할 판국입니다.

 

세리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등등 자꾸 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여기서 이상하게 갈라집니다. 이미 열매들 속에서 갈라집니다.

누구든 대세를 따릅니다. 그 대세는 십의 이조 이레에 두 번 금식, 토색하지 않고

방탕한 삶을 사는 저 세리와 같지 않게 방탕치 않게 해주심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저나 여러분이나 이것이 대세입니다. 이 하나님의 열매로써 자신을 의식하는 겁니다.

저 나무로 말입니다.

 

그런데 세리가 졸지에 다른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다윗이 졸지에 다른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성전 안에서 두 사람이 각각의 하나님으로 갈려집니다.

두 나무로 갈려집니다.

두 열매로 갈려집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거룩이란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겁니다.

청결 경건 이런게 아니라

몸 뚱아리 속에 암덩어리가 있는데 아무리 곁을 반짝 반짝 빛이 나도

속은 암덩어리 이다는 겁니다.

 

결국 거룩이란 그 암덩어리를 건드려야 진짜 거룩아닙니까?

 

제가 아무리 수많은 목사들 만나보고

많은 교회를 다녀봐도

거룩을 단 한놈도 제대로 말하는 놈을 못 봤습니다.

한 수 가르치겠다고 어른으로써 젊은이에게 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이것은 장로가 아니라 마귀새끼더라 말이죠.

목사는 더 심하고요.

 

가장 기본적인 기초인 거룩 조차도 모르더라 말이죠.

그들이 말하는 것은 천주교 불교 도교 유교 거기서도 다 하는 말입니다.

어쩜 그들 나무의 열매가 아닌가 할 정도로

어쩜 그리 똑같은 소리를 하는지

 

그래서 예수님이 그 사람을 자기 열매로 삼았는데 누구인가?

그게 다윗이다 라는 겁니다.

 

다윗이 자기에게 정직한 영이 없다 라고 합니다.

 

우와 이것이 바로 다른 나무의 열매로써의 발언입니다.

 

정직한 영이 없다~~~~~~~~~

 

이것을 말하는 자를 본적이 없어!!

 

그럼 정직한 영이 없으면 뭐가 있는가?

 

항상 죄가 있답니다.

 

(51:3, 개역)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우와 이것도 그 나무의 그 열매로써의 발언입니다.
그 앱 App의 그 자식

꼭 욕처럼 들리는데 ~~ ㅋㅋㅋ

예수님 이꼬르 탕자 예수님 = 탕자


예탕 요요~~~, you say , I say , 예 탕 / 예 탕 / 예 탕 / yo yo~~~

 

항상 죄가 있습니다.

 

이것도 말하는 자를 본적이 없어요 없어

 

(51: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51:2, 개역)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51:3, 개역)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51:4, 개역)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51:5, 개역)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51:6, 개역)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51:7, 개역)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51:8, 개역)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51:9, 개역)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51:10, 개역)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51:11, 개역)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지금 다들 오해를 하시는데

아하 성전을 사흘만에 짖는 자여? 라고 사람들이 조롱하잖아요!!

 

다들 인간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을

인간들이 예수님을 못땐 짖을 먼저 하는 것으로 보는 겁니다.

 

아닙니다.

 

계속 제가 아니다 라고 하지요.

그럼 뭡니까?

눈치 채셨겠지만

 

누가 먼저 시비를 건 겁니까?

예수님이 먼저 걸었다는 뜻에서

 

아하 참 너가 전에 이런 말 했었지! 라고

떠올리는데

얼마나 제대로 홈을 팠으면 즉 구멍을 뻥뻥 뚫었으면

그것을 기억해 내어서 예수님에게 말하고 있냐 말이죠.

 

그 정도로 그들은 충격먹었던 발언인 겁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으로부터 모욕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성전을 헐어버려라 내가 사흘만에 짖겠다 라는 발언은

유대인에게서는 최대의 모욕입니다.

 

즉 하나님을 모독 한 겁니다.

 

참람죄죠.

 

우리가 예수님에게 유대인들이 죄목을 뒤짚어 씌운 그 몇가지를 잘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에게 뒤짚어 씌운게 아니라

최고의 모욕을 받았기에

먼저 가장 모욕적인 공격을 받았기에

 

유대인은 예수님에게 제대로 말려든 겁니다.

 

즉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의사 기능인 감추었던 암덩어리를 제대로 들통나서

죄인임을 환자임이 제대로 들통났다는 겁니다.

 

그럼 거기서 주여 저를 고쳐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나오는

탕자가 바로 예수님의 기능에 부합이 되고

 

모욕을 당한대로 되갚고자 예수님에게 죄목을 뒤짚어 씌우는 것은

의사가 필요 없다고 외치는 건강한 자이다는 증거입니다.

이로소 저들의 나무가 밝혀 지는 겁니다.

그 나무에 그 열매로써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다윗이 쫏겨난 것을 계수 즉 수를 세고 있고

다윗이 눈물 흘리는 그 눈물을 주의 병에 담는

 

아주 마조히즘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는

오히려 사디즘적인 폭력성이다는 겁니다.

 

사도마조히즘

 

이것이 역설적인 웃음 곧 전복성 가로지르기 채널돌리기

7천명이 남았나이다. 770번 용서 받기 등등

해학과 즐거움과 기쁨의 노래가 되는 겁니다.

 

사건으로써의 노래가 말이죠.

 

사도 마조히즘은 결국 짝꿍이다는 것이거든요. 같은 패거리 한패이다는 겁니다.

상호보완적으로써 이성은 감정의 시다바리 보충물로 작용하듯이 말입니다.

 

또는 다른 표현으로 숭고한 히스테리 라고 합니다. 이랬다 저랬다 불편한 거룩

 

이것을 예수님이라는 나무가 펼치고(99마리 양 버리고 한 마리 잃어버린 양 찾듯이)

그 열매인 탕자가

이 의사를 외치고 있는 겁니다.

나의 눈을 뜨게 한 자는

모세가 아니라

지금 너희도 봤듯이 예수님이라고

 

그런데 마귀자식인 바리새인은 안본척 안들은척

너는 예수 제자이지만

나는 모세 제자이다고 우깁니다.

 

모세도 예수님에게 살려달라고 변화산에서 탕자로써 외쳤는데

 

이 보세요

바리새인 제대로 말려들었지요.

 

우리도 말려들어야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말려들지 않았다면

무슨 수로 예수님을 보겠습니까?

 

이미 죽은 양반을

바울이 선언해 놓고서는

다시 바울이 그 양반은 살았다고 외치는

 

이 숭고한 히스테리 ~~~~~~~~~~

 

바울 자신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줄 알았는데

도리어 바울이 말려들었던 겁니다.

 

때려죽어도 하나님 한 분 뿐이지

다른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는 그 일신교의 대표주자 바울이

자기가 외친 것을 다시 취소하고서

자기가 이단으로 몰았던 예수님을 자기가 가장 최전방에 외치는 자로써

죄인 중의 괴수로

이단 중의 이단으로 활동을 개시하는 겁니다.

 

아마 이런 바울이 오늘날 예수님을 외치면

이단으로 몰아서 다들 죽이고 싶어서 환장해 할 겁니다.

바울의 열심은 인간의 열심을 넘어설 정도로 얼마나 집요하겠습니까?

죽여서 쓰레기 통에 버리면 또 다시 벌떡 일어나 아침부터 시비 걸겄이고

또다시 조 패서 쓰레기 장에 버려버리면 또 다디 아침에 벌떡 일어나서 다시 시비를 걸어버리니

 

이것이 오늘 다윗이 그런 짖을 하는 겁니다.

 

너희들 나를 조롱했지!!!

 

앗싸 성공 드디어 몇 번 채웠다 라는 식으로

자꾸 자꾸 눈 앞에 알짱거리면서

구타유발을 유도하는 겁니다.

 

그래야 우리 속에 있는 마귀가 들썩 들썩 거리는 것을 보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아기 예수님도 죽일려고 했던 마귀인데

이제는 예수님이 다 자라서 직접 마귀를 수시고 다니는 겁니다.

점잖은 인간들이 발악을 하면서 마귀얼굴로 변합니다.

 

가인이 제사를 안드린게 아니지요.

더 나은 제사를 드릴수 없었다는 겁니다.


그럼 아벨은 더 나은 제사를 드렸나요?

아니요 안드렸습니다.

 

예수님의 편파적인 해석이 그냥 덮쳐졌는데

뭘 해도 죄가 되기 때문에

죄인으로써

환자로써 의사가 다가간 겁니다.

 

아벨이라는 탕자를 그저 맨발로 멀리까지 나와서 마중했던 것 뿐입니다.

이게 더 나은 제사인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이지

그 십자가가 아벨에게 덮쳐진 것이지

 

아벨이 더 나은게 아닙니다.

아버지의 탕자에 대한 사랑이 더 나은 제사인 겁니다.

 

이것을 거부하는 역할로써 맏아들이듯이

가인은 그 탕자를 용서하는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데

눈에 안보이니

예수님 대신 아벨을 죽인 겁니다.

 

가인 덕분에

예수님과 아벨이 졸지에 연결이 된 겁니다.

 

그 나무에 그 열매로써 말입니다.

 

그리고 가인은 졸지에 거리끼는 걸림돌에 걸려들어서

자신의 아비를 그만 들통내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아벨이 아니라 가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뭘 해도 죄인입니다.

다윗은 아벨이 아니라 가인입니다.

그래서 죄인임을 고백하고

내 속에 정직한 영이 없다고 외치고

고쳐달라고

의사에게 요청하는 겁니다.

 

앞으로도 정직한 영이 없습니다.

가망이 있다면 구하지도 않습니다.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고쳐달라고 외치는 겁니다.

 

환자가 드디어 자기 속에 있는 암덩어리가

자기 보다 더 크고 더 세고 더 힘있고 더 권력이 있는

자신은 이 가인의 자리에서 못벗어나는 자임을 제대로 인식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의사의 사랑 때문에 알게 된 것이기에

얼마나 기쁠까요? ~~~~~~~~~~

 

사도바울이 그래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죄용서함을 받은 다윗의 기쁨을

또 다윗은 아브라함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죄용서함을 받은 아브라함의 행복을

마치 이제서야 통했다고 습관적인 성경읽기로 성경이야기 속의 아브라함 이야기

다윗이야기가 이제야 이제서야 드디어 덮쳐왔다고 기뻐서 외치는 겁니다.

 

성경 말씀이 드디어 죄인인 나를 읽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된다는 겁니다.

내가 성경을 읽은게 아니라

성경이 나를 읽은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라고

 

그럼 아하 아하 성전을 사흘만에 짖는 자여 라는 그 조롱을 들을려면

그 말씀이 나를 읽을려면

 

그 말씀이 나를 조롱해야 합니다.

 

제가 말했잖아요 예수님이 먼저 조롱했다고

 

먼저 시비 걸었다고

 

내가 또는 우리가 예수님을 조롱하는게 먼저가 아니라

우리는 예수님이 시비 걸지 않는 이상

마귀 자식이라서 광명한 천사노릇하듯

점잖아서 댓구 안할려고 합니다.

참고 참고 참지 울긴 왜 울어 라는 식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조롱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것이 마귀가 심은 겁니다.

얼마나 이 암덩어리가 나보다 셉니까? 나 보다 크고 세기 때문에

조롱할 마음이 추호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쪽에서 먼저 나에게 시비를 걸고 나를 조롱해야 합니다.

 

도저히 참을수 없는 것을 건드렸을때에

내 속에 있는 마귀가 비로소 그 반발하면서 반응합니다.

 

아하 !!! 성전을 사흘만에 짖는 자 예수여!!

왜 당신은 하나님의 성전도 모독하고

왜 당신은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왜 당신은 세금을 가이사에게 못바치도록 선동하여

유대사회를 불안케하고 로마사회도 불안케 반역을 주동하느냐

 

(23:2, 개역)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이 세 가지 죄목은

결국 예수님께서 복음선포 바로 전에 마귀의 정체, 악마가 인간을 장악한 내용물을 들추어낸

먼저 있었던 사건의

 

반작용으로써의 원한의 한풀이로써 죄목을 씌우는 겁니다.
즉 예수님이 먼저 시비 걸었다는 것을 고대로 갚는 복수이다는 겁니다.


46년동안 지은 성전을 사흘만에 짖는다? 경제죠.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해서 가난한자 문제를 해결하라

 

(4:3, 개역)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27:40, 개역)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니가 뭐 하나님의 아들이다고? 참람죄 참칭죄

곧 종교 다, 기적문제 구원문제 해결해 달라~~

 

(4:6, 개역)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27:43, 개역)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지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22:70, 개역) 다 가로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

 

 

뭐 세금을 하나님에게도 가이사에게도 내지 말라고?

이것은 정치 문제입니다.
경배문제. 엎드려 절하라, 경배하면 사랑해 주고, 절하지 않으면 미움을 받을줄 알아라 라고 마귀가 시험을 하는 겁니다.

 

(4:8, 개역)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4:9, 개역)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22:15, 개역)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22:16, 개역)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22:17, 개역)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

(22:18, 개역)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22:19, 개역)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2:20, 개역)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22:21, 개역)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22, 개역)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23:2, 개역)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즉 이들의 고소 조차도

예수님이 시비건 대로 짜놓은 각본대로 말려드는 고소로써

마귀가 그들의 아비로써 그 애비에 그 자식으로써의 참 마귀 자식 답게

고소하는 내용들이 예수님이 이미 먼저 들통낸 방식으로 나타나는 식 입니다.

 

(외모 곧 얼굴은 곧 국가권력과 연관이 됩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안 보시지요잉?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지요잉? 라고 말씀을 인용한다는 자체가 이미 자기 꾀에 자기가 말려드는 겁니다.

세금 문제를 물었는데 주님은 동문서답하시면서 외모 이야기를 저들이 끊고 단절시킨 것을 오히려 잇습니다. 동전에 누구 얼굴이 새겨져 있냐 라고 말이죠. 즉 너희는 그 얼굴에 갇혔다는 겁니다. 곧 국가 권력인 거지요.

 

즉 그 권력의 얼굴인 마귀를 좋아한다는 것이고

상대적으로 누구 얼굴은 미운 겁니다. 미워 죽어요 미워서.


그 외모에 얼굴에 갇혀 버렸기에 너희는 예수님의 얼굴을 곧 예수님의 나라 또한 싫어하는
싫어버린바 된 걸림돌의 나라 걸림돌의 얼굴로써
가이샤의 얼굴에 또는 국가에 또는 권력에 또는 중심에 갇혀 버린 자이다 라는 겁니다.)

 

결국 인간의 믿음이란 예수님의 믿음의 반작용으로써의

원한이요 복수이기에 인간의 믿음은 살인의지인 겁니다.

그래서 제발 예수 믿지 말라고 하는데

막 째려 봐요 ㅋㅋㅋㅋ
안색이 변한 거죠. 즉 얼굴을 통해서 국가권력을 비로소 나타내는데
그 국가가 마귀권력인지? 싫어버린바 된 얼굴인 예수님나라인지를
얼굴을 통해서 나타내는 겁니다.

 

얼마나 미웠으면 막 째려볼까요? 죽이고 싶어 미치는 겁니다.

저를 죽이는게 아니라

예수님을 죽이는 겁니다.

아벨을 죽인게 아니라 예수님을 죽인 겁니다.

그러니 제사 안 드렸다면 안죽였거든요.

안 믿었다면 안죽였어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으니까 예수님을 죽인 겁니다.

예수님 본인이 자꾸 자칭 하나님이라고 하니 안 죽이고 배기겠습니까?

누가 지금 시비를 걸면서 조롱하는 겁니까?

하나님을 조롱하잖아요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은 곧 나를 조롱하는 것인데

그 예수 죽여버려야지요.

그러니 그 하나님이 마귀였던 거죠.

예수님만이 하나님인데

하나님을 믿으니까 예수님을 죽인 겁니다.

안 믿으면 안 죽여요. 살인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이미 이런 말 자체도 조롱의 수준 아닙니까?

믿지 말라는 둥

하나님을 믿으면 예수님을 죽인다는 둥

조롱에 가까운 아니 조롱 그 자체죠


그러니 참람죄로써

참칭죄로써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습니다.

구약때에 옷을 찌는 것은 자신의 육체를 찢는 회개와 같은 의미입니다.

회개는 나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 아닙니까?

그 정도로 더럽고도 더러운 죄악을 들었기에

거룩을 지키기 위해서 그 더러움을 씻고자 자신의 육체를 찢듯이

회개를 하겠다는 겁니다.


타인의 죄악 때문에 자기자신마저도 그 불경스러운 죄악이 미칠까봐

자살하듯이 거룩을 유지하겠다는 것이

대제사장이 예수님으로부터 내가 그로다 라는 말을 듣고 나타낸 반응입니다.

 

자 보세요 그러니까 회개 하지 마세요

거룩 지키지 마세요.

자살 하지 마세요.

옷 찢지 마세요. 왜 죄 없는 옷을 자꾸 찢냐 말이죠.

마음은 때려 죽어도 못 찢으면서

복수심에 불타 자살이나 하니 원

 

(26:59, 개역)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26:60, 개역)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26:61, 개역)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26:62, 개역)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26:63, 개역)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26:64,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26:65, 개역)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26:66, 개역)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26:67, 개역)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26:68, 개역) 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자 이제 이 하하 하하 또는 아하 아하 라는 표현이 어떻게 거꾸로 미래에서 과거인 다윗에게로 덮쳐져서 벌어지는지?

 

다윗은 이 사건을 드디어 획득하듯이

십자가 사건을 소홀히 여겨지 않고 이 약속이 덮쳐지는대로

매맞는 것을 계수하고

아하 아하 라고 조롱하는 것을 계수하고

뺨맞는 것을 계수하고

눈물 흘림으로써 병에 까까득 담아서

(56:8, 개역)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책에 기록된 것을 누리게 되었다고 아주 좋아라 합니다.

 

이 얼마나 폭력적인 사랑입니까?

 

죄악을 시기하는 폭력성

죽음 곧 사망의 권세를 기여이 이기는 투기심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먼저 죽음에게

사망에게 먼저 시비를 걸고 먼저 조롱을 하는

 

이 겁 없는 사랑이 바로

우리를 수셔 대면서

 

무엇이 현실인가를 제대로 보라고

우리에게 까지

나에게 까지

 

그런 시비로 조롱을 하면서 십자가로 수셔대시는 겁니다.

 

이 십자가라는 사랑이 아니면

우리는 내 몸에 있는 암덩어리

이 암덩어리의 숙주로써

이 심판 속에서의 구원

조롱 속에서의 구원

멸망 속에서의 구원을 펼치시는

보이지 않는 마귀에게서의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일하심을 못 보고

나의 믿음(모호한) 나의 행함(의문의)에 빠져

 

예수님의 믿음을 못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믿음을 보라고 마귀를 풀어버리시는 겁니다.

 

마귀에게 잡혀 봐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게 될 테니

 

예수님은 이렇게 먼저 우리에게 시비를 거시고 조롱하심으로써

우리의 믿음이 지금 누구를 조롱하는지?

다윗을 조롱하듯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다는 것

예수님에게 받은대로 갚겠다는 이런 복수심으로만 가득채우고 있는 믿음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십자가가 고맙게 고발하고 들추어내고 들통내고 있다는 사실에

 

정직한 영이 없음을

 

정직한 영이 있는 척 할게 아니라

 

주여 제발 고쳐달라고

내 죄가 항상 내게 있으니

제발 이 죄인을

이 환자를 고쳐달라고

 

이렇게 먼저 시비걸어주시고

먼저 조롱해 주심으로써

 

내 속에 있는 암덩어리를 고치시고자

의사로써 먼저 잔소리 해 주심에 대해 감사하시면 됩니다.

 

이미 감사가 흘러 흘러 넘쳤기에 누리는 겁니다.

 

(9:13, 개역)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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