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파괴와 원수갚기 (시편 74)

 


(
74:1, 개역) [아삽의 마스길]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

(74:2, 개역) 옛적부터 얻으시고 구속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의 거하신 시온 산도 생각하소서

(74:3, 개역) 영구히 파멸된 곳으로 주의 발을 드십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74:4, 개역)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에서 훤화하며 자기 기를 세워 표적을 삼았으니

(74:5, 개역) 저희는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74:6, 개역) 이제 저희가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74:7, 개역)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74:8, 개역) 저희의 마음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것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74:9, 개역)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

(74:10, 개역)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

(74:11, 개역) 주께서 어찌하여 주의 손 곧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주의 품에서 빼사 저희를 멸하소서

(74:12, 개역)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인간에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74:13, 개역)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74:14, 개역) 악어의 머리를 파쇄하시고 그것을 사막에 거하는 자에게 식물로 주셨으며

(74:15, 개역) 바위를 쪼개사 큰 물을 내시며 길이 흐르는 강들을 말리우셨나이다

(74:16, 개역)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74:17, 개역)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

(74:18, 개역)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

(74:19, 개역) 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영히 잊지 마소서

(74:20, 개역) 언약을 돌아보소서 대저 땅 흑암한 곳에 강포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였나이다

(74:21, 개역) 학대 받은 자로 부끄러이 돌아가게 마시고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로 주의 이름을 찬송케 하소서

(74:22, 개역)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주의 원통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

(74:23, 개역) 주의 대적의 소리를 잊지 마소서 일어나 주를 항거하는 자의 훤화가 항상 상달하나이다

 

 

출애굽 사건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아이디어입니다.

즉 인간은 추호도 관심이 없었다는 겁니다.

곧 구원사건 말입니다.

 

구원이란 인간 즉 내가 딸랑 구원챙기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구원이란 전쟁 개념이고

전쟁은 바로 원수를 겨냥한 의미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웃끼지도 않게도

원수도 없고요(물론 있어도 소용없어요,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원수이니까)
원수도 거치지도 않고

전쟁도 없이

구원만 딸랑 챙기겠다는 심뽀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그만 탐욕이 되어버린 우상숭배가 된 겁니다.

이런 구원관, 메시아관이 곧 악마성입니다.
이 구원을 목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니

그 예수가 자기가 조작해낸 자기를 위한 우상 예수가 되는 겁니다.

 

바로 이런 인간의 악마성에 이스라엘이 투입이 되어 그 악마성을 건드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인간의 악마성 곧 구원받기 라는 악마성을 애굽이 대변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인 곧 바리새인이 마귀들임을 대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원수입니다. 사실상 우리가 여기에 다 속해져 있습니다.

 

또 이런 악마성을 건드리는 역할에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본인들은 모릅니다. 그런 역할인지도 관심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렇게 양쪽으로 배치를 해서 서로 충돌케 만들어 버립니다.


애굽왕 바로왕을 강퍅케 해서 어서 어서 이스라엘을 오늘밤을 못 넘기도록 만들어라고

아주 아주 졸라요 졸라
애굽왕을 약을 바짝 올립니다.

강퍅케 만드십니다.
 

그렇게 해 놓고서는 이스라엘에게서는 그 강퍅함으로 인해 부르짖도록 만드십니다.
안 부르짖고는 못 배기도록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사울왕에게 강퍅케 만들어 다윗을 오늘밤 못 넘기도록 만들어라 하고서는

다윗에게서는 도망치라고 하는 것으로

출애굽 구원사건을 재현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를 예고편으로 보여주시는 겁니다.

영화 보라고 예고편 광고가 있잖아요

화장품 실품을 사라고 샘플을 주어서 발라보라고 하잖아요.

대형마트에 가면 맛보라고 시식코너가 있듯이 말입니다.


그럼 예고편에서 사울과 다윗은 각자의 맡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는 실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는 진노의 그릇 역할
또 하나는 긍휼의 그릇 연기를 말입니다.
 

진짜 실상은 예수님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건으로써 말하는 겁니다.

곧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 곧 거룩한 주의 구원사건은

원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 하지 못하는 십자가는 더이상 십자가가 아니듯이 말입니다.
다른 말로 사랑 완성, 율법의 마침, 율법 완성이다는 겁니다.

(롬 13:8, 개역)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자 그렇게 되면 의문의 증서는 찢어지는 겁니다.

전남편은 죽게 되었으니 자유케 되는 겁니다.

(롬 7:1, 개역)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롬 7:2, 개역)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곧 원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오직 사랑 뿐이다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 말입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비로소 악의 번성이 그 동안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그것이 해결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짜죠?

오늘 시편 74편에서는 그 하나님의 성소가 파괴 되었뿠네요?

 

악이 망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더 더 더 나은 악의 흥함이 더욱더 펼쳐지겠네요?

우짜죠?

 

원수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원수 문제가 더더욱 모호해 지는 것 아닙니까?

? 하나님의 성소가 파괴 되니까 말입니다.

 

그럼 이제 무슨 수로 죄 문제를 해결할수 있겠으며

악인의 대한 심판이 어떻게 이뤄 지겠습니까?

 

과연 하나님은 있는 겁니까?

왜 악은 이렇게 잘먹고 잘사는 겁니까?

왜 하나님은 악을 허용하시는 겁니까?

 

이게 신정론이라고 했지요.

 

무신론자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도

현대인일수록 오히려 신정론이 더 발달한다고 말이죠.

하나님은 없어도

악은 실상적으로 체험하게 되니까 말입니다.

악 문제에 직접 부딧히게 되니

신은 안 믿어도 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신을 잠시 빌려 온다는 겁니다.

 

왜? 악은 실상이니까 말입니다.

 

이 정도가 되어야 인간이 설정한 악이 아닌게 되는 거죠.

그런데 종교꾼들은 악도 지 마음대로 설정을 해요.

한번 당해 보면 과연 그런 소리 나오나 말이죠.

 

하나님의 성소도 깨어졌습니다.

이제 우짜죠?

 

출애굽 사건때를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성소 곧 성전이란 제사 드리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자 모세는 바로왕에게 다짜고짜 백성을 내달라고 합니다.


제사 드리겠다고 말이죠.
 

이게 말이 됩니까?

모세가 바로왕 입장이 되어 보세요

과연 내어 주겠는가?
너 같으면 내어 주겠냐 말이죠.


(출 5:1, 개역) 『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출 5:2, 개역)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출 5:3, 개역) 『그들이 가로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온역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출 5:4, 개역) 『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으로 역사를 쉬게 하느냐 가서 너희의 역사나 하라』

(출 5:5, 개역) 『또 가로되 이제 나라에 이 백성이 많거늘 너희가 그들로 역사를 쉬게 하는도다 하고』

(출 5:6, 개역) 『바로가 당일에 백성의 간역자들과 패장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출 5:7, 개역)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 소용의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로 가서 스스로 줍게 하라』

(출 5:8, 개역) 『또 그들의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로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자 하나니』

(출 5:9, 개역) 『그 사람들의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

 

맞습니다. 이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겁니다.

 

애굽 쪽의 제사도 새때까리입니다. 애굽에서 드려도 됩니다.

어차피 신에게 드리는 제사인데 제사 누가 말립니까?

제사 드려서 양쪽 다 복 받자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사는
바로 그런 인간 쪽의 제사를 파괴하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내 백성 내 놔라 라는 말은
너거들 이제 끝났다 라는 소리와 같습니다.

그 소리 듣고 가만히 있을 자가 누가 있냐 말이죠.

양 쪽다 서로의 성소를 깨뜨리는 싸움을 전쟁을 펼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전쟁은 곧 신의 전쟁이니까 말이죠.
현대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간끼리의 전쟁은 곧 양쪽 진영의 장기알 싸움인 겁니다.
배후 세력의 싸움입니다. 보호자 싸움 말입니다.

그때의 출애굽 전쟁의 제사 싸움을 시작으로 해서

그래서 발생하게 된 미움으로 인해
결국 지금 시편 74편의이스라엘의 성소까지 파괴되는 겁니다.
애굽의 사고방식이 어디 가겠습니까?
이스라엘을 끝까지 따라잡습니다.
사울왕 보세요 다윗을 끝까지 따라잡잖아요.
기여이 다윗을 파괴하고 죽일려고 하는 겁니다.
성소 파괴 입니다.
예수님까지 죽이는 원수성입니다.

 

그 시초가 되는 것이 바로 출애굽 사건 아닙니까?
그래서 내 백성을 내 놔라 라는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요구가

전쟁을 의도적으로 일으키는 개시가 되는 겁니다.

우와 이 무슨 못땐 장난입니까?

 

그래서 그것을 미리 알고 애굽왕 바로가 미리 기가막힌 말을 합니다.

참 신기합니다.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이 말입니다.

 

여호와가 누구지?

 

난 그딴 신 모르겠는데 말야!!!

마치 누가 시킨것 같은 말투 입니다.
감독이 큐 하고 싸인을 하니까 대본에 씌여진 대로 하는 듯한 ...

 

맞습니다. 제사를 드리겠다면 여기 애굽에게 엄청난 신들이 많습니다.

태양신, 물신(나일강 신), 생명신(개구리), 불신, 치료신, 다산신, 풍요의 신, 땅 신, 죽음의 신, 곡식의 신, 등등 

신 때까리입니다.

 

그런데 뭐? 여호와? 여호와가 뭔데? 누군데? 들어 본적이 없는데!!

 

이 말을 괜히 애굽왕이 놀리는 바람에 귓땀배기 얻어 터지는 겁니다.

 

기다려봐 !!! 내가 누군지 보여주겠어 라고 우비소녀처럼 여호와께서 전쟁을 개시 합니다.

 

그런데 그 전쟁의 방식이 십자가라는 방식입니다.

곧 유월절 어린양 페스티발 잔치입니다. 곧 제사입니다.


졸지에 구원 잔치가 벌어지는 겁니다.
마치 계시록의 생명충만 잔치 처럼 말입니다.
 

성소 곧 성전을 인간의 몸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인간 을 빼 버리고 그냥 몸 이라고 생각하면 더욱더 쉽겠지요.

즉 몸이라는 공간, 집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어떤 주머니 또는 박스 등등

 

그 몸을 깨뜨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끝나죠

 

죽죠.

 

부대 주머니를 찢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을 담는 페트리트 병처럼 구멍이 나면 어떻게 되나요?

쓸모 없게 되지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게 되죠.

가치가 무가치 하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더 이상의 어떤 기능을 못하게 됩니다.

 

아무리 악인이 흥하고 백날 잘먹고 잘살아도 죽어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겁니다.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자 백성을 달라고 했을때에

제사 드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실상 애굽 쪽 애굽의 제사. 애굽의 성전, 애굽의 신을 찢어버리겠다는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이다는 겁니다.

 

참 겁도 없지요.
그 당시 최고의 강대국을
가장 미약한 민족이 아니 민족도 형성 되기도 전이지요.
오히려 탁란으로 애굽이 민족을 형성해 주는 꼴이 된 겁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내막을 알고 모세를 따랐을까요?

진짜 내막을 알았다면

끝까지 안 따랐을 겁니다.

수시로 광야에서 애굽으로 돌아갈래 라고 외쳤습니다.
애굽을 다 몽땅 삭제해 버려도 끝까지 돌아갈래 라고 우깁니다.
아무리 애굽을 지옥을 만들어도 말입니다. 지옥으로 돌아갈래 ~~~~~~
 

모세도 모르는 판국에 모르게 해야지요.

 

지난 시간에 다윗에 왜 당합니까?

그것을 왜 아삽 찬양대는 왜 찬양을 합니까?

 

이거 찬양할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찬양 조차도 저쪽의 찬양을 찢어버리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악인들의 제사 말입니다.

악인들의 성전 말입니다.
악인들의 찬양 말입니다.

 

다윗이 광야에서 노래한다고 했습니다.

성전은 곧 중앙, 중심입니다.

그런데 사울왕이 다 차지해 버려서

광야 변두리로 쫏겨나는 겁니다.

거기서 노래 부르는 겁니다.

왜 일까요?

 

중앙의 성전을 깨뜨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들의 중심을 헐어버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예수님 참 희한합니다.

 

바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처음부터 복음 시작을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변두리에서 출발해서 마지막에 중심 중앙의 예루살렘에서 죽습니다.

 

왜일까요?

 

왜 처음 시작때부터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구지 이스라엘이라는 구약을 거쳐서 예수님이 나중에 등장하셔서 하시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을 거치지 말고 바로 예수님이 직접 하시지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원수 곧 마귀를 겨냥한 활동이십니다.

즉 보이지 않는 이유로써 우리는 원수가 없는 겁니다.

오히려 그 원수로부터 장악이 된 상태이다는 겁니다.

 

그럼 구원사건을 이런식으로 펼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변두리 광야에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마귀의 중심을 깨드리신다는 겁니다.

사망의 권세가 집중이 된 중앙 센터를 깨뜨리겠다는 목적이다는 겁니다.

 

몸을 깨뜨림으로써 더 나은 몸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이것이 제사의 목적인 겁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 말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죽음을 시기하고 질투 한다고 했습니다.
중앙 센터에 권력이 집중이 되어 있는데
죽음이 그 중앙을 다 차지 하고 있기 때문에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몸 공간 즉 다른 몸이 드리는 제사입니다.
인간 말고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성소를 지난 시간에 예수님이라고 인물로 표현했습니다.
성소를 차지할려고 중앙권력을 차지할려는 사울왕과 같은 인간의 제사를 깨뜨리는

걸어오는 문 곧 진짜 성전이신 예수님 말입니다.
 

그런데 저들의 몸이 깨어지기는커녕 예수님의 몸이 오히려 십자가에 갈기 갈기 찢겨

죽음을 당하지 않습니까?

 

이게 무슨 우습기 짝이 없는 어리석음입니까?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지혜 입니까?

 

이게 뭡니까! 도대체?

 

원수의 성전은 무너지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님의 몸이 죽어버렸으니 말입니다.
원수는 오히려 더 활개 치는 것 아닙니까?

 

출애굽 당시에 애굽이라는 몸을 아주 박살을 내었습니다.

그런데 홍해를 건넌 그 몸들은 그럼 광야를 통과 하던가요?
요단강 못 건넙니다.
약속의 땅에 일부러 코 앞에서 다 죽습니다.

여전히 못 통과 합니다.

그들 몸 또한 다 박살이 납니다. 다 파괴 됩니다.

 

이게 뭡니까?

구원 사건 맞기는 맞나요?

구원 받은자 한 사람도 없이

이게 무슨 출애굽이며

구원 사건입니까?

 

그런데 그 출애굽 사건이 또 벌어집니다.
구원 잔치가 또 벌어 집니다. 구원 페스티발 말입니다.

광야생활까지 다 포함이 된 사건까지 말입니다.

 

영화에서 다루는 출애굽 사건은 항상 반쪽만, 50%만 다룹니다.

구원받았다 라고
그런 하나님을 우리는 믿는다고 헐리우드의 성경컴플렉스 아닙니까?
미쿡식 기독교죠,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낸 조작된 기독교.

그런데 광야생활이라는 50%를 더해 버리면 즉 100%가 되면

졸지에 구원 받은 놈 한 놈도 없네 라고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영화가 안됩니다. 돈이 안되요. 장사가 안됩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런 식의 장사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반쪽만 외치는 겁니다.

 

지금 시편 74편은 저렇게 50%만 넣었다면 이런 내용의 노래를 하지 않습니다.

100% 다 포함 시켰기 때문에 나오는 찬양입니다.

 

이게 무슨 찬양이냐 말이죠.

찬양하는 인간이 아무도 없는데, 구원 받지 못했는데

이게 무슨 찬양이 되냐 말이죠.
찬양자도 없는 찬양!!!!

성소가 파괴가 되었는데 이게 무슨 구원사건이냐 말이죠.

 

그런데 주님은 찬양이 된다고 합니다.

오히려 더 풍성합니다. 초과잉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말입니다.

 

찬양자도 없는데?????

 

성소가 파괴 되었는데??????

 

 

성소가 파괴 되니까 진짜 몸이 일어납니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모호한 몸이 부르는 찬양이 아니라

명료하고 또렷한 진짜 몸이 일어나 부르는 찬양이

그 불가능 속에서 찬양자가 나타나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고?

 

아니 성소가 깨어지니까 오히려 더 또렷해 집니다.

 

인간들이 성전에서 드렸던 제사로써는 원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애굽의 제사 요소를 못 버리는 겁니다.


아무리 애굽이 멸망하고 애굽의 성전들이 다 파괴가 되어도

광야에서 속속히 밝혀지는 것들은

오히려 유월절 어린양의 제사가 아닌

애굽의 제사 요소들만 속속속 들추어지는 겁니다.

 

아니 유월절 어린양의 제사가 그렇게 여전히 구원전쟁을 펼쳐서

들통나는 제사였던 겁니다.

원망하고 원망하고 또 원망하고
이런 원망만 할것 같으면
말라꼬 홍해를 건넜던가?
자기 내부 속에 저 멸망해 버린 애굽의 요소가 오히려 더 활활 타올라서 늘 들통나는 겁니다.
원수성이 말입니다. 애굽의 속성이 말입니다.

기여이 열 번을 다 채웁니다. 열번의 원망 말입니다.
사실상 14번 이상에 기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여이 10번이라고 맞춥니다.

열 번의 애굽재앙이나

열 번의 광야원망이나

도찐 개찐 마찬가지이다는 거죠.

너 자체가 애굽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지적해 주는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제사였다는 겁니다.

희생제사는 너가 그 원수야 라는 지적으로 인해
긍휼을 증거하는 겁니다.

 

그랬던 그 사건이

지금 다윗을 중심으로 해서 또 펼쳐지고

다윗이 죽었어도

이스라엘 속에서 계속해서 또 또 또 펼쳐지고

지금 현재의 교회 속에서도 성령의 십자가 사건 재현으로써

또 또 또 펼쳐지는 겁니다.

 

즉 늘 상 성소는 깨어진다는 겁니다.

애굽 쪽의 성전이 깨지든

이스라엘 쪽의 성전이 깨지든

어느 쪽이 깨지든

 

늘 인간들이 저마다 담고 있는 부대 주머니는 찢어지고,

깨어지고, 파괴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들은 늘 엉터리였다는 겁니다.

오히려
상대적인

주님의 몸은 더 이상 깨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다시 사신 몸이 이런 모호한 우리의 몸, 성전을 늘 상 깨뜨리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무엇이 또렷하냐 말이죠.

 

더 이상 파괴되지 않고

허물어지지 않고

깨어지지 않는

십자가에서 찢어져 다시 살아난 몸이 있는데

누가 꾀더냐 말이죠.

 

그래서 아무리 애굽에서 빠져나온 몸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몸은 깨어지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기뻐하자 말이죠.

 

오늘 시편 찬양자는 누가 이런 일을 벌리느냐에 대해서

원수를 우리에게 상기 시켜 줍니다.

 

즉 주님의 자작극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겁니다.

출애굽의 사건이 재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르짖습니다.

원수들이 이렇게 했다고 고자질합니다.

 

이 원수 문제 해결해 달라고 합니다.

 

지난 시간의 내용처럼

더 이상 허물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성소에서 원수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그 하나님의 성소가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의 몸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찢겨진 몸에서 그러나 다시 사신 몸에서

그 원수 문제가 해결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 예수님의 몸 때문에

우리의 몸 우리의 성전 우리의 성소는

예수님의 몸에게 비겁하게 뻔뻔스럽게 떠 넘겨버리면서

마땅히 깨어지는 파괴를 당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미끼로써 우리의 몸인 성소는 깨어지는 겁니다.
 

원수들이 우리를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미워해서입니다.

 

(7:7,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15:18,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5:19, 개역)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15:20, 개역)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15:21, 개역)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15:22, 개역)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15:23, 개역)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15:24, 개역)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15:25, 개역)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15:26, 개역)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15:27, 개역)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그래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도록 만드신 겁니다.

? 예수님을 미워하니까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깨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 예수님을 미워하도록 만드시는 취지인 겁니다.

 

이게 얼마나 놀랍고도 신기한 일입니까?


다윗이 연기를 한다고 했지요?
얻어 터지고 눈물을 흘려서
주의 병에 담는 겁니다. 한 방울 한 방울
얻어 터지고 몇대 맞았다고 주의 책에 기록합니다.
이 무슨 엽기적인 마조히즘이냐 말이죠.
아주 신났어요 신났어?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이 되어 있기에
그 대본대로 각본대로
큐 라는 감독의 싸인으로 인해

연기를 하는 겁니다. 주의 병에 담는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미워한 증거이다는 겁니다.

 

마귀가 자기 밥을 미워할 이유가 없어요.

마귀는 자기 밥풀떼기를 사랑합니다.

사자가 양을 미워할 이유가 없다니깐요.

자기 밥인데

왜 미워해요?

양이 사자를 미워하지요.

 

그런데 마귀가 나를 미워한다면

먹잇감이 좋아야 하는데 싫어한다면

그 정도로 미워 죽는다는 겁니다.

못 먹겠다는 거죠.


이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먹잇감을 싫어하다니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그래서 파괴하는 겁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박수를 치면서

그야말로 뛰어난 지혜라고 기뻐하면서

다른 한쪽 기생이 이렇게 외칩니다.

 

저도 가지지 말고

나도 가지지 말게 해 달라고

 

그야말로 미워 죽을 정도로 그 미움을 표출합니다.

그리고서는 솔로몬의 지혜를 박수를 칩니다.

 

그때 솔로몬 지혜자는

지혜가 박수를 받고

기쁨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닌

미움을 받았다고 그 기생을 잡게 되는 겁니다.

 

지혜를 모독했다고 말이죠.


아니 박수를 쳤는데? 왕의 판결에 기뻐했는데?
지혜를 모독했다니요?????
 

그러나 진짜 어미는 이게 무슨 지혜냐? 이게 지혜 맞기는 맞냐? 지혜가 이럴수 있느냐 라고

오히려 반발 하지요?

어떻게 아이를 반으로 갈라서 반반씩 나누라고 하느냐?

천하에 이런 지혜가 어디있느냐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정으로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이다는 겁니다.

아니 지혜를 반발했는데?

거부했는데?

악인은 솔로몬 왕의 지혜를 찬성 했고요
의인은 솔로몬 왕의 지혜를 반대 했습니다. 


악인은 하나님의 성소를 깨뜨리는데 신났고요,
의인은 하나님의 성소가 깨어지는 것을 보고 울부짖게 됩니다.
 

반어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더 잘 아시는 의미이겠지만 말이죠.

껍데기로 표출 되는 것이랑

속 내용의 의미가 정반대인 것

 

우리가 흔히 개그 코메디 해학에서 그런 내용을 많이 보게 됩니다.

 

또 또 또 툭하면 암이란다.

그러게요!!!

왜 암이겠습니까? ~~~

아이구 그럼 장모님도 하나 마련해야겠어요

내일 모레 80인데 암보험은 무신 암보험

이야 이거 하나면 걱정 덜겠네요

남서방 전화번호 몇 번이고?

 

겉으로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살기를 품고 있는 다른 기생과

겉으로는 울고 있지만 속으로는 긍휼을 바라는 어미 기생

 

이것을 정확하게 명료하게 또렷히 구별해 내는 것이 거룩이요 지혜이다는 겁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 아닌 속의 진짜와 거짓을 말이죠.


사실상 악인이 말려든 겁니다.
우리도 말려들어야 합니다. 

 

애굽의 제사가 만연한 이 세대에(무신론도 일종의 자기 제사입니다. 유신론도 마찬가지)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제사를 통해서

십자가의 사랑을 명료하게 하셨습니다.

즉 모조리 다 깨뜨리시고 파괴하시겠다는 겁니다.
무엇을? 인간의 제사 곧 인간의 몸 말입니다. 성전 말입니다. 공간, 중심.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착각하지 말라

 

(10:34,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12:51,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싸움 붙이러 왔다는 겁니다.

 

그럼 나머지 제사 곧 나머지 성전들은 다 파괴 되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명료한 것이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되도 않는 모호하고 흐릿한 것 붙들지 말라는 겁니다.

어차피 깨어지니까 말이죠.

 

파괴되는 성전은 성전이 아니였다는 겁니다.

찢어지는 몸은 진짜 몸이 아닌 겁니다.

주님이 창조한 몸이 아니였던 겁니다.

 

그럼 찢어지자 말이죠.

파괴되어도 상관 없다 말이죠.

깨어져도 상관 없는 겁니다.

어차피 아닌데 말입니다.

참선지자는 이미 완성된 거룩한 성전과 이스라엘을 봐 버렸습니다.
그럼으로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을
오히려 멸망이 닥쳤을때 더욱더 재촉합니다.
빨리 망해 버리자 말이죠.
왜죠? 반어법

이미 명료하고 또렷한 완료가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 거짓선지자는 절대로 이스라엘은 망할리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오히려 믿음이 더 좋아요!!!
이스라엘이 망할리가 없고,
하나님은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럼 왜 예수님은 버리실까요?


십자가는 그래서 거리끼는 겁니다.
도저히 다 이루었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못 믿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자랑은 커녕 거리끼는 싫어버린바 되는 겁니다.
십자가 때문에 십자가 사건 때문에 예수님이 더 미워지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 보다 더 명료한 밝히 보이는 사랑이 어디있냐고?
역설적으로 외치는 것이
바로 성령 받은 자 입니다.
물론 가장 적대적으로 행했던 사도바울이였는데 말이죠.

그 정도로 명료한 것을 봐버렸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진짜 몸이 세워졌다면 그것으로 게임 오바입니다.

 

우리는 성소가 깨어짐으로써

더욱더 또렷한 주님의 몸을 미워하는 세력을 보게 되는 신비를 보게 됩니다.

사람의 손으로 짖지 않은 성전의 또렷함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이라는 참성전 말입니다.

(행 7:41, 개역) 『그 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행 7:46, 개역)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행 7:47, 개역)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행 7:48, 개역)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행 7:49,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행 7:50, 개역)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3일 만에 다시 살리셔서 주가 되신
주의 몸 말입니다.

그 원수 문제를 드디어 해결하시고자 말입니다.

이것을 찬양자는 노래해야 합니다.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미 완료된 찬양이기 때문입니다.

 

미움받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세상이 얼마나 예수님을 미워하는 지를

우리도 몰랐을때에 그랬던 것을

그 내막을 들추어내주시는 사건으로써 터지는 사건이다는 것을

 

성소가 파괴되는 사건을 통해서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만 했는가?

왜 나의 죄를 지시고 죽으셔야만 했는가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인간의 제사를 거부하시고 긍휼을 원하는
그 십자가 사랑이 너무 너무 또렷하기 때문에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

십자가가 밝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



 

2015-10-14 23:43:55

 

8-124-25 (땅의 짐승) 1510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24-25절입니다. 구약성경 2페이지입니다.

 

1:24-25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만약에 우리가 신자가 아니라고 합시다. 신자가 아닌 채로 방금 읽은 성경내용을 읽고 누구한테 설명하라고 한다면 어떤 이야기가 나오겠습니까? 신자가 아니라면? 신자가 아니라면 이렇게 됩니다. “신이, 하나님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땅에 있는 각종 짐승들을 종류대로 만들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았습니다. !” 그걸로 끝나요. , 그러면 이번에는 신자인 사람, 신자가 창세기 124, 25절을 보게 되면 무슨 이야기가 나오겠습니까? 참 어렵지요?

 

신자의 특징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거든요. 영광을 돌리는 그 방식은 신약의 빌립보서 2장에 나와 있습니다. 인간은 그냥 영광을 못돌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2:11)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창세기 124, 25절의 이 내용과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일과 관련성을 내서 진지하게 고백을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아까 불신자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시작했느냐? 땅에 있는 짐승들, 기린이나 타조나 소나 돼지, 그런 것을 보고서 바로 직접 신, 혹은 하나님이 저들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단어를 더 보탠다면 보이지 않는 존재가 땅 위에 보이는 짐승이라는 존재를 만들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것은 유대인들도 그렇게 하고, 알라 믿는 사람들도 그렇게 하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렇게 하고 철학자들도 다 그렇게 이야기해요. 하나님 집어넣었다고 신자 되는 것 아닙니다. 유대인들도 여호와 믿었지만 그들의 아비는 마귀(8:44)라고 했으니까. 마귀도 하나님이 한 분인 것을 알고 떤다(2:19)고 했습니다. 마귀 입에서 하나님소리가 안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늘상 나와도 마귀, 늘 나와도 마귀입니다.

 

고린도교회에 마귀의 졸개가 당회장이 된 모양이지요. 입만 떼면 예수, 복음, 성령이야기를 했는데 사도한테 걸려들었어요. “그것은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인데 너는 악마의 하수인이다.” 사도가 이렇게 고린도후서 11장에서 판정을 내렸어요. 교인들은 몰랐지요. 악마의 부하가 강대상에서 설교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왜 교인들은 모르는가? 그 차이점을 모르는 거예요. 무엇이 문제냐, 하고 접근해야 돼요. 무엇이 문제인가? 성경대로 읽었고 성경 그대로 풀이했는데 그게 왜 하나님께 영광이 안되는가?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고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그것을 그냥 두면 안되고 예수님이 십자가와 관련지을 때 비로소 우리의 문제성이 어디에 있으며, 진짜 하나님께서 왜 예수그리스만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광 받으시는 이유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려질 것입니다.

 

이제 그 작업을 시작합니다. 창세기 1, 2, 3, 4, 5, 6, 이렇게 6일 동안 피조물을 창조하시고 제 7일에는 쉬셨는데 그 1, 2, 3, 4, 5, 6이 전부 다 한 그룹을 형성해요. 6일째의 그룹은 짐승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도 짐승과 함께 제 6일째에 만들었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짐승 만들고 인간 만들었다고 해서 인간의 인간됨이 인간 단독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짐승과 관계된 상황에서 인간의 실체가 밝혀지는 겁니다.

 

그래서 짐승이 있다는 것은 곧 인간의 조건, 인간이 환경이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짐승과 인간을 한 그룹에 조성하신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인간이 은혜를 잊어버리면 짐승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은혜를 잊는다면. 그것이 전도서 3장에 나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이 대목만 보고 불신자나 신자나 만들었구나. 이러면 굉장히 쉬울것 같지만 창세기 하다가 갑자기 전도서 3장이 나와 버리면 좀 어려워 보이지요? 하지만 참아야 됩니다.

 

전도서 318절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하나님이여, 제가 짐승하고 똑같습니다.”라고 깨달을 때 네가 하나님이 추진하는 일의 취지에 대해서 알고 있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네가 지혜가 있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고요. 잠언 319절에,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짐승이나 인간이 똑같다는 겁니다. 19절 계속 보면,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6일에 같이 창조되었거든요. 짐승은 짐승다워야 되고 인간은 인간다워야 되는데 어떻게 해서 하나님보시기에 네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느냐? 내가 보기에는 짐승이야.” 이런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성, 하나님이 인간을 인간되게 한 그것에 대해서 불신자들이 보듯이 저건 캥거루고 저것은 인간이네.’라고 겉모양만 가지고 판단해버리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안목을 가지고 우리 스스로를 볼 수 있어야 이게 영광이 되는 겁니다.

 

전도서 320, 21절을 계속 읽어봅니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라고 되어 있어요. 차이점이 있다면 죽고 난 뒤에 인간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내려간다는 거예요. 그러면 위로 올라갈 때 위로 올라가야 될 그 혼이 담아낼 내용이 짐승과의 차이점이라면 인간의 위로 올라갈 그 혼의 내용이 하나님 보시기에 부합치 않고 합당치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그래서 인간은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다.”고 한 겁니다.

 

그것을 저는 부산에서 하이데거를 강의하면서 얄팍한 인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인생의 깊이가 없어요. 깊이가 없다는 말은 뭐냐? 말초적인 자극, 새로운 자극을 찾고 그러다가 지루하면 다시 새로운 자극을 찾아요. 이게 짐승인지 인간인지 분간이 안돼요. 깊이가 없으니까. 얇아요. 경박스럽다고 하지요. 얇다는 뜻이지요.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인간이 되려고 하는데 인간이 그렇게 되고자 할 때 인간은 이미 범죄했기에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난 뒤에는 인간의 자기 힘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어요. 이미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창조의 완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투입시키는 분이 계실 거예요. 그 분이 참된 인간이요, 유일한 인간입니다. 그 유일한 인간을 인간이라 하지 않고 뭐라고 하는가? 인자라고 합니다. 진정한 사람의 아들이지요.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태복음 16장에서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물으니까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했을 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하자 베드로가 나서서 이야기하지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인자가 될 수 없다는 뜻이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유일한 아들은 바로 예수님 당신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지요. 그렇다면 예수님 빼놓고 짐승이라는 그 말이 합당하지요.

 

그렇다면 우리보고 바로 잔소리하고 교훈하고 명령하면 되잖아요. “네가 다시 인간다워져야 돼. 짐승이 되면 안돼.”라고 얼마든지 훈계하고 격려할 수 있고 칭찬할 수도 있잖아요, 칭찬하면 고래도 춤춘다는데 고래 춤추는 데는 제주도 돌고래쇼장이지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격려하시면서 긍정적 마인드로 보태줄 수도 있는 문제인데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제켜버리고 인간에게 어떤 긍정적인 희망을 품는 것이 아니고 아예 도외시하고 예수님을 투입해서 참된 인간은 예수님뿐이다.”라고 하시는 겁니까? 인간으로 하여금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나 자질이 전혀 없다는 말인가? 왜 인간이 그래야 되는가, 하는 문제거든요.

 

이것을 지난 시간에 창조의 원리로 이야기했습니다. 1, 2, 3, 4, 5, 6 할 때 1일에서 6일까지 진행이 됩니다. 진행이 되면 혼돈에서 나왔던 그 창조의 원리가 나중에 그대로 유지되면서 마지막 인간창조 할 때 혼돈의 내막이 밝혀져요. 그러면 1다음에 2, 다음에 3, 3 다음에 4, 4 다음에 5, 이렇게 나가는데 이걸 거꾸로 돌리면 어떻게 되는가? 6에서 5, 5에서 4, 4에서 3, 3에서 2, 이런 식으로 돌아갈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돌아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보다 더 깊이 있게 밝혀지는 창조의 원리가 계속 누적이 되거든요. 누적이 되어서 6일까지 들어오는 거예요.

 

지난 시간에 한 것 다 잊어버렸지요? ‘라 하는 것은 그냥 새만 있는 것이 아니고 주변의 공기, 환경과 더불어서 새를 언급했고 물고기는 물과 더불어서 함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에 창조된 인간은 홀로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환경과 더불어 있어야 인간답다는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래서 5일째 피조물들은 환경을 표현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게 원리에요. 인간은 그 나라 의를 증거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지 혼자 자기 잘난 척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잖아요. 그래서 설교 마지막에 완전히 새됐어!” 했잖아요.

 

우리가 완전히 새처럼 그 나라 의를 보여주는 새가 되어야 된다고 했어요. 그 나라 의의 환경을 보여줘야 된다는 그 말이지요. 그런데 그 원리가 이미 차고 들어왔거든요. 그것을 다시 뒤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겁니다. 인간이 실패했으니까 5일로 되돌아갔다가 다시 6일로 도약한다든지 그런 방법은 없어요. 이미 창조된 것을 죄지었다고 해서 무효로 돌릴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뒤로 돌아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뒤로 돌리는 그 방식을 하나님이 사용을 하셨어요. 굉장히 난해합니다. 머리 깎는 기계인데 바리캉이라는 것이 있어요. 남자들 군에 가면 머리를 박박 미는데 그 때 사용하는 기계를 바리캉이라고 해요.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두발규정이 박박 밀게 되어 있었어요. 유신시대 때지요. 저 같이 착실한 학생들은 그런 일이 없습니다만 말썽꾸러기들이 자꾸 머리를 길러요. 그러면 선생님이 화가 나서 애들 복도에 세워놓고 바리캉으로 머리를 밀었거든요. 고속도로 낸다고 하지요. 문제는 바리캉을 진행방향대로만 밀면 안아픈데, 뒤로 잡아당기니까 머리카락을 자르는게 아니라 뿌리까지 잡아당겨서 상처를 입는 거예요.

 

땅에서 문제가 일어나니까 하나님께서 그 땅의 문제의 내막을 파헤치기 위해서 뒤로 되돌려버리면 그 껍질이 벗겨지고 파헤쳐지면서 숨겨진 원초적이고 영적인 내막이 밝혀지고 드러나게 돼요. 쉽게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죄 짓고 난 뒤에 마지막 진짜 인간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 이 전에 먼저 한 작업이 뭐냐? 먼저 이스라엘을 이 땅에 만들었어요. 이스라엘을 만드신 이유가 있어요. 이스라엘을 만듦으로 말미암아 장차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스라엘에 메시아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환경을 염두에 두고 이 땅에 오시는지를 알려주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그거 뭐 예수님께서 이 땅을 회복시키고 잘 되게 하기 위해서 오셨겠지.” 이렇게 하는데 아닙니다. 이 땅은 나중에 하나님이 유황불로 다 불태워버려요. 하나님이 말하는 새하늘과 새땅이라 하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고 발 딛고 있는 흙으로 된 이 땅이 아닙니다. 언약 안에 땅이 준비되어 있어요. 언약 안의 땅, 쉽게 말해서 천국이지요.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의 나라, 아들의 나라, 하늘나라, 천국, 다 같은 개념입니다.

 

처음 인간은 마지막에 땅 위에 있어요. 땅 중심으로 왔다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6일째니까. 앞에 하늘이 있고 또 뭐가 있더라도 마지막 창조가 마감되는 곳은 땅에서 마감이 돼요. 땅에서 마감될 때 짐승들도 함께 만들어졌거든요. 짐승이 만들어진 특징이 뭐냐? 물고기는 환경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새도 환경을 보여주기 위함인데 짐승의 특징은 뭐냐? 중앙을 향하는 속성이 있어요. 길들어져야 됩니다. 짐승 만들고 아담을 만들었는데 아담으로 하여금 짐승에게 이름을 붙여주게 합니다. 이름을 지정해 주는 그곳이 중심이 돼요. 그리고 그 아담의 이름은 하나님이 지었습니다.

 

그러면 중심은 아담인데 아담에게 가야 진짜 창조의 중심되시는, 천지를 창조하신 중심되시는 분이 거기 계십니다. 에덴동산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지요. 쉽게 하면 이렇게 됩니다. 차 안에 내가 있고 내 손안에 차키가 있다면 결국 차키는 차 안에 있는 것이 맞지요. 차 안에 내가 있고 내 손안에 차키가 있으면 차키는 차 안에 있는 겁니다. 뻔한 이야기가 아닌가, 할 텐데 왜 제가 차키를 예를 들었느냐? 자동차가 그냥 있다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키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자동차를 움직이는 그 키는 내 손안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중심은 인간이어야 하고 그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 안에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옵니다. 20, 21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할 때 여기서 이 너희라는 것이 사람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라 하는 것은 예수 안에 있는 성도를 두고 이야기해요. 주님의 손안에 있는 키, 성도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미국 뉴욕에서 마지막 설교 할 때 이 대목을 한 것 같아요. “세상 안에 여러분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안에 세상이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했어요. 맨해튼에서 설교할 때. “세상 안에 여러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왜 그렇게 세상의 정욕과 육신이 안목, 세상 것을 왜 그렇게 좋아합니까?” 그들이 주로 유학생들이었어요. “여러분은 뉴욕에 왜 왔습니까? 여러분이 새로운 뉴욕을 만들면 되잖아요. ? 뉴욕은 여러분 안에 있으니까.” 물론 100층 넘는 빌딩이 들어가기는 좀 힘들겠지만.

 

뉴욕이 유엔의 반 총장을 부러워하지 반 총장이 뉴욕의 빌딩을 부러워하지는 않지요. ? 유엔사무총장이니까. 그러나 그것보다 더 월등한 지위가, 천사도 부러워하는 지위가 성도한테 있습니다. 세상 것 가지고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마세요. 그리고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걸 가지고 차 안에 사람 있고 사람 손에 차키가 있다고 예를 들었습니다.

 

다시 창세기로 돌아가 봅시다. 인간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심이 된다면 그 중심이 인간에게 포함이 되어 있다는데 인간은 이미 범죄했어요. 범죄하게 된 그 이유가 에덴동산에서 뱀에게 유혹을 받아서 인간이 자기의 키를 놓쳐버렸어요. 인간이 차키를 자동차에 넣고 돌려도 시동이 안걸리는 거예요. 고장난 거지요. 폐기처분되어야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실패한 이 상황을 그대로 재료로 사용해서, 그것을 밑천으로 사용해서 새로운 오실 메시아를 주께서 이끌어내십니다. 그 이끌어내신 환경이 뭐냐, 바로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지요. 바로 예수님이 오시면 되는데 왜 이스라엘을 먼저 미리 만들어놓았는가? 이스라엘 역사가운데서 이 땅의 한계……, 그냥 눈으로 보면 땅, 나무, , , 물이 흐르는 이 땅을 그냥 봐서는 불신자들이 보는 그런 땅 밖에 안돼요. 정말 하나님이 보시는 그 땅, 언약이 작용하는 땅을 보려면 여기에 누가 보조하는 이벤트, 사건이 일어나줘야 되는 겁니다.

 

그 사건이 뭐냐 하면, 그 땅과 그리고 땅에서 갈라진 바다가 등장해야 돼요. 그 바다에서 기어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짐승입니다. 원래 짐승은 오늘 본문에 의하면 제 6일째 땅에서만 나오는 거예요. 바다에서는 물고기만 살지 짐승이 사는 곳이 바다가 아닙니다. 그런데 리워야단이라는 짐승은 바다에서 기어 올라와요. 여러분도 알다시피 다니엘 7장에 보면 다니엘이 계시를 받아서 보니까 3, 4절에,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이것은 바다의 물고기모양이 아니에요. 이것은 땅의 짐승의 모양입니다.

 

땅에 숨겨진, 우리 인간들이 보는 그냥 땅이 아니고 땅의 이면, 땅에서 더욱더 보태야 될 영적인 의미를 땅에 사는 짐승의 이미지를 가지고 바다와 대조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진짜 주께서 원하는 천국이라는 땅은 너희들이 모르는, 이 땅에 계신 메시아를 공격하고 대적하는 움직이는 짐승과의 만남을 통해서 비로소 땅의 원리가 풀린다는 거예요. 제가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왜 있느냐는 거지요. 그러면 그 짐승이 다니엘 이전에는 어디서 나왔는가? 이사야에 보면 그 짐승이 홍해바다에서 나온 것으로 되어 있어요. 바다에서 라합이라는 것이 올라오는데 그 라합이 리워야단인데 라합은 애굽나라(30:7)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의도적으로 홍해로 가게 해요. 홍해로 가게 하는데 어떤 인간도 바다를 건너갈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이사야나 다니엘 입장, 신약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어느 누구도 땅 위에 살지만 땅이 포함하고 있는, 왜 땅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언약적으로 온전히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아무도 없고 이스라엘 본인도 몰라요. 하지만 이스라엘은 역사적경험을 통해서 뭔가 같은 나라, 이스라엘 말고 전에 살던 나라, 애굽이라는 나라와 전쟁을 통해서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바다가 갈라져서 바다 한 가운데서 기어 나오는 기이한 체험, ‘왜 하나님께서 그런 기이한 일을 했을까?’라고 궁금해 정도로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이한 체험을 해놓고도 그게 무슨 뜻인지를 몰라요. 나중에 시편에 보면 그 뜻이 죽 나오지요. 시편 7413절에,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바다에 용이 산다고 하지만 사실은 용은 땅의 짐승입니다. 그러니까 원래 땅에 있지도 않았던, 이 땅과 관계없는 창조 이전의 악마와 관련된 사항이 그동안 땅 위에서 일을 벌여서 인간을 범죄케 했다는 겁니다.

 

인간을 범죄케 한 그 영적존재를 주님께서는 기존의 땅에 초청을 해요. 초청할 때 바다에서 기어나오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왜 그런 방식을 사용하는가? 옛날 하나님이 친히 만든 그 이스라엘, 친히 만들기만 했습니까, 동행했던 그 이스라엘이 누구로부터 집요한 핍박과 공격을 받는지를 보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애굽나라에요. 그 애굽나라를 용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애굽나라는 숨겨진 영적존재, 악마를 대변해주는 역할을 하도록 이 땅에 만들어진 나라가 애굽나라에요.

 

같은 애굽나라에서 이스라엘이 분리되었다는 말은 우리는 귀신에게 붙잡혀서, 마귀에서 붙잡혀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약속대로 시행하시는 여호와하나님의, 주의 이름이 친히 벌이시는 그 작업이 아니면 어떤 인간도 이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음을 최초로 시범조로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죽었는데 사흘 만에 살아났습니다. 그 예수님을 첫열매라고 해요. 그리고 신약에서는 그것을 악마로부터, 마귀로부터의 자유라고 해요. 마귀로부터의 자유, 율법과 저주와 심판으로부터의 자유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원래의 목적이 있어요. 심판을 아는 인간, 악마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인간, 그리고 어떻게 해야 악마로부터 벗어나는지를 아는 인간, 그 인간만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미 확정짓고 창조에 나서신 거예요. 그렇다면 첫 번째 인간인 아담은 뭐냐? 장차 진짜 최종적인 예수님이 모형이 되고 상징이 되는 겁니다.

 

장희빈이 라이벌인 인현왕후를 죽이기 위해서 인형을 짚으로 만들어서 바늘로 콕콕 찌르는 장면을 드라마에서 어릴 때 봤어요. 그걸 흑마술이라고 하지요. 콕콕 쑤시면 밤에 왕후가 자다가 가위눌리면서 실제로 찔리는 것처럼 괴로워해요. 이 과학시대에 찌르는 장희빈도 웃기고, 자다가 괴로워하는 왕비도 웃기지요. 짜고 치는 고스톱도 아니고 무슨 텔레파시가 통하는지 어쩐지. 나중에 그 죄가 드러나서 사약 받는 장면도 나옵니다만.

 

설교 초반에 불신자들이 창세기를 어떻게 본다고 했습니까? 신이 만들었다는 그것뿐이지요. 그것 말고 그들이 놓친 것이 있어요.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떤 인간도 알지 못하는 것, 이 땅은 어둠의 영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비로소 밝혀졌습니다. “목사님, 요새 이집트 아무것도 아닌데 애굽이 어디 있고 마귀가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하겠지요. 주님께서는 마귀가 있음을 보여주는데 마귀의 아들들이 하는 짓거리가 바로 율법을 지키는 거예요.

 

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어서 천국 간다는 이것, 지금 교회에서 마귀의 종들이 설교해대고 있는 이 현상을 통해서 여러분은 마귀가 하는 짓을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습니다. 1.5, 1.5, 양안시력으로 볼 수 있고 청각으로 들을 수도 있습니다. 마귀라고 해서 날개 달리고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짓은 하지 마세요. 마귀라 하는 것은 교회에서 또는 성당에서 절에서 곳곳에서 마귀 짓을 볼 수 있습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하고, 인기위주로 살고, 세상권력 추구하고, 육신이 정욕과 마귀의 정욕을 추구하는 것이 전부 다 마귀가 하는 짓이에요. 얄팍하고 자극적이고 깊이 없고 그저 성공신화만 눈독들이고. 제가 지금 나열한 것 죽 보면 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죠. 지금 제가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마귀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마귀가 원하는 대로 습관이 되어서 그렇게 된 겁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 나오지요. 말씀을 들으니까 마귀가 슝, 하고 날아와서 들은 말씀을 집어먹어버려서 말씀을 들어도 언제 들었는데?’ 제 설교 듣는 분들이 자주 그렇게 말해요. 들을 때는 좋았는데 돌아서면 다 잊어버린다고. 돌아서지 말고 바로가지 자꾸 돌아서면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내가 말씀대로 바르게 살아서 영광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 언급했지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은, ‘마귀 들린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도 나는 이제 성경말씀대로 지켜서 구원받는다.’는 이것이 영광 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이 돼요. 그러면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 것은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점이 뭐냐 하는 거예요. 전도서에 보니까 짐승과 인간이 일반이라고 했잖아요. 전도서 7장에 보면 이렇게 나와요. 장래 일을 모르면서 장래 일을 자꾸 생각하는 그런 마음, 그런 혼은 하나님 앞에 드릴 수가 없어요. 자꾸 장래 일에 대해서 예단하고 예측하려 하는 겁니다.

 

그것은 무엇을 삭제하느냐 하면, 마귀가 활동한다는 사실을 자꾸 삭제하기 때문에 내가 지혜를 끄집어내서 내 장래는 이렇게 될 것이다, 저렇게 될 것이다, 미리 예측하고 단정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마귀의 시험을 계속 받고 있는 셈이 되지요. 제가 자주 이야기하는 것, “그냥 사세요.”라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발걸음을 미래에서 주께서 질질 끌듯이 인도하시는 거예요. 그 미래에 가서 미래를 안다? 아니요. 지금 하는 그 일이 주님보시기에 미래에 일어날 일을 보여주고 우리한테 그걸 맡긴 거예요. 어떻게 살라고?

 

그 점은 이사야 65장에 보면 나옵니다. 25절에 이상적인 상태의 6일째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짐승들 간에 주어졌던 그 성품은 중앙을 향하게 되어있고 길들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짐승에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담이었어요. 그러면 이사야 65장의 이상적 세계에서의 중심은 누가 되는가? 예수님이 중심이 되고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가졌던 그 성품이 피조물과 피조물사이의 관계에 전달되었다고 보는 겁니다.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으리라.” 오늘날 성도의 삶이 뭐냐? 주님이 우리를 짐승같이 봤을 때, 우리를 하나의 이리로 보고 여우로 봤을 때 같은 성도끼리는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는 거예요. ‘저걸 어떻게 이용해먹을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니까요? ‘네가 나에게 이런 해코지를 해?’ 그런 관계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다 중앙에 길들여졌으니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경유해서 저쪽을 보거든요.

 

우리가 경유하기 전까지는 나 잘났다, 너 잘났다.’ 하다가 십자가 앞에서 졸지에 우리는 참 마귀의 종인데 주의 은혜로, 사랑으로 이렇게 용서받았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다가가고 저쪽도 이런 마음으로 다가가니까, 다들 중앙에 의해서 길들여지니까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어떤 권리주장이라든지 잘난체, 이런 것이 없이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이 그리스도만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아들의 나라, 천국의 모양새입니다.

 

천국에 이리가 있습니까? 이리가 있을 리가 있어요? 소도 없고 이 땅은 하나의 모형물이니까, 장희빈이 만든 짚 인형에 지나지 않아요. 해와 달도 다 날아가는데, 인간도 없는데 뭐가 있습니까? 인간도 없어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환경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기존의 옛하늘과 옛땅의 인간은 없어지고 천사와 같이 새하늘과 새땅에 의해서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심령과 새로운 인간, 몸과 마음이 새롭게 만들어집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지? “목사님, 이 영혼이 천국가도 유지 됩니까?” 천국 가면 유지 안돼요. 이 영혼은 옛하늘과 옛땅에서 조립된 거예요. 인간은 자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이 있거든요. 환경과 교류하면서 환경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게 제 5일째의 물고기고 새라고 했잖아요. 6일째는 뭐냐? 중앙에 종속될 때, 짐승은 아담에게, 아담은 주님에게 종속될 때 그게 6일째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되는 겁니다.

 

헨델의 메시아가 천국 갑니까? 그게 왜 가는데? 그게 가면 강남스타일도 가겠다. 그런 인간이 만든 작품들, ‘모나리자그런 것은 안갑니다. “김환기의 그림이 천국 갑니까?” 그런 것은 안가요. 성당의 스테인드글래스같은 그런 것은 안갑니다. 제단이라는 말은 거의 안쓰다가 처음 썼는데 지난 주일에 제단에 올라온 그 꽃도 오늘 보니 누렇게 시들어서 다 버렸어요. 주께서 그렇게 하셨는데 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렇게 흙이 된다고 했어요. 전도서에서 우리는 짐승과 똑같아요. 흙이 돼요. 그리고 올라가는 것은 주님의 은혜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대로 하나가 되어서, 예수 안에서 우리 혼이 하나님께 가서 거기서 주님에 의해서 새로운 몸과 마음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동안 얼마나 궁금들 하셨습니까? 이제야 말한다, 이제 말씀드렸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중심을 쳐다보며 살게 하옵소서. 단독적으로 남과 비교하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남과 비교하는 것이 짐승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