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 나는 새가 과연 너무 부러울까? (시편 61)

 

어머니께서 갑자기 왜 하필이면 새와 비교를 하셨을까? 라고 본문을 읽는 중에 그렇게 우발적으로 웃음이 나와서 말씀하시다가 다시 읽으시는 겁니다.

 

어머니! 그것은 인간과 비교가 아니라

솔로몬 왕과의 비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는 내용이 바로 솔로몬의 영광을 구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말씀 따나 누가 공중의 나는 새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까?

아무도 그런 기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머니도 그러셨잖아요!

그렇게 될까봐 겁이나서 다들 솔로몬왕의 영광을 부르짖잖아요.

 

그래서 비교하시는 겁니다.

 

바로 지금 읽으신 마태복음 624절 위에 있는 7절부터의

주님께서 가르쳐 준 주의 기도에서는

오죽하면 우리가 기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가르쳐주시는데

이방인의 중언부언과 비교하시는 겁니다.

 

즉 주의 기도와 이방인 기도의 비교인데

이제는 아예 주의 기도로 중언부언 하는 겁니다.

그러니 뭘 해도 어떻게 해도 우리는 기도 못하는 겁니다.

순 엉터리입니다.

주의 기도 100번만 빠르게 하면 방언 터진다는 둥

그런 헛소리에 반대를 해도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그런 것을 따른다는 거죠.

? 솔로몬의 영광을 구하는 것은 똑같으니까

 

그것이 우리가 말한 청개구리

강가에 아예 무덤을 마련해 묻어다오 라는 겁니다.

 

진짜로 다시는 솔로몬왕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공중의 나는 새를 부러워 하는 기도를 하겠습니다 라고

오해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무슨 기도를 하든 어차피 솔로몬 영광입니다.

그러니 내 쪽에서 하는 기도는 아예 바르게 기도하겠다는 포기하자 말이죠.


오히려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위선자가 되는 길입니다.
그냥 우리는 솔로몬의 영광을 구할 수 밖에 없는
들 꽃 보다 못한 것을 구하는 갇힌자의 모습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올바른 기도를 드리겠다는 것을 포기하자는 겁니다.
 

내 기도 보나 주님이 나에게 어떤 기도를 하시가를 살펴보자 말이죠.
주님이 나를 위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구하시는 겁니다.

 

나는 죽어라고 솔로몬 왕 영광 구했는데

아이구 참 기도 잘하네 그래 그래 공중의 나는 새를 부러워 하는 기도했구나

 

아뇨 아뇨 전 돈 달라고 기도했다니깐요.

그래 그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했구나

 

아뇨 아뇨 하나님 돈 달라니깐요. 보청기 다셔야 하남????

그래 그래 예수님께서 가르쳐준 주의 기도를 구했구나

 

아니라니깐요.

 

답답한 것은 내 쪽이라서

도대체 왜 주님께서 저렇게 일방적으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했다고 하는지

비로소 알아 보게 되니까.

 

부르짖음이 오늘 시편 61편처럼

서원 하고 그 서원을 갚겠다고 했는데

말도 안된다고 어머니가 웃으셨잖아요.

? 인간은 서원을 갚은 적이 없으니까.

맞아요 맞지만 그거 알고서도 못 갚는다는 것 알면서도

왜 다윗은 이렇게 기도를 하는 겁니까?

 

부르짖습니까?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는 집에서 판명이 납니다.

 

어머니! 어머니 께서 백날 기도해도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인 두 패로 나누는 기도 할 줄 아십니까?

아니!! 돈 달라는 기도 밖에 못하는 판국에 무슨,

 

그렇죠!!

그저 이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

자식 잘 되게 해 달라

새벽기도

금요철야기도

교회에서 하는 기도

모든 사람들이 어디에서든 이런 기도 밖에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기도 곧 부르짖음은

두 패로 갈라지게 하는 겁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서 누구든지 기도하겠끔 하게 해 놓고서는

그 속에서 두 패로 가르는 겁니다.

 

성전에서 두 사람이 기도하는 그거 말이가?

네 딩동댕!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맞습니다.

 

(18:10, 개역)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8:11, 개역)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2, 개역)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8:13, 개역)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분명 모든 사람이 서로 성전 중앙 센터에서 서로가 기도를 합니다.

세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다들 서로 중앙 센터를 차지할려다가 그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해서

자꾸 밀려나서 끄트머리로 몰리는 겁니다.

 

끄트머리로 몰리다 보니 자신의 꼬라지가 공중의 새 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공중의 새가 비로소 더 부럽기 짝이 없다 말이죠.

 

시편 61편에서 다윗은 왕이든 왕이 될 운명이든

하여튼 이스라엘 전국 국토에서 끝으로 몰리게 됩니다.

땅끝에서 바로 낭떠러지 떨어지기 직전인 곳에서 몰려서 부르짖게 됩니다.

 

공중의 나는 새가 왜 저렇게 부러운지?

공중의 새 꼴이 될까봐 무서워 아무도 기도하지 않았는데

공중의 나는 새가 되게 해 주세요 라고 아무도 구하지도 않았는데

 

땅끝으로 몰리게 되니

공중의 나는 새가 억수로 부러워요.
너무 너무 부럽기 짝이 없습니다.

 

니가 내 보다 더 낫구나?

주님의 은혜가 너를 도와주고 있구나

나도 주님의 은혜가 나를 도와 줬으면
나를 불쌍히 여겨 주셨으면 좋겠구나. 새야 너처럼 말이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제발 살려주세요.

긍휼을 베풀어 주세요 라고

 

저절로 세리의 기도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먼저 있었던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나에게 덮쳐져서 부르짖게 되는 부르짖음이다는 겁니다.

 

도저히 부르짖을수 없는 불가능한 곳에서 부르짖게 되는

불가능한 부르짖음이

 

바로 공중의 나는 새를 보고 부러워 하는 겁니다.

 

이것이 주의 기도입니다.

주의 기도는 내가 남을 사한 것 같이 나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자꾸 용서 해달라는 겁니다.

 

즉 벼랑끝으로 몰리는 삶 뿐이다는 겁니다.

 

(6:11, 개역)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6:12, 개역)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6:13, 개역)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6:14, 개역)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6:15, 개역)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니 공중의 나는 새가 부럽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똥물에 6번째 까지 몸을 담궈도 몰랐습니다. 
똥물이 나 보다 더 더러운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7번째 담궈 보니까 똥물이 나 보다 백배나 더 깨끗한

 

내가 똥물 보다 더 더러운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무조건 용서 해 달라는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 외에는

구할것이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먼저 계셔서 나에게 덮쳐진 부르짖음 입니다.

나는 분명 그런 기도 한 적이 없는데

주님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기도 했다고

편파적인 해석으로 그런 기도 했다고 우기시는 겁니다.

 

나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했데요 글쎄~~~~~

 

분명 나도 성전 중앙에서 바리새인처럼

그런 기도를 하고 싶어 죽고
그런 기도 뿐이며 그런 기도 밖에 할 줄 몰랐습니다.

십의 이조를 드릴 정도면 얼마나 복받았냐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 두 패로 분리 작업을 통해서

그게 복이 아니라 저주이다는 겁니다.

 

성경에 말도 안되는 것이 갑자기 끼여 있는 신화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천사가 가끔 연못에 내려와서

그 연못에 가면 어떤 병든자도 낫게 된다는 [전설의 고향] 같은 생뚱맞은 이야기가 있다 말이죠.

 

(5:1, 개역)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5:2, 개역)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5:3, 개역)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5:4, 개역)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5, 개역)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5:6, 개역)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5:7, 개역)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5: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5:9, 개역)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다들 그 베데스다 연못 중앙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빨리 달려들려고 하는데

그래야 병이 낫게 되는데

 

중앙 센터로 뛰어갈수 있는 다리가 없는 앉은뱅이 38년 병자라서

아무도 자기를 그 베데스다 연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는 겁니다.

억지로 억지로 가는 그 중간에 다른 사람이 먼저 도착해 버리니

병을 낫게 할 수가 없다는 거죠.

 

그때 예수님이 일어나 가서 걸어가라 라는 겁니다.

 

이게 말이 안되는데

이것이 말이 되겠끔 반드시

유대인들이 시비를 걸어주어서 말이 되겠끔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5:9, 개역)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5:10, 개역)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5:11, 개역)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5:12, 개역)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5:13, 개역)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5:14, 개역)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5:15, 개역)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가만히 있으면 될 것을

시비를 걸어 주는 바람에

? 하필이면 왜 안식일날 고치냐 말이죠!!

안식일날 성전에서 예배 드리는 날 아닙니까?

졸지에 성전의 의미

만민이 부르짖는 기도하는 집의 의미가 오히려 또렷하게 되더라 말이죠.

 

두 패로 갈라지는 겁니다.

 

이런 두 패로 가르는 부르짖음을 할 수 있냐 말이죠?

우리는 못하나
주님은 하신다는 겁니다.

 

두 패로 갈려져서 성전 끄트머리로

낭떠러지로 몰렸을때에

 

비로소 공중의 나는 새가 나 보다 백배나 좋은 팔자라는 것을

너는 그래 주님의 불쌍히 여겨주심의 긍휼로 먹고 사는 것을

나 이제서야 알았단다 라고

너가 부럽다고 부르짖는 겁니다.

 

그저 못나서 못난이로써 끝으로 몰려

성전 중앙에서 부르짖지 못하고

끝으로 몰려 구했을 뿐인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했다고

일방적으로 편파해석을 해 버리시니까

 

그런적 없다고

 

아냐 넌 구했어

 

아뇨 그런적 없다고

 

아냐 넌 나 예수를 사랑한다고 했어

 

아뇨 저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씩이나 부인해서 마귀에게 지금 잡혀 왔잖아요.

 

아냐 넌 나를 사랑한다고 세 번 씩이나 말했어

 

라고 자꾸 입을 삐죽 옆의 누구 보란 듯이
입술을 화살표처럼 가리키는 겁니다.

옆에 뭐가 있는데요?

 

입술 삐죽 입술을 최대한 왼편으로 쭈욱 옆으로 말이죠.

이렇게 일방적으로 선언해 버리는 예수님의 부르짖음에 의해

 

이 부르짖음이 나를 이렇게 다루고 있다는 겁니다.

 

(6:24, 개역)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6:25,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6:26, 개역)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6:27, 개역)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6:28, 개역)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6:29, 개역)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6:30,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6:31, 개역)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6:32, 개역)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6:33, 개역)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34, 개역)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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