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 심판과 왕의 부르짖음 (시편 75)

 


(
75:1, 개역) [아삽의 시, 영장으로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사를 전파하나이다

(75:2, 개역)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을 당하면 정의로 판단하리니

(75:3, 개역)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거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셀라)

(75:4, 개역) 내가 오만한 자더러 오만히 행치말라 하며 행악자더러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75:5, 개역)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75:6, 개역)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75:7, 개역)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75:8, 개역)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어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을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실로 그 찌끼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

(75:9, 개역)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75:10, 개역) 또 악인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왠지 마리아의 기도와 한나의 기도가 연상되지 않습니까?

원수 갚아 달라는 기도 말입니다.

 

물론 인간의 원수는 없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할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원수 갚아 달라는 요청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아주 아주 기뻐하셨습니다.

(왕상 3:4, 개역)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왕상 3:5, 개역)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왕상 3:6, 개역)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왕상 3:7, 개역)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왕상 3:8, 개역)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왕상 3:9, 개역)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왕상 3:10, 개역)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왕상 3:11, 개역)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왕상 3:12, 개역)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왕상 3:13, 개역)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왕상 3:14, 개역)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왕상 3:15, 개역) 솔로몬이 깨어보니 꿈이더라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서서 번제와 수은제를 드리고 모든 신복을 위하여 잔치하였더라

(왕상 3:16, 개역) 때에 창기 두 계집이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이것 때문에 또 한국교회가 일천번제로 사기치는 유행이 나타나기도 했지요.

하여튼 마귀들은 성경말씀을 이용해 먹을려고 발짝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의문을 제게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럼 왜 당신은 몇주전부터 계속 원수 갚아 달라는 제목으로 자꾸 내용을 채우느냐?

제가 아니라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원수 갚아 달라는 말이 아니다 라고 그렇게 보시면 안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인간의 원수개념은 엉터리이다고 했죠.

자기가 만들어낸 원수 설정이다고 말이죠.

 

사람들은 그 어떤 기도를 해도 솔로몬의 영광을 구한다고 했지요?

일천번제도 그딴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먹혀들 정도면

얼마나 한국교회가 썩었다는 그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솔로몬의 영광도 들에 핀 백합화 즉 잡초 보다 못하다고

백날 말해도 우리는 그러든 말든 관심도 없이 솔로몬의 영광을 구한다고 했습니다.

공중의 나는 새가 부러울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광야에 핀 잡초가 부러울 이유가 전혀 없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공중의 나는 새를 부러워 하는 기도를 할 것 같으면 말라꼬 기도하냐 말이죠.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는 기도는 하나 마나 한 기도 아닙니까?

이것을 말씀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비교 대조하시는 겁니다.

너희들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수 없다는

이 죄악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로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쌍히 여겨달라고,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늘 엉터리일 뿐입니다.

성경의 그 어떤 개념도 자기 설정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원수 개념은 원인 있는 결과 개념입니다.

즉 그 원인이 항상 자기자신이기 때문에

자기에게로 회귀하는 원수갚기입니다.

자기를 괴롭히는 자를 원수로 보는 겁니다.

 

그런 기도를 하지 않았다고 솔로몬을 칭찬하십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소원을 구하면 자기 중심의 소원이 되는 겁니다.

자기를 위한 소원을 빌지 않았다는 점에서

솔로몬에게 지혜에 지혜를 더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은 아무리 봐도 자기자신이 우매하고 우매한 우매 그 자체 뿐임을 직시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자신이 빼낸 백성이 아니다는 거죠.
얼마나 수효가 많은지 무슨 수로 감당하냐 하는 겁니다.
주님이 빼냈으니까 주님이 책임지실 문제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지혜가 빼냈지 내가 빼낸게 아니다는 거죠.
애굽에서 말입니다.
참으로 끝까지 출애굽 사건과 연관 시키지요?
왜? 애굽은 이스라엘의 원수가 아니라
솔로몬의 원수가 아닌
여호와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겁니다.
지혜의 원수, 십자가 지혜의 원수이다는 겁니다.
물론 광야에서 까지 애굽의 속성이 이스라엘 속에서 나타났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럼으로 솔로몬 때까지도 심지어 솔로몬 조차도
이런 애굽의 속성은 계속해서 나타났고

여호와 혼자 이 싸움을 홀로 하신 겁니다.

왜 들에 핀 백합화와 솔로몬의 영광을 대조하는 겁니까?
광야에 핀 잡초가 뭐가 부럽냐 말이죠?
그래서 애굽왕이 여호와가 누군데? 광야의 핀 잡초를 부럽게 하느냐?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겠느냐? 할것 아니겠습니까?
누가? 애굽왕 바로왕처럼 우리가 말입니다.

그러니 출애굽 사건은 그때 그사건으로 끝난게 아니지요??
계속해서 반복이 되는 겁니다. 무한 반복,
솔로몬의 영광보다. 애굽같았더라 보다
반드시 들에 핀 백합화 보다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 라는 출애굽사건을 벌리겠다는 겁니다.


그 출애굽 사건을 솔로몬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을 빼낸 사건 말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결국 지혜가 없다는 것에서 불가능한 영역을 보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 출애굽한 백성의 왕이 되어야 하니

무슨 수로 왕됨을 유지하냐 말이죠?

아무리 봐도 왕 될 가치가 없는데

즉 지혜가 없는데

그 지혜?
출애굽한 그 지혜!!!
어디까지나 이것은 주님의 지혜이지 나의 지혜가 될 수 없는데

무슨 수로 이 출애굽한 백성의 왕이 되냐 말이죠.

내가!! 나 솔로몬의 아이디어가 아닌 출애굽한 지혜이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혜를 달라고 하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뭘 해도 어리석고 미련하기 때문에

지혜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겁니다.

 

결국 자기는 왕이 아니다 라는 거죠.

지혜가 섭정, 수렴청정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는 겁니다.

나는 그 지혜로부터 다스림을 받아야 할 뿐이다는 겁니다.

 

자기의 원수를 갚는 것처럼 가장 어리석은 짖이 없다 라는 것을 보게 된 겁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호와의 권리이지

인간의 권리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시편 75편의 다윗의 왕 즉위식에서 찬양대가 외치는 부르짖음입니다.

곧 왕의 부르짖음입니다.
(어떤 이는 여호와의 즉위식이다 라고 하고 다윗의 왕으로 즉위하는 것이다 라고 하고) 

그럼으로 나의 원수는 없습니다.

내가 원인이 되는 원수 말입니다.

나의 원수 말입니다.

 

그럼 원인 없는 결과의 원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네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풀어버린 원수입니다.

 

그리고 그 여호와 하나님의 원수는 바로 이런 자신의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양을 찾는데

보충물로써 작용하는 셈입니다.

 

마귀가 잡아 온 베드로가 졸지에 잃어버린 양이였던 겁니다.

괜히 남 좋은 일만 하는 것이 마귀가 맡은 역할입니다.

 

인간은 원수를 감당하지 못하나

주님은 원수를 감당하시는데 있어서

그 방법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다는 겁니다.

용서 하시기 위해서 잡혀 오라는 겁니다.

차마 용서할 줄 몰랐던 것이 마귀입니다.

백날 해도 십자가가 미워 죽는 겁니다.

 

인간은 사랑이 없기에 원수를 감당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원수를 감당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원수를 풀어버린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십자가의 용서를 말씀하시고자 말입니다.

 

그럼 한나의 기도와 마리아의 기도

오늘 찬양대에서 왕의 즉위식에서 외치는 부르짖음은

바로 이 원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입장에서의

왕의 부르짖음

 

곧 이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나이다 저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는 부르짖음입니다.

 

(23:34, 개역)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이것이 원수를 이기는 방법입니다.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미 이겼는데 뭘 또 새삼스럽게 이기냐 말이죠)

원수가 바로 자기자신이다는 것을 알아라 라는 겁니다.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 라고 오이디푸스가 작동할때에

이 비극이 언제 해소가 되는 희극 가로지르기 웃음 해학이 되는고 하니

(나 만 남았나이다. 억울합니다. 내 열심이 특심인데 ~~ / 7천명 남겨놨다 우짤래 ~~~~)

개그 코메디에서 자주 다루는 소재인데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 드디어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는 구나 라고 했는데

나를 보고 또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 드디어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는 구나

또 그 사람을 보고 어떤 이가 나타나서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 드디어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는 구나

이렇게 부정의 부정으로써

34명이 칼을 들고 서로 원을 돌면서 뺑뺑이 도는 모습을 보면

방청객들이 막 웃음을 터트리는 겁니다.

 

자기들은 원수 갚는다고 심각한데

 

멀리서 보면 웃끼는 코메디이다는 거죠.

 

결국 오이디푸스가 자기 눈을 뽑아버린 이유는

알고보니 자기가 그 원수였던 겁니다.

 

우리는 눈을 뽑을 필요가 없이

불가능한 구리놋뱀을 쳐다보면 됩니다.

내가 불뱀인데 불뱀을 쳐다보라니

이 말이 안되는 모순을 쳐다보는 겁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는 남이 아닌 바로 나입니다.
나 라는 불뱀이 나를 물었던 겁니다.
내가 불뱀이였다는 거죠.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곧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모두 다 가담해 버린 겁니다. 모든 인간이 말입니다.

 

이런 내막을 밝혀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사랑이 아니면 이런 내막을 밝혀줄까요?

안 밝혀줍니다.

 

여전히 원인 있는 결과로

자기를 위하여

자기 자신에게 빠져서, 자기에게 중독이 되어서 살아갈 뿐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자신이 이런 어리석은 인간 중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우매함 속에서 벗어날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건방지에 인간에게 없는 것을 구한 겁니다.

지혜 말입니다.

 

그 지혜가 바로 이 원수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왕으로써 왕을 포기하는 입장에서 진짜 왕에게 구하는 지혜는

바로 그 지혜가 이 원수 문제

죄 문제

어리석음 문제

미련한 문제

악 문제

어둠 문제

죽음 문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는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를 간구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주님의 원래 창조했던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 때문이지요.

 

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지혜가 무슨 지혜냐 말이죠.

이 지혜를 펼쳐 달라는 겁니다.

 

바로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왕의 부르짖음은 바로 이것 뿐입니다.

 

십자가의 구하는 겁니다.

 

악마를 풀어버려도 아무도 이 악을 심판해 달라는 간구를 하는자 없이

오히려 이 악과 동조해서

악으로써 의인을 찢는데 동조해 버린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 아닙니까?

우리가 그렇게도 감추고자 했던 사건입니다.

 

그것을 공개해 버리는 겁니다.

성경은 그야말로 십자가로 도배된 겁니다.

감추고자 하면 할수록 더욱더 도배됩니다.

 

우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도 저를 저주했기 때문에 나무에 달리는 것이다 라고

합리화 하면서 말입니다.

 

분명 독재와 싸우는 줄 알았는데

자신들이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박아라 라고 외치는 순간

자신이 바로 그 악의 독재였다는 것이 밝혀지는 겁니다.

로마로 부터의 해방을 부르짖던 독립군들도

예수라는 방해꾼을 없애버리자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우리를 돕기는커녕 방해하고 실족케 하는

예수를 없애 버리자 라는 것이

독립군의 독재성을 악마성을 들추어내는 올무의 올무에 말려든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지혜는 빨리 화친을 청하라 라는 겁니다.

제발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십자가가 아무리 어리석고 미련해 보여도

십자가는 2만 군사입니다.

 

나는 아무리 악으로 무장하고 권력을 아무리 가져도 1만 군사 밖에 안되는 겁니다.

 

그런데 눈으로 보기에 그렇게 보일까요?

 

지혜의 영이 덮쳐진 자는 그렇게 보여서 당장 무릎꿇는다는 겁니다.

 

굿모닝 ~~ 십자가

 

지난 시간에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교에서

성전은 바로 두 패로 가르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줄 그들은 몰랐던 겁니다.

성전이 나를 위한 성전인줄 알고 착각하면서

십의 이조 바친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한다는 둥

헛소리 허구를 오히려 자기 입으로 발설해 버린 겁니다.

성전에서 우상이 자리잡은 겁니다.

 

그런데 세리도 똑같은 놈이기 마찬가지인데

한쪽 강도도 똑같은 놈이기는 매 마찬가지인데

 

갑자기 지혜의 영이 덮쳐져서 못보는 불가능한 것이 보여지게 되니까

당장 엎드리는 겁니다.

믄 말을 해도 백해무효입니다.

무조건 이유 없이 항복입니다.

원인을 따지면 저 바리새인처럼 그 딴 이야기 밖에 나올게 없습니다.

무조건 이유 없이, 원인 없이

제발 살려주세요 라는 말 밖에 없음을 보게 됩니다.

 

왜냐?

진짜 지혜를 봐 버렸기 때문입니다.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했잖아 그래서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거야 라는

지혜를 봐 버린 겁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자는 그것도 모르고 박수를 치면서

맞습니다 맞습니다. 참 잘하시는 지혜 맞습니다.

두 동강으로 아이를 갈라서

저도 가지지 말고

이도 가지지 말게 하소서

라고 인간의 원인을 들통당하게 하시는 겁니다.


십자가의 용서가 이도 의미없게 만들어 주시고
저도 의미 없게 만들어 주옵소서

 

이런 내막까지 밝혀내기 위해서

십자가의 지혜는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겁니다.

그 밑바닥까지 다 파헤쳐야

원수가 밝혀지는 겁니다.

 

그래서 왕되신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비아냥 거리는

그 비아냥 거림 속에서

왕은 부르짖습니다.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제발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스데반집사의 기도에서도 나오잖아요

 

이상하죠

 

제목을 저렇게 몇 주 전부터 달아놓고서는

왜 원수를 갚기는커녕

저들을 사하여 달라고 왕은 부르짖냐 말이죠?

 

지금 시편 75편 본문에서는 다윗의 왕의 즉위식에서

찬양자는 다윗이 왕 됨을 원치 않는 자들에 대한 악의 심판을 행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75:4, 개역) 내가 오만한 자더러 오만히 행치말라 하며 행악자더러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75:5, 개역)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그럼 예수님과 시편 찬양자와 다르네?

아뇨 같습니다.

 

문제는 더 깊게 바닥을 뜯었다는 겁니다.

구약은 표면적으로 가시화 된 것이고

신약은 그 표면까지 가시화 된 것의 배후까지 다 뜯어버린 겁니다.

신약은 보이지 않는 악한 영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육의 싸움이 아니라 영의 싸움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구약은 그것을 눈에 보이는 장기알로써 이스라엘과 이방과의 싸움으로 나타난 겁니다.

이제는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는 거죠.

그래서 신약에서는 구약처럼 무기가 등장하는 전쟁이 없습니다.

몇만 몇십만이 등장하는 전쟁이 없습니다.

장기알이라는 몇만 몇병거 몇 창 몇 방패가 필요가 없습니다.

신약의 구원전쟁은 배후싸움이니까 말이죠.

 

그런 것 하나도 없이도 우주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신약입니다.

특히 사도행전은 그야말로 우주전쟁입니다. 스타워즈입니다.

무기 없이 말입니다. 영적 전쟁 말입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이 몇만 등등의 군대 라는 표현으로써 등장하도록 되어 있지만

선지자 시대를 통과한 다음에는 구지 그렇게 표현할 이유가 이제는 없습니다.

더 놀라운 점은 국가 민족 이라는 개념도 이제 신약에서는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새이스라엘 개념은 이제 더 이상 육적인 민족 개념에 속해버리지 않게 됩니다.

새술은 새 부대에 담겨지기에

구약에는 이스라엘개념은 민족이나 국가에 담겨진 채로 증거가 되었지만

이제는 거꾸로 그 부대 봉다리 박스가 터져버리는 겁니다.

그 어떤 민족고 그 어떤 국가와 나라도 이 새이스라엘 개념을 담을수가 없습니다.

부대가 터져 버리는 겁니다.

그 어떤 민족고 국가도 말입니다.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만이 담아낼 뿐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의미 있는 새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육에 이제는 탁란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배 보다 배꼽이 더 커져 버렸거든요.

 

담을 그릇이 이제는 없습니다.

그냥 묵시의 세계가 그냥 그대로 그냥 들이닥칠 뿐입니다.

 

오히려 육의 세계에서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겁니다.

출애굽같은 다이나믹한 블랙버스터 같은 전쟁은 이제 없습니다.

 

보이지 않게 다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육적인 싸움 개념이 아니기에

이제는 양상이 더 커져 버렸기에

왕되신 예수님의 부르짖음은

원수 갚아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지금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고 용서해달라고 하시는 겁니다.

 

아 그럼 원수 갚는 것은 없네?

아니지요

바로 이것이 원수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의미를 제대로 세우는 겁니다.

원수들이 용서 받는 것을 마귀는 용서 못하는 겁니다.

 

결국 인간들 좋으라고 원수를 용서하는게 아니라

마귀 보라고 원수를 용서함으로써

마귀라는 원수를 갚는 겁니다.

 

주의 기도가 바로 내가 남을 사한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합니다.

오죽 불가능하면 사해 달라고 합니까?

만민이 기도하는 집은 소원을 성취케 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용서해 달라는 것 외에는 다른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사건은 매일 매일 터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죽인 일에 모두다 가담했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용서 외에는 다른 것이 밝히 보이지 않는데

왜 다른 것을 이야기 하냐 라는 거죠.

그 다른 복음을 말하는 것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겁니다.

 

성령훼방죄란 결국 십자가의 용서를 싫어하는 맞물린 의미로써의 사함이 없는 죄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훼방죄도 웃끼게도 인간 자신을 건드리면 이 성경말씀을 이용해 먹더라 말이죠.

안 그러는 놈들이 없을 정도입니다.

 

자기를 반대하면 성령훼방죄로 몰아버립니다.

정말 정말 안 그러는 놈이 없어요.

 

괜히 성경을 안다고 우기는 바람에 말입니다.

저도 그런 놈들 속에 속해있는 자일 뿐입니다.

벗어나는 인간이 없거든요.

모두다 갇혔습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성경 말씀을 쥐 뿔도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주의 기도를 알려주시고

그래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기에

지혜를 간구하는 겁니다.

 

십자가라는 지혜는 결국 나를 향한 송곳일 뿐입니다.

 

(4:12,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그 어떤 예리한 날 선 검보다 더 더 더 날카롭게 나를 찌릅니다.

매일 매일 찔립시다.

 

왕의 부르짖음은 우리 마음을 매일 매일 찌릅니다.

 

십자가로써 말입니다.

 

 

한나와 마리아의 기도는

즉 왕의 부르짖음은

 

바로 이 의의 완성 때문에

악의 심판이 이미 완료된 채로 동원이 되는 것을 봐 버렸기에

아니 외치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왕의 즉위식

예수님께서 주가 되심은

바로 의가 완성 되었음의 선언이자

악의 심판이다는 겁니다.

 

(75:10, 개역) 또 악인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삼상 2:9, 개역) 그가 그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삼상 2:10, 개역)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 우뢰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1:51, 개역)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1:52, 개역)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1:53, 개역)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 벌리는 십자가지혜입니다.

 

왕되신 예수님은 이 지혜를 완성하셨습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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