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깨뜨리는 부활

 

 

제목: 해의영광....


할렐루야
!!!

요즘 바쁘다보니 인사가 늦었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어렴풋한 실체를 확연하게 만난 느낌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선생님

고리도전서 45: 39~ 이하의 말씀을 읽어보면

사람의 육체, 짐승의 육체,... 해의 영광, 달의 영광....

제 생각에는 우리 성도의 부활, 즉 주님의 권능으로 소생했을때의 성도의 상태를 말하는것 같습니다.

이부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나요?

제가 배운바로는 각 사람의 은혜받은대로 그 영광을 받고 부활하는 현상을 말하는것 같은데

39절 이하의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 궁굼합니다.

시간되실때 답글 부탁합니다.

항상 주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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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해의영광.... 

 

 

(고전 15:29, 개역)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침례를 받느뇨

(고전 15:30, 개역)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고전 15:31, 개역)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 15:32, 개역)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고전 15:33, 개역)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고전 15:34, 개역)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고전 15:35, 개역)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고전 15:36, 개역)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고전 15:37, 개역)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뿐이로되

(고전 15:38, 개역)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고전 15:39, 개역)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고전 15:40, 개역)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자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고전 15:41, 개역)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고전 15:42, 개역)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 15:43, 개역)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 15:44, 개역)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 15:45, 개역)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전 15:46, 개역)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고전 15:47, 개역)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 15:48, 개역)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고전 15:49, 개역)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전 15:50, 개역)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고전 15:51, 개역)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고전 15:52, 개역)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고전 15:53, 개역)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고전 15:54, 개역)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고전 15:55, 개역)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6, 개역)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 15:57,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58, 개역)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제가 임의로 구절을 올려서 첫부분과 중간부분 그리고 마지막 부분으로 세 부분으로 임의로 나누면

중간 부분에 해당 되는 부분을 물으셨는데

 

처음과 마지막은 죽은자의 대한 부활인데 그것을 부연설명하고자 중간것을 집어넣었는데

처음도 마지막도 심지어 부연설명하고 있다는 중간도

모두다 다 말도안되는 소리들 뿐입니다.

 

즉 죽은자의 부활 자체가 이미 말이 안되는데 그것으로 출발한다는 거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자기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말을 합니다.

참 불가능한 소리만 하고 있지요 진짜 죽었으면

그 말을 못하잖아요.

그런데 못해야 마땅한데 다시 살았기 때문에 적고 있다고 합니다.

 

즉 안죽어서 뻥쳐서 구라쳐서 거짓말을 해서

종교심의 종교적으로 말하는게 아니라

진짜로 죽어서 죽은 다음에 다시 살아나서 날마다 죽고 있으니

날마다 죽노라 라는 말이 종교적 신앙적 용어가 아니라

실상이다는 겁니다.

 

그럼 이것이 의문이 되어야 하는데 더 또렷한 이유는

사실상 개인적인 죽음은 애초부터 없었다 라는 거죠. 전체죽음이거든요.

한사람의 범죄로 인해 모든 인간은 이미 죽은 겁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모든 표현을 관계적인 언어로 표현한 겁니다. 곧 은혜언어입니다.

개개인의 언어는 선악법의 언어인 거죠. 그런 언어는 성경에 없습니다.

 

여기에 반드시 말려드는 자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선악적인 법적인 언어관계로 소통하는 자들이

걸려들게 되어 있는 겁니다.

완강하게 거부를 하거나

아니면 억지로 따라하거나 말이죠.

 

39절 부터의 부연설명은

 

(고전 15:45, 개역)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첫사람 아담은 살아있다가 죽을 뿐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의문의 반복이다는 겁니다.

지난 번의 질문에 대한 답변처럼

살긴 살았다는데 죽음을 향한 삶이기에

그 삶은 살아봤자 의문 뿐이다는 겁니다.

 

(8:18, 개역)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8:19, 개역)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8:20, 개역)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8:21, 개역)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8:22, 개역)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8:23, 개역)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바로 이런 의미에서

모든 피조물은 이 허무에 복종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질문하신 해(태양) 조차 말이죠.

?

의문을 구체화 하기 위해서 말이죠.

구체화? 의문은 죽이는 것이다는 겁니다.

 

의문이 왕노릇 하게 만들고자

썩어짐의 종노릇에 포로되도록

모든 피조물은 이 살리는 영이 아닌
모든 피조물은 의문의 죽이는 것에
죽임을 당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자 봤지? 의문은 이렇게 모든 피조물까지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포로된 상태이라는 것. 갇힌바 된 것
의문의 죽이는 것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구체화 하는 겁니다.

 

여기서 구원이라는 희년이 펼쳐지는 겁니다.

갇힌자에게 포로된 자에게 억눌린자에게만 기쁜소식이 되는

복음이 선포되듯이

 

죽은자에게만 이 부활이라는 인물이 복음으로 기쁜소식으로 들리는 거죠.

결국 마지막 아담은 이런 상태를 살리는 영으로 한다는 겁니다.

살리는 영 곧 부활로 한다는 겁니다.

부활은 어떤 상태가 아니라 인물인 예수님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이제 의문으로 하지 않고서 말입니다.

죽이는 것으로 하지 않고 살리는 영으로 말입니다.

 

자 이렇게 되면 아시다시피

개인적인 부활 개념은 없습니다.

 

한꺼번에 집단적이다는 의미는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부활개념은 애초부터 없는 거죠.

부활은 곧 구원 개념이요 영생 아닙니까?

개인 영생이 없어요.

개인 구원 없어요.

집단이니까 관계적인 의미이지요.

(모든 종교는 개개인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개인은 없습니다.

개개인을 인정해 버리면 안식일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안식의 주인은 안식일을 지킬필요가 없이 안식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주인입니다. 주인은 안식이기에 그 자체로 안식 곧 평안케 하십니다.

그래서 안식일날 일부러 죽은자를 살리십니다. 부활시켜버립니다.

아마 개개인의 부활지키는 자들은 왜 안식일날 부활 시키냐고 따질 겁니다.

예수님은 말씀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말씀 지킬 이유가 없습니다.

말씀 그 자체인 예수님을 곧 인물을 실로암소경은 보기를 원했고, 만났습니다.

은혜언어가 아닌 개인을 인정하는 선악언어는

말씀 잘 지키는 예수, 안식일 잘 지키는 예수를 따로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부활 그 자체이신 예수님은 인간들의 부활을 깨뜨리시면서 충돌, 돌파 하십니다.)

 

자 그럼 부활이 무엇이겠습니까?
아니 부활이 누구입니까?

오히려 개인의 부활개념이 의문의 죽이는 것이기에

그것을 또렷하게 깨뜨리는 것이겠죠.

 

이렇게 구체화 된다면

죽어서 부활하고 구원받고 영생하는 천국 개념은 다 깨어지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의문의 썩어짐이 만들어내는 가짜 구원 부활 영생이니까 말이죠.

 

유대인에게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짖겠다는 라는 그런 의미에서의 부활로 보셔야만

유대인처럼 자신의 부활 영생 구원개념이라는 확고한 개념을 깨뜨리는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위기의식을 제대로 인식하게 될 겁니다.
이것이 부활은 예수님이다 라고 돌파하는 부활입니다.
나의 부활개념을 깨뜨리지 못하는 부활은 가짜요 가짜예수인 겁니다.

 

오히려 예수님 혼자만 부활하시고 구원받으심 앞에서

나의 구원이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깨어졌고

나의 부활이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자가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로 기뻐하는 자 입니다.
부활이 누구인가를 제대로 보는 눈뜸입니다. 실로암소경처럼 말입니다.

 

의문이 깨어졌고

명료함이 밝히 보이면서 십자가만이 승리했다는 것이 또렷하니까 말이죠.

 

결국 십자가는 기존의 부활사상을 잘못을 수정해서

제대로 고쳐서 연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아예 기존의 부활사상을 다 깨뜨리고

이제 그 어떤 이도 부활 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바리새인이 실로암 소경의 고침을 자기들 입으로 오히려 또렷하게 증거합니다. 뭐라고?

창세이후로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친 자는 없다고. 모세도 못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는 했다 라는 거죠. 이게 부활입니다. 죽는 미래가 덮쳐져서 그 다음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부활을 못 누리면 즉 예수님을 못 보면 소경이듯이 지금 죽음을 이긴 예수님이 부활 그 자체임을 못 보면 부활교리나 습득할려고 할 뿐입니다. 의문의 반복인 거죠.)


예수님의 부활이 너무 너무 기뻐서

그 기쁨에 노래할 뿐인데

예수님 자신의 부활에 참여 시켜 주심

곧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앞에

나의 엉터리 의문의 부활이 눈 녹듯이 녹는 겁니다


기존의 부활을 끌고와서 연결시킬려고 하니

부활할 놈의 삶이 순 엉망인데도 불구하고

부활은 해야겠고

천국은 가야겠고

그러나 자기 꼬라지가 한심하고
(사두개인이 그래서 형수가 죽었는데 누가 남편이냐고?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하냐고?

그런 족보가 개판인 천국이 있겠는가? 윤리 도덕에 위배되는데?
어떻게 부활이 있을수 있냐?라고
졸지에 윤리 도덕 방지턱에 부활에 걸려서 넘어가질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 국민여러분 ~~~~ 아 안타깝습니다. 부활이 없다네요 ~~~~ ㅋㅋㅋ)

오히려 그런 낮은 수준에서 높은 수준이 되었다고

부자청년은 자신만만했는데
예수님은 어딜 감히 의문인 주제에,

죽이는 의문 덩어리인 주제에 감히 구원받겠다고?
뭐 그 의문의 몸뚱아리를 부활시켜 보겠다고?

전재산 버리고 날 따라와 라고 하니까

근심하고 등 돌려 돌아서 가버리듯이

 

그러니 자기자신의 의문을 더더욱 반복할 수 밖에 없으니 말이죠.

부활은 그야말로 본능 중의 본능인데

 

그것을 연결시켜준다는 의미에서 고전 15장이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썩어빠진 부활 앞에

또렷한 예수님의 부활로 놀려먹으니까

화내고 짜증내야할 입장인지

아니면 같이 놀려먹을 것인지

 

부활 따위는 없지롱 ~~~~~~

 

그러면서도 뒤로 꼬불쳐 놓은

전혀 기존의 부활과 전혀 양상이 다른 부활로 인해

마음껏 놀려먹는

 

심지어 자기자신이 그렇게 애지중지하게 신주단지 모시듯 모신 부활사상을

그 동안 그렇게 열심히 어렵게 공부해서 터득한 그 비밀을

 

가차없이 장단지 깨뜨리듯

성전을 헐어버리듯

부활을 없애버리듯

 

명료한 십자가의 죽음 앞에

이제 나의 부활이 아니라

마지막 아담의 남을 살리는 부활(살리고자 십자가에 대신 달리시는)

남을 사랑하는 율법의 완성으로써의 부활(십자가의 죽음)

 

?

남들은 그저 안 죽고 산 영이다 라고 우기는 그 부활을

 

너 참 죽은 시체이지 라고 죽은자로 취급해서 살리시고자

오히려 역설적이게 죽어버리는

대신 십자가의 저주를 받는 그 사랑

결국 사랑없는 부활을 꿈꾸니까

의문의 죽이는 부활인거죠.

여기서 아무도 빠져나올자가 없으니

예수님이 직접 그 저주에 뛰어드시는 죽음이 바로 부활이다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그 죽음이 바로 부활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영생이니 불멸이니 하는 것들이 다 날라가는 거죠.

여기에 모든 피조물이 부활하는게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죽음에 같이 참여하듯이 막죽어나갑니다. 막 죽어요

아니 부활이야기하는데

왜 자꾸 죽는 이야기가 오히려 만개하듯이 활짝 피느냐 말이죠.

 

임의로 세부분을 나누었는데 사실상 처음과 마지막부분이

다 죽음 이야기입니다. 그게 부활이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날마다 부활하노라가 아니라

날마다 죽노라 하는 겁니다.

날마나 부활 한다는 말도 말이 안되는 판국에

그것이 종교꾼들에게는 먹혀들거든요.

그런데 날마다 부활이 아닌 날마다 죽노라 라고 하면

도대체 몇 번을 죽어야 부활이 된단 말입니까?

 

그것은 창세전에 심은대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심은 것으로

육으로 심은 것은 육으로(의문으로 심은 것은 죽음으로)

영으로 심은 것은 영으로(살리는 영으로 심은 것은 영으로)

 

육으로 심겨진자는 이 고전 15장 이야기가 듣기 싫은 겁니다.

아니면 자기입맛에 맞게 해석하면 건축물에 필요없는 것을 버리겠죠.
그런데 그 건축자들이(해석물) 필요없다고 버린 돌로써

예수님은 머릿돌 삼으시거든요.

 

부활 이야기 하는데 죽음은 빼야하거든요.

자꾸 죽음 이야기가 듣기 싫듯이 말이죠.

 

그러나 영으로 심겨진 자는 이 십자가의 죽음 때문에 부활이다는 겁니다.

그럼 그 죽음의 첫 신호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부활이 시작이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이 십자가의 죽음이 이렇게 밝히 보인다는 취지에서

아주 신나게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증거하는 이유 입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이 부활이다고

 

십자가의 죽음이 바뀌어져서 부활이 되는게 아니라

동시다발적입니다. 관계이니까

관계란 인물과 인물이다는 겁니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듯이 말입니다.

즉 부활은 인물로 봐야

의문이 벗겨지는 겁니다.

 

십자가의 죽음 자체가 부활이다고

그래서 의문으로 하지 않고

살리는 영으로써

마지막 아담은 살리시는 영이라고

 

그 외에는 첫아담에 속할 뿐인 그저 살다가 죽어버리는

, 의문의 육일 뿐이다고

이런 의문의 육에 모든 인간을 첫아담에 속한 자라고

 

그 어떤 누구도 이 첫아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첫사람이 죽은 것 같이 모든 인간은 이미 죽은 겁니다.

 

빠져나올 길은 없습니다.

이 없음이 분명하고

또렷한 단절이기에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일만 골라서 하시는 겁니다.

 

바로 마지막 아담이 부활이다는 겁니다.

아주 아주 놀려먹듯이

너희들 부활 모르지 라는 식으로 아예 단절적인 의미로 증거합니다.

 

저쪽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너도 죽으면 무슨 소용이냐 라고

너도 죽기는 매 마찬가지 아니냐 라고 죽는다는 것에서 놀려먹는데

 

이쪽은 죽어도 산다고 예수님이라는 인물 때문에

겁도 없이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날마다 부활하노라가 아니라

날마다 죽노라 라고

 

마치 한 쪽의 강도처럼 주여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말하는 강도처럼

바울은 부활이라는 어떤 형태가 아니라

부활 자체가 하나의 인물로써

그런 기준으로써 증거하니까

 

 

저쪽의 부활개념은 인물이 아니라

자아의 이동 곧 이 세상에서 살다가 죽어서

저 세상으로 이동개념으로 보고 있는

 

그것도 윤리 도적으로 못산 강도라면 이미 터 버린

반대로 어릴적부터 단 한번도 율법을 어긴적 없어야

그 이동의 부활을 당연시 하는

그런 의문의 죽이는 것을

그 육적인 사고방식

의문의 썩어짐을

 

대조하면서 또렷하게 구별 구분짖는 겁니다.

차이를 내시는 겁니다.

 

그러니 나의 부활이 없다는 것에서 기뻐하세요

왜냐 예수님이 부활했으면 다 된 겁니다.

 

예수님만 다시 사셨으면 이미 다 된 겁니다.

 

내가 부활해봤자 또 의문이니 말이죠.

주님이 나의 창조주니 그 양반이 하실 문제이지

부활은 내 숙제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님의 부활하심 이것 하나로 평생을 감격하면서 살 뿐입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의 부활입니다.

나의 부활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의 부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의 부활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따로 있고 부활 따로 있는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자체가 부활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현재죠

날마나 죽노라처럼 현재 부활을 누리지 못하는자

지금 현재 부활하지 못하는자는

다 엉터리 인 겁니다.

 

 

내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삼일만에 다시 살려내셨다는 그 안도감에

 

그 명료한 다시사심 앞에

 

그저 남아 있는 생을 다 드려도 모자랄 판국이니 말이죠.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삼일 만에 다시 살려 주가 되게 하셨도다

 

(5:30, 개역)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5:31, 개역)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여기에 해도 달도 하늘도 처음부터 예수님의 부활되심에 동원이된 도구요 증거꾼 목격자이다는 겁니다. 즉 선지자죠.

자기를 위한 존재들이 아니였다는 거죠.

 

우리가 거부하면 이들이 증인으로써 심판대에 출석케 되니

그때는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도록 탄로 나겠지요.

 

참으로 철저하게 사랑이라는 자작극에 말려드는 은혜로만 가득채운 겁니다.

이것을 부활마저도 선악으로, 법으로 해석하는 자는

이 십자가가 그냥 거리끼는 걸림돌로 작용하겠지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은혜이고 자랑꺼리이다는 겁니다.

 

(14:7, 개역)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14:8, 개역)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14:9, 개역)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방금 고전 15장을 보고 느낀 점입니다.

신학이랑 아무런 상관 없으니

다른 분에게도 물어보고 비교해 보세요.

 

그런 것도 필요할때도 있을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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