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정의(구원) VS 하나님의 정의(구원) (시편 82)

 


(시 82:1, 개역) 『[아삽의 시] 하나님이 하나님의 회 가운데 서시며 재판장들 중에서 판단하시되』

(시 82:2, 개역)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셀라)』

(시 82:3, 개역)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시 82:4, 개역)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찌니라 하시는도다』

(시 82:5, 개역) 『저희는 무지무각하여 흑암 중에 왕래하니 땅의 모든 터가 흔들리도다』

(시 82:6, 개역)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시 82:7, 개역) 『너희는 범인 같이 죽으며 방백의 하나 같이 엎더지리로다』

(시 82:8, 개역)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판단하소서 모든 열방이 주의 기업이 되겠음이니이다』


 

제목을 저렇게 하면 벌써 눈치채는 것이 당연이 둘의 비교 곧 대조로써

인간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은 한계 곧 결점이 없으니 당연히 하나님의 정의가 옳지 않냐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빨리 결론 내릴게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로움을 바로 인간의 정의를 통해서 그 차이로 드러내신다는 점입니다.

곧 인간의 정의가 얼마나 악마적이냐 하는 점입니다.

인간의 육의 한계의 차원이 아니라

아주 아주 적극적인 악마성의 차원이다는 겁니다.

 

정의는 곧 구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공의)는 곧 하나님의 구원사건입니다.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구원관은 곧 인간의 정의관은

왜 악마와 똑같은가?

그것은 쉽게 마태복음 4장에서도 나옵니다.

마귀가 바른소리를 합니다.

틀린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메시아 라면

적어도 정의를 이루고 구원을 성취하는 자 라면

적어도 메시아로써 악을 심판하는 구원자라면

이러 이러한 메시아가 되어다오 라고

조건을 세가지를 걸어서

시험하는 겁니다.

 

너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라고 말입니다.


(마 4:1,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마 4:2, 개역)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마 4:3, 개역)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 4: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4:5, 개역)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마 4:6, 개역)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 4:7,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마 4:8, 개역)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마 4:9, 개역)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 4:10, 개역)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 4:11, 개역)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그런데 아무리 성경에 적혀 있어도

우리가 추구하는 구원과 정의로움 그리고 메시아 개념은

어쩌면 그렇게도 똑같이 마귀가 요구하는 세가지 시험에 다 들어간다는 점이

그야말로 충격적이다는 겁니다.

 

저것이 마귀의 세가지 시험이라는 것을 알아도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여전히 구원도 정의도 메시아도 저런 마귀가 원하는 세가지로써 구성된

구원과 정의와 메시아를 추구한다는 점입니다.

 

그런점에서 바로 이런 마귀가 요구하는 메시아조건 세가지처럼

인간의 구원관 인간이 성경을 통해서 구상한 정의관을 거쳐서

하나님 자신의 정의를 증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 시편 82편은 증거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누가 봐도 악인에 대한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악인

곧 원수가 누구냐 라는 겁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회 곧 하나님의 모임

신들의 모임에 참여한 자가

곧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즉 다른 말로 하나님의 회에 참여하지 않은 자는

심판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안 심판하느냐?

포함되지 않았다메?

 

아뇨 이미 심판 받은거다는 겁니다.

심판 안 받아서 제외 곧 심판제외가 아니라

이미 심판을 받은바 되었기에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는 겁니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심판의 대상이 아닌데 심판의 대상이 되면

이 심판에 대해서

심판이라는 주체에 대해서 더 깊게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겁니다.

 

겨우 이방인에 대한 심판을 우리는 여기서 언급하는게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심판자 여호와가 아니다는 겁니다.

 

적어도 심판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생각할려면

하나님의 회에 참여까지 했던

신들의 모임의 참석자 곧 유대인에 대한 심판 까지 생각을 해 줘야

그것이 진짜 심판에 대한 내용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기존의 종교에서의 심판 종말 형벌 진노 등등의 협박 공갈은

오늘 말씀하시는 심판과 비교할수 있는 차원이 다릅니다.

 

신이라고 표현했을때에

남을 심판 할수 있는 위치에 해당된다는 거죠.

누가? 이스라엘 말입니다.

유대인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이 신의 위치에서 심판 진노 종말 멸망을 행사하는 자가

도리어 하나님으로부터 심판 받을 정도이다면

 

이 정의는

이 구원은

이 심판은

 

도대체 인간의 정의와는 단 한 개도 맞는 구석이 아예 없게 된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심판 안 받을 수 인간이 아예 없게 되는 겁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이 허걱 하고 놀래서

주여 그럼 누가 도대체 누가 구원을 받을수 있겠습니까? 라고 놀랠정도로

그 정도로 낯설다 라는 겁니다.

포착불가의 구원이요

포착불가의 정의 이다 라는 겁니다.

 

유대인 사회가 구원의 장치로만 온 몸에 칭칭감아서 바깥 사회활동까지 전부다 구원의 장치로 도배를 했는데

그야말로 신들의 환경이요 신들의 도시요 신들의 나라요

구원의 도시, 정의의 도시, 공의의 도시인데

 

그딴 것들이 하등 필요가 없게되는,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전혀 딴판의 구원

전혀 딴판의 정의

전혀 딴판의 심판으로 인해

 

주여 그럼 누가 구원을 얻겠습니까? 라는 진짜 현실 속에 들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19:20, 개역)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19:2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19:22, 개역)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19:23, 개역)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19:24, 개역)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19:25, 개역)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19:26, 개역)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19:27, 개역)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19:2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19:29, 개역)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19:30, 개역)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19:25, 개역)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10:26, 개역)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18:26, 개역)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진짜 현실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아무도 천국에 못들어간다는 진짜 현실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 동안의 세계는 허구였던 거죠. 그 실체를 발가벗긴 겁니다.

허물어 버린 겁니다.
허물어 져야 3일만에 지을 그 뒤의 것을 바라볼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전 것이 지나가야 새로운 것을 볼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정의의 도시 구원의 도시로 인간의 손으로 건설된 도시들이
다 허구 허상 우상이였던 거죠. 자기를 위한 도시였을 뿐인 겁니다.

도시(성전, 교회, 국가, 나라, 천국)

인간들이 꾸며놓은 종교구원의 환경이 다 와르르 무너지는 거죠.

헐라 내가 삼일 만에 짖겠다 라는 선언처럼 와르르 그 모든 허상들은

실상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할 판국이 되는 겁니다.

 

그 실상은 반드시 맞물려서 나타나는 겁니다.

인간은 구원이라는 허상, 신의 정의라는 허상을 추구할려다가

그런 도시 그런 나라를 지을려다가 쓸모 없다고 버린 그 모퉁이 돌이

도리어 하나님은 그 모퉁이 돌을 구원하시는 일만 하신다는 겁니다.

아니 구원에 필요가 없어서 버린 이단사상을

주님은 그 이단 예수를 구원하시는데 이 성경을 기록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역설적이냐 하면

마치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유도하신다는 차원에서

이 시편 82편을 기록하고 있는데

정작 우리 보다 먼저 앞서 읽었던 유대인들이

시편 82편 대로 딱 걸려든 겁니다.

참 신기하게도 거울 맞죠

 

그럼 지금 현재에 우리는 그럼 안걸려드느냐

딱 걸려듭니다.

 

그러니 이 상황을 우리는 거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악마의 정의

악마의 구원을

우리는 그게 옳다고 설치다가

 

주님의 심판에 놓여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주님의 심판을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괜히 이스라엘은 실패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망해도 상관없다 라고 괜히 말하는게 아닙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

곧 신들의 모임에 참여할 정도로 그 기능을 부여받아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 이라는 기록된 말씀을 체험하려면

신들의 모임에 참여해서가 아니라

너희는 신이다 라는 신이 되어서가 아니라.

 

정작 그런 신이 되어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입니다 라는

의문의 반복 뿐이다는

의문의 죽이는 것 뿐이다는

 

저에게는 아무리 봐도 사랑이 없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는

주님의 주 되심에 더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인간에게 아무리 신의 위치에까지 신의 능력

곧 마귀도 쫏아내고 귀신을 물리치고 병고치는 기적과


돌을 떡덩이 되게 하고

경제문제 바로 해결하고


거룩한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도

상처하나 없이 천사들이 두 손으로 받쳐주는

믿음(신앙)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고


온천하만국을 다스리는 제사장 나라로써의 권세를 다 가져도

정치문제 제대로 된 왕이 되면

율법적으로 확실한 왕이 등장하면

정치문제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는

 

그런 완벽한 세상과 환경이 된다고 할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몽땅 도루묵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신이 되면 될수록 상한심령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거리가 더 멀어지는 간극이 극대화 되는데

더욱더 단절이 되는데

 

(GOD)인데

구원인데

정의인데

 

어떻게 신을 해체할수 있겠습니까? 무소불위의 권력인데 어떻게?

 

이것이 가짜 신의 특징이다는 겁니다.

가짜 구원의 특징이다는 겁니다.

 

주여 저의 구원을 취소 시켜 주소서 제발 나의 구원을 취소 시키시는 구원을 베푸소서 라고 기도하는 자가 없잖아요?

 

이것이 가짜 정의의 특징이다는 겁니다.

주여 인간의 정의 곧 가장 의롭고 거룩한 행동들이 모조리 다 배설물 똥 덩 어 리 였습니다.

라고 나의 정의로움을 거짓이다고 고백하는 자가 누가 있냐 말이죠?

 

이것이 인간인데 마귀가 장악한 인간인데

 

다행히 마귀가 장악할 수 없는 그 분이

바로 이런 마귀의 짖을 심판하러 왔다 라는 겁니다.

 

그럼 이 심판이 유대인 곧 너희는 신이다 라고 했던

그 너희 에 해당되는 유대인은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런데 십자가 상에 두 강도처럼

하나는 사울 왕이요

또 하나는 다윗 왕인데

 

사울 보다 더 나쁜놈인 다윗왕은 비로소 감사하다고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오늘 내가 너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라고

 

다윗의 후손으로 심판자가 오시는 겁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듣고 있는 사울왕은 이 말도 안되는 대화에

둘 다 미쳤냐?

지금 죽어가고 있는데 뭘 또 심판자가 오니?

제발 좀 정신좀 차려라 라고

간따나 열받는데 더 열받게 하는 둘의 대화 때문에 미쳐버리는 겁니다.

 

이런 실체를 들추어내는 심판이 감사하기는커녕 무지 무지 싫은 거죠.

 

자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 개념이 증거된다고 할 때

오늘 시편 82편은 바로 그런식으로 심판의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속에서 말입니다.

 

신들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신을 심판하라고 신으로 삼았는데

도리어 그 신이라는 권력을 이용해서

가난한 자를 압제하더라 말이죠.

 

그 가난한자가 자신들의 처음자리인데 말입니다.

자신들의 기준을 스스로 그 뿌리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왜 이런 의미의 내용을 말씀하시냐 하며는

이것이 사실은 법의 의미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법을 주면 누구든지 다 이렇게 됩니다.

안 그러는 인간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지적 당한다고 해서

다른 민족은 예외가 되느냐 아니다고 했습니다.

 

그 어떤 인간도 권력이나 능력이나 힘을 주면

그 기능 자체가 인간들이 감당하기에는 택도 없다는 거죠.

 

오히려 기능 자체가 너는 안돼 라고 몰아가는 기능이였다는 겁니다.

법이 가입된 것은 지키라고 주어진게 아니라

죄 아래 가두기 위함이다고 했듯이 말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의 선민이다는 둥

하나님이 신들의 모임에 참여케 했다는 둥 등등의

나는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의 이조를 내며

등등등

 

금식 자체가

십일조 자체가

그런 올무의 기능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서 그것을 지켰다고 하니

도리어 말려들었다는 겁니다.

 

그럼 신이 아니라

진짜 신은 뭐냐 말이죠.

진짜 하나님은 뭐냐 말이죠.

 

바로 해체입니다.

 

신을 포기하는 신입니다.

 

신을 해체하는 신입니다.

 

가짜신은 진짜신이 될려고 겸손할려고 하고 율법을 다 지킬려고 하고

오히려 진짜 신 되신 예수님은 하늘영광 다 버리고

신의 자리를 버리고 인간 중의 인간인 죄인이 되셨다는 겁니다.

 

신 스스로가 이렇게 신을 해체해 버리면

인간이 내세울수 있는 신이란 이제 없게 되는 겁니다.

 

신은 죽었다.

 

제가 얼마전에 인간은 죽었다 라는 글을 신은 죽었다 라는 내용을 패러디 해서
주어(주체)에서 인간으로 바꾸어서 적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 써먹기에 정말 딱이네요 딱

 

 

김대식 316일 오후 1:32

 

인간은 죽었다

 

로봇 땡중이 나타나 해탈을 했노라고 인간들에게 선언한다.

인간들은 부랴부랴 전원을 차단할려고 로봇을 해체하기 시작한다.

 

마치 인간들 속에서 하나의 로봇이 등장하여

인간은 죽었다고 선언하니까

인간들은 어떻게 인간이 만든 로봇이

인간이 죽었다고 선언할수 있냐고 비웃다가

배꼽잡고 웃다가 죽어버렸다.

 

고로 인간은 죽었다.

 

(인류멸망보고서)

 

http://crosslamb.tistory.com/1240

 

 

이제 인간이 기계를 이기는 유일한 마지막이 되는 이세돌의 한번 승리를 보고 적었었는데요.

 

처음부터 인간의 자리는 없었다 라는 겁니다.

인간은 이미 죽었다 라는 거죠.

 

이세돌은 인간이 진게 아니라 이세돌이 졌다 라고 했지만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모든 아담은 이미 죽은 겁니다.

그것이 다시한번 확인케 하는 사건이다는 겁니다.

 

이런 현실도 모르고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신으로 까지 만드셔서 활동하신 것은

자신의 사랑 되심을 증거하기 위함이였지

인간의 신 됨을 위한 신만들기가 아니였다는 거죠.

 

오히려 죄인만들기를 하는 복음이 기뻐야 하는 건데

유대인은 곧 신은, 신이 된 유대인은 이 복음이 거리끼는 걸림돌이 된 겁니다.

몇 년전에 회복이라는 이스라엘을 다룬 다큐를 봤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현이스라엘의 완악함을 보게 됩니다.

서로가 서로를 폭탄돌리기를 하는 겁니다.

밑도 끝도 없는 의문을 반복하는 것에 아주 아주 자랑스러워 할 정도이니

얼마나 배설물인줄도 모르고 자랑하겠느냐 말이죠.

죄인으로 태어난 줄도 모르고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한 자부심

바로 옆의 이웃 민족은 안 그러냐 말이죠.

 

인간이 신이라기에는 이런 현실 밖에 없으니 너무 너무 초라하지 않습니까?

인간이 얼마나 무능한데

신이라는 능력을 주게 되니

그 수건을 벗을려면

보통으로 그 완악함을 꺽지 않으면 안될 정도이니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셔야 하니

진짜 신은 이래 죽는데

가짜 신은 근처도 못가면서도(안식일 지키기로 흉내냄, 안식의 주인을 못 알아볼 정도로)

신의 흉내는 온갖 다 내면서 정작 본심은 신의 자리를 늘 탐하더라 말이죠.

사랑에 의해서 빠다 발린 빈자리이다 보니 쭐구덕 미끄러지는 겁니다.

안 미끄러지는 인간이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시편 82편의 너희는 신이다 라는 내용을 인용해서

요한복음 10장에서 언급하십니다.

 

(10:34,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10:35, 개역)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10:36, 개역)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마치 저번에 실로암소경을 누가 눈뜨게 했느냐 라는 그 누구를

바리새인 자기들 입으로 스스로 증거케 했던 것처럼

 

같은 방식으로 너희를 신이라고 했듯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예수님 스스로가 스스로 하나님 아들이다 라고 한 것에 대해서

참람하다 라고 공격하는 장면을 역으로 사용하십니다.

 

니가 하면 로멘스고 내가 하면 불륜이냐?

그 불륜이 너희 로멘스가 못하는 구원을

이 불륜이 내가 구원하면 그럼 어떻게 되니?

 

뭘 해도 인간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있는 것 까지 빼앗기는 방식이고

뭘해도 예수님은

있는데 더 있음이 풍성하도록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 마저 빼앗기는

 

결국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정의입니다.

 

인간의 정의에 반대를 하는 정의

인간의 정의를 깨뜨리는 정의

인간이 신이 된 것을 깨뜨리는 신의 자리를 버리고 인간이 된 예수

곧 신을 깨드리는 예수 라는 겁니다.

 

이 분만이 되도 않는 인간의 정의

의문만 반복되는 정의

정의 같지도 않은 정의

흐릿한 정의를

 

십자가로 또렷하게 하셨습니다.

그럼 정의 포기 하라 말이죠.

정의사회구현 사제단 이라고 하지 말고

불의사회구현 사제단 이라고 하라 말이죠.

 

그들이 보는 불의가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의 보다 더 정의롭거든요.

 

똑같은 놈들이 기독교에도 있던데

한참 월드컵이 유행했을때에

붉은악마라는 응원단을 왜 붉은악마라고 하느냐 로 시비를 걸던데

ㅋㅋㅋ

지금 생각해도 웃끼는 코메디인데

하여튼 말이 기독교이지 실상은 악마교죠

붉은 악마라 하지 말로 화이트 엔젤

하얀 천사 라고 하라고 ㅋㅋㅋㅋㅋ

 

마귀 티를 내어도 너무 티를 팍팍 내니 정말 배꼽잡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식으로 너희가 신이다 라고

 

(10:34,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건 뭐 놀리는 것인지?

아니면 신이 아니다는 것인지

 

결국 신은 죽었다 라는 선언과 마찬가지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향해 신은 죽었다 라고 하는 겁니다.

너희가 신이지?

그래 너희는 신 맞아

그런데 신은 죽었어 라고 말하는 겁니다.

 

신들이 그 말 듣고 발칵 뒤짚어 지는 거죠.

그래 너 예수 우리 손에 죽어봐라 라고

죽였는데

죽은 예수님은 오히려 살고

죽음을 행사했던 신들은 오히려 영원히 죽은

 

완전히 팔이 어긋맞게 된 상황이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십자가 사건을 펼치시는

반대를 위한 반대가

바로 정의이다는 겁니다.

거룩이라는 뜻이 차별 구별 거리벌리기 차이내는 것이 거룩의 의미이듯이

정의는 인간의 정의를 산산조각내어서 그 어떤 인간에게도

정의라고 찍 소리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이 정의이다는 거죠.

마치 안식일 지키는 것을 깨뜨리는 안식의 주인처럼 말입니다.

 

 

(82:3, 개역)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지며

(82:4, 개역)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찌니라 하시는도다

 

진짜 정의라면

고아 과부 나그네를 건져내라 말이죠.

 

그것이 바로 신 아니냐 말이죠.

오히려 마귀가 나서서 고아 과부 나그네를 건져내라 합니다.

 

그러나 진짜 신이라면

나는 신이 아니라 오히려 신으로부터 건짐을 받아야 할

고아 과부 나그네인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고

진짜 신을 보고서 가짜신으로 들통내실 주님을 보고 기뻐하는

희년 복음 은혜의 해를 보는 겁니다.

 

출애굽이라는 구원사건으로 인해 덤으로 얻게된 정의

그것은 구원받은 우리가 신으로 칭함을 받아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우리가 덤으로 얻게된 정의

보증 보혜사가

 

(14:16, 개역)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늘 우리와 함께 있어서 늘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들어서

주의 정의를 맛보게 하신다는 겁니다.

곧 내가 곧 고아요 과부요 나그네임을 말입니다.

 

신이 되어서가 아닌 (남을 7번 용서하는 신)

성령을 받아서

고아 과부 나그네로 (매초 매일 매년 매 순간마다 770번 용서 받아야하는)

만드시는 정의 이다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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