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삼키는 열심 (시편 69)

 

제발 제발 책임지지 말자 제발요 ~~~

 

책임 질 것이 없는 종말(율법의 마침), 용서를 누리는 인생

 


(
69:9, 개역)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10:1, 개역)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10:2, 개역)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10:3, 개역)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10:4, 개역)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2:17, 새번역) 제자들은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 / 69:9

(15:3, 새번역)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떨어졌다" 한 것과 같습니다. / 69:9

 

(2:13, 개역)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2:14, 개역)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2:15, 개역)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2:16, 개역)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2:18, 개역)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2:1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20, 개역)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2:21, 개역)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열심 하면 누가 생각납니까? 네 맞습니다.

엘리야입니다.

 

내 열심이 특심이오니 내 만 남았나이다.

 

(왕상 19:9, 개역)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왕상 19:10, 개역)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왕상 19:11,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왕상 19:12, 개역)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왕상 19:13, 개역)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왕상 19:14, 개역)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열심을 낸다는 말은 무슨 의미 입니까?

책임을 지겠다는 겁니다.

 

책임을 감당하고파서 인간은 열심을 내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열심이 누구를 삼킨다?

이 책임을 질려는 자세가 누구를 삼킨다?

예수님입니다.

 

책임이란 주인만이 가지는 의식입니다.

주인 의식

 

그런데 안식일을 지킬려는 그 마음 때문에

안식의 주인을 삼키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 두 주인을 동시에 못 섬기거든요.

 

또 열심 하면 누가 생각납니까?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 참 뻔뻔스럽게도 스데반 집사를 죽인 이유도 바로 이런 책임감 곧 열심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알고나서는

 

(10:2, 개역)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참 지식, 참 지혜되신 곧 예수님을 알고나서는

책임을 지기는커녕 다 떠넘겨버리는 겁니다.


지식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지식이 아니라
공부하고 배운 것을 쌓는 지식이 아니라
인물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주의 집을 향한 열성이 인물을 삼키는 겁니다.
왜? 그리스도를 쫏아 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예수님을 쫏아 난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을 삼키는 열심이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을 쫏아다니기 한 후 부터는
책임을 모두 예수님에게 떠 넘겨버립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의 종입니다. 주의 노예입니다.
주인만이 책임지는 겁니다. 자기 노예의 그 어떤 허물도 말입니다.
책임은 예수님에게, 참지식에게 있지 말입니다.

 

스데반 집사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성경에 나오질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에 빚진자, 사랑에 빚진자, 참 지혜에 빚진자 정도로만 표현되어 있지

스데반 개인에 대한 미안함이 추호도 안 나옵니다.

다윗도 우리야 장군에 대한 미안함이 추호도 안 나옵니다.

 

이것이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마침 때문입니다. 율법의 마침

 

인간이 즉 노예가 책임을 져 버리면 이것은 의문이 됩니다.

의문은 죽이는 것입니다.

남을 살리지 못합니다.
살리기는 커녕 소경이 소경의 길로 인도하는 꼴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책임을 지기 때문에 드디어 마침이 됩니다.

깔끔하게 뒷마무리 수습을 제대로 합니다.
뭔가 뒤에 따라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휴지처럼
그런 이미와 아직의 미완료처럼 그런 찝찝함이 없이
제대로 명료하게 완료가 되는 겁니다. 마감이 됩니다.

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불의한 청지기가 바로 종말을 미리 앞당겨 대비한 이유는

마침을 제대로 하시는 분을 봐 버렸기 때문입니다.

 

(10:4, 개역)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괜히 사도바울이 지식을 쫏지 않고 열심 열성만 있다고 지적하는게 아닙니다.

 

이것을 어떻게 재미나게 표현했는고 하니

저도 들은 이야기 인데

어떤 여성이 클럽에서 춤추고 노래하다가 화장실에 갔는데

볼일을 보고 나왔는데

계속해서 사람들이 자기를 쳐다보더라는 겁니다.

왜 그러지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그래서 화장을 고치고 (아무것도 난 해준게 없어 ~~~ 받기만 했을 뿐 ~~~ 그래서 미안해 ~~)

아무문제 없겠지 해서 다시 나갔는데

또 다시 수근 수근 거리면서 계속 쳐다보길래

기분이 찝찝합니다.
온 몸 구석구석을 살펴봤는데

아니 글쎄 화장실 두루마리 휴지가 옷에 걸려서

계속 질질질 끌려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챙피했는지 쥐구멍을 찾더라 말이죠.

 

이것이 의문의 죽이는 법입니다.

 

안식일 지키지 마세요 라고

예수 믿지 마세요 라고 하는 이유가(인간의 믿음에 대상물이 아님, 오히려 정반대)

제발 좀 막 사세요 라고 하는 이유가(원수됨을 거쳐서 마귀에게 잡혀오라는 의미)

 

인간의 의문은 마침이 없이 계속해서 의문의 의문의 꼬리를 물고서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소경의 길로 인도하는 식으로

죽이는 의문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양을 파는 상을 뒤엎어버리시는 겁니다.

채찍질로 양을 다 쫏아내시면서

어딜 감히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느냐 라고 돈을 뒤 엎어버리시니

얼마나 저들은 죽이고 싶겠습니까?

아니 이런 열심이 어디있는데 왜 이 열심을 가로막냐 말이죠.

그런데 이것은 의문의 죽이는 겁니다.

 

살리는 영의 활동은 오히려 예수님입니다. 강도의 소굴이라고 상을 뒤엎어버리시는 예수님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
그런 의문의 성전에 계시지 않습니다.
인간의 것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꾸 의문으로 소통할려고 합니다.

차라리 불의한 청지기를 보고 배우라 말이죠.
빛의 아들들에게 불의한 청지기가 훨씬 지혜롭다고 칭찬합니다.
 

오히려 불의한 청지기가 의문의 마침을 제대로 보고 하는 행동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주인 곧 책임지는 자의 마음에 너무 너무 꼭 마음에 들었다고

주인이 칭찬을 합니다.

저 빛의 아들 보다 3060100배나 지혜롭다고 말입니다.

 

책임 곧 주인이란 외부의 의미입니다.

오죽하면 책임질수 없기 때문에 은사를 주시는 겁니다.

임의로 부는 바람이 주시는 은사

즉 책임을 질수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 주인을 보고 비로소 무모한 짖을 하는 것이 바로 다말의 불의한 지혜입니다.


창녀로 변신해서 그 불의한 죄값, 도장 도장끈 지팡이라는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는 겁니다.
 

여기에 말려드는 자는 바로 시아버지 유다의 주의 집을 향한 열심입니다.

우리 가문이 어떤 가문인데

약속의 가문인데 감히 니같은 개같은 이방여자 하나 때문에

우리 가문을 망칠수 없다 라고

모든 책임을 전가 시키는 겁니다.

 

마침 어머니께서 하나님 참 얄굿다

형수랑 동침을 안했다고 시동생을 죽여버리니

참 이해 할 수가 없다

 

어머니 그게 아닙니다.

동침 안한게 아니라 동침했는데

태어날 자식이 자기의 기업이 안되고

형수의 자식이 될거라는 계산 때문에

그래서 죽여버린 겁니다.


이런 똑같은 사고방식이 바로 시아버지 유다이기 때문에
사실은 유다를 죽인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시아버지 유다는 자신의 분신인 자식의 잘못을

곧 자기 잘못을

며느리에게 다 뒤짚어 씌우죠

 

꼭 이 며느리 다말의 모습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뒤짚어 씌우는 것과 똑같습니다.

죽은놈 살려 줬더니 보따리 내 놔라고 강도짖을 한다 말이죠.
그러니 상을 엎어버리는 겁니다. 채찍질로 양 비둘기 다 쫏아냅니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말이죠.
아마 오늘날 성화론자들이 그 속에 있었다면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는다메 라고 비아냥 거렸을 겁니다.
의문의 특징은 뒤짚어 씌우는 겁니다.
주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책임져줄 주인이 없어서 말이죠.

 

너 때문에 우리 집안 망한다고

자기(유다) 때문에 망하는 줄도 모르고 뒤짚어 씌우죠

 

안식일 지키는 자 앞에서 바로 코 앞에서 그것도 안식일만 고치시는 짖만을

예수님이 하시는 겁니다.

그 이유는 안식의 주인 곧 안식을 책임지는 자 이기 때문에

마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곧 안식일 지키는 자에게서는 분노를 사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렇게 안식일 지킨다고 하는 너희들이

의문의 죽이는 것으로 밑도 끝도 없이 마침도 없이 안식일 지킬게 아니라

바로 이 안식의 주인으로부터

물에 빠진 너희가 건짐을 받아야 할 입장

남을 7번 용서하는게 아닌

너가 도리어 770번 건짐을 받아야 할 입장인줄 모르냐 라는 겁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 내가 책임질게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시는 겁니다.

 

너희는 구덩이에 빠진 자이다 라는 겁니다.

휴지를 계속 질질 끄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누가 책임 지느냐 하는 문제인 겁니다.

 

(12:8, 개역)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12:9, 개역)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12:10, 개역)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2:1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12:12, 개역)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2:13, 개역)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2:14, 개역)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안식일 지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제사를 원치 않고 자비와 용서를 원하시는 겁니다.

 

즉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구덩이에 빠진 자는 바로 너희들인데

자기인줄도 모르고 주여 건져주세요 라고 주인을 찾고

책임질자를 찾는 날이 바로 안식일 인데

 

안식일 지키겠다고 물에 빠진자를 모르는채 하고

강도를 당해 칼에 찔려 피흘렸다고 부정한 시체를 만지면 안된다고

율법 지켜야 한다는 핑계로 제사장도 레위인도 피해가듯이

 

정작 그 제사장과 그 레위인 즉 모든 첫사람 첫아담에 속한 자는

강도의 칼에 찔려 피흘리는 줄도 모르고

죽어가는 부정한 자인줄도 모르고

휴지를 바지에 낑겨서 질질질 끄는 줄도 모르고

의문의 죽이는 것을 마침이 없이 반복하는 줄도 모르고

 

자기가 강도요 자기가 강도당한 자인데

 

뭐 안식일 지키겠다고?

뭐 약속의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저 부정한 여자를 불태워 버리겠다고?

 

너가 그 놈이야 그 놈

 

이것이 안식의 주인이 책임지시는 모습으로써의 지적입니다.

 

지적

 

이 지적, 간섭 없으면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열심을 특심으로 내고 있습니다.

책임지겠다고

주인의식 가지면서 말이죠.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물리쳤습니다.

 

라고 좋아라 했더니만

 

3초만에 마귀에게 잡혀와서

마귀가 주여 당신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 잡아왔습니다.

스승의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입니다.

도장 찍으세요

결제 하세요 ~~

 

그러나 주님은 주인 답게 책임 지십니다.

 

일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과거를 지워버리고 미래를 책임쳐버리는

불의한 청지기이신 예수님이

나 보다 더 옳았다는 겁니다.

 

책임 질 것이 없는 즐거운 인생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의문의 마침이 드디어 있어 비로소 쉬는 인생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 때문이라는 것을

 

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의문으로 죽이고 살인하고 속일려는 자들에게서

 

이 십자가의 용서를 자랑하는 즐거운 인생인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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