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음과 구원자 (시편 83)

 

 

(83:1, 개역) [아삽의 시 곧 노래] 하나님이여 침묵치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치 말고 고요치 마소서

(83:2, 개역) 대저 주의 원수가 훤화하며 주를 한하는 자가 머리를 들었나이다

(83:3, 개역) 저희가 주의 백성을 치려 하여 간계를 꾀하며 주의 숨긴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

(83:4, 개역) 말하기를 가서 저희를 끊어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

(83:5, 개역) 저희가 일심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언약하니

(83:6, 개역) 곧 에돔의 장막과 이스라엘 인과 모압과 하갈 인이며

(83:7, 개역) 그발과 암몬과 아말렉이며 블레셋과 두로 거민이요

(83:8, 개역) 앗수르도 저희와 연합하여 롯 자손의 도움이 되었나이다(셀라)

(83:9, 개역) 주는 미디안 인에게 행하신 것 같이, 기손 시내에서 시스라와 야빈에게 행하신 것 같이 저희에게도 행하소서

(83:10, 개역) 그들은 엔돌에서 패망하여 땅에 거름이 되었나이다

(83:11, 개역) 저희 귀인으로 오렙과 스엡 같게 하시며 저희 모든 방백으로 세바와 살문나와 같게 하소서

(83:12, 개역)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목장을 우리의 소유로 취하자 하였나이다

(83:13, 개역) 나의 하나님이여 저희로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며 바람에 날리는 초개 같게 하소서

(83:14, 개역) 삼림을 사르는 불과 산에 붙는 화염 같이

(83:15, 개역) 주의 광풍으로 저희를 쫓으시며 주의 폭풍으로 저희를 두렵게 하소서

(83:16, 개역) 여호와여 수치로 저희 얼굴에 가득케 하사 저희로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83:17, 개역) 저희로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놀라게 하시며 낭패와 멸망을 당케 하사

(83:18, 개역)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방금 검색을 해 봤습니다.

이런 문장이 유행하길래 과연 어떤 노래인가 싶어서 말이죠.

그러나 막상 그 노래를 들어보니 저랑 안 맞더군요.

 

어떤 노래의 가사 문장인고 하니

 

[너와 나의 연결 고리] 라는 용어입니다.

예능프로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이라서 한번 검색해 봤습니다.

 

왜 이 너와 나의 연결고리 라는 문장으로 시작을 하는가?

오늘 시편 83편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너와 나가 연결이 되어서 [우리] 라는 하나를 형성할때에

우리는 세상 노랫말처럼 [우리]가 너와 나의 연결고리로 형성한다고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입니다.
[
우리]를 이미 형성해 놓고서 미래에서 소급해서 현재로 쳐들어올때에

시간의 역순이지요. 정작 너와 나 라는 것이 사라진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곧 교회의 의미는 바로 이런 누락개념입니다.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데?

라는 물음이 형성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너와 나 라는 것이 사라진 다음에
[우리]가 형성이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데???

나가 없는데 어떻게 나는 어떻게 되는데 라는 물음이 되겠습니까?

[우리] 밖에 없다는 겁니다.

너도 없고 나도 없는

[우리]만 있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될때 [우리] 라는 의미는 가만히 보면 무서운 개념인 거지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우리]를 이용할려고만 하지
왜? [나] 를 위해서
그런데 [우리] 속에 들어가면 비로소 내가 없어져 버리는데
그런 [우리] 를 원하겠냐 말이죠????

 

이 [우리]라는 차이성을 말하고자 너와 나 라는 것이 동원이 되는 겁니다.

그 차이 때문에 말입니다.

 

제일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요나 사건입니다.

 

어제도 어머니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분명 요나는 이스라엘 선지자입니다.

이방나라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 당시 이방나라 선지자 라는 것은 곧 거짓선지자 이겠지요.

그러나 성경말씀은 거짓선지자를 이방나라의 선지자 라는 차원에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참선지자와의 대조 차이로써의 거짓선지자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거짓선지자인 셈입니다.


아무튼 넘어가고


분명 자신은 이스라엘 선지자인데

왜 이방나라 니느웨 백성을 회개시키는데 자신을 동원시키느냐에 대한 불만이 있었습니다.

물론 여호와 하나님이 니느웨 백성을 심판하라고 했을때는 아주 좋아라 했지요.
저런 개같은 이방인들은 어차피 망해도 싸니까 말입니다.
어 그런데 ~~~~~
심판을 전하라 라는 의도가 요나가 생각한 것과 달랐습니다.

저는 지금 바쁩니다 주님

저는 이스라엘을 돌이켜야 합니다.

왜 쓸데없이 개같은 이방인 니느웨 백성을 돌이켜야 합니까?


아따 알았구만요 퍼뜩 하고 빨리 본업으로 돌아가면 되겠지 싶어서

3일 길을 돌으라는 말씀을 하루 만에 성질 급하게 돌고서는

어차피 회개 안할 인간들이라는 것을 알고

빨리 망해라 빨리 망해라 라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망하기는커녕

어랏 진짜로 회개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망하기는커녕 주 여호와께 감사를 하면서

주님이 구원해 주심에 대한 감사로 파티를 여는 겁니다.

축제죠

 

요나는 뭔가 속은 느낌이였습니다.

치를 떠는 배신감에 몸서리 칠 정도로 치욕 굴욕을 느꼈습니다.

아 이 배신감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 속았다는 배신감입니다.


탕자의 형 맏아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만 하죠?

탕자를 오히려 용서하고 잔치를 벌려요 벌려
속건제 20% 보너스를 더 주니까? 확 돌아버리는 겁니다. 맏아들 미칩니다. 미쳐.
보혜사 성령을 탕자에게 주니까 열 안받고 베기겠습니까?
 

주여 차라리 날 죽이세요.

 

그때 어머니께서 기가막힌 타이밍으로 오해 오독을 한 내용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가 큰물고기 뱃속에서 들어갔다 나와서 요나가 회개하고

그리고 박넝쿨 사건으로 회개했다고 말입니다.

 

하하하 어머니 맞아요 맞아

우리가 그 사건 생각할때마다 늘 헷갈렸지요.

나도 늘 헷갈리곤 했는데 또 언급해 주시니 고마워요


그게 아니라 큰물고기 뱃속에서 이미 들어갔다 나와서

그 다음에 니느웨 백성 회개 사건

그 다음에 박넝쿨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독하고 분명히 읽을때는 안그랬는데 

막상 설명하고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서는

항상 순서가 엉키더라 말이죠.

그게 정상이다 말입니다.

 

헷갈리게 하셨으니까 말입니다.

 

누가 봐도 순서상

니느웨 사건이 먼저고

그 다음 박넝쿨 사건과 큰물고기 사건이 그 뒤에 나와야 하는데
아니면 순서를 달리하던가?
하필이면 중간에, 정중앙 가운데에, 두 사이 중간에,

정작 니느웨 사건은 중간에 폭 들어가 있어가

늘 헷갈리게 하는 요인이더라 말이죠.

 

즉 요나의 표적을 운운할 때

우리는 큰물고기에게 삼킨바 된 것만 요나의 표적이라고 하는게 아니라

사실상 니느웨백성 회개와 박넝쿨까지 다 포함해서 요나의 표적이라고 했을때에

항상 큰물고기 사건이 제일 앞의 사건이 아니라 뒤의 사건으로 헷갈린다는 겁니다.

 

저만 그런가요?

어머니도 그렇다 라는 것을 확인해서 언급하는데

우리만 그런가요?

 

사실상 순서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동시다발적이라서 그런 겁니다.

 

다만 우리가 요나와 똑같이

왜 니느웨 백성의 회개가 있어야만 하는가

즉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억수로 속은 느낌의 그 커다란 배신감을

왜 요나와 똑같이 할 수 밖에 없는가 라는 점입니다.

 

분명 기적을 바랬거든요.

그런데 그 기적의 정반대인 요나의 표적이 펼쳐지더라 말이죠.

즉 배신감이 펼쳐지더라 말이죠.

 

제가 바로 전의 앞글 시편 69편을 하면서

예수 믿지 말자 라고 한 이유는

인간의 믿음의 대상이 되는 예수란 없다 라고 했지만

더 깊숙이 들어가보면

인간이 뭔가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 복수심의 현상이 바로 믿음이라는 겁니다.

우와 이건 이단 중의 이단의 말 아닙니까?

믿음을 복수심이라고 하니

이건 뭐 기독교를 넘어서 모든 종교의 종교인들까지 다 거짓으로 몰아버리잖아요.

네 맞습니다. 제발 제발 제발요 ~~~~ 믿지 마세요.

인간의 믿음은 곧 복수심입니다.

 

그래서 시편 69편은 주를 향한 열심히 주님을 삼키는 이유입니다.

? 주님을 향한 열심을 주님이 안 알아주거든요.

즉 배신때리거든요.

이것이 요나의 표적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괜히 십자가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의 믿음을 거부합니다.

거부를 하기 때문에 상을 뒤엎어버리고 채찍질로 양을 쫏아내버리는 겁니다.

주인이 왔는데

책임지는 자가 왔는데

그 앞에서 어딜 감히 주인행세 하면서 열심을 내느냐 말이죠.

 

그리스도를 쫏아 나지 아니한 것은 모조리 다 죄입니다.
열심만 있었지 지식을 쫏은게 아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쫏은게 아니죠.
그런데 그리스도는 뒤에 오시는데 어떻게 그리스도를 쫏겠냐 말이죠.
그러니 인간의 믿음은 그 불가능성에 대한 대처물일 뿐입니다.
안되는데 되게 하는 척 하는 대용물로써의 열심이요 믿음인 겁니다.
그럼 주인이 왔으면 주인행세한것 빨리 철회하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 앞에서 죄 안짖겠다가가 아니라

뭘해도 저는 죄인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해야할 입장입니다.
곧 비로소 저는 원수였습니다 라고 고백할수 있는 인물(지식)을 만난 겁니다.

그런데 오히려 인간의 믿음 곧 인간의 열심은
비로소 주인으로 등장한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죽일까 하는

주인의 자리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주인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을려고 한다는 겁니다.
괜히 안식일을 지키니까 저럴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럼 원수의 자리까지 가야 우리의 어두운 눈이 들통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시편 83편에서 잃어버림과 구원자의 연결고리 곧 우리 라는 개념을 살펴보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이방나라의 연합군들이 이 이스라엘 하나 죽일려고 달려듭니다.

(83:4, 개역) 말하기를 가서 저희를 끊어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

(83:5, 개역) 저희가 일심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언약하니

(83:6, 개역) 곧 에돔의 장막과 이스라엘 인과 모압과 하갈 인이며

(83:7, 개역) 그발과 암몬과 아말렉이며 블레셋과 두로 거민이요

(83:8, 개역) 앗수르도 저희와 연합하여 롯 자손의 도움이 되었나이다(셀라)


마치 아기 예수 하나 죽일려고 전세계가 온민족이 세계국가가 들썩 들썩 하듯이 말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너희 이스라엘을 무슨 수를 써서 라도 다 없애버리고야 말겠다 라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들은 이스라엘은 덜커덕 겁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누가 깨작 깨작 이들 이방나라 연합군을 강퍅케 하신 겁니까?

누가 애굽왕 바로왕을 강퍅케 하신 겁니까?

 

이들이 이스라엘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예수님께서 벌리시는 겁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들을 악하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 7:7, 개역)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그럼 그 중간에 낑긴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 되는 것이지요.

중간에 낑겨서 삼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뱉어버릴수도 없는

두 세력 사이에 낑긴 상황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원래 의미인 처음자리이다는 겁니다.

곧 잃어버림의 자리이다는 겁니다.


이 틈에서 이스라엘이 태어난 것이거든요. 바로 긍휼의 자리인 겁니다.
3일이라는 간극이 왜 있습니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그 둘 사이의 간극에서
이스라엘이 태어난 겁니다. 이스라엘의 근원인 처음자리 입니다.

이 자리를 반복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없었습니다.

존재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없는데서 뿅하고 생겨난 것은

존재로써 존재하는게 아니라

비존재로써 존재하는 겁니다.

존재 보다 더 나은 존재인 비존재이다는 겁니다. 잉여요 선물이다는 겁니다.

누구의 믿음 때문에? 바로 예수님의 믿음 때문에 말입니다.

 

인간의 믿음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믿음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없다니깐요. 유령이예요 유령

인간은, 이스라엘은 이런 믿음을 만들어낼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자리 말입니다.

믿음을 만들어내는게 아니라 도리어 만들어 짐을 당하는 겁니다.
믿음으로 부터 만들어짐을 말입니다.  
믿음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다는 겁니다.
그 예수님의 믿음의 자리가 바로 십자가 라는 자리이다는 겁니다.
우리는 거기서 태어난 겁니다.

즉 이스라엘의 처음자리는 죽은자리였고 저주자리였고 심판의 자리였습니다.
없음의 자리였습니다.

이것이 희년 곧 복음의 대상이였던
포로된자
갇힌자
억눌린자의 자리

곧 흑암의 백성
사망의 그늘에 주저 앉은자
개같은 이방인 자리였던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자리가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였던 겁니다.

이 저주의 자리
심판의 자리
죽음의 자리를

희년이 복음이 예수님이 찾아와서
자유케 되고
보게 되고
듣게 된 겁니다.

 

그러니 이방나라는 이 귀신같은 유령의 존재인, 비존재인 이스라엘을 어떻게 해서든 없애버리겠다고

다들 강퍅해져서 달려드는 겁니다.

 

누가 이들을 강퍅케 한 겁니까?

 

누구의 콧털을 건드린 셈입니까?

이스라엘입니까?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입니까?


바보들! 건드리면 이들 이스라엘이 받아야할 심판을 괜히 빼앗게 되는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이 이스라엘을 건드린다는 것 자체가 그들 이스라엘을 축복해주는 셈인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누가 생각납니까? 나귀와 발람선지자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바로 여기서 이스라엘 조차도 이런 구원사건에 말려들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본인들도 이 이스라엘의 비밀 즉 선물의 의미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이거든요.

그래서 쭐꾸덕 미끄러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게 되니 졸지에 시끄럽게 됩니다.
심지어 성전을 헐라 라고 하시니까 대혼돈이 일어나니

대제사장과 사두개인 바리새인 율법사
전부 나서서 이 사태를 빨리 잠재우지 못하면
앞으로도 로마에 밉보여서 예배드리는데 지장이 생기게 되니
빨리 저 골치아픈 미꾸라지 한 마리를 빨리 제거해야만 잠잠해 지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관심사는 성전을 헐어버려서 사람의 손으로 짖지 않은 참성전을
삼일이라는 간극을 통해서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 둘 사이의 간극 속에 놓여져서 참성전을 보라는 취지이다는 겁니다.
어느 것이 진짜냐 라고 말이죠.

그렇게 주님은 대소동을 일으켜서 시끄럽고 요란스럽게 출애굽사건을 벌립니다.
구름기둥 불기둥까지 동원해서 말입니다.

즉 이스라엘 조차도 구원이 이스라엘에게서 마저도 비밀이지

당연한게 아니다 라는 것을 말입니다.

구원을 얼마나 무시하느냐에 이스라엘도 포함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처럼?

요나처럼

 

그럼 이들 이스라엘은 어떻게 구원을 오해한 겁니까?

요나선지자는 구원을 어떻게 요해한 겁니까?

 

기적으로 보았다는 겁니다.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 말입니다.

마귀의 세가지 시험에 포함되는 그런 기적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을 무시한 처사 입니다.
남을 일곱번 용서하겠다는 것은(의문의 죽이는 것)
정작 너가 7에 70번 용서 받아야 하는 죄인임을 무시하는 것이다는 겁니다.(또렷함)
의문의 죽이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믿을려고 열심을 다하고 있고
또렷한 영의 일은 무능하고 어리석어서 무시해 버리는 겁니다.

얼마나 7천명의 남은자를 눈에 안 보인다고 얼마나 무시했으면

나만 남았나이다 차라리 날 죽여라 라고
역시나 엘리야도 요나처럼 차라리 날 죽이라고 자살요청을 하겠습니까?

사실상 남은자 7천보다 더 또렷한 것이 없는데 말입니다.

구원을 너무 너무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정반대 입니다.
그래서 3일이라는 그 간극 사이에 놓이게 하는 겁니다.
그럼 심판 받는게 당연하고
잃어버림을 당하는게 당연합니다.

출애굽구원사건의 반복은 곧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그 이스라엘의 처음자리를 다시 반복하는 겁니다.


이거 반복하지 않으면
인간은 또 의문에 빠져서 배부른 소리를 합니다. 남을 몇번 용서할까요?
도대체 누가 주인이고 누가 책임자인지 원!!!!!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인간의 요구에 응하실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표적 뿐입니다.

이것만이 명료한 것이지 다른 것은 다 의문의 반복인데

왜 응해주어야만 합니까? 죽이는 것인데??????

 

바로 그런 시선이 저주받아 마땅한 니느웨 백성인데

그래서 심판하라고 요나선지자를 불렀는데

정작 요나선지자는 그 심판에 동원이 되고서도

하나님은 심판은커녕 돌이켜 회개케 만들어 버리니까

때리는 시어마이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그만 여호와 하나님의 배신에 의해 속이 상할때로 상해서
차리리 죽여라 라고

자살을 요청합니다.

 

이런 과정이
이렇게 여호와하나님으로부터 배신당하고 거기에 맘 상해서 자살요청하는 것까지 다 포함해서
요나의 표적입니다.

곧 십자가입니다.

 

누가 이런 십자가를 자력으로 믿겠냐 말이죠.

그러니 십자가를 증거한다는 것도 사실상 다 거짓말입니다.

십자가는 십자가 스스로 증거할 뿐입니다.


그래서 어차피 안 믿을것 뻔히 아시길래
믿음의 대상물로써의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가 나를 믿겠다고 쳐들어 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 믿겠다는 것은 사실은 자기 편하자고 하는 짖이고
십자가가 나를 믿겠다고 달려드는 것은 오늘 시편 83편과 같은 상황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가 쳐 놓은 함정에, 올무에 말려들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무나 말려드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자작극에 말입니다.

우연히 잠시 동원되는 스피커일 뿐인데

그 스피커를 십자가 증거하니까 나 옳잖아 라고 나오면

또 한 대 얻어터지는 거죠.

 

십자가는 그 어떤 누구도 증거할 수 없도록 되어 있으니까 말입니다.

 

요나나 이스라엘이나 다 오해를 한 겁니다.

구원받았다는

이미 구원받았다는 그 자리는 사실상 버림받는 자리였습니다.

심판의 자리입니다.

그 심판의 자리 속에 있으면서도

활활활 타오르는 그 불 속에 있으면서도

타죽지 않은 것은

그들이 구원받을자라서가 아니라

그 불 속에 예수님이 함께 오셔서

함께 춤추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분명 잃어버림의 자리인데

심판의 자리인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말도 안되는 소리만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구원은 계속해서 말도 안되는 소리로서만 반복이 되는 겁니다.

 

누가 봐도 저주 받았습니다.

누가 봐도 심판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 버림받은 자리가 바로 구원의 자리였는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럼 그게 기적입니까?

아닙니다. 요나의 표적입니다.

요나 또한 구원받을 자격이 하등 없는 인간입니다.

요나가 그럴정도면 이스라엘이나 우리들 또한 다 마찬가지입니다.

뭐 잘했다고 구원받습니까?

 

큰물고기 뱃속에서 들어갔나 사흘만에 나왔다고?

그럼 구원입니까?

여호와의 구원을 노래 부르면 다 구원입니까?

3초만에 배신당했다고 자살시도 하는데?

구원하면 뭐합니까? 자살을 요청하는데 뭘

실컷 죽으라고 살려놨더니만 보따리 내놓으라고 강도짓을 한다 말이죠.

 

이것은 구원을 무시해서 그런 겁니다.

너무 너무 얍잡아 봐서 그런 겁니다.

애초부터 구원은 심판의 자리

버림받음의 자리

저주의 자리에서 벌어진 겁니다.

 

우리는 구원을 그런 자리에서 벗어났다고 까불까불 거리면 구원을 운운하는데

정작 그 순간에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저주에서 벗어나서가 아니라

오히려 보란 듯이 여전히 그 십자가를 지시면서 못난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겁니다.

 

즉 사적인 구원 따위란 없다는 겁니다.

당연히 개인 부활은 없습니다.

 

요즘 부활 부활 운운하는 자들을 보면 웃끼지도 않게

개인 부활 밖에 없습니다.

그 개인 부활을 말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끌어당길 뿐이지

그런 부활이 세상에 어디있습니까 여러분?

자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 아닙니까?

 

그럼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은 요나의 표적으로써

요나가 자살까지 요청할 정도로

반발하고 반발하는

그래서 요나 조차도 백번 만번 지옥가도 할 말 없을 정도로

만들어 버리는 처음자리 그 잃어버림의 자리

심판과 저주를 퍼붓는 퍼부음 당해도 싼

그것을 반복하는 것이 바로 요나의 표적이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어딜 감히 꾀냐 말이죠.

 

이것만이 명료합니다.

분명 심판을 퍼부었는데 주님의 불쌍히 여겨주심이 뛰어들었다는 것만이 명료합니다.

이것 외의 것을 주장하는 것은

의문을 또 반복하는 겁니다. 의문은 죽이는 겁니다.

 

또렷하고 살리는 영의 일은 바로

저주를 퍼부어 불 속에 집어 넣었는데

그 속에서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겁니다.

나를 마땅히 심판하심이 마땅한데도 불구하고

아무리 봐도 지옥가도 할 말 없는 죄인 중의 괴수요 원수인데도 불구하고

 

말도 안되게

 

용서하신다는 그 피흘리심

 

아니 왜

내가 용서 받을 자격이라도 있기는 하냐 말이죠.

천국갈 그 어떤 요소라도 있기나 하냐 말이죠.

 

전적으로 내게는 없기에

나는 뭘 해도 원수짖만 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되게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러 왔다는 그 심판받으심

 

정말 말도 안된다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죄 없거든요. 예수님은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달려야 하냐 말이죠.

얼마나 쓸데 없는 짖입니까?

그런데 그 쓸데 없는 짖이 나를 살렸는데 우짭니까?

이게 더 혼란 스러운 겁니다.

 

요나가 여호와로부터 배신 당한게 혼란 스러운거라면

예수님은 정작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은

더 혼란 스러운 것이다 말이죠

 

그런데 요나에게서는 백날 해도 답이 없어요 의문 뿐입니다.

배신 당했냐 그래 배신 좀 했따 우짤래

백날 따져 보세요 답이 있나? 왜 나를 배신했을까?

그 의문을 천년 만년 모든 지식 다 동원해 보라니깐 답이 있나? 없어요.

 

그러니 그 혼란 보다 더 나은 혼란

왜 예수님이 하늘 영광 다 버리고

심지어 십자가 라는 개죽음을 왜 당하시러 왔냐 말이죠.

이것은 배신보다 더 혼란스러운 겁니다.

역시나 답이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료하고 또렷하게 답을 주시는 겁니다.

 

물론 마귀에게 잡혀와야 무슨 말인줄 알게 되니 말이죠.

그렇다고 스스로 잡혀올게 아니라

봐로 이런 상황

예상치도 못한 그 어떤 철두철미한 대비태세를 갖추어도 다 비켜가는

그런 상황에서 맞딱뜨린

 

이 원수들의 연합군들에게 완전 포위 당해

나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다 사라져야만 하는 상황

이제 이 세상에서는 예수쟁이는 아예 발을 못 붙이도록 만들어 버리는 이 상황에 놓여졌을 때

 

즉 출애굽의 반복인거죠.

 

시편을 하면서 다윗은 자기 혼자 출애굽사건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스라엘은 다윗이 왜 저렇게 출애굽만 죽으라고 반복하는 줄 알길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다윗하나 죽일려고 이스라엘 전체가 들썩 들썩 하잖습니까?

 

이 상황에서 그 저주상황

버림받은 상황

심판의 상황속에서

 

주의 구원이

주의 십자가가

또렷하게 펼쳐지는 사건이 밝혀진다는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이런 상황 원치 않습니다.

먼저 포로되어 저주받는 상황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멀쩡한 인간이 강퍅해져서 미친 듯이 죽이겠다고 설쳐대야 하고

그런 상황에 놓여지게 되면 안하던 기도까지 하게 되고

안 부르짖고는 못배기도록 만들어 버리시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누가 의도적으로 잃어버림의 상황을 만든게 아닙니다.

 

마귀를 강퍅케 하시니까 졸지에 생겨나는 겁니다. 얼마나 우발적입니까?

멀쩡하던 인간이 갑자기 주님이 강퍅케 하니 미친갱이처럼 달려드니

어쩔수 없습니다.

심판에 놓여지게 되고

저주 속에 놓여지게 되고

버림받음 속에 놓여지게 되고

활활 타오르는 불 속에 놓여지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주님이 나를 너무 너무 사랑해서 다가오시는 구원의 방식이다는 겁니다.

내가 뭐가 이쁘다고

다 죽어가는 썩은 시체 냄새 밖에 안나는데?

저 원수들이 하도 짖밟아서

멍들고 썩고 죽은세포로 곪아서 구더기 냄새만 날 뿐인데

뭐가 좋다고 그 불속에서 덩실 덩실 춤 추시겠다는 겁니까?

 

이것이 십자가사건의 반복입니다.

 

구원자 자신의 사랑 방식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싫습니다.

우리는 이런 요나의 표적이 아니라

그냥 기적

그냥 구원을 바랄 뿐입니다.

비록 이것이 자기도 죽이고 남까지 죽이는 것이다 할 지라도

이것이 의문의 반복이다 할 지라도

이것 밖에 모르는 죄인 중의 괴수이거든요.

 

그런데 다행히도 이런 병든 마음까지 주님이 책임지시겠다고 달려드시니

못 이깁니다. 우짜겠습니까?

불 속에서 활활활 타오르는 그 심판속에서 찬양하도록 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어쩔수 없습니다. 피할수 없으면 즐길수 밖에요

이것이 책임 질게 없는 즐거운 인생입니다.

즐겁다고 하니까 불 바깥

심판 바깥

저주 바깥인줄 아시는데

즐거운 인생이란

 

단절 즉 불가능성으로써의 즐거움이다는 겁니다.

 

심판 속에서의 찬양이다는 겁니다.

출애굽사건의 반복

십자가사건의 반복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반복

요나의 표적의 반복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악한세대는 그냥 기적의 반복만을 꿈꾸고 있습니다. 의문의 죽이는 소경의 길만 반복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가시떨기 나무 즉 죽은 나무 저주받은 나무 심판받은 나무 임에도 불구하고

그 나무에 여호와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겁니다.

 

생명이 살아있는 나무가 아닌 가시떨기 나무인데도 말입니다.

 

누가 봐도 죽어 있는 자인데도 불구하고

주님의 인애와 자비가 활활 타올라서 함께 우리로 하나가 되어 있는 겁니다.

 

말도 안되죠.

 

그런데 이것만이 너와 나의 연결고리 인 소통방식입니다.

영으로만 소통하는 겁니다.

십자가로만 요나의 표적으로만 소통하는 겁니다.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으로는 소통하지 않습니다. 의문의 방식이요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디를 가든 더더욱 미움 받을 수밖에 없고

더더욱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사실상

 

저들의 모습을 대변해 주는 식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침뱉는게 아니라

자기얼굴에 누워서 침뱉기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사건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반복합니다.

유대인은 그것도 모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유대인과 똑같이 누워서 침뱉은 겁니다.

예수님에게 뱉었는줄 알았는데

결국 내 손을 내가 못으로 내 몸을 십자가에 박은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불쌍히 여겨주심 앞에 무릎 꿇지 않으면

이 구원자의 구원을 바라보지 않으면

이스라엘이든 이방이든 다 심판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방 연합군의 말이 맞습니다.

차라리 그 심판을 받는게 맞다고

? 이스라엘이 심판 당하는 것 보니 차라리 지옥이 더 낫겠다 라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 보세요 저렇게 십자가에 갈기 갈기 하나님으로부터 찢겨 죽임을 당할빠에

지옥으로 가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참혹하니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감당할수 있겠냐 말이죠.

 

그러니 인간은 사나 죽으나 오로지 사람의 일 밖에 못하는 겁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그 잃어버림의 자리

버림받음의 자리

심판의 자리에 예수님이 뛰어드신게 누구 때문인데????

 

아마 요나는 박넝쿨 사건을 통해서 자살요청을 철회하고 난 뒤에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스라엘을 돌이켜야 겠다는 생각 추호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차라리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퍼부었을 겁니다.

이것이 진짜로 살길 이기 때문입니다.

 

의문의 죽이는 것으로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제 십자가를 증거했을 겁니다.

즉 요나의 표적만을 증거했을 겁니다.

 

처음의 자리가 명료한데 어딜 감히 의문의 것으로 꼬실려고 하냐 말이죠.

 

처음자리 곧 잃어버림의 자리에서 되찾은 예수님의 피흘리심(죄값)이다는 겁니다.

 

우리는 백번 만번 벌써 지옥가도 마땅한 인간이요

그렇게 하셔도 할 말 없는 죄인이요 원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용서를 외치는

 

앞뒤 안맞는 이 모순을 기쁘게 증거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십자가가만이 또렷하고 더 이상의 의문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십자가 사건을 반복하시는 줄

왜 다윗은 시편에서

또 시편기자는 이 출애굽사건

십자가 사건

잃어버렸다가 되찾는 사건을 왜 반복하는 줄 아시겠습니까?

 

이 상황을 피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 하나 없습니다. 의문만 반복 됩니다.

아마 요나처럼 엘리야처럼 차리라 날 죽이세요 라고 또 또 자살요청 할 겁니다.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세요. 즐겁게 말입니다.

아 참 나는 없었지. 아 참 나는 매일 매일 가짜이지
이런 저주 당연해 이런 심판 당연해
심판 안 당해서가 아니라
심판을 마땅히 당하면서도 그 속에서 주님의 일하심에 감격해
이런 심판을 부어주신것 감사합니다 
라고 말입니다.

계시록에 퍼붓는 저 심판이 악한세대에게뿐만 아니라

우리한테도 퍼부음으써 비로소 저들과 하등 다를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일하심에 기뻐하는

주의 심판을 즐기는 기쁨이 딴 사람에게는 없어도
우리에게는 새이스라엘에게는 있다는 겁니다.


왜 반복 되냐구요?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사랑은 무조건 의문 보다 강하거든요.

걱정 하덜덜 마세요.

 

이것이 지존자가 심판으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는 방식입니다.

 

(83:18, 개역)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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