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인가? (시편 70편)

 

믿음직스러운 46(16,790)이 아니고, 도저히 믿을수 없는 3일인가?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 까지도 빼앗기리라

 

 

바로 앞의 글 시편 83편에서 이스라엘의 처음자리는 바로 버림받음의 자리이다고 했습니다.

즉 구약에서 구원이라는 개념을 떠올리면 항상 출애굽사건과 연관이 됩니다.

 

결국 너희는 원래 애굽의 종 되었던 자들이였다는 겁니다.

즉 저주 받은자

버림받은자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 자

죄인이고 원수이다는 겁니다.

 

그런 자를 애굽에서 건져냈다는 것은
즉 버림받음에서 되찾은바 되었다는 것은

주님 쪽에서의 긍휼이였지

너희의 의로움이나(과거나 앞으로의 미래(성화되기)이거나)

너희의 선함때문이 아니다는 겁니다.

모세의 온유와 구스여인 그리고 미리암의 사건에서
미리암은 구스여인이 긍휼을 얻는 것에 질투를 합니다.
아니 저런 천한 여자가 어떻게 지도자 모세의 아내가 되느냐?
그렇게 되면 수준 낮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처음자리를 모독하는 겁니다.
미리암 본인이 한번 그 긍휼을 격어보도록 이스라엘 진영 바깥에 놓여집니다.
그리고 모세의 기도 덕분에 온유 덕분에 다시 이스라엘 진영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인간이 믿겠다는 식은 성화하겠다는 식은 결국 질투에서 나온 살인의지요 미움이지

예수님의 온유에서 나온게 아니거든요.
오히려 그 온유에 말려들어서 들통난 겁니다.
우리도 이렇게 들통나는 반복의 사건인 십자가가 밝히 보이도록 하신 겁니다.
 

시편 70편의 다윗이 처한 상황은 바로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인

저주받은 모습입니다. 버림받은 모습입니다.

그럼 누가 버렸습니까?

누가 다윗을 이런 지경으로 몰아세웠습니까?

참 아이러니 하게도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처음자리로 몰아갑니다.

 

어제 어머니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어머니 46년 동안 정성을 들여서 튼튼하게 지은 집에서 살고 싶습니까?

딸랑 3일 만에 지은 집에 살고 싶습니까?

즉 어느 것이 믿음이 가겠냐 말이죠??

 

선택해 보세요.

당연히 46년이지

 

그런데 어머니 그렇게 46년 동안 지은 집이 톡하고 건드리니까

바로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러나 딸랑 3일만에 지은 집은 아무리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는
영원히 견고한 집

견고한 바위와 같습니다.

 

그럼 어느 집에 살고 싶습니까?

당연히 딸랑 3일 만에 지은 집이다 라고 말하십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질문을 또 해보면 

46년 동안 믿은자, 장로 권사, 목사.(모세의 제자) 신학박사 성경 천번 만번 달달 외운 자와
  
딸랑 3일 믿은자, 초신자(실로암 소경)

누가 주님을 더 사랑하겠습니까?


즉 기드온이 군사를 뽑을때에와 같습니다.

왜 3일인가?
믿음이 안가는 부정적인 의미이다는 겁니다.
믿지 못하도록 하는
반대를 위한 반대
3만2천명 군사가 낫습니까?
300명 군사가 낫습니까?
일부러 부정적인 것
소수 작은 수로 
반대를 위한 반대로 뽑았다는 겁니다.

그럼 우리도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면 되겠네?
아니죠!
뭘 해도 다시 반대를 위한 반대가 주님 쪽의 방식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3일 이라는 의미이다는 겁니다.
 

결국 그 집이 진짜 살수 있는 집인지?

아니면 의문의 허물어지는 죽이는 집인지?를 알려면

 

톡 하고 건드려 봐야 합니다.

 

그렇게 톡 하고 건드려 보는 것을 막고자

인간들은 어쩌면 눈에 견고하게 만들려고 한다 말이죠.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데 신념을 부여하고자

시공간이 동원이 됩니다.

 

여기에 그 시공간의 가치에 무가치로 여김을 받는 것이 의외로 바로 인물이 되는 겁니다.

 

인물의 가치 보다 시공간의 가치가 더높은 세계가 바로 선악의 법체제의 세계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물로 와야 합니다.

시공간과의 일치됨으로 오면 안되는 겁니다.


다른 말로 인간의 믿음에 일치함으로 오면 안된다는 겁니다.

반대로 모든 인간의 믿음을 비켜가는 식으로 와야만

그 믿음을 깨뜨리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을 헐라 라는 표현이 되는 겁니다.

 

물론 성전만 허는 것이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성전을 보여주는 것도 동시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겁니다.

 

즉 인간의 그 어떤 믿음으로도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성전

바로 시공간의 성전이 아닌

다른 말로 인간의 손으로 짖지 않은 성전인

 

예수님 본인이 성전이 되는 그 성전만이

남을 살리는 성전이 되는 겁니다.

성전이 왜 성전입니까?

하나님의 집이다는 것이고

왜 하나님의 집입니까?

인간의 손으로 지었는데 왜 하나님의 집이라고 합니까?

하나님 본인이 직접 지은 집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림자로써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모형 샘플이다는 거죠.

그럼 실상이 오면 그 그림자는 자기 역할 다 끝냈으니 물러나야죠.

의문의 그림자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실상이 오니까

실체가 오니까

너무 너무 초라해서

믿음은커녕 정반대로 믿었다는 이유로

인간이 믿음이 있다는 이유로 저 싫어버린바 된 인물, 무가치한 인물인 그 참성전을 죽일려고 달려드는 겁니다.

 

그래서 그 내막을 들추어내시고자

성전을 헐라 라고

인간의 믿음의 최절정을 그만 건드려버린 겁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은 진짜 죽을려고 환장한 말을 함부로 해 버린 셈입니다.

 

맞습니다.

인간의 믿음은 결국 복수심이다고 했습니다.

 

왜 뚱딴지 같이 제발 예수 믿지 마세요

믿음이란 복수심이요 살인의지라고 뚱딴지 같은 소리를 왜 하느냐 하면

 

인간은 단 한번도 믿음을 가진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져봤자 의문이요 죽이는 것의 반복이지
살리는 것이 아닌 가짜 믿음이다는 겁니다.
허물어질 뿐입니다.
저도 그렇도 모든 인간은 다 가짜입니다.
남을 살리는 믿음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겠다고 나대는 것은 질투 때문입니다.
남 믿는 꼴을 못 보겠다는 겁니다.
특히 예수님에 대한 증오는 십자가에서 다 밝혀진 겁니다.
믿음 되신 예수님에 대한 증오인 겁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믿기는커녕, 안믿겠다고 나설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언제든지 버리겠다는 거죠.
그래서 세번 부인하는 사건이 반드시 개입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즉 인간이 흔히 말하기는 나는 믿습니다 라는 말은

사실은 이런 의미입니다.

나는 언제든지 그를 세 번 배신할 준비가 되어있는

믿음을 버릴, 믿음을 포기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라는 의미를

줄여서 나는 믿습니다 라고 표현된다는 겁니다.

한 율법사가 이런 말을 했죠.
예수님에게 큰 계명이 뭐냐고?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나 믿는자 맞잖아 라고 증거하고자 함입니다.
그 정도로 자신만만했죠. 부자청년도 동일했습니다.

즉 나는 그것을 믿었고 지켰고 행했다는 겁니다.
곧 1 하나님을 사랑하라. 2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두 계명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진짜 속내인 그 내막을 들통내 버리니까
언제든지 믿음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있는 겁니다.
즉 믿음 되신 예수님을 죽일 준비가 늘 되어있는 겁니다.

결국 나는 믿습니다. 또는 나는 말씀을 지킵니다. 라는 말은

(주인을 무시하고, 책임지시는 분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운운하겠다는 겁니다.
관계에 관심없다는 거죠. 주인과의 관계성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배신 하면 난 언제든지 하나님을 죽일꺼야 라는 겁니다.
이것이 가인의 제사에서 그대로 반영이 되었다고 했죠.
결국 인간의 제사는 의문의 제사라서 아벨을 죽이는 겁니다.

아벨의 제사는 그럼 더 나으냐? 아닙니다. 별반 다를바 없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졸지에 개입에서 편파 편애의 해석을 해 버리는 겁니다.
즉 20% 가산점인 미래에서 온 해석이 덮쳐버려서
그 3일? 그 금가락지 좋은옷 새신발에 그만 안색이 변해 버린 겁니다.
괜히 안색이 변해 분노한게 아닙니다.

인간의 믿음은
나만 제대로 믿고 남들은 제대로 믿으면 안된다는 질투와 시기심이 그 근본바탕으로 깔려있는
그것으로 나는 믿습니다 라는 것을 지탱해 주는 기반이 되는 겁니다.

나는 믿습니다 라는 말은 남들은 믿음이 없고 나만 제대로 믿습니다 라는 의미이다는 거죠.
남들은 믿으면 안된다
만약 남들이 나만 믿는 그 믿음을 가지면
차라리 나는 그 믿음을 언제든지 포기하겠다는 만반의 자세가 담겨져 있는 것이
나는 믿습니다 라는 표현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인간은 이런 육에서 의문에서 못 벗어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구원하랴 ~~~


그것을 율법사는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이 두 계명을 지켰다고 자부했던 겁니다.

그런데 그게 바로 살인의지였습니다. 복수심.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라는 말은 율법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은
예수님을 언제든지 죽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라 도 가짜요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도 가짜 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이웃을 사랑하자 하나님을 사랑하자 라는 구호를 외치는 기독교도
동일하다는 겁니다.
율법사의 속내와 같은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믿음을 준 적이 없는데

이미 인간들은 믿음을 자신만만해 하면서 믿는다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관계인데
주인과의 관계인데
책임지실자와의 관계인데

독자적으로 너무 너무 믿음이 좋아 ~~~~
믿음 준적이 없는 믿음되신 예수님이 졸지에
너무 너무 믿음이 좋은 자들에게 죽임당하는 이유입니다.


참 신기해요 예수님은 인간에게 믿음을 준 적이 없는데
인간들은 이미 믿음이 너무 너무 충만해서 너무 너무 잘 믿어요
부자청년 보세요 참 믿음이 너무 너무 좋아 ~~~~~~
과연 그런가 보자 말이죠.
 

그래서 "3일만에"가 동원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처음자리 입니다.

 

과연 믿는지 안믿는지 한번 건드려 보자 라고

 

주님께서 인간의 믿음에 도발하십니다.
참 예수님 겁도 없지요?
감히 인간의 믿음에 도전을 하다니 말입니다.

 

이것이 집약이 되어

인간의 믿음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46년 동안 지은 성전과

 

3일 만에 짖는 성전으로 대립시키는 겁니다.


마치 평생을 지켜온 말씀을
부자청년이 몇살쯤 되었겠습니까?
30살 칩시다
30살 동안 살아온 말씀지킴과 그것 때문에 부요함이 되었다는 그것이

전재산을 가난한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그 말씀에 그만
화르르 무너지는 겁니다.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이였던 겁니다.

무너뜨리기 참 쉽죠잉 ~~~~~~

이것이 3일의 의미 입니다.
 

그래서 이 성전을 헐라 라고 하십니다.

다른 말로 너희 믿음을 포기하라

어차피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할 자이다 라는 겁니다.


뭘해도 우리는 예수님을 세번 부인 할 자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런 표현은 그야말로 종말적인 표현으로 하시는 겁니다.
얼마나 충격적입니까?

종말을 종말론적 종말적 이런 표현으로하면
신학용어를 우리 일반인 같은 경우는 머리가 아프니

그냥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심판의 표현으로 말입니다.


불 속에서의 언어라고 보시면 됩니다.


불 바깥의 언어는 순 사기였다는 거죠.
우리는 예수님 말씀 덕분에 불 속의 언어를 접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습관이 뭔고 하니 불 바깥의 언어로 풀어대고 해석해 낼려고 하는 겁니다.

풀이가 불가능한 언어이지
불가능한 언어 그 자체로 소통되는 거지
가능으로 바꾸어서 소통하는게 아닙니다.
그냥 단절을 누릴 뿐입니다. 소통이 아니라 
 

그럼 인간이 쓰는 모든 언어는 불 바깥의 언어인 셈입니다.

심판 바깥의 언어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래서 종말적으로 심판적인 언어로

이스라엘은 종말에만 나타나니까

이스라엘만 알아먹을수 있는 종말의 언어로

이 성전을 헐라 했을때에

 

시공간의 의미로 받아들이면

예수님은 그야말로 아주 나쁜놈 밖에 안되는 겁니다.

 

분명 인간이 믿겠다는 둥 예배드리겠다는 둥 봉사하겠다는 둥 책임지겠다는 둥

뭔가 인간 쪽에서 뭔가를 행동한다는 것은 책임을 지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막살지 않겠다는 말도 책임지겠다는 의미이거든요.
 

그럼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성전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그냥 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이요 성 곧 거룩할 성, 집 전이니까

거룩한 집이니 자신들의 삶이나 행동은 모조리 거룩해야 책임을 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사수하는 입장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인간 자기 몸 아닙니까

 

아니 누가 이 집을 헐어버리겠다고 하는데 아이고 고맙습니다 라고 기뻐할자가 어디있겠습니까?

 

헐겠다고 하면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말과 같은데

누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목숨을 걸고 막아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단 예외가 있습니다.

헐어버리겠다고 하는데 기뻐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3일 속에서 태어난 자 입니다.
이스라엘의 처음자리 이거든요. 태어난 자리

그 사람은 이 집이 거룩하지도 않을뿐더러

낡고 헌집이고 어차피 무너질 것을 알기에
오히려 헐라 라는 소리가 얼마나 기쁜지

빨리 헐어버려야 한다는 평상시의 의식 때문에

오히려 이 성전을 헐라 라는 소리가 기쁘게 들릴 겁니다.

 

곧 귀신의 집, 강도의 소굴이다는 것을 아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입니다.

의문의 죽이는 집이다 라는 것을 아는 자에게만 말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그 성전에 자신의 부여한 의미가 반드시 있기 때문에
그 성전의 가치는 곧 자신의 가치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가치를 허물어 버리면 절대 절대 안되는 큰일날 소리인 거죠.
오히려 그 허물겠다고 선언하는 자를 죽여서라도

이 집을 사수할려고 한다는 겁니다.
자신이 의미를 부여했거든요.


곧 자기 몸 입니다.
 

집 뿐이겠습니까? 이것을 확대하면 곧

사회요 가정이요 국가요 민족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시공간에 집착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이 이스라엘을 헐라

내가 3일 만에 이스라엘을 세우겠다.

 

뭐 니 따위가?
46
년 동안 460년 동안 4600년 동안 4만 6천년동안 이어져 내려온 민족을 헐어버리겠다고?

 

이 이스라엘이 겨우 3일만에 형성이 된 줄 아느냐 라고 나오지 않겠냐 말입니다.
너 누구 제자야? 난 모세 제자야 나 이대 나온 여자야!! 넌 예수 제자 라메? 

 

자 이런 충돌은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다고 채찍으로 돈바꾸는 환전 책상을 뒤엎어버리고

양을 쫏아내고 비둘기를 쫏아냄으로써

 

니가 무슨 자격으로 이런 일을 벌리느냐 라고 했을때에

 

(2:16, 개역)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2:18, 개역)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

 

즉 이런 일들을 벌릴자는 하나님의 사자라도 되느냐 즉 선지자이냐

그럼 표적을 보여봐 라고 하는 겁니다.

선지자만이 이런 일들을 벌릴수 있다는 거지요.

 

그럼 그 선지자는 표적으로만 일을 하니까 무슨 표적을 보여줄려고 이런 일을 하느냐 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뿐입니다.

그 표적이 바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는 표적입니다.

 

그럼 우리는 요나의 표적 요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살펴봐야 합니다.

 

(2:17, 새번역) 제자들은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 / 69:9

(2:18, 새번역)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물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소?" / 예수의 신성을 보여주기 위한 상징으로서의 기적(그리스어 세메이온)

(2:19,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2:20, 새번역)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짓는 데에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구요?"

(2:21, 새번역)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2, 새번역)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야, 그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서, 성경 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46년 동안 지은 성전을 허물라 라고 했는지

그리고 왜 3일만에 지은 성전인지에 대한 설명 없이

그냥 결과 원인 없는 결과만 언급하고 그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버리는 겁니다.

 

46년 동안 지은 성전이 허물어졌다는 그 자체로써 이미 가짜였다는 겁니다.

툭 건드려도 적어도 46년 동안 아무리 흔들어도 허물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단 한번만에 허물어져 버립니다.

 

그리고 말도 안되게 모든 인간의 믿음을 비켜간 3일 만에 지은 성전이 진짜 성전이였다는 겁니다.

 

시공간과 인물의 대립입니다.

역사와 묵시의 대립니다.

 

저는 묵시라고 해서 역사의 반대말의 차원에서만 생각했는데

그럼 종말운동을 펼치는 하나님나라 운동을 펼치는 바리새인 또한 묵시운동을 하니까

그런 종말은 종말이 안되는 거죠. 그래서 종말을 더 분절해서

종말의 종말이라고 표현하면

그것마저도 그냥 역사는 무조건 아니구나 라는 차원에서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종말의 종말이든 묵시이든 어차피 인간은 자기쪽으로 끌어당겨버리면

결국 역사 곧 시공간이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뭘 해도 인간은 의문으로 끌어 당겨 버리고
반대로 예수님은 그 의문을 깨뜨리는 식으로 일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묵시를 인물로 표현해 버리면

인간 자아가 있는 이상 이 묵시라는 인물은 결국 타자에 해당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 어떤 이유로도 일치는커녕 차이만 단절만 남아버리는 것이 된다 말이죠.

 

그럼 이 성전을 헐라 라는 표현은 지금 이 순간에

나 라는 자아에게 적용해 버리면

어디까지나

너의 몸을 죽이러 십자가에 못 박으러 왔다

기쁘니? 라는 말이 되는 겁니다.

 

누가 기쁘겠습니까?

 

아무도 안 기쁘죠.

이게 무슨 기쁜소식 복음이겠습니까?

 

화나게 하는 나쁜소식 소음이 되는 겁니다. 소동

 

그런데 모든 인간이 다 해당되면 참 좋겠는데

항상 예외가 있습니다.

 

누가 저 나쁜소식이 누구에게나 다 해당되어야 하는데

안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저 나쁜소식이 좋은소식으로 들리는 자가 있다는 거죠.

 

소련의 감옥 수감자들 중에서 너무 추워서 빨리 죽여달라고 하는 자들이 있듯이

성경에도 저 나쁜소식을 좋은소식으로 대비하면서 증거하고 있는데 바로

십자가의 두 강도입니다.

 

아니 십자가에 달려 죽는 당연한 심판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복음을 만난자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강도는 그야말로 인생의 마지막에 로또 맞은 겁니다.
이런 기쁜소식이 없습니다.
누가 봐도 그는 지옥깜입니다.
그런데 1초만에 주인이 졸지에 찾아와서 옆에 같이 달리는 바람에 주인이 생겨서
주인이 주인이되어 주셔서 졸지에 천국간 겁니다.

그러나 다른 한쪽 강도는 아무리 봐도 이 상황을 의문으로 밖에 못 봅니다.
명료한 또렷함이 아닌 오히려 의문에 의문을 더하는 상황이 되는 겁니다.
없는데 있는 것 마저 빼앗기는 식입니다.
간따나 화나는데 미친 두 놈의 대화를 들을려고 하니

죽는 그 짧은 순간에도 마음 편하게 못죽는 짜증내면서 죽어야 하는

나쁜소식을 듣는 자가 있는 겁니다.

 

이렇게 이 둘로 가르는 것이 바로 인물이다는 겁니다. 인물

묵시라는 겁니다. 인물로써의 묵시라는 인물

 

이스라엘이 묵시 묵시 종말 종말 입에 도배를 해도 정작 인물을 빼버리고 운운했듯이

아예 인물로써 말할때에

그 어떤 연결점도 없다는 것이 인물이다는 겁니다.
책임을 질자가 없기에 스스로 책임지는 자로 나서는
인물이 필요없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그럼 그 인물 자체가 요나의 표적을 보여주는 선지자 라는 인물

인물로써의 선지자인데

 

선지자는 바로 이 시공간을 없애는 역할이다는 겁니다.

 

고로 상대적인 거짓선지자의 특징은 시공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절대로 없애면 안된다는 식이겠지요.
절대로 성전을 없애면 안되는 겁니다.
감히 니가 뭔데 헐어버리느냐 라는 겁니다.

 

참선지자는 이스라엘 이라는 역사성 마저도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심판으로 몰아가버리는 겁니다.

46년 동안 지은 성전 허물어 버리는 겁니다.

 

그럼 심판은 저주이니까 멸망이니까 이스라엘이 사라지잖아?

성전 사라지잖아

 

아닙니다.

그 멸망의 자리

심판의 자리

저주의 자리

곧 십자가의 자리가

사실상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였다니깐요.

 

성전이 사라지기는커녕 더더욱 진짜 참된 성전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럼 성전은 뒤로 빠져라

역사 뒤로 물러가라

누락되어라 라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는 겁니다.

 

참성전은 이 분 이고

이 인물이 진짜 참성전이고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뒤로 물러가 누락되는 것인데

 

이것이 역사 속에서는 거꾸로 되어서

예수님이라는 참성전이신 인물이 도리어 누락이 되어버리고

인간은 절대로 자기부인이 안되는

의문의 죽이는 성전 속에서 의문만 반복하는

강도의 짖만 하는 강도의 본부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누락 되든지

아니면 강도짖만 하든지

이 둘 뿐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화론자들처럼 마약에 빠져서 뭐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 섬기고 봉사하고

다 웃끼는 소리다 라는 거죠.

 

그것은 오히려 언제든지 교회됨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

성화론자들의 교회론이요 성령론이다는 겁니다.

교회는 교회가 책임지지 않거든요.
신부는 신랑이 책임지는 겁니다.
그런데 절대 절대 못 맡기는 겁니다.
방종한다는 둥 어쩌구 저쩌구
신랑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전 유지 때문에 로마와 손 잡을 수 밖에 없지요.

그때 손잡을 때 아하 강도의 소굴 맞았네가 아니라

처음부터 강도의 소굴인데 교회로 포장했다는 겁니다.


교회를 헐라
주여 교회는 처음부터 헐어져있는 애초부터 없었던 겁니다.
신랑이 그때 그때 만드셨잖아요 ~~~~~~
 

실제로 수많은 성화론자를 만나보면 강도의 소굴에 살고 있는 티를 팍팍냅니다.

이런 자들은 다들 교회에 미친놈들이다는 거죠.


그럼 목사만 좋아라 하지

평생을 목사 밥풀떼기로 사는 거지요 뭐.
이용만 당하는 겁니다.

 

그 놈들은 의문의 죽이는 짖 밖에 안해요.

괜히 강도이겠습니까?

 

그럼 살리는 영의 일은 뭡니까?

그 표적은 뭡니까?

요나의 표적은 뭡니까?

 

성전을 허물어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허물어 버리는 것만 하는게 아니라

3일 만에 다시 성전을 세워야 합니다.

 

그럼 인간의 믿음에서는 이미 떠난 문제죠.

행함도 안 먹혀듭니다.
[3일이]에게 맡깁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3일 이라는 인물이 주인이요 책임지실 분이다는 겁니다.
괜히 허물겠다고 나서지 마세요
주인이 알아서 하십니다.

 

그럼 왜 3일인가?

3일의 의미가 뭔가?

2일은 왜 안되며 4일은 왜 안되며

이레 곧 일주일 7일은 왜 안되냐 말이죠.

 

즉 숫자 삼으로 볼게 아니라 하나의 인물로 보시면 됩니다.

방금 제가 [3일이] 에게 맡기자 라고 의인화 했습니다.
저번에도 찬양을 노래가 아닌 [찬양이]
안식일을 날짜가 아닌 [안식이]라는 표현으로
의인화 했듯이 말입니다.

즉 예수님이라는 인물과의 관계 때문에
죄인이라는 확정성
심판 받아 마땅한
버림받아도 할 말이 없는 죄인 중의 괴수로써의 확정성이 3일이다는 겁니다.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온 [3일이] 

이것이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이듯이 말입니다.
그 심판의 자리
그 부정의 자리가
죄인으로써 구원자를 만난 처음자리였다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에서

3가지 사건이 다 포함이 되어서 요나의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앞의 것과 마지막은 죽었다 살아난 겁니다.
충분히 요나 개인적인 의미에서 긍정성을 부여할수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회심했다고 말이죠.

1, 큰 물고기 입에서

3, 또 대머리에 햇빛이 쪼임으로써

이것은 어디까지나 요나 개인의 격는 겁니다.

 

그런데 중간의 니느웨 백성의 회개는

요나 개인의 경험이 될 수 없습니다.

타인의 회개 아닙니까?

 

그들은 분명 심판 속에 놓여졌습니다.

그래서 심판 받아야 하는데

심판 속에서 졸지에 회개하는 바람에 구원받습니다.
분명 버림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구원받냐 말이죠?
이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구원자 때문이다는 겁니다.

이것은 니느웨가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 벌리신 일임을 요나 선지자가 알고

여기에 큰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내가 개입이 안되고 제외 된 타인들 저거들끼리 일을 다 처리해 버린
그야말로 완벽하게 속은 것이지 말입니다.


그 타인이 누굽니까? 누가 도대체 누가 니느웨에게 뛰어든거냐 말이죠.
바로 그 누구 라는 그 타인이 책임지는 자로써 주인으로써 등장했다는 겁니다.

 

마치 엘리야가 나만 남았다라는 시위에

7천명을 남겨놨다 라는 그 7천명이 바로 니느웨 백성의 구원받음이 해당되는 겁니다.


곧 탕자가 용서를 받아서 그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살진소를 잡아 잔치를 벌려 금가락지 새신발 좋은 옷이라는 

속건제 20%에 해당되는 잉여 곧 선물 보너스인
성령을 받았다는 이것에 의해서 졸지에 맏아들이 비로소 분노하면서 

두 패로 갈리게 되는 겁니다.

의문의 제사인 가인의 제사가 아니라
더 나은 제사인 살리는 제사가 미래의 예수님의 피가 미래에서 덮쳐진 겁니다.
얼마나 또렷한지 ~~~~~~~ 

 

십자가의 죽음?

인간이 다들 믿을려고 달려듭니다.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고난에 해당되니까 말입니다.
영웅이란 고난을 안 당하는게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배신을 안당하는게 아니라 다 당하는 가운데서 극복하는 

영웅신화 종교신화입니다.


미국의 이방인으로써 왕따 당하던 유대인이 슈퍼맨이라는 영웅을 만들어 내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부활?

모든 종교에서 다 믿~~~~~~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하니까 말이죠.

 

그럼 이 두 죽음 사이에 있는 이 잉여, 이 보너스, 이 성령

 

이것은 엘리야도 요나도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겁니다.

이 자리에서 이스라엘이 태어난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영

성령입니다.

영은 의문으로 하지 않고 살리는 겁니다.

죽이는 의문이 아닙니다.

20%의 잉여에서 그만 맏아들이 반발합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죽음에서 다시 사는 부활에서는 화를 안냅니다.


예수라는 자의 자기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니까 말입니다.
혼자하고 가라 말이죠.
그런데 마귀가 분노하는 일을 해 버리는 겁니다.
니 혼자 천국 가라 말이죠.
니가 가라 하와이 ~~~~~

그런데 자신의 영광을 공짜로 누구를 보너스 선물을 주더라 말이죠.
이 놈의 선물만 아니면 화를 안내는데 말입니다.

죄인의 회개
니느웨의 회개  

바로 여기서 맏아들과 요나가 화를 냅니다.
죄인은 회개하면 안된다.
돌이키면 안되도록 되어 있다.
원수인데
원수가 사랑받으면 안돼 라는 겁니다.

저렇게 막사는 인간들,
막살아도 너무 너무 막살았던 인간들이 감히 어디를 간다꼬?

그런데 그 원수자리가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인데 우짜죠?
누가 제일 화를 내겠습니까?
제사 안 드리는 자이겠습니까?
막살기를 안 하는 자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이 제일 화를 낸다 말이죠.
아에 코 앞에 대고 그런 일을 벌리신다 말이죠.

애굽의 종 되었던 그 원수를 건져낸 여호와 인데?

그런데 돌이킨 것은 주님이지 저들이 아니다.
참 성경 제대로 알죠.
제대로 알지 않는자들이 아니죠.
이것 까지 다 아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배신감!!

저들이 회개한게 아니라
예수님이 회개케 만들었기에 예수님에 대한 배신감
언제 내려 오기만 해 봐
아벨을 대신 죽였듯이
손을 제대로 봐 줄테다 ~~~~~~

왜? 선물인 성령을 주느냐 라는 배신에 대한 반감이요 분노입니다.
이 영이 바로 인물입니다.

예수의 영입니다.

 

다른 사람이 부활해도 예수님(탕자)이 부활하는 꼴은 못 보겠다는 것이 인간의 부활입니다.

죄인이 회개하는 꼴을 못 보겠다는 겁니다.
마귀는 압니다. 사실상 죄인이 회개한게 아니라
예수님이 회개의 영을 선물로 주셔서 죄인이 회개하게 된 것을
그러니 배신감과 분노는 바로 예수님에게 향하는 겁니다.

왜 탕자에게 아버지는 살진소를 잡아 잔치를 벌리며
금가락지, 좋은 옷, 새신발을 주느냐 말이죠.
뭘 잘했다고 보너스 20%를 주느냐 말이죠.

그것도 바로 코 앞에서
마귀 보란 듯이 말입니다.

왜 3일 이냐굽쇼~~~~~~~~~

바로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에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자식이기 때문에
죄인 하나 돌아왔다고 천국에서 잔치를 벌리는 겁니다. 천사들이 나팔을 불어요 불어

천사들이 참 일을 제대로 하셨다는 것에 감탄, 감동 감화 감격 그 자체였다는거죠.

이 긍휼 곧 인애와 자비를 확장 확대 하고자 이 20%를, 

금가락지를, 좋은 옷을, 새신발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죄인 하나 돌아왔다고 증폭시키고자
3일이라는 간극을 둔 겁니다.

인물을 개입 시킨 겁니다. 그 중간에 말입니다.

? 예수님이 바로 그 탕자이거든요.
죽었다가 살아난 그 탕자 말입니다.

첫열매 입니다.

그 탕자가 용서 받는 것 까지는 아무도 반발 안합니다.

그런데 탕자에게 살진송아지 금가락지 신발 좋은 옷

 

20%의 보상인 보혜사 성령을 준 것에 대해서 맏아들이 비로소 분노하게 됩니다.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이 말을 구원받은 강도가 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말씀으로는 화를 안내었을텐데
예수님 말씀 자체가 구원받은 강도에게 관계성으로 나타나기에
구원받은 강도를 통해서 하는 말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라는 말에
뿅 가버리는 겁니다. 여기서 다른 강도는 비로소 분노하게 됩니다.


왜? 반대를 위한 반대이기에
야들아 지금 현실은 십자가 처형 뿐이야?
그런데 뭐? 오늘밤 너와 내가 낙원에 있다고?
지금 천국 운운 할때니?

이게 반대를 위한 반대
부정의 부정
종말의 종말에 걸려들어서 화를 내는 겁니다.
 

사실상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였거든요.


내가 이스라엘인데 예수님이 참이스라엘이 되어버리니까
두 이스라엘은 존재할 수 없잖아요
하나는 가짜요
다른 하나는 진짜이니까
그래서 이 쌍둥이 권법이 3일이라는 간극에 의해 두 패로 갈라지는 겁니다.
쌍둥이(에서와 야곱, 맏아들과 탕자) 라고 하니까 좀 이해가 어렵고 어려워 하시던데
작년에 어떤 드라마를 보고 아 요즘 젊은사람들은 쌍둥이 라는 의미 보다
도플갱어로 표현하면 조금 쉽겠구나 싶더군요.

예수님은 쌍둥이 곧 도플갱어이다는 겁니다. 예수는 괴물이다.

그럼 나는 무조건 가짜 이스라엘입니다. 나는 매일 가짜 입니다 라고 해야할 판국인데
도리어 내가 믿습니다가 될려면

내가 이스라엘이 될려면
다른 자는 이스라엘이 되면 안된다는 질투가 이것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믿습니다 를 보존, 지탱,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믿음이 아니라 오기 고집 신념 이다는 겁니다. 즉 질투죠. 질투는 나의 힘)

그것을 정확하게 촌철살인으로써 예수님이 콕 찝어서 파고드시니까
다 가짜 이스라엘로 들통나는 겁니다.
도플갱어 이스라엘로써의 예수님이다는 거죠.


진짜가 오니 가짜는 사라져야 하니까 말이죠.
그럼 이스라엘의 원래 처음자리는 뭐냐?
처음부터 고아 과부 나그네의 자리였다는 겁니다.
애굽의 종이였다는 겁니다.
이웃환대법에서 내가 이웃을 삼는게 아니라
예수님이 이웃으로 나를 이웃 삼아야 한다는 입장이다는 겁니다. 
왜 그 정도로 불쌍히 여겨주지 않으면 아무도 이들을 돌봐 줄 자가 없다는 겁니다.
오늘 시편 70편에서 다윗은 저를 돌와봐 주십시요 라고 합니다.
왕 꼬라지 참 기가막히죠?
아무도 그를 거들또 보고 있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15:7,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15:8, 개역)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15:9, 개역)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15:1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15:11, 개역)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5:12, 개역)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5:13, 개역)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5:14, 개역)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훙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15, 개역)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5:16, 개역)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을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5:17, 개역)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5:18, 개역)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5:19, 개역)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15:20, 개역)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15:21, 개역)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15:22, 개역)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15:23, 개역)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15:24, 개역)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15:25, 개역)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15:26, 개역)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15:27, 개역)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15:28, 개역)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15:29, 개역)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15:30, 개역)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15:31, 개역)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15:32, 개역)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맏아들의 분노는 바로 잉여 20%의 보너스 때문입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리지 않았다면 화를 낼 이유가 없습니다.


왜? 맏아들은 단 한번도 그런 대접을 받아 본적이 없거든요.
이것이 차이입니다. 간극 입니다.
그럼 탕자처럼 되던가 말이죠?
그런데 때려죽어도 막살수 없거든요.
때려죽어도 탕자 절대로 안될려고 하거든요.

성령은 곧 의문으로 하지 않는 살리는 영은
죄인 중의 괴수에게만 해당 되는 보너스 입니다.
탕자죠.
 

이것이 이스라엘의 의미요

처음자리요

이 심판의 자리에서의 긍휼의 자리를 반복하는 것이

성령의 일이다 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을 할때에

이스라엘의 무기는 이것 밖에 없습니다.

무기가 희한한 무기입니다.

곧 할례입니다.

 

에이 이게 무슨 무기냐 말이죠.

 

우리는 무기를 들어도 이게 무기가 아닙니다 라는 자기부인의 의미가 바로 할례입니다.

할례 곧 꼬추 끝을 자르는 것 아닙니까?

 

힘을 짜르는 겁니다.

무기란 힘 되라고 무기인데
이 무기를 가지고 힘쓰라고
적군을 죽이고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면서
아군의 목숨까지 지키고
가정 가족을 적의 위협으로 부터 지키고
국가를 지켜내는 무기를 가지고 힘쓰라고 무기를 가지게 되는데
심지어 머리를 쓰는 전략도, 지식도 일종의 무기거든요.
 

그런데 힘을 짜르면 이게 무슨 무기가 되냐 말이죠.
똑똑한 자가 전략을 짜는게 아니라
나는 멍청합니다 라는 자를 전략가로 내세우게 되면
그 전쟁 무슨 수로 이깁니까?

 

무기 아닌 무기이다는 겁니다

힘 아닌 힘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성령의 일이다는 겁니다.

 

힘으로 하지 않는 전쟁

그럼 말라꼬 전쟁하느냐 말이죠.

개죽음 당하게 되는데?

죽어도 상관 없는 전쟁을 하는 겁니다.


왜? 이미 승리했기 때문에 말입니다.
전쟁 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승리했데~~~
이것이 믿음으로 하는 전쟁이다는 겁니다.
그 믿음이 바로 할례에 담겨져 있는 겁니다.
즉 인간의 믿음으로 하는게 아니라
믿음 되시는 분이 힘을 다 짤라서 하는 이미 승리한 전쟁이다는 겁니다.

죽어도 상관 없다고 하니까 

그럼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보상심리로써 순교자 라고 명예심을 부여합니다.

 

그런데 그것 마저도 다 힘입니다. 힘의 사고방식입니다.

나는 원래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이지

 

저 이렇게 신을 위해 죽으니 나를 순교자로써 만들어 천국에서 보상해주세요가 아니잖아요.

그건 성화론아닙니까?

 

할례는 그야 말로 하나 마나입니다.

있으나 마나 한 겁니다.

그런데 이 할례를 하면 전쟁승리이고

이 할례를 단 한 명이라도 빠뜨리고 안하면 전쟁에서 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는 순교가 목적이 아닙니다.

승리가 목적입니다.

그런데 원인이 힘이라는 무기가 아니라

원인이 없는

힘이 없는

무기 아닌 무기로써만 승리하는 전쟁이다는 겁니다.
승리의 원인이 힘이 아닌
무원인으로 만들기이다는 겁니다.

 

참 말로 설명하기 참 어려운데

한 마디로 오로지 성령으로만 승리하는 것이지

육의 요소가 단 한 개라도 있어서 승리하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 또한 육의 요소이거든요.
나는 믿숩니다
나만 승리해야지
남이 승리하면 안된다는 그런 질투가 아니지요.
 

그런데 이런 할례마저도 아까전의 묵시운동을 하는 바리새인처럼

이것이 그만 강도들끼리 너 가짜 이스라엘 맞어

응 나 가짜 강도 이스라엘 마저 라는 싸인(암호)이 되고 만 겁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손해 보느냐

더 눈에 안보이는 방식으로 더 깊게 들어가버리는 겁니다.

듣보잡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마음판의 할례가 졸지에 등장하는 바람에


졸지에 손할례가 허물어지는 성전처럼 허물어져 버리는 겁니다.

완악한 의문의 죽이는 것으로 유대인은 아직도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마음판의 할례는 육이 실천 가능하도록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포기하라는 취지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손 쓸수 없는 아예 영의 차원인 겁니다.
마음판의 할례를 어떻게 하는지 유튜브에 한번 올려보세요.
아무도 행할 수 있는 사람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화론자들은 진짜 강도들이요 사기꾼들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들이 다 차지하는 것 보면
참 신비하지요? 예수님 당시와 다를바 없는 겁니다.

 

그럼 당연히 마음판의 할례는 묵시의 언어로써 결국 인물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성령은 개방이 아니라, 소통이 아니라 단절입니다.

그 단절성을 뼈저리게 느낌으로써
상한심령되신 예수님을 보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동일성이 아닌 아무리 봐도 예수님과 나는 극과 극의 그 차이로써

불가능성으로써

자기를 부정하는 자기부인이 되는 겁니다.

 

불교의 자기부인 또는 무자아 개념은 종말운동차원이지

묵시라는 인물을 만나서 자기부인이 아닌 겁니다.
더 나은 자아를 형성하기 위한 자기부인이지

어떤 인물을 만나서가 아니다는 겁니다.
어떤 인물을 무슨 수로 만나겠습니까?
직접 찾아와 주셔야 하는데
그것도 하늘 영광 다 버리고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찾아오심입니다.
이것이 유대인 곧 바리새인이라는 회개의 달인들이 다 이런 식입니다. 불교식입니다.

성화론자 개혁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이지요.

 

자기부인이란 예수님이라는 인물을 만나서

성령이라는 약속한 성령을 20%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지
자력으로 죄책감과 양심의 가책으로 반성의 차원에서의 자기부인이 아닌 겁니다.
아무도 회개를 할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회개를 포기하세요.
회개의 영을 제발 달라고 해야 합니다.

여기서 갈라지는 겁니다. 성령에서 말입니다.

 

요나가 왜 화딱지 나서 자살시위를 벌리는 겁니까?

 

성령 때문입니다.

금가락지 좋은 옷 새신발 때문입니다.
죄인의 확정적인 3일의 간극이자
동시에 그런 죽었던 자를 불쌍히 여겨서 살리는
보너스 잉여 선물 3가지 입니다.

이것 아니면 맏아들 화내지 않습니다.

화나게 만들어 버리는
갈라지게 하는 요소는

바로 약속한 성령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무엇을 주시겠다?

화딱지 나게 만드는 성령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이 성령 아니면
이 세가지 물증 아니면

다른 것은 다 의문의 죽이는 것입니다.
왜 성화론자들은 이 의문의 죽이는 것을 행할려고 환장해 하는지
참 신기하죠?
 

영은 왜 살리는 것이고

의문의 죽이는 것이 아니기에

 

인간들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이 성령의 성전을 싫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전은 너희다 라고 했을때에 인물이 만나고자 하는 것은 죄인이거든요.
그런데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시공간)은 이 죄인을 싫어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일부러 안식일날 이 죄인들을 용서하고 고치시고 살리니까
바리새인들이 화딱지는 내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원수인데
그 원수를 사랑하시니 미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봐도 탕자 같거든요.

탕자만이 교회요 성령의 전인데

 

성화론자 곧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는 자는

이 성령을 선물 받은 탕자를 반드시 싫어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3일이다는 겁니다.

세가지 선물을 받은자 말입니다.

이것만이 제대로 간극을 벌리는 겁니다.

 

어떤 선물?

 

분명 증거궤에 세가지 물증이 잡혔습니다.

 

십계명 깨어진 두 돌판

만나를 담은 항아리

아론이 싹난 지팡이

 

죄인이라는 증거물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한 증거물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로써

심판 받아 마땅한 자라는 겁니다.

 

이것이 애굽 탈출 때가 아닌

요단강 입성 때가 아닌

광야 때입니다.

죽음의 강 홍해와 죽음의 강 요단강 이 두 죽음 사이에 있는
죄인 중의 괴수 만드는 광야 말입니다. 그것도 40년 광야
 

즉 의도적으로 죄인 만들기를 했다는 겁니다.

? 20% 줄려고

보너스 줄려고

보혜사 줄려고

즉 예수님 자신을 줄려고 말입니다.

구원자 자신 말입니다.

 

그래서 잃어 버림받은 자

심판받는자

죄인의 자리

원수의 자리에 놓여서

그 위에 증거궤 두껑 위에 피를 붓는 겁니다.

그것도 필요없어 보이는 광야때에 말입니다.

 

자신을 주시고자 말입니다.

이것만이 살리는 영이거든요.
되찾거든요
되찾는 영이거든요.

 

3일 입니까?

예수님 자신을 주시고자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원치 않습니다.

누가 솔로몬의 황금옷 영광옷이 낫지
공중의 나는 새를 더 낫다고 보는 자가 아무도 없듯이

그저 되도 않는 황금옷인 의문만을 붙잡고

의문의 반복

죽이는 것의 반복만을 좋아라 붙잡습니다.

 

살리는 영은 싫어하고

구하지도 두드리지도 찾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살리는 영은 의문을 허물어 버리고

46년 된 성전을 헐어버리고.
의문의 증서를 찢어버리는 겁니다.


어딜 감히 책임질려고 주인행세 하느냐 말이죠.
그래서 환전책상을 엎어버리고
채찍질로 양과 비둘기를 다 쫏아내는 겁니다.
의문은 썩 물러가라 라고 말이죠.
 

명료한 것이 왔기 때문에 말입니다.
제대로 책임지는 자가 왔기 때문에
주인이 왔기 때문에
그 주인이 벌리는 간극이 바로 3일 입니다.


거봐 거봐 너는 나를 세 번 부인했잖아
제대로 된 간극 앞에 할 말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거 안 물을래
나는 이것만 물을 것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말입니다.
이 보다 더 명료한 것 있으면 나와보라 말이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또 의문을 반복하느냐 말이죠.
 

지금 시편 70편에서

다윗은 심판 속에 놓여지고

버림받음 속에 놓여지고

 

아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짖는자여 라고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다윗이 놓여진 이 십자가의 자리가 바로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이다는 겁니다.

다윗은 탕자라는 이유로 거부당하지만

정작 이것이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였던 긍휼의 자리요.

용서의 자리이다는 겁니다.


이 버림받는 다윗의 가문에서 다윗의 주이신 주가 나시는 겁니다.
누가 봐도 심판받고 있는 다윗인데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을 이렇게 광야로 몰아버리고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아버리고서는 좋아라 할지 몰라도

 

정작 그 자리가

 

있는 자(탕자)는 더 받고, 없는 자(맏아들)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자리였다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이것이 영의 일인줄 모르고 말려든 겁니다.
 

있는자가 등장하고 없는 자가 등장해서

이 자리를 증거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잉태된 이스라엘의 처음자리 말입니다.

 

(13:8, 개역)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13:9, 개역)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3:10, 개역)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3:11,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13, 개역)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13:16, 개역)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3:17,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13:18, 개역)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25:14, 개역)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25:15, 개역)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25:16, 개역)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25:17, 개역)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25:18, 개역)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25:19, 개역)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25:20, 개역)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5:21, 개역)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5:22, 개역)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5:23, 개역)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5:24, 개역)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25, 개역)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5:26, 개역)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5:27, 개역)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25:28, 개역)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어라

(25:29,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25:30, 개역)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25:31, 개역)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25:32, 개역)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25:33, 개역)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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