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의 장막을 구체화 하기 (시편 71)


 

큰 계명 두 개가 있는데 율법사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몰라서 물었을까요?

 

아니지 말입니다!

 

이 큰 계명 두 개를 지켰다고 과시하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물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주 아주 웃끼는 것은

묻기는 물었는데 잘못 물었습니다.

물음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묻지 말아야 할 인물에게 물었습니다.

괜히 물었다는 거죠.

물을 인물 상대를 잘 못 골랐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누워서 침뱉기 식으로

악인의 장막을 구체화 시키는 겁니다.

누가?

우리가 대상인물을 잘못 골라서 그 앞에서 과시하는 그 분 앞에서 말이죠.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았다는 겁니다.

 

그 번데기가 바로 아름다운 장막이고

그 아름다운 장막의 문지기가 바로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이다는 겁니다.

 

복음들고 산을 넘는 아름다운 발
그 발에 비싼 향유를 때려 부어서 허비했습니다.
맞습니다 아깝죠.
그러나 얼마나 너무 너무 아름다웠으면 여자의 목숨인 머리카락으로 딱아도 아깝지 않으니
그 비싼 향유일까 보냐 말이죠.

 

(52:7, 개역)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그것도 모르고 주름 잡은 거죠.

 

아니 왜?

뭐가 잘못 되었고

그럼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데?

 

번데기 앞에서 내 주름 억수로 많제? 라고 묻는다는 것은

자신의 추함을 과시하는 겁니다.
그 배설물인 똥떵어리를 자랑하는 겁니다.
버려도 시원찮을 판국에 ~~~~~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의 가시면류관과 창에 옆구리 찔림 앞에

주여 나 손에 까시 찔려서요 너무 너무 억울합니다.

제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나요 뭘 그리 잘못했길래 이런 불운을 주시나요 라고
내 열심히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아니다 라고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딱 하나입니다. 3일의 간극 반복입니다.

이것이 부정적은 이미지라면

정반대로 긍정적인 이미지로 표현해 보면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물리치고

마귀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라는 것과 같습니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으니

 

독사의 자식들아 나는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한다 라고 하십니다.

 

그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생명책에 네 이름이 기록된 것을 더 기뻐하라고


자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 말도 안되는 간극 무슨 수로 무슨 재주로 갭을 좁히겠습니까?

태어나기도 전인데 ~~~~~~

자 이러면 왜 율법사가 물음의 대상을 잘못 고른 것을 이제 알게 됩니다.

괜히 잠자는 심판자의 콧털을 건드린 겁니다.

죄 아래 가두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분을 건드린 겁니다.

당연히 주님은 이제 이런 식으로 3일의 장막과 차이나는 악인의 장막을 구체화 합니다.

 

과연 이 율법사가 제대로 큰 계명을 지켰는지

아니면 그것이 사실은 복수심이요 살인의지 인지를 가려보자 라는 겁니다.

 

아니나 다를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성경해석을 하십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선한사마리아 비유입니다.

 

이것이 큰 계명 두 계명과 연관이 된다는 겁니다.

그럼 이와 연관이 안되는 자는 악인의 장막인데

오히려 이 두 계명을 지켰다고 자부하는 자가

큰 두 계명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악인의 장막이요

그것이 들통나게 되니까 비로소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꼬 라는

살인의지가 발현하는 그 속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겁니다.

씨뿌리는 비유와 같죠.

예수님이 복음이 씨앗을 뿌리니까

그 땅의 속성들이 속쏙쏙 들추어지는 겁니다.

아무리 안식일을 지켰다

큰 계명 두 계명을 지켰다 라고

완벽하게 껍데기를 갖추어도

예수님이 던지시는 말씀의 씨앗에 의해서 그 땅의 속성은

들추어지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됨으로써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겁니다.

실로암 소경은 보게 되고, 소경 아니다고 하는 자는 소경이 되는 겁니다.

거지나사로 비유도 동일합니다.

부자는 오늘밤 네 영혼을 취하게 되니 그 동안 창고를 더 짖고 지어서 모은 재산이

결국 남 좋으라고 모으게 된 셈입니다.

그러나 거지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있게 되는 겁니다.

 

부자청년도 마찬가지죠

가난한 자에게 다 주라고 하니 못 주게 되니까 근심하고 돌아서게 됩니다.

그 있는 것도 빼앗긴 겁니다.

 

앞의 글에서는 탕자는 더 받고

맏아들은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식입니다.

아버지의 마음과 상관 없는 것이 들통나 버렸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가 다 이런 식입니다.

 

자 그럼 오늘 시편 71편은

 

바로 이런 아버지의 긍휼을 말하기 위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선함을 말하기 위해서

상대적인 악인의 장막을 구체화 하는 겁니다.

대제사장이 강도 만난 자를 모른채 하고 가버리고

레위인이 모른채 하고 돌아가버린

그 악을 구체화 하지 않고서

어떻게 선을 말할수 있냐 말이죠.

 

선이란 악과의 차이성인데

차이를 내지도 못하고

간극을 벌리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선이라고 말하냐 말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이 복음을 시작할 때

벌써 마귀의 세가지 시험을 통해서

악마의 정체를 들추어내신 뒤에 복음이 그 뒤에 증거되는 겁니다.

그래야 왜 기쁜소식인지가 나타나는 거지요.

 

그 이전의 소식은 나쁜소식으로써

인간을 어떻게 장악했는지가 들통나는 겁니다.

 

마치 누구처럼?

율법사처럼

부자청년처럼

맏아들처럼

안식일을 지켰다고 우기는 바리새인처럼 등등 말이죠.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쩔수 없습니다. 우리 또한 앞의 사람에 다 해당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지적하심으로

뒤에 기쁜소식이 오심으로 인해

그 차이를 말씀을 통해 밝혀 주십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럼 시편 71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곧 노래입니다. 노래가 기쁨이 아닙니까?

즉 계시로써의 노래이다면

 

그 앞 이전의 상황인 슬픔을 구체화 하는 겁니다.

 

바로 시편에서 가장 어렵다는 원수가 누구냐에서

인간은 그 원수를 아무리 시편을 봐도 모르는 판국에서

이미 말씀은

시편에서는 이 원수를 구체화 하고서 들어가는 기쁜소식이다는 겁니다.

그럼 우리는 이 기쁜소식의 복음을 선물로 받기 전까지는

이 원수를 구체화 하시는 말씀 속에 놓여져야 합니다.

원수를 구체화 하는 말씀을 못 본다면 기쁜소식이 왜 기쁜지를 알길이 없으니 말입니다.

 

결국 원수가 누구인지를 전혀 모르게 된다는 거죠.

 

그런데 지난 시간에도 말했지만

예수님이라는 인물이 오시기 전 까지는

아무리 선하고 정의롭고 바른소리를 하고

올바른 삶을 살았다고 자부해도

 

그것은 악인의 장막이 구체화 되지 않는 상태에서의 자칭선함

자기설정의 선함이기에

 

진짜 선하신 예수님이 알려주시는 선함과 다르다는 겁니다.

 

물론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미리 맛배기로 눈치채라고 주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율법입니다.

 

곧 율법은 죄 아래 가두기 위함입니다.

즉 마귀에게 다 잡혀 오라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에게 다 잡혀 오기는커녕

도리어 마귀를 잡았다고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물리쳤다고 하니

 

얼마나 제대로 마귀에게 제대로 낙인 모습을 그대로 표출하냐 말이죠.

율법사가 왜 율법사로써 예수님께 큰 계명 두 계명이 뭔줄 아냐고

물은게 필연이 아닌 이유입니다.

율법사 아니였다면 절대로 안 묻습니다.

율법사 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물었던 겁니다.

딴 사람 같으면 안 물었어요

이미 번데기 앞에 주름 잡는다는 것을 아니까 말이죠.

그런데 율법사이기 때문에 참으로 신기하게도

다들 아는데

율법사만 몰라요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식일 지킨자만이 안식의 주인을 태클겁니다.

참 신기하죠.

아주 아주 역설적이게도

이게 인간이 바로 악인의 장막으로써 들통나야만 하는 모습인 겁니다.

 

율법은 몽학선생으로써 화살표 올무입니다.

너 안돼 저분이야 라고 화살표로써 방향을 나타냅니다.

그럼 그 분을 쳐다봐야할 고개를 돌려야 할 입장인데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율법 지킨 자신에게 빠져 버립니다.

율법 못 지킨다는 것을 알면 고개를 저 분에게 돌릴텐데

방향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화살표가 향하는 곳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흠모할 모양 하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움이나 풍채도 없이

고개를 다 절래 절래 돌릴정도로 싫어버린바 되었다는 겁니다.

 

참 이게 율법의 함정입니다.

싫어버린바 되었기에 방향을 거기로 화살표한 겁니다.

누구든지 다 볼 것 같으면 화살표가 저리로

저 인물로 향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니 딴 사람이 아닌 율법사가 걸려들어야 해요

딴 사람이 걸려들면 안됩니다.

반드시 율법사가 낚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놀랍게도 누구와 맞딱드리게 되느냐?

안식일을 지킨자들이 맞딱드리게 되어서

반발심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시편이 중요한 이유는

시편은 나 예수를 말하기 위함이다고 했습니다.

그런 예수를 누가 거부하도록 되어 있느냐 하면

시편을 달달 외우는 자들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비밀이 공개되어도 여전히 비밀로써 풀리지 않는 겁니다.

 

십자가의 용서는 그래서 비밀입니다.

 

십자가를 외치는 자일수록

 

지금 이 글을 읽는 저 김대식이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지요.

그런 자가 역설적이게도 십자가의 용서를 가장 거부하는 식이 되는 것이

비밀이다는 증거이다는 겁니다.

 

저 같은 인간에게 풀이 되고 해석되는 시편이다면 그 시편 가짜죠.

 

말씀을 어릴적부터 다 지킨 그 동네로부터 존경받는 부자청년 조차에게서 마저도

복음을 여전히 비밀이어야 합니다.

해석했다고 말씀을 지켰다고 풀려버리면

패쓰워드가 풀려버리면 그건 처음부터 말씀이 아니라

허상을 붙잡은 것이다는 겁니다.

 

그럼 너의 주장은 아예 안 풀리는 말이냐?

네 딩동뎅

풀리면 안됩니다.

 

우리는 도리어

이런 장면이 영화에서 가끔 나오는데요.

우리는 도리어 수갑을 풀었다고 아주 아주 좋아라 했는데

특수 수갑이라서 풀었다고 하는 동시에 다시 더 쪼여지는 수갑에 갇힌 겁니다.

 

아무리 천하의 금고털이라고 해도

오히려 그 재주가 더 역이도록 되어 있는 수갑이

바로 율법이라는 수갑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더 쪼여드는 수갑이 된다는 거죠.

 

그래서 율법사 만이 그런 질문을 반드시 예수님께 해야 한다는 겁니다.

반드시 안식일 지킨자만이 안식의 주인에게 주름잡아야 합니다.

 

오늘 시편 71편에서는

다윗 앞에 누가 주름을 반드시 잡아야 합니까?

맞습니다. 사울왕입니다.

 

이 개인을 마치 호두알 하나로 생각해서 망치를 깨뜨리면

이제 하나가 아니라 수백개의 파편이 될 겁니다.

 

그럼 다윗을 깨뜨리면 수백개의 파편이 되어서

누구가 반드시 달라 붙도록 되어 있다?

악인의 장막이 구체화 되는 겁니다.

바로 사울왕 하나를 깨뜨랴서 수백개의 파편이 되어서

반드시 다윗 앞에

예수님 앞에

누구처럼?

율법사처럼

안식일을 지킨자처럼

46년 동안 성전 지었다고 자부하는 자처럼

반드시 배치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시편 71편을 보자 말이죠.

시편 전체

성경 전체를 보자 말이죠.

 

자 그렇게 되면

이 시편 71편이 질질질 눈물 짜고 하는 내용이 아닌 겁니다.

원수를 구체화 하기 위한 복음이 되는 겁니다.

슬픈소식이 아니라

기쁜소식이 되는 겁니다.

 

분명 그 내용은 슬퍼보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시편 71편 전체를 하나의 의인화를 해 버리면

이것은 마치 실로암 소경과 같습니다.

 

이 실로암 소경에게 걸려들고 낚이는 놈들이 악인의 장막으로써 구체화 되겠지요?

바로 소경 아니다 라고 우기는 자들 아닙니까?

 

시편71편을 또 하나의 인물로 의인화하면

이것은 탕자와 같습니다.

부정적이지요. 슬픔으로써 표현되겠지요.

 

그러나 이 탕자에게 말려들고 낚이는 놈이 있는데 바로 악인의 장막으로써 구체화 되는

맏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에 반발하는 자로써 동원이 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씨뿌리는 비유에서 씨앗을 뿌리니

복음을 뿌리니

이 악인의 장막에 해당되는 자들이 들통이 나고

 

이들과의 차이로서

 

좋은땅에 3060100배 라는 3일의 간극이 바로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복음의 위력이다는 겁니다.

 

복음이 이런식으로 거룩작업 곧 구별, 분별작업을 벌리시는 겁니다.

 

이 분별작업에 당해야 할 입장에서의 인간이

도리어 자신이 분별하겠다고 달려드는 입장에서

율법사가

걸려들어야

복음이 마귀 보란 듯이 마귀 코 앞에서

그 차이성을

그 거룩성을 실감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예수님의 가르침은 누구 약올리듯이 표현 되는 겁니다.

 

(7:29, 개역)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1:22, 개역)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저들과 같지 않다고 말입니다.

이미 먼저 말씀을 들려주었던 저들과

이미 먼저 알려주었던 저들과의 차이성으로써 말이지요.

 

자 그렇다면 이 슬퍼보이고 아파보이고 힘들어 보이는 것은

결국 누구를 구체화 하는 사실상 기쁜 소식이다?

 

네 맞습니다. 악인의 장막입니다.

원수죠. 원수.

 

그럼 우리는 빨리 자수해야 할 입장에 놓여진 것이지

이 복음 앞에서

감히 저는 십자가와 함께했습니다.

저는 율법 두 큰 계명을 지켰습니다.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라고 말할 입장이 못 됩니다.

도리어 원수로써 들통나야 할 입장이고

 

그런 입장에서 주님의 용서와 긍휼을 바래야 할 죄인 중의 괴수이다는 겁니다.

 

이런 입장이 못 되면

우리는 도리어 나 보다 못 한 사람 붙잡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도리어 성전의 올무 기능에 말려들게 되고 걸려들고 낚이게 되는 겁니다.

성전은 그렇게 우리를 가려내는 겁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지

자신의 거룩함을 들고오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철저한 무능앞에서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라고

도리어 세리가 말려들지 않게 되는 겁니다.

 

다윗은 그런 입장에서 세리로써 주여 불쌍히 여겨달라고

성전 저 끄트머리에서 고개도 못 들고 있는 겁니다.

 

이것을 더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율법사 같은 자가 동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거룩사건이 구별로써 갈라짐으로 구체화 되는 겁니다.

바로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사울왕은 저 다윗과 같이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지 않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라고

 

말려든 거지요.

 

아무리 봐도 사울왕은 다윗이 걸려들었다고 보았지만

 

다윗은 지금 사울왕처럼 주여 주여 제가 오늘 안식일 지키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그것으로 기뻐하는게 아니라

다윗은 정작 편파 편애로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한다고 일방적인 편파해석에 의해

 

졸지에 다윗은 안식일을 어기고 제사장만 먹는 진설병을 먹어

율법을 어기는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어야만 하는 죄인의 자리

부정적인 자리

3일의 자리에 놓여져서

이스라엘의 처음자리를 보여주는 반면에

 

정작 사울왕은 그렇게 되지 않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저렇게 토색하지 않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라고

창세전의 생명책과 무관함에 도리어 놓여짐으로써

 

괜히 나대다가 말려들게 되는 겁니다.

 

율법사가 그런 입장에서 말려드는 겁니다.

도리어 편파 미움 때문에

뒤짚어 씌움을 당해서

율법사 라는 이유로 율법을 무시한 것이 들통나게 되는 겁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이 안식의 주인을 무시하듯이 말이죠.

 

시편을 달달 외운자들이

시편을 괜히 봐서

시편 대로 오신 예수님을 절대로 못 보는 소경임이 들통나듯이 말입니다.

 

이 얼마나 역설입니까?

 

그렇다면 동질성으로 여길것이 아니라

철저한 단절을 느껴야 하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구원하랴 라고

이 사망의 몸

지옥의 몸을

 

실감한 자가 도리어

원인 없는 결과로써

로마서 8장의 새 몸을 누리는 겁니다.

 

시편 71편이 그래서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원하랴 라고

기쁜소식이 원인 없는 결과로써 뒤에서 덮쳐져야 하기 때문에

앞에서는 이 사망의 몸을 실감하는 겁니다.

 

여기에 원수들이 말려드는 거죠.

 

하나님이 다윗 너를 버렸으니까 너가 그런 것을 당한다고

사실은 자신들이 당할 것을 미리 보여주는 예고편이

다윗 스크린에게 방영된 것인데

자기 거울로 안 보고

남이 당한다고

내가 아니다고

내가 당하지 않는다고

손가락질 하다가

누워서 침뱉기식으로 말려드는 겁니다.

이것이 율법의 올무성입니다.

 

다윗의 몸이

성도의 몸이

율법의 올무기능으로 작용한 겁니다.

 

저번에 말했던 주의 병에 담기 위한 눈물 연기라고 했지요?

 

아 곤고하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지랴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말을 들은 자들이 저봐 저봐 자기도 못 구하면서 남 구원하겠다고

나대다가 됀통으로 당했지 말야

하나님한테 버림받았으니 저렇게 원망하지 라고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야 말로 어쩔수 없습니다.

영의 일을 무슨수로 육이 해석하겠습니까?

 

그 간극만 더 극으로만 보일 뿐이니 말입니다.

 

성령을 선물 받은자만이 아 왜 이런 알 수 없는 일들을 벌리셨는지 알게 되는 겁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또렷히 밝히 보이기 위해

이제 그 어떤 의문도 꾀지 못하게 하는 명료한 다 이루심이

우리 마음판에 새겨지도록 하기 위함인 것을 말입니다.



(막 12:27, 개역)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막 12:28, 개역) 『서기관 중 한 사람이 저희의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 잘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막 12:2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막 12:30, 개역)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막 12:31, 개역)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막 12:32, 개역) 『서기관이 가로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막 12:33, 개역)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막 12:34, 개역) 『예수께서 그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막 12:35, 개역)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뇨』


(눅 10:1, 개역)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눅 10:2, 개역)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눅 10:3, 개역)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눅 10:4, 개역)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눅 10:5, 개역)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눅 10:6, 개역) 『막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눅 10:7, 개역)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눅 10:8, 개역)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는 것을 먹고』

(눅 10:9, 개역)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눅 10:10, 개역)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눅 10:11, 개역)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 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눅 10:12,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눅 10:13, 개역)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눅 10:14, 개역) 『심판 때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눅 10:15, 개역)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눅 10:16, 개역)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눅 10:17, 개역)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0:1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눅 10:1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눅 10:20, 개역)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눅 10:21, 개역)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눅 10:22,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눅 10:23, 개역)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눅 10: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눅 10:25, 개역)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 10:26,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 10:27,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눅 10:2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눅 10:29, 개역)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눅 10:3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 10:31, 개역)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눅 10:32, 개역)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눅 10:33, 개역)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 10:34, 개역)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 10:35, 개역)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 10:36, 개역)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 10:37, 개역)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눅 10:38, 개역)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눅 10:39, 개역)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눅 10:40, 개역)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눅 10:41, 개역)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눅 10:42, 개역)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