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자의 이웃(돕는자, 지혜자, ) (시편 72)

 

 

오늘 어머니와 이 말씀을 나누면서 어머니께서 좀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던 그런 가난한자가 아니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좀 더 깊게 들어갈려고 하는데 가난한자 에 대해서 막히다 보니

그 부분을 오히려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왕은 이스라엘의 왕의 조건으로써 이런 왕이 왕의 조건이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약으로 넘어가면

놀랍게도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만약 너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면

이런 메시아의 조건이 맞긴 맞냐 라고 따지는데

그 첫 번째 시험으로써의 메시아 조건이 바로

가난한자의 이웃이 되어 달라는 겁니다.

 

이웃이란 돕는자를 말하는 겁니다.

어려울 때 도와줄수 있는자.

아무런 댓가 없이 말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말입니다.

 

이것을 솔로몬은 시편 72편에서 지혜자로 표현된 겁니다.

가난한자를 위한 지혜자

소위 이웃이 되는 거죠.

 

그래서 본문을 낭독하기 전에

누가복음 10장의 선한사마리아 비유부터 읽고

시편 72편을 낭독했습니다.

 

이웃 개념을 제대로 말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엉터리 가난한자의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엉터리 가난한자의 개념으로 인한

이웃 또한 엉터리 이웃 개념입니다.

 

이것을 놀랍게도 율법사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을 들추어내십니다.

즉 올바른 가난한자의 개념과

이웃 개념을

율법사의 입을 통해서 밝혀냅니다.

 

물론 율법사는 정반대로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자신이 마음이 가난한자요.

자신이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큰계명을 지키는

이웃이다 라고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 이용하지만

정작 이용당하는 것은 율법사 인 겁니다.

 

마치 저번에 실로암 소경이야기를 통해서

실로암 소경이 자신을 눈뜨게 한 자가 누구인지를 모를 때

바리새인이 목격자로써 그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꼴로 만드시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자 이것을 제가 어머니에게 강조한게 바로

마귀를 거쳐서 가난한자 개념

이웃 개념이 밝혀지지

 

마귀를 거치지 않으면 엉터리 가난한자 개념

엉터리 이웃 개념을 마귀가 심었기 때문에

그것인줄로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럼 우리도 똑같이

제대로 된 가난한 자의 개념을 알려면

엉터리 가난한자 개념을 먼저 거쳐야 합니다.

곧 마귀가 우리에게 심어버린 엉터리 가난한 자 개념을 알아야

 

그 차이로써 제대로 된 가난한자를 알게 된다는 거죠.

그래야 이웃이 누구인지를 아는 거죠.

 

그래서 쭈욱 설명을 하니까

어머니께서 반발하십니다.

 

그럼 김성이 친일파가

또 이박 대령이가

가난한자가 된단 말이가?

아마 고신측에서 반발할것이다.
친일파 청산, 친일세력 타도를 외치는 바리새인들이기 때문이다.

진짜로 그들이 가난한 자이단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성경에 보세요

매국노 삭개오 세리가 바로 가난한자 였던 겁니다.

물론 상대적인 우연성으로 말입니다.

 


에잇! 못 받아 들이겠다
.

 

ㅋㅋㅋ

 

당연히 못 받아 들여야 합니다.

 

고로 우리는 마귀가 원하는 메시아가 곧 지혜자. 곧 돕는자 이웃이

마귀가 심은대로 원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새롭게 만들어내는 가난한자 개념은 원하지 않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물론 제가 서두를 가난한자는 없다 라고 시작했기에

새롭게 발생시키는 가난한자를 통해서

아무도 원치 않는,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 가운데서 이웃 개념

가난한자의 이웃 가난한자를 돕는 이웃 개념이 등장하는 겁니다.

 

이것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입니다.

 

왜 하필이면 사마리아인입니까?

유대인에게서는 철천지 원수이잖습니까?

바벨론 포로 이후에 돌아와서 스룹바벨 성전 지으라고 하셔서

그 깡통 허룸한 성전을 짖는데

솔로몬의 황금성전을 본 노인들은 펑펑 웁니다.

그런데 이 허허벌판의 불타버린 땅에서 재료가 뭐가 있겠습니까?

온갖 다 타버린 매말라버린 가지를 가지고서 겨우 겨우 성전을 짖는데

그것 마저도 방해를 끝까지 했던 것이 사마리아인들 아닙니까?

그야말로 철천지 원수죠.

 

그런 사마리아인을 코 앞에서 보란 듯이 편애를 하고

탕자를 보란 듯이 금가락지 새신발 새옷을 입혀 살진소를 잡아 잔치를 벌리니

일부로 화 내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악한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 아니라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니느웨가 회개할 일이 없거든요.

원수이니까

 

원수가 돌아올일이 없다 말이죠.

그런데 회개를 하고 돌이키니까

 

탕자를 받아주니까

 

요나는 눈치챈 겁니다.

이것은 니느웨가 돌아온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

그래서 반발해서 자살시위를 벌리는 겁니다.

배신당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럼 너가 마귀의 권세를 한번 이겨 보렴

 

어떻게?

이 강렬한 햇빛의 열기를 이기듯이

한번 이겨 보라는 겁니다.

 

당연히 못이깁니다.

 

 

대머리인데 우에 이깁니까?

 

차라리 날 죽이세요 라고 자살시위하듯이

죽겠다메?

그럼 죽음의 권세, 사망의 권세 이겨보라니깐?

못 이깁니다.

 

왜냐하면 이길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 지금 발언 조심해서 해라

까닥 하다간 이단발언이 된다 ㅋㅋㅋ

 

이단 이든 삼단이든 이미 이단 중의 이단이 된 입장인데 뭘 조심해요.

 

예수님은 그럼 이 사망의 권세를 이길 필요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당연히 없습니다.

 

오오오 너 조심해

 

조심할 필요가 없다니깐 ㅋㅋㅋ

 

예수님은 새삼스럽게 사망의 권세를 이길 필요가 없이

이미 이긴채로 이 땅에 오신겁니다.

그렇다면 마귀의 활동 조차도 독자적으로 가 아니라

예수님의 자작극에 해당되는 활동으로써 마귀는 지멋대로 행동 못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사망의 권세도 마찬가지인 겁니다.

 

그러면 말라꼬 그런 하나 마나 한 짖을 하느냐?

이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긍휼입니다.

 

긍휼과 진리의 만남

의와 화평의 입맞춤

 

이 부분을 하면서 저도 놀랬습니다. 85편이였지요.

오늘 시편 72편과도 똑같은 맥락입니다.

 

긍휼을 7번 베푼자와 진리되신 예수님과의 만남이 아니라

의인과 화목제물되신 예수님의 입맞춤으로 화평케 되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마귀가 세가지 시험을 통해서

이런 메시아의 조건으로 내세운 꼴입니다.

? 인간도 그런 메시아를 맞이할 조건을 갖추었다는 거지요.

 

그래서 가난한자의 이웃이 되어달라고

첫 번째 시험부터 시편내용을 가지고 시험하는 겁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긍휼을 7번 베푸는 자가 아니라

긍휼을 770번 베품을 받는자와 진리의 만남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긍휼을 거꾸로 본 겁니다.

평강 평강 누가 운운을 잘 하던가요? 거짓선지자 아닙니까!!!

 

똑같습니다.

 

의인과 화평의 만남이 아닙니다.

죄인과 화목제물의 만남입니다.

 

아 참 만남이 아닌 입맞춤

 

의인과의 사랑을 나누는게 아니라

죄인과

원수와 사랑을 나누겠다는 겁니다.

 

완전 정반대로 문자를 보는 이유가

바로 마귀가 그렇게 심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나누는 초반부터 제가 아예 단절성을 느끼도록 이런 말로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능한 이야기가 단하나도 없이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마귀는 이 성경을 가지고서 가능한 이야기만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마귀를 거쳐야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럼 그 대표적인 것으로써

 

손 할례와 마음판의 할례입니다.

 

손할례는 누구든지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마음판의 할례는 불가능 그 자체입니다.

누가 나는 마음판의 할례를 했다고 우길때에

어떻게 했는지를 그 사람도 증명할 길이 없고

검증하는 자도 어떻게 검증할 방법 자체가 처음부터 단절된 것이다 말이죠.

 

그럼 긍휼과 진리의 만남

의와 화평의 만남이라고 했을때에

긍휼을 가능성으로 주장하는 쪽은 마귀 곧 거짓선지자의 주장이고

의도 마찬가지

 

긍휼,

오늘 나누는

가난한 자

이웃

솔로몬이 이런 왕이 되어주이소 라고 하는

 

물론 가능성의 왕이라면

솔로몬 자신이 왕이니까

자기자랑 밖에 안되겠지요.

그런데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왕 개념은 불가능성이기에

오호라 난 안되는 놈이구나 라고

이런 분이 왕이 되어주이소 라고 하는 겁니다.

가능할 것 같으면 말라고 이런 왕을 요구하겠습니까?

 

즉 솔로몬 자신은 왕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아니니까

아무리 봐도 아니니까

그저 막사는 놈이니까 이런 왕을 요구하는 겁니다.

물론 원수가 구체화 되지 않았던 시편에서 말입니다.

 

가난은 나랏님도 해결 못하는데

그렇다고 손땔수 없잖아요

 

그러니 마귀가 이런 가난한자의 왕이 되어달라고

어떤 특정 구절의 시편을 인용하는게 아니라

사실상 성경 전체 개념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는 겁니다.

예수님만 시편대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귀도 시편대로 일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눅 24:44, 개역)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거짓선지자는 참선지자의 보충물이듯 차이가 나듯이
강도의 소굴, 악인의 장막은 바로 주의 아름다운 장막을 말하기 위한 보충물이다는 거죠.

 

결국 성경 그 어떤 개념도

가능성으로서의 개념들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가능성이 없다면 성화론자들 주장처럼

동기부여가 안되는데

누가 과연 믿고 따라와주고 구원을 얻겠냐 말이죠.

 

글쎄 그러니까요 내 말이

 

동기부여가 전혀 없어요

없는데 결과는 이미 덮쳐져 버렸어요.

그래서 행함으로 하는게 아니라

믿음으로 하게 되는 겁니다.

 

동기부여가 없는데

오히려 더 명료해요

 

동기부여 안되면 어떡하나 라고 억수로 걱정을해서

그렇게 실천케 해서 부족한 부분을 매워가면서 그렇게 했는데

오히려 명료하기는커녕 늘 찝찝하게 휴지 달고 외출하듯이

의문의 반복만 되는 겁니다.

 

성화론자들이 방종케 만든다고 공격하는 이유는

동기부여 못하게 될까봐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걱정하덜덜 마세요.

동기부여는 마귀가 합니다.

자라 보고 놀란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잖아요

뭐 캥기는 놈이 다리 지린다고

 

실로암소경이 날 누가 눈뜨게 했죠? 라고 물으니까.

넌 예수 제자이니까 꺼져

난 모세 제자야 라고

 

오히려 그 인물 누구를 알려주는 역할이 바로 악령들린자의 역할이다는 겁니다.

 

율법사가 누가 이웃인줄 알려주는 역할로써

가짜 이웃과 진짜 이웃의 차이를 알려주는 보충물 교보재 역할로써 동원이 된다 말이죠.

동시에 가난한자도 마찬가지

엉터리 가난한자와 예수님이 없는 가난한자를 새롭게 만들어서 자신이 이웃되심을 증거하심에

율법사가 그 엉터리를 말해주는 차이로써 동원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화론자 즉 예수님이 긍휼을 부으시지 않고

본인이 긍휼을 78번 베풀려도 하는 자로써

동원이 되는 식이니

 

성령이 이 모든 일들을 이런 식으로 처리한다고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을 성화론자는 견디지 못해서

자기가 직접 일하고 실천하고 행하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설명하니까 어머니께서 어느 정도 눈치를 채셨습니다.

자 그럼 왜 가난한자가 없는지도 아셨고

그런 와중에

가난한자로 만든적이 없는데

 

저마다 지가 지 스스로 가난한자이다고 우길때에

 

예수님은 전혀 새로운 가난한자

곧 세리 매국노

유대인에게서 세금을 갈취해서 로마에 갔다바치는 그래서 월급타서 부자가 된

민족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배신해서 빌어먹고 사는

그래서 재산을 축적한

그 세리 매국노 삭개오 집에 찾아가니까

 

누가 걸려듭니까?

누가 낚시에 낚이는 겁니까?

 

자칭 가난한자라고

자칭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자라고 우기는

자들이 걸려들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예수는 어찌 죄인의 집에서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말이죠.

 

그것 뿐이겠습니까?

일부러

 

일부러

유대인의 철천지 원수 사마리아인을

유대인 보는 앞에서 편애 하십니다.

 

유대인 미쳐 돌아버립니다.

바리새인 돌아버립니다.

 

맏아들 보는 앞에서 탕자를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반드시 먼저된자와 나중된자를 대조 대비 시키는데

일부러 그러신다 말이죠.

 

그래서 일부러 안식일날만 골라서 고치시고 낫게하시고 일어나게 하시는 겁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자가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그 코 앞에서 말입니다.

일부러

 

이 말은 인간이 가지고오는 그 어떤 개념

이웃사랑실천이라는 둥

긍휼이라는 둥

계명이라는 둥

율법

성전

안식일 등등

 

심지어 그 반대개념들인

죄인 개념도 엉터리로 주장하고 있으니

 

그 어떤 개념도 인간이 가지고 오는 개념들을 모조리 깨뜨리는 식으로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

 

예수님께서 깨뜨리시는데 이렇게 하시는 것을

이런 자가 바로 이웃이다는 겁니다.

결국 이웃은 예수님 뿐입니다.

 

찬송가를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도움 어디서 오나

도움 곧 돕는자 이웃

오늘 시편 72편에서는

돕는 지혜자

바로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어떻게 돕던데?

응 다 깨뜨려

잘난것도 깨뜨리고

못난것도 다 깨뜨려

 

이것을 이웃 이라고 하고

선한자 라고 하는 겁니다.

즉 선함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선함이 아닌거죠.

오히려 정반대로 못때게 모조리 깨뜨리는 자가 선한자이다는 겁니다.

 

포도원비유를 통해서 있는자 더 받고 없는자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 라고 했잖아요.

나는 뭘 해도 가짜입니다 라고 고백할 판국인데

자꾸 있다고 하니까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식이다 라는 겁니다.

이런 일을 벌리시는 분이 선한자이다는 거죠.

즉 반드시 주인은 악하다 라고 욕을 얻어먹음으로써 선하심의 증거가 밝혀 지는 겁니다.

 

악인의 장막이 들추어지면서 말이죠.

 

팔복에서 결국 그것을 하나로 묶으면 결론은 이런 선지자는 핍박을 받았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선함입니다.

 

(5:12, 개역)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팔복

복 복 실컷 이야기 해놓고서는

결론은 핍박입니다.

이것이 참선지자입니다.

 

상대적으로 거짓선지자는 핍박이 없어요. 평강잉께 핍박이 있을수 없지요.

 

그러니 이런 의미도 다 불가능한 소리이다는 겁니다.

 

우리는 불가능한 소리를 해야 합니다.

가능한 소리를 하는게 아닙니다.

 

가능한 소리를 하는 자는 악령이 씌인자입니다.

거짓선지자입니다.

의문을 반복하고 의문의 죽이는 것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살리는 영은 또렷한 밝히 보이는 것만 증거합니다.

곧 불가능한 소리를 하는 겁니다.

 

어떻게 이 원수를 십자가에서 용서하냐 말이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왜 나의 죄악을 다 씻는 피흘림이 되냐 말이죠.

 

그런데 이것을 꼭 토를 달아서

그러니까 이제는 성화가 되어서

막살지 않기로 하자 라고 말하냐 말이죠.

 

그런데 그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의 역할이 차이로써 해야하기 때문이거든요.

자기 발지리듯이

그들은 끝까지 성화론을 이야기 해 주어야만 하고

끝까지 막살면 안된다고 말해 주어야만 합니다.

 

막살아라 라는 말을 그들은 그들 식으로 해석하니까 말입니다.

막살아라 라는 말은 바로 그런 자들이 역이고 낚이도록 하기 위한 발언인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막살아라를 의인화 하면

탕자이거든요.

 

그것도 상대적인 절대로 막산적 없는 맏아들과의 대조로써의 탕자이니까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또렷한 십자가의 용서를

바로 이런 악마들을 거침으로써 풍성하고 완료적이고 또렷하게 증거하시니까 말입니다.

마귀 보란 듯이

마귀가 눈 시퍼렇게 떠 있는 가운데서 말입니다.

 

이것을 밝히 보인다

또렷하다 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그러니 누가 꾀더냐 라고 하시는 거죠.

캥기는 놈을 유발케 하시는 겁니다.

 

지레 자기 발 저린 놈이

예수님과 자신들의 간극을 스스로가 벌려버리는 십자가의 지혜가 펼쳐지는 겁니다.

85편에서

바벨론 70년 포로이후에 돌아오니까

돌아오고 돌이켰다고 좋아라 하는 당사자는

오히려 여호와 한분 뿐이고

 

정작 돌아온 자들은 시큰둥 합니다.

다시는 이런 굴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말자고 다짐합니다.

의문을 반복하는 다짐일 뿐이니

그게 해서 뭐하게요?

 

그러니 왜 돌이켜 돌아왔는지 조차도 모르는 겁니다.

자기 죄책감 따위나

남의 시선에서 내가 잘못했구나 그래서 이런 역사 반복하지 말자?

어차피 반복 또 합니다.

예수님 당시 까지도 그 숙제를 해결 못해서

그저 이스라엘의 해방을 노리니까

그래서 수많은 독립운동학파들이 저 나름대로 독립운동 펼치는데 있어서

예수님이 해방 시켜줄줄 알았는데

전혀 도움이 안되니

자기들 원수에게 손잡고 팔아넘기고

자기들 원수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겁니다.

얼마나 가능성만 추구하고 행함을 제대로 했습니까?

자기들 손에 피 안 묻혀서 좋지요.

원수들이 죄 더 짖도록 원수들 로마에 뒤짚어 씌워서 좋지요.

이게 성화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여호와 혼자 이스라엘이 돌아왔다고 좋아라 할 뿐이지

이스라엘은 전혀 안 기쁜 겁니다.

 

십자가에 달려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을때에

그 어떤 인간도 안 기뻐합니다.

오히려 죽인 놈도 찝찝하고 의문의 반복이고

나 몰라라 도망친 놈도 찝찝해서 엠마오로 나 돌아갈래 할 뿐입니다.

 

주님 혼자 기뻐서 일일이 나타나셔서 내 손 만져봐 내 배허리 만져봐

 

이것은 뭐 예수님 지 혼자 막 기뻐요 막 기뻐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일일이 찾아와 주지 않는 이상 안 기뻐요

 

그래서 일일이 찾아오심이 바로 긍휼이다는 겁니다. 770번의 긍휼

 

오히려 내 쪽에서 안막살겠다고 다짐해서 긍휼 7번을 갖추게 되면

8번이 못 된 것에 대한 의문에 휩싸이게 되고

그것 때문에 자살시위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 이러기요? 왜 니느웨 백성 회개케 만드는데?

왜 내 눈이 시퍼렇게 뜬 그 코 앞에서

원수 같은 사마리아인을 왜 구원하는데?

왜 선하다 라고 하는데?

돌아버리는 겁니다.

 

일일이 찾아오셔서 깨뜨리시는 겁니다.

 

니가

요나 니가 니느웨 백성이다는 겁니다.

그 입장이 되어보라는 겁니다.

 

요나 니가 실로암망대가 무너져 깔려 죽게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자 이다는 겁니다.

 

3일의 간극을 한번 맛 봐라 말이죠.

 

그 소리가 나오는가?

그저 주여 살려주셔서 감사 오케이 땡큐입니다 뿐이지

 

그럼 요나가 거짓선지자에서 참선지자로 주님이 그렇게 만드신 후에

그리고난 뒤에 이스라엘을 향해서 어떻게 외치겠습니까?

평강이다 평강이다 이렇게 외치겠습니까?

아니면

너희들의 철천지 원수 개같은 이방인 니느웨 백성도 회개하는데

이스라엘 너희들 회개 안하면 지옥갈줄 알아라 이렇게 증거했겠습니까?

 

예수님은 어떻게 증거하던가요?

짜증지대로다 라는 식으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듣기 싫은 소리

미움받을려고 환장한 소리를 하시더라 말이죠.

 

의인인데

의인과 화평이 입맞추는데

의인이 회개할게 뭐가 있냐 말이죠

 

가난한데

가난한 조건을 갖추었는데

이웃인 돕는자는

돌을 떡덩이로 만드는 기적을 베풀어서

 

야 드디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솔로몬이 말한 임금 왕이 나타났구나

죽으라고 쫏아가자

그렇게 쫏아가 임금 삼자

 

예수님은 도망치십니다.

?

너는 가난한자가 아니라

먹고 배부른 자이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오히려 가난한자라고 우기는 그들 눈앞에

절대로 가난한자가 아닌 부요한 세리 삭개오를 가난한자라고 하니

이 새로운 가난한자를 만드심 앞에서

기존의 가난한자가 의문의 죽이는 것으로 다 들통이 나는 겁니다.

먹고 배부른 자들이라고

그래서 임금의 조건으로 본 것이라고

 

자 이런식으로 우리 속에 악마가 심은 것을 지적하지 않는 예수라면

그게 예수입니까? 인간이 조작해낸 예수이지!

 

성경 전체가 이런식으로 우리 속에 있는 암덩어리를 자꾸 건드리는 겁니다.

암덩어리가 자기를 툭툭 건드리니까 자꾸 까칠한 반응을 나타내더라 말이죠.

 

거봐 거봐 거봐 의인을 커녕

건강한자 이기는커녕

죄인 맞네

원수 맞네

안막사는자 이기는커녕

막사는자 맞네

 

주여 난 병자입니다 저를 고쳐 주소서

 

이것 보다 또렷한 관계성이 어디있냐 말이죠.

 

밝히 보이는 또렷함이란 주님 쪽에서 맺고자 하는 관계성인

죄인 이다는 겁니다.

죄인 이것 보다 또렷한 들통남이 어디있냐 말이죠.

죄인으로 들통나지도 않는데 어떻게 십자가가 밝히 보이겠습니까?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이길 필요가 없어요

역시나 마찬가지

십자가가 밝히 보일 필요가 없어요

이미 사망의 권세를 이긴 상태이고

이미 밝히 보이는 십자가 그 자체인데

왜 이런 필요없는 하나마나한 표현이 있느냐

 

마치 이것은 주의 주 되심은

이미 주 이신데

주의 주 되심인데

왜 하늘에 가만히 있어도 됨으로써 사망의 권세도 이길필요가 없이

이미 이긴 상태인 하늘에 있으면되고

십자가를 밝히 보일 필요가 없이 십자가 그 자체로써 이미 밝히 보이는데

왜 구지 구지 이런 하나 마나 한 일을 구차스럽게 하시느냐?

그것은 바로 3일의 간극 때문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이라는 하나마나한 일을 하심으로써

주의 주 되심이고

십자가가 밝히 보이심이다는 겁니다.

 

즉 이미 사망의 권세를 이길 필요없으신 이미 이긴 상태에

본인이 스스로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분절해서

이 땅에 내려와서

일일이

직접

하나 하나 만나서

하나 하나 입맞추어서

긍휼과 진리의 만남으로

의와 화평의 입맞춤으로

일일이 직접 방문했다는 겁니다.

 

그래야 누가 지발 지린다?

마귀가 지발 지리는 겁니다.

왜 벌써 오냐 말이죠.

 

일일이 죄인 삭개오 집에 찾아가 먹고 마시니까

마귀가 반응합니다.

죄인의 집에서 먹고 마신다고

 

그래 나 죄인의 집에서 먹고 마신다 우짤래

 

니 보란 듯이 했다는 겁니다.

마귀

 

이것이 진짜 가난한자의 이웃입니다.

 

가난한자를 바로 상대하는게 아니라

 

가난한자의 이웃이 되어달라고 외치는 마귀를 상대하시면서

그 마귀를 거쳐서 나오는 새로운 개념의 가난한자

새로운 개념의 죄인을

 

가난한자가 목적이 아니라

죄인이 목적이 아니라

 

그 가난한 자의 이웃이 누구냐?

그 죄인을 구원할 구원자가 누구냐를

 

마귀와 대조로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시는 겁니다.

맏아들과 대조로 탕자를 사랑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반드시

맏아들이 주장하는 가난한자 개념을 거쳐야 하는 겁니다.

돌삐를 들고 쳐죽일려고 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막사는 개념을 거쳐야 하는 이유입니다.

 

땅에 뭐라 쓱쓱

 

ㅅㅅㄱ 적으니까 SSG 배달이 오는게 아니라 쓰으윽하고 적으니까

막사는 여자를 돌로 쳐죽일려고 하는 자들이 하나 둘씩 다 빠져나가는 겁니다.

한 율법 한다메?

막살지 않은 자가 돌로 쳐라!

 

우와 얼마나 도발적입니까?

그래 내 인정할게

막살지 않은 놈 있으면 돌로 쳐 죽여도 좋다
한번 돌로 쳐서 죽여봐 죽여보라니깐

 

이 말입니다.

 

다들 나는 막사는 놈입니다 라고 쓰으윽 돌을 내려놓고 도망쳐버립니다.

한 율법 하는 놈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막살지 않는 놈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희한하게도 막살자 라는 말은 누가 예민하게 반응하는고 하니

마귀들이 더 반응합니다.

자신들의 광명한 천사의 가면이 벗겨질까봐

지래 지발 저려서

 

이 방법을 예수님이 무지 많이 아니 성경전체에 나타납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

 

무조건 반대하는 겁니다.

 

나를 무조건 반대하면

나는 무조건 틀린 겁니다.

그렇게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시는 예수님이 무조건 옳다는 겁니다.

 

그래야 우리 속에 있는 마귀가 꿈쩍도 안하다가 반응합니다.

수술칼이 쓰으윽 하고 들어오는 것을 느끼니까 왜 벌써 왔냐고 반응하는 겁니다.

 

무엇이 또렷합니까?

강도만나 다 죽어가는 내 모습이 현실입니까?

아니면 남을 7번 용서하고 8번 긍휼을 베풀고 있는 이 의문의 반복된 것이 내 모습입니까?

 

누가 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입니까?

제대로 현실을 또렷히 보자 말이죠.

 

십자가가 괜히 나와 남을 구원하기 위해서 피흘려 죽임당하시는게 아닙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인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님이 보는 현실은 모든 인간이 지옥에 가는 마귀를 뒤따라가는 자로 밖에 안보이는 겁니다.

 

강도만난 자입니다.

 

저 강도 만난 자의 이웃도 없습니다.

 

아니 강도 만난 자입니다 주여 저를 치료해 주세요 라고 하는 자들이 아무도 없습니다.

강도에게 칼을 찔렸는데도 불구하고

저를 빨리 치료해 주세요 라고 하는 자들이 없이

그저 배불러서 성화 레벨 높이기에 정신이 없다는 겁니다.

그게 강도의 칼에 찔린 모습이다는 겁니다.

율법사야 넌 강도의 칼에 찔렸어

누가 너의 이웃이 되어야 하니?

넌 남의 이웃이 될게 아니라

너가 칼에 찔렸다니깐?

 

서로가 동문서답하듯이 대화가 어긋맞게 주고받고 하지만

정작 예수님은 또렷합니다.

그 앞에서 율법사의 의문의 반복, 죽이는 것은 기를 펴지 못합니다.

어느새 쓰으윽 돌삐를 내려놓습니다.

막살았던 것 들켰거든요.

 

도망치기 바빳지

고쳐달라는 놈 없습니다.

 

가난한자는 고로 없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일일이 새로 만들어야 합니다.

강도 만난 자를 일일이 새로 말이죠.

 

그리고 그 죄인을 부르러 오신 자신을 나타내는 겁니다.

 

이웃이 바로 예수님 자기 자신 뿐이다고 말입니다.

 

이웃사랑 실천은 예수님 뿐입니다.

그 앞에서 이웃사랑실천하자 실천했다 라고 우기는 놈들이

쓰으윽 돌삐를 내려놓고 도망치기 바쁩니다.

 

예수님이 이웃이 되셔서 강도만난 저를 책임져 주세요 라고 고백하지 않고 돌아서 등돌리고 가버리는 겁니다.

 

얼마나 또렷합니다.

의문들이 다 도망쳐 버리는 겁니다.

 

이 의문을 도망쳐 버리게 못하는 이웃은 이웃이 아닙니다.

즉 시편 72편에서 솔로몬이 말하는 지혜자 왕이 아닌 겁니다.

 

가난한자를 섬기는 자는 누구입니까?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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