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형제 결혼법이 아니라 시아버지 결혼법 (부활과 시형제 결혼법)


아니 그럼 시아버지 결혼법? 이였단 말인가? 더 구체화 된 것이다.
또 변이를 해서 가로지른다.


이제 그것도 아닌 며느리 다말 결혼법!!

더 가관이다.

배가 산으로 가는 것 같다. 도대체 이해 가능한 내용은 성경에 없다. 모조리다 불가능 뿐이다.

시아버지 유다를 죽여버려서, 죽은 시아버지 유다를 3일만에 다시 살리는 며느리 다말.

거꾸로가 아닌가? 다말이 죽임을 당하는 것 아니였던가?

시형제결혼법에서 시아버지결혼법으로
다시 시아버지 결혼법에서 며느리결혼법으로

또 다시 며느리 결혼법에서 십자가의 피흘림으로 (십자가 스캔들)

물론 부활이란 죽었다가 3일만에 살아나는 것이다.
그냥 부활이 아니라 이 3일이라는 단서가 붙어야 부활이다.
죽었다 다시 사는 것도 불가능한 판국에 더 불가능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는???
고로 기존의 부활사상은 다 거짓이다.

기존의 부활을 거짓으로 판명하는 간극으로써의 부활이다. 그 정도로 지옥과 천국의 간극은 극과 극이다.

왜 3일인가?
기존의 부활사상과의 단절이요 거리요 간극을 벌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부활은 결국 개인부활이다.

집단부활 곧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부활이 아니다.
왜 이스라엘에게만인가?
약속을 부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게만 말이다.
나머지는 모조리 사적인 부활 밖에 안된다.

다른 민족들은 개인이 모여서 집단이라고 우길 뿐이지 개인들의 집합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개인이 없는 집단이다.

고로 인간의 부활 따위는 없다.
인간 개인의 부활은 성경에서 운운 된 적이 없다.

여기에 심지어 이스라엘 조차도 사적인 부활을 운운하는데
사두개인이 그 대표성으로써 발설하게 된다.

어떻게 말야! 죽은 형수가 천국에서 누구의 남편이 진짜 남편이게 되느냐 이다.
첫째 맏이가 본 남편이라서 남편인가? 그럼 둘째는? 아니면 7번째 막내가?

"시형제결혼법은 틀렸다"고 언제든지 이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오해했던 것이다.
구약 자체로 보면 시형제가 아닌 시아버지가 진짜 남편이다.

즉 천국에는 시집 장가 가는 결혼이 없다.
남녀도 없다.
오로지 예수님과의 불쌍히 여겨주심 뿐인
율법의 완성인 사랑 뿐이다.(약자보호법, 이웃환대법-시형제결혼법)

(마 22:23, 개역)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마 22:24, 개역)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마 22:25, 개역)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 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마 22:26, 개역)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마 22:27, 개역)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마 22:28, 개역)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마 22:29,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마 22:30, 개역)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 22:31, 개역)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마 22:32, 개역)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마 22:33, 개역)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이 사랑이라는 실체 뿐인데 언놈이 모호하고 의문인 남녀결혼을 운운하는가? 
남녀의 결혼, 인간의 결혼? 은 언제든지 결혼을 포기하는 이혼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왜 3일이요? 왜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가?
그래서 시아버지 유다에게만 해당된다.
시아버지를 죽여서 다시 3일만에 살리는 것이다.
도장 도장끈 지팡이가 그 증거다.
법적 확정물 탕탕탕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했다.
불의한 것에 충성하라고 했다.

(눅 16: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눅 16:10, 개역)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눅 16:11, 개역)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재물 즉 돈이 아닌 죄인된 우리에게 충성하신 예수님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에 충성하신 예수님 자신의 죽음이다.
곧 믿음 되신 예수님이요 불가능한 믿음의 세계이다.
상대적인 육의 세계와 의문의 죽이는 것과 차이나는 살리는 영의 세계이다.
다말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며느리 다말이 죽는게 아니다.

아무리 불로 화형시켜서 태워본들
안죽는다. 의문만 될뿐이고 의문만 반복될 뿐이다.
죽음이 먹혀들지 않는 다말을 죽여본들 소용이 없다.
죽음이 그 앞에서 의문일 뿐이다.

오히려 산 자 라고 우기는 첫아담인 시아버지 유다가 죽은자이다.
둘째 오난이 죽은게 아니다.
여호와로부터 죽임을 당한 자는 사실은 시아버지 유다이다.
유다를 이미 죽여버린 것이다.
이제 이 시아버지 유다를 어떻게 살릴것인가? 

의문은 죽이는 것이지 살리지 못한다. 

그럼 명료한 것은 무엇인가? 3일의 간극인 부활이다.

정반대로 시아버지를 죽여서 다시 살리는 것이

역설적이게도 며느리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를 살린다.

단절된 약속을
단절된 뚝뚝 끊어진 약속의 
가문을 ... 


얼마나 명료한가?


예수님을 죽일려고 달려든 모든 인간
십자가에 못박아라 못박아라
그러나 정작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자는
모든 인간이다.

그것을 미리 앞당기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다.
진리의 길이다. 저주의 길인데 어떻게 진리일까?
명료하기 때문이다.

이 십자가라는 저주의 길이 아닌 길은 생명의 길이 아니라

지옥길이다.

아니 저주의 길은 천국길이라고 하고
축복의 길은 지옥길이라고 하니

이게 어떻게 전도 되었는가?

이것이 바로 십자가가 밝히 보여주심 때문이다.
얼마나 또렷한가? 명료하기 짝이 없다.

이미 벌써 죽어있는 시아버지를 살리는 자는 며느리 다말 뿐이다.
이미 벌써 죽어있는 인간을 살리실 분은 오로지 예수님 뿐이다.

그 예수님이 십자가를 명료케 하셨다.
모든 죽어있는 인간에게 밝히 보이셨다.

내 손에 죽는자가, 안죽었다고 우기는 죽은 나를 살리는 유일한 분이다.

무엇이 명료한가?
분명 내 손으로 죽였는데
내가 죽여서 죽은 것을 봤는데
다시 살아나버렸으니

반드시 원수 만들어서 등장하는 구원자이기에
십자가 외에는 다 꾀는 거짓이 되는 이유이다.

그래서 십자가만 알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나를 철천지 원수로 만들지 못하는 십자가는 인간이 조작해내는 상상의 십자가일 뿐이다.
진짜 십자가는 나를 못 박는다.
그래서 죽여서
원수로 만들어 죽여서
죄인으로 만들어 죽여버려서
다시 살리는 것이다.

그 증거물이 되는
이스라엘의 자리가
그 처음자리
바로 약자의 자리, 가난한자의 자리

처음사랑의 증거물이
도장 도장끈 지팡이다.
빼도 박도 못하는 탕탕탕 법적 증거물이다.

분명히 닭울기전에 세 번 부인했다
분명히 마귀에게 사로잡힌 포로였고
분명히 마귀에게 눈멀었던 눈먼자였고
분명히 마귀에게 얽매인 눌린자였었다.

이 고아 과부 나그네 자리에서 은혜를 보게 되었다.
이전 것은 지나갔다. 보라 새것이 되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편파적인 관계를 말하신다.

도장 도장끈 지팡이로 아이의 아빠가 너 라고 보여준다
창자국 못자국을 만져보라고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법적 확증물

누가 이 확증물이 있는데 언놈이 꾀냐?
누가 확정된 재판의 판결인 십자가의 용서인 사랑의 법을 언놈이 뒤짚어 엎을래?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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