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땅에 쓱 ㅅㅅㄱ  SSG, 홈을 파는 피용서의 세계 (시편 73편)


성소에서 갈라서게(구별, 거룩, 분리케) 만드는 소자(어린아이)의 세계
(피용서의 세계)

 

악의 형통과 성소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악의 종말 (악인의 멸망과 성소)


 

(73:17, 개역)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마 12:4, 개역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마 12:5, 개역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17:1, 개역)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17:2, 개역)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17:3, 개역)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17:4, 개역)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성전 곧 성전이라는 건물 이전에 성막이라는 이동식 텐트가 있었죠.

즉 테두리를 쳐서 성막의 마당터를 형성하고

그 안에 마당터인 뜰과 성소라는 텐트를 구별하고

그 텐트 안에서 다시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합니다.

지성소는 1년에 딱 한번 대제사장이 대속제일에 단한번 들어가는 겁니다.

 


 

 

 

성전(성막)과 성소의 차이를 검색한 내용입니다.

 

아무튼 시편 73편 기자는

악인의 너무 너무 활개치는 것을 보고 그만 실족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악인이 죽을 때 조차도 고통없이 평안하게 죽고

정작 의인은 아침부터 저녁에 잠자기 전까지 늘 두들겨 맞는 고통 속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데 있어서 그만 낙심이 되니

죄 안짖고 사는

막살지 않는 삶이 그만 헛된짖으로 사는 것이 되지 않는가에 대해

절망감과 함께 몸이 쇠하여 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일소에 단 한번에 해결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철통같은 악의 형통이 한방에 훅 하고 날라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때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성막뜰까지는 죄를 씻는 행위들이 벌어집니다.

그런다고 악인들이 없어지는게 아닙니다.
애굽군사들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성소까지 들어가야 합니다.

 

성소에 들어가면 그럼 악인이 멸절됩니까?

네 됩니다.
바로 구원사건입니다. 출애굽사건의 반복이라고 했죠!!

그런데 이것은 믿음의 문제이지 행함의 문제에서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게 됩니다.

 

요즘은 오히려 악의 팽배 때문에 종교도 가지지 않는 일반현대인들이

오히려 종교인들보다 더 고통스럽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악이 팽배한 것일까? 라는 신정론을 따지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몸에 부딧히는 현상을 격으니까 그런 고민을 하게 되지

몸에 부딧히지 않았다면 생각지도 않았다는 거죠.
악 문제가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닌 전지구적으로 보편화 확대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처음부터 악에 대한 문제로 출발합니다.

이것이 곧 행함이 아닌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다윗언약에서는 이것이 뒤집어 집니다.

 

성막뜰에서까지 죄씻기를 반복하던 자가 바로 제사장들 아닙니까?
제사장은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죄를 제물에 전가 시켜서 번제 등등으로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제사장도 아니면서 제사장만 들어갈수 있는 성소에 누가 들어갑니까?

다윗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럼 다윗 개인이 들어가면 개인의 행동으로 끝나면 되는데

이것이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운명과 연결되는 겁니다.

 

즉 이 다윗이 이 성소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지성소의 휘장 천막이 찢어집니까? 안 찢어집니까?

절대 안 찢어지죠.

 

그런데 다윗이 들어오게 되니까 비로소 지성소 휘장이 찢어집니다.

그 다윗이 바로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다윗 개인이 아닙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결과를 미리 말해버렸는데

 

(12:4, 개역)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2:26, 개역)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6:4, 개역)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9:2, 개역)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사울왕이 다윗을 죽일려고 추격하는 가운데

피신하던 다윗이 배고파서 먹을 것을 찾는데 있어서

제사장만 먹을수 있는 진설병을 다윗이 먹고 다윗과 함께한 자들이 먹게 됩니다.

 

이것은 엄격히 율법에 어긋난 행동이라는 꼬투리를 잡아서

사울왕은 그 아히멜렉 제사장과 또 다른 제사장 80여명 정도를 죽여버립니다.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자들도 모조리 몰살시켜 버립니다. 수백명쯤 죽었겠죠.

 

(삼상 22:1, 개역)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삼상 22:2, 개역)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삼상 22:3, 개역)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을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로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삼상 22:4, 개역)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이 다윗의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삼상 22:5, 개역)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삼상 22:6, 개역)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나무 아래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 곁에 섰더니

(삼상 22:7, 개역) 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로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삼상 22:8, 개역)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삼상 22:9, 개역) 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신하 중에 섰더니 대답하여 가로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었는데

(삼상 22:10, 개역)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식물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더이다

(삼상 22:11, 개역) 왕이 보내어 아히둡의 아들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 아비의 온 집 곧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부르매 그들이 다 왕께 이른지라

(삼상 22:12, 개역) 사울이 가로되 너 아히둡의 아들아 들으라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삼상 22:13, 개역)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로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뇨

(삼상 22:14, 개역) 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모신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삼상 22:15, 개역) 내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은 것이 오늘이 처음이니이까 결단코 아니니이다 원컨대 왕은 종과 종의 아비의 온 집에 아무 것도 돌리지 마옵소서 왕의 종은 이 모든 일의 대소간에 아는 것이 없나이다

(삼상 22:16, 개역) 왕이 가로되 아히멜렉아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네 아비의 온 집도 그러하리라 하고

(삼상 22:17, 개역) 왕이 좌우의 시위자에게 이르되 돌이켜 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의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고발치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삼상 22:18, 개역)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이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이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인을 죽였고

(삼상 22:19, 개역)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삼상 22:20, 개역)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가 피하였으니 그 이름은 아비아달이라 그가 도망하여 다윗에게로 가서

(삼상 22:21, 개역) 사울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인 일을 다윗에게 고하매

(삼상 22:22, 개역)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고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비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연고로다

(삼상 22:23, 개역) 두려워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 하니라

 

 

(73:2, 개역)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73:3, 개역)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73:4, 개역)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73:5, 개역)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73:6, 개역)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73:7, 개역)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

(73:8, 개역)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거만히 말하며

(73:9, 개역)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사울왕은 그야말로 형통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더욱더 힘이 더 축적이 되는 식이고

반대로 다윗왕은 끝까지 쫏겨나고 쫏겨나서 도망치는데 있어서 지쳐버릴 정도입니다.

 

자 안식일은 정작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안식의 주인을 만나는 날입니다.

얼굴과 얼굴의 만남이라고 했습니다.
긍휼과 진리의 만남이요, 의와 화평의 입맞춤입니다.

누가 배고픔을 해결한 상태인 긍휼이고
누가 죄인이 아닌 의인으로써 화평과 입맞춤입니까?

누가 봐도 안식일을 처단하는 사울왕이고
죄인으로 몰려버린 다윗이 아닌 의인으로 하나님까지 자기를 돕는다고 좋아라 하는
성전 안의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인 바리새인이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누가 봐도 의인이고 자칭 의인이라고 하는 사울왕 아닙니까?

아무도 이런 해석에 덤비는자가 없더라 말이죠. 덤비면 위에서 처럼 다 죽여버리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내부에서 조차
주객이 뒤바뀌게 되어버린 겁니다
. 안식교만 욕할 입장이 안되죠.

주일성수를 지키는 놈들도 마귀들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주객이 전도된 보편화된 입장을 다시 역으로 주객을 뒤바꿔 버리는

아니 주객을 뒤 바꿀수 없죠,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객은 있어도 주인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주인이 나타나서 주객이 뒤바뀐 입장을 다시 주객인 뒤바뀌게 하는

십자가사건을 벌림으로써

즉 다윗이 하나님의 성소 들어가게 됨으로써

(시 95:2, 개역)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시 100:4, 개역)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비로소 악인이 멸절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성소에 들어갈게 비로소 나타나는데

 

그 성소가 의인화 되면 한 인물로써 

바로 신약에서는 예수님인데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서

그 동안 엉터리였던 개념들이 전도되었는데

그것을 다시 뒤짚어 엎어버리는 주객전도의 사건인 십자가 사건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것이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면서

너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함으로써

휘장이 찢어져 막힌담을 모조리 헐어버렸다는 겁니다.

(엡 2:13, 개역)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엡 2:14, 개역)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엡 2:15, 개역)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6, 개역)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엡 2:17, 개역)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 2:18, 개역)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 새번역)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엡 2:2, 새번역) 『그 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엡 2:3, 새번역) 『우리도 모두 전에는, 그들 가운데에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엡 2:4, 새번역)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엡 2:5, 새번역)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엡 2:6, 새번역)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엡 2:7, 새번역)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로 베풀어주신 그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장차 올 모든 세대에게 드러내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엡 2:8, 새번역) 『여러분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엡 2:9, 새번역)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엡 2:10, 새번역)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엡 2:11, 새번역)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난날에 육신으로는 이방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뽐내는 이른바 할례자들에게 여러분은 무할례자들이라고 불리며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엡 2:12, 새번역) 『그 때에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외되어서, 약속의 언약과 무관한 외인으로서, 세상에서 아무 소망이 없이, 하나님도 없이 살았습니다.』

(엡 2:13, 새번역)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습니다.』

(엡 2:14, 새번역)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엡 2:15, 새번역)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엡 2:16, 새번역)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 ㉡또는 '우리 둘을'』

(엡 2:17, 새번역) 『그분은 오셔서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에게 ㉢평화를 전하셨으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평화를 전하셨습니다. / ㉢사 57:19; 슥 9:10』

(엡 2:18, 새번역) 『이방 사람과 유대 사람 양쪽 모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엡 2:19, 새번역)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외국 사람이나 나그네가 아니요, 성도들과 함께 시민이며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엡 2:20, 새번역)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엡 2:21, 새번역)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엡 2:22, 새번역)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 ㉣또는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함께 건물을 이루어 하나님께서 거하실 곳이 되어갑니다'』

(히 10:20, 새번역)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은 곧 그의 육체입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의 세계인 소자의 세계입니다.
작은자 가난한자 죄인을 용서하는 십자가의 세계 입니다.

 

그런데 사울왕의 세계는 마치 소자를 연자맷돌을 목에 달아서 바다에 빠뜨리는 것과 같은

지옥의 세계이다는 겁니다.

즉 안식의 주인을 만나는 것보다. 안식일 지키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린 세계는

지옥의 세계 곧 다윗이라는 소자를 연자맺돌을 목에 달아 바다에 빠뜨리는 것과 같은 세계이다는 겁니다.

 

그럼 반대의 세계는 바로 소자의 세계인 용서의 세계인데


안식일 지키기를 따지는게 아니라

진설병을 먹었냐 안먹었냐?를 따지는게 아니라

인간 쪽에서 선함을 들고오는 세계가 아니라


정반대로 지성서 휘장이 찢어져서, 거꾸로 하늘의 세계가 이 땅에 쏟아부어지는

막힌담이 허물어지는

물이 바다를 덮어서
(바다가 물을 덮어버리지, 물이 바다를 덮지 못하는데 용서의 세계에서는 이 사건이 벌어지는 겁니다.이 말도 안되는 불가능이 말이죠.)

(사 11:9, 개역)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 11:9, 새번역)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합 2:14, 개역)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합 2:14, 새번역) 『바다에 물이 가득하듯이, 주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땅 위에 가득할 것이다.』


(겔 47:8, 새번역) 『그가 나에게 일러주었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흘러 나가서, ㉡아라바로 내려갔다가, ㉢바다로 들어갈 것이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 죽은 물이 살아날 것이다. / ㉡또는 '요단 계곡' ㉢사해를 일컬음』


바다에 연자맷돌을 달아 소자를 빠뜨려 티도 안나게 죽이는

그 지옥세계를 뒤업어 버리는(팔을 어긋맞게)

그 연자맷돌에 달려 바다에 빠져 죽은 소자를 건져내는 세계가

바로 지성소의 휘장이 찟어져서 피용서를 퍼붓는 세계가

소자의 세계, 용서의 세계가

반대급부로써 증거 되는 피용서인 십자가 세계이다는 겁니다.


즉 항상 둘이 서로 대립되는 입장에서 서로 맞물려서 증거된다는 구조인 거죠
.

 

(12:1,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12:2, 개역)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12:3,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12:4, 개역)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12:5, 개역)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12:6,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12:7, 개역)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12:8, 개역)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즉 휘장이 찢어져 주인을 만나기 보다


의문의 죽이는 것으로 지성소 휘장까지 갈수 있는 안식일 제대로 지키기 에만 신경쓸 뿐이다는 거죠
.


그러니 방울을 달아서 흔들어 보는 겁니다
. 죽었나 안죽었나.

백프로 죽죠. 의문의 죽이는 것을 가지고 왔으니 말입니다.


그럼 안지켜야 하는데

주객이 거꾸로 되다 뵈니

죽기를 무서워 평생 종 노릇하는 전남편이 살아있으니 못벗어나는 겁니다.

안식의 주인은 관심없고

안식일 지키기에만 미쳐있는 겁니다.
죽든 말든 우리는 1년에 한번 대제사장을 지성소에 집어넣었다 끝.

그것만 내세우더라 말이죠.

 

그래서 이들의 역사 그것도 우려먹는 정통역사가 어떠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코 앞에서

안식일을 막어겨서

막살아 버립니다.

안식일날만 골라서 병자를 고치고 기적을 베푸니까
누구 보라꼬? 약을 바짝 바짝 올리는 겁니다.

과연 지옥의 세계를 발설하는지

아니면 용서의 세계를 발설하는지를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소에 들어갈 때 드러나는 겁니다.

 

(12:4, 개역)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12:5, 개역)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죄가 있다고 돌삐를 들었으니

과연 용서의 세계인지를 아니면 지옥의 세계인지를

땅에 쓱 ~~~ ㅅㅅㄱ SSG 적으니까

지옥의 세계는 들었던 돌삐를 하나 둘씩 내려놓고서는 도망치듯이 물러나 버립니다.

 

그 정도로 지옥의 세계가

연자맷돌로 소자는 다 빠뜨려 죽여버리는 이 촘촘한 세계에

그 바다처럼 넓은 세계에, 아무도 거기에 빠드려 죽어도 아무도 모르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려도 아무도 모르고 그 어떤 양심의 가책도 없는 그런 지옥세계에

낯설기 짝이 없는 용서의 세계가 뛰어들어서 사랑을 확정하십니다.

오히려 이 용서의 세계가 저 넓은 바다 보다 더 크게 더 높게 더 깊게 작동합니다.

 

그들은 지옥의 세계 속에 살면서 의로움을 갖추었다고 우깁니다.

그리고 누가 봐도 지옥자식으로 보이는 세리를 정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의 두 사람중 누가 하나님의 집인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 부합되는자인가를 묻습니다
.

 

(18:9, 개역)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8:10, 개역)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8:11, 개역)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2, 개역)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8:13, 개역)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8:1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18:15, 개역)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8:16, 개역)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8:17,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누가 소자의 세계인 용서의 세계인 하나님나라에 부합되는 자인가를 말입니다.

 

결국 율법 지키는자들의 특징은 지옥의 세계를 주장하는 자로서

자기도 못 지키고 남도 못지키는 것을 가지고

연자맺돌을 목에 걸어서 바다에 빠뜨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도 소자

곧 자기 보다 못 한자에게 말입니다.

참 재미있게도 자기보다 뛰어난 자에게는 절대 안그럽니다.
꼭 자기보다 못한자를 골라서
집요하게 걸고 넘어지는 것이 성화론자들인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래야 자기가 지킨 것이 도드라지고 티가 난다 말이죠.
티가 나지도 않는다면 미쳤다고 지키기를 하겠습니까?

그래서 일부러 내 돈 300만원 띠먹고 도망친 놈을 일부러 코 앞에 지나가게 하는 겁니다.

이것이 일만달란트 용서의 비유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용서를 거부하는 지옥인간을 보여줌으로써
용서가 이렇게 또렷하고 명료하다는 것을 확정하는 겁니다.

용서 받았던 자 마저도 용서치 않음으로써
(원가지도 아끼지 않음으로써 말이죠. 역사를 우려먹는 이스라엘 처음된자를 말하는 겁니다.)
용서를 용서가 치심으로써 용서의 잉여성이 더더욱 풍성해 지는 

그 정도로 명료하게 밝히 보이는 십자가의 용서의 세계이다는 겁니다.

죽는게 무섭냐? 용서의 세계가 더 무섭다!!!


소자 곧 자기 보다 못 한자를 가지고서 자기 의를 내세우는 자의 코 앞에서

그것을 뻔히 알고 주님께서 이 소자의 세계를 맞물리게 해서

어린아이의 세계인 용서의 세계 십자가의 피 용서를 주장하시는 겁니다.

 

율법은 죄를 더하게 하기 위함이지

지키라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왜 난 안되지? 응 안된다는 것을 직시해야
이 율법은 너 지키라고 준게 아니라, 저분이 이루셔!!!! 라고 말하기 위한 몽학선생이다는 겁니다.

저분이 이루신다는 것이 얼마나 기쁘냐 말이죠.

그래서 제가 성경말씀은 마귀 읽으라고 준 것이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나에게 읽혀짐을 당하는 말씀은 없습니다. 거꾸로 입니다. 주객이 뒤바뀐겁니다.


그럼 성도는
? 성경말씀을 읽는자가 아니라

성경말씀에 의해서 읽혀짐을 당하는 자입니다.

그것도 주야로 읽혀짐을 당하는 겁니다.
발걸음도 머리카락도 세고 계심에 당하는 겁니다. 완전 스토커죠.

그러니 천지차이인 3일의 간극이 덮쳐지는 자에게만 이 용서를 누리는 겁니다.

죄인으로써 말이죠.


의와 화평의 입맞춤이다는 겁니다.

(요일 2:2, 새번역)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시니, 우리 죄만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요일 4:10, 새번역)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욥을 예로 들었는데

그 욥이 이 십자가의 피 용서를 보고 난 뒤에

그렇게 자기를 괴롭히던 친구들을 위해서 제사를 드립니다.

용서의 세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욥이 성소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발걸음이 아니라

성소되신 예수님이 걸어와서
성소에 덮쳐진바 되니

욥을 통과해버리니까

구원의 뿔이 욥을 빵구멍 내어버리니까

스캔하듯이 쓱 ㅅㅅㄱ SSG 지나가니까


성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왔다고 일방적인 편파해석을 해버리고서는


악인들은 그만 건드리지 말았어야 하는

예수님을 대신 죽여버립니다.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살인자에 나 자신도 포함된 겁니다.

하도 하도 다윗을 죽이고 싶어서

대제사장을 죽여버린 겁니다.

율법을 어겼다고

그런데 율법을 어긴게 아니라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베풀었던 겁니다.


다윗을 잡을려다가 하나님의 콧털을 건드린 겁니다
.

이것이 하나님의 전에서 벌어지는 사건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무슨 사건이 벌어져야 합니까?


제사
?
번제?
남을 7번 용서하기?

십일조?

안식일지키기?

천만의 말씀

 

그런거 백날 해 본들 죄문제 악문제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내 속의 죄와 악 무슨 수로 해결하시겠습니까?

십자가 사건이 벌어져야 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으로만 해결되는 겁니다
.

마귀가 잡고자 했던 베드로

그 베드로 대신 죽으시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는 예수님

이것이 바로 용서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이 악인의 형통은 배아파 하면서도

정작 이 용서의 세계

소자의 세계

공중의 나는 새를 부러워 하는 세계는 정작 원치 않습니다.

차갑던가? 아니면 뜨겁던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저 나의 유익만 쫏아갈 뿐인 각기 제 길로 가는 양같은 자일 뿐인

막사는 자일 뿐이지만

 

예수님은 또렷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 용서의 세계를

십자가의 피 용서로

악의 심판을 제대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수시로 이 십자가 사건을 벌리십니다.
우리가 원하던 원치 않던 상관없이 수시로 말입니다.

이 용서의 세계가 있다는 것 자체


이것을 기뻐하시면 됩니다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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