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 찾기에 급급 (악마가 인간을 가지고 장난치는 방식)

 

마귀는 원인만을 따지고, 예수님은 결과만을 물으신다.

 

 

sns에서 누구랑 대화중에 영화 [곡성]과 책 [채식주의자]에 대한 평가를

원인 찾기에 급급하다 는 결론이였다.

 

우와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 원인 찾기에 급급!!! 오 대단해 ~~~

 

아직 곡성을 못봤고 책은 더더욱 난독증이라 포기상태이지만

그의 평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침 어머니께서 물으신다.

욥기를 읽다 보니

욥의 세 친구들이 욥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원인 곧 죄를 지었기 때문에

결과 곧 저주가 내린 것이니

 

욥 너는 어서 빨리 회개 하라는 것이다.
(점쟁이, 무당, 천주교 신부 사제, 불교 땡중들, 심지어 목사들까정 모조리 마귀들인 이유다.

이런 원인들이 생겨나줘서 이들은 삥을 뜯는 것이다. 원인 없으면 장사가 안된다.
시편 모세의 노래에서 인생은 원래 하나님의 진노 속에 있기에 허무하다. 그런데 원인을 찾고 있다.)

 

인간의 언어구조와 그로 인한 사고방식은 "원인에 따른 결과이다" 라는 사고이다.

선악적 언어구조이기 때문이다.

 

이 언어관에서 신(하느님)도 조작되어 형성된다.

신도 졸지에 인간의 언어관 즉 사고방식에 따른 신이다.
세상에 이런 조잡스럽기 짝이 없는 신이 어디있나?
국어 문법에 위배되는 신은 신이 아니란다. 언어법칙에 벗어나면 안돼 ~~~~~ 푸하하하 ~~~~

 

이 언어관을 깨뜨리는 것이 십자가이다.

 

욥이 위대한 점은 사실상 욥은 껍데기이고 욥 속의 그리스도께서 위대한 점은

원인이 없는 결과가 덮쳤다는 그 결과로만 일하신다는 것이다.

 

그 결과 때문에

오히려 원인은 삭제될 판국에 놓여졌기에

그 사건 때문에 욥은 이런 일을 격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마귀의 내기(부조리)이지

자신의 내기(장난)가 아니다.
십자가의 자작극이다.

 

그런데 욥의 세친구는 그 연장선상에서 내기(장난) 게임으로 몰아간다.

마치 바리새인이 마귀를 물리친 예수님을

세 가지 시험을 이긴 그 마귀가 잠시 물러갔는데

그 마귀자리를 마치 바리새인이 채우듯이

바리새인은 끝까지 원인을 따지는 식으로 예수님을 몰아세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로지 십자가의 피흘리심이라는 결과만을 주장하신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안식일날 이삭을 먹고,

왜 예수 당신은 안식날만 골라서 병자를 고치는 거요??
왜 자꾸 거룩한 안식일을 어겨서 거룩하지 못하게 안식일을 더럽히는 거요?

응 그건 너 보라꼬??? 너가 그렇게 원인을 따지면서
결과를 무시할 수 밖에 없도록 하기 위해서!!!
원인은 결국 자아로 결집되기 때문에
너 자아로부터 안식을 구할려고 한다.
너희들이 더럽히는 안식을 구할려고 와 우짤래??


너는 너의 가축이 안식일날 늪에 빠졌는데 안 구할꺼니
?

구하죠!

그러니 결과로써 그 가축은 안식일에 안식의 주인을 만난 섬김당하기 라는 결과를 누리듯

안식은 죽음에 빠진 너희를 구하기 위해 있는 거야!!

그런데 오히려 이 말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이들을 부추기게 하는 결집(힘 모으기)을 유도 하게 된다. 


(12:1,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12:2, 개역)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12:3,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12:4, 개역)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12:5, 개역)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12:6,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12:7, 개역)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12:8, 개역)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12:9, 개역) 거기를 떠나 저희 회당에 들어가시니

(12:10, 개역)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2:1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12:12, 개역)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12:13, 개역)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2:14, 개역)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12:15, 개역)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12:16, 개역)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

(12:17,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12:18, 개역)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2:19, 개역)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12:20, 개역)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12:21, 개역)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바리새인이나 오늘날 성화론자들은 율법을 존재로 보고 있다.
존재라는 자기를 기준으로 한 투사로써 확장시켜 율법(말씀)까지도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안식일도 존재로 해석하는 눈 밖에 없다.

결국 그 원인은 자아 이다. 없는 자아를 우기는 방식이다.
원인은 자아다. 삭제된 자아를 주장하는 것이다.

(사단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결과를 더 기뻐하라)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을 존재로 말하지 않고 기능으로 말씀하신다.

결과이다. 원인 없는 결과이다.

그 안식일에 병든자를 고치지 못하는 안식일이 무슨 의미가 있냐 무슨 존재 가치가 있느냐 이다.

그래서 일부러 안식일날만 골라서 고친다. 약을 바짝 바짝 올리는 것이다.

 

저들의 존재 가치가 원하는대로 안식일날이 아닌 다른날에는 안 고치신다.

안식의 기능을 안식일날에 해야하지 않는가?

자 이렇게 예수님은 결과만을 주장하신다.)

 

 

마귀가 예수님의 수 제자 베드로를 드디어 잡았다.

월척이다.

예수님도 할 말이 없도록 만들기 딱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더 자신만만하다.

마귀가 드디어 복음의 결과인 십자가의 용서를 말하기 위한

기가막힌 보충물 역할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마귀의 주장은 원인을 찾는 것이다.

형사는 원인을 찾는 일 밖에 없다.
판결이라는 몫은 자기 기능이 아니다.

 

그러나 판사는 결과만 말할 뿐이다.

예수님은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결과만을 주장하신다.

 

!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더 잘아십니다.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탕탕탕 통과

무시험 합격!

 

세상에나 이런 편파판정이 있을 줄이야? 그런데 베드로는 대박이다.

구원받은 강도가 그래서 대박 중의 대박이다.

그것을 보충하는 역할이 옆의 다른 강도이다.

말도 안된다고

 

당연하다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으니까

처음부터 말도 안된 것이다.
즉 언어관을 깨뜨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바리새인이나 성화론자들이나 모든 종교꾼들의 특징은

원인을 어떻게 해서든 만들어내는데 미쳐있다.

이것이 결과적이다.

그들은 아니야 결과적이지 않아! 원인만 찾으면 수정할수 있어 라고

성화론자들은 지금까지도 자꾸 자기인생을 수정하겠다고 지우개를 들고
지우면서 다시 쓰고 또 지우고 또 다시 쓰고 있다.
문제는 그렇게 지우개로 지우고 수정할수 있다고 여기는

원인인 자아라는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 디 아더스, 식스센스 ~~~~~

 

~~~~ 닭살 돋아 ~~~~~ 오싹하다 ~~~
이미 죽은 귀신이 자기인생을 수정하겠다고 회개를 하겠다는 식이다.

그래서 마귀는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감히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놈 베드로를 잡겠다고 혈안이 되어있다.

자기 죄를 자기가 찾아내서 조져버리겠다고 자기숙제를 펼친다.

 

여기에 굴하지 않는 것이 바로 십자가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꾄다는 말은 십자가라는 결과를 무효화 시키는데 동원되는 모든 것들의 사상이다.

그 사상은 바로 원인 찾기 이다.

 

백날 찾아봐라 찾을수 있는가!!!

 

욥은 결과가 덮쳐버리는 바람에

마귀는 그렇게 똑똑하다는 마귀는

처음부터 지는 내기를 그 게임을 지도록 되어 있는 게임을

참가한 멍청이가 되는 것이다.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

 

원인 없는 결과 때문이다.

 

없는 자는 어떻게 해서든 원인에 집착할 뿐이지

결과 가 있음을 무시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예수님은 원인을 묻지 않으신다. 결과만 물으신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결과를 볼래

아니면 지워버리고 삭제해버린 휴지통에 넣어버린 원인을 복구할래 라고!!!

 

악마에게 장악당한 모든 인간들은 외친다.
없는 원인을 만들어 제대로 살겠노라고!!!

 

나 돌아갈래 ~~~~~~~~ 복구할래 ~~~ 내 인생 돌려도 ~~~~~~~

 

마귀는 원인만을 끝까지 따진다. 뻔한 결과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십자가로 귀결 되는 것을
기여이 자기에게로 귀결하고자 인간도 마귀도 원인만 따진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과만을 선언하실 뿐이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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