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내려라!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라! (마귀와 예수님의 시편 싸움) (시편 91)

 


(마 4:1,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마 4:2, 개역)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마 4:3, 개역)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 4: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4:5, 개역)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마 4:6, 개역)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 4:7,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마 4:8, 개역)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마 4:9, 개역)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 4:10, 개역)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 4:11, 개역)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91:1, 개역)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91:2, 개역)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91:3, 개역)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91:4, 개역)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91:5, 개역)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91:6, 개역)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91:7, 개역) 천 인이 네 곁에서, 만 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91:8, 개역)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91:9, 개역)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91:10, 개역)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91:11, 개역)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91:12, 개역)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91:13, 개역)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91:14,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91:15, 개역)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91:16, 개역)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4:6, 개역)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4:6, 새번역)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 / 91:11;12

(4:10, 새번역)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해서,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다' 하였고 / 91:11; 12

 

 

마귀는 원인만을 따집니다. 결과는 관심 없습니다.

이미 결과는 정해져버렸기에

이 모든 역사는 결과가 정해진 상태이기에

원인만을 따지도록 되어 있는 것이 마귀입니다.

 

모세의 시편을 통해서, 90편이였지요.

바리새인과 실로암 소경의 충돌에서

바리새인은 원인이 되는 자기자신을

마치 자신들이 모세의 제자이다는 것에 중점을 둡니다.

즉 하나님의 진노 바깥에 이미 설정해 버렸습니다.

구원자가 원인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인이 되어서 진노 바깥에 두어
구원을 미리 자기가 자신을 구원해 버렸습니다
.

구원자는 그럼 말라꼬 오냐 말이죠.
결과가 오실 필요가 없게 되는 겁니다.


 

마치 오늘 시편 91편을 가지고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처럼

시편 91편에 기록된 대로 뛰어내려라 천사들이 손으로 받들어 발이 다치지 않게 할 것이다. 라고 합니다.

즉 시편 말씀을 지켜라 그러면 메시아로 봐 줄게 라는 겁니다.

 

웃끼죠

메시아로 안 보면 그럼 메시아가 아니게 됩니까?

무슨 놈의 메시아가 인간의 허락을 받고

인간의 시험을 통과 해야 합니까?

인간의 시험은 곧 원인 있는 결과

말씀 지키면 메시아 이다는 겁니다.

 

말씀도 안 지키는 놈이 무슨 놈의 메시아냐 라는 거지요.

그런데 그 감독을 자기가 하겠데  
시험 감독을 마귀가 하겠데요 글쎄 
그런 마귀에게 인간이 달라붙어서 이단감별사로 일하겠다고 합니다. 웃끼죠 ㅋㅋㅋㅋㅋ

 

율법을 준 이유는 지키라고 준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원인은 있을래야 있을수가 없습니다.

결과만이 등장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물론 여기서도 결과는 인물을 말합니다. 인간 좋으라는 결과는 없습니다.

 

율법의 완성

율법의 결과인 사랑이 오느냐 안오느냐의 문제이다는 겁니다.

그 사랑이 너를 섬기면 결과가 덮쳐진 것이고

그 사랑이 너를 섬기지 않으면 원인이라는 쳇밧퀴에 빠져나올수 없어

의문의 증서에 적힌대로 그 의문에만 맴돌다 끝나는 겁니다.
마침도 없는 거죠.

안식도 없어요.

 

자 그러니 바래새인은 나는 모세의 제자이다고 우기는데

복음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 제발 별세해 주세요 십자가의 죽음으로 사랑을 완성하소서 라고 합니다.

자 이렇게 되면 바리새인이야 당장 돌삐를 들고서는(율법 실행자) 다시 돌삐를 내려놓고

언제든지 도망칠 입장이지만

모세는 정답은 예수님 당신 뿐입니다.

결과는 예수님 십자가 뿐입니다. 라고 외칠때에

 

어딜 감히 마귀가 시편 91편 대로 행하라고 시험할 입장이 되냐 말이죠.

정작 시편 91편은 정답을 외칩니다.

 

(4:7,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즉 마귀에게 정답을 알려줘봤자

마귀의 기능 자체가 정답 보다는 원인만을 따지는 역할이기에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싫어한다는 자체이다는 겁니다.

 

그럼 마귀의 편에 선 인간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결과는 싫어해요.

원인만을 따집니다.

너가 자기 죄인지?

아니면 부모 죄인지?

소경이 된 원인을 따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과만을 외칠 뿐입니다.

이 실로암 소경이 소경이 된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엥 이 무슨 뚱딴지 같은 말씀을?????

 

다시 말씀드릴깝쇼? 귀 쫑긋 세우시고 잘 들으세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입니다.

 

아니 부모 죄인지 자기 죄인지 그거 알려 달라니깐요. 소경된 원인이 뭡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다른 말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이래 되는 겁니다.

 

자 이렇게 원인을 따지는 식이

모든 인간이 마귀에게 장악된 모습입니다.

심지어 유대인은 마귀가 심은 메시아를 기다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원인을 따져야 하니까

그 원인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백날 연구해 보세요

유대인에게는 절대로 메시아가 될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은 원인을 따지니까 말입니다.

 

시편 91편에 기록되었잖아

뛰어내려봐 그러면 너가 메시아인지 아닌지 우리가 가려낼게

어떻게? 시편 91편에 기록되어 있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에 부딧히지 않도록 천사가 손으로 받도록 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참 마귀 참 믿음 좋죠? 성경대로 시험해요!!! ㅋㅋㅋㅋ

이것을 믿음 좋다고 말합니까?

그런데 웃끼게도 인간들끼리 주고 받는 언어 속에서는 이것이 믿음 좋다고 통용이 되요.

안 그러면 소통이 안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마치 실로암소경 쳐다보듯 하더라 말이죠.

아이구 불쌍한 놈 자기죄인지 아니면 부모죄인지 평생을 눈봉사로 살뿐이겠구만!!!쯧쯧쯧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실로암 소경을 불쌍하게 쳐다보고 있는 너가 더 불쌍하구나 쯧쯧쯧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럼 마귀가 가만히 안 있죠.

그래 너 예수 우리 손에 죽어봐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자작극에 말려드는 마귀의 모습 곧 인간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그 대표성을 유대인이 보여주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라는 어리석은 지혜가 펼치는 결과입니다.

단 한 놈도 이 지혜에서 벗어나는 인간 없습니다.

여기에 다 말려들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 그럼 시편 91편을 찬찬히 살펴봅시다.

이미 결론을 미리 말했지만 말이죠.

 

얼마나 웃끼는 것이

시편 자체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가지고서 마귀는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으니 기가찰 노릇이지요.

마치 다윗을 가지고서 다윗을 시험하겠다는 식입니다.


즉 이 시편을 외우고 있는 모든 자들이 자신이 다윗이고

그 다윗의 자손으로서 예수님이 온다고 했을때에

그 다윗의 자손 예수님을 과연 주라고 부를까요? 아니면

내가 니 할배다 라고 우길까요? 이게 농담인 듯 보여도

실제로 모든 인간들이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내가 니 할배다 라는 주장과 같은 식이다는 겁니다.

나는 모세대학 나왔는데, 모대 나온 여자야! 니는 어디서 굴러온 뼈다귀야 라는 거죠.

 

말씀이 육신이 되니까 비로소 모든 인간은 시편을 외우고 믿고 행하고 등등으로

너 몇 살이야 라고 인간세계에서나 먹혀들 이야기를 예수님에게 들이대는 겁니다.

 

자 먼저

지존자 또는 전능자가 나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기존의 하나님을 쪼개어서 등장하는 개념이 지존자요 전능자입니다.

지존자는 시편 90편 모세의 노래에서도 언급 되었듯이

원수 문제를 해결하는 입장에서의 지존자입니다.

이미 결과로서 지존자의 등장입니다.
그래서 벌리는 전쟁이 원수와의 전쟁이 바로 출애굽전쟁입니다.

 

그리고 전능자 라고 하면 우리는 나오미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전능자는 나오미를 괴롭게 하는 하나님입니다.

즉 상대적인 나오미 남편의 하나님은 가짜다 라는 거죠.

오죽하면 나오미 기쁜자를 괴롭해 해서 마라 라고 이름을 갈아치우냐 말이죠.

전능자를 만나면 이름이 갈려요 갈려

우리가 내가 성을 간다 라고 그런말을 하잖아요.

손을 장 지진다 라고

즉 때려죽어도 자기 말이 옳다 틀리면 내 성을 간다 라고 할때에

이름을 갈아버리게 되면

역전의 상황이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결국 내가 알던 그 하나님이 아니네 라는 겁니다.

완전 정반대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힘이 있을 줄 알았는데

쥐뿔도 힘이 없네

어 그런데 나의 이름을 갈아치는데 있어서 만큼은 최고로 강한자

전능자 라는 겁니다.

한마디로 스토커 라는 거죠.

다른 것에는 하나님이 아예 없어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무리 불러도 대답없는 너 예요 김종서 대답없는 너

 

그런데 내 이름 문제에서 만큼은 저 꼭두새벽부터 달려와서 지근 지근 밟더라 말이죠.

성을 가는데 이름을 가는데 도사야!

전쟁의 도 틴 신이 바로 여호와이듯이!!!

 

그럼 이름이 뭔데 그렇게 예민하게 구시느냐?

이름을 왜 가시냐 하면

이름을 갈아서 다른 이름으로 교체하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나오미에서 마라로 바꾸었다는 것은

야가 바로 이름이 이스라엘이다 라는 겁니다.

다른 말로 야 이름이 3일 이다는 겁니다.

무슨 다큐 3일도 아니고 ㅋㅋㅋ

 

야 이름이 3일이예요. 날짜 아니죠. 종말이다 라는 겁니다.

 

야 삼일아 !!!!

 

이 삼일이로 만드는데 도사이다는 겁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자 말입니다.

 

뭐 그렇다 치자 말이죠.

그런데 그게 뭐 그리 중요한데???

 

이 죽었다 다시 살아남에

모든 네트워크가 역여져 있다는 겁니다.

죽을 때 우리는 그냥 죽는 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죽일 때 모든 인간들이 다 달려들어야 했듯이

삼일이 우리도 그냥 죽는 법은 없고

원수와 마귀와 다 역여져서 죽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럼 그것으로 끝나느냐?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는 간극이 또 있습니다.


다시 살아남에 있어서

모든 인간들이 어떻게 해서든 방해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가 살펴봤습니다.

부활 소식을 못 퍼트리도록 방해해야 하니까 말이죠.

그러니 이런 연결망 네트워크

인간이 이 연결망에 의해 저마다 자기역할을 그 기능대로 발현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마치 아기 예수님을 죽일려고 온 동네가 들썩 들썩 했듯이.
모세때도 이스라엘의 아기들을 죽일려고 들썩 들썩 했듯이 말입니다.
.

 

참 신기하죠?

안 역여진 자가 없어요.

즉 독자적인 존재는 없어요.


심지어 마귀도 보충물로 동원이 되는 판국인데

그런데 그 마귀가 선한일 하겠다고


시편
91편대로 예수님 당신이 하나님 아들 맞다면 시편 91편에 기록되어 있기를

뛰어내려도 안 다친다고 하던데요?????? 함 뛰어보세요.


이게 과연 마귀가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기를 바라는 모습입니까
?

아니 성경대로 주장했잖아요. 그럼 마귀가 선해집니까?
성경대로 주장하면 마귀적이지 않나요?
오직 성경대로 라는 구호를 외치는 자 중에 거의 백프로가 원인을 따지는 자들 아니던가요?

 

포도원 농부 비유가 그래서 결과적입니다.

그러나 원인을 따지는 것은 마귀입니다.
주의 선하심은 딸랑 30분 일한 자에게 베풀어질때에 그 선하심을 마귀는 원인으로 따지는 겁니다.


작년이였나 자주 언급했는데

원인 있는 결과는 없다고

원인이 삭제 당하는 세계가 말씀의 세계이다고.


싸기지 없는 마리아는 결과를 택해서 좋은 것을 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언니 마르다는 시근든 모습처럼 많은 일로 근심한다 말이죠.

그럼 도와주면 될 것 아니냐 말이죠. 돕도록 야단치라 말이죠.

그런데 좋은 것을 택했다 라는 결과적인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즉 빼앗기지 않는 일을 택하라 라는 겁니다.

결과를 미리 앞당겨 누렸다는 겁니다.

 

(10:42, 개역)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내용이 어려워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이 울고있는 여인네들을 향하여 싹 뒤돌아 보면서 외치시는 말씀을 통해서 해소가 되었다고 했잖아요 중고등부때

여인네들이 예수님이 불쌍해서 우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울고 있는 여인네들을 향해서 더 우십니다.

니 아들 우짤래 우짤래 라고 ~~~~

 

끝을 미리 앞당겨서 보는 시선인 종말이를 선택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 자식을 위해서 울라고 하시는 겁니다.

 

딸랑 30분 일한자에게 하루 삯을 주니까

얼마나 선한 분인지 참 선하셔 라고 추켜세워 아부할때는 언제고

정작 12시간 다 일해도 같은 동일한 임금을 주니까 악하다 라고

갑자기 바꿔버리더라 말이죠.

자기가 선택한 선한자가

자기의 원인에 부합되지 않으니까 바로 악한주인으로 바뀌어 버리는 겁니다.

원인을 자기에게 두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한 결과가 아닌 이상 리셋해서 다시 원인을 돌릴려고 과거를 따지는 겁니다.


그럼 원인을 예수님에게 두면 끝까지 예수님을 선하게 볼수 있을까요
?

못 봅니다.

 

원인 자체를 없애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원인 없애기는 불가능해요.

인간의 신체 몸 자체가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원인을 따지도록 되어 있는 육이니까 말입니다.

 

원인을 인간이 없애버리겠다는 자체가 또 원인이 되니까 말입니다.

 

답은 딱 하나 예수님 제발 십자가에서 죽어 주시옵소서입니다.

즉 결과를 덮쳐지게 해 주옵소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시간의 하나님의 진노 속에 있는 허무의 인생이다는 겁니다.
진노 속에 있지 않으면 누가 과연 주의 이름을 부르겠냐 말이죠
.

 

인간은 원인을 찾는 이상 절대로 예수님을 선하다고 못 봅니다.
십자가의 죽음도 나를 위한 십자가의 죽음이어야지 남을 위할 꺼면 반대한다 말이죠.
.


예수님이 무조건 선하심이라는 결과가 덮쳐져야만 선하게 보이지

안그러면 예수님의 실족케 하심에 다 분노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도리어 우리를 분개케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아벨의 죽음이 결과적인줄도 모르고 원인을 가인은 하나님께 따지는 겁니다.
왜 내 제사 안 받냐 말이죠. 받으면 안 죽일텐데 날 건드리고 화나게 만들었으니 그 원인을 나에게 묻지 말라 라는 겁니다.
내 제사 안 받은 것은 하나님이다 말이죠. 원인을 좋든 나쁘든 끝까지 원인만 알리바이만 형성하는 겁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마치 싸가지 없는 마리아의 좋은 선택처럼

악한 포도원농부의 정반대의 모습처럼

베테랑 어부가 물고기 잡는 어업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물이 찢어지게 될 정도로 물고기를 잡게 되니까

물고기를 잡는데 정신팔린게 아니라

놓아버립니다.

그리고 하는 말 아주 아주 역설적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캬 이 말은 나는 결과를 만났다 라는 겁니다.

 

원인을 따지는 베테랑 어부가

원인을 손 놓아버리고

결과를 만나서 비로소

죄인임을 외친다 말이죠.
참신기하죠 반드시 죄인임을 외쳐요.

그러나 성화론자는 의인임을 외치는 겁니다. 원인을 따지기 때문이죠. 절대 죄인임을 못 외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정말 신비하지 않습니까? 왜 죄인임을 외치는 거죠? 예수님이라는 결과 때문에
구원자 라는 결과 때문에 이제 나는 없어져도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의인이 아니다 죄인이다는 말은 나 라는 존재 원인은 그 앞에서 있으나 마나 한 무능한 존재일 뿐이다는 겁니다.
결과라는 인물을 만남을 당해 버리면(당한다는 의미는 예수님의 대상물, 결과의 대상물이 되어버려 눈이 멀어버리게 됐다는 거죠)
그 앞에서 멋도 모르고 의인이 되겠답시고 말씀지키고 스데반집사 죽이고,
이단 몰아내고, 예수쟁이 이단들 잡겠다고 설쳐대던 그 모든 일들인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다 허사이다는 겁니다.
모세가 인생은 허무하다고 한 이유입니다. 의미를 둘려고 하니까 말이죠. 백날 원인으로 만들어도 허사인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자 라는 결과를 만나버렸다 내 인생 이제 끝내도 여한이 없음 이라는 겁니다.

죽어도 상관 없음 이라는 겁니다.

싸가지 마리아가 왜 좋은 것을 선택했고

빼앗기지 않는다고 했지는 아시겠죠

 

육신의 정욕 해결하기? 포기하시면 해결 됩니다.

육은 자꾸 원인(기념비)이 되기를 원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그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고자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원인을 없애 버리고

원인을 없애고 삭제하는 결과로써 오셨다 말이죠.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어떤 분이 육신의 정욕을 어찌하냐고 물었잖아요

해결 못합니다. 자꾸 원인을 손 볼려고 손댄다 말이죠.

백날 원인이 되는 나를 손 본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결과만 선언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원인은 과거의 나입니다.

과거 백날 리셋해서 타임머신타고 다시 다시 다시 해 본들

소용없어요 나비효과 라는 영화처럼 오히려 더 꼬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라는 결과는 아예 원인을 삭제해요.

원인을 삭제 하면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야 너가 나를 사랑하냐? 라는 것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찾아와 주심

 

너 육신의 정욕을 왜 못 이겼니? 이거 안 따집니다.

 

베드로야 너 나를 사랑하니 라는 물음은

너 베드로야 나 좀 사랑해줘 라는 말이 아닙니다.

너에게 달렸어 라는 말이 아닙니다.

 

정반대죠.

너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를 사랑했다 이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대답이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라고

네 제가 주님 사랑합니다가 아니라

주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잘 아시면서 라고

에이 에이 찌찌뽕 주님이 벌리신 자작극이네요 라고

뻔뻔스럽게 주님이 더 잘아시면서 와카십니까 라고 과잉애정관계를 표출하는 겁니다.

손발이 척척 맞아

주님이 과잉하시니까

베드로도 과잉으로 손바닥을 치니

짝짝 죽이 잘 맞아요.

 

혼자 베드로 잡겠다고 겨우 잡아왔다고 설레발 쳤던 놈은

마귀죠.

좋아라 했지 수제자 베드로 월척 잡았다고
아주 아주 나쁜놈 베드로 이 나쁜놈, 예수님이 지 한테 해준게 얼마나 많은데 배신 때리다니 씩씩 거리면서 잡아왔다 말이죠.

그런데 베드로 좋게 하는 꼴이 된 겁니다.

 

소경실로암 좋게 하는 꼴이 된 거다 말이죠.
실로암 소경이 자기를 고친 분의 이름을 몰랐는데 알려준 꼴이다 말이죠.

 

그러니 말씀을 동원해서라도 예수님을 시험하겠다는 마귀는

끝까지 무시험 합격이라는 결과를 싫어하도록 되어 있어요.

끝까지 원인을 따지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무원인이란 있을수 없다 말이죠.

 

그 원인을 따지는데 있어서

오히려 말씀이

시편 91편이 원인을 따지는 마귀에게 더 부추기도록 해 ~~~~

마귀는 자기가 시편 91편을 쥐었다고 본 거죠. 천만의 말씀

 

시편 91편이 마귀를 쥐고 있는 겁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설레발을 치는 겁니다.

마귀는 좋다고 이거 가지고 시험하면

될 줄 알았다 말이죠 그런데 도리어 당하는 꼴이 되고 만 겁니다.
마귀 또한 말씀을 보충물로 사용하더라 말이죠.
기능이 원래 그래요 원인을 따질려면 말씀을 보충물로 사용해야 거짓선지자 노릇을 하도록 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

욥기서에서 마귀가 하나님의 내기에 걸려드는 모습과 똑같아요.

 

여려분 욥기서처럼 마귀가 욥에게 다가왔듯이

나에게도 다가오면 우짜나 걱정하시는 분들 의외로 많아요.

걱정마세요

결과적으로 나온 말씀입니다.

말씀이 마귀를 이용하고 있지

마귀가 백날 말씀 이용해 본들

말씀으로 말씀을 유혹하고 시험하겠다는 짖 밖에 안됩니다.

만약 여러분도 그런 걱정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꾸 원인을 따지는 마귀와 같은 겁니다.

몸이 아플까봐 걱정하는 것은 본능이니 어쩔수 없지만
(이것도 원래 하나님의 진노 속에 있는 인생이라 허무해서 그런거지, 원인이 아닙니다.
결과로써 인생을 허무케 했다 말이죠. 이래나 저래나 불뱀에게 물린 입장 뿐입니다.
약 바르면 이라는 원인 소용없어요.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는 결과가 덮쳐지느냐 의 문제 입니다.) 
그 보다 더 심각한 것은

마귀처럼 말씀으로 말씀을 유혹하는 식과 같다 말이죠.
예수님으로 예수님을 유혹하는 겁니다.
시편으로 시편을 시험하고 있어요. 이 멍청한 마귀가 말입니다.

그러니 결과적(예수님)으로 보도록 되어 있는 욥기입니다.

 

원인을 따지는 사고방식인 성화론자들 사고방식이면

욥기로 장난치겠다는 것과 같은 거죠.

나는 어려운 욥기를 아는데 너는 모르지 라고

어떤 마귀들린 장로와 같다 말이죠.

원인을 따지니까 자꾸 허물을 캘려고 약점을 찾을려고 하는 이유가 그런 겁니다.

 

시편은 예수님입니다.

시편이신 예수님을 가지고서 예수님을 시험하는 멍청한 자가 세상에 어디있습니까?

그게 마귀입니다.

원인을 따지는데 미쳐있는 것이 인간이거든요.

 

그런데 모든 인간이 이 마귀에게 장악되었습니다.

그래서 건방지게 시편을 가지고서 마귀랑 똑같이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기도들 아닙니까?

특히 새벽기도에서 난리났어요 목사는 흐뭇해 합니다.

늙은 여전도사와 늙은 권사가

누가 누가 더 예수님을 시편으로 시험하나 라는 기도싸움을 벌려요 글쎄 ~~~~~

목사는 그 싸움을 더 부추겨요.

그래놓고 나중에 어차피 욕하죠.

속았어 속았어 한국드라마 아니 한국 목사에게 속았어.

 

얼마전에 110년 된 교회가 목사에게 고소당했다고 ㅋㅋㅋ

양쪽다 원인을 따지다가 서로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겁니다.

 

(91:2, 개역)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91:3, 개역)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91:4, 개역)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지존자 이기 때문에

전능자 이기 때문에

결과 때문에

없던 원수도 끌어모아서 무엇을 일으키겠다?

네 맞습니다. 출애굽입니다. 이 출애굽 사건은 결과로 인한 전쟁입니다.
원인 아닙니다. 원인으로 인한 구원전쟁이 아니다 라는 이유 때문에
원수를 일부러 일으키는 겁니다. 심지어 강퍅케 하셔요. 참 부지런도 하시죠. 이것이 밤의 주의 성실함이다고 했습니다.
원수의 주장이 무엇때문인가를 보여주심이다는 거죠. 그래서 바리새인을 일으켜야 합니다. 원수를 말입니다.

(시 91:5, 개역)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시 91:5, 새번역) 『그러므로 너는 밤에 찾아드는 공포를 두려워하지 않고, 낮에 날아드는 화살을 무서워하지 않을 것이다.』



?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전능자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말이죠.

 

자작극이지요.

 

(91:6, 개역)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91:7, 개역) 천 인이 네 곁에서, 만 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91:8, 개역)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91:9, 개역)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로 거처를 삼았으므로

(91:10, 개역)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91:11, 개역)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91:12, 개역)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91:13, 개역)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91:14, 개역)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91:15, 개역)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91:16, 개역)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출애굽때의 이스라엘을 건지시는 모습입니다.

단 한 명도 해를 입지 않았다는 겁니다.

원수들의 손에서 넉넉히 건졌듯이 말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무기도 쥘 필요가 없었습니다.


시 91:8, 개역) 『오직 너는 목도하리니 악인의 보응이 네게 보이리로다』
 

오로지 그들은 뭐만 쳐다봤다?

 

(14:10, 개역)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4:11, 개역)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14:12, 개역)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4:13, 개역)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14:14, 개역)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14:15, 개역)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

(14:16, 개역)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행하리라

(14:17, 개역)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14:18, 개역) 내가 바로와 그 병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만 쳐다보는 것 밖에 할게 없다 말이죠.

결과만 쳐다 보는 겁니다. 결과만

곧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만 쳐다 보라 말이죠.

 

그런데 마귀가 이 부분을 역설적으로 다시 예수님을 시험하는데 이용합니다.

이것은 마귀가 물러난 뒤에 그 빈자리를 바리새인들이 채워서 시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적을 보여달라 라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요나의 표적이 뭡니까?

결과입니다.

 

요나도 거부했던 결과입니다.

요나는 원인을 따지면서 빨리 이스라엘을 회개케 하는 게 바쁜데

그 원인을 빨리 수정하고 회개시키기 바쁜데

왜 쓸데 없는 니느웨 백성을 돌이켜 회개시켜서 뭐하게요?

 

빨랑 30분 일한자 하루 일삯을 줘서 뭐하게요?

뭐하기는 뭐해 너 요나를 실족케 할려고 하지

졸지에 선함이라는 의미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나는 때려죽어도 이런 불합리한 일에 동원이 되기 싫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선하심은 이미 결과적으로 덮쳤습니다.

누가 무조건 틀린 겁니까?

원인을 따지겠다는 하는 요나가 틀린 겁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나 라는 원인 삭제 하시고 아버지의 뜻인 그 결과대로만 하옵소서

 

주로 원인을 따졌던 모세 아브라함 특히 욥

요나 엘리야

이들에게 예수님의 답변은 딱 이것 뿐입니다.

 

왜 광야에 비를 내리는 줄 아느냐입니다.
생명이 있기를 합니까?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는데 즉 원인이 없는데 왜 비라는 생명수를 왜 주냐 말이죠. 죽음 뿐인데.

 

모르지? 모르면 가만히 시키는대로 해입니다.

 

예수님은 원인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나의 원대로 하지 마옵시고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원인은 삭제 되어버린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안되는 판국에, 예수님도 삭제되는 판국에 우리인들 ~~~~~~

 

그런데 아버지의 뜻이

결과가 모든 허물을 다 덮고도 남습니다. 죽음 뿐인 광야에 생명수를 왜 비로 뿌리겠습니까?
너도 원래 죽음에서 못 벗어나는 자이다는 겁니다.

광야에서 마저 비를 내리시는 그 긍휼하심이 매마른 광야도 다 덮고도 남는다는 겁니다.

우리는 안되면서 자꾸 원인을 따진다 말이죠.
원인을 제대로 따지면, 원인만 밝혀내면 죽음 해결 할수 있냐 말이죠
.
손때라 말이죠.

그분이 알아서 하신다 말이죠.

 

자 그러니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는 겁니다.

그 증거가 마귀가 마침 그렇게 보여주잖아요.

시편이라는 예수님을 가지고서 예수님을 시험하잖아요.

요나가 그랬듯이

우리 또한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표적을 바라고 있지

우리의 멍청하고 어리석은 모습을 들추어내는 요나의 표적을 원치 않는다 말이죠.

 

십자가는 내가 나를 못박는 겁니다.

분명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는데

말려들었어

내가 내 손을 못박고 난리야

분명 예수를 못 박아라 라고 외쳤건만

이게 요나의 표적입니다.

 

이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어요.

이 결과 뿐입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꾀는 놈
자기 자신 밖에 없습니다
.


남 탓 할 입장이 못되요
.

남도 같은 짖을 하고 있어요.

여기서 남은
같은 욕망인 타인의 욕망으로써 같은 아담인 첫아담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든 첫 아담은 남 탓합니다. 

마지막 아담 예수님을 탓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탓 할 입장이 못되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자작극을 벌리시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입니다.

모든 똑똑한 인간이 안 말려들고는 못 배기는 요나의 표적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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