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을 허는 복수의 하나님과 십자가 지혜 (시편 94)

 

(94:11, 개역)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고전 3:20, 새번역) 또 기록하기를 "주님께서 지혜로운 자들의 생각을 헛된 것으로 아신다" 하였습니다. / 94:11(칠십인역)

 

(고전 3:19, 새번역)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신다" 하였습니다. / 5:13

 

 

(고전 3:16, 개역)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17, 개역)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 3:18, 개역)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전 3:19, 개역)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고전 3:20, 개역)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고전 3:21, 개역)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고전 3:22, 개역)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고전 3:23, 개역)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94:1, 개역) 여호와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보수하시는 하나님이여 빛을 비취소서

(94:2, 개역) 세계를 판단하시는 주여 일어나사 교만한 자에게 상당한 형벌을 주소서

(94:3, 개역) 여호와여 악인이 언제까지, 악인이 언제까지 개가를 부르리이까

(94:4, 개역) 저희가 지껄이며 오만히 말을 하오며 죄악을 행하는 자가 다 자긍하나이다

(94:5, 개역) 여호와여 저희가 주의 백성을 파쇄하며 주의 기업을 곤고케 하며

(94:6, 개역)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를 살해하며

(94:7, 개역)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생각지 못하리라 하나이다

(94:8, 개역)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94:9, 개역)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94:10, 개역) 열방을 징벌하시는 자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자가 징치하지 아니하시랴

(94:11, 개역)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94:12, 개역) 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94:13, 개역)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에 벗어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

(94:14, 개역)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 기업을 떠나지 아니하시리로다

(94:15, 개역) 판단이 의로 돌아가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좇으리로다

(94:16, 개역)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나서 행악자를 치며 누가 나를 위하여 일어서서 죄악 행하는 자를 칠꼬

(94:17, 개역)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혼이 벌써 적막 중에 처하였으리로다

(94:18, 개역)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94:19, 개역)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94:20, 개역) 율례를 빙자하고 잔해를 도모하는 악한 재판장이 어찌 주와 교제하리이까

(94:21, 개역) 저희가 모여 의인의 영혼을 치려 하며 무죄자를 정죄하여 피를 흘리려 하나

(94:22, 개역)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나의 피할 반석이시라

(94:23, 개역) 저희 죄악을 저희에게 돌리시며 저희의 악을 인하여 저희를 끊으시리니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 저희를 끊으시리로다

 

 

복수(보수)라는 개념은 구원이라는 의미와 동일합니다.

보수 수원수, 보응 보복 갚을 보

원수들에게서 원수를 파 하고 건져낸다는 겁니다. 앙갚음

 

그러니 구원 얻는 우리에게는 은혜로운 의미입니다.

시편 94편에서 복수 라는 의미가 말입니다.

 

그런데 종교꾼들은 이 복수가 은혜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편하지요.

 

왜 불편한고 하니 원수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이들이 오히려 자신들이 불편해하는 원수에 대한 살인의지가 더 강하다는 역설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은혜를 모르는 것을 더 뛰어넘어서 은혜를 거부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활동에서 우리는 유대인 바리새인을 통해서 은혜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았듯이 말입니다.

즉 구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거부합니다.

 

바로 이 부분이 정말 중요한데 뭐라 말로, 한계적인 언어로 표현하기가 부족한데

아무튼 그런 자들이 교회를 다 차지하고 있고

그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 유사 은혜를 만들어서

교회운영이라는 명분아래에 원수짖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시편 94편에 대한 내용을 검색하다가 바로 이런 사고방식을 잘 보여주는 이단사이트를 보니까 그저 교회를 훼방하는 자는 가만히 두질 않겠다는 식으로 시편 94편을 해석을 하더라 말이죠.

 

그런데 바로 그런자를 예를 들어야만 오늘 시편 94편을 설명하기가 딱이더라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런 이단들뿐만 아니라 오늘 시편에서도 다루어지는 이스라엘 조차도

역시나 구원을 즉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이 원수를 갚는다 라는 표현이 불편한 겁니다.

 

실제로 시편대로 오신 예수님은 이 시편을 자꾸 이방인보다 개같은 원수 이방인 보다

이스라엘 유대인을 향해서 실상을 나타내보이시니까

유대인들이 원수들의 반응과 동일하게 반응을 나타내니

예수님은 유대인에게만 가짜 도금을 끍어내는 발언을 서슴치 않고 하시더라 말이죠.

? 복수의 하나님이니까 말입니다.

구원의 하나님이니까 말입니다.

 

누구로부터 건지겠다?

원수로부터

유대인으로부터 건지겠다 말이죠.;

오늘날로 치면 교회사람들로부터 구원시키겠다는 겁니다.

소위 구원자로 나서는 그 구원자들로부터 구원을 구원시키겠다는 겁니다.

아마 교회사람들 다 돌삐 던질껍니다.

그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결국 원수 갚기에 대한 유대인들의 불편한 심경은

오히려 예수님을 원수로 삼아버리는 겁니다. 그것이 십자가 처형으로 나타난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뻔히 예수님이 아시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부추깁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 건드리기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들의 가장 큰 결정적인 우상인 성전을 건드리는 겁니다.

 

하여튼 교회 건드리면 인간들은 미쳐요 미쳐

교회 뿐이겠어요?

조직 아닙니까?

절 성당 예배당 메카? 이슬람 사원을 메카라고 하나요? 사원이라고 하나요? 뭐 사원이라 하면 되겠죠.

하여튼 불교의 절, 천주교의 성당, 기독교의 교회, 이슬람의 사원

점쟁이의 철학관, 유대교의 성전

이거 건드리면 난리 납니다 난리 나

 

교회에 덕이 안된다고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덕 될 리가 없지요.

덕이 되면 예수님을 죽일 하등의 이유가 없겠지요.

자기 유익에 따라 좌우되는 인간이니까 말입니다.

 

인간은 별거 없습니다. 성전 건드리면 바로 반응합니다.

그렇게 순하고 착한 티를 온갖 내던 인간도 성전 건드리면 바로 마귀로 돌변합니다.

그게 진짜 그들의 얼굴이니까 가면을 벗어던지고 달려드는 거죠.

종교없는 자는 그러면 괜찮다고요?

아니죠. 곧 몸입니다. 몸 건드리면 가만히 있을 인간이 어디 있겠어요!!

 

뭐 예수님의 죄목이 세가지라고 하는데 결국 결정적인 것 하나는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짖겠다 이겁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그렇게 할 일이 많지 싶은데

딴거 한 것 없이 오로지 이 일에만 집중하고 가셨습니다.

 

아니다 십자가에서 죽으러 오셨다.

네 제 말이

그 말이 곧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짖겠다는 말이다는 겁니다.

 

왜 많고 많은 일 중에 오로지 이 일에만 집착하셨냐 말이죠.

 

그런데 인간의 인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의 인생을 살펴봐도

인간은 딱 하나 밖에 하는 일이 없습니다.

성전 짖기

이거에 미쳐 있습니다.

말이 성전이지 오로지 바벨탑 짖기에 미쳐 있어요.

성전으로 둔갑한 바벨탑이다는 겁니다.

양의 탈을 쓴 늑대처럼 말이죠.

구원의 문을 제작하기에 미쳐 있어요.

요즘도 노아 방주 짖겠다는 미친 놈들이 많잖아요.

인간은 자기 구원에 미쳐있어요 무신론자도 마찬가지 오로지 자기구원밖에 몰라요.

 

아니 제가 보기에는 그런 놈들은 눈에 확 띠게 티는 내어서 금방 보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사실상 교회에 미친놈들이다 말이죠.

그 말은 곧 목사 말에 다 속아넘어가는 자들 밖에 없더라 말이죠.

목사가 그것으로 밥 빌어먹고 살거든요.

교인들은 앵벌이야

목사가 시키는대로 해서 앵벌이처럼 살다가 상납하는

목사 밥풀떼기로 살더라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는 이거 그냥 못 넘어가는 겁니다.

반드시 보응하는 십자가다 말이죠.

그게 사랑입니다.

죄를 그냥 보고 지나치는 것이 사랑이 아니잖아요.

물에 빠진 자를 그냥 보고 지나치는 자 레위인 그리고 제사장은 반드시 그냥 지나쳐야 하는데

? 돈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선한 사마리아인은 곧 유대인의 원수인 사마리아인은 물에 빠진 자를 절대 그냥 못 지나치는 겁니다. ?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원수 갚기입니다.

 

물론 마귀들도 유사원수갚기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 기준입니다.

이 말은 말만 조직이요 집단이지

개개인이 모여서 이룬 집단입니다.

사조직 아닙니까

그래서 사실상 개인복수입니다.

 

그러나 오늘 시편 94편에서 말하는 원수갚기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개인 원수 없어요.

여기에 이스라엘이 동원이 되는 겁니다.

말이 동원이 되는 거지 사실상 이스라엘은 미끼입니다.

 

결국 시편 94편은 출애굽을 재현하는 겁니다.

구약은 전부 출애굽을 재현하는 사건입니다.

? 그것이 곧 출애굽이 바로 구원사건이니까

이것이 신약에서는 십자가사건이고 십자가 사건만을 반복하는 겁니다.

 

에이 하나님 이제 출애굽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애굽이 없다니깐요.

언제적 이야기인 유행지난 이야기를 하고계셔

 

아이고 십자가 고만 우려먹어라

그 십자가 사건은 2000년 전에 벌어진 일인데 아직도 우려먹나

고만 해라 마이무따 아이가

 

과연 지나갔을까요?

오냐 과연 지나갔는지 똑같은 상황을 만들어 주마 라고

갑자기 이스라엘이 망하고 공중분해 되고 포로되어 바벨론에 잡혀 갑니다.

그리고 무슨 놈의 약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70년이 지나면 다시 되돌아 온다고 합니다.

아니 되돌아 올 것 같으면 말라꼬 바벨론 포로 당하도록 하느냐 말이죠.

 

주님이 하시는 말

내 말이 ~~~~

그래 그게 내가 할 말이다.

 

그 애굽이라는 원수의 속성이 너희 이스라엘에게 있기 때문에

그 원수 속성을 일으켜서 그 원수를 갚는 일인 출애굽사건을

구원사건을 일으키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랑을 확정 하겠다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용서를 확정 시키겠다고

일만달란트 용서를 해 놓고서는

다시 내 돈 내돈 내돈~~~~ 300만원 띠먹은 놈

일부러 코 앞에지나가도록 해서

그 어떤 인간도 용서 받은적이 없도록 하심으로써

용서를 극대화 시키는 원리이다는 겁니다.

 

구원을 극대화 시킨다는 겁니다.

 

분명히 결과적으로 용서받은 자는 없어요.

원가지 유대인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세상사람 다 알잖아요 유대인은 약속의 민족임을

그런데 그들이 아니다는 겁니다.

원가지도 아끼지 않고 짤랐다는 겁니다.

그 빈자리를 이방인이 채우는 겁니다.

이것이 용서만을 가치있게 하시는 용서이다는 겁니다.

용서 받는 자를 가치있게 하는게 아니라

십자가의 용서의 피를 주님이 직접 높이시는 의미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용서는 더더욱 극대화 되어서 용서의 왕 중의 왕이다는 겁니다.

사랑을 확정 하셨다는 겁니다.

여기에 그 어떤 인간도 반박을 못해요 반박을.

이것이 십자가의 지혜로써 원수갚는 모습입니다.

복수를 완성해야 구원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구원은 완성 했는데

구원 받은 자는 없어!

용서는 완성했는데 반박할자가 아무도 없을 정도로 완성했는데

당연히 마귀 대가리를 치니까 쫄병들은 할 말 없죠.

그런데 용서 받은 자는 없어~~~

 

이것이 바로 구원자들로부터 구원을 용서하는 방식인

십자가의 지혜이다는 겁니다.

 

참 내가 말 해놓고서도 정말 말이 안될 정도로

불가능한 소리만 하고 있습니다.

이해 제발 하지 마세요 라는 식입니다.

말귀 알마먹지 마세요 라는 식입니다.

도리어 듣고 깨달아 고침을 받을까봐 예수님은 걱정하셨죠.

 

(4:12, 개역)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마가복음에서는 더 심하네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고침 받으면 안돼는데 라고 예수님이 두려워 해요

자 이렇게 말하면 또 어떤 놈이 번역이 잘못 되었다고 나댈껍니다.

 

(13:15, 개정)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13:15, 바른) 이 백성의 마음은 무디어졌으며, 그들의 귀로 둔하게 듣고, 그들이 자신들의 눈을 감았으니,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서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라고 한 것이다.

(13:15, ) 百姓의 마음은 무디어졌으며, 그들의 귀로 하게 듣고, 그들이 自身들의 눈을 감았으니,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서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라고 한 것이다.

(13:15, 새번역) 이 백성의 마음이 무디어지고 귀가 먹고 눈이 감기어 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귀로 듣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게 하고 돌아서지 못하게 하여, 내가 그들을 고쳐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13:15, 공동)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 하고 말하지 않았더냐?

(13:15, 쉬운) 이 백성들의 마음이 둔해졌고, 귀는 듣지 못하고, 눈은 감겨 있다.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치는 일이 없게 하려 함이다.’

(13:15, 우리말) 이 백성들의 마음이 굳어져서 귀는 듣지 못하고 눈은 감겨 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지 못하게 하고 귀로 듣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게 하고 돌아서지 못하게 해 내가 그들을 고쳐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6:9-10

(13:15, 킹흠정) 이 백성의 마음은 무디어지고 그들의 귀는 듣기에 둔하며 그들은 눈을 감았나니 이것은 언제라도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여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느니라.

(13:15, 한글킹) 이 백성의 마음이 무디어져서 그들의 귀는 듣는 데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그들이 어느 때라도 눈으로는 보지 못하고 귀로는 듣지 못하며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고 회심하지도 못하게 되어 나로 그들을 치유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한 것이라.

(13:15, 현대인) 이 백성은 마음이 둔해졌고 귀는 먹었으며 눈까지 멀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서 나에게 고침을 받을지도 모른다.'

(13:15, 현대어)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귀를 막아 버려라. 눈을 아예 감겨 버려라. 그들이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마음으로 깨달아 내게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여라. 그들이 고침받는 일이 없게 하여라.'

(13:15, 가톨릭)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4:12, 개정)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4:12, 개역)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4:12, 바른) 이는 '그들이 보고 또 보아도 이해하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그들이 돌아서서 용서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4:12, ) 이는 '그들이 보고 또 보아도 이해하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그들이 돌아서서 容恕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4:12, 새번역) 그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셔서, 그들이 돌아와서 용서를 받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 6:9; 10

(4:12, 공동) 그것은 그들이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알아보고 알아듣기만 한다면 나에게 돌아와 용서를 받게 될 것이다.'" / 이사 6:9-10.

(4:12, 쉬운) 이는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용서받지 못하게 하기위함이다.”

(4:12, 우리말) 이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해 그들이 돌아와서 용서를 받지 못하게 하시려는것이다6:9-10

(4:12, 킹흠정) 이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사 언제라도 그들이 회심하여 자기 죄들을 용서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4:12, 한글킹) 이는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므로 어느 때라도 회심하지 못하게 되며 따라서 자기들의 죄들도 용서받지 못하게 되느니라."고 하시고

(4:12, 현대인) 이것은 그들이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그들이 돌이켜 용서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4:12, 현대어) 다른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다. )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와 용서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 70인역 사6:9-10)

(4:12, 가톨릭)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용서 받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 주님의 선언입니다.

 

그런데 결국 예수님의 모든 활동의 결과는

죄사함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다들 오해를 하는데 죄사함을 위해 흘리는 피가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죄용서 받는 인간이 중요하다는 겁니까?

인간은 죄 용서 받을 인간이 없으면 흘리는 피가 소용없다는 식입니다.

그래서 시편 94편처럼 다시 출애굽 사건이 벌어지는 겁니다.

다시 오늘날 지금 현재 2000년 전의 십자가 사건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지금도 반복이 된다는 겁니다. 2016년에도 2017년에도 계속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일만달란트 비유를 비유로 증거하신 이유입니다.

시편도 비유입니다.

성경 전체는 다 비유입니다. 비밀입니다.

 

인간의 사고방식과 다릅니다.

인간의 사고방식은 선악과를 따먹어서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에

복수심이 없어요.

어떤 복수심

원수에 대한 복수심

놀랍게도 원수가 있어야 복수심이 생기는데

무슨 수로 원수가 생기겠습니까?

모든 인간의 원수는 딱 하나 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복수심 뿐입니다.

원수가 졸지에 예수님이 되었어요

원수가 없는 인간에게 그 인간을 건드리게 되면 졸지에 원수가 생기는데

오로지 십자가는 모든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함이니

졸지에 예수님이라는 원수가 생겨버린 겁니다.

 

? 성전을 깨뜨렸거든요.

몸을 건드렸거든요.

 

그 성전에 대한 이야기를 고전 3장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성전과 지혜를 언급하고 있는데

사실상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파냐 아볼로파냐 게바파냐 라는 싸움이 벌어진 겁니다.

왜 이런 치부를 여과없이 성경은 기록하느냐 하면

반드시 언제든지 벌어지는 문제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더더 노골적으로 숨기는게 아니라 더 터트리면서 기록함으로써

이런 일들이 이상한게 아니다는 겁니다.

언제든지 수시로 벌어질수 있기 때문에

심각한 것 없다는 거죠.

오히려 늘 수시로 벌어져야만 하는 일이다는 겁니다.

아무튼 그런 일들이 벌어지니까

알게모르게 충돌이 되니

성전 이야기를 느닷없이 하는 겁니다.

 

(고전 3:16, 개역)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17, 개역)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성전을 더럽히지 말라 라는 겁니다.

? 거룩하니까!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사람들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닙니다.

그런 성전은 목적이 번제와 제사입니다. 의문의 죽이는 것을 반복하는 장소요 강도의 소굴입니다. 돈 벌이입니다. 바벨탑의 구원의 문입니다.

 

그런데 같은 단어를 쓰면서 정반대의 의미인 성전은 그리스도의 몸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인애와 자비만을 수시로 발산하는 성전입니다. 이미 완료되었기에

회복이라는 둥 앞으로 바른교회답게 잘해보자는 둥 그런거 없습니다.

또렷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또 여기서 대부분 거룩이라는 의미로써 거룩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달라서 다들 갈라서게 됩니다.

거룩은 깨끗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성전(그리스도의 몸)을 더럽히지 않을려면

그 교회를 깨뜨려야 합니다.

다시 세워지는 교회만 거룩하다는 거죠.

그것이 더럽지 않은 겁니다.

만약 깨뜨렸는데 다시 일어서지 못하면 그게 더러운 거다 말이죠.

거룩하지 않다는 겁니다.

 

? 이게 구원이니까

이게 출애굽이니까

신약에서는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니까

신약은 십자가 사건만 반복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전은 곧 누구다?

건물도 아닌, 개인도 아닌, 조직도 아닌, 집단(개개인이 모인)도 아닌

오로지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는 그리스도의 몸만 성전이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건물 백날 뿌셔보세요 다시 세워지나? 그것도 사흘만에 다시 말이죠.

오죽 하면 우리가 46년 동안 지은 성전인데 뭐 3일만에? 라는 인간의 발언이 나왔겠습니까?

그 사람의 발언은 우리 모두의 발언이다는 겁니다.

건물 벽돌을 다시 지어도 사흘만에는 안된다 말이죠.

몰라 앞으로 3d 프린터로 지으면 된다고 할지 모르죠

그런데 말하는 취지가 가능성을 이끌어 내기 위함입니까?

불가능성으로 유지되는 거룩을 말하는 겁니까?

 

말이 되면 안되요

당신 너 당신이 성전이다고 성경이 말하니까

말도 안되요 라고 불가능하다는 반응이 나타나야 한다는 겁니다.

불가능해요 저는 더럽거든요

네 맞아요 더러운 것 맞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피가

죄인을 위해 흘렸다는 겁니다.

 

게바 파 바울 파 아볼로 파

그들은 내 죄를 대신 해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기까지 복종한 자들이 아닙니다.

사실은 바울의 과격함 때문에 벌어진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감당이 안될 정도로 바울은 다른 사도들과 다르다 보니

이런 오해가 나타난 겁니다.

그렇지만 입을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하라고

정작 바울이 이런 의미로 또하나의 은혜를 외치고 있는 겁니다.

 

누가 너희 죄를 위해 피 흘렸느냐 라는 거죠.

예수님의 피는 건물에 흘린게 아니다 말이죠.

 

저는 더러운 죄인입니다 라고 더럽다고 말하는 너! 당신! 당신에게 바르는 피지

 

게바도 바울도 아볼로도 발리움을 당하는자이지

사도들이 피를 흘려서 당신에게 나에게 바르는 자가 아니다 말이죠.

? 그들도 더럽거든요. 죄인이거든요.

 

이것이 거룩의 의미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당연하다 가능하다 이래 나오면

일만달란트 용서 받았던 그 자처럼 용서 도루묵이 되는 겁니다.

용서의 의미가 사라져요. 피가 무의미해져 버리는 겁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불가능한 십자가의 용서의 세계를 한발 한발 내딛고 있는 겁니다.

! 발이 없어 못 걷는 앉은뱅이 이시라구요?

그런데 어떻게 당신은 다리도 발도 없는데 걷고 있죠?

당신은 눈 봉사인데 어떻게 용서의 세계를 걷고 있죠? 안보일텐데!!!

당신은 귀머거리 인데 어떻게 그 불가능한 십자가의 세계를 걷고 있죠? 안들릴텐데!!!

 

 

(94:9, 개역)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94:10, 개역) 열방을 징벌하시는 자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자가 징치하지 아니하시랴

(94:11, 개역)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94:6, 개역)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를 살해하며

(94:7, 개역)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생각지 못하리라 하나이다

(94:8, 개역)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여기서 바로 과부 나그네 고아를 원수와 대립시키는 겁니다.

원수는 과부 나그네 고아를 건드려도

하나님은 못 보고 하나님은 못 듣는다고 조롱합니다.

 

출애굽때의 상황과 똑같습니다.

그렇게 건짐을 받았던 이스라엘이 오히려 고아 과부 나그네를 압제하는 자들이 되어버린 겁니다.

처음자리인데 고아 과부 나그네는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인데 오히려 이스라엘이 애굽이 되어 버려서

고아 과부 나그네를 압제하는

예수님을 죽이는 원수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벌어지는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듯이

구약에서는 출애굽 사건이요.

바로 구원사건이자

원수를 갚는 날이다는 겁니다.

 

은혜의 해는 오히려

포로된자

갇힌자

억눌린 자에게만

 

기쁜 소식이지

 

가능한 자에게는 은혜가 아닙니다. 당연한 줄로 알지!!

 

그래서 멀쩡한 놈도

포로된자 만들고

갇힌자 만들고

억눌린 자 만드셔서

 

즉 죄인 만드셔서 구원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은혜의 해

곧 복수의 날이자 구원의 날이다는 겁니다.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게 어디 보통 기쁨이겠습니까?

 

그러니 이 날을 반복하고자

주님은 인간들이 시시하게 케케묵은 옛날 것이라고 치부하는

애굽도 없는 판국에

원수도 없는 판국에

그 애굽 원수를 일으켜서

출애굽의 은혜의 해를 다시 재현하시는 겁니다.

 

물론 누가 죽어나가겠습니까?

이스라엘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거 격지 않으면

누가 원수입니까?

애굽의 속성을 그대로 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원수 아니겠습니까?

? 실제로 고아 과부 나그네를 이스라엘이 압제하거든요.

그 증거가 바로 시편에서 아니 시편이 아니여도 구약에서

바로 다윗이다는 겁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3일만에 살리셔서 주가 되게 하셨다처럼

너희들이 핍박했던 그 다윗을 여호와의 보좌로 삼았다고 지지난 시간에 말했습니다.

 

(93:2, 개역)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122:5, 개역) 거기 판단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 집의 보좌로다

 

다윗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나라 중심의 중앙에 있지 않고

외국에까지 쫏겨다니고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까지 비방을 듣게 되니까

마치 빈보좌인것처럼 인식이 되니

그 보좌를 마귀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주님이 보좌에 앉아 좌정하시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아니 아무리 봐도 보좌는 비어 있는데

빈보좌인데

다윗이라는 보좌는 외국에서 떠돌고 있는데

아무리 중앙에 성전 중앙에 다가갈려고 해도

늘 쫏기는 신세라서 변두리 성전 저 끄트머리에서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하는 겁니다.

성전에서 두 사람이 이렇게 다른 양상이다는 겁니다.

번제 제사 드리고 싶어도 못 드릴 팔자라는 겁니다.

오로지 인애와 자비 밖에 구할게 없어서 그저 용서해 달라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사울계열)은 저 세리(다윗)과 같지 않게 해 주심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번제와 제사를 드릴수 있도록 이레에 두 번 금식, 십의 이조, 안식일을 지키도록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저 세리는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어서

나 사울왕은 그 제사장과 가족들 세리 다윗과 함께 한 자들 모조리 다 죽여버렸습니다.

? 안식일을 어겼고 율법을 어겼기에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바로 거룩하지 않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기에

성전 중앙에서 그 권력의 자리에서 외치도록

자기 꾀에 말려들도록 한다는 점입니다.

 

(고전 3:19, 새번역)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리석은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신다" 하였습니다. / 5:13

 

? 하나님을 귀 없는 자로 취급해 버렸고

? 귀 없는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나 사울에게 귀가 제대로 작동하니까

귀 있는 자의 하나님이지

귀 없는 자의 하나님이 아니니까 말이죠.

 

즉 산자의 하나님이지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다는 겁니다.

 

(22:32, 개역)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12:27, 개역)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20:38, 개역)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3:6, 개역)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3:6, 새번역) 하나님이 또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뵙기가 두려워서, 얼굴을 가렸다.

 

(12:26, 새번역)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에 관해서는, 모세의 책에 떨기나무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너희는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하시지 않으셨느냐? / 3:6

(20:37, 새번역) 죽은 사람들이 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에서 보여 주었는데, 거기서 그는 주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 3:6

(7:32, 새번역) 『㉥'나는 네 조상들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모세는 두려워서 감히 바라보지 못하였습니다. / 3:6

 

출애굽 사건을 다시 재현하는 겁니다.

 

눈 없는 하나님으로 취급해 버렸기에

? 하나님은 눈 없는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눈 있는 자의 하나님이기에

나 사울에게 눈이 제대로 작동해서 그 제사장만 먹는 진설병을 다윗이 먹는 것을 봤으니 다행이지

못 봤으면 저 더러운 안식일을 더럽히는 다윗이 거룩한 안식일을 더럽히는 꼴을 못봤으면 저 더러움을 막을 길이 없었으니까 말이죠.

 

자 이런 상황속에서 거룩은 바로 그 사울왕의 손에서

죽음 속에서 다시 3일만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 바로 거룩이다는 겁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 손에서

제사와 번제를 지키는 자들 손에서

 

물에 빠진 자를 건지는 것이 바로 안식의 주인을 만난 날이다는 겁니다.

원수의 손에서 건짐을 받은자이다는 겁니다.

 

누가 원수냐 말이죠.

 

그 다윗이신 예수님이 이제는 아예 대놓고 실행하십니다.

 

가룟유다에게만 어서 너가 맡을 일을 시행하시지? 라는게 아니라

사실상 유대인 전체에게 대놓고 어서 너가 해야 할 일을 하라고 자꾸 수셔대는 겁니다.

 

예수님이 본으로 누구한테만 시비를 걸고 실족케 할려고 수셔댑니까?

유대인 아닙니까?

그것을 본 사도들이 전세계에 퍼져서 그렇게 수셔대는 겁니다.

각 나라와 각 민족에게 말입니다.

 

?

원수를 들추어내어야

구원사건이 벌어지니까 말이죠.

 

오늘날 교회는 재주도 좋아

원수도 없이 구원이 막 벌어져요

 

저런 충돌도 없이 곧 십자가 사건이 없이 어떻게 구원이 무슨 수로 벌어지는지

저절로 아무런 사건도 없이 구원이 벌어져

예수님 보다 더 구원자 야~~~~

십자가에 달릴 필요도 없이 구원이 막 벌어져요

 

구원이 벌어진게 아니라 돈만 오고가고 할 뿐이더라 말이죠.

 

교회건물은, 껍떼기는 화려한데

앙꼬는 없어요.

피 흘림과 피 발림의 사건이 없어요.

구원 또는 십자가의 피 용서를 빙자한 돈장사 밖에 없어요.

 

돈을 그들은 구원이라고 하니 말이죠.

약장수 였나요 영화 주인공이 김인권인데

다단계 판매하는 자들 이야기

할머니들 상대로 놀아주고 재밌게 말벗도 되어주고

나중에는 돈 뜯어먹더라 말이죠.

그렇게 속여서 속아넘어간 뒤에라야 돈 뜯죠.

그렇게 부흥회처럼 신나게 놀더니

그 모습을 보니 다 교회에서 배운것들 아닙니까?

약장수 부장이였나요? 본지 1, 2년 되었지 싶은데

그렇게 천사같이 어머니 어머니 라고 했던 부장이

갑자기 돈 문제로 들어가면 화를 내잖아요

제가 본 그 장면이

꼭 과거의 부목사들이 담임목사들에게 야단맞는 장면하고 너무 똑같더라 말이죠.

달려들면 그 세계에서 매장 당할테니 덤빌수도 없고

저는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제 눈치를 봐요.

눈치는 보이고

아부를 싹싹 빌어도 처자식 먹여살릴 돈을 벌수 있을까 말까인데

덤비면 큰일 나지요 큰일나 ~~

 

물론 천주교는 기독교보고 저렇게 천박스럽게 안 논다고 하지만

역시나 고상한척하면서 돈 뜯어먹기는 마찬가지이다 말이죠.

 

그들 개인 하나 하나를 떼어놓으면 그렇게 착할수 없어

그런데 조직에 모였다 하면

갑자기 깡패로 돌변해

정신병자들 같아

 

정신과 의사한테 들은 말이

그렇게 의사 선생님에게는 그렇게 아부를 하면서 잘 하기 그지 없어

그런데 의사가 나갔다 하면

그 병원실 다른 환자들에게 이유 없이 무조건 갑질을 해요

자기 보다 약한 자 보면 그렇게 괴롭혀요 이유 없어요

그냥 그냥 무조건 이유없이 그냥 괴롭혀

 

우리 모두가 다 이런식이다 말이죠.

저도 마찬가지이구요

그 어떤 누구도 돈을 이길수 없도록 했다 말이죠.

그래서 수시로 벌어질 수밖에 없는데

오히려 더 안 일어나요~~~~

 

우리가 고아 과부 나그네 이면서 동시에 고아 과부 나그네를 압제하는 원수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수시로 십자가 사건을 벌리시는 겁니다.

원수 짖 했다고 죄책감 느낄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피 흘려 용서했다는 이것을 기뻐하느냐 라는 겁니다.

 

참 예수님이 무모하시죠.

참으로 불가능한 첩첩산중의 일을 벌리시는 겁니다.

뭘 믿고 십자가만을 기뻐하는 자를 가려내겠다고 이런 일들을 벌리시는지

거기에다가 마귀까지 풀어서 더더더 어럽게 일부러 그렇게 십자가를 못 보도록 한다 말이죠.

 

오로지 십자가만 자랑하시겠다는 겁니다.

괜히 다 잊어버린 출애굽 사건을 또 일으키고

괜히 십자가 사건을 또 지금 터트리시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원수갚기를 실행하시는 겁니다.

예수님 혼자만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아무도 못하는 불가능한 일을 말이죠.

우리는 안돼요. 그랬다간 짤려서 처자식 못 먹여 살려요.

 

그래서 예수님만이 이 원수문제를 반드시 도출시켜서 해결하시는 겁니다.

나 예수가 할테니 너는 혜택만 누려라 라는 겁니다. 너 숙제 없다는 겁니다.

사실 예수님 존재 자체가 이미 해결한 완료이기 때문에 실시하시는 겁니다.

 

그 방법이 바로 십자가의 지혜인데

바로 포로로 잡혀들어가는 겁니다.

애굽에 잡혀 들어가는 거죠.

바벨론 포로 잡혀 가는 겁니다.

탁란입니다.

그렇게 배불리는 겁니다.

먹이시는 겁니다.

오히려 바벨론이 유모라는 겁니다.

 

참 재미있게도 제 블로그에 어떤 검색어로 내 블로그를 찾았나 싶어 보니까

뻐꾸기 탈란으로 검색해서 들어왔더라고요.

 

마침 어머니께서 이사야 40장 정도 해당되는 부분을 읽고 있어서 물으셨는데

 

저번에 15장 읽었을 쯤에 왜 이사야는 자꾸 슬프다 슬프다 이야기만 하는가?

 

그야 당연히 남들이 못보는 것을 봤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망해서 바벨론 포로가 되는 것이니까 슬프다 라고 하는 거죠.

 

그런데 이제는 40장 쯤에서는 돌아온다 신나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되돌아 올테니 기뻐하라는 겁니다.

 

(49:23, 개역) 열왕은 네 양부가 되며 왕비들은 네 유모가 될 것이며 그들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네게 절하고 네 발의 티끌을 핥을 것이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이사야가 바벨론 포로가 700년 쯤에 벌어지는데

이사야는 5년 전 쯤에 죽습니다.

그 이전에 미리 예언했다는 거죠. 앞으로 이런 일들이 벌어짐을 말이죠.

그러니 미리 앞당겨서 미래를 예언하는 겁니다. ? 이 자체가 이미 완료되었다는 겁니다.

완료 때문에 오히려 역사속에서는 성전은 무너지고 이스라엘은 망해야 한다는 거죠.

 

미리 앞당겨서 이렇게 증거하더라 말이죠. 예언을 말입니다

그러니 지난 시간 얼굴과 얼굴에서 말했듯이

부분적으로 보면 나 만 남았나이다 라고 차라리 날 죽여라 가 되어서 원망하겠지만

얼굴 전체 전체적으로 보는 큰 숲을 보게 되면

이것이 주님의 사랑이요 배려이다는 겁니다.

7천명을 남겨놓은 전체 그림을 못보고

자기 혼자 남았다고 원수 손에 죽을빠에 주님 손에 차라리 죽겠다고 했던 거죠.

부분으로만 보이니 사랑이 아닌데

전체로 보니 사랑이 아닌 것이 없는 겁니다.

부정의 부정인거죠.

가까이서 보면 인생은 비극인데

멀리서 보면 인생은 희극 기쁨이다고 채플린이 말했듯이 말이죠.

 

이 의미가

귀를 지은 자가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눈을 지은 자가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너는 귀가 병나면 못 듣지만

하나님은 귀를 지었다는 겁니다.

귀가 병나면 그 기능을 못해 못듣는다고 해서

그런 너가 못 듣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못 듣겠냐 라는 겁니다.

 

그런데 원수들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귀를 짜르고 눈을 뽑아버리고 입을 벙어리로 만들어 버리면

외칠수가 없으니 하나님은 알길이 없을 것이다고 한다 말이죠.

 

과연 그러냐 말이죠.

멍청한 놈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겁니다.

자기가 그렇게 똑똑하다고 자부했던 그 지혜에 자기가 속아 넘어가도록 하신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자기 지혜 인간 지혜가 나올수 있는 모든 것을 토하도록 해야

그 뒤에 십자가의 지혜가 나타나는 겁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에스더 사건이 역시나 자기꾀에 자기가 속아넘어가는

원수인 하만을 끌어들임으로써 터지는 사건인

원수갚기 사건 곧 구원사건 부림절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터트리신 주님이 바로 사랑이다는 겁니다.

안그러면 번제 제사에만 미쳐있으니, 눈에 보이는 교회에만 미쳐있으니,

 

얼굴과 얼굴을 언제 마주 보겠습니까?

 

전체 그림 결국은 사랑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부분을 안 묻습니다.

베드로야 너 왜 날 세 번 부인했어 안 묻습니다.

베드로야 너 날 사랑하니? 라고 전체 곧 사랑을 묻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원인을 안따진다고 했습니다.

결과만 따집니다.

너 나 사랑하느냐 라고

 

이 사랑이 거룩이고

이 사랑 때문에

우리의 더럽기 짝이 없는 거룩으로 포장했던 것 모조리 발가 벗기는 겁니다.

 

바울 파, 게바(베드로) , 아볼로 파로 나누어져서

부분으로만 볼려고 하고 어린아이 같이 볼려고 하는데서

 

(고전 3:1, 개역)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장성한 자로 만들고자 얼굴과 얼굴을 보듯이

전체를 보게 하시고자

주님이 일부러 싸움 붙였다 말이죠.

죄를 깨닫고 죄사함 받으라고

 

아니 저쪽은 못 받도록 해놓고

우리 쪽은 죄사함 받도록 하고자

바울 자기가 이 모든 불란의 원인이면서

이런 취지인 전체 그림을 바울 본인이 이야기 하는 겁니다.

죄 사함받도록 하고자 말이죠.

병주고 약주고 하듯이 ㅋㅋㅋㅋㅋ

원인을 따지는게 아니라

결과를 미리 땡겨버리셔 벌어지는 사건임을 말이죠.

 

어떤 사태가 일어나도

우리에게는 십자가만 밝히 보이도록 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율법을 어긴 것을 보고

그 부분만을 보고

하나님의 보좌인 다윗을 덮썩 물어버리는

자기 꾀에 자기가 걸려 넘어지는

 

이 원수를 끌어들이는 방식을

지금 시편 94편에서 곧 바벨론 포로 당해 갈 것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다윗을 보좌 만들기 했듯이

이스라엘을 다윗 꼴 나게 만드시고

예수님 꼴 나게 만드셔서

그게 보좌이니까 이런 일들을 격게 하는 것이고

이렇게 하심으로써

원수들은 너거 하나님 있기는 있냐

이거 보고도 너가 하나님은 가만히 있냐?

눈이 있기는 있냐? 우리는 다 보는데 이런 사태 보기는 보냐?

귀는 있기는 있냐? 라고 조롱하는 겁니다.

 

애굽왕 바로왕이 여호와가 누구관데? 난 그런 신 몰라요 ~~~ 라는 사고방식이다는 거죠.

반드시 그 말을 주님은 마귀가 말해주길 바랬던 겁니다.

그래야 은혜의 사건이, 구원사건이 벌어지니까 말이죠.

나 몰라 그래 내가 누군지 알려줄게 기다려봐 ~~~~~

 

다윗도 이사야처럼 이미 완료를 보고,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성전완료를 보고

인간의 몸이라는 성전을 깨뜨리는 십자가에 못 밖는

여호와의 원수갚기를, 구원사건을, 출애굽 사건을 반복하듯이, 십자가 사건을

이렇게 시편 94편에서 외치는 겁니다.

 

한 쪽은 고아 과부 나그네 즉 죄인 만드셔서 은혜의 해를 부으시고

다른 한 쪽은 그 고아 과부 나그네를 이유없이 그저 괴롭히는 원수로 만들어서

반드시 맞물리게 해서 구원사건 십자가 용서를 펼치시는 겁니다.

3의 영역은 없습니다.

피한다고 해서 핍박을 안할 원수들이 아니고

원수들이 아무리 의인짖으로 안식일을 백날 지켜도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안식일에만 일하시는 겁니다.

 

영원한 물과 기름으로 나누어지는 거룩 사건입니다.

거룩은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 분리개념입니다.

탕자와 맏아들로 말이죠.

어딜 감히 제3의 영역을 바라냐 말이죠.

마귀도 못 피하는 판국인데

우리인들 말이죠.

 

사실 외모로 풍기는 모습은 오히려 탕자와 고아 과부 나그네는 거의 깡패수준입니다.

탕자 보세요 그게 인간입니까? 그런데 많이 탕감받은자가 많이 사랑하는 겁니다.

오히려 이들을 거부하고 핍박하는 원수들은 젠젠젠틀맨들입니다. 의인의 모습을 갖추었다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모로 보시지 않고 중심으로 갈라서게 하시는 겁니다.

 

바로 인간이 못 푸는 원수 문제 곧 구원문제

자기 스스로가 나서서 구원문제를 풀겠다고 나서는

그 악마의 하수들인 인간들 속에서

이 십자가의 용서의 세계는 매일 매일 펼쳐지는 겁니다.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말이죠.

말이 안되는 구원사건이 곧 원수갚기라는 복수의 사건이 말입니다.

 

누가 이 십자가의 용서를 믿겠습니까?

누가 범죄자를 위해 간구하시는 그 기도를 듣겠습니까?

 

불가능에서 불가능으로 이루어진 사랑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53:7, 개역)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53:8, 개역)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53:9, 개역)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53:10, 개역)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53:11, 개역)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53:12, 개역)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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