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 그리고 무릎 꿇어라 2 (시편 95)

 

나에게 무릎꿇은 그 분이 나를 무릎꿇게 하시는 내가 경배하는 분


(히 3:1, 개역)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 3:2, 개역)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히 3:3, 개역)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95:1, 개역)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95:2, 개역)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95:3, 개역)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시로다

(95:4, 개역)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것도 그의 것이로다

(95:5, 개역)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95:6, 개역)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95:7, 개역)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을 듣기를 원하노라

(95:8, 개역)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지어다

(95:9, 개역) 그 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

(95:10, 개역) 내가 사십 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95:11, 개역)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시편 95편의 감흥이 너무 풍성해서

아직도 그 여운이 남아서

다시 한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고싶은 말은 많고

한계적인 언어로 표현할려고 하니

많은 것들을 다 적기 못해서

생략하다 시피 적었는데

계속해서 내용이 떠올라서 덧붙일려고했는데

그냥 새롭게 한번더 하자 라는 생각에 두 번째로 시편 95편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런 감흥을 한마디로 허걱 이라고 합니다.

놀라 자빠질 정도로 모든언어로 다 담아서 한마디로 표현한 것을 말합니다.

 

일어문 이라고 하는데

 

一語文

 

홀러 프래스틱

 

hol·o·phras·tic

 

뜻이 [많은 개념을 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포합적이다]

이런 뜻이 사전에 나옵니다.

 

포합은 모든 것을 하나로 포괄한다는 거죠.

 

왜 이렇게 사전까지 들먹이냐 하면

지난시간에도 약간 언급했는데

시편 95편은 신년기도에 낭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11일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시간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11일이 아닙니다.

외국인이 한국에서 가장 신기했던게 나이 계산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한 개인인데

한국 전체가 한 살을 모두 같이 먹게 되냐 말이죠.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먹어야 하는 서양의 계산법과 다르다는 겁니다.

 

전체 포괄적으로 포합적으로 한꺼번에 한 살을 다 먹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더 심합니다. 그 포합성에 더 더 더 포합적인 것이

모든 국민이 한꺼번에 한 살을 다같이 함께 먹을 뿐만 아니라

1년마다 신년이 되는 역사시간적 개념이 아닌

사건적 개념으로써

죽었다가 살아난 그 새롭게 태어난 그 날은 무조건 신년 11일이 되는 겁니다.

1년 이라는 12달이 꽉 차서 12달이 지나야 1년이 되는게 아니라

사건 곧 구원사건이지요. 구원사건이 터져서 건짐 받으면 무조건 신년이 되는 겁니다.

 

어제 신년이였는데 오늘 또 구원받았어 그럼 오늘이 또 신년이다 말이죠.

11일인 모든 날이 주의 날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이날은 이날은 주의 날일세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기뻐하며 즐거워 하세 즐거워하세

 

결국 주의 날이면 무조건 나의 나이와 상관없이 주의 날이라는 이유로 나의 생일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죽다 살아난 날로써 구원의 날이 나의 생일이다는 거죠.

 

그런데 어떤 시편 95편의 해석인 설교를 보면

시편 95편은 신년 예배의 기도용이라고

예배 기준으로 봤다는 겁니다.

 

아닙니다 사건용입니다.

즉 예배 용으로 본다면 이것은 번제와 제사라는 의문의 반복입니다. 죽이는 겁니다. 미완료죠.

 

그러나 사건용인 인애와 자비는 살리는 또렷함이요, 의문의 죽이는 것의 반복이 없는 완료입니다.

 

단번에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단번의 제사입니다.

 

아마 그 목사는 목사니까 예배에 신경쓰다 보니 사건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 그대로 설교속에 나타난 겁니다. 물론 신학자들의 해석을 참고해서 말이죠. 그래야 이단 소리 안듣거든요.

 

누가 이런 사건 즉 불편하기 짝이 없는 사건을 신년기도로 하겠습니까?

삽자가의 날을 말입니다.

그러나 정작 사건을 당한사람 곧 사건이 덮쳐진자에게는 마땅히 나올 수밖에 없는 기도이다는 겁니다.

 

왜냐? 내용이 살벌해요 살벌해

 

그런데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우리의 자랑이요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흔적이니까 말이죠.

우리 자체가 십자가의 증상물이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나를 낳았다는 겁니다.

 

제목을 그리고 무릎꿇어라 즉 경배하라입니다.

 

그런데 시편 95편의 내용은

왜 무릎꿇어야 하느냐 하면 좀 역설적입니다.

 

왜 무릎 꿇어야 하는 즉 경배를 해야 하느냐 하면

사실은 우리가 예수님을 무릎 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아니 그럼 경배하는게 아니잖아!!!!!

 

네 맞습니다. 경배하는게 아니죠.

그 정도로는 우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길로 갔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을 예수님께 감당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반드시 그런 내용을 거쳐야만 주님을 경배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즉 그런 예수님을 무릎꿇게 만들지 않았다면 주님을 경배 못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또 오해해서 예수님을 무릎꿇게 만들고 그 다음 주님을 경배한다.

물론 이것도 말이 안되기 때문에 이해불가입니다.

그러나 그런 원인을 예수님을 무릎꿇게 만들자 그 다음 주님 경배하자 라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원인 없는 결과로써

주님을 경배함이 덮쳐져 버렸기 때문에

왜 경배했느냐 라고 물으면 우리가 예수님을 무릎꿇게 만들었거든 이라고 외치는 겁니다.

 

이 말귀를 못알아먹는 목사들이 방종을 유도한다는 식으로 뒤짚어 씌우는 이유인 겁니다.

 

그야말로 이 또 무슨 생뚱맞게 말도 안되는 소리를

또또또 이상한 소리를 할려고 그러냐 ~~~~

 

라고 하시겠죠.

 

그런데 우짭니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으니 말할수 밖에요.

목사들은 이런 이야기 안합니다.

그랬다가는 쿠테타 일어날까봐 도리어 걱정이 될테니 말이죠.

심심하면 교회질서가 깨진다고 합니다.

 

왜 이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소리를 하냐 하면

당연히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취지이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예수님을 호구로 봤다는 증거이다는 겁니다.

 

저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오히려 강퍅하다는 겁니다.

 

그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듯이

결국 십자가 사건이라는 결과 때문에

한 쪽은 강퍅한 모습을 저렇게 나타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강퍅해져서 십자가가 발생한게 아니라

십자가 사건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강퍅한 자가 나오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물론 긍휼을 입은자도 나오고 말이죠

시편 95편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95:8, 개역) 이르시기를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지어다

 

므리바 사건과 맛사의 날 사건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으로써 등장하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는 모순점의 간극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다 보니

이 중요한 두 사건 므리바 사건과 맛사의 날 사건을 언급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이유입니다.

 

분명히

 

(95:6, 개역)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경배했죠

무릎을 꿇었죠.

 

그런데 안 받는데요 글쎄

 

아니 오라 했잖아요 그래서 갔잖아요

그런데 들어오지 말래요 글쎄

 

왜 그러냐 하면 그 경배 그 무릎꿇기를 안 받고

 

예수님 자신을 세 번 부인하는 즉 도리어 예수님을 무릎꿇게 만드는 그 십자가 사건을 거쳐서

경배와 무릎꿇기를 하라는 겁니다.

 

이거 안거치고서 경배하고 무릎꿇는 것은 안 받겠다는 겁니다.

참 희한한 하나님이지요?

 

마치 예수님이 드디어 십자가에 달리고자 가실때에

예수님을 베드로가 가로 막습니다.

주여 절대 안됩니다. 가실려면 나도 따라 가겠습니다.

얼마나 대견합니까? 베드로 참 잘했지요?

이것이 스승을 사랑하는 제자로써의 마땅한 도리 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탕아 물러가라

어디서 그런 사루비아같은 달콤한 말로 나는 넘어뜨릴려고 하느냐

너는 빨리 나를 세 번 부인이나 해

 

라고 하십니다.

 

분명히 우리의 시선은 참 잘했어요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시선에서는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나를 꾀더냐 라고

사탄아 물러가라 가 되는 겁니다.

 

이 모순의 간극 무슨 수로 좁히실래요??

 

베드로는 그야말로 멘탈붕괴가 되는 겁니다

 

 

홀러 프래시틱

 

띵 해져 버리는 겁니다.

 

그 사랑! 안받겠다는 겁니다.

 

너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라는 겁니다.

인간의 사랑은 거짓이다는 겁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마귀에게 잡혀 왔을때에

딴거 안 물어요

 

[너는 왜 아직도] [모르는거야] [너만을 향한 내사랑을] [너는 왜 아직도] [모르는거야]

[남은건 널위한 사랑뿐] 오오 워워워 오오오 워워워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만 물어요

왜 날 세 번 부인했니 그딴거 안 물어요

너 나를 사랑하니 이것만 물으신다 말이죠.

 

아니 아까는 세 번 부인하기 전에는 나의 사랑 안받아주시더니

왜 지금은 사랑하냐 라고 묻냐 말이죠

 

아까는 세 번 부인 안 했걸랑요

 

아까는 광야에서 세가지 물증을 못잡았거든요

이제 잡았거든요.

 

바로 이게 성화론자와 그리스도인의 차이입니다.

성화론자들, 개혁주의자들 이런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흉내내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손에서 유사기독교가 만들어지잖아요.

유교인지 유교기독교인지 불교인지 카스트제도인 인도교인지 모호해요.

 

심지어 예수님을 조작해요

 

어떻게 해서든 자기들과 똑같은 착한 예수 만들려고 무지 노력한다 말이죠.

자기투사입니다.

못땐 예수면 안된다는 식이다 말이죠.

성경에 착한 예수는 없어요.

심판의 주이신데

그래서 가면 갈수록 지옥을 만드시는 예수님이 아니다 라는 식이

교회사에서 앞으로 가면 갈수록 더 심해진다 말이죠.

 

세 가지 물증 잡는 예수를 그들은 못믿어요

그러면 안된다는 겁니다.

예수 땍지

그러면 못써 어딜 감히 세가지 물증을 잡을려고 해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믿을려고도 하지 않아요.

믿고픈 것만 믿는다 말이죠.

 

그러나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 부인하기 전에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는 절대 안 받아줘요

경배도 안 받아줘요

무릎 꿇는 것도 안 받아줘요.

 

그런데 세 번 부인하고난 뒤에는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를 받아줘요

경배도 받아줘요

무릎 꿇는 것도 받아준다 말이죠.

 

이 모순의 간극을 그들은 해결을 못해요

아니 거부해요

거리끼는 것이거든요.

 

어머니께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어머니랑 나누면서 완전 신났어요 신났어

 

분명 베테랑 어부 고기잡는 사람인 베드로가

여기 저기 다 물고기를 잡고자 다 해봤다 말이죠.

그럼 오늘은 아니다 말입니다. 공 쳤으니까 접는 것이 베테랑 어부의 경험이다는 겁니다.

이게 인간의 지식입니다. 인간의 경험이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저기에 그물을 던지라 라고 하는 겁니다.

 

아까 했거든요. 안 잡혔다는 것을 해 봐서 안다 말이죠.

그래서 뭐 어쩔수 없이 순종함이 당연해서 순종하는게 아니라

주님이 똑똑히 보시고 안된다는 것을 아신다면

앞으로 두 번 다시 던지라는 소리를 못할겁니다 라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우의라는 것을 알려주고자

어부도 아닌 아무것도 모르는 예수님에 대한 한수 가르쳐주고자

최대한의 예의로써 대하는 겁니다.

그래서 던졌다는 겁니다.

자 그럼 여러분 이것을 가지고 사기꾼 목사들이 어떻게 써먹을 것인가가 눈에 훤히 보이시죠

 

아무튼 던졌어요

아 그런데 그물이 찢어질 듯이 잡히니까

 

베드로의 경험과 지식이 졸지에 날라가 버리게 되는 겁니다.

 

 

헐러 프레스틱

 

즉 예수님을 무릎꿇게 만들려고 코를 납작하게 만들려고 했는데

도리어 자신이 배가 뒤짚어질 정도로 초과잉적인 물고기가 나타난 것이다 말이죠.

 

이것을 보고 뭐라 하느냐

 

 

일어문 一語文 (적인), 단일어, 전체적인, 포괄, 포합적인,

 

holophrastic [hὰləfrǽstik]

 

하러 프래스틱

 

지식과 경험이 날라가 버리게 되면 이것을 비지식이 침범한 것이다 말이죠.

물고기 잡는 어부 세계는 내가 평정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자의 침범으로 인해 한순간에 다 날라가 버리는 겁니다.

뭐 우연이였겠지? 라고 베테랑인 베드로가 이 사건을 속여서 충분히 카바하고 남을텐데

진짜로 남는데도 불구하고 뭔가 손발이 짤려버린냥

입술을 화인침 받은냥

그대로 얼어버리는 겁니다. 동결

 

인간 세계가 아닌 비세계의 침범이다는 것을 한순간의 감각으로 알게 된 겁니다.

 

마치 영화 곡성의 뜻처럼 곡소리 곡하는 소리 헉 HUG 허걱 처럼

 

그래서 주님 이거 돈으로 바꿔서 잔치 벌립시다 이랬나요

아니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졸지에 심판의 주를 경험한 겁니다.

 

아침에 눈뜨자 이 말이 막 떠올라서 계속해서 생각해봤습니다.

아니 자기가 떠나면 될 것을 왜 예수님 보고 떠나라 했지?

 

안겁니다.

예수님이 스토커 라는 사실을

도망쳐 본든 예수님 손바닥이니까 못 떠나는 겁니다.

 

예수님은 살아 움직이는 운동력이고 베드로는 그 운동력에 사로잡힌 바 임을 말이죠.

처벌 당해 할 심판자이고 그 심판에 죽어 마땅한 자임을 말입니다.

 

그럼 말이 안되잖아 예수님에게 떠나라는 말은 더더욱 그렇다면 더더욱 말이죠.

 

바로 그겁니다. 이것이 부정의 부정이요

역설적인 표현이다 말이죠.

하나 마나 한 소리이다는 겁니다.

 

즉 베드로는 인간의 문법과 사고에 맞는 용어를 말한게 아닙니다.

 

헉 이라는 구멍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구원의 뿔에 나 뚫혔다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이 빈공간은 채울길도 없다는 겁니다.

그 주체가 바로 이 분이다는 겁니다.

 

결국 그 빈공간이 주체가 된 입장에서 보게 되면

시선이 바뀝니다.

어떻게????

 

물고기를 자기가 잡는 줄 알았는데(선악적 사고)

그것으로 승부를 거는 삶이였고

어부였는데

 

알고보니 지금까지 물고기가 자기에게 잡혀준 것이다는 겁니다.(은혜적 사고)

원인 없는 결과 이다는 겁니다.

돈을 내가 번게 아니라

돈이 나에게 와준 거다 말이죠.

 

말씀을 내가 지킨게(읽은게) 아니라

말씀이 나를 지킨 것(읽은 것)이다는 겁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4:12,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4:13, 개역)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좌우에 날썬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 영 관절 골수를 찔러 쪼개서 그 마음 생각 뜻 모조리 다 드러내니까

그 앞에서 발가벗겨지지 않은 것이 없이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발가벗겨 졌으니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으로 들통나 버렸습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 부정한 자에게 주님같은 거룩한 분이 함께 할 자가 못된다는 겁니다.

이 말이 결국 이런 죄인에게 딱맞는 분이 바로 당신입니다 라는 겁니다.

이런 환자에게 딱 맞는 분이 바로 의사 되신 당신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말씀앞에 도살된 고기들의 조각들처럼

베드로는 죽게 된 겁니다.

지식이고 경험이고 뭐고 그 앞에서는 죽은 것이요 의문의 것이다는 겁니다.

뭘 해도 죄 뿐이다는 겁니다.

또렷한 것 앞에서 감히 그딴것들을 앞에 내어놓을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에수님께서 땅에 쓱 SSG 하고 섰잖아요

 

헉 입니다.

HUG

 

구멍을 뚫어버리니까

도망치잖아요

 

부자청년도 근심하고 돌아서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8장에서는 그 부자청년과 대조되는 인물로써

구걸하는 한 소경의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외침과

19장의 삭개오와 대조를 이루는 겁니다.

 

자 이렇게, 그렇게 자신만만하면 돌삐 던지라 말이죠

자신만만하면 어릴적부터 말씀을 지켰으면 가난한자에게 전재산 나누어주라 말이죠.

목사들 심심하면 전재산 나누어주었다고 외치잖아요 그럼 목사 니가 한번 해 보라 말이죠.

그런 놈이 도대체 어디로 도망갔냐 말이죠.

 

이상하게 오늘날 교회는 돌삐 던지는 인간들만 생산해 놓는 공장 같아요.

정죄함 밖에 없어요.

물론 그것이 곁으로 드러나면 다들 교회 안다니겠죠. 티가 안나니까 다니는 겁니다.

즉 정죄함 밖에 없다는 말은 거짓선지자의 평강이다 평강이다 밖에 없다는 겁니다.

 

반대로 참선지자는 오히려 겉으로 보이기에는 정죄함 뿐이며 삐딱하고 부정적인 말 밖에 안하잖아요.

오히려 참선지자의 교회가 더 다니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 정죄함 밖에 없다는 말은 실질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은 정반대이다는 겁니다.

사랑이 너무 넘쳐 ~~~ 이게 인간들이 조작해내는 교회이다는 거죠

 

빠져나올 생각을 안해

같이 돌삐 던지는 재미에 빠져 살거든요.

 

구멍이 뻥뻥 뚫여지니까

그 구멍이 부끄러워서

그 십자가의 흔적이 부끄러워서

도망을 치는 겁니다.

 

그렇게 돌삐 든자 들끼리 만든 교회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저들이 이제는 십자가라는 구멍을 새기니까(손자국 발자국 이마표)

부끄럽제 부끄럽제???

 

아니 나에게는 자랑이요 능력이요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겁니다.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고

도리어 남 좋게 하는 꼴이 된 겁니다.

 

바로 이 3일이라는 간극을 만드시는 것이 바로 광야의 주님이다는 겁니다.

 

이 부끄러운 거리끼게 하는 십자가가 죽게 만드는

그래서 십자가로, 하나님의 저주로 죽여버릴려고 했는데

 

도리어 이 십자가가 나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였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

오라

경배하라

무릎꿇자

 

라는 것은 안 받는 겁니다.

 

십자가를 거쳐서

그 죽음을 통과한 자만이

주님의 경배하고 주님께 무릎꿇는 자이다는 겁니다.

 

 

그럼 십자가 거칠래 거치면 될거 아니냐

어떻게 거치는데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해라

 

음 그거는 도저히 못하겠다 이래 나오던가

까짓것 구원 준다는데 그까짓거 대충 하면 되지 뭐 라고 나오던가

 

둘 중에 나오겠죠.

 

그런데 인간이 이렇게 받아들인 지식과 경험 과연 통할까요?

둘 다 안 통합니다.

 

물고기가 잡혀 줘야

헉 되지

 

저런 것들은 둘 중에 하나 인들

백 중에 백인들

 

헉이 되지 않아요

 

할러 프래스틱이 안된다 말이죠.

 

그것은 지식을 오히려 쌓게 되고

경험을 오히려 쌓게 되잖아요

 

발가벗겨지는게 아니다 말이죠.

빈공백이 되는게 아닌

구원의 뿔에 뻥뻥 뚫힌게 아닌

 

자기가 자기를 뚫어요

지식과 경험이 날라가는게 아니라

오히려 더 쌓게 돼

이것을 오늘 시편 95편에서는 강퍅함 완악함 이라고 합니다.

완악함의 수건을 때려죽어도 유대인들은 벗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지식으로 받아들여서 지식쌓기를 한다는 거예요.

 

내가 버린 돌이 나의 자랑스러운 머릿돌이 되는게 아니라

여전히 자기가 머릿돌로 삼았다는 식입니다.

 

주님이 머릿돌이 되고자 침범한 식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가 머릿돌로 삼았으니 십자가가 없이도 충분히 되었다는 겁니다.

 

마치 사도바울이 사단의 가시를 뽑아달라고 세 번 기도했는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했는데

이들은 자기가 그 사단의 가시를 자기가 직접 다 뽑아버린것과 같다 말이죠.

 

여전히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당연하게 호구로 얕잡아 본다는 겁니다.

 

성화론자들 개혁주의자들 다 이런 식입니다.

그런 성화론자들과 대화를 해보면 눈에 레이져가 뿜어 나와요

눈에서 살기가 넘쳐 흘러요

그렇게 점잖고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뭐하나 흠잡을데 없다고

자기가 자기 스스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외치는 자들인데

이상하게 그런 자들의 생각을 제가 안받아들이면

눈에서 레이져가 씨뻘겋게 발사 되어요

살인자들입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띠엄 띠엄 봤으면

3일이라는 간극을 다 무시해요

안 그런 목사들이 없어요.

 

아 그래서 다르게 보입니다.

저 존경하는 목사 밑에서 배우면 구원받겠지 라고 모인 교인들이

다들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되어요

물론 환상으로 보이지만 말입니다.

 

목사는 안 불쌍해요

그 역할을 맡았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교인들은 불쌍해요

다 속아요 다 속아

그래서 한 마디 하면

목사에게 조종을 당하다 보니

으르렁 으르렁 으르렁 대 ~~~~

 

지금 신났어요

너는 왜 철이와 미미 노래 틀다가

다시 엑소의 으르렁 까정 신났어요.

 

얼마나 강퍅한지

그 완악함에 수건을 벗지 않는 겁니다.

으르렁 으르렁 으르렁 대

물러서지 않으면 다쳐도 몰라

 

그래서 예수님을 무릎 꿇게 만들어 버린 겁니다.

우리가 말이죠.

 

그랬는데 그래서 버렸는데

돌아와 보니 다시 머릿돌이 되어있는겁니다.

 

그래서 다시 버렸어요

다시 돌아와보니 상좌에 앉아 있는 거예요

 

또 다시 버렸어요

다시 돌아와 보니 머릿돌이 되어 있는 겁니다.

 

이 기이하고 신기한 구멍을 백날 매꾸어 보세요 되나?????

 

다들 미끄러지는 겁니다.

 

3일의 간극이 종교꾼들에게는 없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오라 해 놓고서는 못들어가 라고 가로막는 겁니다.

이 모순점을 무슨 수로 푸시겠습니까?

 

정작 말씀이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다면 우리는 죽어있는 상태임으로

말씀이 으르렁 되어야 할 판국인데

도리어 우리가 말씀인냥 살아움직이는 운동력이 있는냥

우리가 으르렁 으르렁 거리다가 예수님을 갈기 갈기 찢어 죽였던 겁니다.

 

그런데 말씀은 으르렁 거리면서 너 세 번 부인했지 라고 하지 않습니다.

원인을 따지지 않아요

결과만 묻습니다.

너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으르렁 거리지 않아요.

 

완악하지 않아요

걍퍅하지 않아요.

 

도리어 방귀뀐 놈이 화낸다고

죽은 놈이 강퍅케 되더라 말이죠.

 

이것이 십자가에서 두 패로 갈라지는 겁니다.

제사와 번제 또는 예배로는, 그런 의문의 것으로는 두 패로 갈라지지 않습니다.

 

인애와 자비에 의해서만 갈라지는 겁니다.

거룩에 의해서만 갈라지는 겁니다.

거룩이 곧 참선지자에 의해서 두 패로 갈라져요

거짓선자의 평강이라 에서는 절대로 두 패로 갈라지지 않는다 말이죠.

 

무릎꿇는 자와 강퍅한 자로 말입니다.

 

십자가의 지혜가 덮쳐진 자에게는

이렇게 내가 버린 돌이 나의 머릿돌이 되는

그 원인 없는 결과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강퍅한 자는 그 자체가 짜증나고

강퍅함을 계속 버리지 못하고

안식을 거부합니다.

 

안식교 뿐만 아니라

주일성수교들(모든 현대 교회)도 안식의 주인을 거부하는 이유입니다.

완악함 때문에 수건을 벗지 않는 유대인처럼 말입니다.

 

(고후 3:13, 개역)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고후 3:14, 개역)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고후 3:15, 개역)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 3:16, 개역)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고후 3:18, 개역)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자 바로 시편 95편에서 말하는 완악함 곧 강퍅함을 설교한 자들이 많아서 살펴봤는데

거꾸로 말하더라 말이죠.

 

그들은 완악함과 강퍅함을 거룩으로 말하고 있고

오히려 거룩을 완악함으로 강퍅함으로 거꾸로 말하고 있어요.

 

므리바 사건과 맛사의 날 사건은 마음의 완악함 곧 강퍅함과 연관이 되어 있는데

 

이것이 신약에서는 마귀의 활동과 연관이 되어 있는 겁니다.

 

므리바 사건과 맛사의 날 사건은 둘 다 물(죽음, 홍해)과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통과 했잖아요 홍해를 통과했잖아요

그것을 다시 반복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더 싫었던 겁니다.

 

쓴물 때문에 목말라 죽게 되었는데

나뭇가지를 던져서 마실 물로 변하게 했던 사건이고

 

맛사 날은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해서 마시게 했던 사건입니다.

 

물없는 곳 양식 없는 곳으로 인도할때에

원망 안하고 배기겠습니까? 원망합니다.

그렇다고 이 원망이 강퍅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아참 홍해를 건너게 해 주셨지

아 까먹었었는데 그것을 다시 상기시켜 알게 해주셨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이 강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원인 없는 결과로써 예수님은 베드로는 이미 사랑했기 때문에

오히려 베드로는 세 번 부인하는 일을 격게 되는 겁니다.

 

내 쪽에서 사랑하겠다는 것이 탈탈 털려야

주님 쪽에서 다가오시는 사랑을 볼게 아니겠습니까?

 

나만 남았나이다 라는 원망은 강퍅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험을 만나면은 기뻐하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세 번 부인한 것 마저 주님께서 친히 감당하시고자

대신 십자가에 달렸으니까 원인 없는 결과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7천명 남겨 놨다는 말에 부끄 부끄가 되어

주님 아까 제가 뭔말했지요? 못 들으셨지요 라고

감사 때문에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뻔뻔스럽게 감사합니다 라고 기뻐하는 겁니다.

 

그런데 원망이 아닌 강퍅은 바로 이 7천명 남겨 놨다는 것에서

비로소 살인의지를 불태우는 겁니다.

왜냐하면 남겨놨다면 왜 미리 말 안해주냐

그럼 나만 남았나이다 안그랬을꺼 아니냐

세상에 이런 반칙이 어디있냐 날 속였다니 가만히 두지 않겠어

이래 되는 겁니다.

원망이 강퍅함이 되는게 아니라

7천명 남겨놨다는 것에서 배신감에 살인의지를 불태우는 겁니다.

 

불뱀에게 물렸는데

구리 놋뱀 보고 나을 것 같으면

이건 뭐 완전 장난질에 놀아나는 것 아니냐 라는 겁니다.

 

그래서 구리 놋뱀 달린 것 쳐다 보면 낫는다 라는 그 말에 화가나서

오히려 더 안쳐다보게 되는 완악함을 펼치더라 말이죠.

 

즉 긍휼 거부입니다. 저 모순과 불륜이 나를 낫게 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모순이 아닌 정순이

불륜이 아닌 정결함이 나를 낫게하면 나는 받아들이겠다는 겁니다.

바로 이게 완악함이요 강퍅함이다는 겁니다.

왜 성화론자들이 마귀들인지 아시겠습니까?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서 허랑방탕하게 다 탕진해 버렸습니다.

즉 이제 남은 인생은 죽은인생이나 마찬가지 이다 말이죠.

그래서 아버지 집에 노예로 살려고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니까

 

누가 강퍅해 집니까?

맏아들 아닙니까?

 

맏아들은 원망 한 번 한적없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원망도 건너뛰고 왜 강퍅해 졌습니까?

 

시편 95편을 달달 외웠던 맏아들이

시편 95편 대로 죽었다가 살아난 동생 탕자가 신년 11일을 맞이하게 되니까

구원의 날을 맞이하게 되니까

비로소 강퍅케 되었다는 겁니다.

참 말이 안되죠?

불가능하죠

부정하죠

 

이 부정성과 함께 머무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 불가능성과 함께 머무는 것이 구원이다 말이죠

말 되면 그것이 지옥이다는 겁니다.

 

원망은 정작 탕자가 했지만

죽게 되었다고

원망은 했지만

뉘우치고 돌아왔는데

그것을 받아준다고

생전에 하지도 않던 살진소 금가락지 좋은 옷을 입힐 때

비로소 강퍅케 되어버린 맏아들이다는 겁니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겁니다.

이것이 불의입니다.

이 불의가 야곱을 살리는 날이 되고

이 불의가 에서를 미워한 겁니다.

 

하나님이 불의하뇨? 하나님이 허물하뇨?

아주 당당하게 되레 묻죠!!!!

 

얼마나 자신만만했으면 이렇게 물을까요!!

 

즉 원망한 자를 받아주는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이다는 겁니다.

세 번 부인한 자를 받아주는

불의한 자를 받아주는

불의한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이다는 거죠.

그때 강퍅함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런데 시편 95편 설교자들이 그것을 정작 빼버리고

완악함을 이야기 하고 있으니

얼마나 강퍅한 줄 몰라

착한 목사

바른 목사

이단소리 안하는 목사 라는 것을 알아 달라는 속내가 훤희 비치는 설교뿐이야

그게 강퍅함입니다.

강퍅하지 말라고 설교하는 바른소리 한다고 우기는 목사들이

바로 강퍅하다 말이죠.

 

이게 마귀입니다.

 

그래서 왜 제가 기존의 인터넷상에 있는 시편 95편의 완악함에 대한 설교를 보면서

왜 정반대로 완악함을 해석한다고 하느냐 하면

긍휼 자체가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용서이다는 겁니다.

구원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들 설교들은 구원도 긍휼도 용서도 원인에 따른 결과로써 구원이다는 사고방식 때문에

 

강퍅함도 원인에 따른 결과로써의 완악함으로 설명을 하더라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구약의 시선에는 맞아요

물론 틀린것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십자가 사건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맞다 칩시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그게 왜 틀린고 하니 바로 그런 사고방식으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더라 말이죠.

 

물 없는 곳으로 인도했으니 당연히 원망하죠.

시험을 만났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그 원망을 통해서 긍휼을 주시는 겁니다.

원망 안해서 긍휼을 주시는게 아니라

원망을 했기에 용서한다 말이죠.

 

바로 그 십자가의 지혜가 싫다 라는 겁니다.

이런 반칙 중에 반칙이 세상에 어디있냐 말이죠.

긍휼을 베푸는게 싫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결국 결과적으로 따지자면

죄인 중의 괴수 만들기를 하는 피의 자작극이 된다는 것을 안 겁니다.

 

주님은 때려죽어도 버린 돌과 머릿돌의 그 간극을 좁힐 생각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선악적이라서

원망을 안하는 곳으로 인도해서 용서해주면 왜 안되느냐 라는 겁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이 사건이 더 깊게 들어가는 겁니다.

 

유대인을 장악한 마귀가 인간을 대변해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어떻게?

 

돌이 떡 덩이 되게 해 달라는 겁니다.

 

즉 쓴물 마실수 없는 물을 마실수 있는 물로 변하게 하는 나뭇가지를 던져서 마실수 있게 해 달라는 겁니다.

 

이거 므리바 사건을 염두한 것 아니냐 말이죠.

 

그래서 많은 목사들의 시편 95편 설교가 엉터리이다고 하느냐 하면

지금 마귀는 원망도 하지 않고 바로 오히려 믿음 좋게

주님은 쓴물을 마실물로 만드시고자 오신 구원자이다는 겁니다.

이제 알았다 구약에서 쓴물로 인도해서 마실물 주었는데

몰랐을때는 원망했지만 이제 우리는 원망안한다

? 돌을 떡덩이 만들 듯이 쓴물을 마실물로 만드실테니까

 

얼마나 믿음 좋나요?

실제로 바리새인들이 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입니다.

이게 바로 강퍅함이요 완악함이다는 겁니다.

 

이렇게 마귀는 세 번 예수님을 시험한 후에 잠시 떠났다고 하는데

계시록 전까지는 실제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떠난 마귀가 누구 속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시험하는 강퍅함을 보여주느냐 하면

위에서도 유대인은 수건을 벗지 않는 완악함에 빠졌다고 했듯이

바로 바리새인 속에 들어가서 끝까지 끝까지 예수님을 시험하는 강퍅함을 보여준다 말이죠.

그게 더 놀라운 것은 그게 바로 예수님이 심어서 이다는 겁니다.

자발적인 강퍅함은 없다 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더 약올리듯이 맏아들 보는 앞에서 탕자에게 긍휼을 입히십니다.

그렇게 되면 더 강퍅해 질 수 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시험을 만나면은 하나님이 나를 시험한다 생각하지 말래요

오히려 시험을 만나면 기뻐하라 라는 겁니다.

 

그것도 그냥 기쁨이 아니라 온전한 기쁨이다는 겁니다.

완벽 퍼펙트 완전한 기쁨이다는 겁니다.

 

(1:2, 개역)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아니 누가 시험을 만나면 기뻐하는 자가 어디있냐 말이죠.

 

뒤에 가면 더 가관입니다.

 

(1:13, 개역)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아니 물없는 곳 양식 없는 곳으로 누가 인도합니까?

하나님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안보여

그의 일을 대신하는 자가 모세 아닙니까?

그래서 모세를 죽일려고 달려든다 말이죠.

 

(1:13, 개역)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분명 하나님이 시험하시면서

하나님께 시험받는다고 하지 말랍니다.

 

아니 하나님이 시험하지잖아요

그런데 제가 믿음이 없어서 이렇게 너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실제로 선지자들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만 남았나이다

아니 이거 다 주님이 펼치신 일 아니냐 말이죠.

요나 선지자도 이렇게 외칩니다.

뺑뺑이 돌으라매 돌았잖아요

그럼 니느웨 백성 쫄딱 망해야지

왜 안 망합니까?

시킨대로 했잖아요.

 

맛사 사건에도 모세가 성질이 나서 두 번 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상황에 기뻐하라?

그것도 온전히 기뻐하라

 

자 이래서 성경말씀은 가능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불가능한 사건들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명 할 말이 있습니다.

너무 너무 불합리 하다고

바로 그겁니다.

주님의 불합리가

우리의 합리 보다 훨씬 뛰어난 합리이다는 겁니다.

그 불합리 만이 나를 구원하는 겁니다.

세상에 독생자를 원수에게 내어줌으로써

우리를 살리는 이유가 뭡니까?

이유나 조건이 있으면 그거 가짜입니다.

이유가 없어요.

도통 이해가 안되어야 해요

독생자를 버려서

원수를 살리는 법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는데

이 사랑을 원하는자 아무도 없습니다.

얼마나 불합리 하냐 말이죠.

 

시험이 어떻게 불합리한데

그 불합리를 온전히 기뻐하라 가 되냐 말이죠.

 

그런데 됩니다.

우리는 안되지만 주님은 됩니다.

 

그 불합리가 나를 구원하거든요.

 

내가 정죄하고 버렸고 세 번 부인했던 그 다말이, 그 예수님이

나를 도리어 살리는 머릿돌 예수님인데

이 모순된 불합리한 그 간극이 좁혀지면 안되는 이유이다는 겁니다.

 

난 예수님을 정죄하기 싫었고

원망하기 싫었고

세 번부인하기 싫었고

쓸모없는 돌이라고 건축자의 버린돌로 버리고 싶지 않았다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결과적으로 말입니다.

 

다윗은 어쩔수 없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게 되는

밧세바를 취해서

우리야장군을 죽이게 되고

심지어 여기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던 이름없는 아기까지 죽임을 당하게 되니

인간의 수준에서 죄책감의 백배 천배 만배의 무거운 짐에 의해 벌써 자살하고도 남았을텐데

뻔뻔하게 주님을 내가 사랑합니다 라고 세 번 외치고 있는 겁니다.

 

그 모순점을

예수님을 버렸다는 그 꼭지점 하나 찍고

그리고 다시 머릿돌이 되고

 

이 간극

 

나는 죽였는데 분명 죽였는데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 죽여라 그래서 죽였는데

죽은자가 도리어 나를 살리더라 말이죠.

죽은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말도 안되고

또 다시 살아났으면 왜 나를 죽이느냐 라고 나에게 복수하듯이 나를 죽여야 하는데

오히려 나를 살리는 말만 하더라 말이죠.

 

이 말도 안되는 모순점이 도리어 나를 살리는 일이고

도리어 불합리를 제거하기 위해서 합리적인 일만 했다고 자부했던

나의 행동들이 오히려 의문의 죽이는 것을 반복이 되어버렸을때에

 

누가 더 진짜 합리적이냐 말이죠.

 

나는 거짓말 때려죽어도 안했고 바른말만했는데

예수님은 말도 안되는 거짓말과 같은 헛소리만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팔이 어긋맞게 뒤 바뀌더라 말이죠.

참말만 했다던 나는 죽이는 의문의 반복이고

헛소리 같은 하나마나 한 말, 붕뜨는 소리들, 그 허구와 같은 말이 도리어 실상이 되어

살아 움직이는 날썬검처럼 죽은자를 도리어 살리는 살리는 영이였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미련함이 세상의 똑똑한 지혜보다 훨씬 더 지혜롭더라 말이죠.

 

부정의 부정이다는 겁니다.

 

자 이것을 설교자들은 이야기를 못하더라 말이죠.

왜 합리적으로 이야기 해야 하니까

 

그게 바로 강퍅함이요 완악함이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수건을 벗지 못하는 이유이다는 겁니다.

 

거꾸로 반대로 보고 있다 말이죠.

 

합리적으로 해야 하니까 그런 겁니다.

 

아닙니다.

불합리적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미련함으로 해야 합니다.

 

즉 십자가로 해야 한다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즉 완악함으로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마귀에게

 

돌이 떡덩이 되게 해 달라

쓴물을 마실수 있는 물 되게 해 달라 라는

강퍅한 마귀의 말에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인간의 신앙 곧 믿음은 저게 전부입니다.

주여 물없는 곳 양식 없는 곳으로 주님은 우리를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원망하지 않게 하셔서

쓴물이 돌이 먹을수 없는 것을

깨끗한 물 떡덩이 먹을수 있는 것으로 바꿔주시는 주님임을 믿게 해주소서 라고

 

오히려 믿음 좋게 기다리는 자세를

마귀가 강퍅함으로 시험한다 말이죠.

 

이미 마음 속에 바란다는 자체가

이미 시험하는 것이다 말이죠.

완악함 때문에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완악함을 설교하는 시편 95편이 없더라 말이죠.

오히려 완악하지 말자 라고 합리적으로 적었다고 우기지만

정작 내막들은 제발 완악해져서 예수님을 끝까지 시험하자 라고

완악을 부추기는 설교 밖에 없었어요.

?

너무 너무 합리적인 설교이기 때문에

불합리한 것 전혀 설교한 적이 없기 때문에

본인들은 옳게 설교했다고 보는 겁니다.

 

자기가 바르게 설교하는게 그게 그렇게 중요하냐 말이죠.

버림받는 돌도 안되고

머릿돌 되는 것도 거부하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런 것만 노리는 노림수만 가득해 보였습니다.

이게 윤리책인지 불교경전인지 도덕책인지 유교책인지

그들은 자부하죠 완벽하게 합리적인 내용만 채웠다고

그게 바로 완악함이요 강퍅이다는 겁니다.

 

(1:15, 개역)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1:16, 개역)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 유명한 야고보서 115절을 생각할 때 마다 누가 생각나느냐 하면

바로 다윗입니다.

 

바로 그 다윗이 하나님의 보좌 이다는 겁니다.

?

이스라엘 왕인데 왕이 아닌 자이기 때문에

이 모순의 간극 좁힐수 있는 사람 나와보세요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닙니다.

벌써 문장 자체가 말이 안되죠.

이 모순점을 그대로 증거하는 겁니다.

그런데 설교자들은 그런 모순점들을 다 제거해서 증거하니까

그게 강퍅함이다는 겁니다.

 

마귀들이다는 겁니다. 거짓복음이다는 거죠.

 

분명 장정만 60만명이 홍해를 건너 출애굽했습니다.

그런데 딸랑 두 명만 요난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갑니다.

심지어 모세도 탈락입니다.

 

자 일만달란트 탕감 비유에서 결과적으로 용서받은자는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따지면 약속의 땅에 들어간자는 없는 셈입니다.

그럼 용서가 실패해야 맞고 그것이 합리적이고

출애굽은 실패했다가 맞고 그것이 합리적인데

오히려 용서든 구원이든 하등 손해본 것이 없이 오히려 더 충만하다는 겁니다.

요단강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출애굽사건이 무색해질정도로 그 의미가 축소되던가요?

 

천만의 말씀! 오히려 구원의 날 사건은 더더욱 풍성해 집니다.

시편은 이 출애굽사건을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풍성했으면 말이죠.

 

그것을 도리어 마귀가 노리고 그때 광야에서 원망한 것을

원망하지 않는 신앙으로써 예수님을 세 번 시험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마귀의 강퍅함을 왜 오늘날 설교자들은 그대로 답습할까요?

이것도 무지 무지 기이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그 버린돌이 무가치 해지던가요?

아 전혀 안어울리는 돌 하나를 버리고나서 아이고 이제 건물이 이쁘네 하고 들어왔더니만

방금 버린돌이 안방을 떡 하니 차지하더라 말이죠.

이상하다 분명히 버렸는데

아이구 귀찮아라 다시 버리지뭐

이제는 저 바다에 연자맷돌 달아서 다시는 못돌아오겠끔 멀리 던져버리자

그래서 실컷 흡족해 하면서 합리적인 행동에 만족하면서

제대로 버렸고 그 버린것에 흐뭇해 하면서

돌아왔는데

또 안방을 차지하고 있는 버린돌이다는 겁니다.

 

이거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아니냐 말이죠.

 

며느리다말과 시아버지 유다의 사건인 돌 버전입니다.

 

웃씨 이제 안되겠다 이 돌을 아에 불속에 집어넣어서 가루로 만들어 버리도록

도가니 불속에 지옥에 집어넣어버리자

예수님을 그래서 지옥의 저주 속에 집어넣었다 말이죠.

자 그런다고 이 불합리가 합리로 바뀌겠습니까?

일만달란트 용서의 가치가 사라집니까?

출애굽사건이 축소 될까요?

 

오히려 더 증폭 됩니다.

 

제가 건방지게 앞의 글에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자 제발 이라고 했는데

세 번 부인 될 양반이 아니다는 겁니다.

백날 세 번 부인해 보세요 되나

세 번 부인 하면 예수님이라는 의미가 축소되고 퇴색되고 의미가 사라질 거야

천만의 말씀

더더욱 풍성해 집니다.

이 불합리를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 강퍅함이다는 겁니다.

합리적으로 만들겠다고 말이죠.

 

그래서 오히려 광야 40년 동안에

우리 속에 나올수 있는 더럽고도 더러운 것 나올수 있는 것 모조리 다 끄집어 내시는 겁니다.

원망 안하는 인간 만들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게 아니라

원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은 오로지 용서 긍휼이다는 겁니다.

 

그 용서에 반기를 드는 강퍅한 완악한 마음이

바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방식이였다는 겁니다.

 

맛사 사건에서

모세가 자 이렇게 기적 보여주고도 안 믿을래 라고

모세가 도리어 말려듭니다.

그래서 한번 쳐도 될 것을 두 번 칩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탈락 합니다.

 

이것을 마귀가 놓치리가 없잖아요.

그것을 써먹습니다.

 

세 번째 시험에서 말입니다.

 

온천하 만국의 영광을 줄테니 내게 절하라

무릎 꿇고 절하면

사람들이 니 말을 잘듣게 해 줄게

? 모든 권력을 쥐고 있으면

말 듣기 싫어도 인간은 말 듣도록 멀리서 뛰어와서라도 무릎꿇고 경배할 것이다 라는 겁니다.

즉 모세가 반석을 두 번 친 것을 염두한 겁니다.

 

얼마나 말을 지독스럽게 안들었으면

모세가 속이 터져서 두 번 쳤겠냐 말이죠.

 

모세 지도 실패하고

출애굽 장정 60만명 다 죽고

에이 이게 무슨 구원사건이고 실패인데??

그런 실패 하기 싫거든

 

모세 말 지독스럽게 안듣는 백성을

한번에 말 잘듣는 순한 양으로 만들 수 있는 권력을 줄테니 절하라 라는 겁니다.

 

이게 강퍅한 마귀가 행하는 하나님을 시험하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 목사들이 대부분 이런 사고방식입니다.

말 지독스럽게 안듣는 교인을 기여이 말 잘듣는 인간 만들어 보겠다고

그게 강퍅이예요

절대로 막 살면 안된다고 외치는 것이 강퍅이다는 겁니다.

정 그러면 그렇게 말하는 본인은 막살지나 말던가

지는 더 해요

평생을 막살아 와놓고 여전히 막살면서 말이죠.

 

막살지 말라 라는 것은 성경말씀을 억수로 생각해서 말하는게 아니라

자기 말에 지배 당하는 자로 만들고 싶어하는 취지 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강퍅한 말인지 몰라요 시험들게 하는 말이다 말이죠.

 

지는 막살면서 남은 절대로 막살면 안돼

 

즉 내가 니다 낫다 라는 우위선점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미쳐있는 놈들이 바로 성화론자 개혁주의자들이다는 겁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우위 선점

성전 중앙 센터 선점

너 세리 저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

 

사장 말에

모세 말에 토 토 토ㅗㅗㅗㅗ 토 달지 않는 인간 만들기 위해

온천하만국의 영광을 받아라

이것이 강퍅함이다는 겁니다.

 

결국 왜 설교를 하느냐

나 온 천하 만국의 영광을 받았으니

내 말 들어

까불지 마

까불면 삼대가 망할줄 알어!!!!

이런 목사들의 공갈 협박에 다 넘어가더라 말이죠.

소위 이름 있는 건전한 목사들은 다르더라?

더했으면 더했지

? 더더욱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니까 말이죠.

더 강퍅한 놈이더라 말이죠.

교회가 미신의 온상이다 말이죠.

강도의 소굴

 

모세가 자기가 원한 대로 이렇게 기적을 보여줬으면 말 들어야지

이렇게 보여줘도 안 믿냐 라고

화를 냈듯이

기적을 보여주면 더더욱 잘 믿을까요?

인간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강퍅해서

죄인 만나기기 하늘에 별따기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인간으로 안 보고 신의 자리에 두고서 보고 있습니다.

마귀 귀신이냐 아니면 성령의 전이냐 이것 둘 밖에 없어요.

3의 영역인 합리적인 영역은 없는 겁니다.

 

둘의 불합리적인 영역 밖에 없어요.

 

한 쪽은 말도 안되는 불합리한 용서이고

다른 한 쪽은 무조건적인 내어버려둠입니다.

 

둘 다 편파적이다는 겁니다.

이 불합리가 합리보다 더 합리적이다 말이죠.

 

그렇게 열심히 율법 지킨 말씀을 지킨 자를 너희 애비는 마귀다 라고 얼마나 불합리한 말만 하시느냐 말이죠.

 

또 너희는 신이다 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에 더더욱 불합리하게 더 깊게 들어가서

성령의 전인줄 몰랐니 라고 하십니다.

 

완전히 편파적입니다.

 

오죽하면 이것을 창조주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 허물 밖에 안보이니까 말이죠.

하나님의 불의 밖에 안보이니까 말이죠.

 

(9:19, 개역)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9:18, 개역)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9:19, 개역)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9:20, 개역)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9:21, 개역)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9:22, 개역)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9:23, 개역)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9:24, 개역)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9:25, 개역)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9:26, 개역)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9:27, 개역)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9:28, 개역)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9:29, 개역)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9:30,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9:31, 개역)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9:32, 개역)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9:33,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즉 우리가 무릎 꿇을만 해서

그런 조건을 하나님이 갖추었으니 우리가 무릎 꿇을께요 라는

합리적으로 따져서 무릎 꿇는 원리가 아니라

 

오히려 불합리적인

즉 내가 싫어서 버렸던 그 돌이어야만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자랑스러워 하는 머릿돌이다는 겁니다.

 

그 불의가 그 허물이 나를 구원해 버렸고

다른 한 쪽은 오히려 버려버렸기 때문에

이 거룩을 이 갈라놓는 분리를

불의하다고 허물뿐이다고 외칠수가 없는 겁니다.

그 불의가 나를 구원해 버리는 모순이 되어버렸기에

비밀이 되어 버렸기에

편파 무시험합격을 시켜버렸기에~~~

 

이것을 찬양이라고 합니다.

유다에게서는 찬양의 홀이다는 겁니다.

 

(49:8, 개역)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49:9, 개역)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49:10, 개역)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49:11, 개역)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49:12, 개역)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이것이 찬양대요 하나님의 군사요

칼과 창이 아닌 찬양으로

무슨 찬양? 내가 버린 돌이 나의 머릿돌이다는 찬양만을 외침으로써

이 모순점을 자랑하는 찬양으로써

남들은 10월 달인데

이스라엘은 추수의 날인 10월 달이 신년 11일이 되는 겁니다.

구원받은 날

물론 유다지파 다 깨어집니다.

10월달이 신년이 되는 1월 되는 것 다 깨어집니다.

? 다 실패해야

그림자는 누락되어야

실상이 나타났기에 상관이 없는 겁니다.

 

예수님만 제대로 찬양하였지

유대는 실패했죠.

그렇다고 찬양이 축되거나 그 의미가 퇴색되던가요?

오히려 실패를 통해서 실상의 찬양을 더욱더 보게 되었듯이

제발 실패하자 말이죠.

제발 세 번 부인하자 말이죠.

제발 막살자 말이죠.

 

? 이 불가능성에 더더욱 불가능한 말도 안되는

찬양 그 자체가 되신 예수님을 다 이루신 십자가의 용서라는

또렷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왜 시편 95편을 설교하는 자들이 완악함을 오히려 강퍅케 거꾸로 증거하느냐?

누가 꾀더냐 ~~~~~~

 

그래서 시편 대로 오셨고

이것이 찬양이고

이 찬양을 거부하는 자들이 바로 시편을 달달 외운자로써

시편대로 이루시는 자를 죽이는 겁니다.

 

이것이 강퍅함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미 모든 자를 무릎 꿇게 만드시는 그 십자가를

그 불의함을

그 불륜을 다 이루셨습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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