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이 중헌디! 참람죄 여! 너희는 신이다 여!! (시편 82)

 

 

(82:6, 개역)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10:34,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율법에, '내가 너희를 신들이라고 하였다' 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너희의'가 없음 82:6

 

(10:24, 개역)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10:25,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10:26, 개역)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10:27, 개역)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10:28, 개역)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10:29, 개역)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10:30, 개역)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10:31, 개역)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10:32,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10:33, 개역)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10:34,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10:35, 개역)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10:36, 개역)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10:37, 개역)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10:38, 개역)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10:39, 개역)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고아 과부 나그네 였던 이스라엘을,

가장 미천했던, 가장 미약했던 민족이여서 선택했던 이스라엘을(신 7:7),

하나님의 회 의 자리에 까지 앉혀서( 82: 1)

재판자의 자리에 까지 앉혀놓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주님의 긍휼을 자랑하라는 이유였다 말이죠.

 

그래서 너희는 신이며, 지존자의 아들이다 라고

그 자리에 앉히신 분을 자랑하라는 취지였는데

 

원래 고아 과부 나그네 출신이였던 자가

도리어 고아 과부 나그네를 핍박하는 자로써

그 자리를 모독하는 자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 시편의 상황, 시편 82편의 상황인

다윗을 핍박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다시 재현하듯이 예수님을 참람죄로 십자가의 세가지 죄목중의 하나로 몰아가는 사건이

드디어 표출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편에 기록된 대로 너희를 신이다 라고 했던 말씀을 인용해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그 전에 요 10장 앞에서 이미 유대인의 성질을 빡빡 긁어댄 터라

그 말씀은 오히려 유대인을 강퍅케 만드는 셈이 된 겁니다.

아무리 시편에 기록이 되었다 하더라도 말이죠.

 

자 그럼 이렇게 예수님이 나오니까

유대인들은 무조건 반대를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반대로 겸손 모드를 취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교만하기 짝이 없는 발언을 한 것이다 라고 몰아붙이기 위해서

겸손 모드를 취한다 말이죠.

 

예수님은 더더욱 저들의 의도를 강퍅하게 몰아 붙이기 위해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시고자

 

아니 시편에 기록됐잖아

율법에 기록되기를

너희는 신들이다 라고 말이다

 

시편에 기록된 것이 유대인을 위해야 하는데

예수님을 위한 기록이기 때문에

그것에 반대하기 위해서

시편에 기록 되어도

반대하는 겁니다.

 

율법에 기록된 것은 오로지 유대인을 위한 것이지

예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함부로 입에 잘 담지 않고 조심 조심하는 것을

예수는 아주 버릇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막써먹는 시편이니

참람죄로 몰아붙이지 않으면

막 써먹게 된다 말이죠.

 

그래서 등장한 수많은 이단들 땜에 얼마나 골치아프게 교리를 형성했는데

그것을 막 써먹어 ~~~~~~

 

너 귀신 씌였지~~~~~~

 

그런데 자기들끼리도 논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아니 귀신 씌인자가 어떻게 귀신을 쫏아내고 소경을 고치겠느냐?

우리가 다 봤지 않느냐 라는 겁니다.

(요 10:19, 개역)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요 10:20, 개역)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요 10:21, 개역)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물론 예수님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감정적으로 예수를 몰면 지는 것이다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예수의 이단성을 밝혀 내어야지

그렇게 대충했다가는 오히려 우리가 손해보게 된다는 식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그들의 눈에 까시입니다. 그 가시를 어떻게 제대로 뽑아내느냐인데

잘못했다가는 살 속에 더 깊게 들어가게 된다는 것에서

조심 조심한다 말이죠.

 

아니나 다를까

여전히 예수는 버릇없이 교만하게 말을 함부로 막 막 해 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귀신 씌인 강퍅케 된 유대인이다는 겁니다.

 

왜냐! 예수님을 마귀로 몰아야 하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들이 그런 마음을 더더욱 곤고하게 만들기 위해서

귀신 씌인 아이가 했던 말처럼

 

뭣이 중헌디!! 참람죄여! 너희는 신이다는 율법기록이여!!

 

저봐라 저봐라 귀신씌인자가 그런 대사를 하는데

예수 너가 바로 귀신씌였다는 증거 아니냐

 

너희는 신이다는 시편 82편 말씀을

우리는 겸손하게 감히 신의 자리에 우리를 놓지 않는데

너 예수는 서슴없이 신의 자리에 너를 놓는 구나

그러니까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는 소리를 막 하는 이유이다는 겁니다.

원인이 귀신씌여서 그래서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겁니다.

불법을 저지른다고

감히 교만하다고

예수 너는 불경하다고 불의하다고 말합니다.

마귀가 말이죠.

마귀가 예수님한테 말이죠.

 

여기서 귀신 씌인 유대인이든 예수님이든

이미 대화가 처음부터 갈라졌기 때문에

아무리 같은 성경을 보더라도

오히려 성경말씀이 이들 둘을 더더욱 갈라놓는 입장이다는 결과가 덮쳐졌다면

 

유대인도 무조건 예수님이 하는 말에 반대해야만 하는 강퍅함을 보여줘여만 하고

예수님도 이들의 속내 내막을 들추어내는데 열중하시는 겁니다.

 

대화라는 언어를 통해 소통할려고 하면 안됩니다.

좁힐려고 하면 안되요

오히려 더 그 간극을 넓혀버리는 겁니다.

어차피 저쪽도 그러하니까 말이죠.

 

시편 82편에서 너희는 신들이다 했죠

그런데 그 시편 82편의 내용은

신이다는 놈들이 오히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압제하고 핍박했다는

책망의 내용이다는 것을 유대인들이 잘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유대인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서슴없이 율법에 기록하기를 너희는 신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라고

그때의 그 사건을 또 끄집어 내는 겁니다.

 

신이면 뭐해? 고아 과부 나그네를 압제하는데!

성령받으면 뭐해!! 막사는데!!

이 모순인 그 간극을 그들은 견디질 못합니다.

부끄럽거든요. 싫거든요. 거리끼는 걸림돌이거든요.

 

그러니까 요한복음 10장에서의 바리새인의 태도는

너희는 신이다는 말씀을 포기하는 대신에

즉 성령받은자 아니냐 라는 말씀을 포기하는 대신에

 

고아 과부 나그네를 핍박하는 재미를 추구하는 것을 감추는 식으로

말씀을 취사선택해 버린다 말이죠.

간극을 좁혀 버린다 말이죠.

오늘날 성화론자나 개혁주의자들이

이웃을 설정하기는 원수가 아닌

자기를 위한 이웃으로 설정해서 이웃사랑실천을 외치듯이 말이죠.

 

아니 그런다고 다윗을 핍박했던 이스라엘이 모습이 사라지냐 말이죠.

 

성령도 포기하고, 다윗을 죽이는 마음을 그대로 간직할려고 하고,

 

광야에서 세 번 원망한 사건인 두 사건

므리바 사건과 맛사의 날 사건을

마귀가 정작 이용해서

재편집 각색해서

주님께서 강퍅을 심으신 것을 안들키고 감추고자

믿음이 있는 척으로

광야의 원망을 원망하지 않는 방식으로써

예수님을 시험하더라 말이죠.

 

말씀에 동일한 일치성은 오히려 우리고

예수 너는 일치하지 않은 참람죄를 저지르는 자이다는 겁니다.

그렇게 몰아붙여야 그 일치성이 맞다는 주장을 합리화 할 것 아니겠습니까?

 

쓴물이 마실물로 바뀌게 했듯이

주님은 모세처럼 그렇게 하실꺼죠?

그때 이스라엘은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원망했지만

이제 우리가 그때의 사건을 알기 때문에

원망하지 않을테니까

쓴물을 마실물로 바꾸셨듯이

먹지 못하는 돌을 먹을 수 있는 떡으로 만들어 주세요

라고

성경적으로 바꾸어서 이런 분이 메시아의 조건에 맞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경적인 내용으로 들이대는데

예수님은 어딜 감히 하나님을 시험하느냐

사람은 떡으로 사는게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 말이죠.

 

모세는 짜증내어서 이렇게 기적을 베풀어도 의심하느냐 라고

반석을 두 번 쳐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했는데

오히려 탈락했으니

 

나 마귀는 그런 모세의 실수를 하지 않고

또 예수 너도 모세가 말빨이 없어서 사람들에게 먹혀들지 않았듯이

이 힘만 한번 잡사봐 사람들이 너에게 넙쭉 넙쭉 절할꺼야

미리 모든 권능을 가져서 그 권능에 모든 사람이 무릎을 저절로 꿇게 해줄테니 절하라 라고 하는 겁니다.

 

너 예수도 힘 없으면 모세처럼 짜증내어서 결국 탈락할꺼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온천하만국의 영광과 능력을 받아서

말을 저절로 듣도록 하는게 아니라

저절로 무릎 꿇어 경배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십자가에 죽으러 간다고 하니

모조리 세 번 부인하도록 만드신다는 겁니다.

도저히 예수님에게 무릎 꿇었다가는 같이 죽임을 당할까봐 못하겠다 로

만들어버리시는 겁니다.

그런다고 예수님이 손해 보거나

구원의 능력이 축소 될까요 아니면 더더욱 풍성해질까요?

 

왜 십자가는 힘도 영광도 능력도 권능도 없는 하나님의 저주라니깐

아무도 순종 못하도록 했다 말이죠.

왜 저주를 왜 뒤짚어 쓰냐 말이죠.

 

그러니 마귀의 소욕과 정반대의 길이다는 겁니다.

저주를 받는 길로 가더라 말이죠.

단 한 놈도 못 따라 오도록

저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길로 가도록 말입니다.

 

그러면 마귀는 더더욱 동일성 일치성을 추구하도록 부추기는 겁니다.

너 그러면 모세처럼 실패케 돼

모세처럼 탈락하게 돼

구원자가 또 와야해?

제대로 무릎 꿇게 만들려면 온천하 만국의 영광을 받기만 하면

다들 저절로 순종한다니깐

알아서 자발적으로 무릎 꿇는다니깐

그럼 미션 완료야

왜 자꾸 실패하는 길로 갈려고만 하니 ~~~~~

너도 성공해야지 성공 ~~~~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마라

다만 그만 경배하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마귀가 괜히 모세의 탈락 곧 모세의 화냄을 들고 온게 아니다 말이죠.

 

바로 이런 식으로

유대인 바리새인이 율법 시편에 기록된 너희는 신들이다 라는 시편 82편의 오남용을

바리새인들이 너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조심에 조심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막 함부로 말을 하더라 말이죠

 

너 신이잖아

나도 신이야

아버지와 나는 하나야

 

너 신 아니니?

 

성령 받은자 아니니?????

 

성령 받은자로 취급해 줘도

예수의 꿍꿍이를 몰라서

자기가 하는 짓으로 예수도 그렇게 한다 싶어서

갑자기 조심 조심 한다는 겁니다.

 

조심 하고자 하는 자한테 막 함부로 말을 막하니까

 

졸지에 두 소욕이 분명하게 갈라지더라 말이죠.

 

즉 이 간극을 좁히고자 하는 차원이

예수님도 아니요

바리새인도 아니다는 겁니다.

 

바리새인도 죄목을 참람죄로 몰았다는 것은

자신들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는 자신들의 변호 변명을 깔고 가는 것이잖아요

마치 마귀가 예수님을 세 번 시험하면서

자신이 장악한 유대인들을 제발 제발 구원해 달라

이런 구원자 되어달라 라고 하듯이 말이죠.

얼마나 기특하기 짝이 없는

평강이요 평강이요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이 바로 강퍅함을 심으신 대로 그 티를 팍팍내는 겁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이런 긍적인인 마귀의 주장에

삐딱하게 부정하게 불가능성과 함께 머무듯이

참선지자가 그랬듯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어 유혹하느냐 라고

모순점을 제거할 생각이 전혀 없으시다는 겁니다.

오로지 십자가 라는 부정성, 불륜, 불의함으로 밀어 붙이신다 말이죠.

 

바로 이렇게 마귀의 정체를 마귀의 기능을 복음전파 전에 들통내심으로써

그 마귀의 수법을 누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바로 바리새인이여 유대인이며 오늘날 우리가 그런 식으로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다 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해야 할 판국에

오히려 강퍅함을 더 노골적으로 펼침으로써 하나님에게 까지

그 강퍅함을 드러내더라 말이죠.

그래서 시험하는 겁니다.

 

자기들끼리 귀신들린자를 고치지 않았냐

여기에 대해서는 반박할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불리하다 라고

자기들도 앞뒤 안맞는 모순적인 논리로

 

예수님을 무조건 몰아붙이는데 있어서 한계점이 있어도

오히려 그것이 더더욱 부추기게 되는 판국에

 

예수님은 더더욱 성질을 끍어버리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고

 

벼르고 벼르고 있는 저들에게

참람죄로 어차피 뒤짚어 씌울게 아니냐 라고

주님이 아예 저들 좋으라고

밀까부듯이 까부는 초정밀 조사에

꼬투리 잡을려고 하는 자들에게

아예 큰 꼬투리 증거물을 주더라 말이죠.

 

그 미끼를 덮썩 물더라 말이죠.

 

이야 드디어 증거 잡았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수 있는 죄를 드디어 잡았다.

이제 예수 박멸이라는 우리의 꿈을 주님이 이루어 주시는 구나 라고

좋아라 할 것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시편 82편이 살아서 지금 이 상황을 그대로 만드는 줄도 모르고

제대로 올무에 걸려들더라 말이죠.

 

여기에 중요한 것 하나가

심지어 다윗도 그랬다 라는 겁니다.

마귀 잡을려고 쳐놓은 올무에

다윗이 걸려들었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 조차도 주님의 계획이다는 겁니다.

그럼 빠져나오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의 불의함이다는 겁니다.

편파판정이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면서 이스라엘의 왕이 아닌

졸지에 틈이 생기고 간극이 생겨버리는 겁니다.

 

그 틈에서

그 불의한 틈에서

다윗은 주님의 용서를 봤던 겁니다.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는다 라는 율법을 뒤엎어버리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됩니다.

 

주님이 원하는 제사는 인애와 자비인 상한심령이다는 것을

바로 이 기준에 의해서 참선지자가 활동하고

반대로 거짓선지자는 평강이다 평강이다 번제와 제사 라는 의문의 죽이는 것을 반복하는 역할로써

백성을 꾀는 역할을 하더라 말이죠.

 

그러니

나는 신이 맞습니다. 그러나 나는 신이 아닙니다 라는 모순되는 간극이 있어야 하는데

 

유대인과 바리새인이 무슨수로 그 간극을 만들어 낼수가 있냐 말이죠

 

오히려 예수님에게 유대인의 왕이다 라고 조롱하고

자칭 신이다 자칭 하나님이다 라고

참람죄를 뒤짚어 씌우고

그렇게 온갖 죄악을 뒤짚어 씌워서 십자가 라는 하나님의 저주를

그들 자신이 하나님의 대리자 로써

너희는 신이다 라는 그 신됨을 나타냄으로써

 

정작 예수님에게는 간극을 만들어 주고

정작 반대로 자신들은 동일성을 추구함으로써

 

시편 82편 그대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핍박하는 것이 들통나게 하시는

십자가 라는 거리끼는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이제 예수님이 우리가 버렸던 그 버린돌 예수님이

나를 용서해주시는 분으로 보이느냐

아니면 강퍅함 그대로

그 모순된 그 간극 속에서 태어난 이스라엘이 아니기에

처음사랑을 버렸듯이

자칭 이스라엘이라고 하면서도 이스라엘의 특이성인 처음자리를 스스로 발로 차버렸듯이

여전히 신의 자리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하다 하다 이제는 예수님을 죽이는

신을 죽임으로서

스스로가 신의 자리를 파괴하는

처음사랑을 스스로 발로 차버리는

누워서 침뱉는

자기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스스로 속임을 당하는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21:33, 개역)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1:34, 개역)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21:35, 개역)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21:36, 개역)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21:37, 개역)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21:38, 개역)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21:39, 개역)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21:40, 개역)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21:41, 개역)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21:4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21:43,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21:44, 개역)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21:45, 개역)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21:46, 개역)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십자가의 지혜에 말려들어서

강퍅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너희는 신이라 하지 않았느냐 라고

마치 인심 후하게 쳐주는 아줌마처럼 막 퍼주니까

그것에 안 넘어갔다고 자부하는 것이

바로 자기 꾀에 넘어가는 식이 되는 겁니다.

 

예수한테 속으면 안돼

속으면 절대 안돼 라고

자기가 했던 버릇을 예수님이 역으로 해 오니까

안 속겠다고

속지 않겠다고 하다가

제풀에 자기가 걸려 넘어지는 식이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참람죄로 뒤짚어 씌울려고 했던 그 강퍅함의 결과가

예수님께서 너희는 신이라 하지 않았느냐 라는 말씀을 거부하는데서

더 더욱 촉발이 된 겁니다. 확장 확대 되는 겁니다.

 

아무리 맞는 말씀이다고 수긍할려고 해도

이미 조직의 분위기가 그런 입장에서 반대를 할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것이 강퍅한 마귀세계이다는 거죠.

방대한 힘의 세계이다는 거죠.

반대하면 죽임당하거든요.
반대했다간 연자맺돌에 달려 쥐도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하는 겁니다.

안 당할려면 역으로 연자맷돌을 뒤짚어 씌워야 합니다.

그 죽임으로 몰고가고 있는 것이 예수님를 처음부터 죽이고자 했던 것인데

감히 그런 권력에 누가 도전하겠냐 말이죠.

 

아무도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내부자가 되어서 그들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내부자들 영화 보시면

불가능한 상황인 그 권력을 무슨 수로 깨냐 말이죠

바윗에 달걀 던지기 식 밖에 안되니 말이죠.

 

그런데 틈 사이에서

간극 사이에서 이스라엘이 나왔거든요.

그들도 거기에서 시작했거든요.

 

그럼 모순을

불륜을

불의를 추구하면 됩니다.

즉 반대를 위한 반대를 말이죠.

부정의 부정 말이죠.

 

그들의 내부자가 되면 된다 말이죠.

 

그래서 광야에서 제발 세 번 부인하라 라고

예수님이 오히려 응원해주시고

격려 해 주시는 겁니다.

 

이것을 지금 바리새인은 거부하는 거죠.

감히 그런 막말을 하다니

교만하구나

함부로 그런 말을 하다니

참람죄이구나

 

라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에 분해서가 아니라

속으로 좋아라 죽는 겁니다. 드디어 잡았다 라고 신나하는 거죠.

 

바로 이것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이 듣고싶어 했던 그 말을

내부자가 되어서 말씀하셨던 겁니다.

 

십자가의 흔적에 대해서 말했죠.

십자가를 말하면 부끄럽게 만들어주마

부끄럽게 만들어 주겠다는 자체가

자기들이 그것이 부끄럽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겠다 라고 하는데

오히려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자랑이요 영광이요 하나님의 능력이다는 겁니다.

부끄럽기는커녕 자랑꺼리이다는 겁니다.

 

어 우리는 싫어하는 것인데

왜 쟈들은 자랑스럽고 영광스럽다고 하지?

 

당연히 저들은 모르는 겁니다.

이 간극을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신이라 라고 내부자가 되어서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마치 저들이 거부하는 부끄러움이요 싫어하는 매국노 세리 삭개오 집에 들어가듯이 말입니다.

바리새인은 더더욱 놀라는 거죠

 

죄인의 집에 들어가서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는가?

 

이게 반대를 위한 반대이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들어갈수 없는 곳만 골라서 들어간다 말이죠.

 

 

(4:4, 개역)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4:5, 개역)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4:7, 개역)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4:9, 개역)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그것이 사마리아 지역에 막 들어가는 겁니다 막

저들 유대인들은 피해서 삥둘러서 가는 길을

가로질러서 사마리아에 막 들어가요

오히려 누가 당황하냐 말이죠

우물가의 여인이 당황하는 겁니다.

 

제사장 레위인이 피해서 가는 강도만난자인 시체가 된 피를 흘리는 부정한 자를

선한사마리아인은 막 돌봐줘요 막

 

저들이 부정하다고 피한 것을

오히려 부정의 부정으로써

반대를 위한 반대로써

 

부정하다고 하는 곳만 골라 다녀요

 

이것이 내부자 가 되는 겁니다.

 

마귀를 피해가는게 아니라

마귀세계 속에 들어가서

마귀에게 잡혀서

바벨론에 잡혀서

탁란 하듯이

예수님께서 내부자가 되어 탁란하셔서

빠져나올때에 해체시키는 한방을 날려서 십자가의 용서를 다 이루신다는 겁니다.

 

어디서 듣긴 들었는데 기억이 가물 가물하네요

뱀에게 물려 죽는 동물이 죽을 때 뱀에게 잡혀죽으면서 새끼를 낳는데

이 새끼가 뱀 속에서 깔아먹다 보니

뱀이 해체가 되는 겁니다.

뱀이 오히려 새끼의 영양분이 되더라 말이죠.

뱀 바깥에서는 오히려 뱀에게 잡혀 먹힐수 있는데

뱀 몸 속에서는 오히려 뱀이 잡혀먹히는 겁니다.

 

아니 뱀 입 속에 있는데?

이 모순점이 이해가 되냐 말이죠.

그런데 이것 보다 더 지혜로운 지혜가 어디있냐 말이죠.

 

오소리였나?

하여튼 그런 동물이 있데요

 

내부자가 되는 겁니다.

 

죄인의 친구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긴다고 별명을 지어줄정도로 말이죠.

 

그래서 마귀의 세계를 거쳐서 십자가의 용서를 이루시는 겁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거다 말이죠.

뱀에게 잡혔습니까?

마귀에게 베드로가 잡혀버렸습니다.

주님은 마귀처럼 원인 안따집니다.

베드로는 내부자가 되었다고 죄책감 뿐이였겠지요.

그러나 결정적인 한방은

단번에 완료하심은 바로

 

피 용서 자랑이냐

너의 죄책감이냐?

 

뭣이 중헌디!!!

 

피요

 

왜 하나님의 회에 참여케 하고

왜 너희는 신이라고 하고

왜 재판관의 자리에 앉혔는지 아느냐?

 

피 자랑 하라꼬 ~~~~~

 

그런데 악을 이길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아니 없어야 합니다,

없으니 잡힐 수밖에 없다 말이죠.

 

세 번 부인 할 수 밖에 없다 말이죠.

그런데 걱정 하덜덜 마라

피는 피 스스로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서

피를 영광스럽게 만드니까 걱정 하덜덜 말라는 겁니다.

 

오히려 마귀에게 잡힌 것이

이 피 자랑의

피의 지혜에

피가 인도한 것이니

걱정 하덜덜 말라는 겁니다.

피의 자작극이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시편 82편은

시편 82편을 달달 외우고 있는 유대인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신이 되어서

도리어 고아 과부 나그네를 핍박하는 자가 됨으로써

나의 손에 죽임당한 진짜 고아 진짜 과부 진짜 나그네이신 예수님이

도리어 신이 된 나를 살리는 또렷함 때문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더 잘아시잖습니까 라고

 

시편 82편을 이루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 사랑은 없는채

지키기로

외우기도

행하고 실천함으로

때울려고 했는데

 

실상 실체 앞에서는 택도 없는 것들이기에

오히려 그런 것들을 다 한방에 날려주심에 오히려 감사하고

이 마귀의 세계를 구멍 뚫는 십자가가 고마운 겁니다.

 

이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고서는 입이 건지러워서 못삽니다.

 

주님의 피를 자랑하고파 온몸이 건지러운 겁니다.

 

바로 그런 심정으로 주님은 너희를 신이라 하지 않았느냐 라고 하시는 겁니다.

 

얼마나 벅찬 마음으로써 그 시편 82편을 말씀하셨는데

유대인은 나는 절대 신이 아니다 라고 거부하는 겁니다.

어떻게 해서든 죽이고픈 마음에

마침 맞춤맞게 맞춘 듯이

예수가 참람한 말을 해줌으로써 잡게 되는데

도리어 이것이 예수님에게 마귀가 잡히게 되는 방식인

십자가의 피 자랑이다는 겁니다.

 

뭣이 중합니까?

나의 죄책감

세 번 부인한 것

그게 중합니까?

 

아니면 이런 놀라운 피를 자랑할것입니까?

 

마귀 세계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피 라는 주체는

주체를 못할 정도로

마귀 보란 듯이 십자가의 용서를 막 뿌려대는 겁니다.

마귀가 듣기 싫어하고

꺼려하는 죄인의 집에

막 들어가서

막 먹고

막 마시고

막 함께 하시는 겁니다.

마귀는 그렇게 해체되는 겁니다.

 

맏아들 보는 앞에서 탕자를 자랑하듯이

마귀 보는 앞에서 예수님은 죄인 중의 괴수인 우리를 이유없이 무조건 용서하는

십자가의 피를 막 자랑하시는 겁니다.

 

마구 마구 막 막

 

뭣이 중헌디!!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디!!! 뭐가 중허냐고 ~~~~~

 

저들도 감히 부끄러워서 절대로 말 못하는 십자가의 저주를

우리는 자랑삼아 떳떳하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 잘 아시잖습니까? 라고

마귀 들으랍시고 마귀 보란 듯이 외치는 겁니다.

 

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잖아

참람죄 저질렀잖아

 

그래서 어쩌라고

 

뭣이 중한디!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뭣이 중허냐고 뭣이 중헌지 모르면서 꾀냐고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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