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이 야 야! 십자가가 어때서 ~~~, 피 자랑하기 딱 좋은 죄인 인데 ~~~~ (시편 98편)

새노래가 어쨌다구? (시편 98)

 

새노래(외설적 십자가의 명령)의 증상을 즐겨라 

 

땅을 심판하러 온 외설(불법)적인 십자가(새노래)

 

외설적인 십자가(새노래)가 나 보다 옳았습니다.

 

약속을 망치는 저 여자 다말이 오히려 원수인 나를 건지는 구원자였다니 아뿔사!!

어제의 불법이 오늘 나를 구원하는 영생의 법이였다.

 

땅을 판단하러 임하심; 어둠은 영접하지 않았으나 빛은 더욱더 빛나도다 (시편 98)

 

 

(1:5, 개역)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1:9, 개역)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10, 개역)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1, 개역)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12, 개역)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13, 개역)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1:14, 개역)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5, 개역)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16, 개역)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17, 개역)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18, 개역)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98:1, 개역) []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

(98:2, 개역) 여호와께서 그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 의를 열방의 목전에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98:3, 개역) 저가 이스라엘 집에 향하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의 모든 끝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98:4, 개역)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할지어다 소리를 발하여 즐거이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

(98:5, 개역) 수금으로 여호와를 찬양하라 수금과 음성으로 찬양할지어다

(98:6, 개역) 나팔과 호각으로 왕 여호와 앞에 즐거이 소리할지어다

(98:7, 개역)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과 그 중에 거하는 자는 다 외칠지어다

(98:8, 개역)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이 박수하며 산악이 함께 즐거이 노래할지어다

(98:9, 개역) 저가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로다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빛이 비추었는데 그 빛을 자기백성이 영접했더라

~~~

 

이래 되면 사건이 안됩니다.

 

좀 더 길게 해 볼까요?

빛이 비추었는데 그 빛을 자기백성이 영접했더라

그렇지만 상대적인 개같은 이방인은 영접하지 않았더라

 

요것이 유대인들이 원했던 스토리 이다 말이죠.

자아가 꿈꾸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래 되면 사건이 안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대부분 오늘날 교회의 설교들이 이렇게 설교를 하거든요.

특히 성화론자들 개혁주의자들 말입니다.
또 여기에 후발주자로 나선 틈새시장을 노리고 있는 신흥이단 집단들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결국 그들은 다른복음을 증거하고 있다는 겁니다.

사람을 좋게 하는 설교이다는 거죠.

 

사건이 될려면 반전이 일어나야 겠지요.

즉 십자가라는 외설이 개입하면 오히려 전복이 되어 뒤집어 집니다.
팔을 어긋맞게 된다는 거죠.

 

빛이 비추었는데 그 빛을 자기백성은 영접하지 않았으나


얼마나 특이한 반전입니까?

빛이 비추면 빛의 자녀는 그 빛을 영접해야 하는게 마땅한데

그것이 반대의 상황이 되는 빛을 영접하지 않았다가 되는 겁니다.


여기에 또 반전이 또 일어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던 자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는 겁니다.

(사 65:1, 개역)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주를 믿었더라 이래 되는 겁니다.

이중부정입니다.


즉 이방인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구원 얻으니

선민사상은 다 깨어지는 거죠.

 

저 원수같은 이방인이 구원을 얻게 되면

자칭 의인들도 의인이 아닌, 죄수 복을 다시 갈아서 입어서 같은 원수가 되어야하고

자칭 구원받았다는 자들도 개같은 이방인 곧 같은 죄인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주여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그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고 개가 되어야 한다 말이죠.


아무리 이스라엘로써 이스라엘 답게 행동할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죄 아래 가두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더 하다는 겁니다.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살아있는 영을 추구하는게 아니라

도리어 남의 허물을 코투리 잡아서 캐내는 죽이는 육을 추구하더라 말이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십의 이조 이레에 두번 금식 토색하지 않도록 저 세리와 단절시켜 주셔서 감사!!

 

이것이 죄 아래 제대로 가두어진 율법의 올무에 걸려들었다 말이죠.

원하는 바, 나는 하나님의 법을 원하지만

육체의 법이 사로잡아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 와중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십자가 라는 걸림돌까지

거리끼는 부딧힐 돌로써 작용합니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냐 말이죠.

 

외설적인 십자가의 긍휼의 개입은 바로 이겁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서 농부들이 거센항의를 합니다.
그렇다고 약속했던 삯을 안주던가요
?

그런데 왜 주인을 악하다고 할까요?

졸지에 주인이 선하지 않고 도리어 거리끼는 부딧히는 돌로써 작용한다는 겁니다.

졸지에 의인이 되기는커녕 죄인이 되어버리더라 말이죠.

 

(1:11, 개역)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12, 개역)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13, 개역)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결국 내가 원해서도 아니요

내가 달음박질 해서도 아닌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

이 빛을 영접한다는 겁니다.

권세가 그들에게 있지 않았기에 주셨다 말이죠.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9:18, 개역)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이 반전이 바로

십자가라는 사건입니다.

이 거리끼는 걸림돌을 신나게 노래하는 것을 새노래 라고 합니다.

새노래 또한 사건입니다.

새노래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것을 뒤짚어 엎어버리는 반전인 사건이 벌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떤 반전, 어떤 역설???

바로 그 빛을 영접하지 않는 자기 백성이라는 명확한 사건이 벌어져야 한다 말이죠.

 

그리고 또 역시나 이중반전인 자기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이 

어두움이라고 정죄했던 그 이방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백성이 되었다는

이 외설적인 불륜의 역설이 벌어지는 십자가 라는 사건 말입니다.

 

이 일방적인 편파적인 선포인 십자가에서

우리가 태어나는 겁니다.

이 모순의 간극에서 말이죠.

원래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인 모태가 원래 이 간극이였다는 거죠.

바로 긍휼 이라는 자궁에서 태어났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데 있어서

사실상 그들은 이미 이런 선입견을 가지고서 질문을 합니다.

 

너희 예수쟁이는 예수 만을 믿어야 천국 간다고

딴 사람은 안된다고

그래서 기독교만 천국가지

다른 종교는 지옥이다고

주장한다고 말입니다.

(행 4:10, 개역)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행 4:11, 개역)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행 4:12, 개역)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천국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만,

천국이 알고싶어서가 아니라

너거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 도대체 뭐가 그리 달라서 유난을 떠느냐 라는 시비였습니다.

도대체 뭐가 다르냐 라는 거죠. 다른 종교랑 뭐가 그리 다르냐 말이죠.

어차피 천국은 똑같은 목표점인데

가는 길이 각자 달라서 일 뿐이지

같은 곳을 향해서 가는 것 아니냐 라는 질문들이였습니다.

 

그냥 노골적으로 복 받는 것이 기독교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는 겁니다.

 

복 받는 것

 

참 노골적이지 않습니까?

복 받는데 무슨 놈의 복이 까탈스러우냐 라는 거죠.


주체가 너무 까탈스럽다는 겁니다.

 

이건 뭐 교회 안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제발 유별나게 믿을 필요가 없다는 식이

오히려 세상사람들 보다 교회 사람들이 더 강하게 주장한다는 겁니다.

 

결국 사람들은 모든 종교는 하나의 목표점인 천국을 향해 간다는 점에서

모든 종교가 같다고 보는 겁니다.

단지 자기 취향에 맞게

즉 문화생활에 맞게

달리 해서 갈 뿐이다는 겁니다.

 

참 하나 빼 먹을뻔 했는데

위에서 언급한 교인들만 그런게 아닙니다.

제가 만나봤던 목사들 중에서 대부분의 목사들은 결국

기독교 문화 운동가들 뿐이였다는 겁니다.

참한 교회를 세우고, 참한 교인들을 모아 알콩달콩하게 살겠다는 겁니다.

언제 그 속셈들이 보여지는고 하니

2년 정도만 가까이 지내보면 고갈나는 형태들이 똑같은 양상으로 드러나더라 말이죠.

 

이것은 모든 인간의 본능입니다. 어쩔수가 없습니다.

뭐 토착종교 즉 민속신앙 또는 민족신앙과 결합하든

유교와 기독교가 짬뽕이 되든

기존의 사상과 기독교가 결합이 되면

결국 하나의 같은 목표점일 뿐이지

가는 길만 다른 일종의 문화로 볼 뿐이다는 겁니다.

종교는 곧 문화이다는 거죠.

문화란 놀이이거든요.

 

실제로 구원장사를 하는 기독교는 일종의 문화에서 못 벗어나는 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교육관을 본관 보다 더 크게 지어서

소위 문화센터

놀이동산을 만드는 겁니다.

수영장도 있을 정도입니다. 노래방 교실, 꽃꼿이 교실. 악기 교실 등등

왜냐하면 결국 인간의 신앙으로 움직이고 유지되는 식이 되어버렸으니 말입니다.

가인이 에녹성(방어막)을 짖는데 집착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벨탑 말입니다.

하나님께로 나지 않았다는 티를 팍팍 내는 거죠.

 

그러나 이런 다른 복음과 차이나는 예수님은

바로 저런 천국을 박살내러 왔다는 점에서

모든 종교와 다릅니다.

천국 자체를 박살낸다는 겁니다.

같은 목표점이라고 여기고 있는 그것을 아예 원천 박살내는 겁니다.

 

일체 동일성이 없이 오로지 차이성으로만 다가오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반대를 위한 반대 뿐이다 말이죠.

 

천국 되신 예수님이 인간천국을 박살내러 왔습니다.

인간구원도 박살내러 왔다 말이죠.

하나님 되신 예수님이 하나님을 박살내러 왔다는 겁니다.

곧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과 같이 되어버렸거든요.

모든 인간을 십자가에 못 박고자 왔다 말입니다.

그래서 늘 자나 깨나 모든 인생은 헛되게 천국건설 곧 바벨탑건설에 평생 미쳐있습니다.

그 허구를 깨뜨리고자 오신 천국이다 말이죠.

 

즉 내세의 천국이나

지상의 현세의 천국이나(곧 종교나 그들의 성전이나 그들 교리나 신학이나 사상들)

모조리 심판하고자 임하는

땅에 침범하는 것이 복음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만이 구체적인 진짜 현실이다는 겁니다.

천국침노 말입니다.

가나안땅인 약속의 땅은 지금도 침략당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침노 당하는데 그 천국을 침략하는 자의 것이다는 겁니다.

예수님 밖에 없다는 거죠.

그 침략당한 천국을 예수님이 개봉하니까

다들 싫어하는 천국이였다는 겁니다.

바로 십자가 라는 무한영광이 천국이였다는 거죠.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천국이요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은 천국이였던 것이였던 것이였던 것이였습니다.

 

구원 얻은 우리에게는 오히려 십자가가 자랑꺼리가 되는 겁니다.

이 십자가가 아니였다면 휴 ~~~~ 지옥에서 못 벗어날뻔 했다는 겁니다.

천국이 지옥은 줄 모르고 갔다 말이죠.

 

IS 테러 보다 더 심각한 것이 복음입니다.

테러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무섭냐 말이죠.

현재 지금 세계는 테러에 대한 공포 보다 더 무서운게 없을 정도로 심각합니다.

마치 묻지마 살인과 같은 이유 없는 테러 아니냐 말이죠.

그래서 안 보이는 것에 대한 공포일수록 더 크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무서운 공포보다 더 더 더 심각한 공포가 바로

나를 이유 없이 사랑하고 용서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선언하는 공포 이다는 겁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부정의 부정이다는 겁니다.

 

도대체 십자가 당신! 도대체 원하는게 뭐요???? 케 보이!!!

원하는 것도 없고. 이유도 없이 그냥 죽음 속으로 몰고가는 겁니다.

나의 더럽고 부정한 죽음 보다 더 심각한 죽음을 보여주더라 말이죠.


나는 죽어서 좋은데 가겠다는 심뽀로 천국을 생각했지

또 엉터리로 살았다 싶으면 에이 뭐 죄 값을 받아 마땅하겠지 라고 지옥 가겠구나 등등으로 생각했지

 

죽어서 천국과 지옥이 아니라

 

살아있는 가운데 천국과 지옥이 직접 임해버리면

죽기전까지의 소위 내 인생이라고 우기는 그 나의 아주 작은 공간들은

모조리 차압당해 버린다는 겁니다.

부도 나버린 인생이다는 겁니다.

뭐 하기도 전에 이미 집에 딱지가 붙어버린다 말이죠.

이 소유물들은 복음이 소유물입니다. 손대지 마세요. 라고

차압딱지가 떡떡 붙어버린다 말이죠.

심지어 이제 나에게도 차압딱지가 붙어버렸습니다.

이 사람은 복음의 소유물이다 라고 말이죠.

 

아 그럼 복음이 나를 소유했으니

천국이겠네?

아니지요.

 

복음이 나를 소유했으니

천국에 보내든 지옥에 보내든

복음! 자기 마음대로 이다는 겁니다.

토기장이! 마음대로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이유가 없어요 이유가

 

거기에 차압당한 인생을 되찾아보겠다고 열심히 일하는 자가 언니 마르다 였고

그 차압당한 인생을 아예 룰루 랄라 신나게 즐기면서 노래 부르는 것이 바로

싸가지 없는 동생 마리아 이다는 겁니다.

 

꼭 맏아들과 탕자 같고

꼭 사울왕과 다윗왕 같다 말이죠.

십자가상의 두 강도와 같다 말이죠.

 

오늘 시편 98편이 그러합니다.

참으로 불가능한 노래입니다.

지난 시간의 97편은 진짜 말도 안되는 소리죠.

어떻게 포로 당해 갔는데

더 신나게 노래 부르냐 말이죠.

즉 새노래란 주님의 구원역사를 노래 이다고 했습니다.

포로 안 당했을 때 보다 더 신났어

무화과 나무 잎이 말라 버린 것을 보고

드디어 신나게 부르는 것과 같다 말이죠.

무화과 나무가 말라 죽지 않았다면 나올수 없는 새노래이다는 겁니다.

종말의 노래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소리를 복음은 더 신나게 외치고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 없으며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난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리라 ~~~~~

(합 3:1, 개역) 『시기오놋에 맞춘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

(합 3:2, 개역)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합 3:16, 개역)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

(합 3:17, 개역)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 3:18, 개역)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그런데 오늘 시편 98편도 그야 말로 또 역시나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이제는 포로에서 돌아와서 또 노래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야 이 두 사이의 간극이 생기지 않냐 말이죠.

바벨론 포로 당해서 점 하나 찍고

포로에서 귀환해 돌아와서 점 하나 찍어서

그 두 점을 이으면 한개의 면이 생기는데 바로 이 간극이 처음자리가 되는 겁니다.

이 간극에서 이스라엘은 태어났던 겁니다.

이스라엘 처음자리 말이죠.

 

완전 쫄딱 망한 판국에 이 무슨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인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냐 말이죠. 의미 없는 소리이냐 말이죠.

 

마치 이것은 주의 원수들이 뱀처럼 이스라엘을 삼킬려다가

오히려 자기 입이 찢어지고 배가 배탈이 나서

블레셋 신상들의 목 손 발 짤리듯이

창세기때 아브라함 아내 사래가 애굽족장에게 팔리듯 들어갔다가

오히려 저들의 여자들이 졸지에 태가 다 닫혀버림을 당하자

도리어 아내 사라를 뱉어버리듯이 내어놓듯이

그렇게 되돌아와서 주의 구원을 노래하는 데 있어서

저들 땅끝들이 주의 구원의 역사를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주님에게 달려들다가 작살났다 말이죠.

그 긍휼과 강퍅으로 두 갈래로 나누는 그 선긋는 기능을 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곧 아브라함이였듯이

이스라엘이 이 복의 근원이 되어서

이 세상 열방의 민족 끝까지 가서 두 패로 나누더라 말입니다.

사랑할 자 사랑(긍휼)하고, 미워 할 자 미워하는

거룩을 분리를 펼치신다 말이죠.

이것을 누리는 겁니다.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누리는 겁니다.

편파작업인 거죠

이유 없음 이다는 겁니다.

 

(98:3, 새번역) 이스라엘 가문에 베푸신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기억해 주셨기에, 땅 끝에 있는 모든 사람까지도 우리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만의 주님 되심이 아니라

온 우주 만물의 주가 되심을 보여주는 미리 앞당겨 보이시는 예고편처럼

 

앞의 시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 되기를 바랬지만

정작 주님은 온 열방의 주 이심을 보이시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이스라엘은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써 보여져야 하는데 정작 실패 합니다.

 

너희는 신이라 하지 않았더냐 라고 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참람죄로 몰아 붙이는 겁니다.


너희는 신이라 를 못 누리는 겁니다.

신 꼬라지가 이게 뭐냐고 참람죄로 몰아붙이는 마귀에게 포로 되었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모세는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신이 임한 선지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모세의 소망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의 소망이였습니다.

(민 11:29, 개역)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또 다윗은 자기 속에 정직한 영이 없음을 알고 정직한 영을 달라고 합니다.

없음을 알아야 달라고 할 것 아니겠습니까?

 

고아 과부 나그네였던 너희들을 재판장에 앉혀 놓고

주님의 긍휼을 외치라 했거늘

 

너희는 신이다 라고 신의 자리에 까지 앉혀 놓아

주의 긍휼이신 인애와 자비를 증거하라고 했거늘

 

그래서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했더니만

 

오히려 자신들의 처음자리인 고아 과부 나그네를 핍박하는 자였다는 겁니다.

 

처음자리였던 긍휼의 자리를 그들 스스로가 발로 차버리는 겁니다.

이것을 강퍅이라고 합니다.

그 완악함의 수건을 벗지 않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남의 눈의 티는 기가막히게 돋보기까지 동원해서 초정밀조사해서 들추어내는데

정작 자기 눈의 대들보는 못 보는 겁니다.

남들은 다 보는데 말이죠.

 

이스라엘의 의미를 개차반으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이 이스라엘의 의미를 포기 하시느냐?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주님 본인이 직접 이스라엘이 되어서 이 온 민족 열방에게

주의 자비와 인자하심을 증거하신다 말이죠.

 

여기에서 반전이 다윗 조차도 실패케 만들어서

너가 직접 그 죄인 중의 괴수가 된 입장에서

원수가 된 입장에서

물에 빠진 당사자가 된 입장에서 보라는 겁니다.

 

이유를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용서해 달라고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외치는

세리와 같지 않냐 말이죠.

 

바로 이 긍휼을 뽑아내기 위해서

주님은 심판으로써 실행하시는 겁니다.

솔로몬의 재판 지혜에서

십자가는 모두다 심판 속에 집어넣을때에

긍휼을 바라보는 자를 뽑아내시는 겁니다.

모두다 불뱀에게 물려 다 죽게 될때

나무에 달린 인자를 쳐다보는 자를 살리시는 겁니다.

 

그 심판 속에서 구원이

곧 주의 이름 앞에 무릎 꿇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심이다는 겁니다.

 

오히려 마귀는 하나님의 편에 섰는냥 편들다가

완악함을 들추어내시는 십자가의 용서 앞에서

비로소 안색이 변하는 겁니다.

 

오히려 무릎 꿇지 않고 마음이 완악해져서 끝까지 수건을 벗지 않은 원수는

이방이 아니라, 죄인 중의 괴수가 아니라, 탕자가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 곧 혈통 육적 이스라엘이 더하더라 말이죠.

의인 이스라엘이였던 겁니다. 한번도 아버지 말씀을 어긴적 없었던 맏아들이였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이 이방에게로 넘어가는 겁니다.

주님 아쉬운 것 하나 없어요.

빛이 어두움에게 비추이니까

정작 저들 이방인을 개같은 어두운 지옥의 자식이다고 욕했던 그 이스라엘이
오히려 빛을 영접하지 않은 어두움이였다는 팔을 어긋맞게 하심이다 말이죠.

 

(1:9, 개역)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1:10, 개역)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1, 개역)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1:12, 개역)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13, 개역)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그럼 그것으로 끝나면 참 좋겠는데

그렇게 되면 또 사건이 안되지요.

갭이 안 생긴다 말이죠.

 

어두움만 밝히시는 빛이 아닙니다.

빛의 자녀도 만드시는 겁니다.

 

지옥 백성만 들통내시는 것 뿐만 아니라

천국 백성도 같은 양상으로 이유 없이 만드시는 겁니다.

 

영접하는 자가 있더라 말이죠.

그런데 이들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에 의해 영접한자들이 아니다는 겁니다.

 

오늘 시편에서 역시나 기이하다 라는 신비함을 비밀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뭐가 기이하고 신비하고 비밀로써 놀라운 일이였을까요?

 

바로 이것이 바로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고 난 뒤에

그렇게 아이를 살려달라고 기도 눈물 금식 회개 라는 4종 세트를 드렸는데

 

그것이 안통했다는 것이죠

안 받는다 안 카나

받으소! 안 받을란다

어허 받으라 카이!

어허 안 받는다 카이

 

그랬던 다윗이

이제는 아예 먹고 마시고 씹고 뜯고 마시고 즐기고 하더라 말이죠.

신하들이 왕이시여 혹시 미치신거 아니시죠

 

아니다 안 미쳤다

내 눈물 내 기도 내 회개 내 금식이 아이를 살려낼줄 알았는데

씨알도 안 먹히더라

오히려 그 꺽으신 뼈가 나를 건지셨으니

이 아니 기쁠소냐 라는 겁니다.

 

이 부정성과 함께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 부르겠다고

꺽으신 뼈로 기뻐 노래하는 겁니다.

나는 예수님을 죽였는데 예수님은 날 용서 했다는

이 모순의 간극을 노래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새노래입니다.

뭐 뭐 십자가가 어쨌다고

뭐 뭐 새노래가 어쨌다고

남들이 뭐라해도 나 십자가 아니였으면 지옥에서 못 벗어났을 거야

남들이 싫어하고 부정하다고 거리끼는 걸림돌이고 실족케 하고 폐인이 된다고 우겨도

십자가가 나의 자랑인데 우짤껀데

이것이 나의 새모태이다는 겁니다.

나를 태어나게한 나를 낳은 처음사랑의 자리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신나게 다윗은 새노래를 즐겼겠습니까?

 

이 십자가라는 걸림돌을 만나지 않았다면

사울왕처럼 똑같이 왕이 되니 신이 되니 재판관이 되니

역시나 사울왕과 다를바 없는 원수짓만 했다 말이죠.

 

그런 원수 짓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삼켜버린 그 우리야 그 밧세바 그 이름없는 아기가

나를 도리어 뱉어내더라 라는 겁니다.

나를 새사람 만들기 위해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것이 되게 할려고

희생안타를 친 겁니다.

도대체 큰 물고기 뱃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냐 말이죠.

도대체 바벨론 입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이스라엘을 뱉어 버렸냐 말이죠.

 

블레셋이 삼켜버린 그 언약궤가 도리어 뱉어짐을 당해서

발도 없이 뚜벅 뚜벅 걸어오는데 있어서

 

블레셋도 다윗도 빛이 스스로 구원전쟁을 행하신 것을 봤듯이

바벨론도 이스라엘도

이 구원의 빛이

어두움 속에 있던

사망의 그늘에 주저앉은 양쪽 모두에게

 

빛으로 비추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빛되신 그리스도를 안 외치고 배기냐 말이죠.

새노래를 안 부르고 배기냐 말이죠.

 

노래 디기 듣기 싫타고?

그래서 어쩌라고

바지가 벗겨지든 말든

신나 죽겠는데 !!!!!

 

블레셋이 악마 이라는 둥

바벨론이 악마 이라는 둥

사울왕이 원수 라는 둥

하는 것이 다 날라가고

 

본인 당사자 나 다윗

곧 다윗인 내가 지금 어두움 속에 갇혀 버린 이상

이 빛은 딴사람인 어두움에게 비추시라고 양보 못할 입장이다는 겁니다.

본인이 가장 시급하게 그 빛이 필요한

제일 나쁜 놈이요

제일 원수 중의 괴수이며

내가 제일 마귀 중의 마귀이니

이 십자가의 피가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죄인으로써

환자로써

죄인 중의 괴수로써

주여 당신이 나의 빛입니다.

나를 고치실 의사는 당신 뿐입니다. 다들 돌팔이들 뿐이였다는 겁니다.

제발 나를 고치소서 라고 해야 말 판국이다는 겁니다.

딴 사람이 아닌 내가 그 말을 마땅히 해야할 자이다는 겁니다.

남을 원수라고 할 입장이 못 된다 말이죠.

 

내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

남 볼 겨를이 없다 말이죠.

 

주님의 발등상에 원수가 앉으면 그 때 주님의 오른팔을 나타내신다 말이죠.

그 원수가 바로 접니다

주의 목전에서 죄를 지은 놈은 남이 아닌 저 라 말이죠.

심판 받아 마땅한 자는 저 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제발 긍휼을 베풀어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천부당 만부당 한 그 심판 속에서

그 기이한 구원

그 신비한 구원

그 비밀의 구원을 느끼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이 찬양을 하는 겁니다.

 

다들 시편 96편과 거의 흡사하다고 하지만

저는 오히려 제일 끝인 150편을 미리 앞당겨 부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이제 끝났구나 끝났어 라고 아주 아주 신나게

끝을 미리 앞당겨서 말입니다.

 

빛이 오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

누리고 있는 것

어려움도 격을테고

기쁨도 있을테고

그런 일상 적인 것을

좀더 더 좋게 향상 시켜주는 것이 빛이 아니라

 

오히려 빛은 끝을 미리 당겨 버림으로써

해가 다 저물었으니

엄마가 저녁 먹으러 오라고 막 부르시는

이제 모래 장난하고 있는 것 손 탈탈 털어버리고 일어서는

바로 그런 부르심과 같다 말이죠.

 

시편 98편이 우리를 그렇게 부릅니다.

야야 야들아 소꿉놀이 이제 그만 하고 저녁 먹으러 와야지 라고 부르는 엄마의 음성

그 노래(음성)가 우리들을 자동적으로 손 털고 옷 털고 콧물 한번 훔치고

가자 라고 일어서게 만든다 말이죠.

 

아무리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앉은 지옥 백성도

그런 앉은 뱅이도

갇히고 포로되고 눈먼자이어도

 

일어나라 말씀만 한 번 하시면

죽었던 자도 일어나는 호명이다는 겁니다.

 

이상하게 평생을 앉은뱅이로 살았던 자도 일어서서

이 빛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이 시편 98편이 우리를 벌떡 일으키더라 말이죠.

포로된자를 자유케 만들어 버리고

갇힌자를 놓이게 해 버리고

눈먼자를 보이도록 하는

 

이 시편 98편의 노래가 말이죠.

 

그렇게 자유 되어서 뭐할래?

놓이게 됨에서 뭐할래?

보이게 됨으로써 뭐할래?

 

할게 없어요

그냥 시편 98편이 다 알아서 해요

자유케 되었으니

자유다 라고 외치는 것 외에는 외칠것이 없어요

놓이게 되었으니

우와 풀려났다 라는 것 외에는 외칠것이 없다 말이죠.

보이게 되었으니

우와 우와 보여요 라고 자동적으로 외치게 된다 말이죠.

 

이게 새 노래입니다.

 

내 나이가 어때서 라는 노래가 있듯이

내 새노래가 어때서

내 십자가가 어때서

 

새노래 하기 딱 좋은 날인데

십자가 자랑하기 딱 좋은 죄인인데~~~~~

 

그냥 자동적으로 터져나오는 감탄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 자동적으로 터져나오는 감탄이 바로

시편 98편에서는

우와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났다 라는 외침입니다.

우와 자유케 되었다는 겁니다.

우와 어두움에서 빛나는 곳으로 빠져나왔다고 외치는 겁니다.

 

(98:1, 개역) []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대저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도다

(98:2, 개역) 여호와께서 그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 의를 열방의 목전에 명백히 나타내셨도다

(98:3, 개역) 저가 이스라엘 집에 향하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의 모든 끝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열방의 목전에서 그 의를 명백히 또렷하게 나타내었다는 겁니다.

아니 이스라엘이 스스로 빠져나올수 있었던 전쟁을 벌렸던가요?

엣세네 파 무슨파 무슨파 하면서 그런 독립투사들처럼

로마로부터 독립운동을 펼치기라도 했던가요?

전혀 없었습니다.

 

철저하게 무능 속에 있었을 뿐입니다.

뭐 손 하나 까딱 한 것 없는데

어떻게 바벨론은 또렷하게 항복이라고 자기들이 항복한 명백함 때문에

이 여전히 아무 것도 없는 쥐뿔도 아닌 이 이스라엘은 놓아주느냐 말이죠.

전쟁 포로는 영원한 노예로 부려먹다 죽으면 그만이다 말이죠.

왜 저들은 손해 보는 장사를 하냐 말이죠.

 

기이하죠

그야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무릎 꿇었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구원을 창과 칼로 하셔서 인가요?

천만의 말씀

얼마나 신기한지 기이한지

2차 포로 귀환때는

고레스를 메시아로 삼아서

성전 지으라고 귀환케 합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냐 말이죠.

 

자기 나라 신도 아닌데

남의 나라 이스라엘 나라 신으로부터 메시아로 임명을 받은 타국의 왕이

남의 나라 신인 여호와를 위한 성전을 지으라고 포로를 돌려보내라니

 

이게 말이 되냐 말이죠

성경말씀은 단 하나도 말 되는 소리가 단 하나도 없어요
그냥 이유 없이

원인 없는 결과 뿐이다는 겁니다.

사건 뿐이다는 겁니다.

 

(대하 36:22, 개역)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대하 36:23, 개역)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1:1, 개역)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1:2, 개역)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1:7, 개역) 고레스 왕이 또 여호와의 전 기명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당에 두었던 것이라

 

(4:3, 개역)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5:13, 개역) 바벨론 왕 고레스 원년에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전을 건축하게 하고

 

(5:17, 개역) 이제 왕이 선히 여기시거든 바벨론에서 왕의 국고에 조사하사 과연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전을 예루살렘에 건축하라 하셨는지 보시고 왕은 이 일에 대하여 왕의 기쁘신 뜻을 우리에게 보이소서 하였더라

(6:3, 개역) 고레스 왕 원년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에 대하여 이르노니 이 전 곧 제사드리는 처소를 건축하되 지대를 견고히 쌓고 그 전의 고는 육십 규빗으로, 광도 육십 규빗으로 하고

(6:14, 개역)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함으로 인하여 전 건축할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좇아 전을 건축하며 필역하되

(44:28, 개역)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 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45:1, 개역)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이사야 서에서 바사 왕인 고레스를 메시아로 목자로 삼았다 했죠.

 

만약 이스라엘이 포로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레스를 메시아로 삼았다 라고 나오면

절대 이스라엘은 받아들일수가 없었을 겁니다.

데모하고 시위하고 난리 났을 겁니다.

저 개같은 이방나라 왕을 뭐 메시아로 삼았다고~~~~

 

제 말은 포로 되었으니까 고레스를 메시아로 삼지가 아니라

먼저 타국인이 즉 이방인이 메시아가 되는 법이 없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반발하고 거부하는 자들일 수밖에 없는 자들이

지금 자기 코가 석자이다 보니까

순순히 수긍할 뿐이지

실질적인 본모습은 바리새인처럼 완고함에 있어서는

도저히 말도 안된다 말이죠.

절대 수긍하지 않아요 !!!!

 

산적 두목인 깡패 입다를 구원자로 삼으니까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반박하잖아요.

물론 표면적으로 드러내지 않기에 그 속내를 들추어내는 사건이 구성이 되는 겁니다.

그런 판국에 더군다나 그 고레스 왕이 성전까지 지으라고?

 

절대 용납 못하죠

그런데 여호와께서 그렇게 했다 라고 나오니까

못 이기는 척 받아주는 척 하지

인간의 신앙(수건 안 벗기)이라는 오기심은 절대 수용 못하는 겁니다.

수용거부 사드 결사 반대 !!!

 

아니 초대교회때 스데반집사를 죽인 그 사도바울을 얼마나 경계했냐 말이죠.

스데반을 죽인 사도바울은 물러가라 물러가라 ~~~~

 

그런데 그 사도바울이 핍박을 자기들 보다 더 매 맞고

더 고난과 핍박을 받은 그 증거로써 사도됨을 증명해야 할 정도로

그 정도로 인간은 선입견이 이미 있기에 그것을 깨뜨리고자

의도적으로 성경은 기록하시는 겁니다.

허물 있으면 허물 있는 그대로

충돌이 있으면 충돌 있는 그대로

그것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앞에서는 그렇게 심각한게 아니다는 겁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질적으로 느껴진 경험은 끝까지 이질적인 낯설음 으로만 남습니다.

절대 익숙해져서도 익숙해 질려고도 하지 않는다 말이죠.

만약 그것이 익숙해져 버리면

몸 자체가 율법적이고 몸 자체가 선악적이기 때문에

원래 익숙해졌었던 것이 도리어 이질적으로 변합니다.

몸은 시이소처럼 한 쪽을 누리면 다른 한쪽이 튀어나오고

다시 튀어나온 쪽을 누르면 또 반대 쪽이 튀어나오거든요.

 

이 곤고함에서 못 벗어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잠시 필요에 따라 고레스를 메시아로 삼았더니만

이것을 또 고레스를 메시아로 삼은 여호와 보다

그 고레스에 빠져서

고레스를 평생 메시아로 삼아서 지내는 유대인 집단들이 생겨날 정도이다는 겁니다.

주객이 역시나 뒤바뀌는 겁니다.

 

여호와의 구원을 알게 하시고자 한 일을

사람의 일로 생각해 버리니

그 도구가 졸지에 우상이 되고 만 겁니다.

대표적인 예가 목사를 우상으로 보는 것과

교회라는 건물을 조직을 우상화 한다는 것이다 말이죠.

 

그 껍데기 그림자를 왜 믿냐 말이죠.

그러니 인간의 믿음은 자기가 믿고픈 것에 미쳐 있다는 겁니다.

종교는 마약이라고 우기는 그 놈 역시나

자기 주장에 곧 자기 신념이지요

그것에 미쳐 있는 겁니다.

 

안 그런 인간이 없을 정도입니다.

뭘 해도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죄입니다.

옳다 라고 여기는 순간 제명이 되는 겁니다.

 

그 미쳐있음이 자신의 삶의 의미에 동기부여를 하지

안그러면 무기력에 빠져 우울증에 걸리니까 말이죠.

 

자 이런 인간의 거짓된 믿음이라는 어두움을 배경으로 깔고서

빛은 증거 됩니다.

 

어두움은 자신이 그러하듯이

비추이니까 그 비추는 원인을 없애버리면 빛은 안 비추인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빛을 못 비추도록 존재론적이든 그 원인이든

그 이유를 찾아내어서 차단하면 된다고 여기는

그야말로 어두움 그 자체의 발상으로 달려듭니다.

 

거기에 말려들도록 하는 것이 어리석은 십자가입니다.

즉 저들의 어리석음에 역시나 어리석은 십자가 이여야만

저들은 죽을 때 까지 똑똑했다고 옳았다고 자부하면서 그 어리석음 속에 갇혀 못 빠져나오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절대로 십자가가 지혜롭게 안 보이도록 한다는 거죠.

 

빛은 자기가 비추고자 해서 빛나는게 아닙니다.

빛 그 자체이기 때문에 빛나는 겁니다.

스위치를 on 으로 켜서가 아니다 말이죠.

자꾸 이유와 원인을 따지니까

스위치를 찾아서 off 로 만들겠다는 심뽀입니다.

이것이 지 같은줄로 알고 설쳐대는 어두움이다는 겁니다.

 

스위치 온 오프가 없는데

자꾸 찾겠데요 글쎄

 

마귀가 비록 영적인 존재라고 우겨도

육인 이유가 바로 피조물이기 때문에

피조물 다운 육의 생각 밖에 못합니다.

 

그것도 주님이 부여한 기능 외에는 못 벗어난다 말이죠.

 

아무리 선악과를 따먹어서 신과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고 해도

그 실상의 하나님과

그림자 하나님의 차이는

 

마귀처럼 인간 또한 다 자기 같은 줄 알고 설쳐대는 껍데기만 신이다는 겁니다.

괜히 신이 되어가지고 골치 아프게 살 뿐이다 말이죠.

그런 자들에게는 공중의 새가 억수로 부러울 리가 당연히 없는 겁니다.

내일 아궁이에 던질 들풀을 오늘 귀히 입히시는 그 이유를 알 리가 없습니다.

광야에 왜 비를 내리시는지를 알수가 알수가 없는 거죠.

이유는 간단 합니다.

그 이유를 찾고자 하는 그 주체가 없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 주체를 계속 주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냥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으면 될 것을 말이죠.

 

문제를 풀어야 하는 나 라는 주체는 없다 라고 여기면

문제 또한 없다 말이죠.

뻔뻔 스럽게 처음부터 내 숙제는 없다고

예수님 숙제 뿐이다고 떠 넘겨버리면 될 것을

율법은 예수님이 하실 숙제인데

건방지게 율법을 지키겠다고 나서게 되니

단 한 놈도 푸는 놈이 없는 겁니다.

풀면 풀수록 더욱더 엉키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내 쪽에서는 뭐를 하든 죄 뿐이요

멸망 뿐이요

심판 받아 마땅할 따름이다는 것을 보게 되면

 

새찬양이 나를 스피커로 삼아서 노래를 부르는데 있어서

바벨론에 가서 노래 부르도록 하고

땅 끝에 가서 노래 부르도록 한다는 겁니다.

 

포로 되어 가서 찬양하는 것도 불가능한데

돌아와서 새노래를 부르는데 있어서

단 한번도 경험 못해봤던 그 땅끝에까지 새노래가 침범하는 사실을

돌아와서 그 땅끝이 그나 여기나 마찬가지이다는 심정으로 노래한다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되냐 말이죠.

이스라엘이 바벨론 쪼매 잡혔다고 시리

땅끝 예를들어 인디언의 아메리카나 남미의 파나마나

그 근처로 가보기나 했냐 말이죠.

쪼매 바벨론 정도의 거리 정도만 가보고서

땅 끝에 까지 주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을 봤다고 외치면 곤란하지 않냐 말이죠

 

그러니 이것은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죽음의 바닥에 관한 문제이다는 겁니다.

 

지옥에서까지 주님은 자신의 주 이심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증인으로 목격자로써 이스라엘을 데리고 목격케 만들었다는 겁니다.

 

구지 이스라엘 땅의 지구 반대편까지 갈 필요가 없이 말이죠.

죽음의 권세인 사망의 권세 속에서 목격케 만들었다는 겁니다.

 

우와 우와 우리 주님은 이스라엘만의 주님이 아니라

열방의 주님 이심 뿐만 아니라

죽음의 권세까지 다 다스리시는

사망의 권세까지 다 다스리시는

주님이다는 것을

 

목격자들이 목격한 바를 노래하는 겁니다.

이것이 새노래를 누리는 자들의 오늘 시편 98편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우리가 띠엄 띠엄 주님을 봤고

또 포로 되어서 억울하다는 심정만 나타낼줄 알았는데

오히려 주님의 살아계심과 주의 주 되심이

이곳 죽음의 땅

지옥의 땅에서도 생생하게 주의 주되심을 나타내시고

그 목격자로써

이 땅에 진노를 햏하심에 있어서

도리어 신나고 기뻐서

 

드디어 흐릿하고 모호하고 의문의 것들이 마침이 된다는 입장에서

신나게 노래 부르는 겁니다.

 

그러니 새노래는 끝을 미리 앞당겨 부르는 겁니다.

곧 십자가를 부르는 겁니다.

나의 죽음을 미리 부르는 겁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 죽음을 노래 부르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는

이전 것은 지나가버린

새 것으로써의 나를 미리 앞당기는 식입니다.

 

? 천년 만년 악의 장막 보다

단 하루의 주의 장막의 문지기가 좋냐 말이죠.

 

헌 것은 백날 수선해도 헌 것입니다.

 

그러나 새 것은 헌 것과 족히 비교도 안됩니다.

더 이상 의문의 반복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공중의 새가 안 부럽고는 못 배긴다 말이죠.

그 정도로 또렷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옷은 흐릿하고 모호하고 의문의 반복 뿐입니다.

 

언제까지 천년 만년 강도의 소굴에서 번제와 제사를 드릴껍니까?

단 하루만이라도 주의 인애와 자비가 더 좋다 라는 또렷함이 더 낫다 말이죠.

 

단 번에 죄사하시는 십자가를

이 새노래 라는 사건이

 

모든 의문의 반복을 끝내시는 겁니다.

 

다시는 죄도 없을뿐더러

다시는 제사도 없는 겁니다.

 

십자가가 두 번 일어날 필요가 없는 명료함이기 때문에

모세처럼 반석을 두 번 칠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지키는 것은 이제 없고

누리는 것 뿐입니다.

 

누가 물을 마시면서 물 마시기를 지킨다고 합니까?

오늘 이웃을 사랑했다고 사랑한 것을 지켰다고 이웃사랑 실천지키기 라고 합니까?

원래 지킨다고 의식하는 자는 원래 불법자이였다는 겁니다.

 

공기 마시기를 지킨다는 의식이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했던 자들은

지킨 적도 없는데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했다고 일방적으로 편파 칭찬을 듣는 겁니다.

 

이것이 종말을 누리는 자의 삶이다는 겁니다.

새노래를 의식적으로 노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이라는 끝을 미리 앞당겨서 의식적으로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주님의 뜻대로 잘 진행이 되고 있기에

뭐든지 감사 뿐이라서

뭐든 예가 되어서

그래서 새노래로 주님이 이 땅을 심판하심이

드디어 마침이 된다는 것에서

놀랍고 놀라워서 기뻐 감사하는 노래이다는 겁니다.

노래 할 필요 없이 이미 노래 속에 풍덩 잠겨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말입니다.

 

야야야 내 새노래가 어때서

십자가 사랑외치기 딱 좋은 죄인인데 ~~~~

 

 

(10:1, 개역)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10:2, 개역)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10:3, 개역)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10:4, 개역)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10:5, 개역)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10:6, 개역)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10:7, 개역)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10:8, 개역)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10:9, 개역)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10, 개역)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0:11, 개역)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0:12, 개역)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0:13, 개역)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0:14, 개역)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10:15, 개역)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10:16,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0:17, 개역)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0:18, 개역)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10:19, 개역)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10:20, 개역)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10:21, 개역)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10:22, 개역)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10:23, 개역)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않고 굳게 잡아

(10:24, 개역)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10:25, 개역)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10:26, 개역)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10:27, 개역)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10:28, 개역)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10:29, 개역)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10:30, 개역)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10:31, 개역)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10:32, 개역)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10:33, 개역)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10:34, 개역)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10:35, 개역)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10:36, 개역)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10:37, 개역)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10:38, 개역)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0:39, 개역)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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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베이비 박스

 

이미 선진국이라는 나라가 다 밟은 절차이기에

어쩔수 없이 따라 갑니다.

 

나중에는 그런 불법이, 나라를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는 법이 됩니다.

어제의 불법이 오늘의 법이 되듯이

구조 속에서 못 벗어나도록 하는 겁니다.

 

처음부터 윤리나 법이나 양심이나 하는 것들은 불법이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겁니다.

 

분명 어제까지 십자가는 하나님의 저주인 불법이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부터는 십자가는 우리를 그 저주의 지옥에서 건져내는 유일한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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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에서 언급한

계열 29 좋은 의도들이 크게 벌받는다

가 생각나네요

 

영화 올드보이 이야기에서 주인공 최민식(오대수)이가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길은 과거의 기억의 삭제(반칙)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유지태(이우진)의 정의의 응징(또렷한 기억-트라우마)은 도리어 벌 받게 되죠.

 

박찬욱의 복수 3부작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을 받았고(니체도 영향을 받아 선악을 넘어서를 구상했고)

 

또 연결 된 것이 바로 괴테의 파우스트

괴테는 루터에게 영향받았고

 

스피노자가 말했다 라고 알려졌던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은

 

루터가 한 말을 인용한 거였죠.

 

즉 천년 만년 악의 장막에서 사는 것 보다

오늘 단 하루만이라도 주의 장막의 천하디 천한 문지기가 더 좋사오니

 

(84:10, 개역)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내일 아궁이에 던질 들풀도 오늘 귀히 입히시니

솔로몬의 옷 보다

공중의 새가 더 부럽다고 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주의 용서(십자가)라는 반칙(원인 없는 결과=이유 없는 용서)이 없는 세계는


오히려 지옥과 같다는 겁니다.

 

나의 억울하다는 트라우마만 계속해서 평생 의문의 반복을 할테니(원인 있는 결과)

천년 만년 살아본들 좀비와 같을 뿐이니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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