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다윗을 찾아낸 예수님의 성실하심 (시편 89)


( 15:4, 개역)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 15:7,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1, 개역)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눅 15:2, 개역)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눅 15:3,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눅 15:4, 개역)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눅 15:5, 개역)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눅 15:6, 개역)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눅 15:7,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 15:8, 개역)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눅 15:9, 개역)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눅 15:1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 15:11, 개역)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눅 15:12, 개역)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눅 15:13, 개역)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눅 15:14, 개역)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훙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눅 15:15, 개역)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눅 15:16, 개역)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을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눅 15:17, 개역)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눅 15:18, 개역)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눅 15:19, 개역)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 15:20, 개역)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 15:21, 개역)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눅 15:22, 개역)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 15:23, 개역)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 15:24, 개역)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눅 15:25, 개역)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눅 15:26, 개역)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눅 15:27, 개역)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눅 15:28, 개역)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눅 15:29, 개역)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눅 15:30, 개역)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눅 15:31, 개역)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눅 15:32, 개역)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18:12, 개역)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8:13, 개역)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89:20, 개역) 내가 내 종 다윗을 찾아 나의 거룩한 기름으로 부었도다

(89:20, 새번역) 나는 내 종 다윗을 찾아서, 내 거룩한 기름을 부어 주었다.

(13:22, 새번역)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물리치시고서, 다윗을 그들의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가 내 뜻을 다 행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 삼상 13:14; 89:20

(삼상 13:14, 개역)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를 삼으셨느니라 하고

(삼상 13:14, 새번역) 그러나 이제는 임금님의 왕조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임금님께 명하신 것을 임금님이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달리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아서, 그를,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영도자로 세우셨습니다."

(13:22, 새번역)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물리치시고서, 다윗을 그들의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가 내 뜻을 다 행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 삼상 13:14; 89:20

 

 

시편 89편이 시편의 핵심인데

마치 복음서에서는 희년을 선포하는 모습과 같다는 겁니다.

 

즉 나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하나님이고

포로된 자 갇힌자 억눌자를 자유케 하는 자이다는 선포 말입니다.

 

그것은 구약에서 출애굽할때의 주님 자신의 일방적인 선포와 같습니다.

시편 89편이 시편의 핵심인데

다윗과 협의해서 언약하시는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쳐들어와서 다윗과 언약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그 다윗언약이 바로 여호와의 성실하심으로 인해 성사가 되는데

그 성실하심이란 뭔고하니

자주 언급했듯이

 

주의 성실하심이란 다윗을 죽은자로 만든다는 겁니다.

즉 잃어버린 자로 만드셔서

그리고 난 뒤에 찾아내시는 겁니다.

 

어차피 찾을꺼 왜 잃어버릴까요?

지난 시간에도 언급했듯이

어차피 나사로를 살릴꺼면

다들 오해를 하지 않도록 해서 살릴것이지

왜 의도적으로 죽여서

또 죽음의 확정인 3일을 일부러 지체를 해서

그 다음 온 동네 사람들에게 욕 먹을꺼 다 먹은 뒤에

그 다음에서 살리시는 것일까요?

그래야 부활교리 라는 엉터리 암덩어리를 지적하시는

예수님 본인이 부활이다는 겁니다.
부활이란 죽었다가 살아나는 상태가 아니라 인물 그 자체 라는 겁니다.

 

이것을 다른말로 잃어버린 원인 이라고 합니다.

원인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아니라

[원인이 없음]에서 난 것이 부활이기에

이 원인 없음에 충실하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주의 성실하심이다는 겁니다.

빈공터(잃어버림)에 성실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믿고자 하는 믿고파 하는 부활은

잃어버린 원인 으로써의 부활이 아니라

꽉꽉 채워진 원인으로써의 부활이라서

이유와 원인이 있다는 겁니다.
조건화 된 부활이다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인간의 숙제가 되어버린 겁니다.

믿음도 부활도 구원도 모조리 인간 하기 나름이 되는 거죠.

인간이 행하기에 달렸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한게 아니라

원인이 없어 버리면 인물이 됩니다.

부활이 인물입니다. 곧 예수님입니다.

그 어떤 종교에서도 다 외치는 부활이

오로지 부활은 예수님이다 라고 해 버리면

다 달려들도록 되어 있는

기분나쁘게 하는 부활

불편해져 버리게 하는 부활

거리끼게 하는 부활이 되는 겁니다.

분명 종교에서의 가장 중요한 교리인 부활이

가장 기분 나쁘게 하는 의미가 되어버린다는 거죠.

 

바로 그런 기분 나쁘게 하는 의미로써의 부활

곧 잃어버린 원인 에 충실 성실하심으로써

예수님 본인이 부활이 되는 겁니다.

 

그럼 그 이외의 부활 개념은 다 사기가 되는 거죠.

성전도 마찬가지

예수님 본인이 성전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

몇 년 전에 믿음이 예수님이다 라고 하니까

달려들잖아요.

? 기분나쁘거든요.

그럼 내 믿음은 엉터리이다는 말이가?

네 맞습니다. 엉터리 맞습니다.

이것을 인정 못하게 되니까 말이죠.

 

그러니 잃어버린 원인에 예수님은 성실하시는 겁니다.

모조리 다 걸려 실족케 하는 거리끼는 의미인 십자가이니까 말이죠.

십자가도 잃어버린 원인이지

십자가를 원인으로 삼을수 없습니다.

그 반대로 십자가의 대상물로써 나는 그 어떤 원인도 없었다는 거죠.

이것이 주의 성실하심 때문인데

그 주의 성실하심으로 찾아낸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바로 다윗입니다.

 

네 맞습니다. 고의적으로 잃어버린 겁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성실하심 곧 선하심 때문입니다.

목자가 선하기 때문에 99마리 양을 찾는게 아니라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겁니다.

왜 일까요?

목자의 선하심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그 때문에 졸지에 다윗은 잃어버림을 당해야 합니다.

 

주의 성실하심이 곧 이 잃어버린 원인에 충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찾아냈었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참 웃기죠.

아니 언제 다윗이 도망이라고 쳤나요?

아니면 다윗이 숨기라도 했나요?

하늘에서 주무시지도 쉬지도 않는다고 하셔놓고

발걸음도 다 세신다고 하셨다면

다윗을 잃어버렸다는 말은 통할수 없는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하늘에서 다 지켜봤다 아입니까

그런데 잃어버린 적이 있어야 찾아낼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잃어버렸다는 표현을 의식해서 찾아내었다고 하실까요?

 

그것은 당연히 인간의 선택에 반대를 위한 반대의 의미로써

너희 이스라엘은 다윗을 버렸지?

그러나 나 여호와는 너희가 버린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울 거야 라는

의도가 복선으로 깔려서 증거되고 있다는 겁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이라는 이름을 짖고 부를 때 마다

정작 아브라함은 비웃었다 말이죠

분명히 비웃어 놓고도 웃음이라는 이삭이 그 허물을 다 덤어버린

그 잃어버린 원인을 충실하신 여호와의 뜻을 늘 새기는 겁니다.

원인 없는 무조건 적인 인애와 자비를 생각한다 말이죠.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놓고서는

정작 그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는

마치 비웃었지만 도리어 이삭이라는 웃음이

우리의 허물을 덮어서 웃게 만드는

이것이 바로 믿음의 세계이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주의 성실하심은 십자가의 지혜에 충실하시듯이

이 너희가 버린 다윗을

반드시 찾아내어서

이 잃어버린 다윗에 충실하시겠다는 주의 성실하심을 보이시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졸지에 이스라엘의 뿌리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힘으로 능으로 세워지는 다른 국가들처럼 그렇게 세워지는 국가나 민족이 아닙니다.

 

오로지 주의 성실하심으로 세워진 언약에 의해서 흥하고 망하는 나라이다는 겁니다.

흥하는 것도 다른 민족 국가의 방식도 아니요

망하는 것도 다른 민족 국가의 방식이 아니라

오로지 언약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움직인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과 맺는 언약이

바로 이스라엘의 근원이 되는 겁니다.

 

다윗 자체가 잃어버린 원인 곧 원인 없는 결과이듯이

이스라엘은 이 원인 없는 결과에 충실하신 여호와의 손에서만 움직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정작 엉뚱하게도 다른민족국가의 방식으로 왕을 세웠습니다.

즉 언약이 아닌 방식으로 말이죠.

그럼 다윗은 버림 받은 겁니다.

그 너희가 버린 다윗을 왕으로 세웠다는 것은

곧 예수님 또한 버린 받은 왕으로써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3일 만에 다시 살리시사 주의 주가 되게 하셨다는 겁니다.

 

결국 주이 성실하심은 이 잃어버린 원인

곧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3일의 간극에 충실하셨다는 겁니다.

 

졸지에 다윗은 예수님의 생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겁니다.

다윗 개인이 아니라 말이죠.

 

그리고 아주 아주 재미있는 표현으로써

다윗을 찾아내었다고 합니다.

찾아냈다.

결국 누구 들으랍시고 하시는 표현입니까?

언약 밖의 마귀의 방식으로 왕을 세운 자들을 들으랍시고 하시는 겁니다.

 

이삭이라는 웃음을 왜 많고 많은 이름 다 내버려 두고 그렇게 지으셨을까요?

아브라함 들으라꼬 하신 겁니다.

그러니 왠 용서인지 왠 긍휼인지

졸지에 아브라함은 믿음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못 벗어나는

사랑의 포로가 되어버린 겁니다.

아브라함을 찾아내었거든요

요놈 찾았다 너는 믿음의 조상이 되어야 해 라고 말이죠.

 

다윗을

요놈 찾았다 어디 숨어 있었니?

너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해

 

아브라함이든 다윗이든 추호도 관심 없었다 말이죠.

주님이 일방적으로 심어버린 겁니다.

 

베드로 요놈 찾았다 어딜 그리 짱박혀 있었니

내가 너를 위해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얼마나 기도했는지 아니

너는 사도가 되어야 해

 

에수님을 세 번 부인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 모든 허물을 덮는 사랑을 외쳐야 해 라고 말이죠.

찾아내신 겁니다.

 

잃어버렸다가 찾아내신 겁니다.

 

베드로가 자발적으로 나선게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그 어떤 자도 조건이 안됩니다.

그들보다 조건? 원인? 이유? 백배나 뛰어난 자를 일부러 앞에 세워서 쫄딱망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찾아낸 겁니다.

일부러 잃어버렸다가 찾아낸 겁니다.

인간들의 선택을 무조건 거부하시는 주의 성실 때문이다는 겁니다.

 

모세 또한 자신이 구원자로 나서야겠다고 하는 순간

제명이 되어서 40년을 잃어버린 세월로 삽니다.

그리고 난 뒤에 따집니다.

내가 들고 일어섰을 때 왜 그때 왜 안도와주고

힘 다 빠지고 늙어서 지팡이를 의지해야 하는 노인을

이제 와서 쓰시겠다 굽쇼?

장난 나랑 지금하십니까

 

딴 사람 알아보세요

저는 말주변도 없고 무식하고 수준이 낮은 자라서 안됩니다.

 

그 많고 많은 뛰어난 사람들, 또 젊고 힘세고 똑똑한 자들이 엄청 많은데 아니 왜?

 

주의 성실하심은 잃어버린 원인 에 충실하십니다.

일체 믿음이 안 가는 놈이여야 합니다. 모세가 딱입니다.

또 말 더듬이 어야 합니다. 그래야 더더욱 믿음이나 신뢰감이 팍팍 떨어지는 겁니다.

 

바울은 설교 중에 거품을 물고 뒤로 자빠집니다. 복음에 방해가 되니 고쳐달라고 합니다.

안 고쳐 줍니다.

 

잃어버린 대의에 오히려 충실하십니다.

 

인간 쪽에서 믿음 곧 기대를 걸고 나오는 그 모든 발걸음을 도로 돌려 보내는 식이

바로 원인 없음이요 그것에 주의 성실하심이 충실하시다는 겁니다.

 

내 열심히 충심이오니 나만 남았나이다

바로 이것이 주의 성실하심으로 이루어진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게 싫었던 겁니다.

진짜로 아무 원인이 없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믿음의 시선 곧 주의 성실하심의 시선으로 보여주니

그것이 바로 7천 명이 남았다는 초과잉 잉여 선물이였습니다.

 

그러니 안믿겨지는 것으로만 인도해야 합니다.

원인 없음에 충실하시는 주의 성실하심이거든요.

 

주의 인자하심은 뭐라고 했죠?

상한심령 만드시는 겁니다.

즉 예수님을 세 번 부인케 만드는 주의 인자하심입니다.

그래놓고 다시 묻습니다.

그 어떤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 않고

왜 날 세 번 부인했니가 아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만 묻는 것이 주의 인자하심입니다.

즉 주여 저를 제발 긍휼히 여겨주소서 라는 기도를 하기 이전에

먼저 묻는 물음 이십니다.

 

자 이렇게 되면 우리는 어버버버버 라고 말이 탁 막혀 버립니다.

 

그 유명한 파리의 연인

똥파리 짝꿍말고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드라마에서

 

왜 말 못해

저 남자가 내 사람이다. 저 남자가 내 애인이다 왜 말을 못하냐구!!

 

주의 인자하심은 일부러 예수님을 세 번 부인케 만들어 마귀에게 잡혀온 베드로에게

 

마귀 들으랍시고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대범하게 뻔뻔스러워 지라고 물으시는 겁니다.

 

왜 말 못해

저 남자가 내 사람이다. 저 남자가 내 애인이다 왜 말을 못하냐구!! 라고 말이죠.

 

이것을 어머니께 설명을 해야 하는데

어머니께서 파리의 연인 드라마를 안 보셔서 모르십니다.

그 대신 스가랴서에서 나온 대제사장 여호수아 이야기를 아시기 때문에

수백번 반복했다 말이죠.

또 듣고 들어도 너무 기쁜 소식이라 크게 웃으시면서 빵 터지신다 말이죠.

 

그래서인지 시편 다음으로 계시록을 준비하고 있는데

얼마나 기쁜지 생각만 해도 설레인다 말이죠.

 

미리 글도 며칠 전에 적어 놨어요

 

그냥 바로 올리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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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을 시작하면서

 

작년 십자가마을 수련회 강의를 듣다 보니

시편 다음에 요한계시록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자격이나 그런 학문적 소양이 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게 아니라

도리어 해석 당해야 마땅한 입장이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이지만 또한 얼마나 신나고 기쁜 일이지 않는가?

그야말로 계시록은 기쁨의 하이라이트이다.

 

그런데 계시록 이전에 다니엘 또는 에스겔 등등은 반드시 거쳐야 하지 않겠나 싶어

다니엘이나 에스겔을 먼저 할까 했는데

감당이 불감당이다. 어차피 난 안된다. 포기다. 어느 세월에 다 하겠는가?

차라리 계시록 속에 다 있다 보니

그냥 계시록 속에서 언급하면 되지 않겠나 싶다.

 

시편이 3년 정도였다.

물론 순 엉터리 이다.

자료도 나에게는 없고

시편을 제대로 한 자들도 못 봤다.

그런 입장에서 수준 낮은 나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신학적인 것 아예 없다.

신앙적인 것도 아예 없다.

그저 큐티 수준일 뿐이다.

그저 다급한 마음에 붙잡았고 시편이 딸려왔다.

 

계시록을 10? 짧게는 5년으로 보고 있다.

남을 위한 계시록 해석은 불가능하다.

내가 가장 당장 시급하다.

내가 해석당해야지 남 걱정할 입장이 못 된다.

 

사실 시편을 통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구약의 요한계시록 같은 느낌 말이다.

 

이 시편을 근거로 해서 이스라엘은 멸망하도록 되어 있는

참선지자들의 선포의 초석이 되는 느낌 말이다.

이미 완료가 되어 있었기에 마음놓고 실패해도 상관없는 자유 말이다.

 

그러니 요한계시록을 접하는 마음은 더더욱 설레인다.

어차피 할 짓 없는 인생

요한 계시록에 해석 당하다 가면 된다.

 

설교와 강의를 참고로 해서 그 깊은 산골의 샘물을 마시는 기쁨

목마름의 갈증이 심하면 심할수록 기쁨은 배가 될 것이다.

 

세상은 어차피 그 어떤 기준도 없이 자기 멋대로 살고 있다.

그러나 엄연한 심판의 기준이 있다.

그 기준에 의해서 움직인다.

요한계시록은 그 기준을 보여줄 것이다.

이 기쁨의 감사가 아니면

모두다 허무일 뿐이다.

 

주의 승리가 어떻게 세상 구석 구석까지

파고 들어가는지를 목격하고

기뻐할 수 밖에 없다.

 

올림픽 양궁 경기에서

한발 한발이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다.

말씀 하나 하나가 그렇다

말씀의 화살이 나의 구석 구석을 쏘아서 정확하게 명중시킨다.

그 말씀에 정조준 당하는 기쁨 말이다.

제발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마음껏 나를 쪼개버리기를 바란다.

 

(4:12,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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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기자가 자주 출애굽을 다시 재현하듯이 강조했는데

이스라엘 속에서의 탈출이듯이

 

그 정도로 출애굽은 그야말로 애굽은 초토화 되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일종의 혼인잔치

전남편에게서 탈출해서 새신랑과 결혼하는 야밤도주처럼 신나고 짜릿한

 

새신랑과의 만남이였듯이

실제로 오늘 시편 89편에서는 찾아냈다 다윗을 찾았다 라는 표현을

만났다 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만

 

계시록은 마치 그런 구조이다는 겁니다.

애굽을 박살내고 새신랑과 드디어 만나는 야밤도주

출세상하는 신나는 탈출

얼마나 설레냐 말이죠.

 

그냥 또 하면 안돼

꼭 세 번 부인하듯이

원망도 해야 돼

 

그래야 잃어버린 원인에 충실하신 새남편의 성실하심이

왜 전남편 마귀와 차이가 나는지를 알게 되니 말이죠.

 

마귀는 이것을 충실할 수가 없다 말이죠.

그저 원인만 따지고

이유만 따지다 보니

 

십자가 라는 어리석은 지혜를 거부하는 짓만 하도록 되어 있으니 말이죠.

 

바로 그런 이유로

다윗을 찾아낸 겁니다.

 

(13:20, 새번역) 약 사백오십 년 동안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그 뒤에 예언자 사무엘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사사들을 보내주시고,

(13:21, 새번역) 그 뒤에 그들이 왕을 요구하기에, 하나님께서는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그들에게 왕으로 주셔서, 사십 년 동안 그를 왕으로 섬기게 하셨습니다.

(13:22, 새번역)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물리치시고서, 다윗을 그들의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가 내 뜻을 다 행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 삼상 13:14; 89:20

(13:23, 새번역)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구주를 세워 이스라엘에게 보내셨으니, 그가 곧 예수입니다.

 

다윗이라고 해서 40년 통치를 한 사울왕과 다른게 있느냐

오히려 사울이 훨씬 뛰어나다고 했지요.

 

그런데 왜 다윗을 세우시는 주의 성실하심인가?

 

사울에게 없는 다윗에게만 있는 것이 딱 하나 있다 말이죠.

 

딱 한가지 이유가 있는데 들으시면 황망하실 겁니다.

그 이유 한가지가 뭐냐?

 

바로 [이유 없음]입니다.

잃어버린 원인에 충실하신 주의 성실하심이다고 했죠.

 

바로 이것 때문에 마귀는 더욱더 미치고 팔짝 뜁니다.

 

주의 인자하심이란 오로지 마귀만을 미치고 팔짝 뛰도록 만드시는 일이다는 겁니다.

이유가 있으면 마귀가 그것을 공격해서 반드시 바꾸어 버리겠죠.

그런데 이유가 없으면 마귀는 믄 짓을해도 이미 진거다 말이죠.

그러니 믄 짓을 해도 복음의 보충물로만 작용될 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에 대한 반대를 위한 반대이기에

다윗의 반대인 사울왕은 정반대로 온갖 이유로만 가득차있는 조건으로써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날 성령의 소유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화론자들은 온갖 이유, 원인,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일체 자기 숙제가 없이

주님의 숙제만을 보는 가운데

주의 성실하심이 바로 이 잃어버린 원인에 충실하신다는 점에

기뻐 감사한다는 점입니다.

 

당연히 거짓선지자와 참선지자의 차이도 이겁니다.

 

이스라엘을 자꾸 빈공터로 몰아가는 자는 참선지자이고

거짓선지자는 이스라엘을 자꾸 꽉꽉 채울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텅텅비어있으면 불안해 미치는 겁니다.

 

성화를 채우든

믿음을 채우든

충성 봉사를 채우든

이웃사랑을 채우든

기도를 채우든

성경읽기를 채우든

뭐든 꽉꽉 채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이죠.

 

그 모든 것이 죄인 줄도 모르고 오히려 의로움을 채우는 것이라고 사기를 친다는 겁니다.

 

아직까지도 제 블로그 검색해서 들어오는 검색어 1위가 바로 [십일조 내야 합니까] 입니다.

 

십일조 내면 꽉꽉 채워준다는 성경구절을 끄집어내어서 사기를 치고 협박공갈을 하다 보니

얼마나 고민이 되었으면 검색어 1위를 차지했겠습니까?

예수님을 못 보도록 하는 훼방꺼리가 1위이다는 거죠.

 

조건 갖추어라 라는 공갈 협박인 겁니다.

제가 다녀봤던 어떤 교회는 저런 수준 낮은 짓은 절대 안한다 라고 해놓고서는

한국 교회의 가장 수준 높은 성화론을 주장하더라 말이죠.

 

무슨 놈의 조건이 그리도 많은지???

 

다윗 언약에 위배되는 줄을 모르더라 말이죠.

한국 신학 박사가 말이죠.

 

다윗언약을 한마디로 뭐라고 하냐하면

인애와 자비입니다.

 

여기에 다윗언약을 거부하는 비언약을 한마디로 뭐냐

번제와 제사입니다.

 

주여 저 번제와 제사 똑바로 못 드렸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이것은 방종을 유도한다고 번제와 제사쪽의 비언약 세력들이 외치는 겁니다.

 

괜찮아 괜찮아 가 방종을 유도하는게 아니라

내가 너 대신 했다 라고

오히려 인간 쪽에서 하는 것 안 받겠다는 겁니다.

 

방종을 유도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번제와 제사를 주장하는 비언약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아예 예수님과의 충돌을 시키는 겁니다.

 

방종 보다 더 나쁜 거지요.

그런데 이것이 십자가 안에 있는 자에게는 오히려 더 큰 기쁨이 되는 겁니다.

그 혜택을 입은자 딱 한 사람이 바로 다윗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중에 말이죠.

 

그 이유로 버림을 받습니다.

너희가 버린 다윗을 주님은 찾아냈다고 하시는 겁니다.

 

참 기가막히게 언약이 맞물려서 약속이 구체화 되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 도 왕 자리에서 누락 되지요.

다윗은 그저 예고편이지 본편이 아니다 말이죠.

진짜 왕은 저 분입니다 라고 외치고 정작 본인은 누락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왕 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세운 왕이 사울왕이고

 

사울 왕은 억울해요

 

누가 말 마따나 맏아들이 불쌍하다 말이죠.

왜냐하면 개인으로 대조시켜서 다룬게 아니라

판대기 인간 전체로 대표성으로써 다루니까 말이죠.

그러니 사울왕은 처음부터 짤리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마치 에서는 나기도 전에 미움 받도록 되어 있듯이 말이죠.

 

판대기로 일괄처리 한다니깐요.

 

맏아들은 개인으로써 언급이 되는게 아니라

지옥의 사람으로써 언급이 되는 겁니다.

때려 죽어도 번제와 제사를 주장한다 말이죠.

 

반대로 누가 봐도 지옥 마땅히 가야할 탕자가 천국에 가있는데

천국의 사람으로써 언급이 되는 천국사람대표이다는 겁니다.

즉 때려죽어도 인애와 자비만을 외치는 자이다는 겁니다.

 

이 구별은 인간에게 의해서 구분 지어지는게 아닙니다.

주의 성실하심과 인자하심으로만 구별 차이가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 쪽에서 백날 그런 조건 갖추어봐야 소용이 없다 말이죠.

그러니 나기도 전에 날 때부터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구별이 되어서

구별이 된 상태로써의 증상으로써 삶을 그리 살도록 되어 있지

인간의 믿음에 의해 좌우 되지 않는다 말이죠.

 

인간의 믿음은 어차피 번제와 제사 뿐입니다.

 

벗어날수가 없다 말이죠.

율법 외에 한 의 라는 제 3자의 개입 외에는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 인물과의 만남

즉 그 인물이 찾아내느냐에 달려있지

그래서 찾아낸 다윗이지

 

다윗이 그 어떤 조건을 갖추어서 된게 아니다는 겁니다.

이것이 다윗언약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왕에서도 손때고

이스라엘에서도 손 때는 겁니다.

 

자기가 관여해서 될게 없다는 겁니다.

이미 다 완료되었기에 말이죠.

 

그런데 이 다윗언약을 기준으로 해서 참선지자는 손때자 이고

주님이 알아서 다 하신다 이고

 

거짓선지자는 손떼면 안된다는 겁니다.

절대 이스라엘은 망할 리가 없다는 겁니다.

 

저렇게 못때빠진 참선지자는 인애와 자비를 외치고

저렇게 착해빠진 거짓선지자는 번제와 제사를 외친다는 이 역설 ~~~~~

 

주의 성실하심은 잃어버린 원인만을 충실하신다 말이죠.

 

이스라엘 전체 쫄딱 망해도 상관 없다는 겁니다.

사랑이 이미 완료 되었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데 왜 쫄딱 망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거짓선지자는

절대 이스라엘은 망할 리가 없다.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보호하신다고 하느냐 하면

이 번제와 제사를 반복하는 것을 없애버리고자

멈춰버리고자 함인데

그거 멈추면 굻어죽는다 말이죠.

그러니 착해빠지게 오로지 이스라엘만 걱정하고 기도하고 있는 그 거짓선지자를 향해

돈 밖에 모르는 놈들이라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인다 말이죠.

얼마나 억울하냐 말이죠.

 

바리새인은 돈을 사랑하는 자라 라고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인다 말이죠.

오로지 이스라엘의 회복, 재건만을 위해 목숨을 걸어서 충성을 다하고 있는데

전혀 엉뚱한 평가를 하니까 더더욱 발끈하는 겁니다.

유대인이 그렇게 멍청한 민족이냐 말이죠. 돈 밖에 모르는?

이것이 일방적으로 뒤집어 씌우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

 

부자청년에게 갑자기 전재산을 다 가난한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지켰다면

율법의 그 뿌리가 어디서 나왔냐 말이죠.

행함이라는 번제와 제사입니까?

아니면 사랑입니까?

율법의 완성을 원인 없는 결과인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럼 율법 지킨 것 다 남주라 말이죠.

 

남은 율법 지키게 된 거고

나는 율법 단 하나도 안 지키게 된 거고

 

남은 의인이 된 거고

나는 때려 죽어야 할 죄인이 되는 거고

 

그거 누가 지킬수 있겠냐 말이죠.

 

사랑이 아니면 안되잖아요.

그럼 부자청년이 사랑입니까?

그러니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을 예수님은 요구하신 겁니다.

마치 무화과 나무가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열매를 내라 라는 것과 같죠,.

당연히 못내니까 말라죽어라 라고 하니 말라죽는 겁니다.

부자청년이 지금 무화과 나무 입장과 똑같다 말이죠.

부자청년 뿐이겠습니까?

우리도 똑같다 말이죠.

 

그런 일방적으로 뒤집어 씌우는 예수님의 꼬장을 기뻐하는 자는

사랑받은 자 외에는 없다는 겁니다.

즉 이유 없는 결과를 받은 자 말입니다.

그가 바로 예수님이 찾아낸 자 이다는 겁니다.

다윗이지요.

 

이것이 기준이 되어서 심판하는 겁니다.

 

심판 기준 다윗언약

 

원인 없는 결과를 너희가 아느냐

모르면 지옥

알면 천국 이래 되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 곧 십자가를 아느냐

알면 천국

모르면 지옥

 

이 말도 안되는 것을 밀어붙이는 겁니다.

그런데 말되는 기준들은 소위 심판을 못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 말도 안되는 기준이 제대로 심판이 된다는 점

무화과 나무가 진짜로 말라 죽었다는 점

이것이 얼마나 신나느냐 말이죠.

 

다윗언약이 성취가 되었으니 말이죠.

 

산을 들어서 바다에 던지라 하면 된다 말이죠.

? 약속이 왔기 때문에 말입니다.

믿음이 왔기 때문에 말입니다.

믿음이 왔으면 됐다 라는 겁니다.

내 보고 믿어서 그것을 행하라가 아니라

믿음이 왔다는 증거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제대로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말이죠.

 

(21:20, 개역)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2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21:22, 개역)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던

잃어버린 원인으로 만드는

내것도 되지 않게 하시고

저의 것도 되지 않게 하소서 라는

그 악한 기생의 주장인 마귀를 심판하러 오신

심판주가 왔다는

심판의 기준이 오셨다는 그 사실로 기뻐하라 라는 겁니다.

 

다윗을 그래서 기뻐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없어져도

예수 안에는 있거든요. 그것도 모호하고 미흡한 이스라엘이 아닌

명료하고 완벽하고 또렷한 이스라엘 말이죠.

 

또 본인이 왕에서 누락 되어도 상관 없었다 말이죠.

제대로 된 의의 왕이 심판주로 오셨으니 말이죠.

 

이것이 바로 인애와 자비

곧 주의 성실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인해

다윗언약을 다윗이 성취하는게 아니라

주께서 또렷하고 명료하고 완벽하게 이루신다는 겁니다.

 

다윗은 오히려 그 성취의 증상물로써

신나게 누리는 겁니다.

십자가의 용서를 말입니다.

 

반대로 다윗언약을 거부하는 자들은

여전히 번제와 제사를 드림으로써 아직도 할게 너무 너무 많다 말이죠.

지킬게 많아요.

부자청년처럼 어릴적부터 다 지켰는데 또 부족한게 있다면 말씀만 하소서

당장 지키겠습니다.

즉 단 하나도 지킨적이 없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전재산을 가난한자에게 나누어 주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랑이 없기 때문에

(사랑 하기가 아니라 사랑받은게 없음, 7번 용서가 아니라, 770번 용서받음이 없음)
도저히 전재산을 못 주어서가 아닌

자기가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님이 목숨까지 내어주시는 그 전재산인 목숨값을 받아야 하는

가난한자가 임을 모르기 때문에

잃어버린 자인줄 모르기 때문에

죽은 자 인줄 모르기 때문에

 

이미 지옥의 사람으로써 대표로 동원이 된 겁니다.

 

자 다윗언약의 취지를 아시겠습니까?

 

다윗은 탕자 곧 둘째아들입니다.

두 번째 왕입니다.

잃어버렸다가 되찾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님 곧 마지막 아담을 말하기 위해 동원이 된 겁니다.

 

잃어버린 한 므나 비유,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 비유,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비유 등등은

바로 다윗언약의 완성자 예수님을 말하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시편 89편은 여려분을 어떻게 다루겠습니까?

번제와 제사 잘 드리는 놈 곧 맏아들처럼 또는 남을 7번 용서하는 사람으로 만들까요?

아니면

그저 인애와 자비만을 바라는 탕자 곧 770번 용서 받아야만 하는 사람, 그런 인생으로 만들까요?

 

다윗은 어디에?

 

인애와 자비인 십자가라는 잃어버린 원인에 충실한 주의 성실하심에 다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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