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부로 애틋하게 죄인 다윗을 부르러 오심 (시편 103)


(
9:13, 개역)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2:17,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5:3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9:13, 새번역)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6:6

(2:17, 새번역) 예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103:1, 개역) [다윗의 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103:2, 개역)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103:3, 개역)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103:4, 개역)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103:5, 개역)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103:6, 개역)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

(103:7, 개역) 그 행위를 모세에게 그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103:8, 개역)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103:9, 개역)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3:10, 개역)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103:11, 개역)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03:12, 개역)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03:13, 개역)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103:14, 개역)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03:15, 개역)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03:16, 개역)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그곳이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103:17, 개역)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103:18, 개역)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103:19, 개역)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103:20, 개역)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103:21, 개역)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103:22, 개역)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의인은 필요가 없다 라는 뜻입니다.

제가 지금 큰 실수를 했지요?
감히 함부로 한국교회 모두가 외치고 있는 의인되기에 찬물을 끼얹고 있으니 말입니다.

결국 막사는 자를 부르러 왔다는 것은

막살지 않는 자는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절대로 막살면 안된다 라고 주장하는 자는 필요가 없다 말입니다.

 

이것은 곧 의인들의 반발을 아주 당연히 유도하고 있습니다.

 

다윗언약의 핵심은 곧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를 원한다입니다.

 

그렇다면 번제와 제사의 달인들의 반발이 있어줘야

상대적인 인애와 자비를 원하시는 사랑이 돋보이게 되는거죠.

 

뭐가 생각납니까?

맞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사건이 또 재현되는 겁니다.

 

번제와 제사의 달인 가인의 반발이

아벨을 거부하는 겁니다.

 

아벨은 제사를 잘 드린게 아니라

아벨 본인이 제물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의 편파적인 해석이 덧씌워지는 겁니다.

옳지 이 아벨의 죽음을 예수님의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을 편파적으로 일방적으로 연결시켜버립니다.
결국 아벨의 죽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기 위해서 반드시 죽어었어야만 했다는 겁니다.

 

곧 예수님 본인이 제물 곧 화목제물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럼 제사 잘 드린 가인의 제사는 뭐가 됩니까?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는 맏아들은 뭐가 되느냐 말이죠.
그렇다고 그들이 포기할 자들이 아닙니다.
반드시 성경의 의미를 가지고 와서 자기들과 억지로라도 연결시키는 겁니다.
단절이 아니라 반드시 연결 말이죠.
곧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제물로 받쳤으니
제대로 제사 드린 것 맞잖아 라고 말이죠.
내가 뭘 잘못했는데? 시킨대로 했는데 뭐!


하나님이 참 잘했다 할까요
?

 

오히려 평생 그 모호하고 흐릿한 의문의 제사드리기에서 못 벗어날까요?

번제와 제사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평생 절대로 막살지 않았다 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의인이 되었는데 어떻게 벗어날수가 있겠습니까?

 

도리어 율법이라는 올무에 걸려 넘어진 거죠.

졸지에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과 경쟁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죽인 겁니다.

가인과 아벨 사건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율법이라는 몽학선생이 인도한 저 분이 율법을 완성하실 분이야 라고 율법이 알려주는 예수님을

오히려 아벨 죽이듯이 죽이는 겁니다. 저 아벨만 없었더라만 내 제사를 받았을텐데 라고 말이죠.

(창 4:5, 개역)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 4:6, 개역)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창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8, 개역)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 4:9, 개역)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창 4:10, 개역)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결국 죄 문제를 해결 못한 겁니다.

왜 번제와 제사를 드립니까?

죄 문제 해결 때문 아닙니까?
죄의 문제는 해결도 되지 않은채
제사와 번제를 잘 드렸다는 것만 남으면 뭐 하냐 말이죠.
죽음 문제는 여전히 가만히 내버려둔채
난 절대로 막살지 않았습니다 를 주장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죠.
어릴적 부터 율법을 지켰습니다. 혹 부족한 것 있으면 말씀만 하소서 당장이라도 실천하겠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해서 전재산을 나누어 주어라
어릴적 부터 지키면 뭐하냐 말이죠.

사랑이 없는데 ~~~

 

시편도 율법입니다.

시편 대로 행하면 죄문제가 해결 되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해결 되기는커녕 더욱더 옥죄어 오듯이 더 깊이 말려들어가는 겁니다.

율법은 죄 아래로 가두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3:9, 개역)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7:14, 개역)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3:22, 개역)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3:9, 새번역) 그러면 무엇을 말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유대 사람이 이방 사람보다 낫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다같이 죄 아래에 있음을 우리가 이미 지적하였습니다.

(7:14, 새번역) 우리는 율법이 신령한 것인 줄 압니다. 그러나 나는 육정에 매인 존재로서, 죄 아래에 팔린 몸입니다.

(3:22, 새번역)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이 죄 아래에 갇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약속하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죄 아래 갇혔으면 갇힌 죄인이 나와야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믿을 것인데

죄인은 없고

죄다 절대로 막살지 않았다는 의인들 뿐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구지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의인에게는 하나님이 있거든요.

 

의인에게는 예수님이 필요가 없어요

오로지 죄인에게만 예수님이 필요하고

 

의인은 그럼 뭘로 대처 하느냐?

의인은 하나님으로 대처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차이가 뭐냐?

하나님은 인간의 손에 절대로 죽지 않는 하나님 곧 긍정적이기에

그 어떤 것도 걸림돌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럼 하나님과 뭐가 차이가 나느냐

이 예수는 졸지에 인간 보다 더 못해!!
너무 너무 못해
어느 정도로 무능하냐 하면 남 구원은 커녕 자기도 못 구원할 정도로
허무하게 죽는다는 겁니다.

그것도 인간이 다 뒤짚어 씌워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십자가에서 죽어버리더라 말이죠

하나님의 저주가 십자가 이거든요.

허무하게 인간의 손에 죽어요

아니 예수는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해 놓고

인간의 손에 죽어버리면 이게 무슨 놈의 하나님이냐? 말이죠.

 

실제로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죽여버린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말이죠.

 

그야말로 아벨의 이름처럼 허무 하게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시편에 나온대로 병사들이 놀려 먹습니다.

아니 남을 구원한다는 자가 왜 자기를 못 구원하냐 말이죠.

그럼 구원자 라는 것이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시 22:18, 개역)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시 22:18, 새번역) 『나의 겉옷을 원수들이 나누어 가지고, 나의 속옷도 제비를 뽑아서 나누어 가집니다.』

(마 27:35, 새번역)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나서, ㉨제비를 뽑아서, 그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 ㉧그, '그를' ㉨시 22:18』
(요 19:24, 새번역) 『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이것은 찢지 말고, 누가 차지할지 제비를 뽑자" 하였다. 이는 ㉥'그들이 나의 겉옷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 나의 속옷을 놓고서는 제비를 뽑았다' 하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병정들이 이런 일을 하였다. / ㉥시 22:18』

 

적어도 구원자

곧 메시아 라는 그 조건에 맞아야 한다 라고 우긴다 말이죠.

이것이 마귀의 3가지 시험에서도 나오는 내용입니다.

 

졸지에 마귀의 세가지 시험은 곧 인간의 최대 문제인 실제적인 삶의 문제이다 말이죠.
그거 해결하는 조건으로써의 메시아 구원자 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교회 목사를 뽑을때 어떻게 하던가요?
일단 교회 교인수를 늘리는 조건이 제일 먼저이지요.
이게 교회 부흥이라는 것으로 다른 교회에 밀리지 않겠다는 심뽀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돈 문제도 해결 될 것이고 그럼 다 된다 말이죠. 그러니 조건이 성사가 되는 겁니다.


결국 나의 예수가 될려면 이 조건을 해결하라는 겁니다. 경제 종교 정치 문제 말입니다
.

 

그런데 이거 단 하나도 해결해 주실 의향이 전혀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마귀는 유대인들을 곧 모든 인간의 대표성을 장악한 것이 당연하다 말이죠.

 

그럼 예수님은? 인간을 장악할 필요가 없어요.

인간을 구원 하실 이유가 전혀 없거든요. 구원할 필요가 없어요.

모든 인간이 꿈꾸는 저 세가지 문제 해결 인데

해결해 줄 필요가 전혀 없다 말이죠.

 

그럼 구원자의 조건이 성립이 안됩니다.

 

자 그러니 병사들 말이 맞지요

남을 구원하러 왔다는 양반이 왜 자기자신을 못 구원하냐 말이죠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았다 말이죠. 부를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부르신 자는 바로 죄인 뿐이다는 겁니다.


인간 구원에 관심이 없어요.

오로지 자신의 피 기능을 발휘하고 싶은 겁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시는 그 피의 기능은

오로지 죄인에게만 해당 되더라 말이죠.

의사의 기능은 오로지 환자에게만 해당 되고 건강한 자에게는 필요가 없듯이

약이 환자에게만 필요하지 감기약이 감기 안 걸린 인간에게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죠.

고로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로지 마귀 입니다.

즉 마귀에게 포로 잡힌 자에게만 해당되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이다는 겁니다.

고로 마귀에게 포로 잡히지 않은 의인에게는 해당이 안됩니다.

 

오늘 시편 103편에서

다윗은

예수님이 죄인을 부르러 왔다.

나 죄인 다윗을 부르러 왔다고

함부로 막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언약정신인 십자가 정신이다는 겁니다.

 

이 노래가 새언약의 노래이고 이것이 새노래이다는 겁니다.

 

찬양은 번제와 제사를 지키는 정신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인애와 자비라는 십자가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 새노래라는 겁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시온에서도 말고 야곱의 우물에서도 말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요 4:20, 개역)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 4:2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요 4:22, 개역)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4:23, 개역)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4:24, 개역)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장소 개념이 아니라 시간 개념이 아니라,

시공간이 졸지에 인물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 인물과의 관계성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관계인

예수님과 함께한

예수의 영과 함께한 예배이다는 겁니다.


누구 라는 인물과 상관이 없다면
인애와 자비가 아니라
주님께서 싫어하시는 번제와 제사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돋보일려면

반드시 예배 시간과 예배 장소 공간을 더 중요시 여기는 자들 곧 자칭 의인이라는 자들이

반드시 등장해 주어야만

왜 예수님이 저 우물가의 여인인 더러운 사마리아 여인에게

바리새인도 행할 수 없는 이 인간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지킬수 없는 이야기를 하시는가?


이미 완료된채로 덮쳐져서 누리고 즐기는 상황이기에

예수님은 당당하게

예루살렘도 날려버리고

시온도 공중해체 시켜버리고

야곱의 우물도 의문의 덩어리이기 때문에

오로지 예수님 자신만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인간의 관심사는 특정 장소 특정 시간인데 말이죠.

저런 의문의 것이 아닌
특별 장소 특별 시간이면 일수록 더더욱 또렷하기는 커녕 더더욱 의문의 모호한 챗바퀴이다는 겁니다.

오로지 또렷한 예수님 자기 자신이 곧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 자신을 증거하시는 겁니다.

 

마침 어머니랑 이런 대화를 아침식사 중에 나누었는데

왜 많고 많은 장소 중에 가나안 땅을 죽자살자고 쳐들어 가느냐 라는 겁니다.

다른 땅 많잖아요.

놀고 있는땅 많다 말이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그 땅만이 아니라 주변에도 많다 말이죠
.

특히 애굽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아닙니까?


참 성경은 역설적이게도 성경 자신이 반칙을 엄청나게 하고 있다고 스스로 발설합니다
.

아브라함 조카 롯이 소돔땅이 애굽땅 같고 에덴동산 같았더라 라고 했습니다.

자기 혼자만의 생각일 같으면 설득이 안되겠지만
보편적인 시선으로 남들도 다들 부러워 하는 장소였기에 에덴동산 같더라 라고 하는 겁니다.

(창 13:10, 개역)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당연히 본능적으로 에덴동산 같은 애굽 같은 땅 쪽을 택할수 밖에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보다 더 좋다 말이죠.
자 이렇듯

왜 꼭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왜 구지 빼앗냐 말이죠.

조만간에 요한계시록을 시작 할 것인데
묵시가 역사(시간, 공간)를 빼앗지 않고서는 나타날수 없는 것이 종말이다 말이죠.
우리는 종말론을 도망치듯이 지구멸망에서 살아남을려면 탈출하듯이 도망치듯이
역사에서 다시 다른 역사로 이주하는데 어떻게 살아남으면서 잘 이주하는가 하는 방식인

엉터리 종말을 추구하는데

정작 성경의 요한계시록은 정반대로 쳐들어가는 겁니다.

목시가 역사를 천국을 침노하듯이 빼앗는 방식이다 말이죠.

계시가 역사를 붕괴시키지 않고서는 전리품 곧 빼낼수 없는 것이 성도(교회)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종말은 마귀가 세상을 장악하는게 아니라
정반대로 어린양의 승리가 이 역사를 애굽처럼 멸망시킴으로써 구원하시는 빼내시는


빼앗는 날
여호와의 날이듯이
기뻐하고 기뻐하세 주의 날일세 주의 날일세
예수님의 날이다는 겁니다.
얼마나 신나는 날이냐 말이죠.

 

천국은 빼앗는 자의 것이다 말이죠.

 

(11:12, 개역)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마 11:13, 개역)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마 11:14, 개역)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마 11:15, 개역)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마 11:16, 개역)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마 11:17, 개역)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마 11:18, 개역)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마 11:19,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마 11:20, 개역)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마 11:21, 개역)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마 11:22,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 11:23, 개역)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마 11: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마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6, 개역)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7,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8, 개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개역)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개역)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런데 이 즐거운 날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다 말이죠.
세례요한의 때 까지는 울어도, 애곡하여도 가슴치면서 슬퍼하지 않았다 말이죠.

이제는 즐거운 날 뿐이다는 겁니다. 주님의 승리 뿐이니
이 천국은 빼앗긴다 말이죠. 빼앗는 자 곧 예수님의 것이다 말이죠.
얼마나 신나느냐 말이죠. 그런데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있다 말이죠.  
 

그럼 그곳이 천국이다 말입니까?

아닙니다.

 

아주 아주 역설적이게도 사실상 그 땅은

지옥이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결국 천국을 어디에다가 세우겠다?

지옥에다가 세우겠다는 겁니다.

 

원수들이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잘 사는 꼴을 못보겠다는 겁니다.

 

이 원수의 성문을 여는 자가 복의 사람 곧 천국에서 보낸 자이다는 겁니다. 싸움꾼 이스라엘 말이죠.

 

(24:60, 개역)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

 

자 이것이 역사적인 곧 구약에서 구체화 되던 모습에서 정작 이스라엘은 실패하고 반발하고

졸지에 이스라엘 조차도 해체 되어 버립니다.

그럼 약속은 우찌 됩니까? 도루묵 되나요?

 

신약에서 더더욱 구체화 되도록 비가시적으로 됩니다. 추상적으로 된다 말이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오신 이유입니다.

 

사망의 권세를 직접 해결하러 왔다는 겁니다.

사망의 권세가 설치는 꼴을 못보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거 아니면 뻔데기 앞에서 주름 잡지 말라 말이죠.
번제 드렸다는 둥 제사 지켰다는 둥 율법 어릴적 부터 모두다 지켰다는 둥
다 거짓입니다. 사망의 권세가 여전한데???
사랑도 없이 말씀을 지켜서 뭐하게요?

그렇기 때문에 허구헌날 그 많고 많은 장소중에

왜 하필이면 예루살렘에서 반드시 죽으시러 왔느냐 말이죠.

다른 장소는 왜 안되냐 말이죠.

 

다른 장소는 언약에서 지정한 원수의 성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원수의 성문, 지옥의 대표성으로써의 예루살렘 거기서
지옥을 멸하고 사망의 권세를 멸해서 세우는 천국이다 말이죠.
육을 십자가에서 멸하고 그 십자가에서 낳은 영이다 말이죠.


원수의 성문
?

다른 장소는 노아 때에 설정된 함과 가나안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함 곧 애굽땅은 그 에덴동산 같은 땅은 이미 작살을 내었습니다
.

이제 가나안 땅을 빼앗아야 하는 겁니다.

그 원수의 성문을 함부로 애틋하게 벌컥 벌컥 열지 못하는 자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함부로 벌컥 벌컥 여는 겁니다.

사랑 아닌 자는 죄 문제를 해결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장소에서 모든 인간을 장악한 마귀가 또 모든 인간의 대표성으로써 예수님을 시험하는 겁니다.

사망의 문을 열지 말라꼬

열면 너 죽어

열기만 해 봐라 가만히 안 있을 꺼다 라고 말이죠.

 

그러나 사랑은 죽어서라도 함부로 막 열어버리는 겁니다.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마침 누가 부정의 부정이라는 의미로 글을 적어서

제가 댓글을 달았습니다.

어머니와 나눈 대화내용을 집어넣어서 말입니다.

 

===

 

김대식

 

2시간 전 ·

 

부정의 부정

 

법을 뛰어 넘어서는 것이 불법(참람죄)일까?

아니면 법을 뛰어 넘어서는 것이 사랑(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일까?

 

원수의 성문 곧 죽음의 권세를 여는 것이 불법일까?

아니면 원수의 성문(가나안 땅)을 빼앗는 것이 사랑일까?

 

절대 그 문을 열면 안된다는 것이 바로 법(오이디푸스=율법)의 사수자들이고

원수의 성문(사망의 권세)을 함부로 막 애뜻하게 열어 재끼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19:40, 새번역)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19:41, 새번역)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성을 보시고 우시었다.

(19:42, 새번역)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19:43, 새번역)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치리니, 너의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너를 사면에서 죄어들어서,

(19:44, 새번역)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한 개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19:45, 새번역)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19:46, 새번역)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 56:7 7:11

(19:47, 새번역)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우두머리들이 예수를 없애버리려고 꾀하고 있었으나,

(19:48, 새번역) 어찌해야 할지 방도를 알지 못하였다. 백성이 모두 그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망의 권세를 열러 오셨지 (이 성전을 헐라!)

인간 구원하러 오신게 아니다.
오히려 인간 구원을 헐라 !!! 헐러 오셨다.
오로지 십자가의 사랑만을 세우러 오신 거다.

 

믿음은 이 사망(죽음)과 머리 들이내밀고 싸우는 사랑이지

행함은 사망과는 상대하지 않고 멀리 거리를 둘려고만 하는 법지키기 이다.
오히려 자기 보다 못한 행함이 미약한 자를 가지고 육의 자랑을 늘어놓는다.

이레에 두번 금식, 십일조를 이레에 두번 낸다고 ~~

누가 사망과 도깨비 씨름하듯이 밤새도록 붙잡고 씨름할려고나 할것이겠는가?

 

사랑은 이 죽음에 대한 질투이다.
사망의 권세가 설치고 다니는 꼴을 절대로 못본다.
그런 마음이 없는 자들은

이레에 두번 금식. 십일조 이레에 두번을 자랑하는 것이다.

얼마나 말씀을 못 지켰으면 저런것을 자랑할까 말이다.

그러나 사랑 되신 예수님은  
왜 사랑은 잃어버린 원인 곧 사랑에 충실하실까?


원인 없는 결과(잃어버린 원인)에 충실하는 것은 오직 사랑 그 자신이다.

사랑(잃어버린 원인)이야 말로 이유 없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사망권세를 이기기 때문이다.


(13:10, 개역)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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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천국은 빼앗는 자의 것이 듯이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와 싸워 이겨서 그 완성으로써

전쟁 승리의 전리품으로 빼앗은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듯

이 잉여물이라는 빈공백 곧 잃어버린 원인 에만 충실하심 이다는 겁니다.

 

죄인을 마귀에게서 빼앗는 구체적은 사건인 겁이다. 요나의 표적이 말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확정이다는 의미이다는 거지요.

고로 십자가 사랑의 용서의 승리의 증상물입니다. 죄인이 말이죠.

의인을 부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 박OO 목사는 죄 죄 죄 그만 카라 라고 모든 한국 교회를 대변하듯이

한국교회가 죄 죄 죄 그만 카라 라는 겁니다.

그럼 뭐로 채우느냐? 의인의 삶을 사는 그런 삶을 채우자 라는 겁니다.

 

한국 교회가 졸지에 의인되기에 미쳐있어서 성화되자를 주장하는

예수님이 마귀로부터 빼앗은 죄인이 더 이상 되기 싫어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이제 그만 보고

자신들의 신앙활동을 하자 라는 겁니다.

의인 되자 죄인되면 안된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의인에게서는 마귀에게서 빼앗은 그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겁니다.

즉 십자가의 흔적이 없다 말이죠.

 

(6:17, 개역)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요나의 표적 흔적은 없고

온갖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그런 흔적들만 가득 채우고 있다는 겁니다.

 

주의 인애와 자비의 흔적이 아닌

주님이 싫어하시는 번제와 제사의 흔적만 가득 채우는 겁니다.

 

그들의 주장은 자꾸 손할례를 주장하는 것과 같지

마음판의 할례는 거부하는 겁니다.

남들에게 내세울 꺼리가 없거든요.

[없음=마음판의 할례] 에 충실하시다 말이죠.

전혀 기적 같지도 않는 기적인 요나의 표적에만 충실하시다 말이죠.

 

(고전 7:18, 새번역) 할례를 받은 몸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굳이 그 할례 받은 흔적을 지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할례를 받지 아니한 처지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굳이 할례를 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의인은 마귀에게서 빼앗은게 아니라

지가 말씀 잘 지켜서 절대로 막살지 않음으로써

부자청년처럼 어릴적부터 율법을 지켰고

맏아들처럼 아버지 말씀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기에

 

무엇 무엇으로부터 빼앗은게 아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기심인 사랑

곧 죽음으로부터 빼앗은 것이 아닌

 

포로된자 갇힌자 억눌린자를 자유케 하는 복음이 해방케 해서가 아니라

 

그저 지가 지 스스로 지킨것만 천날만날 우려먹는 자들이기에

예수님의 사랑이 의미가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십자가가 밝히 보이지 않기에

다른 것이 중요하다고 자꾸 주장할 수 밖에 없는 거죠.

본인들이 십자가의 혜택을 받아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말이죠.

그저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중요하다고 하니까

그때 그때 강조할 뿐

십자가가 전부가 아니다 라고 자꾸 주장하는 겁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오로지 병자라야 의사가 필요하듯이

죄인에게만 무한 영광입니다.

오로지 죄인 다윗에게만 무한 영광이기에

지금 시편 103편을 그렇게 증거하고 있는 겁니다.

이 예수님을 송축하라 라고 말이죠.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말이죠.

즉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다윗은 이런 시선을 갖게 된 것일까요?

 

다윗 자체에서는 없습니다.

다윗은 실패자요

다윗은 왕으로써 벌써 자격 박탈입니다.

그것을 죽을때까지 꼬투리 잡고 다니는 자들이

이스라엘 전부라고 할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들을 왕이면 다 제거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제거하지도 않습니다.

도리이 늘 쫏겨다닙니다.

심지어 아들까지 그럽니다.

아들까지 그러는 판국에

백성들은 오죽하겠느냐 라고 할 정도로

이것 조차도 주님께서 벌리신 일이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시선은

이미 용서 받은 기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왜일까요?

도대체 이런 시선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다윗 자체에서는 없다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시편 89편이 시편의 핵심이라고 했지요.

바로 다윗과 맺은 언약입니다.

나라다 바로 망하기 직전

바벨론 포로 되기 직전에 시편 89편을 외치고 있습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 뿐입니다.

 

드디어 죄인 다윗을 찾아냈다고

주님 혼자 기뻐합니다.

아무도 안 기뻐합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찾았다고 좋아라 하는 목자는

99마리 양을 내버려두고 찾은 겁니다.

왜일까요?

 

바로 죽었다가 살아난 되찾은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이기 때문입니다.

죄인 하나 찾아내는데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주님 쪽에서 찾아낸 죄인입니다.

의사가 드디어 의사의 기능을 뽐낼수 있는 유일한 죄인 하나를

 

산넘고서 물건너서 바다 건너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로써

드디어 찾아낸 겁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경험이 없는 의인 99마리 양은

그저 저들은 조건을 갖출려고만 할 뿐이다 말이죠.

몇 번 남을 용서할까요? 78?

 

그러나 예수님이 맺고자 하는 관계성은

번제와 제사가 아니라

인애와 자비인 도리어 예수님으로부터

의사로부터 770번 대수술을 받아야만 하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주장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관계성을 맺으러 왔다 말이죠. 오로지 십자가로만 맺어진 관계 말입니다.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

넌 십자가에 날 못 박고

난 십자가에서 너를 용서하는 거야.

 

이 관계성이 싫은 겁니다.

유대인에게는 이 십자가가 거리끼는 걸림돌 즉 불편하기 짝이 없는 숭고함이고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거다 말이죠.

 

그런데 그 십자가가

그 어리석은 십자가가

이 거리끼는 십자가가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유대인을 빼앗는 유일한 사랑이고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헬라인을 빼앗아 버리는 유일한 지혜이다는 겁니다.

 

그 관계성은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고

오로지 인애와 자비로만

즉 다윗언약의 완성으로써만 예수님 자신의 사랑을 확정시키셨다 말이죠.

 

(5:8, 개역)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5:9, 개역)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5:10, 개역)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5:11, 개역)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꾀냐 말이죠.

 

즉 십자가가 스스로 밝히 보이기 위해서

십자가 스스로 십자가 아닌 것을 보충으로 한다 말입니다.

빛이 빛 스스로 밝히 보이기 위해서

빛 아닌 어두움을 동원해서 빛과의 차이성을 나타낸다 말이죠.

 

그렇다면 이 시대는

심지어 오늘날 교회들은 왜 십자가를 거부하는지를 보여주는 보충물로써 작용한다 말이죠.

그들은 자본에서 낳은 종교시설물들이고 종교동아리 클럽일 뿐이다는 겁니다.

 

그래야 다윗언약의 완성으로써의 새언약의 보충물로 동원이 된다 말이죠.

 

다윗은 예수님을 송축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허물을 덮는 이 십자가의 용서를 말이죠.

이 인간 말쫑 다윗을 찾아낸 주님의 솜씨를

이 분만이 진정한 목자임을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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