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꽃의 노래 (시편 104편)
(시 104:1, 개역)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
(시 104:2, 개역)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시 104:3, 개역)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시 104:4, 개역)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시 104:5, 개역)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시 104:6, 개역) 『옷으로 덮음 같이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시 104:7, 개역) 『주의 견책을 인하여 도망하여 주의 우뢰 소리를 인하여 빨리 가서』
(시 104:8, 개역) 『주의 정하신 처소에 이르렀고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시 104:9, 개역)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시 104:10, 개역)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시 104:11, 개역) 『들의 각 짐승에게 마시우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시 104:12, 개역) 『공중의 새들이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무가지 사이에서 소리를 발하는도다』
(시 104:13, 개역) 『저가 그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시니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
(시 104:14, 개역) 『저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시 104:15, 개역)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시 104:16, 개역) 『여호와의 나무가 우택에 흡족함이여 곧 그의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이로다』
(시 104:17, 개역) 『새들이 그 속에 깃을 들임이여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
(시 104:18, 개역) 『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
(시 104:19, 개역)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것을 알도다』
(시 104:20, 개역)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 나오나이다』
(시 104:21, 개역) 『젊은 사자가 그 잡을 것을 쫓아 부르짖으며 그 식물을 하나님께 구하다가』
(시 104:22, 개역) 『해가 돋으면 물러가서 그 굴혈에 눕고』
(시 104:23, 개역) 『사람은 나와서 노동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도다』
(시 104:24, 개역)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
(시 104:25, 개역) 『저기 크고 넓은 바다가 있고 그 속에 동물 곧 대소 생물이 무수하니이다』
(시 104:26, 개역) 『선척이 거기 다니며 주의 지으신 악어가 그 속에서 노나이다』
(시 104:27, 개역)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시 104:28, 개역)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시 104:29, 개역)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시 104:30, 개역)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 104:31, 개역)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기 행사로 인하여 즐거워하실지로다』
(시 104:32, 개역) 『저가 땅을 보신즉 땅이 진동하며 산들에 접촉하신즉 연기가 발하도다』
(시 104:33, 개역) 『나의 평생에 여호와께 노래하며 나의 생존한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시 104:34, 개역)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바라나니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로다』
(시 104:35, 개역)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실지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
또 역시나 반복 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시편 103편의 반복?
오히려 낯설기 짝이 없는 반복이다는 겁니다.
왜 십자가만 반복하느냐 라고 짜증내는 자들이 많은데
그 십자가가 그들에게서는 역사적 반복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기에 이 지혜를 반복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반복하는게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직접 십자가를 말이죠.
이런 의미에서 인간에게서의 반복은 지겨움이겠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반복은 시간적인 의미가 아닌 묵시의 개입인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개역)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정작 십자가가 반복이 되는 것은
매번 매번 반복이 되어도
낯설기 짝이 없어서
늘 새롭다는 겁니다.
즉 새롭다는 것은 이전의 것을 지워버릴정도로
상대적으로 새롭다는 것이지
말만 번드르하게 새롭다고 긍정화 하는게 아니다는 겁니다.
반드시 이전의 것이라는 것과 대조한 입장에서의 상대적인 새로움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공간의 개념을 뛰어넘어버리는 겁니다.
낯설기 때문에 단절적인 반복인 겁니다.
시공간적인 이어짐이 아니다는 거죠.
사건으로써 전혀 다른 사건이다는 겁니다.
즉 앞의 것은 지나가야만 하고 누락되어야 한다는 단절 이다는 것이죠.
시편 104편을 보니
마치 이스라엘 역사 그냥 다른민족의 역사처럼 그런 역사가 아니라
여호와의 묵시를 압축해서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출애굽 사건 말이죠.
출애굽은 자꾸 애굽탈출만 생각할게 아니라
가나안 입성까지 다 포함해서
특히 그 사이의 간극인 가장 중요한 광야생활까지 포함해서
이 출애굽사건을 곧 구원의 역사 이스라엘의 역사를 함축해서 표현한
시편 104편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울까요?
이스라엘을 그렇게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그 속에서 너를 낳았다는 거죠.
광야에서 낳은 너는 내 아들이라
십자가에서 너를 낳았다 말이죠.
너거들 이런 역사 있어?
우리 이스라엘의 역사는 구원의 역사야 라고
어린아이가 우리 아빠가 제일 사랑이 많으시다고
다른 아이들에게 자랑하듯이 막 자랑하는 겁니다.
다른 아이들은 자기 아빠가 스마트 폰도 사주고
이쁜 가방도 사줬다고 자랑을 하는데
그 자랑들이 고만 고만 한 것들인데
이스라엘은 전혀 다른 것을 자랑합니다.
너거 아빠는 죽은 사람을 살린적 있어?
우리 아빠는 죽은 나를 살렸어!
의사야?
의사도 아닌데 어떻게 살리니?
불법 시술했네 경찰관에게 고자질 해야겠네!
맞아 의사 아니야
그런데 의사도 아닌데 죽은 의사도 살릴 정도로 더 나은 의사야
마치 이런 식으로 아이들끼리 서로가 자기 아빠 자랑하면서 싸운다 말이죠.
고만 고만한 애들 싸움이
유독 전혀 다른 이야기로
아예 하나에 집중되는 몰빵으로써
한 아이의 외침에 집중이 되는 겁니다.
어떤 아이?
바로 시편 104편을 외치는 아이 말이죠
자 그렇게 되면 모든 자잴구리한 것들은 하나로 모아져서
바로 두 갈래로만
오로지 시편 104편을 외치고 있는 아이의 반대편으로 모아져서
이 시편 104편을 노래하는 아이와 대립하게 된다는 거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시편 대로 이루시는 주님과
시편을 달달 외운 유대인과의 대립으로 나타났듯이 말이죠.
시편 그 자체와
시편을 외우고 믿을려고 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두 세력의 대립 말입니다.
하나님 그 자체와
하나님을 믿을려고 애쓰는 자와의 대립 말입니다.
얼마나 역설적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 곧 예수님을 죽이는 거다 말이죠.
이 십자가의 지혜를 감당할 수 있겠냐 말이죠.
자 그럼 우리는 자꾸 하나님의 편에 서서
시편 104편의 서서 이 시편 104편을 볼게 아니라
왜 우리는 시편 104편을 거부하는 자인가 라는
거부하는 자의 자리에 서서 이 시편 104편을 보자 말이죠.
창조자의 편에 서는게 아니라
창조자를 거부하는 자의 자리에서 왜 주의 창조전쟁을 거부하는지 말이죠.
아이들이 저 마다 자랑하는 것이 다 비슷비슷합니다.
그런데 유독 엉뚱한 것을, 낯설기 짝이 없는 것을,
자랑하는 그 아이를 쳐다보는 입장에서, 마주 대하는 입장에서
즉 우리는 다른 아이들처럼 낯설지도 않은 고만 고만한 것들을 가지고
자기 아빠를 자랑할 때
전혀 다른 아빠를 자랑하는 아이의 말을 들어보자 라는 겁니다.
그 낯설기 짝이 없는 자랑꺼리의 내용이 뭔가 말이죠.
이제는 어른이 되었으니 그 내용을 파악해 보자 라는 겁니다.
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거지?
왜 모든 세상의 아빠랑 전혀 다른 아빠를 자랑하고 있는지를 말이죠.
시편 104편 2절부터
아이가 곧 찬양자가 우리 아빠는 이런 분이셔 라고 자랑을 막 하는데
왠지 잘못 보면은 우리 아빠 슈퍼맨이야 라고 하는 것 같다 말이죠.
그러면 다른 아빠랑 뭐가 다르냐 말이죠.
모든 아이들이 자기 아빠를 다 그렇게 자랑한다 말이죠.
그런데 자세히 보면 슈퍼맨을 자랑하는게 아니라 영웅담을 늘어놓는게 아니라
(시 104:9, 개역)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시 104:7, 새번역) 『그러나 주님께서 한 번 꾸짖으시니 물이 도망 치고, 주님의 천둥소리에 물이 서둘러서 물러갑니다.』
(시 104:8, 새번역) 『물은 산을 넘고, 골짜기를 타고 내려가서, 주님께서 정하여 주신 그 자리로 흘러갑니다.』
(시 104:9, 새번역) 『주님은 경계를 정하여 놓고 물이 거기를 넘지 못하게 하시며, 물이 되돌아와서 땅을 덮지 못하게 하십니다.』
(시 104:10, 새번역) 『주님은, 골짜기마다 샘물이 솟아나게 하시어, 산과 산 사이로 흐르게 하시니,』
(시 104:11, 새번역) 『들짐승이 모두 마시고, 목마른 들나귀들이 갈증을 풉니다.』
출애굽이라는 여호와의 영광으로 이룬 창조전쟁을 언급하시면서
영웅들의 소굴 곧 애굽
애굽을 멸하고 애굽이라는 무에서 유로 가나안 땅 정복으로
무에서 유로 창조하신다 말이죠.
어벤져스 : 악당을 물리치는 복수자 영웅들
을 물리치는 아빠라는 겁니다.
영웅을 물리치시는 더 나은 아빠라는 겁니다.
즉 마땅히 아이들은 우리 아빠 영웅이야!
왜? 나쁜 악당을 물리치는 자이니까
그런데 유독 이스라엘 어린이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너희 아빠의 기능은 뭐니? 뭐하시니?
너는 아빠를 어떻게 자랑하고프니?
아이는 자기가 직접 격은 것을 봤는 것을 보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우리 아빠는 악당을 물리치는 어벤져스(복수자들) 영웅들을 물리치는 분이시야!!
뭐라고? 악당을 물리치는 영웅을 물리치는 아빠라면
나쁜 아빠네!!!!!
아니지!
나쁜 악당을 물리치는 영웅을 물리치는 아빠면 나쁜 놈이지 뭐니!!!
아니지! 그러니까 제일 센 분이시지!!
나쁜 악당이든, 그 나쁜 악당을 물리치는 영웅이든
둘 다 우리 아빠가 먹이시고 살리시고 창조하시고 물리치시는 제일 센 분이시지.
뭐라고? 너 말장난해 퍽퍽퍽
매를 번다 벌어 말이죠.
이래 되는 겁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이 시편대로 오시니까
시편을 달달외운 자들이 예수님을 죽여버리는 겁니다.
하나님 외에는 제일 센 분이 없는데
죄를 사하시는 자 가 없는데
예수가 죄를 사했다고 건방지게 이야기 하니까
매를 벌수 밖에요.
매사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이 말을 꼬투리 잡아서 죽임을 당한다 말이죠.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 처음부터 꼬투리 잡을려고 한 겁니다.
즉 이것이 고맙게도 니 아빠와 내 아빠는 다르다 라는 임마누엘 사건으로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저들이 설치지 않았다면 임마누엘 사건이 나오지 않았을테니 말이죠.
빨리 나와라 빨리 나오라고
오히려 저들은 꼬투리 잡는데 열중한 것 자체가
예수님 쪽에서 빨리 나와라 빨리 나오라 라고 하신 것이지
저들의 의도가 아닌 겁니다.
자꾸 미끼를 던지니
그만 미끼를 물어 버린 것이여
빨리 물어라 빨리 물어라 가 된 거죠.
그럼 또 따지는 자가 있겠죠.
거봐 거봐 예수님 나쁘네 그런 못땐 짖을 유도하고 있으니 말이지
네 참 나쁘죠 맞습니다 맞고요
그렇기 때문에 빨리 십자가랑 꽝 하고 충돌하자 라는 겁니다.
최고의 지혜
가장 센 지혜
과연 흐릿하고 모호하고 의문의 지혜와 맞짱 뜨자 말이죠.
빨리 빨리 승패를 가리자 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 라는 사랑에 꽝 하고 부딧히도록 하신 겁니다.
그래야 자기 아빠 자랑하는 입들이
갑자기 이 십자가에서 다시 태어나는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로 만드시고자 하는 새창조사건이기 때문입니다.
2절부터 계속해서 출애굽 사건을 염두하셨지만
이 자체가 창조사건이다는 겁니다.
창조사건을 수백 수천년 지난 뒤인 출애굽사건을 통해서 펼치실때에
창조를 한번도 격어보지 못했다 말이죠
창조는 한번으로 끝났다 라고 유대인이나 오늘날 교인들이 자꾸 우기지만
이 창조는 매일 매일 벌어지는 창조사건이기에
구원사건은 창조사건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창조사건은 매일 매일 반복되어짐에 있어서
인간의 눈에 귀에 손에 포착가능한 인식가능성으로써의 창조가 아니라
늘 인식 자체가 불가능한 사건으로써
기존의 것을 폐하시는 방식으로 창조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창조를 얍잡아 본 것에 대한 나의 무지와 죄악에 대해
놀래 자빠져야 할정도로
그 정도로 경악 스럽고 낯설고 경탄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냐 말이죠.
가시떨기 나무에 붙은 불이 그냥 우리가 가스 렌즈에 켜면 불이 올라오는 그런 불이 아닙니다.
우리 아빠 불은 가스렌즈를 켜면 나오시는 그런 불이야 라고 아이가 자랑할 때
우리 아빠는 그런 불이 아니야
그럼 뭔데?
우리 아빠는 가시떨기나무인 모세에게 불 붙은 불이야
그럼 모세 타 죽잖아
그래 맞아 불타 죽어야지
그런데 안 타. 불에 타 죽지 않게 하시는 불이야
에이 그런게 어디있니
우리 아빠 불은 붙어있는 모든 것은 다 불태우는데
너희 아빠 불은 불이 아닌갑따
아니야
같은 성향의 불로써 다 똑같은 하나님 신이지
뭐 별난 신이 있겠어 라는
아빠 불을 자랑하는 아이들이
달려들어서 한 아이를 왕따 시킬때에
이 이스라엘 아이는 우리 아빠 불은 그렇기 때문에 진짜 불이 맞어
안태워 죽이시는 사랑의 불이거든요.
얼마든지 태워죽이셔도 상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온유한 불이시기 때문에 안 태워죽이시는 거야
그래서 불이 붙어도 안 타죽는 거야 라고
오히려 너희 아빠 불은 불 안 붙으면 못태우지?
우리 아빠는 반대야 불 붙은 자는 살고
불 안 붙은 자는 죽어
에이 너 자꾸 헛소리 할래????
자 이렇게 전혀 다른 낯설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시편 104편이다 말이죠.
이것이 진짜 창조자의 불이다는 겁니다. 여호와의 불 말입니다.
물론 제가 출애굽 구원전쟁을 염두하다 보니 불로 표현했지만
시편 104편에서는 물로 표현 된 겁니다.
정반대인 물로?
네 그 물이, 불입니다.
창세기 때의 물 곧 창조 말입니다.
물은 경계가 확연하게 구별되게 보이자만
불은 경계가 없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가시떨기 나무에 불 붙은 것은 경계가 생기더라 말이죠.
넘어오지 않더라 말이죠. 억수로 많이 봐 주셨다 말이죠.
(시 104:9, 개역) 『주께서 물의 경계를 정하여 넘치지 못하게 하시며 다시 돌아와 땅을 덮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정글북이라는 영화를 보면
제가 어릴적에 이 이야기를 몰랐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결국 주인공은 모세가 아닌 모글리가 아닌 붉은 꽃 곧 불 이라 말이죠.
왜 힘센 호랑이도 모든 짐승들도 왜 인간을 두려워 하느냐 말이죠.
특히 오랑우탄 곧 원숭이들의 왕 루이가
왜 그렇게 붉은 꽃을 다루는 것을 인간 모글리로부터 알려달라고 하냐 말이죠.
창조자가 되고픈 것이다 말이죠.
동네 골목대장이 아니라
전 세계의 전 정글의 왕 말이죠.
불만 다룰줄 알면 된다 말이죠.
어 그런데 인간은 왜 불을 다를 줄 알면서도 창조자가 못 되는 거죠?
자기만 다루나? 인간이라면 다 다루는데!!
그래서 만인을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써
졸지에 더더욱 붉은 꽃이 주인공이 될수 있도록
인간들은 장기알처럼
불의 전쟁을 펼치는데 동원이 되는 도구로 배치된다 말이죠.
루이는 거꾸로 본 겁니다.
인간이 불을 다루는게 아니라
불이 인간을 다루는 주체인 것을 말이죠.
자 그럼
어떤 불이 진짜냐
누구 불이, 누구 아빠가 진짜냐 라는 싸움 말입니다.
그래서 이 여호와의 불을 지금 시편 104편은 자랑하고 있습니다.
어떤 불이? 누구 불이 진짜 구원의 불이냐
창조의 불이냐 라는 거죠.
창조의 샘이냐 창조의 물이냐 라는 거죠.
불은 소멸 아닙니까?
(시 104:35, 개역)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실지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
누구 불이 제대로 소멸하느냐 라는 겁니다.
악을 제대로 말이죠.
아니 그럼 제일 위헤서 언급했던 악당을 물리치는 영웅을 물리치면 안되는 것 맞잖아요.
그럼 영웅들의 악은????
나쁜 악당을 물리치기만 하면 선한 영웅이 되나요?
당연하죠 나쁜 악당을 물리쳤으니까?
그게 바로 함정이다 말이죠.
과연 그런지 안그런지 십자가의 지혜와 한번 꽝 하고 교통사고 나 보자 말이죠.
저 마다 우리 아빠 불이 나쁜 악당을 물리쳐 소멸시키는 진짜 불이다 라고 자랑질 할 때
시편 104편 찬양자는 아냐 우리 아빠가 너희 아빠까지
어벤져스 까지 다 소멸시키시는 진짜 불이야 라고 자랑하니
이 이스라엘을 주변 나라가 가만히 놔 두겠냐 말이죠
그러면 그럴수록 아예 더 노래를 불러요
시편 104편 작사 작곡까지 하면서 앨범을 발매해요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 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다른 불은 다 가짜다
다른 아빠는 다 가짜다
왜냐하면 다른 불 조차도 이 우리 아빠 여호와의 불에 소멸당하는 불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불은 죽는다
신은 죽는다 라고
어떤 신이 외치니까
다른 신들이 신이 어떻게 죽냐
안 죽는 것이 신인데 라고 웃겨 죽겠다고 배꼽잡으면서 웃다가 죽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신은 죽는다 라고 외친 신만 살아남은 겁니다.
참 시답지 않는 말로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다는 자체가 웃끼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인간의 종교심에 정확하게 꼿혀서
막흔들어대기 시작한다 말이죠.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종교심이
졸지에 이 말에 다 흔들려 와르를 무너지더라 말이죠.
그 동안 가짜였던 것이 역사 수천년 역사를 자랑하면서 돈이나 삥뜯었지
정작 수천년역사를 지녔다고 자랑한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 버릴 정도로
한 순간에 1초 만에 다 무너지는 겁니다.
이것을 역사를 우려먹는 곳 마다 한번 적용해 보자 말이죠.
종교나
국가나
민족이나
소위 이데올로기가 확실한 절대성이 있는 곳에 말이죠.
오히려 절대성은 무너지기가 더욱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이다는 거죠.
처음부터 절대성을 가질 필요가 없는데 말이죠.
진짜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비웃는
특히 역사가 비웃는 우연성이 절대로 무너지지 않더라 말이죠.
아니 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해서?
절대 아닙니다.
아무도 희생하는 자 없어요.
그런데 왜?
오로지 반칙 때문에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말이죠.
반칙? 그럼 나쁘잖아!
그 나쁜 반칙이 바로 십자가 라는 부조리 이다는 겁니다.
이 부조리가 아니면 절대 무너질 리가 없다 라는 그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이
사실상 부조리 였다는 겁니다.
이 부조리를 발가벗길려고 십자가는 부조리하게 창녀의 모습으로써
시아버지 유다의 부조리를 무너뜨리는 겁니다.
그리고 며느리 다말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특이성
곧 우리 아빠는 영웅들을 없애는, 불을 모두다 태워버리는 불이야
불을 태우는 불, 신을 죽이는 신이야 라는 소리를 외치는 이스라엘의 특이성을
오로지 며느리 다말을 통해서 더 나은 부조리, 부정의 부정을 외치는 찬양자로 태어난 겁니다.
원숭이의 왕 오랑우탄 루이는 백날 태어나도 붉은 꽃을 백날 배워도 소용이 없습니다.
붉은 꽃이 오랑우탄을 태워버리니까 말이죠.
근처에 못 가는 겁니다.
아무리 근처에 가는 방법을 터득해도 말입니다.
그러나 모글리는 가만히 있어도 불이 딱 달라 붙어있다 말이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안 타죽는다 말이죠.
이게 바로 유다 곧 이스라엘의 특이성인 겁니다.
아빠를 영웅으로 자랑하는 아이가 정작 자신이 커서 악당이 되면
그 나쁜 악당을 물리치는 아버지를 과연 그때에도
자기가 악당이 되어서도 그 아빠를 자랑할수 있냐 말이죠.
자랑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 모순이 되죠.
그러나 시편 104편의 노래를 부르면서 아빠를 자랑하는 노래하는 찬양자는
자신이 악당이 되어도
자신이 선한자가 되어도
심지어 악당을 잡는 영웅이 되어도
그 딴거 다 엉터리 죄일 뿐이고
정작 자랑할 것은 오로지 여호와의 불이다 라고 자랑하는 자로써
탕자가 되어도 변함없이 자랑할 수 밖에 없는 감격의 불이다는 겁니다.
자기가 악당이 되어버리면 그때는 자랑할수 없게 되는 그런
오락가락하는 불이 아니라
자기 상태와 상관없이
무조건 무조건이야 라고 여호와의 불을 자랑할게 아니냐 말이죠.
오히려 부조리의 부조리이면 일수록 더욱더 자랑꺼리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죄인 중의 괴수가 되어도 이 여호와의 소멸하는 불을 자랑한다 말이죠.
그런데 의인이 안되고 죄인 중의 괴수가 되어버리면
졸지에 여호와의 소멸하는 불을 그만 자랑하는 자들이
성화론자들이다 말이죠.
그 놈들은 무슨 놈의 조건들이 그렇게 많은지
막살면 안된다는 둥
용어도 까먹었네
방종?
맞다 방종
계속 참람죄만 떠올랐는데 말이죠.
방종하면 안된다는 둥
그렇게 말하는 자가 방종자들인데 말이죠.
자기도 천국 안가고 남도 천국 못가게 가로 막아서 삥 뜯는 방종자 말이죠.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너희를 신이라 하지 않았느냐를, 이 참람죄를,
현대판으로 바꾸면 방종 아닙니까?
부끄러운 구원을 받으면 안된다는 둥
하여튼 기가막히게 용어를 만들어 내어요
오늘 제목을 레드 플라워 워 붉은 꽃 전쟁으로 하면 되겠네요
갑자기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 이라는 드라마 제목도 생각나구요.
교회를 다녀봐도 결국은 여인천하입니다.
남자들을 조종하는 것은 그 뒤의 배후세력인 여자이니까 말이죠.
왜 힘센 동물들이 나약해 빠진 인간 아이 모글리를 왜 두려워 할까요?
인간이 두려워서?
아니다 말이죠.
제일 연약한 것이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것은 인간에게는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여호와의 불이 붙어 있다는 겁니다.
우리 보고 겁내는게 아니라 여호와의 불을 보고 겁낸다 말이죠.
즉 왜 이스라엘만 특이할까요?
다른 인간, 다른 민족과 비교하면 제일 못난이 중에 못난이 족속인데!!!
불을 소유할려고 할 필요가 없이 불이 붙어 다니는 겁니다.
반대로 다른 민족들은 불(신)을 소유할려고 애를써야 하고 말이죠.
힘센 동물들은 불 근처에 가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불을 피하지 못해 타 죽지만
소년 인간은 불이 붙어있어도 타 죽지 않는다는 것이
(다니엘의 세 친구, 가시떨기 나무 모세, 인간이 잘나서가 아니라 불이 억수로 불쌍히 여겨서)
그 영화를 보고 느낀 점이다 말이죠.
가시떨기 나무에 불 붙은 이 여호와의 불 전쟁이
진정한 창조자이다는 겁니다.
이 창조전쟁을 수행하는 자가
곧 출애굽 전쟁이요
신의 전쟁이요.
구원전쟁을 직접 하시고자 옷을 입는 자이다는 겁니다.
(시 104:1, 새번역) 『내 영혼아, 주님을 찬송하여라. 주, 나의 하나님, 주님은 더없이 위대하십니다. 권위와 위엄을 갖추셨습니다.』
(시 104:2, 새번역) 『주님은 빛을 옷처럼 걸치시는 분, 하늘을 천막처럼 펼치신 분,』
그런 다른 신들을 태워 죽이지 못하는 여호와의 불이면 가짜 불이죠.
그래서 유대인들은 오로지 예수를 이 로마의 신을 불태워 죽이는 신일줄 알았는데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니까
도리어 유대인들이 로마에 팔아서
손에 피 안묻히고 예수님을 죽이는 겁니다.
예수는 가짜 불이다는 거죠.
창조싸움으로 보고 있다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예수를 죽인 그 자들이
도리어 예수님을 주라고 외치게 됩니다.
완전 반전이죠.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길로 갔는데
우연히 내 입에서
나귀와 선지자 그 선지자 이름 뭐죠?
맞다 발람
분명히 내 입으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 그래서 죽은 것 확실하게 그 증거를 봤는데
이제는 아무도 이 증거를 부인 못하는데
십자가는 하나님의 저주로써 저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제대로 죽었고 죽은 것을 봤고
그 증거가 십자가인데
이 십자가가 역설을 일으키는 겁니다.
도리어 이 증거(십자가)가 더더더 부인 못할 정도로
내 입으로 예수님은 주 이시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내가 발람 선지자 그 거짓선지자 발람선지자 꼴이 되어서
예수님은 주 이시다 라고 외치는 거다 말이죠.
분명 저주 했는데 말이죠.
한 입에서 찬양과 저주가 동시에 나오면 안되잖아요.
그런데 시편104편을 노래한 찬양자가 역설적이게도 예수님을 죽였다 말이죠.
그런데 더 역설적이게 그 자가 또한 예수님을 주 이시다고 외치며 노래한다 말이죠.
반전의 반전
그러니 시편 104편을 달달 외워서 1000년 동안 외치는 유대인으로 만드시는게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이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는 최선봉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이였는데
발람 중의 발람선지자인 바울이였는데
그런 죄인 중의 괴수가 오히려
우연히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그 사도바울의 입에서 죽을때까지 예수님을 주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로
아예 창조 낯설기 짝이 없는 창조를 그 입을 새로 지어버렸다 말이죠.
입만 조디만 지으셔도(조디 좀 약하다, 주디 !! ㅋㅋㅋ)
다른 것 다 지은거다 말이죠.
발만 씻어도 다 씻은 거다 말이죠.
(사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6, 개역)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사 6:7, 개역)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사 6:8, 개역)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 6: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사 6:10, 개역)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사 6:11, 개역)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 6:12, 개역)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사 6:13, 개역)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그러니 내 입술을 불로 지지는 자가 진짜 창조자이다는 겁니다.
모조리 다 불태우고 십분의 일 남은자만 구원하시는 분이
즉 십분의 구를 버리시는 분이 구원자이다는 겁니다.
99마리를 내버려 두고
한 마리 잃어버린 양만 찾으시는 분이 바로
제대로 소멸하시는 불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구원사건이고
이것을 시편 104편은 이스라엘의 묵시로써 노래하는 겁니다.
붉은 꽃을 노래한다 말이죠.
그 어떤 피조물도 이 붉은 꽃을 노래하는 자는 없다 말이죠.
그런데 거꾸로 되어서 인간만이 이 붉은 꽃(여호와의 불)을 노래 못하는 벙어리가 되었고
모든 피조물들은 노래한다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만
오로지 우연히 발생한 이스라엘만 특이하게도
전혀 다른 노래를
인간 세계 속에서 외치고 있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합격할려고 다들 노래 솜씨를 뽐내고 있는데
유독 춘향이만 전혀 다른 노래를 하는 겁니다.
어떤 노래
이제 너거든 다 죽었다
죽었다고 복창해라 라고 노래 한다 말이죠.
향유를 부인 여인만 전혀 다른 행동을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거다 말이죠.
(약 2:17, 개역)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20, 개역)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약 2:26, 개역)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제가 말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성화론자들이 말하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여기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전혀 다른 노래를 하고 있는 춘향이의 노래와 같다 말이죠.
다들 합격할려고 상 탈려고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는데
춘향이는 목에 칼을 끼고서
너거들 이제 다 죽었구나 우짜니
아이고 우짜노 라고 노래 부른다 말이죠.
심사위원들 에게 다들 잘 보일려고 노래를 부르는데
춘향이는 아예 죽을려고 환장한 듯이 노래를 부르는데
아예 자기 보다 너희들이 이렇게 죽는다고
목에 칼(형틀 이름)을 끼우고 노래부른다 말이죠.
얼마나 엽기적이냐 말이죠.
세례요한도 그러다가 죽었다 말이죠.
참선지자의 노래가 다 이런식으로 엽기적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말이죠.
성화론자들의 행함이 있는 믿음은 오히려 반대로 심사위원들에게 잘보일려고 하는
점수 잘 받기 위한 선함이라고 주장한다 말이죠.
아닙니다. 심사위원들을 위협하는 행함이어야 하는데
과연 그들이 선함을 지키겠다는 자들에게서 이런 엽기적인 행동이 나올수 있겠냐 말이죠.
그래서 예를 든 것이
아브라함을 아들 이삭 바치는 행함이요 그야말로 엽기적이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버리시는 장면 아닙니까
그리고 두 번째 예가 바로 기생라합의 거짓말입니다.
이 거짓말은 정작 거짓말로 혜택을 입은 10명의 정탐꾼들이
간담이 녹지 않아서(기생 라함과 정반대로) 도리어 갈렙의 증언에 다들 분노해서
갈렙과 모세를 무릎 꿇혀서 돌로 쳐 죽일려고 한 이스라엘의 상대적인 모습을 갖추는 거짓말이다는 겁니다. 행함 자체가 저들의 행함에 반대성을 갖추고자 한 행함이다는 거죠.
성령이 이렇게 한 겁니다. 기생라합이 한게 아니라. 불가능하죠.
그런데 이것을 가능성으로 자꾸 바꾸니까 알맹이는 빼버리고 가능한 것인 착하자 거짓말하지 말자 참람죄 짖지 말자 라고 그야말로 믿음이 아닌 행함을 갖추더라 말이죠.
또 세 번째의 예인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는 엽기적인 행동이 뭔고 하니
엘리야가 3년 반 동안 비오지 않기를 기도한 겁니다.
이것을 요즘으로 하면 아무도 몰래 기도하는게 아니라
아예 대놓고 기도하게 되면
이건 사드 배치 보다 더 심해서 전국적으로 데모하고 난리일 껍니다.
아마 김OO이가 엘리야의 멱살을 잡고 난리칠겁니다.
김OO이가 성화론자들의 대표성 아닙니까?
인간을 너무 너무 사랑하는 연민을 가진 초인 겸손한자 위버멘시
어떻게 성화론자들은 말만 번드르하게 할게 아니라
김OO 보다 못하다 말이죠.
그저 지들끼리만 구원받을려고만 하니 말이죠.
행함이 있는 믿음은 결국 춘향이의 외침이다 말이죠.
(위에서 언급한 춘향이 이야기 상황에서 말이죠)
특이성을 깨는 더 나은 특이성으로써의 낯설음을 들이대는 겁니다.
자 그럼 이 시편 104편을 부르는 찬양자도 결국 누구들으랍시고 엽기적으로 부르는 겁니까?
자기 원수 말고
인간 원수 말고
하나님의 원수에게 이런 엽기적인 노래를 귀에 대 놓고 부르는 겁니다.
내 영혼아 저 하나님의 원수에게 외쳐라
전쟁의 나팔을 외쳐라
모든 죄악은 소멸 될 것이라고 말이다
라고 말이죠.
거기에다 덤으로 찬양자 자신
곧 이스라엘은 그 원수들이 덮썩 무는 미끼로써 동원이 되니까
이스라엘은 이 원수의 입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하는 경험을
매일 매일 해야 하는 겁니다.
언제까지 버틸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 못합니다.
모세도 탈락 할 정도인데
우리 인들 소냐 말이죠.
불가능합니다.
이 불가능성을 펼치시는 것이
가시떨기나무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여호와의 불을 불 붙이시는
구원전쟁 곧 원수갚기입니다.
댓글 단 글을 다시 제목을 달아서 타임라인에 올렸는데
김대식
8월 20일 오전 10:37 ·
구원사건 곧 원수갚기(사망의 권세 이기신 십자가구원사건)
모세가 자신을 불태워 소진시켜가면서 까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도
그 자체가 이미 헛된 짓임을
도리어 뭘 해도 죄 뿐임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를 알게 하시고자
가시떨기나무의 불꽃으로 나타나시는 겁니다.
소진되지 않는, 가시떨기가 타들어가지 않는 불꽃이다는 거죠.
자신을 불태웠노라고 자신을 쳐다보지 말고
가시떨기 나무에 붙은 여호와의 불꽃을 보라는 겁니다.
안 그러면 나만 남았나이다. 내 열심이 특심인데 이러기요?
라고 엘리야 컴플렉스에 빠지게 되는 거죠.
너는 너를 불태워 다 없어지지만
여호와의 불은 가시떨기나무를 태우지 않고서
일하시는 구원이다는 겁니다.
고로 인간의 구원은 헛되다는 겁니다.
(시 60:11, 개역)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시 108:12, 개역)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구원받은 자 입니다.
나대지 말고 그분께 맡겨라 ~~~~
(롬 12:19, 개역)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 12:20, 개역)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롬 12:21, 개역)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히 10:30, 개역)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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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상상도 못할정도로 역동적인 구원인데
어찌 인간들이 외치는 구원은 딸랑 지 한 몸 축복받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야기 뿐이니 말이죠.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기쁨 없이
그저 자기 한 몸 건지는 구원의 기쁨만 딸랑 챙기는 방식이니
이게 돈이 되고 이것으로 장사를 하고 있다 말이죠.
그래서 그런 개인 구원만 챙기는 집단으로 빠진 것이
이스라엘이기에
지금 새롭게 이 시편 104편의 찬양자는 미리 앞당겨서
벌어질 구원사건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의 재현인데
미리 알고 있던 그런 출애굽보다 더 낯설기 짝이 없는 구원사건으로써 말이죠.
이스라엘이 과연 기뻐할까요?
자신들의 민족 자신들의 국가 자체 마저도 해체 될 정도로 벌어질 사건을 미리 노래해야 하는데?
그런 구원을 노래 할까요?
불가능하기에 미리 노래하는 겁니다.
나라가 없어져도
민족이 뿔뿔이 다 흩어져서 다 사라져도
여호와의 불 전쟁
곧 구원전쟁은
모든 원수들을 소멸 시킨다 말이죠.
그 증인이 이스라엘이니
원수들이 소멸할때마다
그 증인들은 이스라엘로써 불쑥 등장해서
이스라엘로써 찬양하는 겁마니다.
이 구원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이 십자가의 승리로 사망의 권세를 넉넉히 이긴 사랑이시기에
무덤에 머물수 없어 춤추고자 노래하고자 세워진
넉넉히 세움받은 새이스라엘 이기에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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