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금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 (1:10-16)

 

 

(1:10, 개역)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1, 개역)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멜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12, 개역)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13, 개역)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14, 개역)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15, 개역)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16, 개역)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1:10, 새번역) 주님의 날에 내가 성령에 사로잡혀 내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 , ''

(1:11, 새번역) 그 음성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베소와 서머나와 버가모와 두아디라와 사데와 빌라델비아와 라오디게아의 교회로 보내라."

(1:12, 새번역) 그래서 나는 내게 들려 오는 그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서서 보니, 일곱 금 촛대가 있는데,

(1:13, 새번역) 그 촛대 한가운데 '인자와 같은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 7:13

(1:14, 새번역)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과 같이, 또 눈과 같이 희고, 눈은 불꽃과 같고,

(1:15, 새번역) 발은 풀무불에 달구어 낸 놋쇠와 같고, 음성은 큰 물소리와 같았습니다.

(1:16, 새번역) 또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쥐고,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칼이 나오고, 얼굴은 해가 강렬하게 비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제목을 일곱 금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 라고 했습니다.

 

인자 라 하면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에게 버린바 되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분을 말씀했었었었다 말이죠.

 

즉 인자 라고 하면

넘기움을 받는 자 라고 예수님 자신이 표현했었었습니다.

 

(17:22, 개역)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20:18, 개역)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8:31, 개역)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9:31, 개역)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10:33, 개역)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9:22, 개역)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9:44, 개역)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하시되

(18:32, 개역)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24:7, 개역)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결국 가룟유다만 예수님을 판 게 아닙니다 넘기운게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팔아 넘겼다는 겁니다.

가룟유다는 우리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 대표성입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을 팔았다는 겁니다.

 

자 그럼 그 넘기움을 받았던 그 인자 되신 예수님이

다시 계시록에 나타났습니다.

 

 

!!! 그런데 넘기움을 받았던 그 인자 맞나요?

얼마나 볼품 없었고

풍채도 없었고

무능하고

인간들이 싫어 할 만큼 흠모할 아름다운 모양이 일체 없는

역겹다고 역겹다고 재수없다고 소금뿌리면서

고개를 다들 돌려버리는 그런 인자였는데

 

지금은 180도 정반대의 모습이였다는 겁니다.

 

진작 저렇게 왔다면 아무도 싫어하지 않았을 텐데

아무도 넘기우는 자 없었을 텐데

 

서로가 사랑하겠다고 모든 재산을 다 버리고

서로 달려들면서 서로 따라가겠다고 했을텐데

그때는 전혀 그런 모습이 없다가

 

지금 계시록 때는 도저히 싫어할 수 없는 모습의 인자이다는 겁니다.

 

아니 그렇게 무능해서 다들 지나가다가 발로 차 버릴 정도로

재수 없다고 희롱하고 능욕하고 침 뱉으면서

그래도 아무런 방어도 못하는 그런 무능하고 무능했던 인자였는데

지금은 온갖 거룩으로 도배되었고 금으로 도배된 모습이다 말이죠.

 

발에 끌리는 옷을 입었다 라는 말은 고귀한 신분이다는 거죠.

감히 우러러 볼수 없을 정도로 어이쿠 눈부셔 라고 할 정도로 위대한 신분

 

거기에다가 가슴에 금띠를 띠었다 즉 거룩한 분이다는 거죠.

 

머리카락 색깔이 흰 양털 같을 정로도 희고도 흰 정결한 분

숭고하기 짝이 없는 아름답다 라는 천상의 존재 라는 거죠.

 

그의 눈은 불꽃, 발은 강인한 주석 다이아몬드. 음성은 많은 물소리

오른손에는 일곱 별, 입에는 좌우에 날선 검, 얼굴은 광채로 빛났다 라고 합니다.

 

즉 이 말은 전에 우리가 봤던 그 인자가 아니다는 겁니다.

 

무시했었었던 고개를 돌려 싫어버린바 되었었었던 그런 인자와 정반대의 모습의 인자다는 겁니다.

 

(1:13, 개역)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14, 개역)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15, 개역)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오죽하면 저절로 그 앞에서 죽은자 같이 되어버렸다 라는 겁니다.

전에는 인간이 그 앞에서 산자처럼 산 척을 마음껏 했었었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은자 취급해서 왕따 시켜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정도였는데

 

이제는 거꾸로 인간 쪽에서 내 쪽에서 저절로 죽은자가 될 정도로

그의 위엄이 저절로 높임을 받을 정도로 정반대의 인자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1:17, 개역)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7-8년 전에 어떤 청년이 에반겔리온 이라는 일본 에니메이션을 보고

겁을 먹고 사도가 지구를 공격하는데 있어서

왜 이런 짖을 벌리냐고 묻길래 황당했습니다.

그 영화를 전혀 몰라서이구도 하고

도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청년이 겁을 먹었을까?

영화판으로 나온 에반겔리온 파? ? ?

파 이지 싶은데

거기서 인자가 입에 좌우에 날선 검이 나와서 지구를 초토화 시키는 모습을 처음장면부터 나오더라 말이죠. 지구멸망

 

그래도 마틴 루터의 말을 인용한 스피노자처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라고 지구멸망 이후에 살아남은 자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내용이던데

언제까지 사도들의 공격을 막아낼수 있을지는 ~~~~~

 

아무튼 그 영화가 생각날 정도로

인자는 완전 무섭기 짝이 없는 분이시더라 라는 처음장면이였다 말이죠.

전에 모든 인간들이 익히 알던 그 인자가 그 예수님이

전혀 딴 모습으로써 전에 알던 모습이 아니였다는 겁니다.

 

아무튼 제목을 일곱 금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 라고 한 이유는

그 밑의 구절에서도 나오지만

우리가 오해하기를 일곱교회가 주체가 아니다는 겁니다.

당연하지요

그러나 당연하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당연하게 안여긴다는 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한계 때문이겠지요.

 

일곱 교회는 처음과 나중이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그 일곱교회는 이런 일들을 전혀 벌릴수 없는 자들입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이 인자의 오른손에 쥐어져야만 하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즉 인자가 벌리시는 사건의 증상물이 일곱교회이다는 거죠.

원인 없는 결과 말이죠.

 

어제 지진이 벌어졌는데

실재계 라는 역사 밖의 세계가 역사 속으로 침범할때에 벌어지는 것이 사건입니다.

결국 사건에는 반드시 증상이 나타나는 거죠.

아 묵시가 침범 하니까 역사는 이런 반응이 나타나더라 라는 증상 말이죠.

 

[인자 같은 이]가 전에는 무능한 모습으로 나타나니까 즉 침범하니까

십자가 라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 쪽에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에게 넘기움을 받는

십자가 라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계시록에서 [인자 같은 이]가 등장하니까

일곱교회가 그의 오른 손에 붙잡힌 바 되고

나머지는 저절로 죽은자 같이 되어버리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죽어버린 자 같이 되어버린 자 중에 한 사람 사도요한에게 벌어진 사건이

그 많은 물소리가 뭔고 하니

 

(1:18, 개역)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19, 개역)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기록하라 라는 사건이 요한에게 벌어진 겁니다.

그럼 요한은 마지막 남은 인생을 기록하는 사건에 놓여지게 되는 거죠.

 

이 부분을 볼 때 마다

주의 병에 눈물을 담는다는 시편 내용이 생각납니다.

 

(56:8, 개역)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즉 주의 책에 기록되는 것은

다윗의 눈물이다는 겁니다.

 

이것 외에 다른 것들은 이스라엘의 그 어떤 것도 주의 책에 기록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그네 됨에 충성하신다는 거죠.

 

나그네 됨이 아닌

첫사랑이 아닌

원인 없는 결과가 아닌

잃어버린 대의가 아닌 것들은

 

주의 책에 기록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마침 어제 지진이 일어나기 전인 아침에 어머니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마침 역대기를 읽으시길래 말이죠.

 

왜 이스라엘은 왕이 필요 없음에도 불구하고 왕을 주시냐 말이죠.

그것은 하도 하도 왕을 달라꼬 때를 쓰니까 줬다 말이죠.

 

나의 곧 하나님의 왕 됨을 원치 않으니까 왕을 허락해 버린 겁니다.

그래서 처음 나온 왕이 사울 왕이다 말이죠.

 

자 제가 놀라운 것을 질문했습니다.

 

어머니! 이스라엘은 왕이 필요한 나라일까요?

왕이 필요 없는 나라일까요?

 

왕이 필요 없는 나라 이다 말이죠.

 

족장 시대에서 왕 시대로 넘어갈 시점에

주변의 이방나라에서 왕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너무 너무 좋아보여서

일부러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더 또렷하게 보여주니까

왕 안 세우고는 못 배길 정도로 왕 제도를 억수로 부럽게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지 그럼 왕 제도 없애버리면 될꺼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왕 제도 없앨까요? 아니면 더 나쁜 왕 제도를 도입할까요?

나쁜 왕을 없앨까요? 아니면 더더더 나쁜 왕을 세울까요?

 

어머니가 눈이 번쩍 뭐라꼬?

처음 들어본 말이라서 뭐라꼬 다시 다시

 

임금, 아버지, 남편을 유지할까요?

 

그의 백성, 그의 아들, 그의 남편,을 유지할까요?

나그네, 고아, 과부를 없애 버리고

 

아니면 임금 아버지 남편을 없애 버리고

나그네 고아 과부를 유지할까요?

 

말을 괜히 어렵게 했는데

나쁜 왕들 보다 더 나쁜 왕이 될까요?

아니면 나쁜 왕들과 달리 좋은 왕으로 오실까요?

 

다들 교회에서 엉터리로 가르치는 이유가

나쁜 왕들에 비해 좋은 왕으로 오신다고 했는데

아닙니다.

나쁜 왕들 보다 더더더 나쁜 왕으로 오신다 말이죠.

 

그래야 왜 나쁜 왕들이 곧 인간 왕들이 왜 안되는가?

더더더 나쁜 왕이 오심으로써 보여주신다 말이죠.

부정의 부정

반대를 위한 반대

 

즉 부정을 없애지 않고

부정 보다 더 부정한 모습으로 온다 말이죠.

왕 제도를 없애 버리는게 아니라

왕은 왕인데 아무도 흠모하지 않는 왕

 

그래야

 

즉 인간왕 그들은 종일 뿐이다는 거죠.

주인은 마귀다 말이죠.

마귀가 뭡니까?

왕 제도를 요구한 법 법 법 제사와 번제를 요구하는 자 아닙니까?

모호한 의문의 것을 반복하는

 

그럼 그런 종 곧 마귀의 종인 왕 보다

더 나쁜 그들 종인 왕의 주인인 마귀를 건드리는

그 주인만 상대하는 더 나쁜 왕이 오셔야

모든 의문의 것들을 패하고

또렷하고 명료한 밝히 보이는 십자가의 사랑을 넉넉히 다 이루심을 보여준다 말이죠.

 

이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가 너희들을 구원했다 라고 했을때에

거룩한 척의 달인인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가 거리끼는 걸림돌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헬라 이방인에게는 지혜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가장 어리석은 지혜가 구원의 지혜였다니

인정할 수 없는 거죠.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고자 지혜를 추구했는데

그렇게 싫어했던 어리석음이 도리어 자신들을 구원하는 지혜 중의 지혜이다니

인정하겠냐 말이죠.

 

누구 말 마따나

바보가 되기 싫어서 바보가 되기로 했고

정신분열증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기로 했다는 식이다는 겁니다.

부정의 부정

 

그렇기에 십자가는 저들의 법에 의하면 더 나쁜 불륜인 불법이다는 겁니다.

사랑은 불법입니다.

법 보다 더 나쁜 것이 사랑이다 말이죠.

 

그런데 이 나쁜 사랑

이 죽일 놈의 사랑이

나를 참된 인간 만들어주는 겁니다.

인간 같지도 않는 벌레 같은 인간을 구원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인자 같은 이는 일곱 금촛대 사이에서 등장해서

봐라 또렷한 인애와 자비의 결과물인

나의 오른손에 붙잡힌 바 된 일곱 별을 일곱교회를 보라 라고

앞장세우면서 그 사랑의 원인 없는 결과물을 내세우면서 등장하시는 겁니다.

 

인자의 모습이 특이한데

? 전의 모습과 정반대인데

그 중에 특이한데 더 특이한 것은

바로 오른손이 일곱별을 쥐고 있다는 점에서 이중특이성

즉 저들 이방 신과 다른 점으로써의 차이성이다는 겁니다.

즉 이방신은 약속을 못 지킨다는 거죠.

그야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마치 주님쪽에서 신이 있는냥 인정을 하시듯이

신이 있다.

다른 신이 있다

있기는 있는데 약속을 못 지키는 신들이다 라는 겁니다.

그럼 다른 신을 누가 인정합니까?

주님이 인정하잖아요

그런데 이것이 역설 페러독스인데

인정해 줬으면 아 신은 있구나

예수님 말고 다른 신은 있구나 라고 존재론적으로 이야기 하는게 아니라

너희 손으로 만든 우상 인정해줘놓고

그들 신이 약속을 지키디? 라고 다시 뒤짚어 엎어버리는 겁니다.

결국 신은 없다는 거죠.

그런데 신은 없다 라고 표현안하시고

신은 있다 라고 표현하시면서 존재론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약속을 지키냐 안지키냐 라는 식으로 한판 붙자 라는 겁니다.

그럼 약속 안 지켰잖아

나는 지켰잖아

이 봐라 내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잖니 라고 나오시는 겁니다.

이것 때문에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으로써

처음부터 나중까지 약속에 충실한 자는 인자 자신 뿐이다 라고

삥삥 둘러서 이야기 하시는 겁니다.

즉 이 말씀 자체도 인간을 상대로 한 표현들이 아니라

인간이 볼수 없는 마귀를 겨냥해서 표현한 것임을 좀 보라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의문의 반복인 제사와 번제를 안거치는게 아니라

이미 인간이 여기 속에 다 빠져 있기 때문에

제사와 번제라는 의문을 반복하는

? 의문인고 하니 마침이 없거든요

그래서 그 속에서 못 벗어나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 라고

의문의 반복 속에 있는 자들에게

 

처음과 나중 이요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를 원하시는 주님이

드디어 마침 곧 또렷한 십자가를 밝히 보여주시는데 있어서

드디어 약속을 성취 하셨다

다 이루셨다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 처음부터 나중까지 일괄되게 일하셨으니까

 

이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인애와 자비 앞에서

정작 사도요한은 죽은 자 같이 되었고

역시나 무능하게 사로잡힌바 되어서

이유 없이 용서 받은 일곱교회는 죽은 자 같이 되었는데

 

정작 세상은 죽은자 같이 되지 않는겁니다.

이 말은 저절로 그의 앞에 무릎 꿇는게 아니라

도리어 그 심판의 자리에

저번의 무능한 그 인자 모습을 대하듯이

자기들이 심판의 자리에 앉아서

불안함을 조장하고

의문을 것을 폐했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세워서 의문의 것을 반복하는 겁니다.

헐었는데 허문 것을 다시 세우더라 말이죠.

의문을 다시 반복하는 겁니다. 답도 없으니 답도 없는 상태로 계속하겠다는 식입니다.

마침이 없도록 하겠다는 심뽀죠.

 

(2:16, 개역)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2:17, 개역)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2:18, 개역)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2:19, 개역)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2:20, 개역)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21, 개역)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유대인도 안 되는 판국에

이스라엘도 뭘 해도 안되는 판국에

개같은 이방인에게 유대인처럼 살라고 율법을 준다면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는 꼴이다 말이죠.

그렇게 되면 예수 안에서 사는게 아니라

예수 밖에서 내가 사는 것이다 말이죠.

죽은자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함께 죽는게 아니라

독자적으로 내가 십자가와 무관하게 내가 사는 것이다 말이죠

십자가는 그저 보충용인 내 구원용으로 자기 유익으로 이용하면서 말이죠.

그러니까 의문의 반복이니까 불안하니까 막살지 말자 라고

불안함을 보충하는 주문 최면을 외우는 겁니다. 막살지 말아야 하느니라 라고 말이죠.

 

그렇게 되면 또 이방인보고 유대인과 같이 살라고 하는 식이다 말이죠.

헐어버렸는데 다시 세운다 말이죠.

 

바로 이런 자들이 인자 되신 이에게 반항 하는 자들로써

계시록에 등장하는 겁니다.

 

즉 주의 오른손에 붙잡힌 바 된 일곱 교회를

즉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에게 정죄치 않는 주의 오른손에 놓여진 자를

 

의문의 것을 반복하라고, 절대로 막살면 안된다고 돌삐 든 자들처럼

그렇게 살면 돌삐 던지겠다고 하는 자들처럼

주의 오른손에 없는 자들이 반박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막살면 안된다고 말이죠.

 

그럼 돌삐 던지라 말이죠.

그런데 인자가 옛날에 똑같이 돌삐 맞아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 분이

다시 살아나서 오른 손에 일곱 별을 쥐고 있으니까

 

그렇게 정의 정의 외치고

바른삶 바른 삶 막살지 않는 삶을 외치는자 맞다면

돌삐 던져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돌삐는 던지고 싶은데

인자가 전번때처럼 돌삐 맞아도 소용없을 정도로 다시 사는 분이라서

예수님만 아니였다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돌로 쳐죽였을텐데

하필이면 그때 침을 뱉어 땅에 뭐를 쓱쓱 쓰는 바람에

안타깝게 죽이지 못했는데

 

이제 드디어 죽을려고 돌삐 들었는데

아 이제는 그때의 인자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가로막고 있어서

 

이 인자 때문에 또 죽이지 못하는 겁니다.

 

돌삐던지고 싶은 저 얼룩을 향해 저 막사는 놈들을 향해 돌삐 던지고 싶어 미치겠는데

이 인자 땜에 말이죠.

 

그런데 이 인자가 바로 인애와 자비를 원하는 모습이고

이 상대적인 보충물이 바로

저들 돌삐를 든 붉은 글씨로 양탈무리처럼 돌삐 던지고 싶어서 미치고 환장한

? 나는 절대로 막살지 않으니까

이런 놈들이 바로 의문의 것을 반복하는 번제와 제사를 반복하는 자들로써 배치가 되는 거죠.

 

그럼 계시록의 최종적은 사건은 바로 이것 때문에 벌어지는 겁니다.

주의 오른손이 있는 일곱별을 미치도록 돌삐 던지고 싶어하는

땅의 짐승(마귀)과 여자(제사장 딸) 음녀는

이 일곱별 일곱촛대를 빼앗고자 하는 최종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 얼룩과 같은 일곱 교회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계시록 전쟁이다 말이죠.

 

어차피 마귀는 예수님을 못 이긴다는 것은 압니다.

그걸 알 정도면 얼마나 믿음이 좋냐 말이죠.

그러니 인간들끼리 믿음 믿음이라는 소리는 다 헛소리입니다.

 

그러나 마귀가 도저히 못 견디는 것은

자기가 그린 아름다운 그림에 이놈의 얼룩인 일곱교회 때문에

미치는 겁니다.

사실은 일곱교회 때문이 아니라 일곱교회에 묻은 십자가의 피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자기 그림이 이놈의 얼룩이 신경쓰이는 겁니다.

아무리 아릅답게 그림을 그려도 그 눈에 보일락 말락한 얼룩이

전체 그림을 다 빨아들일정도로 신경이 쓰여서 전체 그림이 안 보이고

얼룩만 크게 보인다 말이죠.

 

바로 그런 이유로

예수님의 오른 손에 일곱별이 쥐어진 겁니다.

 

자 그래놓고 주님은 뻔뻔스럽게

누가 약속을 지키는 자인가?

즉 누가 처음과 나중이요

알파와 오메가 이며

처음에도 계셨고 나중에서 계신

즉 한 마디로 약속을 실행하는 자가 누구신가 라는 겁니다.

그럼 상대적으로 약속을 못 지키는 자를 반드시 데리고 와서

서로 비교해서 그 차이성을 나타내시니까

마귀는 싫어도 동원이 되고

마귀는 싫어도 예수님의 동기부여로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해서

그 동기부여에 말려들도록 하신다 말이죠. 마귀에게 말이죠.

 

오로지 예수님 자신의 약속 지키기를 즉 처음과 나중을 보여주시고자 말입니다.

그럼 우리 또한 오른손에 쥐어질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데

절대로 막살지 않아서가 아니라

뭘해도 막살았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오른손에 쥐어지는 겁니다.

그래야 얼룩제거하고 싶어서 미치는 겁니다.

 

마귀의 깔끔병은 바리새인 저리가라 할 정도이니까 말이죠.

차에 먼지 묻었다고 차 팔아버리는 거는 족히 비교할수도 없을 정도이다 말이죠.

마귀는 광명한 천사이기에 거룩병이 있다 말이죠. 결벽증 이다 말이죠.

더러운 꼴을 못 봐요, 막사는 꼴을 못 봐요. 탕자 형처럼 말입니다.

바리새인을 보고 그래서 너희 아비는 마귀다 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앞으로 일곱교회 하나 하나를 살펴보겠지만

바로 그런 식으로 일곱교회를 다루는데 있어서

완전 거꾸로 해석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너도 나도 제일 괜찮은 교회를 자기네들 교회의 이름 간판으로 정하더라 말이죠.

제일 욕먹는 교회 이름 지었다가는 돈장사를 못하거든요.

주의 오른 손에 붙잡혀 있어도 소용없어

그 일곱 교회 중에서도 가장 칭찬 듣고

가장 깨끗하고 정결한 교회로 이름을 지어야 된다고

동일성을 추구하게 되니

그게 또 돈이 모여지니까 말이죠.

 

자 이 모든 것이 바로 마귀를 거치지 않고

예수님만 거치겠다는 심뽀이다는 겁니다.

자기가 마귀인 것을 고백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바로 예수님만 추구하겠다고 하니까

정작 예수님은 자신을 마귀를 거쳐서 그 차이성을 나타내시기 때문에

마귀가 아니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게 하셨는데

자기 혼자 깨끗한것만 추구하면 되는 것처럼

그래서 회개를 못하기 때문에

탕자처럼 인애와 자비를 모르기 때문에

맏아들처럼 번제와 제사만 추구하면 된다고 봤기 때문에

그것이 엉터리인줄 모르기 때문에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율법의 가입으로 모든 자들이 죄 아래 가두기 위함인데

지 혼자 죄 아래 갇힌 적 없이

그래서 회개 없이

율법 지키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동일성을 추구한다 말이죠.

 

바로 이것이 법의 올무요 유혹인데

마귀가 바로 이것을 노리는 거죠.

여기에 자신만만하기 때문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님의 약속 곧 처음과 나중에 대드는 겁니다.

마귀는 믿음이 있어요.

승산이 있다는 것을 말이죠.

처음부터 질 게임이라면 참가하지 않았다 말이죠.

욥을 놓고 하는 하나님의 내기에서 뻔히 자기가 질 것 같으면 왜 참여하냐 말이죠.

승산이 있다는 믿음을 주님이 자꾸 동기부여를 해준다 말이죠.

그래서 덮썩 미끼를 무는 겁니다.

 

그러니 마귀는 육으로 계산하는 겁니다.

가능성이 있다고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이 왜 할짓없이 승산없는 게임에 참여하겠습니까?

승산있다고 본 겁니다.

아무리 최악이라도 무승부까지 된다고 본 거죠.

왜냐하면 예수님 쪽에서 차 포 마 다 빼고 장기를 두자 하니까 말이죠.

주님은 육으로 계산한게 아니라 영으로

믿음으로 두시기 때문에

약속을 지키신다 말이죠.

이 약속에 자기 목숨 걸었다 말이죠.

그러나 마귀가 육인 이유는 약속에 목숨 걸 리가 없거든요.

약속을 이용만 해 먹을려는 심뽀는 우리와 같다 말이죠.

 

그러니 생각 자체가 이미 육이요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차 포 마 다 떼어도 넉넉히 이긴다 말이죠.

 

그러나 마귀는 자꾸 육으로 계산하는 겁니다.

차 포 마 떼주면 제가 이길수 있으니 차 포 마 떼어달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떼어주기 싫으면 말고

왜냐하면 욥을 가지고 내기를 하자고 한 분은 주님 쪽이다 말이죠.

누가 아쉽냐 말이죠.

약속을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난 분이 아쉽지

마귀가 뭐가 아쉽냐 말이죠.

어차피 지구가 멸망해도

심지어 이 게임에서 져도

자기는 무승부 원래 지구가 만들어지기 전에 있었던 대로 돌아가면 그만이니까

자기는 져도 상관없으니 무승부로 생각하면 그만이니

뭐 하나 아쉬울게 없다 말이죠.

 

그런데 사랑은 바로 그것에 대한 질투요 시기이다는 겁니다.

이 사랑 곧 약속을 지키시는 주님에 대한 분노를 지옥에서 영원히 품도록 하겠다는 취지이니까 말이죠.

 

그러니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인간이 아닌 마귀를 겨냥한거다 말이죠.

그 마귀를 겨냥한 일에 왜 쓸데 없이 인간이 같이 말려드냐 말이죠.

 

곧 마귀는 주님께서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라는

약속 지키는 꼴을 못 보겠다는 그 심뽀를 더더욱 마귀 보란 듯이 펼치시는 겁니다.

마귀가 배 아파 죽겠다고 설쳐대도록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