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바뀐 원수, 뒤바뀐 거룩 (시편 94편)
(고전 3:20, 새번역) 『또 기록하기를 ㉥"주님께서 지혜로운 자들의 생각을 헛된 것으로 아신다" 하였습니다. / ㉥시 94:11(칠십인역)』
(시 94:11, 개역)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시편 94편은 원수 갚아 달라는 기도입니다.
문제는 인간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원수이다는 겁니다.
이 부분을 대부분의 시편 94편 설교가 신학자들의 연구를 참고로 하다 보니
인간적인 기도라고 설교하더라 말이죠.
그런데 아닙니다.
정작 인간은 원수가 없습니다.
보여야 원수 갚아달라고 기도할것 아니냐 말이죠.
안보이니 기도 할수 조차도 없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원수이기에
구원 전쟁은 결국 원수갚기로 주어지는 겁니다.
평화라는 의미가 전쟁이 종식이 되지 않는 이상
평화 평강 평강이라고 외치는 것은 곧 거짓선지자의 외침과 같다 말이죠.
마찬가지로 원수 문제를 해결되지 않는 이상
구원은 없다는 겁니다.
결국 원수를 갚아야 구원이 되는 겁니다.
자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구원개념은 순 엉터리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원수 문제를 해결되지 않는 상태에서 구원을 운운하게 되니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주여 원수를 물리치소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기도는
곧 시편 94편의 외침이 되는 겁니다.
어머니께 이런 설명을 했습니다.
인간 중에는 원수 개념이 없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이 원수 갚아달라고 기도하는 민족이 생겨났는데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이라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은 유일하게 하나님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외치는 민족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자기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 말입니다.
자 이것은 당연히 이스라엘의 자발적인 기도요청이 아닙니다.
이 부분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의 기도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결국 이스라엘 조차도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기도를 하는 겁니다.
당연히 그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지는 기도인 겁니다.
하나님 자신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런 의미로 시편 94편을 보자 말이죠.
하나님 자신의 기도 말입니다.
분명 원수 하면 애굽입니다.
함과 가나안에 대한 복수입니다.
자 그런데 강조한 것은 애굽은 이미 500년 전 쯤에 지나간 때요
애굽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또 함 땅의 객이 되었다고 시편 105-106편에서 강조했듯이
또 원수 애굽을 언급하냐 말이죠.
가나안 땅은 이미 정복해서 발 디디고 살고 있으니 가나안 민족은 없잖아요
그런데 그 노아때의 예언이 시편 당시에 까지도 계속해서 언급이 된다는 겁니다.
함이 있어야 원수 개념이 성립이 되잖아요
그런데 함 땅의 애굽도 이미 멸망했다 말이죠.
가나안 땅도 이미 정복했다 말이죠.
그런데 왜 시편 94편은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원수 애굽 곧 함을 아직도 언급하냐 말이죠.
이것은 상대적인 약속의 땅의 약속을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약속의 보충물로써 계속해서 함 땅을 언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은 이 기도를 함에 있어서
이스라엘 아무도 기도 안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중에서 아무도 이런 원수 갚아달라는 기도를 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주님이 의도적으로 원수 갚아달라는 기도하는 자를 세우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이 보기에 과연 그 사람이 그런 기도를 할 자격과 조건이 되느냐 하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아무도 이런 기도 즉 원수 갚아달라는 기도를 하는 자가 없기에
즉 인간에게는 원수가 없기에
하나님에게만 원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세운 자가 이스라엘인데
정작 이스라엘 중에는 이런 기도를 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기도하는 자를 이스라엘 속에서 또 따로 세우는 겁니다.
그 예를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로 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거룩인 율법을 더럽혔다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돌삐를 들어서
쳐 죽일려고 한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율법을 더럽힌 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더럽다고 정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땅에 쓱 뭐라 뭐라 적으니까 돌삐 든 자들이 다 도망치고 없는 겁니다.
자 거룩을 더럽힌 자를 정죄할려면 죄 없는 거룩한 자가 정죄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원수라고 돌삐를 든 그 자들도 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원수인 겁니다.
왜? 거룩을 더렵혔거든요.
거룩은 결국 예수님 자신의 긍휼을 입었느냐로 결정되지 (원인 없는 결과)
인간의 거룩 행하기는 결국 주님의 긍휼을 모독하는 오히려 거룩을 더럽히는 것이다 말이죠.
왜 함과 가나안 에 대한 저주를 몇세대 심지어 천년 구약 전체 또 신약까지 3천년까지 계속 밀어 붙이시느냐 하면
바로 거룩을 더렵혔다 말이죠.
노아 라는 은혜 입은 자의 술 먹고 벗은 것을 모독했으니 말이죠.
이것이 고린도전서 3장에서도 시편 94편이 언급 됩니다.
(고전 3:20, 새번역) 『또 기록하기를 ㉥"주님께서 지혜로운 자들의 생각을 헛된 것으로 아신다" 하였습니다. / ㉥시 94:11(칠십인역)』
(시 94:11, 개역)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성전을 더럽히지 말라는 이유로 책망하는 내용이 고전 3장에서 언급됩니다.
성전은 거룩한 하나님의 집이다 말이죠.
그런데 그 성전이 바로 우리 몸이다는 겁니다.
건물이 아니라
그런데 거룩이라는 의미를 주님께서 자신의 피를 발라 거룩을 부었다 말이죠.
그런데 그 거룩한 몸을 더럽힘에 있어서 거룩을 모독했다는 겁니다.
그 원인이 바로 사도바울이 하도 괴팍하게 굴다보니까
게바파 아볼로파 바울파 라는 계파가 거룩한 교회에서 형성되다 보니
거룩을 더럽히지 말라는 충고로써 언급이 된다 말이죠.
그런데 사도바울이 정작 원인이면서 정작 사도바울이 수습을 하는데 있어서
전체 그림을 보여준다 말이죠. 성령으로 인해 말입니다.
원인을 따지는게 아니라 결과로 따지는 겁니다. 오히려 원인이 부재 되더라 말이죠.
그리고 언제든지 벌어질수 있는 교회내에서의 일들을
부분으로만 생각하는 계기가 아니라
전체 나무 숲을 보는 얼굴과 얼굴을 보는 계기가 되도록 하시는 겁니다.
즉 원인이 아닌 결과로, 끝에서 보라는 시선인 겁니다.
자 그렇다면 시편 94편도 다윗이라고 보시고
하나님의 원수에 대한 기도를 이스라엘이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음에 있어서 다윗이 기도를 하는데
과연 이스라엘이 동의를 하겠냐 말이죠.
왜냐하면 제일 원수짖을 다윗이 제일 심하게 했다 말이죠
얼마전에 추석전에 어머니께서 성경 읽으시다가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는 바람에 징계를 받는데
정작 다윗이 죽임을 당하는게 아니라 딴사람이 죽임을 당합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그때 다윗에게 악령이 들어가서 인구조사 했다고 하고
어머니께서 읽은 부분은 하나님이 시켜서 인구조사했다고 나온다 말이죠.
그러니 원수 짖은 누가 더 했다? 다윗 아니냐 말이죠.
하나님이 용서해서 그렇지
백성들은 다윗이 우리야 장군을 죽이고
밧세바를 취하고
이름없는 아기 곧 솔로몬의 형의 죽음을 잘 알고 있다 말이죠.
기억에서 못 지웁니다.
그런데 다윗이 원수 갚아 달라고 기도하면
같이 네 맞습니다. 저 기도에 저도 아멘합니다 라고 나오겠습니까? 아니면
속으로 지는 더 하면서 라고 피식 거리면서 비웃겠습니까?
마치 어중이 떠중이 이스라엘 중에 가장 부정한 자인 자들을
사사로 판관으로 구원자로 세우는 사사기와 같다 말이죠.
고린도 전서 3장도 마찬가지이다 말이죠.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원수 갚아 달라고
거룩을 더럽힌 이 원수 짖을 그냥 내버려두지 말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과연 이런 기도 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못합니다.
다윗도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하십니다. 거룩한 성령을 부으셔서
이 불가능한 기도를 하게 하십니다.
회개란 앞의글 계시록에서도 언급했지만
모호하고 의문의 반복인 번제와 제사를 회개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잘못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과 부딧혀 충돌하는 점이 뭔고 하니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면 뜯어 고쳐서 안하도록 하라 라고 하는데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아도
그 반복 됨에서 완벽하게 벗어나는 자는 없습니다.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그 기도도 반복이 됩니다. 의문의 반복처럼 말이죠.
오히려 나는 이 반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임을 고백하는 것이 회개인데
졸지에 벗어났다고 우기는 자들이 또 등장함에 따라
그들이 또 그런 반복을 자꾸 우긴다는 점입니다.
벗어났다는 둥 말이죠.
벗어나든 안벗어나든 그것은 의미가 없거든요.
그런데 벗어났다고 우기니까 그것이 또 의문의 반복이 되는 겁니다.
전형적인 성화론자들의 주장 아닙니까?
나 개인의 벗어남과 안벗어남과의 관계없이
주님께서 이미 또렷한 십자가를 밝히 보였다 말이죠.
그런데 왜 또 개인의 벗어남을 주장함에 있어서 또 의문의 것을 반복함에
또렷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왜 꾀냐 말이죠.
그러니 회개를 성령께서 부으신게 아니라
개인의 실천으로 했기에
또 견디질 못하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또 잡는 겁니다.
거룩을 더렵혔다고
그러니 거룩이 뒤집어진줄 모르는 겁니다.
오히려 더러운 자가 거룩한 자고
깨끗한 자는 하나님의 거룩을 더럽히고 있는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원수가 다윗이다 말이죠.
그런데 그 하나님의 원수인 다윗이 원수 갚아달라고 기도 하고 있으니
누가
가장 누가 피식 거리면서 비웃겠냐 말이죠.
당연히 이스라엘이 비웃는다 말이죠.
정작 본인들은 원수가 없으니 원수 갚아달라는 기도를 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죠.
그러니 바뀌어도 한 참 뒤바뀐 원수가 되는 겁니다.
원수가 원수 갚아달라고 기도하고
원수가 없는 이스라엘은 원수 갚아달라고 기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원수가 없으니 그런 기도를 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런 자에게 시편 94편은 또렷한 십자가의 반복이 아니라
의문의 반복인 제사와 번제의 반복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거룩을 더럽힌 탕자가 오히려 원수 갚아 달라고 기도하는 셈이고
맏아들은 저런 원수가 기도하는 꼴을 못 보는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는 깨끗한 원수가 되는 겁니다.
결국 원수 개념
마귀 개념을 거치지 않고서는
거룩을 우리는 알길이 없다 말이죠.
바로 그런 것을 거치지 않고 거룩을 추구하는 것은 순 엉터리가 되는 겁니다.
어머니께서 문뜩 아 그럼 마귀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광명한 천사 라고 하는 이유가 그런 이유구나 라고 하시더라 말이죠.
그렇죠 어머니
오늘날 교회가 전신에 광명한 천사인 마귀짖을 따라 하더라 말이죠.
정작 거룩은 아무리 봐도 더러운 자가
거룩의 구석이라고는 없는데 오로지 단절된 의미에서
원인 없는 결과로써 오로지 피
예수님의 피 발림 때문에 거룩이고
저들은 아무리 거룩한 행실을 어릴적부터 부자청년처럼 율법을 행해도
정작 그들이 거룩을 더럽히는 원수인 이유는
예수님의 피 발림이 의미가 없기 때문에
원수가 되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신 예수님의 피를 모독했기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사도바울은 자신의 원인이 된 교회내의 파 갈림이
물론 자기가 유도한게 아니라 성도들이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하다 보니
게바파 아볼로파 바울파 로 나누어진 것을
이것을 계기로 거룩을 모독하는 하나님의 원수에 대한 의미를
사도바울이 언급해서 더 큰 의미 거룩의 의미로 확대해서 주의 피 발림의 거룩의 의미를
명료하고 또렷하게 증거하는 계기로 삼은 겁니다.
그러니 속이지 말라 라고 하는 겁니다.
개인의 거룩을 추구하는 성화론은 속이는 자들인 셈입니다.
전체 거룩을 모독하기 때문입니다.
(고전 3:16, 개역)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17, 개역)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 3:18, 개역)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전 3:19, 개역)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고전 3:20, 개역)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고전 3:21, 개역)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고전 3:22, 개역)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고전 3:23, 개역)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그런데 그 전체 거룩을
개인의 거룩들이 모여서 돌삐를 들어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율법을 어겼다고
율법 대로 돌삐 들어 쳐죽일려고 할 때
하필이면 예수님이 지나가니까 예수님을 시험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율법을 지키는데
율법이라는 거룩을 더럽히는 이 원수를 당신은 어떻게 할꺼요?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라고 했는데?
(레 11:44, 개역)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바 기어다니는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레 11:45, 개역)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고전 3:17, 개역)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벧전 1:16, 개역)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벧전 1:16, 새번역)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하였습니다. / ㉡레 11:44; 45; 19:2; 20:7』
그런데 주님은 어딜 감히 나를 속일려고?
과연 너희들이 거룩할까?
거룩한 율법대로 돌삐를 들 자격이 있을까?
오히려 원수가 뒤바뀌어지는 겁니다.
거룩이 오히려 가장 더러운 자가 거룩을 입게 되는 겁니다.
왜? 함과 가나안을 시편에서 다시 언급하시는 것일까요?
이들이 원수 짖을 하는데
나그네 고아 과부를 압제 한다는 겁니다.
그 고아 과부 나그네가 이스라엘인데
그래서 원수 갚아 달라고 기도하는 민족은 이스라엘 밖에 없는데
그 이스라엘이 도리어 원수가 되어서
고아 과부 나그네를 압제 하더라 말이죠.
그렇다면 함이라는 애굽 즉 원수가 멸망한지 벌써 500년 지난 출애굽한지가 500년에
이 원수 갚아 달라는 기도를 한다는 것은
다시 출애굽과 원수 갚는 구원의 사건
곧 출애굽사건을 다시 벌리시는 겁니다.
출애굽때 부르짖음을 유도케 해서 구원사건이 벌어졌다 말이죠.
그 부르짖음을 듣고 출애굽을 벌리신 겁니다.
지금 시편 94편에 이 원수 갚아 달라는 기도를 통해서
출이스라엘을 벌리시고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는 겁니다.
왜? 고아 과부 나그네 곧 이스라엘을 압제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애굽처럼 멸망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곧 고아 과부 나그네를 건지시는 겁니다.
원수의 손에서 말이죠.
즉 이 말은 두 이스라엘로 갈라지는 겁니다.
그러니 원수도 두 개념
거룩도 두 개념으로 갈라지는 거죠.
거룩한 율법을 지키는 자들의 시선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족보는 더럽기 짝이 없습니다.
절대로 거룩으로 은혜로 안 보인다 말이죠.
왜냐하면 원인 있는 결과, 원인 있는 거룩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족보가 왜 거룩하냐 하면 원인 없는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섯 여인이 도저히 유대인에게서 받아들여질수 없는 여인으로만 채워지는 겁니다.
다섯 여인 ~~ 에게서
광명한 천사가 돌삐 들어서 원수를 갚겠다고 돌삐 쳐 죽일려고 하는 원수가 있고
바로 그런 원수를 자신의 피로 발라서 거룩케 해서 그 피를 모독하는
거룩을 모독하는 원수를 또 만들어 내시는 겁니다.
이 말을 듣고 어머니께서 팔을 어긋맞게 하시더라 말이죠.
네 맞습니다 어머니 바로 그겁니다.
누가 봐도 거룩을 더럽히 더러운 개같은 이방인이 거룩한 자이고
누가 봐도 흰 백로 같이 깨끗한 거룩한 자들이 오히려 가장 더러운 마귀 자식이라고
예수님께서 정죄 하시는 겁니다.
결국 주님은 끝까지 나그네 라는 의미를 포기 하지 않습니다.
처음자리인 이스라엘의 첫사랑 말이죠.
그러나 인간은 포기한지가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치 않으시고
이 나그네 개념을 이스라엘 개념을 끝까지 충성하시는 이 성실하심을
이 시편 94편을 통해서 다시 상기시키시는 겁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 나그네의 의미를 통해서
다시 원수 갚아달라고 부르짖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원수를 사랑하시는 그 십자가의 용서를 다시 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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