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의 임금, 고아의 아버지, 죄인의 구원자 (시편 107편)

 

(4:17,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4:18, 개역)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4:19, 개역)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4:20, 개역)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4:21, 개역)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107:1, 개역)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07:2, 개역)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는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

(107:3, 개역)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107:4, 개역)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107:5, 개역)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107:6, 개역)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107:7, 개역)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107:8, 개역)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107:9, 개역)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107:10, 개역)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107:11, 개역)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107:12, 개역)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107:13, 개역)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107:14, 개역)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107:15, 개역)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107:16, 개역) 저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107:17, 개역) 미련한 자는 저희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곤난을 당하매

(107:18, 개역)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

(107:19, 개역)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107:20, 개역)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107:21, 개역)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107:22, 개역)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 행사를 선포할지로다

(107:23, 개역) 선척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영업하는 자는

(107:24, 개역) 여호와의 행사와 그 기사를 바다에서 보나니

(107:25, 개역) 여호와께서 명하신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107:26, 개역) 저희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도다

(107:27, 개역) 저희가 이리 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

(107:28, 개역)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107:29, 개역)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107:30, 개역)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107:31, 개역)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107:32, 개역) 백성의 회에서 저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저를 찬송할지로다

(107:33, 개역) 여호와께서는 강을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샘으로 마른 땅이 되게 하시며

(107:34, 개역) 그 거민의 악을 인하여 옥토로 염밭이 되게 하시며

(107:35, 개역) 또 광야를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마른 땅으로 샘물이 되게 하시고

(107:36, 개역) 주린 자로 거기 거하게 하사 저희로 거할 성을 예비케 하시고

(107:37, 개역) 밭에 파종하며 포도원을 재배하여 소산을 취케 하시며

(107:38, 개역) 또 복을 주사 저희로 크게 번성케 하시고 그 가축이 감소치 않게 하실지라도

(107:39, 개역) 다시 압박과 곤란과 우환을 인하여 저희로 감소하여 비굴하게 하시는도다

(107:40, 개역) 여호와께서는 방백들에게 능욕을 부으시고 길 없는 황야에서 유리케 하시나

(107:41, 개역) 궁핍한 자는 곤란에서 높이 드시고 그 가족을 양무리 같게 하시나니

(107:42, 개역) 정직한 자는 보고 기뻐하며 모든 악인은 자기 입을 봉하리로다

(107:43, 개역) 지혜 있는 자들은 이 일에 주의하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이스라엘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시편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나그네이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너희들 올챙이 적 모습이 바로

고아 과부 나그네 였다는 겁니다.

 

그런 고아에게 아버지가 졸지에 생겼고

과부에게 남편이 생기고

나그네에게 캐슬 성전 곧 안식처 같은 임금이 생겼다는 것은

 

곧 말도 안되는 일이 졸지에 일어났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약속이다는 겁니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이다는 겁니다.

 

왜 말도 안되느냐

고아는 아버지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고아입니다.

그런데 고아에게 아버지가 생기면 더 이상 고아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고아 라는 의미를 계속 가지고 가면서 아버지를 외치고 있으니

 

정작 고아 아닌 민족들이

이 고아민족인 이스라엘에게 졸지에 고아가 되는

너희 신은 가짜임이 들통나게 되더라 말이죠.

 

과부민족인 이스라엘이 정작 남편이 없어야 과부 맞는데

과부민족이라는 의미를 계속 가지고 가면서

정작 남편있다는 다른민족을 졸지에 과부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너희 신은 가짜이다 라는 약속을

저들 민족을 보충재료로 삼아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더라 말이죠.

 

결국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도구로 사용되어 지는 겁니다.

약속의 도구로 말이죠.

 

자 이런 게임은 이미 마귀가 졌다 라는 것을 압니다.

그럼 마귀는 하나님의 보충물로써 어디로 투입되는 허락을 받게 됩니까?

당연히 이스라엘 내부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외부인 다른 민족이 아니라 말이죠.

 

그래서 약속의 깊이가 더더욱 깊어지고 높아지고 넓어지는 겁니다.

즉 우리의 죄악이 더 깊고 더 높고 더 넓어지는 겁니다.

그런 죄악 마저도 더 깊게 더 높고 더 넓게 십자가의 피는 용서하시는 겁니다.

 

(3:18, 개역)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3:19, 개역)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결국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의미가 해소가 된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오히려 그 고아 과부 나그네에 충실하시겠다는 겁니까?

죄인의 구세주이시기에

구세주 라는 기능 때문에 우리를 죄인에서 의인으로 만들겠다는 겁니까?

아니면 죄인 되도록 더더욱 충실하시겠다는 겁니까?

 

이것은 오히려 놀랍게도 주체의 기능을 절대로 포기치 않겠다는 겁니다.

즉 너희가 나를 사랑한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독생자를 보내 우리 죄를 위해 화목제로 삼았다는 겁니다.

 

즉 사랑이라는 주체를 하나님 쪽에 두겠다는 겁니다.

이 말은 곧 우리를 계속해서 환자 죄인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부정적인 자리에 놓겠다는 겁니다.

? 자신의 의사 라는 기능 즉 이것이 약속이다는 겁니다.

 

그럼 당연히 자연스럽게 이 부정이라는 얼룩을 제거할려고 달려드는 자들이

비부정으로써 달려들다가 도리어 자신들이 부정으로 탈로나게 하시는

약속이라는 사건을 벌리시겠다는 취지입니다.

여기서 이 약속이 벌린 십자가 라는 불륜 스캔들이

옳았다 라고 보이는 자는

오히려 그 십자가에서 자신의 의라고 여겼던 모든 것이 부정이였음을 알게 되는 자는

십자가가 감사할 것이고

그렇지 않는 자는 십자가가 평생 거리끼게 되는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나를 의인으로 만들어주는 구원용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이 이렇게 깊고 넓고 크다 라는 넉넉한 사랑을 보여주는 주체이다는 겁니다.

 

주체를 말하고자 함이다 말이죠.

 

마치 모세가 주인공이 아니라

모세가 쥐고 있는 지팡이

곧 아무것도 아닌

그래서 그 누구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주체 주인공으로써 나타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세웠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인들을 보면

모세를 주인공으로 보듯이

자신도 믿음의 주체로써 주인공으로 본다는 겁니다.

신앙 곧 믿음은 곧 내가 하는 것이다 라는 식이다 말이죠.

거기서 배제 되는 것이

모세의 지팡이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지팡이가 의미 있다고 여기시는데

방금 위에서 언급했듯이

아무것도 아니다 말이죠.

그러니 아무리 너 지팡이야 너가 주인공이야 백날 외쳐도

소용이 없어요 결국 내가 주인공이다 말이죠.

 

자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 라는 것은

내 쪽에서 아무리 의미를 부여해서 투사 투여해도

결국 내가 투영한 것만 되돌아 올 뿐이다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십자가는 그냥 나무 조각일 뿐인 겁니다.

 

진짜 십자가가 나에게 내가 의미를 투사해서가 아니라

십자가가 나를 찾아 올때는 언제인고 하니

내가 너무 너무 잘 믿어서 내가 봐도 내가 기특해 보이고

내 믿음이 내가 봐도 너무 잘 믿어 보일때에

그렇게 성공했다고 자부하던 그 때에

갑자기 얼룩이 보여서 모든 것이 완벽하게 깨끗한데

얼룩이 눈에 계속해서 거슬려 신경쓰여서

그 얼룩을 지울려고 다가 가다가

미끄러 자빠져 엉망진창이 되었을때에

 

내가 그동안 그렇게 싫어했고 보기 싫다고 고개를 돌렸던 그 모습이

졸지에 나의 모습이 되었을때에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다들 고개를 돌려 버리는 그 순간

그때에 이 십자가가 바로 나를 찾아오는 순간이다는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대로 하자면

사사기 입다가 더 이상 이제 난 산적이 아니다

이제 떳떳이 대접받을 수 있는 난 사사야 구원자야 라고 했을때에

정작 제일 처음으로 입다를 맞이하는 것을 제물로 바치겠다는

그 의로움에

졸지에 찬물을 끼얹듯이 제일 먼저 자신을 맞아주는 것은 자기 딸이였다 말이죠.

 

이것을 뭐 인신제사가 맞다 아니다 라는 식으로 따지는 옆길로 세는 취지의 내용으로 볼게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내부 내막을 깊이 파고들어가는 것이 무엇이냐 라는 겁니다.

가장 강했을때에 신과 자신을 결부시키는데 성공했는줄 알았는데

정작 신은 그 순간 죽어버린다는 겁니다.

 

신이 죽는다는 것이 말이 안되잖아요.

이것이 신은 죽었다 라는 니체가 어떤 신화를 인용한 내용인데

 

신이 죽으면 더 이상 신이 아니다 말이죠.

그러니 인간들이 믿었다고 의롭다고 우기는 그 순간

졸지에 제명 당하듯이

내가 목표로 했던 그 신은

정작 죽어버리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죽는 신이다는 겁니다.

 

이런 약해빠진 신은 그럼 과연 믿음을 충만하게 열심으로 믿을수 있겠니 라는 거죠.

 

그래서 십자가는 십자가에서 내 손에 의해 죽는 신으로 오신 그 예수님을

주체로

 

그래서 너가 기여이 주체로 서고자 하는 자를 강압적으로 내려앉혀서 주인공 자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백날 해도 어차피 의문의 반복일 뿐이니

 

자발적으로 아니 자원하는 영으로 기꺼이 너가 너를 포기하는

너의 자리에 너가 앉아 있는 그 자리 마저도 아예 깡끄리 내어주는

주인공 자리를 이제 차지함도 아니고 그저 나는 내 자리에서 고만 고만 하게 있겠습니다 라고

우기는 그 자리 조차도 내어주는

아예 내 자리 자체가 없는

 

인자는 하늘 영광 버리고

이 땅에 내려왔고 심지어 머리 둘곳 없는

 

졸지에 아버지 남편 임금은커녕

본인이 고아 과부 나그네가 되어버리는

 

고엘의 하나님 됨을 포기해 버리는

본인 스스로가 고아 과부 나그네가 되어버리는

 

또 이것을 따라하라는 말이 아니라

정반대로

주님이 하늘 영광 버렸듯이

너희는 땅의 영광을 버리고

하늘 영광 누리라 라고

 

우리를 고아 과부 나그네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것에 충실하시겠다는 겁니다.

 

우리는 벌써 고아 과부 나그네 포기한지가 훨씬 옛날인데

예수님이 포기 하지 않으셔서 거기에 목숨까지 걸어서 충실하셨고 다 이루셨다 라는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땅의 영광을 누리고 싶어도 못 누리를 팔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은 썩을 것들이기 때문에 오래 못가요

나중에는 썩어서 부패가 심해 냄새가 나

 

그런데 뭐 하나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우리는 하늘의 영광을 누려야만 하는 팔자가 되어버렸기에

썩지 않을 것을 누리는 겁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고아 과부 나그네

곧 이스라엘이라는 약속이 잉태한 생산물이다는 겁니다.

 

자녀 됨이지요

 

내가 스스로 자녀 될려고 해서 자녀된 것은 의문의 반복일 뿐임과 동시에

저 부조리한 십자가의 사랑이 감사하기는커녕 거리끼는 걸림돌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자녀 될려고 한 적도 없는데 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이 또렷한 용서 앞에서는 십자가가 거리끼는게 아니라 오히려 자랑이 되는 거죠.

나 봐라 이런 죄인도 용서하는 십자가 이다고

 

죄수복을 입고서 말이죠.

 

나그네 고아 과부 의 옷을 입고서 말이죠.

 

그런데 나그네 고아 과부 라는 죄수복을 벗자 마자

졸지에 나그네 고아 과부를 압제하는 이상하고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만을 밝히 보여주기 위한 모든 사물의 배치이니까 당연하다 말이죠.

 

이것이 역사입니다.

 

그러나 묵시는 십자가만 자랑하는 죄인입니다.

의사를 자랑하는 자는 건강한자가 아닙니다.

오로지 환자만이 의사를 자랑한다 말이죠.

 

역사는 절대로 십자가를 자랑 못해요

다만 존경할려고 노력하지요.

역사는 행함이거든요.

 

그러나 묵시는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묵시는 믿음이니까 말입니다.

 

교회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존경하는 자들이다 말이죠.

소녀 팬들이 자기 우상 욕하면 전쟁하잖아요

예수 광팬들이 교회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럼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군데?

교회사람 교회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 쪽에서 고아 과부 나그네로 만든 사람입니다.

그들만이 예수님을 믿어요.

묵시가 졸지에 그렇게 만들어 버렸거든요.

오히려 교회사람들은 이들을 싫어합니다.

교회에 덕이 안된다고 쫏아냅니다. 돈 안되거든요.

약대는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러낸다 말이죠.

(마 23:24, 개역)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자 그렇기 때문에 의사가 만들어낸 환자

구세주가 만들어낸 죄인

예수님이 찾으시고 부르시는 99마리 양이 아닌,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은

성경도 모르고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요


모르는데 사랑하시는 겁니다.
아무 조건 없이 말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죠

그러나 오늘날 강도의 소굴은 교회는 무슨 놈의 조건이 그리 많은지
마귀처럼 항상 조건을 따집니다.
그 조건에 안 맞으면 나가 달라고 합니다.

아무 조건 없는 것이 십자가의 사랑인데 말이죠.
 

상대적으로 예수님을 잘 알고

이레에 두 번 금식

이레에 십의 이조

이런 자들은 주님이 부른 적이 없다 말이죠. 찾고 찾으시는 자가 아니다 말이죠.

 

주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왔다 말이죠.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말이죠.

의인의 하나님이 아니라 죄인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곧 하나님 스스로가 하나님 되기를 포기해 버렸다는 겁니다.

하늘 영광 버리고 이 땅의 죄인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죄인의 하나님이 될려고

의인의 하나님이 되기를 포기했다 말이죠.

 

이게 왜 중요한고 하니 의인이 단 한명도 없다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인간이 어리석어서

사람의 생각이 허망하여서

 

거룩하지 못하고 거룩한채 해 버리는 것이 그것이 거룩이다고 아예 세뇌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자기를 자기가 그렇게 세뇌해 버렸기에, 자기가 자기에게 최면을 걸어버렸기에

 

졸지에 마약이 되어 중독이 된 환자가 되어버린 겁니다.

의인이 된 자로 중독시켰다 말이죠.

그러니 주님은 누굴 찾겠습니까?

의인을 찾겠습니까? 그게 마귀가 한 짖 아닙니까?

마귀를 거쳐서 보니 의인이 아닌 죄인을 찾으신다는 겁니다.

마귀를 거치지 않고 예수님을 보니까 의인 찾는 줄 알고

율법사가 자기가 율법의 큰 계명을 지킨자 라고 나 옳잖아요 라고 하는 겁니다.

어릴 적부터 단 한번도 율법 어긴적 없다고 부자청년이 나 옳잖아요 라고 하는 겁니다.

나 예수 믿어 주니까 옳잖아요 라고 하는 겁니다.

나 교회 다니니까 옳잖아요 라고 하는 겁니다.

나 믿음을 가진 신앙을 하니까 옳잖아요 라고 하는 겁니다.

나 하늘을 나는 마귀를 예수님 이름으로 떨어뜨렸으니 나 옳잖아요 라고 하는 겁니다.

나 바른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니까 나 옳잖아요 라고 하는 겁니다.

 

어딜 감히 인간끼리의 비교를 가지고 주님께 들이대냐 말이죠.

주님은 자기 피에 걸맞는 자를 찾으시는 겁니다.

 

저런 마귀들이 내세우는 것 말고 말이죠.

나 십의 이조 드리고 나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왜 그런 배설물을

예수님 앞에까지 들이대냐 말이죠. 똥 냄새가 진동하는데?

 

본인들이 거룩하다고 여긴 것이 똥 냄새가 진동하는 배설물인줄 모르는 겁니다.

 

뭐 십의 이조 드렸다고? 아이고 똥냄새야 ~~~~

뭐 이레에 두 번 금식한다고? 두 번 회개 한다고? 아이고 똥냄새야 ~~~~

저 세라 매국노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 한다고? 아이고 똥냄새가 진동하네 ~~~

 

자기가 투사해서 만들어낸 하나님과 전혀 다른 하나님이 예수님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하나님은 저런 예수님이 아니다 말이죠.

그래서 죽이고 싶어서 난리 난 겁니다.

그래서 벌어진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다 말이죠.

 

십자가 사건은 신은 죽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죽은게 아니라

너가 죽었다 라는 겁니다.

신이 된 너가 예수님을 죽일려다가 도리어 너가 그 저주의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겁니다.

고로 신은 죽었다 라는 겁니다.

 

강함은 없다 라는 겁니다. 구원은 없다 라는 겁니다.

신은 없다 라는 겁니다.

 

다 허구다 말이죠.

 

도리어 내가 허구라고 몰아세워 죽인 그 예수님이 실상이다는 겁니다.

믿음은 실상이다 말이죠.

 

허구를 예수님에게 뒤짚어 씌우고 자신들이 실상이 될려고 했다가

도리어 자기 꾀에 자기가 말려들어

본인들이 허구로 밝혀지고

괜히 예수님이 진짜 실상임이 밝혀지도록 하는

남 잘되게 한 꼴이 되었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어리석은 줄 알았는데

나의 꾀가 먹혀들어갈줄 알았는데

도리어 십자가 가장 지혜로운줄 모르고

번데기 앞에 주름 잡았다는 거죠.

 

그러니 십자가는 모든 인간의 지혜가 다 총동원이 되어 달려들도록 만드는 겁니다.

얼룩을 제거하고 싶어서 안달이다 말이죠.

이렇게 좋은 하나님이 주신 환경에

이 아름다운 그림이

저 꼬추가루 하나가 얼룩처럼 자리잡아서

이 아름다운 그림을 다 망치고 있으니

얼마나 이 얼룩 예수를 뽑아내어 제거하고 싶겠냐 말이죠.

그게 바로 잉여성이다는 겁니다.

찌끄래기

쓸모없는 부분을 빨리 제거하고 싶다 말이죠.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다 말이죠. 아무리 봐도 이 건물에 쓸모가 없다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쓸모없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주춧돌 머릿돌이 될 줄이야

아뿔사 ~~~~~

 

이것이 전복이다는 겁니다.

 

인간 역사에

지구 역사에

예수님은 쓸모 없는 돌이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세우는 건축 물 곧 성전 곧 교회에 가장 쓸모 없는 돌이다 말이죠.

교회에 덕이 안돼 덕이

 

그런데 왜 이런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돌이 머릿돌이 되는 겁니까?

쓸모 없는 계집종이 어떻게 왕비라는 귀하디 귀한 왕비가 되느냐 말이죠.

 

(30:21, 개역)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30:22, 개역)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30:23, 개역)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거리끼는 걸림돌 같은 계집아이가 사랑받는 아내가 되는 결혼을 하게 되느냐 라는 겁니다.

과부가 어떻게 남편이 생기며

고아가 어떻게 아버지가 생기며

나그네가 어떻게 임금이 생기느냐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지혜이다는 겁니다.

 

단절인데 어떻게?

 

이것은 고아 과부 나그네 쪽에서 거룩을 찾아낸게 아니라

거룩이 이 자신의 거룩을 나타내고자 고아 과부 나그네를 찾는 겁니다.

물론 고아 과부 나그네란 없습니다.

억지로 만들어 낼려고 하지 마세요

지금 있는 남편 억지로 청부살해해서 과부 될려고 하지 마시길 ㅋㅋㅋ

 

그래서 예수님께서 새롭게 고아 과부 나그네로 만들어 내어야 하는 겁니다.

죄인을 만드시는 겁니다.

그러니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것은 묵시적인 의미이지

인간이 포착해서 해석가능한 따라행할수 있는 실천할수 있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이 일방적인 해석에 의해 죄 죄 죄 인이라고 하면 죄인인 겁니다.

토 토 토 토 토달지 말라 말이죠.

 

난 부유한데요 어떻게 가난한자라고 하십니까?

토토토 달지 말라 말이야

 

내가 가난한 자라 하면 가난한 자인줄 알아라 말이죠.

아무리 재산이 수천조 재산이 있는 만수르 라고 해도

주님이 가난한 자 라고 하면 가난한 자인 겁니다.

묵시적인 안목은 백날 역사적인 안목에서 해석이 안되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써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하면

토 토 토 달지 말라 말이죠.

 

마귀만이 육으로 묻고 따지는 겁니다.

마귀가 놀라운 점은 영이라는 존재적인 의미이지만

영이 아닌 육 밖에 생각 못한다는 겁니다.

영적인 존재이면 뭐합니까?

믿음을 못 누리는데!!!

영적인 생각을 못해요~~

육 밖에 몰라요

자나 깨나 육 육 육

 

아런 점에서 마귀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어요.

도리어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은 예수님이다 말이죠.

육체를 죽이는 자를 두려워 할게 아니라

영혼을 멸하는 자를 두려워 하라 라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이다는 겁니다.

 

(10:28, 개역)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사랑은 두려움이 없는데

육체를 죽이는 자는 두려워 하지 않고

사랑을 베푸시는 자만을 두려워 한다는 겁니다.

믿음 없이는 아무것도 기쁘시게 못하니까 말이죠.

믿음만을 두려워 하라 라는 겁니다.

그분이 실상이고 믿음이고

그 나머지는 허구 허상이다는 겁니다.

안개를 두려워 하지 말라 말이죠.

 

그러니 오늘 시편 107편을 신약 식으로 옮기면 마치 희년 선포와 같습니다.

 

(4:18, 개역)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이 기쁜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자는

포로된 자이고

가난한 자이고

눈먼 자이고

눌린 자이다 말이죠.

고아 과부 나그네 곧 이스라엘만 들을수 있는 기쁜 소식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아무도 안 기뻐

 

마치 시편 107편이 그 당시 상황에서도 아무도 안 기뻐

 

희년 선포가 누구에게만 기쁘냐?

이스라엘로부터 핍박받는 자들

억눌린 자들

포로된 자들

갇힌 자들만 기뻐

 

의인들은 하나도 안 기쁜데

죄인에게만큼은 너무 너무 기쁜 소식

 

그렇기에 오늘날 십자가도 역시나 마찬가지 이다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는 십자가가 하나도 안 기뻐요

그래서 고난주간을 만들어서 고때만 기념해 버리는 겁니다.

1년 내내 십자가를 외쳐 보세요

고만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라고

듣기 싫어합니다.

무슨 놈의 성취감이 없는

행함이 없는 그런

믿음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아무것도 아닌 것만

하나 마나 한 십자가를 1년 내내 들어보세요

질린다 말이죠. 질려.

 

죄 죄 죄 고만좀 캐라 라고

오히려 목사들이 제발 그만하라고 합니다.

 

실제로 들어봤으니까 이 말을 하는 겁니다.

저를 정죄하는 자들이 어떻게 그런 목사랑 붙어있는지

자기가 똑똑하다고 그렇게 과시하더니

정말 멍청하다 라는 것을 새삼 보게 됩니다.

차라리 뭘 해도 난 멍청한 자입니다 라고 하면 될 것인데

늘 똑똑하다고 우기더니만 말이죠.

 

결국 예수님이 희년을 선포하고 난 뒤에

다들 기뻐했나요 아니면 분개 했나요?

화를 내고 어디서 굴러먹은 뼛다귀가 와서 가르쳐들려고 하느냐 라고

졸지에 본색을 드러내더라 말이죠.

 

난리가 났다 말이죠 난리가

얼마나 싫어하고 싫어했으면

이 말 때문에

이 희년 선포 때문에

낭떠러지로 몰아서 떨어뜨려 죽일려고 했다 말이죠.

살벌하기 짝이 없어요.

희년 선포하니까 이런 반응이 이스라엘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4:22, 개역)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4:23,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4:24, 개역)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4:25,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4:26, 개역)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4:27, 개역)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4:28, 개역)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4:29, 개역)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4:30, 개역)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증거하면

교회 사람들이 낭떠러지로 몰아서 떨어뜨려 죽일려고 한다 말이죠.

살벌하기 짝이 없어요

십자가를 증거하면 그렇게 되요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를 증거한다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만 되는 겁니다.

그것도 상대적인 마귀들의 분개를 유발시키면서 말이죠.

 

그렇다면 시편 107편을 외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희년 선포이자 동시에 마귀 도출입니다.

이제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은 해체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도리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은 구체화 되는 겁니다.

 

이것이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요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이다는 겁니다.

이 처음과 나중 되시는 주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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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보다 더 두려운(강한) 사랑


김대식 두려움은 몰라서 두려운 겁니다. 
모르기 때문에 알길이 없습니다.
알면 하나도 안 두렵고 오히려 웃게 되는 역설적인 전복이 일어납니다.

죽음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 할 수 밖에 없고
죽음을 알면 죽음 뒤의 것을 알기 때문에 죽음이 시시해 집니다.

도 닦는 것은 일종의 열심(행함)이지 지식이 아닌거죠
또렷함이 아니라 의문의 반복이다는 거죠.

정작 두려운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유 없는 무조건적이기 때문에
도저히 알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생뚱맞은 질문을 하시는 이유는

두려워 하지 말라는 지혜가 찾아와서 묻는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안다 라는 것은 사랑한다는 거죠. 목숨을 내어 줄 정도로 말입니다.

(마 10:28, 개역)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롬 10:2, 개역)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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