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 그러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시편 95)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에서 죄인 중의 괴수로

 


(
2:3, 개역)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2:3, 새번역) 백성들이 오면서 이르기를 ",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 할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 또는 '가르침' 또는 '교훈'

 

(4:2, 개역)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4:2, 새번역) 민족마다 오면서 이르기를 ", 가자. 우리 모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어서 올라가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실 것이니,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길을 따르자" 할 것이다.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님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말씀을 준비할려고

미리 6월에 적어놓은 시편 95편의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 라는 내용을 읽다 보니

너무 감동을 받아서 그냥 그대로 다시 올릴려고 했었 었습니다만.

다시 읽어봐도 은혜가 되어서 나누고 싶어서 말이죠.

 

http://crosslamb.tistory.com/1741

http://crosslamb.tistory.com/1742

 

그러나 말씀을 나누고 나서는 다시 새로운 은혜를 주셔서

어머니와 나눈 말씀을 다시 정리해서 올리게 되었습니다.

 

 

분명 시편 95편의 앞부분은 오라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올라갔다 말이죠.

 

그런데 후반부에는 안식에 못 들어간다는 겁니다.

 

도대체 앞 뒤가 맞지 않는 모순의 간극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그 사이 간극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여호와의 산에 오르자

그런데 안식에 못 들어간다.

 

?

완악해졌다는 겁니다.

 

그럼 오라고 하지를 말던가?

오라 해 놓고서는 못 들어간다고 하니 속은 것 아니냐 말이죠.

 

여호와의 산에 오른 것이 오히려 완악해져 버렸다는 겁니다.

사울왕이 그랬잖아요

차라리 성령을 안 받았으면 되었을걸

성령 받는 바람에 성령이 떠나니까 더욱더 완악해 지는 겁니다.

이것은 사실상 한 개인 사울왕에 해당되는게 아니라

오히려 전조 현상, 본진 전에 전진이 있었듯이

이스라엘 전체가 그런 사울왕에 해당되는 모습이였다는 거죠.

 

그 속에서 빼내시는 방법이 바로 다윗이 율법에 의해서가 아닌

인애와 자비에 의해서 건짐 받는

대신 원수 갚는 자의 등장 때문이다는 겁니다.

제사와 번제가 아니다 라는 거죠.

 

그런데 사실 여호와의 산에 올라서 완악해 진게 아니라

원래 완악했는데 여호와의 산이 우리의 본모습을 들추어낸 겁니다.

그 거룩한 산이 우리의 실체를 한꺼플 벗겨주는 겁니다.

 

주님의 도를 배우고 주님의 길로 행하니까

 

봐라 나 행했잖아 너 못 행했지?

나는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의 이조를 드리는데

너는 못 행했지? 못 드렸지?

 

바로 이것이 주님의 도가 주님의 길이 들추어낸 우리의 본 모습이다는 겁니다.

거룩이 나를 벗기는 줄 모르고

거룩을 내가 지켰다고 착각하는 나의 죄악을 드러내더라 말이죠.

성령 받은 것이 나의 죄악을 드러내는 줄 모르고

성령 받은 것이 도리어 육체의 자랑이 되어버리니까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되는 겁니다.

수건을 벗지 못하는 완악함이 되더라 말이죠.

 

오늘 시편 95편은 히브리서 34장에서 인용이 됩니다.

 

(3:11, 개역)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3:18, 개역)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4:1, 개역)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4:3, 개역)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4:5, 개역)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왜 안식에 못 들어가는 가?

40년 광야에서 완악함 때문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사건을

시편 95편에서도 인용하고 있고

히브리서에서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럼 안식에 어차피 못 들어갈꺼 왜 오라고 했냐 말이죠.

 

왜 인간은 그 어떤 인간도 왜 못들어가는지를 와야 알 것 아니냐 말이죠.

알려주시고자 배려한 줄도 모르고 미리 완악함을 드러내는 식이 인간 곧 육체인 겁니다.

 

와야 제대로 들추어질 것 아니겠습니까?

안 오면 어떻게 내가 완악해져서 들통나는지를 모를 것 아니냐 말이죠.

 

결국 주님의 도, 주님의 길은 40년 광야라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쓸데 없이 15일 만에 갈수 있는 길을

괜히 삥 둘러서 40년 동안 뺑뺑이 도는 겁니다.

단절성으로 들어가는 거지

개방성

가능성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에 말이죠.

 

억수로 힘들고 어렵고 물없고 양식없는 장소인 죽음의 사막이라서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에어콘 신발 두 컬레가 필요없을 정도였다 말이죠.

 

오히려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은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자를 섬기면서까지

안식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섬김에 반발하는 그것이 완악함이다는 겁니다.

십자가의 길은 주님의 피흘리시는 희생이지

그 광야의 사막 길을 가서가 아니다 말이죠. 그건 십자가의 길이 아닙니다.

 

지금 사막에서 사는 사람은 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겁니까?

아니잖아요.

 

난 십자가의 길 갈래 그래 광야 사막에서 40년 동안 생활하자? 이게 십자가냐 말이죠.

일부러 광야 사막에 백날 가보세요 예수님의 섬기심이 있는가?

 

나의 완악함을 들추어내고자 일부러 원망할 만한 곳으로 인도합니다.

성화론자 백날 버텨도 소용없어요 반드시 원망하도록 인도합니다.

물 없는 곳 양식 없는 곳으로 말이죠.

딸린 식구가 있으면 더더욱 원망 안하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미래가 없거든요.

희망이 없어요.

 

죽음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죽음으로 인도한다 말이죠.

 

이것이 주님의 섬김인데

주님의 도요 주님의 길인데

다들 원망했습니다.

원망 안한 사람 없습니다.

다 원망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 세 번 부인했습니다.

 

문제는 원망해서 안식에 못들어가는게 아닙니다.

그것은 마귀의 주장입니다. 조건 따지는 마귀의 주장 말이죠.

 

이렇게 원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그 물음에 대한

완악함입니다.

 

뭐 나를 일부러 원망할 만한 곳으로 인도 했다 말이죠?

그래놓고 불뱀에 물려 죽게 만들어서

장대 높이 달린 구리놋뱀 쳐다 보면 낫는다고?

장난 나랑 지금 하냐?

 

원망케 만들어 놓고

죄인 되게 만들어 놓고

의사의 처방전을 내어놓으니까

가만히 보니 너 의사 기능 자랑할려고 일부러 불뱀에게 물리도록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철저하게 놀아나니까

원망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속아넘어가는 것에 대한 격분한 마음

곧 완악한 마음 때문에 안식에 못들어간다 라는 것을

주의 도 주의 길인 40년 광야에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러나 원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쌍히 여겨 고쳐주시겠다고 찾아오심 자체에

감사하는 자는 안식에 들어가는 겁니다.

딱 한 명 들어갔습니다. 나머지 다 탈락입니다.

심지어 모세도 탈락입니다.

완악해 져서 수건을 안 벗어서 말이죠.

그래서 모세를 뒤로 편법을 써서 변화산에 느닷없이 나타나게 해서

제발 예수님 별세해 주소서 사망해 주소서 라는 간청케 만들어 놓고

안식에 들어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난 모세의 제자다 넌 예수의 제자이지? 어딜 까불고 있어 라고 한 자는

헛발 디딘 겁니다. 썩은 동앗줄 잡은거다 말이죠.

모세 보다 더 크신 이를

모세도 굽신 굽신 거린 이를

얍잡아 본 이유는 수건을 벗지 않은

완악함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럼 이 완악함을 무슨 수로 해결합니까?

안식에 못 들어가는데 이 완악함 때문에?

히브리서 34장 그 이후에 멜기세덱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사야 23절에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고 주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죄아래 가두기 위함입니다.

그와 동시에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죄아래 갇히지만

원망할 수 밖에 없지만

그 실패가 동시에 성공하신 분을 보게 되는 몽학선생 곧 안내양이 가리키는 저분

곧 저분이 실패한 당신의 구원자

환자된 당신의 의사 라고 알려준다 말이죠.

 

그러니 시온에서 구원자가 나오고 (즉 포로되었다는 것이 전제되었다는 겁니다.)

(9:14, 개역)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같은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14:7, 개역)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53:6, 개역)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고 하나님이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69:35, 개역)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 거하여 소유를 삼으리로다

(46:13, 개역)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상거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52:7, 개역)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62:1, 개역) 나는 시온의 공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62:11, 개역)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반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임하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2:32, 개역)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1:21, 개역) 구원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4:10, 개역) 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애써 구로하여 낳을지어다 이제 네가 성읍에서 나가서 들에 거하며 또 바벨론까지 이르러 거기 구원을 얻으리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너의 원수들의 손에서 속량하여 내시리라

(9:9, 개역)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11:26, 개역)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성전청소할때의 물처럼

흘러 흘러서 모든 허물을 다 덮어버린다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선언하시는 겁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완성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두 장소의 간극에 누가 말려들어야 합니다.

즉 시온에서 예루살렘이라는 그 간극에서

마귀 곧 원수가 주님의 발등상 아래에 놓여져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기 때문에

갇힌자 포로된자 억눌린 자 곧 고아 과부 나그네에게 희년의 복음이

고아 과부 나그네의 의미를 포기하지 않고

죄 아래 갇힘으로 인해서

이 갇힌 자를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시는 주님의 활동 때문에

 

그럼으로인해 원수가 그 사이 간극에서 출현하는 겁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를 압제하고자 말이죠.

율법의 완성은 사랑인데

사랑이 아닌 자가 율법을 쥐고서

정죄하는 자로써 등장하는 겁니다.

 

완악한 자가 등장하는 겁니다.

십자가의 피 용서를 거부하도록 되어 있는 자들 말입니다.

그들로부터 주의 오른편에 있는 멜기세덱이

 

원수와 전쟁을 치르는 샬롬 왕 곧 안식의 왕이 등장해서

그들 원수의 손에서 건지신다는 겁니다.

 

결국 우리는 마치 아브라함 조카 롯의 신세인 겁니다.

포로된 롯을 구출하는 긍휼을 베푸시는 겁니다.

원망했던 우리를 말입니다.

 

원수는 완악함으로 인해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는 멜기세덱에 의해 발등상에 놓여지고

멜기세덱은 오른 팔로 우리를 그 원수들의 손에서 건지시는 겁니다.

 

시편 110편에서 다윗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인간 중에는 왕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다른 말로 구원자가 없음을 오히려 왕이기는커녕 도리어 고아 과부 나그네임을

즉 도리어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지

남을 구원할수 있는 입장이 못된다는 겁니다.

왕이 아니다는 거죠.

 

그래서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는 멜기세덱만이 왕이다는 겁니다.

이 멜기세덱만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끄집어내어

안식에 들어갈수 있게 해 주는 자이다는 겁니다.

 

? 샬롬 왕 평화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원수 문제를 그가 해결헤주지 않는 이상

안식 곧 쉼은 없다는 거죠.

 

역사속에서는 육체에서는 왕이 날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다지파에서 왕이 나오는게 아니라

멜기세덱 지파 곧 멜기세덱 반차에서 왕이 나오는 겁니다.

 

(110:1, 개역) [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110:2, 개역)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110:3, 개역)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110:4, 개역)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110:5, 개역)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110:6, 개역)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

(110:7, 개역)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

 

그러니 이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는 멜기세덱이라는 왕에 의해서 건짐을 받는

원수를 멸하시고 그 원수의 손에서 건져주심을 받는 자만이

완악치 않게 즉 십자가의 어리석은 지혜를 거붙이 않고

거리끼게 여기지 않고 자랑하고 감사케 만들어서 안식에 들어가는 겁니다.

 

성화되어서 안식이라는 구원에 들어간다는 소리는 다 허구입니다.

불교죠 교리 플러스 실천

 

그런자는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는 멜기세덱이 필요없는 자입니다.

여전히 인간 중에 왕이 있다는 식 처럼

육체를 따라 육체에 기대를 거는 겁니다.

성령은 그런 육체의 기특하기 짝이 없는 노력에 보조밧데리일뿐이다는 식입니다.

노력 안하면 안된다는 거죠.

 

그러나 겸손해져서 안식에 들어가는게 아니라

그 겸손이 유대인에게는 오히려 완악함이였다 말이죠. 수건을 벗지 않는

 

겸손이 아니라 원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시고자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주님의 사랑을 보고 안식에 들어가는 겁니다.

내 행동의 잘잘못의 여부를 따져서가 아니라

나를 볼 필요도 없이 이미 원망했기에 더 이상 기대할 것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분만이 보이는 겁니다.

너무 너무 충격적이다 말이죠.

죽음보다 더 강하다 말이죠.

죽음 보다 두려운게 어디있냐 말이죠.

그런데 죽음 보다 더 두려운게 더 강한게 나타나

저 분만이 보이는 겁니다.

 

이것을 어머니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를 통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둘 다 강도입니다.

마땅히 벌을 받아 죽어야 하는

율법이 시온에서 나왔기에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는 겁니다.

 

그런 당연한 형벌에, 그 당연한 죽음에

 

예수님을 그 자리에서 만날줄 꿈에도 몰랐다 말이죠.

 

원망 안해서 불뱀에게 안물려서 예수님을 바라본게 아닙니다.

원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예수님을 감히 만나게 되다니

주님을 바라보게 되다니

 

너무 너무 기쁜 나머지 주여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라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게 되는 겁니다. 감히 감히 말이죠.

너무 오바 하는 것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한 쪽 다른 강도는

치 피 흥 남을 구원한다고 떠들어 대더니만

자기 하나 못 구원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되었냐 라고 비꼬는 겁니다.

 

이것은 단순히 다른 강도의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완악케 만든 자들 모두다 가지고 있는 생각을 이 자를 통해서 대표로 발설케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강퍅케 만든 자의 생각이다는 겁니다.

 

죽는 판국에 무슨 놈의 메시야가 필요하냐 라는 거죠.

판돈이 남아있는 자는 도박걸 듯이 천국에 보험걸거나 베팅을 하겠지만

바리새인들처럼 말이죠.

바닥이 다 들어난 자는 강도짖하다가 베팅 걸게 없으니

보험금이 없어서 천국을 포기하니까

본색이 들어나는 겁니다.

결국 마일리지 있는 놈은 이런 본색을 감추는 식이고

이레에 두 번 금식, 십의 이조 드렸다고 말입니다.

없는 놈은 본색을 그대로 노출하는 거다 말이죠.

 

바리새인이나 이 옆의 강도나 주님께서 완악케 만드신 결과물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강도는 어떻게 그 순간에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는

감히 상상도 못하는 발언을 할수 있냐 말이죠.

그것이 바로 원수를 파함으로 멜기세덱이 오른편에 서서 이 강도를 원수에게서 건졌기에

죽음 보다 더 강한 주님의 용서에 푹 빠져서 감사케 만들어서 그렇게 된거다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안식에 들어가는 자는

안식에 들어갈만한 자격조건을 갖춘게 아니라

주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불쌍히 여겨주셔서 들어갔다는 겁니다.

 

그런데 완악한 자들은 아니다 자꾸 인간 쪽에서 뭔가를 구비해야 한다는 식으로 외치더라 말이죠.

수건을 절대로 벗지 않고자 하는 완악함을 그대로 간직하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본인들이 마귀처럼 율법의 자리에 앉아서 완악함을 행사하는

고아 과부 나그네를 압제하는 자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까지 죽이게 되는

결국 행함이라는 인간의 믿음은 예수님을 죽이도록 되어있는 방향성이다는 겁니다.

 

예수님 제발 믿지마세요 인간의 믿음은 결국 예수님에 대한 경쟁심이자 적개심이요 살인의지이다는 겁니다.

 

예수님 믿지 마세요 예수님에게 믿음을 양보하세요

믿음을 포기하라는 겁니다.

어차피 행함이니까 말이죠.

 

인간 속에는 왕이 없다 말이죠.

역사 속에서는 왕이 없어요 섬기는 자 없어요.

육체에서는 없어요

 

그래서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는 육의 바깥

역사 바깥의 인물이 와야 안식에 들어가는 겁니다.

 

한 쪽 강도는 예수님이 안식을 몰고 옴에 졸지에 안식을 누림으로써

그런 발언을 하게 되고

 

다른 한 쪽 강도는 예수님이 안식을 몰고온다는 자체가

오라 해놓고서는 이 광야에서 죽게 하냐?

구원한다메? 구원한다 해 놓고서는 도리어 남도 못 구하고 너도 죽게 되냐?

구원자 꼬라지 참 좋다 라고 비아냥 거리면서 완악함을 드러내는 겁니다.

 

십자가 처형 당하는 판국에 이판사판이라서 막 쏟아내었지만

바리새인은 어떻습니까?

극단으로 몰리지 않았기에

고상한척 하는 것을 다 갖춘터라 저런 말을 하지 않겠죠.

그러나 그 동안의 예수님과의 충돌을 통해서 사실상 고상한척 하는 바리새인은

완악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건을 절대로 벗을 리가 없다 말이죠.

 

못 벗습니다.

우리라꼬 벗겠습니까?

못해요

벗겨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율법이 시온에서 나와서

우리의 속내를 다 들추어내도록

원망케 만드시는 겁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에 충실한 자는 예수님 뿐입니다.

인간은 원치 않습니다.

 

카프카에 대한 강의를 들어봤는데

어떻게해서든 유대인은 정착민이 되고 싶어하지

떠돌이 나그네가 되기 싫었다 말이죠.

누가 고아 과부 나그네로 살고 싶겠냐 말이죠.

 

그런데 주님은 반드시 99마리 양이 아닌

잃어버린 한 마리 양으로 만드시는 겁니다.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드시는 겁니다.

 

우리는 정작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 되고 싶은데

예수님은 끝까지 나그네에 충실하셔서

우리를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드신다 말이죠.

 

이것을 인자 하심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하버드 중의 하버드

는 의문의 반복인

배설물이였다는 것이 하버드 중의 하버드 출신인 당사자 바울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흐릿하고 모호하고 의문의 반복인 번제와 제사였다는 겁니다.

 

또렷한게 하나 없다는 거죠.

 

그러나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드신 주님의 섬기심 때문에

십자가가 밝히 또렷히 보이니까 그 어떤 속임수에도 넘어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어떤 모호하고 흐릿하고 의문의 것에 안 속는다 말이죠.

 

앞의 글 시편 107편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래서 나그네 됨에 충실하시는 겁니다. 끝까지 말이죠.

 

바벨론 포로 이후에 돌아와서 다들 감사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107:1, 개역)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07:2, 개역)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는 이같이 말할지어다 여호와께서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

(107:3, 개역) 동서 남북 각 지방에서부터 모으셨도다

 

아니 거지 되었는데

포로 이후에 돌아와본들 거지인데

빈털터리인데 뭐가 감사하냐 말이죠

 

고아 과부 나그네 되었는데 뭐가 감사하냐 말이죠.

바로 이것이 인자하심이다는 겁니다.

 

고아인 이스라엘이 고아 아닌 민족에게 잡혀갔는데

가보니까 오히려 저들은 고아가 되어버리고

저들의 입에서

저 이방민족의 입에서 너거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네 라고

포로 됨에서 풀어주더라 말이죠.

 

정작 이스라엘은 우리는 고아 아냐 라고 완고함을 포기못하는데 말이죠.

 

저들의 고백에서 나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돌아와서 감사하는 겁니다.

 

믿겨지지 않을거다 말이죠.

마치 한 쪽의 구원받은 강도처럼

예수님을 이 죽는 순간에 만날 줄이야

얼마나 너무 너무 기뻤으면

장대 높이 달린 예수님 보고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냐 말이죠.

그러니 옆의 강도가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이스라엘의 처음자리 고아 과부 나그네의 자리를 충실하심을 보여주는 인자하심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돌아와서야 감사하지만 말이죠.

무슨 독립 운동을 한것도 아니고

저들 이방민족이 하나님께 감복해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약속의 땅을 전쟁하나 없이 그냥 차지 하는 겁니다.

주의 전을 지으라고 이방나라왕 고레스가 도리어 풀어주는 겁니다.

오로지 고아 과부 나그네에 충실한 주의 인자하심 때문에 말입니다.

 

아마 다시 그 땅의 차지하기 위해서 독립운동이나

전쟁을 치러야 할 것 같으면

요즘 이스라엘이 그런 식 아닙니까?

그 완악함이 이루 말도 못할 것입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고레스 왕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전을 지으라고 명령하니까

그래서 포로 귀환이 되는 겁니다.

이게 상상이나 했냐 말이죠.

 

큰 지진 위에 주의 보좌요

큰 파도 위에 주의 보좌이다는 겁니다.

 

도대체 당신 누구신데 큰 파도도 잠잠하냐 말이죠.

우리가 독립 운동 할 필요가 없다 말이죠.

성화 할 필요가 없다 말이죠.

 

죄인 중의 괴수임이 십자가의 피 용서로 들통나는 것을 누리면 된다 말이죠.

 

왜 광야라는 40년이라는 주의 도를 배우고, 주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필요한 겁니까?

우리 속에 있는 원수가 심은 모호하고 의문의 것을 들추어내시고

상대적으로 또렷한 것을 나타내서 이 둘의 차이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와

쉼을 얻도록 하시는 겁니다.

 

주님 쪽에서 베푸시는 나를 죄인 중의 괴수 되게 하시는 것을 누리면 되는 겁니다.

마귀가 가만히 안 있죠?

죄인 잡았다고 좋아라 한다 말이죠.

 

원수가 원수 잡았다고 말이죠.

뒤바뀐 원수이다는 겁니다.

거꾸로 된 거룩, 곧 더럽다고 싫어버린바 된 자가 거룩이였고

온갖 거룩으로 포장된 자가 더러운 완악한 자였다는 거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은 여인으로 예수님을 시험하다가

도리어 진짜 원수로 들통나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주의 인자하심 아침에

그리고 주의 성실하심 밤마다

 

베푸시는 십자가의 지혜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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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강의 


[서양고전]나는 이방인이다, 변신(최윤영 교수)

https://youtu.be/0MB42YzLnOk



박정수 느티나무TV - [농부와 인문학] 카프카의 소수적 삶과 문학 :…


https://youtu.be/a_pNDUXv80w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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